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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장로교 약사略史
황영철
최초 노회 탄생
1776년 독립 전 미국은 행정상 영국 식민지였으나 그 주민은 영국민 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 건너온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다. 신대륙에서 형성된 최초 장로교도 다양한 국가 배경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됐다. 장로교 신앙을 가진 영국 청교도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장로교도들, 프랑스 위그노, 화란과 독일과 스위스에서 이민 온 개혁교도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초기에는 어떤 조직도 형성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1706년에 주로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Francis Makemie 주도 아래 식민지 노회(Intercolonial General Presbyterian)를 구성했다. 그리고 10 년 뒤에는 최초 대회(General Synod)를 조직했다.
상이한 두 전통
이 최초 식민지 장로교회 일부 회원들은 그들이 유럽에서 받았던 박해 때문에 국가권력 간섭을 받지 않는 신앙의 자유를 열렬히 희구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디서나 “정교분리”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그들 이런 정신은 단순한 정교분리를 넘어서 자신들 신앙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 모든 교권을 부인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모든 종교적 결정의 궁극 주체는 각 개인이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한 대표자가 Jonathan Dickinson이었으며, 이것은 영국 청교도들 전형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영국 청교도들보다 더 정통 장로교 전통을 가진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은 영국 청교도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에 교회의 교리 순수성을 보호할 수 있는 아무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야기될 수 있는 위협, 교회에 대한 교리 위협을 심각하게 느꼈다. 이런 생각의 대표자인 John Thompson은 1727년 대회에서 “교회 순결성을 위해 교회가 공적 신앙고백서를 택해야 한다.” 점을 역설했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국 장로교에는 목사들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모든 내용을 철저하게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배경을 가진 그룹과 ‘그런 교리적 승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갖은 영국 청교도 배경을 가진 그룹으로 나뉘게 된다. 그런데 이 최초 의견 대립은 18세기 합리주의 대두에 위협을 느낀 양 진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공적 신앙 고백서로 채택하기로 합의함으로써 해결됐다. 바로 이 합의가 ‘1729년 채택 조례(Adopting Act)’다. 그런데 신앙고백서와 대회가 개개 신자에 대해 갖는 구속력을 놓고는 양 진영이 여전히 상이한 태도를 취했으며 이러한 상이성은 그 후 두 차례 분열 요인으로 작용한다.
최초 분열: Old Side / New Side
1730년대와 1740년대에 미국을 휩쓴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영향으로 미국 장로교는 최초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미국 장로교가 이 부흥운동을 찬성하는 진영과 반대하는 진영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부흥운동을 찬성하는 진영을 “신파(New Side)”로 불렀고, 반대하는 진영을 “구파(Old Side)”로 불렀다.
구파는 ‘성경의 권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교회를 중시하는 엄격한 장로교 교회 정치’를 강조한 반면, 신파는 ‘주관적인 체험 신앙과 경건을 위해서라면 교회 통제를 벗어나더라도 어느 정도 그런 것을 관용해야 한다.’는 태도를 가졌다. 구파가 볼 때 신파는 비정통이었고 무지한 광신주의였으며 위험한 것이었다면, 신파가 볼 때에 구파는 죽은 정통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신파 중심인물 Gilbert Tennent가 1740년에 [변개하지 못한 목사의 위험]이라는 설교로 구파를 비판한 일을 계기로 표면화됐다. 그리고 1741년 구파가 신파를 축출함으로써 최초 분열을 겪게 됐다. 축출된 신파는 1745년에 신파 뉴욕 대회(New Side Synod of New York)를 결성했다. 또한 구파는 구파 필라델피아 대회(Old Side Synod Philadelphia)를 결성했다. 그런데 이 최초 분열은 대체로, 비록 약간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영국과 웨일즈 배경을 가진 관용적인 장로교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배경을 가진 엄격한 장로교 사이 분열이었다. 그런데 이 점은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지는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파에게 축출된 신파도 채택 조례에서 합의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그대로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구파 마음에 드는 원칙들을 계속 지켜 나갔기 때문이다.
통합
비록 이들이 분열되긴 했지만 분열 시나 분열 이후에도 상호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이들은 1758년에 연합대회(New Side Synod of New York and Philadelphia)를 구성해 다시 통합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이 연합운동 주역이자 최초 회장을 맡은 인물은 바로 분열 원인이 됐던 Gilbert Tennent였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양 진영은 서로 자기들 주장을 조금씩 양보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공통 태도를 근거로 연합을 성취했다.
