이탈리아(1)
2004년 9월3일 로마 민박집에서 조식후 서부제님의 안내로 고대 로마의 유적과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지하철를 타고 성 라테란( 성 요한) 대성당 앞에서 내려 순례한후 그옆에 있는 성 스카라(계단) 대성은 무릅을 꿇고 기도하면서 올라갔고, 성마리아 마조레 대성 등 로마 5대성당을순례하면서 기도와 묵상 주님께 감사하면서 기쁨에 넘쳐 다녔다. 조금 힘은 들어도 로마 외곽에 있는 지하묘소인 카타콤바와, 고대 시민정치의 터전인 포로로마노를 관광할때는 다리도 아프고
첫날부터 힘은 들었어도 많은 유명 명소를 보게되어 영광이고 다녀온곳을 소개합니다.
라테란(성 요한) 대성당
세계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 되는 성당, 로마의 4대성당에 하나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보다 격이 높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대제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하고 라테란지역의 토지를 교황 밀찌아래(311-314)에게 기증하여 성당을 세운 것이다. 성당을 짖게한 결정적인 계기는 콘스탄티누스대제의 둘째부인이며 마쎈지오의 누이
동생인 파우스타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
마쎈지오의 막강한 힘으로 세워진 이 성당은 중앙부가 이중으로 만들어져 구세주 그리스도, 세례자 요한, 선각자이며 제4복음서를 쓴 사도 요한에게 봉헌 되었다.
중앙 교황 제대의 천개 양식은 15세기 고딕 양식이다.
라테란이란 이름은 로마 제국의 귀족가문의 이름이다. 콘스탄티누스대제는 라테란가문의
파우스따와 결혼 했는데 이때 결혼 지참금처럼 가져온 플라우찌오 라떼라노궁전을 325년에
교황 실베스떼르 1세에게 선물로 드린다. 이로써 교황은 첫 번째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고
1309년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교황은 이곳에 성전을 짓고 천여년
간 거처하며 교황청 업무를 보았으며, 현재는 로마 4주교좌 성당중 하나. 로 성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중요하다.
라테란 대성당은 455년 반달족의 칩입으로 빼앗겼다가 교황 레오 1세(440-461)때 되찾았고, 896년엔 지진으로 파괴 되었다가 905년 세르지오(904-911)3세 때 재건되었다. 그후 교황
니콜라스(1288-1292)4세가 많은 단장과 장식을 했으나, 1308년 1361년 사이에 두 차례 화재
로 소실되었다가 우르바노(1356-1370)5세와 그레고리오(1371-1378) 11세 때 각각 재건된 수난의 건물이기도 하다.
정면 부분은 끌레멘트(1730-1740) 12세 때, 알렉산드로 갈릴레이가 만든 것으로 꼭대기에 있는 6m나 되는 석상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모시고 옆에는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티노 등 교회 박사들이 있다. 현관 오른쪽에 성문이 있으며, 왼쪽에는 흔하지 않은 콘스탄틴 대제는 다뉴브강 유역에서 태어나 아시아 지방에서 컸으며, 그가 살았을 때 세 번밖에 로마에
머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의 동상이나 석상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중앙의 청동문은 305년에 포로 로마노의 원로원에 있던 것을 1650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성전 내부는 세기를 두고 보수하고 손질을 해 왔지만, 오늘날의 모습은 1650년 보로미니의
작품이다. 성전 중앙통로 양쪽 기둥에 서 있는 사도들의 석상은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석주의 장식 등은 신구약의 사건들의 석상은 베르니니 제자들의 작품이며, 우리는 이 안에서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을 볼수 있다. 바닥은 14세기, 천장은 16세기의 것이며 미켈란제로의 제자 다니엘르 다볼떼라가 만들었다.
중앙 교황제대의 천개양식은 15세기의 고딕식이다. 윗부분 굵은 철사 안에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석상이 있는데, 두 사도의 두개골을 모시기 위함이다.
중앙제대 앞의 교황 마르티니(1417-1431)5세의 무덤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께서 묶이고 매 맞으시던 기둥을 옮겨온 공적 때문이라 한다.
또 제대를 향해 왼쪽에 성체를 모시는 경당에 있는데, 그 꼭대기에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에 쓰시던 식탁이 보존 되어 있어 성 목요일에 교황께서 집전하는 만찬미사는 오늘날에도
이곳에서 봉헌된다. 오른쪽으로 1598년에 제작했다는 갈대 오르간이 있다.
