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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명교회(大名*大明*大命)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Ⅰ. 여는 말 Ⅲ. 세속화 시대에 대한 성결신학 Ⅱ. 세속화의 의미 Ⅳ. 닫는 말 |
I. 여는 말
지난 한 세기 동안에 교회와 신학의 관계는 언제나 급변하는 사회 상황의 변수 작용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즉 신학자와 교회가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달하고 보호하는 근원적이며 평상적인 임무만 수행함으로써 그 사명을 다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사회는 그동안 자연과학과 기술공학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생긴 인간의 문화생활의 전면적인 변화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가져온 지구촌의 정치 사회적인 변동과 이러한 변동에 수반한 팽창된 세속주의는 기독교의 종교적 위치와 가치관을 인간생활의 한구석으로 몰아내어서 교회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신앙생활은 개인적인 문제로 간주하게 되었다.2) 세속화 현상은 대략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시작되어, 20세기에 들어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심화되었다. 현대인은 진리를 상대적으로, 실제를 역사적으로, 인간을 기능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으로 치달았다.3) 이러한 급변한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에 미친 다양한 현대사조의 영향으로 1950년대 후반에 고조된 급진적 세속화 추세와 때를 같이하여 세속화 신학이 발전되기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전통적인 신학 주제들에 대해 다분히 반동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4) 한국교계와 신학계는 서구교회보다 10여 년 늦게 이에 대한 관심이 쏟아져 1960년대에 들어와 기독교 ‘세속화’(Secularization)라는 술어를 통하여 진보?보수간 신학자들간에 논쟁을 넘어서 도에 넘치는 감정대립을 보이기까지 큰 논란이 있었다.
1960년대 3월에〈기독교사상〉에 J. 브라우어의 “세속주의”를 필두로 해서 세속화 논의가 소개된 후, 1966년까지 3년여에 걸쳐 〈기독교사상〉지가 1965년 2월호부터 특집으로 다룸으로 해서 세속화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연구되었고,5) 이 문제가 크게 한국교계에 환기된 것은 서남동 교수가 1966년 1월 6일 온양에서 모인 기독자교수협의회에서 행한 주제 강연인 “세속화 과정과 그리스도교”라는 글이〈기독교사상〉에 전부 게재됨으로서였다.6)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구미 각국에서 논의되어 오던 기독교 세속화 문제는 1960년대에 들어와 외래사조로 인한 제 교단들이 교단 분열이라는 쓰라린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세속화 또는 비종교화라는 용어가 소수의 사람에 의해 패션 쇼처럼 한국 신학의 전시대에 놓여지자 이에 대한 찬반론으로 다시 심한 반목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세속화 논의가 대체로 1960년대 세계교회가 참여하고 있는 세속화론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고, 1960년대 말쯤에 가서 끝이 났다.7)
한국성결교회는 1960년대 한국교회의 세속화 논의과정에 개입하여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지는 않았으나 대체적으로 세속화론에 대한 위험성과 탈선을 경고하고, 복음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세속화론에 대한 찬성의 입장이 공고화되고, 또한 21세기에 세속화라는 현대사조의 변화의 파고는 지난 세기말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우리 앞에 다양한 위협과 도전으로 놓여져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과거와 마찬가지의 배타적 자세의 일관성이나 보수적인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21세기의 급속한 사회적 변화를 파악하고, 대응하기 위하여 과거의 불필요한 구조와 사고의 틀을 깨고, 새로운 틀을 세워 가는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 있어야 한다.8) 종교와 문화의 상대성을 철저하게 인정한 나머지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상대적 공론을 표방하는 다원주의 원리와 무신론적인 현대주의, 경제 효율의 법칙 아래 무한 경쟁과 자기 생존을 향해 나가는 세속화의 시대적 변화에 대해 분명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곡해되어지고 성경의 권위가 무시당하면서 각종 이단사상과 세속적인 풍조가 교회 안에까지 침입하여 교계는 물론 사회까지도 극도의 혼란에 빠뜨려놓은 위급한 이 때에 과거 영국에서 일어났던 영적 혁명과 같은 복음주의 신학적인 대안으로서의 패러다임의 변형이 지금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9)
