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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官度) 수계만으로 정식 관승이 되는 것은 아니어서 수계라는 의례가 필요했다. <사분율>에 의한 수계는, 사미가 정식 스님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할 필수 코스로, 만 20세가 되면 계단(戒壇)에서 삼사칠증(三師七證, 즉 戒師3인+증명법사7인)이 갖추어진 계단에서의 수계라는 의례를 거쳐야 해야 했다. 감진이 일본으로 건너간 까닭은, 당시 승려는 증가했으나 계율을 제대로 몰라 지키지 않는 일이 많았고 이에 천황으로부터 계사(戒師) 초청의 명을 받고 견당사(遣唐使) 일행을 따라 입당한 스님이 후쇼(普照)와 요에이(栄叡) 스님입니다. 젊은 두 스님은 감진 스님을 찾아가 간곡하게 일본으로 가주십사, 가서 일본의 허물어진 계율을 바로 일으키고 부처님 법을 널리 펴게 해주십사, 엎드려 청했습니다. 이에 감진 스님은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합니다.(742년의 일입니다) 이때가 감진 스님 세수는 이미 만54세, 이미 연로했습니다. 8세기 당시의 54살... 요즘 54살과 비교할 수 없겠지요?
굳은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갈 배를 구하고, 식량을 구해 싣고, 물론 부처님 경전은 그 모든 것에 우선하여 선적했겠고요. 그렇게 어렵사리 관청의 허가를 얻지 못 하거나 겨우 겨우 배를 띄워 출발했으나 난파 당하고... 그렇게 5차에 걸쳐 실패하고.......구사일생으로, 아니 5전6기, 다섯 번의 도전과 실패 끝에 겨우 여섯번째 시도하여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일본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753년 12월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무려 11년간에 걸친 고난의 여정을 마치고 나라(奈良)에 도착한 것입니다. 일련의 힘든 도일 과정에서 감진 스님은 시력을 잃고 맙니다. 일본 불교를 위해 두 눈을 바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나라(奈良) 도쇼다이지(唐招提寺)에 가면 눈을 감은(보이지 않는 눈) 감진 스님 동상이 쓸쓸히 이끼를 뒤집어쓴 채 거기 구석진 나무그늘숲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감진의 도일(渡日)에 대한 경위를 기록한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 저작의『唐大和上東征伝とうだいわじょうとうせいでん』(779년)이라는 감진 스님 전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감진 스님의 도일 경위를 픽션으로 생생하게 잘 그려낸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역사소설 <天平の甍>이 있습니다. 동명의 영화(1980년)도 있다는데 저는 영화는 아직 못 보았습니다. 감진 스님이 일본에 건너감으로써 드디어, 일본의 스님들도 중국에서도 공인 받는 국가적 수계제도가 수립된 것입니다. 이로써 도다이지(東大寺) 계단(戒壇)이 설치되고, 이후 시모츠케(下野, 현 도치키栃木)의 약사사(藥師寺)와 큐슈 다자이후(九州 太宰府)의 칸제온지(觀世音寺)에도 계단이 설치되어 나라시대 천하 3계단이 됩니다. 이후 헤이안(平安)시대 들어와서 히에이잔(比叡山延暦寺)에 대승계단이 설립되었고 이에 산문파 히에이잔 엔랴쿠지와 라이벌 내지 앙숙관계에 있던 사문파 미이데라(三井寺=온죠지園城寺)는 계단을 설립하는 것이 숙원이었던 바, 여기서 라이고(賴豪) 스님(<철서의 우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물로 본 일본 불교사>(마츠오 겐지 지음/김호성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2005) pp,53-56참조) * p.54에『천평(天平)의 죽음』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용마루 맹甍을 훙서 훙薨으로 본 데서 온 오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두 글자가 너무 닮았습니다. |
* 감진(鑑眞)을 일본음으로는 '간진がんじん'으로 읽습니다만 중국 스님이라
그냥 '감진'이라 독음했습니다.
그러니 일본 사이트에서 검색하실 때 참고해 주세요.
당초제사(唐招提寺) 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