제대 뒤쪽에는 지난 세기에 새로 장식한 로마 주교 좌가 있다. 주교 좌위의 모자이크는 13세기 뚜리띠의 작품이다.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은 성전에 들어오면 느낄수 있는 것은 성당 중에 으뜸임을 알수
있다. 바티칸이 새로운 교황 좌로 정해져 옮겨지기는 했지만 중세기까지 교황들의 거처는
바로 라테란 궁 이었고 1309-1377까지 60여 년간은 프랑스의 아비뇽에 있었던 때도 있었다.
이때 라테란 궁은 화재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아비뇽에서 돌아온 교황은 바티칸에서 거쳐
하게 된다.
성전에 들어와 가운데 통로 오른쪽 첫 기둥 뒤에 있는 지오또의 그림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사상 첫 성년인 1300년에 로마에 왔다가 교황 보니파시오8세의 부탁으로 이 벽화를 그렸다
(메트로(A), Sangiovanni역에서 하차, 버스 218번을 타고 카타콤바 행을 타고 15분).
성 스칼라 성당( 성 계단 성당)((BASILICA DI SANTA SCALA )
일반적으로 스칼라 산타( 거룩한 계단)로 알려진 예수님 고난의 성당으로 역사적 ,예술적
종교적 그림이 많이 소장하고 있는 유명한 성당으로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의 왼쪽의 길 건너편에 있는 건물이 성 계단 성당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로마의 군병들을 시켜 예수가 빌라도에게 심판을 받을 때 사용
하였던 빌라도 궁전의 28개의 계단을 가져오게 하여 성당을 지어 보관하게 하였다.
로마시대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시기로 고소당한 예수님을 심문 하였으나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에게 적당히 만족을 주어 사건을
마무리하고자 죄 없는 예수님을 채찍질하여 피투성이가 되게 한 다음 그를 군중들 앞에 세운다. 하지만 피를 본 이리 때가 된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 된다.
결국 군중들은 두려워하는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를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다..
바로 이 계단에서 이루어진 사실이다. 후에 이 성당은 교황 전용의 소성당이 되었고 일반
신부들은 교황을 알현하기 위하여 무릎으로 이 계단을 오르도록 하였다.
목적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여 자신의 죄를 고행함으로써 고난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마르틴 루터도 무릎으로 이곳을 오르고 있었다. 오르던 도중 그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말을 기억하고 죄는 고행으로써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으로만 해결 할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일어나 내려와 스위스
로 도망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성 바오로 대성당(BASILICA DI S PAOLO FUARI LE MURA)
성 바오로 대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성당이다.
성 바오로 대성당을 가려면 아우렐리아나 성문중의 하나인 뽀르따 산 빠올로를 지난다.
그 문 옆의 피라밋은 기원전 11년에 이집트의 피라밋을 본떠서 만든 로마인의 무덤 이었다.
피라밋의 뒷편 성 바오로 문의 오른쪽에는 비 카톨릭인의 무덤이 있는데, 여기에는 영국시
인 셀리와 키츠가 묻혀 있다.
성 바오로 문에서 시작되는 길을 오스띠엔세라 부르는데, 이길은 로마제국 당시에는 군사적, 상업적 관문이었던 오스띠아 안띠까로 연결된다. 당시 인구가 10만 이었던 이 도시는 폼페이 이후의 도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현 오스띠아는 로마시민들의 해수욕장등 휴양지로
이용 되고 있다. 성베드로 대성당 이전에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성 바오로 대성당은
콘스탄틴 대제의 뜻에 따라 성 바오로의 무덤 자리에 324년 교황 실베스타 1세가 세웠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많은 고초와 박해를 받고 로마에 앗 아꽈스 살비아스라 부르는 장소에서 돌아 가셨다..
성 바오로 성인은 독실한 유다교 가정에서 태어난 철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 시리아지방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러 원정을 가던 중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회심의 마음을 갖게
되어 이방인들에게 활발한 전도를 하시다가 순교 하셨다.
지금은 그곳을 뜨레 폰따나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사도께서 순교하실 때에 몸에서 분리된 그의 머리가 세 번씩이나 땅에서 뛰었고, 또 그곳에서 샘이 솟았다고 전한다. 지금 그곳에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가까이에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원이 있다.