세속 현대사회의 다원화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대인들의 질문들에 대하여 복음이 어떻게 답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성결교 와 관련된 신학자들도 고민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복음주의는 복음의 본질에 관한 한 어떠한 변화도 용납할 수 없지만,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 면에서 변화의 파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여 수정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참신한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새 천년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도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방향에서 재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10)
바야흐로 몇 년 뒤 창립 100주년을 맞는 한국성결교회도 현대 세속화 시대에 자기정체성 확립뿐만 아니라 성결신학의 현대적인 재해석을 통하여 시대를 계도하고, 선도하는 역할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Ⅱ. 세속화의 의미
1. 세속(Seculum)의 어의(語義)
세속의 희랍어적 용어는 κοσμικóς이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나타났는데 ‘세상에 소속된’(belonging to the world)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유대 랍비들이 외래어로서 채용하여 ‘온 세계에 응용하는’(applying to the whole world)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초대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에 속한 것’(which belongings to this world)의 뜻으로 사용되어 하나님께 반역하는 일시적인 삶을 의미하였다.11) 구체적으로 ‘세속’(世俗, seculum)이란 말의 어의는 중세에 사용한 라틴어로서 거기에는 기독교 용어 라틴어에 세계를 의미하는 두 가지 낱말이 있는데, 곧 saeculum과 mundus다. saeculum은 age를 의미하고, mundus는 world를 의미한다. 우리말에 세계(世界)는 시간의 차원을 의미하는 ‘세’(世)와 공간의 차원을 의미하는 ‘계’(界)가 합쳐서 세계가 되었고, 인간이 태어난 환경에는 시대(age)와 세계(world)의 두 영역 내지 차원이 있다.12)
2. 세속화의 의미
영어에는 형용사 ‘세속적’(secular)과 세 개의 명사, 즉 ‘세속적인 것’(the secular), ‘세속주의’(secularism), ‘세속화’(secularization)가 있는데 secular와 secularism은 공통으로 사용되고, the secular와 secularism은 기술적 의미를 가진 용어로서 세속화 논의에서 사용된다.13) 흔히 세속성(secularity)과 세속주의(secularism) 이 두 낱말은 구분하여 사용한다. 아울러, 이에 해당하는 형용사인 세속적(secular)과 세속주의자(seculartist)도 구분하나, 이러한 구분은 다소 인위적인 것이어서 좀 부자연스럽게 느낀다.14) secular는 거룩한(sacred)의 반대어로서 종교에 대한 일차적 관심이 아니고, 생의 영역에 관한 것으로 사용된다.15) secular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의미와 특수한 의미를 다같이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secular는 현세의 일들과 관심거리에 전심하는 것을 의미하며, 통상적으로 영적 또는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물의 전 체계를 거부한다. 보다 특수한 의미로는, secular라는 용어는 인간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 주장이나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하게 행하는 생활에 대한 견해를 의미한다.16) 그리고, 세속주의(secularism)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에 의해 만들어진 말로 “종교적 가치나 초월적 실재를 고려해 넣지 않는 생의 철학과 태도”를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확실히 그 의도에서 경멸적인 것이며,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사용한 대로 그것의 인생관을 거룩한 것으로서 부정한다. 세속화는 서양에서 오랫동안 작용해 왔고, 근래에 와서 매우 빠르게 증대한 현대화의 과정, 중세기의 교회 지배로부터 인간주의에로의 인간 이성의 해방, 자율의 성취과정이다. Macquarrie는 세속성(secularity)을 현대과학적 태도와 더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이 이 관점에 찬동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다른 한편 세속주의(secularism)를 단지 과학을 통해서만 어떤 진정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구체적인 것과 이 세상의 인간사상만이 관심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엄격한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17) 또한 그는 ‘세속적’이라는 의미를 다음의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세속적이라는 것은 시간적이고, 영원한 것에 반대된다. 이것은 ‘세속적’이라는 라틴어 seculum의 본래의 의미를 반영하는 것으로 그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세대(generations) 또는 시대(age)를 의미한다. 이것은 역사 즉, 시간 속의 있는 인간의 관심사를 말하는 것으로 타계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써 이 세상적인 삶에 속하는 것(이 세상적)으로 말할 수 있다.