그 뒤 1776년에 미국이 독립하자, 미국 장로교도 총회(General Assembly)를 조직했으며 내지선교內地宣敎에 더욱 힘을 쏟아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교육을 위해 1811년에 Princeton신학교를 세웠고, 도덕적 고결성을 위해 금주, 도박 금지, 주일 성수를 강조했으며, 영화 관람과 댄스를 금지했다.
그러나 이 기간 장로교 발전 중에서 2차 분열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장로교가 많은 논란을 거친 뒤에 통합 계획(Plan of Union)에 따라 1801년에 뉴잉글랜드 조합 교회와 통합한 일이다. 이 통합은 선교지에서 조화와 화합을 유지하기 위해 이뤘다. 그리고 그 결과 신도들은 장로교회와 조합교회 어느 쪽에도 가입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바로 이 통합 때문에 뉴잉글랜드 신학이 장로교회에 스며들어 왔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돼 2차 분열이 일어나게 됐다.
2차 분열: Old School / New School
통합 계획에 따라 장로교와 뉴잉글랜드 조합교회가 통합됐지만, 미국 장로교는 통합을 둘러싸고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뉘어서 긴장과 갈등 가운데 들어가게 됐다. 당시 진보파는 ‘사무엘 홉킨스 추종자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홉킨스주의’와 이보다 더 급진적인 ‘나다니엘 테일러 New Haven 신학’이 양대 주류를 이루던 뉴잉글랜드 신학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 신학은 “죄인들에게 복음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이 구원받아야 할 필요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적 타락 교리’와 ‘인간 힘에 의하지 않는 초자연의 중생 교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신학이었다. 이 주장이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 가르침에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었다.
오랫동안 계속돼 오던 미국 장로교 이 긴장은 예일신학교에서 테일러에게 신학을 배운 Albert Barnes가 1829년 {구원의 길}이라는 설교집을 출판하면서 표면화됐다. 보수파는 그 설교 속에 나타난 죄인에게 하는 회개의 호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가르치는 칼빈주의 교리 체계에서 어긋난다는 까닭으로 1830년에 Albert Barnes를 총회에 고소했다. 그 뒤 진보파와 보수파는 총회에서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는 세력 다툼을 벌이다가, 마침내 1837년 보수파는 진보파를 축출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전체 교인 약 5/1에 이르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다. 축출당한 진보파는 그해에 Auburn에 모여서 [어번 선언]을 채택해 자기네 입장도 정통 장로교 입장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38년 총회에 자기네 대표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보수파와 큰 소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들은 즉석에서 새로운 총회를 조직했다. 두 개의 장로교가 탄생한 것이다.
이 당시에 오래 계속된 보수파와 진보파 싸움은 악명이 높았던 것 같다. 1835년에 찰스 피니는 총회를 비꼬면서 “해마다 총회가 모일 때쯤이면 지옥에서는 축제가 열릴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로교인이었던 당시 잭슨 대통령은 “내 정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장로교인들 분열이 내 속을 썩이는 것에 비하면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분열 원인을 두고 후기 역사가들은 다양한 견해들을 제시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지배적인 견해는 그 분열의 주된 원인이 신학적인 것이었다는 견해이다. 보수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신학적, 교리적 순수성이었다면, 진보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 전파와 부흥이었다는 점이다.
부흥을 지상 목표로 여기는 진보파에게서 부흥을 위한 어느 정도 신학적 타협을 두고 교회가 지나치게 엄격한 제재를 가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바로 이런 부흥의 분위기 속에서 예일신학교가 1822년에 설립됐고, 또한 테일러주의의 온상지가 됐던 것이다. 그러나 진보파 이런 신학적 이탈은 결국 보수파 단호한 결단을 유도하게 됐다. 이들 단호한 태도는 당시 보수파 변증가였던 L. Cheeseman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몸의 소수가 불건전하게 되면 절단 이외 다른 치료책은 없다. 또한 다수가 불건전하게 되면 분리 이외 다른 치료책은 없다.” 결국 보수파는 자기네가 다수가 됐을 때에 전자前者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보수파가 중시한 신학적 순수성’과 ‘부흥을 위해 더 관용적인 교회 통치, 신학적 관용주의를 주장한 진보파 태도’는 분열의 양면이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한 분쟁, 초교파 선교단체를 지원하는 문제에 대한 이견도 위 차이에 비춰서 쉽게 추리할 수 있다. 보수파는 “총회 산하 모든 교회는 총회 직접 통제를 받는 선교기관이나 교육기관과만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진보파는 “초교파 선교단체가 선교 효율성을 제고하며 교회연합에 도움을 준다.”는 까닭으로 초교파 선교단체를 더욱 지지했던 것이다.