사도께서 순교하신후 그의 유해는 오스띠엔세 길옆에 모시게 되었으며 콘스탄틴 대제때, 즉 4세기 초에 그의 무덤 위에 세운 성당은 386년에 티노 발렌티아노 22세 때 확장공사를
하였고 , 그 후 테오도시오 1세 황제때 궁전은 커다란 중앙부와 80개의 기둥으로 나눠진 다섯 개의 측량을 가진 건물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세계 제일의 큰 성당으로 군림 했었다.
대 성당은 세기를 거듭하는 동안 수차례에 걸쳐 수난을 당했다. 그중 중요한 사건들을
살펴보면, 461년 벼락으로 인해 커다란 피해를 입었고, 739년에는 롬바르크족의 침입으로
약탈을 당했고, 801년에는 지진으로 천장이 내려앉아 보수를 했고, 847년에는 사라센인들
의 침입으로 또다시 약탈을 당했다.
또한 1823년7월 15-16일 에는 큰 불이 나서 이 아름다운 성당은 거의 다 타버렸다.
대화재로 말미암아 대성당 건물은 물론이고 내부에 그려져 있던 벽화를 비롯하여 모자이크
등 역사적인 보물은 거의 다 손실 되었거나 파괴 되었다.
레오 12세는 교황에 즉위하자 곧 바오로 대성당의 재건을 위해 전 세계 교회에 재정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 당시 이름 있던 건축가 벨리.폴레띠, 베스피냐니, 칼데리니등이 참여하여 대
성당의 설계도대로 복원, 비오(1846-1878) 9세때 폴레띠가 설계하고, 베스피냐니와 칼데리니
가 건축, 옛 성당의 면모를 살리면서 새로 지어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축성 되었다.
화재는 비오7세가 운명하기 몇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교황에게는 이 비보를 알리지 조차 못했다. 성 베드로와 함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세운 성 바오로의 몸과 정신은 이 성당
의 높은 제대 아래 잠들고 있다.
정문에는 카노니카가 조각한 성 바오로 상이 서 있다. 정면은 콘소니와 아그리코라가 설계한 대로 만든 모자이크가 있다.
모자이크는 이사야, 에레미아, 에제키엘, 다니엘의 네 예언자를 나타내고 있다. 맨 위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나란히 거느리고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다.
현대식으로 무늬를 넣은 청동문은 안토니오 마리아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말씀을 새긴 10개의 나무판이 있다. 오른쪽에는 바오로6세의 명령으로 콘스탄티노플에다 그레고리오 7세가 만들었던 것을 청동제로 복원한 커다란 문이 있다. 많은 선지자와 예수님의 일생, 그리스도의 말씀을 새긴 545개의 나무판은 비잔티움 예술의 최고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문은 중세기의 빼어난 걸작에 하나이다.
성 바오로 사도의 무덤위에 있는 교황 제대위의 천개의 장식은 13세기의 작품이며, 화재 때에도 상하지 않은 승리의 아치는 5세기 고트의 왕후 갈라쁠라이디아가 기증한 것이며, 뒷면의 모자이크도 화재에 손상을 받지 않은 13세기의 작품이다.
유리 대신 사용한 대리석은 이집트의 부왕 모하멧 알 리가 기증한 것이며 ,맨 끝에 있는 제대는 러시아 황제 니꼴라오 1세가 기증한 것이다.
성 바오로 대성당의 내부에 들어서면 너무나도 훌륭한 실내 장식과 장중한 모습 때문에 안도감이 들며, 아름다운 벽이나 정교한 천장 모습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눈꽃 모양의 석고로 된 유리창으로 아름답게 비치는 햇빛은 경건한 신앙심을 자아내게 해주는 듯하다.
바오로 대성당의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보려면 해지기 2-3시간 전에 순례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해가 긴 여름(5-9월)에는 오후 5시경이 좋고, 봄과 가을에는 오후 4시경이 가장
적당하다. 이 시간대에 대성당을 바라보면, 금을 입혀 제작한 모자이크가 반사되어 나오는 강렬한 빛의 아름다움에 어쩌면 눈이 멀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장관 이다. .
여러 차례 다시 고쳐진 맨 끝에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다. 그 옆에는 성 베드로, 성 안드레아, 성 루가가 있고 그 밑에는 이 작업을 완성한 교황 오노리노 3세가 있다.