둘째, 세속적인 것은 보다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것의 반대되는 것으로, 세속주의자는 세속적 활동들과 비교해 볼 때 종교적 활동들은 비현실적이고, 그림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셋째, 문화와 지식의 영역에서 세속적인 지식은 인간의 탐구에 의해서 얻는 지식과 인간의 합리적 능력과 그의 관찰 능력의 운동에 기초를 둔 지식으로 자연과학이 그것에 대한 전형적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방식에서 얻는 지식은 신학(계시에 기초를 두고 있는)과 대립 속에 있고, 옛 형이상학에도 반대된다.
넷째, 세속적 인간은 자율적 인간으로 인간이상 더 높은 존재가 없고,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들을 창조하고, 자신의 표준과 목적을 세우고 자신의 구원을 성취해야 한다. 따라서, 자율적 인간은 신앙의 삶에 반대하며, 거부한다.18)
세속화의 의미는 요컨대, 기독교의 수적 감소와 사회적 영향의 감축, 그리고 세속적 영역으로의 적응과 전이의 현상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구교회는 세속화를 일차적으로 ‘비기독교화’(de- christianization)와 그 사회적 결과로 이해하는 반면, 한국교회는 이 용어를 한결같이 현대의 이데올로기들, 유행하는 풍조들, 또는 종교적 혼합주의와 같은 세상 정신의 유입과 관용을 통한 교회의 영적 타락을 서술하는 데 사용한다. 이것은 로마서 12:2에 나오는 ‘세상을 본받는 것’, 즉 ‘세상화’의 개념과 거의 동일하다. 서구적 이해가 사회적이며 현상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지는 데 비해, 한국적 견해는 영적이며 교회적인 측면을 강조한다.19) 리트펠드(Boudewijn Rietveld)는 세속화를 ‘창세기 3장 타락의 역사가 세속화의 시작의 역사로 세상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존재하기 위한 삼위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로 정의하였다.20)
Ⅲ. 세속화 시대에 대한 성결신학
기독교는 한 가지 종교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가르쳐 주는 종교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속된 사회와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하며 또한 그 다른 점을 자랑삼아 왔고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교회는 이 때까지 싸워왔던 것이다.21) 21세기 새 천년에 들어와 작금의 시대 현실은 인간 스스로 창출해 낸 세속적 가치를 존중하고 기독교 정신을 역행하는 세속화를 향한 브레이크가 파열된 기관차와 같이 질주하고 있다. 21세기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바, 이 시대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기치아래 경제효율의 법칙들이 정치?사회?문화 제반을 지배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22) 세속화 시대의 마지막 판도라 상자는 세계화와 지방화?다원화?지식정보화로 포장되어 있고, 그 속에는 반윤리적 부도덕성, 환경 파괴, 경제?사회적 적자 생존과 약육강식을 통한 이익추구로 인해 실직, 빈곤, 기아, 세대?계층간의 갈등 등 변화된 시대의 각양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1세기 이 시대는 과거와 다른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해서 인류에게 새로운 생활방식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이 변화는 도덕적인 영역에서까지도 새로운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23) 세속적 가치가 맹위를 떨치는 이 시대에 한국성결교회는 이에 대한 본연의 교단 창립 이념에 따른 정체성 규명과 적용에 따라 현실적인 신학적 제안과 실천적인 행동 강령들을 가지고 세속화 시대를 주도하고 선도하는 역사성 있는 교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성결교회는 본연의 정체성적 특성이 자생성과 성결성이라는 개체적 고유성을 강화함과 함께 우주적 조화성으로 세계 교회에 동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고, 둘째로 소극적 내지는 역기능적인 면에서는 새 시대의 세계화와 지방화의 현상 속에서 야기된 문제인 무한경쟁과 극심한 대립 내지는 충돌에 한국성결교회는 성결성, 곧 사랑으로 극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24) 따라서, 세속적 가치를 절대시하고 도덕적 타락이 극도로 팽배한 이 시대에 반성서적이며, 인간중심 가치의 세속성을 제압하고, 끊어내며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가는 성결성, 성결신학이 요청됨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1. 성결신학의 핵심으로서 성결론