분열에서 세번째로 중요한 문제는, 당시 사회를 두고 교회가 취해야 할 도덕적인 태도였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진보파는 “금주 운동이나 노예제도 폐지 같은 사회개혁 운동에 교회가 적극 참여하는 것이 성경적이다.”고 주장한 반면, 보수파는 “성경이 그런 문제를 놓고 직접적인 원칙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신자 양심의 자유에 맡기고 있으므로, 그런 문제를 놓고 교회는 결정적인 발언을 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런데 미국 사회 큰 문제였던 노예제도를 두고는 미국 장로교는 또 다른 분열들을 감내해야 했다. 노예제도 폐지론 쪽으로 향하는 진보파에 반대해 1857년에 21 개 남부 노회는 진보파를 탈퇴해 장로교 연합대회(the United Synod of the Presbyterian Church)를 구성했다. 보수파도 역시 노예제도 문제로 분열을 감수해야 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난 1861년에 보수파 1/3을 차지하던 남부 교회가 보수파를 탈퇴해 미국 연방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진보파와 보수파에서 각각 탈퇴한 이 두 교회는 연합해 ‘남장로교(Southern Presbyterian Church)’로 알려진 미국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United States)를 구성한다.
2차 통합
1837년에 분열했던 교회는 1869년에 재통합을 성취한다. 그러나 이 재통합을 두고 당연히 갖게 되는 의문은 ‘1837년 분열 뒤 32 년이 지난 뒤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생겼기에 그들이 재통합을 성취할 수 있었느냐?’다. 물론 한 세대가 지나가는 동안 양 교단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 교단 구성원들 변화, 상대방을 향한 감정 변화 따위가 재통합에 어느 정도 긍정의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분열 당시 신학적인 이슈들은 어떻게 됐는가? 보수파가 진보파 입장을 용납할 수 있을 만큼 관용적이 됐는가? 아니면, 진보파가 신학적 관용주의를 버리고 원래 장로교 신학과 신앙을 취했는가? 아니면, 그런 신학적인 차이가 해결됨이 없이 어정쩡하게 조직적인 통합만을 이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묘하게도 재통합을 찬성했던 양 진영 대다수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재통합을 반대했던 소수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마지막까지 통합을 반대했던 소수의 보수파 대표자인 찰스 핫지는 다음과 같은 음미해 볼 만한 지적을 했다. “비록 진보파가 연합을 위해 자기네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인다고 공언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인다는 말을 두고 그들 이해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과거 분열 당시에도 진보파들은 칼빈주의 체계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자기네는 여전히 그 체계를 받아들인다고 말했으며, 또한 실제로는 그 체계에서 명확히 벗어난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분열한 까닭은 진보파가 칼빈주의 체계를 공개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네 공언과 일관성 있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연합을 이루려는 이 시점에서도 진보파는 칼빈주의 체계에서 벗어난 사상을 정죄하지 않고 그대로 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보파와 신학적 태도는 분열 당시와 달라진 것이 없으므로 재통합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 핫지 주장이었다.
실제로, 보수파는 1850년대 말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양적으로 팽창했으며, 진보파 사람들은 보수파와 연합해 더 큰 교회 일원이 됐었다. 이처럼 진보파와 보수파가 통합을 이룰 당시 보수파는 분열 시 보수파 성격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고, 진보파는 분열 시보다는 더 보수파에 가까이 갔던 것이다. 결국, 재통합을 이룬 교회는 진보파와 보수파 성격을 다 포함할 수 있을 만큼 그 조망이 확대됐던 것이다.
중간평가
지금까지 우리는 두 번에 걸친 미국 장로교회 분열과 통합 과정을 살펴보면서 장로교에 존재하는 두 가지 서로 상이한 신학적 전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하나는 ‘구파’와 ‘보수파’로 대표되는 전통이다. 다른 하나는 ‘신파’와 ‘진보파’로 대표되는 전통이다.