바로 아래에는 십자가의 승리를 상징하는 천사와 사도, 성인들의 모습이 있다. 성당 안에는 전부 7개의 제대가 있는데 교황 제대가 하나, 중앙 측면에 둘, 양쪽 부속성당에 4개가 있다.
이 대성당을 관리하는 베네딕도 수도원 이층에는 고대 콘스탄티노 대성당에서 찾아낸 비석과 글씨들, 그리고 42명의 교황을 원형 프레스코로 만든 것이 있다. 성 베드로에서부터 42명에 이르는 교황 프레스코는 대성당이 불타기전에는 내부에 장식되어 있던 것이다.
다른 성당에선 보기 힘든 정원이 딸려 있고 회랑이 삼면을 에워싼다. 정원 한 가운데는 오른손에는 칼과 왼손에 성경을 든 사도 바오로가 서 있는데 그는 평소 성경 말씀을 날카로운
것에 비유하였는데 이는 로마인의 힘과 권리를 상징한다. 또한 칼을 든 사도의 모습은 모든 이단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보호하시는 바오로 사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사도의 참수치명을 뜻하기도 한다.
바오로 사도께서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디모테오 2서,“4.6절“한 것을 보면 순교를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제대는 전체건물에 비하여 작은데 12세기 세워졌던 원형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무덤은 교회
지하에 있다. 바오로가 이곳에 와서 순교한 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루가가 기록한 사도행전
에 의하면 바오로는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친 후 지친 몸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
다 유다인들은 바오로 축일을 준비하고 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야고보와 원로들을 만나고 성전으로 들어갈 때 유다인 들이 그를 붙잡았다. 바오로는 로마군인들에게
넘겨져 파견대장의 지시로 채찍질을 당하게 되었고 바오로는 백인대장에게 자신이 로마시민
임을 내세워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것은 로마법에 위배된다고 주장 했다. 그러나 파견대장은 백인대장 두 사람을 부른 다음 이렇게 말했다.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투적병 이백 명을 준비시켜 오늘 밤 아홉 시에 가이사리아로 출발 하여라. 그리고 말도 준비하여 바오로를 태우고 펠릭스 총독에게 호송하여라” 하고
명령하면서 ( 사도행전 23장 23-24절)
파견대장 리시아는 페리스 총독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백인대장에게 주었다.
“ 글라우디오 리시아 는 총독 펠릭스 각하께 삼가 문안드립니다. 호송되어 가는 사람은
유다인들에게 붙들려 살해당할 뻔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가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구해냈습니다. 유다인들이 무슨 이유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아보려고
그를 유다인의 의회에 데리고 갔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그가 유다인들의 율법 문제로 고발을 당했을 때 사형을 받거나 감옥에 갇힐 만한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다인 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저는 그를 각하께
보내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각하 앞에서 직접 그를 고발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사도행전 23: 26-30)
펠릭스 총독은 편지를 읽은후 바오로에게 어느 지방 출신이냐고 묻고 그가 길리기아 출신이라고 대답하자 “ 그대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온 다음 심문 하겠다”고 하고는 바오로를 헤로데 관저 안에 가두었다. 닷세후 대사제 아나니아가 바오로를 총독에게 고소하기 위해서 원로 몇 사람과 데르딜로라는 법관과 함께 왔다. 데르딜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바오로를 고발 하였다.
“펠릭스 각하 우리는 각하의 덕분으로 크게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각하의 선견지명으로 개선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본 결과 이자는 몹쓸 전염병 같은놈 으로서 온 천하에 있는 모든 유다인 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이며 나자렛 도당의 괴수입니다”
루가는 바오로의 순교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위치: VIA OSTIENSE, 메트로(B선)을 타고 PAOLO이나 GARBATELLA 하차, 도보로10분
성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BASILICA DI SATA MARIA MAGGIORE )
성 요한 라테란 궁에서 메틀리나로 가면 로마시의 7개 언덕중에 하나인 에스퀼리네 언덕
위에 352년 카톨릭교회에서 처음으로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이다. 또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를 전 인류의 어머니로 선언한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다.
이 성전이 여기에 세워진 이유에 대하여 눈(雪)에 얽힌 유명한 기적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리베리오(352-366) 교황 때의 일이였다. 로마에 “요한” 이라는 독실한 신자 귀족이 있었다.