한국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사중복음이다. 한국성결교회는 1907년 설립 때부터 사중복음의 전파를 그 사명으로 해왔다.25) 중생?성결?신유?재림의 사중복음 중에서도 한국성결교회의 핵심적 신학은 성결론에 있다. 성결론은 사중복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신학사적으로 성결교단 신학이 성결론(성결신학)으로 집약된다는 설명에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한국성결교회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나 기독교대한성결교회나 할 것 없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중생(Regeneration)한 자는 성결(Holiness)을 추구해야 하며, 신유(Divine Healing)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한 병고침을 넘어서서 하나님 앞에 성결한 삶을 살아가고, 장차 재림(Second Coming)하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성결한 심령의 소유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성결론은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집약이요, 강령으로써 넓은 차원에서 본다면 창조론과 구속론, 그리고 종말론을 꿰뚫는 기독교 신학의 근간이요, 복음의 골간인 것이다.26) 따라서 성결신학의 중심은 사중복음, 사중복음 중의 중심은 성결론으로 성결신학은 곧 그 핵심과 정점이 성결론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회가 1907년 설립시에 이미 조선에 개신교가 들어와 활동을 하고 그 결과로 많은 교회가 세워졌지만 완전한 은혜, 즉 성결의 도리를 강력하게 전하는 단체가 없기에 주께서는 미신자는 물론이고 신자에게까지 순복음(사중복음)을 외치며 이단과 세속화를 공격하는 성결교회를 세우셨다고 피력하고 있다.27)
2. 요한 웨슬리의 성결론 이해
앞서 논급한 바와 같이 사중복음의 중심이 성결론이요, 성결론은 한국성결교회의 교리적 요체이다. 그러나 성결론은 성결교회나 웨슬레안 교파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성결을 강조하여 왔다. 동방과 서방교회 교부들은 “온전한 그리스도인”(Christian Perfection)을 강조하여 왔다. 물론 동방교회의 온전한 기독교인의 개념이 플라톤적 요소가 있고, 서방교회의 그 개념이 율법주의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신앙과 신학에서 핵심적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성결교회의 성결론의 특징은 성결론을 처음으로 말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이 가지고 있는 성결론을 재확립했다는 데 있다.28)
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인의 완전 또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교리, 또는 성결론29)을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보다 바르게 연결시킨 사람은 없었다.30) 이것은 웨슬리신학에서 성화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큼을 지적하는 말로서, 웨슬리신학에서 성화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웨슬리는 두 개의 근본적인 교리로서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에 중요 관심을 갖고 있다. 이 중에서도 더욱 중요시되는 것은 성화이다.31)
웨슬리는 성화를 구원론의 범주 안에서 파악하는데, 구원론의 핵심은 칭의와 성화이다. 웨슬리는 루터(Luther)가 천주교의 행위신학, 즉 공로구원에 반대하여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주장한 개신교 진리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성화에 대해서는 그는 종교개혁자들과의 의견을 달리한다. 루터는 ‘의로운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을 주장하며 인간 자신의 내부에서의 의인과 죄인의 긴장에 찬 투쟁적 공존에서 철저한 죄의 고백과 거기에 따른 은총의 간구를 강조한다. 즉, 우리의 죄악된 내면성이 변화되어 성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전가 받음으로 성결해짐을 말한다.32) 웨슬리는 중생을 성화의 첫단계로 보았다.33) 이것을 그는 초기 성화로 설명하며, 중생 때부터 점진적인 성화가 시작된다고 한다.34) 이 점에서 칼빈(Calvin)과 동일한 견해를 가진 웨슬리는 성화를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칼빈과 달리 이 세상에서 온전한 성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웨슬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온전한 성화란 죄 없는 완전한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온전한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즉, 웨슬리는 하나님 형상의 핵심을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능력(도덕적 형상)이라고 말하고, 이런 관계 회복을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35) 조종남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속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시작되며, 은혜만으로 완성된다는 점에서는 웨슬레는 종교개혁자들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그 성화의 과정의 성격에서는 서로 이해를 달리하고 있다. 즉 순간적인 단계로서 온전한 성화(또는 성결)가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 그는 종교개혁론자들의 해석과 구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화의 과정이 있다는 성화론의 대의에서는 같으나, 그 세부 이해(circumstance of the doctrine)에서 웨슬레는 종교개혁자들보다 더 자세하게 또 분석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점으로 보아 웨슬레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더욱 진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다.36)