전자는 대륙의 정통 개혁 교회,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통 신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후자는 영국 청교도와 뉴잉글랜드 청교도 전통을 따르고 있다. 전자는 ‘성경의 권위’를 두고 엄격한 견해를 강조하고, 객관적이고 권위적인 장로교 전통을 취하며, 부흥주의에 대해 회의적이고, 과도한 체험주의 기독교를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에 성경의 권위를 구체적으로 적용해 교회가 권위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긴다. 반면에 후자는 주관적이며 부흥주의를 중요히 여기고, 성경이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장로교 운영 원리는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을 위한 것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평가는 두 가지 신학적 차이점을 명확하게 부각하려고 대표 경향을 소개한 것이지, 그 각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동일한 강도로 어느 한 경향을 취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차라리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스펙트럼을 상상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왼쪽으로 치우쳐 있고,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19세기 진보파는 18세기 신파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신파도 조금 더 왼쪽에 위치했고, 오히려 보수파가 신파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 장로교는 두 번 분열과 통합을 거치면서, 점점 더 ‘신파’와 ‘진보파’ 쪽으로 기울어 왔던 것이다.
미국 장로교회 발전
2차 통합 뒤 미국 장로교회는 국내 선교와 외국 선교, 그리고 기독교 교육과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으며, 그 결과 교회는 더욱 성장했다. 이런 성장과 함께보다 능률화 되고 중앙 집중적인 된 교회 조직이 탄생했는데, 문제는 이 교회 조직이 자유주의 신학자들ㅡ당시에는 이들을 “modernist”로 불렀다ㅡ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한 이들 모더니스트들은 처음부터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을 공공연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재해석하면서 “우리들 신학적 사고가 참된 의미로 ‘기독교’다.”고 주장했으며, “오늘날 과학이 발달된 시대 속에서 기독교는 현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말로 표현돼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들은 실제로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신앙고백서와 함께 성경이 가르치는바 근본 가르침을 무시하며 교회의 연합을 위해 온갖 종류의 가르침을 다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런 자유주의적인 견해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정통주의자들이 바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과 칼빈주의 체계를 그대로 고수했으며, 특히 성경의 권위와 영감의 문제에서는 지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결국 문제는 과연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느냐 여부에 달려 있는 까닭이다. 이들 고발에 의해, 당시 장로교 내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자였던 Charles A. Briggs가 1893년에 총회에서 정죄당해 충분한 회개의 증거가 보일 때까지 목사 활동을 정지당했으며ㅡ그러나 뉴욕노회에서는 그의 무죄를 선언했다ㅡ 1894년에는 Lane신학교 Henry P. Smith가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까닭으로 교수 자격이 정지됐다. 그리고 1900년에는 동일한 까닭으로 유니온신학교의 A. C. MeGiffert가 면직 당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기독교 신학의 한 형태가 아닌 이단 사상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근본주의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은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근본 원리를 그들이 주장했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자들이 총회를 지배하게 됐던 1910년의 미국 장로교 총회는 기독교의 다른 중요한 원리들과 함께 다음의 다섯 원리들을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했다.: ①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②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③ 하나님 공의를 만족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대속. ④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 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의 초자연 성격.
이리해 다시 이 시기 미국 장로교에서는 두 진영 대립이 전개됐다. 그러나 이 시기의 투쟁은 이전 시대 구파와 신파, 진보파와 보수파의 분열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전 시대 분열은 적어도 같은 복음적 신앙 내에서 어느 쪽이 더 성경적이고 어느 쪽이 더 정통적이었느냐 하는 것이었지만, 이 시기 분열은 기독교와 기독교 아닌 것 사이의 분열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립해 일어난 근본주의 진영 인물들은 여러 가지 신학적인 배경에 속할 수 있었다. 이전 같으면 서로 의견을 다르게 해서 제 길을 갔을 사람들이 공동의 적 앞에서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대주의도 당시 근본주의 진영에 가담해서 함께 싸웠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 성격은 상당히 모호해졌다. 따라서 근본주의는 특별히 칼빈주의적이거나 장로교적인 여러 가지 중요한 원리를 전혀 강조하지 않게 됐다. 환언하면 이 시대 칼빈주의적인 장로교인들은 기독교 뿌리를 공격하는 자유주의 공격 앞에서 기독교 자체 사활을 건 싸움을 해야 했으므로 칼빈주의나 장로교 신앙의 독특성 같은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장로교 내 근본주의 운동이 거의 초교파적, 혹은 심지어 반교파적 성격까지 지니게 됐던 것이다.