그는 경건한 아내를 맞아 평화스럽고 원만한 가정을 이루고 나날을 보냈으나, 그 가정엔
자녀가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늘 기도 중에 자녀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말씀
드렸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딴 데 있었음인지, 둘이 다 연로하여 이제는 자녀에 대한
희망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부부는 막대한 재산을 성모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어떤 방법
으로 바쳐야 되는지를 모르던 두 부부는 열심히 기도하며 자선행위도 하고 단식과 금욕의
재계를 지키며 주의 계시만 기다렸다. 그들의 소원은 참으로 기이하게 이루어졌다.
325년 8월4일이 지나고 5일로 접어둔 밤중에 지극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이들 부부
각자의 꿈에 나타나시어 “ 로마의 에스퀼리네 언덕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우라, 그 장소는
눈이 하얗게 내린 곳이니 즉시 알 것이다“ 하셨다.
아무리 꿈이며 묵시라고는 하지만 둘에게 동시에 나타난 현상이요, 찌는 듯한 이 삼복더위
에 과연 눈이 내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날이 밝자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과연 눈이 하얗게 와 있지 않은가! 그것도 꼭 성당을 지을 장소에만 눈이 내려 있었다.
신기 하고도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으로 두 부부는 곧 교황님을 알현을 청하여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교황께서도 다른사제들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듣고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도 삼복더위 8월중에 내린 백설을 보고 이는 거룩한 동정 마리아 성모님의 순결을
상징함이라 하며 감탄 하면서 감동되어 하느님께 찬미를 느렸다.
이런 경로를 거쳐 세워진 성당이라 처음엔 교황 이름을 따서“ 리베리오성당”이라 불렀고,
그 후 예루살렘에 있던 예수 아기가 누웠던 말구유가 이 성당에 안치된 뒤에는 “망 구유의
성모 성당“ 이라고 불렀으나 , 로마의 다른 성모 성당과 구별하기 위하여 ”성 마리아
대성당“ 이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8월5일 삼복더위 중에 내린 백설을 기념하기 위해
성모설지전(聖母雪地殿) 이라고도 한다.
그후 이건물은 5세기에 와서 교황 식스또(432-440)3세가 확장 개축했다. 교황 그레고리오(1371-1378) 11세 때에 지은 종탑로마에서 가장 높은 종탑 가운데 하나이다.
성년에만 열리는 성문은 현관 좌측에 있다. 성전 정면의 광장에는 마센찌오의 바실리카
기둥이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성당 내부의 길이는 86m로 중앙부와 기둥을 조화롭게 나누어진 양쪽이 대표적인 초기교회
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천장은 주리아노 다 산갈로 다섯줄로 나누어 105개의 우물반자로 꾸며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천장은 전세계에서 가져온 첫 금을 녹여 도금한 것이라고 한다.
아벤띠노언덕의 쥬노신전에서 옮겨온 36개의 기둥 위에 성서를 소재로 한 36개의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볼수 있다. 승리의 아치나 제대 후면의 장식 등에서도 이 설지전의 매력을 느끼게 된다 .여러가지 조각으로 장식된 바닥은 13세기에 장식된 로마의 어떤 성당보다도 아름답다. 나무로 된 천장은 르네상스 때 너무나도 유명한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작품으로 15세기말 콤롬부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와 아라고나의 페르디난도왕을 거쳐 교황 알렉산델6세
(1492-1503)에게 선물한 금으로 도금했다고 한다.
중앙제대의 화려한 천개장식은 성 베드로 대성전의 베르니니 작품을 본받아 푸가가 만든 것이다. 제대 밑의 동굴경당에는 베들레헴의 예수님 구유가 보존되어 있어 성탄 때에 따로 구유를 꾸미지 않아도 된다. 여기엔 또 1854년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선포한 교황 비오 9세(1846-1878)가 무릎을 꿇고 있다. 제대 위의 모자이크는 5세기의 작품으로 성모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에페소 공의회와 관련되어 만들어졌다.
뒷면의 승리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아름다운 모자이크는 훨씬 뒤인 1세기에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은 뚜리띠의 작품이다.