칼빈과 마찬가지로 루터나 쯔빙글리(Zwingli)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현세에서의 온전한 성화를 인정치 않았으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로 인해 중생 체험 이후에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라 불리우는 두 번째 은총의 가능함을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초기 성화 이후에 자신의 무능과 아직도 자신의 심령 안에 남아있는 죄를 깨닫고 중생 이후에 오는 또 하나의 순간적인 체험인 온전한 성화를 모든 신자들이 경험해야 할 것을 권고하였다.37) 웨슬리는 내재적 죄를 씻어주는 성결의 은혜는 온전한 성화(성결)의 단계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서 죄가 없다라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하였다.38) 웨슬리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온전히 성화된 상태, 즉 모든 죄에서 정결케하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으나, 다시는 타락하여 죄를 지을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는 절대적 의미의 완전이 아니고, 상대적 의미의 완전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으로 자력적이거나, 독립적인 완전이 아닌 신의존적인 완전이다.39) 성화의 교리를 자신의 신앙체험으로부터 신학적으로 정립한 웨슬리는 성화의 교리를 강조하고, 전하는 것을 자신과 자기를 추종하는 메소디스트들에게 주께서 맡기신 위대한 기탁물로 확신하였다.40) 따라서 웨슬리는 완전, 즉 온전한 성화는 개인적인 내면적인 성화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회적 성화로서 이 땅에서 죄를 벗어난 삶을 살게 하는 성결의 복음을 전파하는 부흥운동을 벌임으로써 이후 성결운동의 역사적인 신학적 기원을 갖게 하였다.
3. 웨슬리의 성결운동이 18세기 영국사회에 끼친 영향
웨슬리의 성결운동은 산업화가 시작됨으로 많은 문제점을 도출시켰던 영국 사회에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라는 성화의 메시지를 통하여 기존 영국사회에서 묵인되어 오던 죄악들을 그냥 간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41)
18세기 말 영국은 농업국가(agriculture)에서 수공업국가(manufacture)로 변형되는 산업혁명의 전야를 맞게 되었다. 1769년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는 최초로 효과적인 증기엔진, 1770년 제임스 하그리브스(James Hargreves, ?~1778)는 방적기, 1768년 리챠드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 1732~1792)는 방직기, 1784년 에드문드 카트라이트(Edmund Cartwright, 1743~1823)는 동력직조기(power-loom)를 만들고, 1762년 죠시아 웨지우드(Josiah Wedgwood, 1730~1795)는 스태포드셔(Staffordshire) 도자기 제품 공장을 가동했다. 산업과 사회적 변화, 그리고 그로 인한 변화에 수반된 문제들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종교도 극히 실제적인 재조정 과정을 겪게 되었다.42) 개인적인 신앙의 침체는 도덕적 수준을 허물게 하였다.43)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민의 신앙은 전반적으로 침체 분위기였는데 18세기에 들어와 당시 영국적 상황과 맞물려 전통적 기독교 신앙이 그 영향력을 잃어감과 함께 영국에는 도덕적 수준이 저하되었고 공직사회에는 부패가 만연하였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 사람들이 그들의 정열을 신앙으로부터 산업혁명을 통한 경제 방면으로 돌린 필연적 결과였다. 18세기를 통해 영국인의 교회 출석률은 전 인구의 20%밖에 되지 않았다.44) 이미 18세기 이전 17세기부터 영국에서 추진한 이성의 종교, 이신론(Deism)은 영국을 강타하고 프랑스, 독일, 미국으로 파급되었다. 처베리(Cherbury)의 군주, 에드워드 허버트(Edward Herbert, 1583~1648)가 1624년 이신론의 기본교리들을 제시한 이후부터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이신론은 영국 상류층의 사고(the thinking of the upper classes)를 지배하였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은 자기 피조세계를 자연법(natural laws) 아래 조종받도록 하셨기 때문에 기적,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로서의 성경, 예언, 섭리, 신인양성이신 그리스도 등이 필요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단지 도덕 선생이라고 가르쳤고, 예배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덕과 경건(virtue and piety)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예배였다.45) 이신론의 결과는 결과적으로 교회와 사회를 황폐화시켰다. 