어쨌든 근본주의 특성은 칼빈주의적 장로교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함에도 당시의 더 보수적인 장로교인들이 그 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자기들 독특성을 강하게 주장할 수 없었던 실정을 그레샴 메이천이 다음과 같은 말로 잘 표현했다. “여러분들은 초자연적인 기독교를 변호하는 저 인기 있는 사람들(세대주의자들) 속에서 내가 그들 오류들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매우 싫어하는 ‘근본주의자’라는 명칭으로 자유주의자들이 나를 지칭하고 있는 사실을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실로 그것을 우리 공동의 큰 적 앞에서 나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나와 함께 싸우는 내 형제들(세대주의자들)을 공격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해 미국 장로교는 이른바 근본주의 논쟁이라고 부르는 한 역사 시기를 맞이하게 됐다. 한쪽에는 기독교의 모든 특징을 포기하고자 하는 모더니즘 사상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것을 거부하는 근본주의 사상이 있어서, 이 둘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 경우에 비춰 한 가지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근본주의자들이 모더니스트들을 축출하지 않으면, 적어도 근본주의자들이 분리해 나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 메이천을 포함한 보수주의자들이 총회에서 축출당해 지극히 작은 교단 하나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비교적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그러나 신학적 무관심주의를 표방한 대다수 사람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까닭은 아니다. 거기에는 총회의 조직과 관련된 문제도 있었고, 총회라는 조직이 가지는 기계적인 운용의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주된 까닭은 역시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 미지근한 태도 때문이었다. 이들 태도는 전형적인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cism)의 그것이었다. 대다수 그들은 여전히 자신을 복음적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들은 건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미국 장로교 다수를 차지한 이 사람들은 교리적 원칙으로 자기 길을 정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가급적 서로가 좋은 길을 택해 서로 양보하며 적당히 타협하고 나가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엇다. 그들은 분열을 택하기보다는 자유주의자들이 지배하는 교단에 속해서라도 평안을 유지하기를 더 원했다. 이들은 간단한 복음을 전하고 단순한 기독교를 믿고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논리와 복잡한 교리적 논쟁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구원을 얻기에 최소한의 진리를 가지고 서로 우애 돈돈하게 교회를 유지해 가면 되지 않느냐? 바로 이것이 그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메이천은 일찍이, 바로 이런 태도는 미국 장로교 교회의 큰 위협이라고 간주했었다.
벤자민 워필드는 이미 타계하기 1 년 전에 미국 장로교 이런 상황을 가리켜서 “썩은 나무”로 평가했고, 교단의 분열 가능성을 묻는 메이천에게 “썩은 나무로부터는 분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탈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연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미국 장로교 상태에 비춰 볼 때, 이제 남은 일은 옛 프린스턴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칼빈주의자들이 언제 거기서 나오느냐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때가 왔다. 미국 장로교가 1935년에 메이천 박사의 목사직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그리해 그들은 1936년에 정통 장로교(Orthodox Presbyterian Church)를 창립했다.
맺는 말
미국에 장로교회가 최초로 형성된 때부터 장로교의 원래 정신을 유지하려던 사람들이 자기네 신앙적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그 교단에서 맥없이 축출당하는 사건을 보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역사의 과정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들이 뿌린 씨를 거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 두려운 마음을 갖게도 된다. 특히 3차 분열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대다수 비교적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태도는 우리에게 경고해 주는 바가 있다고 사료된다. 20세기 초반 미국 장로교 급속한 타락ㅡ“신학적 좌경화”로 불러도 좋다ㅡ과 교회의 무력화無力化는 바로 그런 신학적 무관심주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메이천 교수 축출과 관련된 미국 장로교 신속한 타락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이런 미국 장로교의 진보파와 보수파 전통과 관련해 한국 장로교 전통을 살펴볼 때에, 한국 장로교는 구파와 보수파 전통보다는 신파와 진보파 전통에 훨씬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내 좀 극단적인 견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과연 한국 장로교가 구파 전통에 접촉한 적이 있는지에 회의적이다. 이것은 과거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한국에 복음을 심었던 미국 장로교인 대다수가 진보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전도와 부흥주의, 금주와 금연, 감정적인 신앙 등은 진보파적 장로교 전통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을 놓고 한국 교회의 장로교는 자기들이 서 있는 전통에 좀더 명확한 자의식과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를 항해서 가고 있는가?’
참고 도서
1) George P. Hutchinson {The History Behind th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Evangelical Synod}(Mack Publishing, Company,1974). 본고는 이 책의 4, 5, 6장을 요약한 것이다.
2) George M. Marsden {The Evangelical Mind and the New School Presbyterian Experience}(Yale University Press, 1970).
3) Ned B. Stonehouse {J. Gresham Machen](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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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프뉴마티코스]는 역사적인 개혁 신앙과 그 신학을 소개하고, 그 분석틀에 의해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제반 문제를 분석하는 무크지”라는 정신으로 창간했던 1988년 3월 20일짜 [프뉴마티코스 창간호]에서 옮겨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