중앙제대 양편에 커다란 경당이 둘 있는데, 왼쪽 것은 까뻴라 보르게세라 하며 교황 바울로
5세(1605-1621)때에 세운 것이다. 이 경당은 로마에 있는 수많은 경당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경당이다. 제대 꼭대기의 부각은 17세기 스테파노 마데르노의 작품으로, 그 유명한 한 여름의 눈의 기적을 그리고 있다.
맞은편 경당은 교황 식스또 5세 때 즉 1585년에 도메니꼬 폰따나가 세운 것으로 성체를
모신 경당이다. 도금한 화려한 제대 장식은 스깔쪼가 만들었다.
성모 설지전은 확실히 가장 아름다운 성전중에 하나이다. 그 건축양식 자체는 물론이지만 모자이크에서 볼수 있는 중세기의 신비주의, 상갈로의 천장 장식에서 나타나는 르네상스 때의 우아함, 까뻴라 보르게세에서 볼 수 있는 바로크양식의 장엄함, 같은 바로크양식이지만
푸가의 천개장식의 화려함 등 그 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이 성당은 15세기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예술뿐만 아니라, 풍습과 역사까지도 조화 있는 산 증인으로서 전해 주고 있다.
1600년대 로마의 대 예술가 베르니니의 무덤이 엷은 대리석판에 이름만 새기는 정도로 아무 장식 없이 제대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다.
콜로세움(COLOSSEUM)
베네치아 광장에서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를 1km 정도가면 거리가 다하는 곳에
있다.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으로는 가장 규모도 크고 로마를 상징하는 가장 큰
원형극장으로 콜로세움이란 명칭은 ‘거대하다’ 라는 의미의 COLOSSALE에서
유래 되었다.
타원형 외곽 직경은 188m와 156m,이다. 둘레길이 527m, 높이 57m나 되는 타원형의
이 거대한 건축물은 72년 베스파시아누스황제가 착공하여 8년 후에 그 아들 티누스황제가
80년에 개관한 것으로 로마에서 가장 위대하고 웅장한 유적지이다..
당시 로마 인구를 120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이 건물은 55,000명을 수용 할 수 있고, 그것도
지금부터 1920년 전에 만든 것이라니 감탄을 금치 못한다.
황제는 보통 동물 서커스로 쇼를 시작하게 되고 그 후 두 명의 검투사가 나타나 한사람이
죽을 때 까지 싸움을 한다. 한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운반하고 나서, 경기장의 핏자국
위에 새 모래를 덮는다. 그리고 나면 다음 경기의 준비가 완료된다. 심하게는 부상을
입은 투사는 황제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어볼 기회를 준다.
황제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면 그는 살게 되고 , 황제가 엄지손가락을 내리면 그는
죽게 된다. 싸움의 승자는 곧 영웅이 되었다. 동물들은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가져온
사자, 코끼리, 하마, 얼룩말, 코풀소 등 이였다.
이곳에서는 왕과 부유한 로마시민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한 검투와 맹수들이 싸움하는
모습을 보며 광적인 환호를 하는 로마시민들을 상상해 본다..
1) 이 극장에서 로마시민들은 훈련받은 노예들의 격투
2) 외국에서 운반해온 야수들의 사냥
3) 전쟁을 재현한 작품 등 관람
4) 검투사와 맹수와의 격투한 곳 이지만 그리스도교를 말살하고자 했던 황제들이 이곳에서
그리스도 교인들이 맹수의 밥이 되게 하여 순교한곳 이기도 하다.
그 후에 300년 이상이나 처참한 사투가 되풀이 되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막을 내렸다. 그 뒤로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일부 파괴
되었고 중세에 교회나 큰 건물을 짓기 위해 채석장으로 변하여 외벽의 절반 이상이 없어
지는 등 몹시 훼손 되었다.
오늘날의 원형경기장은 부분적으로 파괴 되었지만, 네 개의 층에서 네 개의 원주를 아직도
볼 수 있다. 각 층마다 기둥의 양식이 다른데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고린토 식이다. 단일건물에 이렇게 세 가지 그리스 양식이 있는 예는 별로 없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황의 명으로, 그리스도교도의 수난의 현장으로 수복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메트로(B선)을 타고 콜로세움 역에서 하차
카타콤바(CATACOMBE= 지하동굴묘지)
쿼바디스 성당에서 조금 내려가면 카타콤바가 나온다.