따라서 교회의 설교는 흔히 도덕적 상투어구로 가득찬 긴 훈계에 불과했다. 고위 성직자들은 5,000개가 넘는 교회의 하위 성직자들이 일년에 20파운드 내지 50파운드 정도밖에 받지 않을 때 많은 급료를 받았다. 그들은 지방의 대지주들의 식객이 되어 그들의 조악한 운동과 술잔치에 참여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도덕 역시 땅에 떨어져 18세기 초반에 값싼 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수용소(asylum)로 보내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므로 사망률이 증가했다. 정치지도자, 찰스 제임스 폭스(Charles James Fox)는 24살 때 10만 파운드를 날렸다고 말한다.46) 웨슬리는 당시의 반법종교(irreligion)에 대해 ‘영국의 현상태는 어떠한가?’에 묻는 질문에 ‘사악한 상태에 있다(It is ungodliness) 사악함이 모든 곳에 만연해 있고, 계속되고 있으며, 기묘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고 답하였다.47) 18세기 그 시대는 분명히 병든 시대(sick century)로서 신학에 대해 의심하며, 열정이 결여된 시대였다.48)
드디어 심원한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 변화는 우선적으로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결과였고, 모든 영어권 사용국가에 복된 흐름으로 넘쳐 흘렀다. 18세기 초에 각성의 조짐이 스코틀랜드 두 형제 에벤에젤(Ebenezer, 1680~1754)과 랄프 어스킨(Ralph Erskine, 1685~1752)의 지도 아래 복음주의 부흥 운동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세 명의 위대한 지도자 존과 찰스 웨슬리(John and Charles Wesley) 형제와 화이트 필드(George Whitefield)의 출현은 복음주의 부흥운동을 당시의 강력한 조류로 등장하게 하였다. 이 운동은 40년간 뚜렷이 세 가지 다른 것으로 구분되지만 밀접하게 관련된 흐름 안에서 모두 영국국교회와 연관을 맺고 발전하였다. 웨슬리 형제의 감리교(Methodist Societies), 화이트 필드의 칼빈주의적 감리교(Calvinistic Methodist), 그리고 좀 더 전통적인 교구의 노선을 따르는 앵글리칸 복음주의자들(Anglican Evangelicals)의 3조류이다.49) 16세기 종교개혁과 17세기 청교도주의 이후 발생한 감리교 부흥운동은 영국의 세 번째 종교각성운동이었다. 그것은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는데, 종교에 관한한 18세기를 지배했다. 역사가들은 감리교 운동(Methodism)이 18세기 위대한 역사적 현상의 하나로서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에 쉽게 비견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50)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예루살렘 오순절 이후에 18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오순절운동이었다.51) 웨슬리는 말을 타고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지를 20만 마일 이상 여행하였고, 약 42,000번 설교하였고, 200권 정도의 책을 저술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을 조직했다. 중요 교리는 앞서 논급한 중생의 순간적인 경험을 통한 신앙에 의해 얻어진 칭의(justification)와 그리스도인의 완전(perfection), 완전한 사랑(perfect love)의 교리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들의 심령 속에 가득하므로 죄를 축출하고 완전한 성결의 삶을 촉진시킬 것이므로 기독교인은 동기(motive)에서 세속적인 삶에서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가능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또한 이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죄가 없거나 무오한 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심령은 동기면에서 죄가 없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52) 또한 복음은 개인 심령 부흥뿐만 아니라 세속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감리교 신앙부흥이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술, 노예제도(slavery), 전쟁을 반대했다.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부분적이지만 술 판매가 중지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746년에 영국 최초의 무료 의무실이 설립되었다.53) 웨슬리는 감옥의 개혁뿐만 아니라 빈민구제를 위한 기금모금을 통해 의복과 음식을 분배해주고, 법률적 특권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기독교적 관심을 일으켜 1787년에 자선우정회(Strangers’ Friend Societies)를 만들게 하였다.54) 웨슬리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으로 인해 영국은 사회적 의무를 깨닫고, 세속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 표본적 모델을 이루며 개인적 성결을 넘어선 사회적 성결까지 성결론을 확장시켰다.