현재 이탈리아 국민의 97%는 카톨릭 신자이다. 그러나 AD313년에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이 내려지기 전 까지는 그리스도교가 공인 되지 않았다. 특히 박해가
강화된 1ㅡ3세기경 그리스도교도들은 미사나 집회를 위해 지하로 잠적 했다.
카타콤베는 과거 그리스도가 공인 되지 않았던 로마제국시절 박해를 피해 그리스도교도들이
군인을 피해서 미사를 보던 장소, 지하교회와 공동묘지, 두 가지 용도로 사용 되었다.
로마에는 카타콤바가 51개가 있는데 카타콤바는 그리스어로 KOIMETERION
(꼬이메떼리온)에서 온 말로 안식처란 뜻이다..
동굴은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어떤 곳은 5층 아래로 내려가는 곳도 있어 구불
구불 한 미로에서 길을 잃기에 십상이다. 통로의 총길이가 무려 20km에 이른다.
어둠 컴컴한 계단식 통로를 통해서 지하로 내려가면 심한 습기가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낄수 있다.
성 안에 시신을 매장해서는 안 된다는 로마법 때문에 카타콤바는 모두 성 밖에 있다.
로마로 통하는 아피아도로 주변에는 15개의 카타콤바가 밀집해 있다고 한다.
카타콤바는 고대 로마인들만의 특이한 묘지형태가 아니다. 몰타섬이나 소아시아, 이집트
의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도 고대의 카타콤바가 발견 되었다.
고고 학자들에 의하면 로마 성밖에 카타콤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리스도교인
들이 순교자들을 카타콤바에 안치 하면서부터였다 고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흘 동안 동굴무덤에 안치되었던 것처럼 순교자들을 아마천으로 싸고 무덤 문을
막고 묘실에 안치했다. 로마의 천연 동굴무덤이 없으므로 그리스도교인들은 장례법을
따라 카타콤바에서 장례를 지내고는 순교자들이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나기를 고대했다.
또 이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노예가 많았기 때문에 개인 무덤을 만들 수가 없었고, 땅도
제한되어 있어 땅 속 깊숙히 5-6층 정도의 통로를 뚫고 장사 지내는 방법을 택했다.
이 통로의 총 길이가 약 900km정도나 되며 , 300년 동안 약 6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인원
이 묻혔다. 본래 카타콤바는 비밀스런 장소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로마법에는 모든 무덤은
신성불가침의 장소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찬은 땅 속 무덤으로 피신 할 수 있었고 때로는 종교예식도 자연
스럽게 할 수 있었다. 모든 카타콤바의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 가운데 곧은 통로가 있고
그 측면 층층으로 시체를 묻었던 것이다.
많은 카타콤바 중에서 제일 큰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는 3세기부터 크리스찬의 무덤이었
으며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아 순교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자연히 카타콤바의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카타콤바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전용 묘역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카타콤바가 그렇게 사용되었다. 230년-310년 사이에 성 뽄시아노(230-235), 성 식스투
스2세(257-258)교황등 9명의 교황과 3명의 주교가 확인되고 아직 5명의 밝혀지지 않은
교황들이 묻혀 있다. 이는 카타콤바가 로마의 초대교회 교인들의 보편적인 장례지
였음을 말해준다. 10인의 교황님의 시신이 안치된 방을 ‘교황의 묘실“ 이라고 부른다.
초세기 교황님들의 소성당도 눈에 띄고 , 성녀 체칠리아의 무덤도 내려가다 보면 눈에
들어 온다. 음악의 주보성인 체칠리아는 뜨라스떼베레의 자기 집 뜨거운 목욕탕에
가두어 놓고 장기간의 고문을 당하며 그래도 굽히지 않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다.
성녀의 관은 821년 교황 파스칼1세(817-824)의 명으로 뜨라스떼베레의 성녀 체칠리아
성당으로 이장 되었는데, 여기에 있는 현재의 석상은 1599년 성녀의 관을 열었을 때,
그 성녀의 몸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현상을 목격한 스테파노 마데르노가 남긴 작품
으로 , 원형은 성녀께 봉헌된 성녀 체칠리아 성당에 보존되어 있고 여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성녀는 오른손가락으로 셋, 왼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르키는데 삼위일체
이신 하느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희미한 벽화 , 그밖에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긴 했어도 만찬장면, 그리스도의 초상화
비들기, 어린양, 물고기, 닻이 달린 십자가, 이곳 성 칼리스토 묘지는 기원후 258년
박해를 피해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시체를 임시 대피 시켰던 장소로 믿어진다.
칼리스토 지하묘지 입구 건너편에 쿼바디스 성당이 있다. 이성전에 의하면 네로황제
(54-68)의 크리스찬에 대한 혹독한 박해로 죽음을 피해 달아나 아피아가도를 걸어가
베드로 사도는 홀연히 나타난 스승 예수를 만나, “쿼바디스 도미네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으니, ”다시 십자가에 박히기 위해 로마로 들어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부끄러워 즉시 성문 안으로 들어가 체포되어 바티칸언덕
에서 십자가로 거꾸로 매달려 67년경 순교한다. 이런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와의 사실을
기념하는 쿼바디스 성당은 아주 조그마하고 볼품은 별로 없다. 성당에는 그리스도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진 돌이 통로 한 가운데 놓여 있다.
300년대 후반 교황의 명으로 건립된 지하 성당은 31m에 폭이 17m나 되는 거대한 규모로 순교자 네리우스와 아키레우스 두 사람을 기념하는 성당이다.
476년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카타콤바는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500년대 이후로 카타콤바는 거의 매장지로 사용되지 않았고 세월이 가면서 사람들은 카타콤바가 지하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러다가 16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1) 산 칼리스토 카타콤바(5층)
개관: 목-화, 08:30-12:00, 14:30-17:00
VIA APPIA ANTICA 110
2) 산 세바 스티아노 카타콤바
개관: 수-월: 08:30-12:00, 14:30-17:00
VIA APPIA ANTICA 136
콜로세움의 CLAUDIA 거리에서 118, 218 뻐스로 30분 소요.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베네치아광장과 콜로세움의 중간에 위치한 대규모 유적지로서 지금은 황폐화되어 앙상한
신전의 기둥들만 덩그런히 서 있는 폐허의 장소이지만 고대 로마의 화려 했던 전성기가
쉼 쉬고 있는 역사적인 곳이다. 고대 로마시대의 시민의 정치, 경제, 상업, 사법 ,행정의
중심지가 바로 이곳 포로로마노 였다. 이곳에는 아직도 발견 되지 않은 유적이 있으며 현재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지하철 B선을 타고 콜로세움 역에서 내려 한10분 걸으면 나온다.
포로 로마노를 가기 전에 캄피돌리오 광장의 세나토리오궁 뒤쪽 좌우에 설치한 테라스에서
유적지를 보는 것이 더욱 장엄하고 웅대하다. 캄피돌리오 언덕을 내려가 포로 로마노 거리를 따라 가면 첫 번째로 마주치는 것이 기원전 367년경의 델리데이콘 센터의 주랑 현관이다. 다음으로 베스파시아노 황제의 신전이 서 있고 건너편에는 성 루카와 마티나 교회가 있
다. 바실리카 에밀리아는 로마에 세워진 두 번째 공회당으로 금융, 사법 등의. 업무를 하던 중요한 장소로 로마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었던 곳으로 기원전 179년에 세웠다. 또 꽁꼬
르디아신전은 기원전 367년 평민들도 집정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리카니우스법의 제정을 기념하기위한 신전도 있다. 이곳에는 베스파시아노황제와 그의 아들 티투스를 위해 세워진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티투스개선문을 비롯하여 세비루스황제의 두 아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에서 승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기원전 204년에 세운 세베루스 개선문, 신전 등이
산재되어 있다. 이곳에서 승전행진과 종교행진이 행하여 졌던 곳 이기도하다.
포룸에서 가장 큰 건물은 법률 재판이 열리는 바실리카 였는데 극작가 플라우투스는 바실
리카를 가르켜 “법률가, 소송당사자, 중개인, 상인, 은행가, 부자로부터 야간에 돈을 구걸하는 거지들로 꽉차 있다” 라고표현 하기도 했다. BC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새로운 포룸
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에서 트라야누스에 이르는 모든 황제들에게 전례가 되었
다. 황제들은 황제의 포럼들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개선문을 세웠으며 베스파시아누스는
하루의 업무를 끝난후 오락의 장소로 콜로세움을 세웠다.
로마 법정이었던 율리아 바실리카유적, 원로원들이 모이는 장소였던 쿠리아, 가장 오래된 장소중의 하나인 제사를 지냈던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