결국,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요한 웨슬리의 사회적 변혁을 포함한 성결운동은 19세기 미국에서 감리교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로서 성결을 강조하게 하였고, 이후 한국성결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19세기 성결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19세기 성결운동의 부산물로 베빙톤(D. W. Bebbington)은 미국에서 전통적인 세속적 악단과 민속 합창단의 폐지를 통해 종전의 새로운 국면이 그 시대의 정신에 합당한 음악적 고유어를 택하는 변화가 찾아오고, 또한 여성들의 사역을 확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레크레이션과 달리 세속적 놀이 행사(돈을 따기 위한 카드놀이, 극장, 오페라, 무도장에 단골손님, 경마장 경기에 참여)할 것은 반대하는 장벽이 높이 세워지고, 알코올에 대한 절제 여론이 강화된 것을 지적하였다.55) 미국에서의 이 같은 결과들은 청교도 혁명이 실패한 영국을 산업혁명 과정의 위기에서 구원한 감리교운동, 즉 웨슬리의 성결운동을 통한 사회적 변혁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이 점에 감안하여 19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감리교 신학자들과 해방신학자들이 사회적 성결(성화)과 사회적 해방을 웨슬리신학에서 재해석하여 왔다. 20세기 초 시카고 게렛(Garret)신학교에서 가르쳤던 헤리스 플랭클린(Harris Frankline Rall) 교수를 비롯해서 레온 힌슨(Leon Hynson), 알버트 아우틀러(Albert Outler), 데오도어 러년(Theodore Runyon), 남미 해방신학자 죠세 미퀘즈 보니노(Jose Miquez Bonino), 여성해방신학자 레티 러쎌(Retty Russell) 등이 그의 성결(성화)신학을 사회적 해방의 개념으로 재해석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데올로기적 해방운동이나 폭력적 혁명으로서의 해방을 말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의 해방, 성령의 사랑과 자유의 은총을 힘입어 사회의 구조적 악과 제도적 모순에서 해방시키는 운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 성결(성화)신학은 현대 해방운동의 영성회복에 큰 교훈을 주고 있다.
미국 감리교회(U.M.C.)는 웨슬리의 사회적 차원에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그의 영적, 내면적 성결(성화)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한국 감리교회는 웨슬리의 개인적 성결(성화)에만 관심을 기울여 왔기에 사회적 성결(성화)의 차원에 무관심하여 왔다.56) 한국성결교회도 교단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웨슬리의 개인적 성결에 머물러 세속사회를 향한 사회적 성결의 변혁적 차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것은 18세기 웨슬리 신학이 말하는 바 성화, 즉 완전한 성결 개념이 지향하는 바 개인적 성화와 동시에 사회적 성화를 양면으로 강조하는 내용을 그대로 전수받지 않고, 그 중간에 19세기 성결운동을 통한, 즉 개인적 성결체험으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한 교리적 내용을 단편적으로 동양선교회를 통해 신학적 전통유산으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성결교회의 성결신학의 핵심인 성결론은 성령세례, 즉 중생한 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순간에 받을 경험과 원죄에서도 정결케 씻음을 받고, 성별하여 능력받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57) 이 같은 내용은 19세기 성결운동이 성령세례를 강조하면서 따라온 자연적인 결과로 ‘능력받음’ 외에는 모두가 웨슬리 부흥운동 즉, 웨슬리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어온 개념들이다.58) 그러나 한국성결교회가 가르치는 바 사중복음의 성결론은 많은 장점과 함께 세속화된 현시대에 와서 보완의 필요성을 제기받는다. 21세기 들어와 인류사회는 더욱 점증되는 도덕성 상실과 사회 구조적 악, 그리고 생태계 파괴, 더 나아가 인간복제 또한 배타적 독존을 거부하고 다원화를 주장함으로 신학과 교회에 도전하는 세속화 시대에 놓여져 있고, 새로운 문제제기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청하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성결운동에서 성령세례를 통한 순간적 성결체험 신앙은 개인적인 체험신앙으로 하나님과 신자 개인 사이의 내면적 깊이를 더해주고,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 주는 반면에 상대적으로 개인주의나 분파주의, 더 나아가 영적 체험의 신비주의로 발전되어 결과적으로 사회적인 무관심과 몰역사성을 보이는 한계를 드러낸 점을 보완해야 한다. 따라서, 현 성결교회의 성결신학, 즉 성결론은 성화의 양면을 강조한 웨슬리 신학의 내용을 절대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세속화 현시대에 개인적 성화에 머무르는 반편의 신학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성화로까지 나가는 온전한 신학을 주장해야 한다.59) 사회적인 성결(Social Holiness)이외는 다른 성결이 없다고 주장한 웨슬리에 대해, 브래디(John W. Bready)는 웨슬리 신학을 단적으로 가리켜 ‘사회적 종교’라고까지 말한 점을 한국성결교회는 오늘의 상황에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60)
Ⅳ. 닫는 말
주지한 바, 웨슬리는 성화를 성결과 사랑으로 이해하여, 성결이 개인적 성화라면, 사랑은 성육신적인 요소로 사회적 성화로 볼 수 있다고 말하였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성화를 말함으로써 중생의 체험을 한 성도는 당연히 그 관심이 세속사회를 변혁시키는 사회적 성결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앞서 논급한 바와 같이 웨슬리는 한편으로는 경건주의적 요소를 갖고 인간의 타락성을 지적하며 개인 영혼 구원과 개인적 성화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경건주의적 내세지향적 천국관에 머무르지 않고 현세적 천국을 실천하는 이 땅에서의 사회적 성화를 말함으로 인해 세속 사회를 복음으로 선도하고, 변혁시키는 일을 하였다. 초월적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면서도 그는 세속 역사와 사회 속에서 실현되는 내재적 하나님 나라도 강조하였다.
앞서, 세속화 개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속화시대의 정점에 놓인 새 천년에 들어와 오늘의 한국적 사회상황은 한국성결교회의 성결신학, 즉 성결론의 기독교 윤리와 사회적 적용에서 그 어떤 시대보다 폭넓게 적용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을 하고 있다. 따라서, 성결의 복음의 지평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그 신학적 이론과 실천적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놓음으로 통전적 구원의 이중 범주로 확대해야 할 것이다. 18세기 웨슬리의 사회적 성결운동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놓인 영국과 유럽을 구한 것과 같이, 오늘날 세속화 시대의 각양의 위기에 놓인 한국 사회와 교회를 인간 영혼 구원의 개인적 성결운동에서 사회구조적 그리고 근원적으로 윤리적인 변혁을 일으키는 사회적 성결운동을 동시에 한국성결교회가 펼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의 산업화와 정보화로 인한 맘모니즘과 문화의 세속화, 과학의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한 자만과 허영, 절대적 가치관과 윤리의 붕괴로 세속화된 현대사회의 황폐화와 자유신학의 공허함으로부터 이 땅에 구원과 정화를 가져다 주는 치유의 방편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