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 모인 시장·군수·구청장, 그들이 CEO인 이유 속초=강민석 기자 mskang@joongang.co.kr | 제129호 | 20090830 입력 영동포도 판촉을 위해 서울 양재동 하나로 클럽으로 떠나기 전 중앙SUNDAY와 만난 정구복 군수. 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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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4기 지방행정 CEO 120여 명이 모였던 28일의 강원도 속초시. 지자체 선거를 1년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의 마지막 공식회합이라 그런지 오가는 인사말이 비장했다. “살아서 돌아와 내년에 다시 만납시다.”
이들 중 내년보다 당장 오늘이 걱정인 지방 CEO가 한 명 있었다. 정구복(52) 충북 영동군수였다. 그는 빡빡한 총회일정을 마치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서울 양재동 하나로클럽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영동포도 판촉 행사를 위해서였다. 그는 전기 기능직 8급 공무원 출신의 지방 CEO다. 싱크대의 대명사였던 ‘오리표 싱크’에서 전기주임으로 근무하다 1987년 특채로 8급 기능직 공무원이 됐던 이색 경력자다.
<가난 때문에 3년 ‘꿇어’ 고교 입학> 그는 워낙 집안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남들보다 3년이나 늦게 진학했다. 3년을 ‘꿇는’ 동안 서울에 올라와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돈을 벌었다. 고교 졸업 후엔 바로 군에 입대해 대학도 남들보다 3년 가까이 늦었다. 고교까지 포함해 남들보다 6년이나 늦게 진학한 데가 대전공전.
“그런 ‘창피’한 경력이 선거엔 오히려 도움이 되더군요. 남들은 위아래로 2~3년까지밖에 잘 모르지만 저는 6년 전후까지 다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대전공전 졸업 후 오리표싱크에 입사해 근무하다 공무원이 됐다. 8급부터 출발해 7급까지 갔다가 계급정년을 채우지 않고 사표를 던졌다.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전기직의 경우 7급이 만땅(승진의 끝)이었거든요. 비전이 안 보였어요.”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하다 96년 첫 지자체 선거 때 군의원 후보로 출마해 당선했다. 친구가 등을 떠밀어 아무 생각 없이 출마해 꼭 14일 선거운동을 한 게 전부였는데 당선이 됐다. 그러나 군의원 재선 후 기초단체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두 번이나 연거푸 쓴맛을 봤다.
“그때 한국의 보수층이 얼마나 강한지 느꼈습니다.” 당시 그는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었다.
그러나 그는 ‘될 때까지’ 도전하는 스타일이었다.
“남들은 어렵다고 하는 일도 저는 일단 부딪쳐 보고 판단합니다. 일하기 전에는 어렵다는 생각을 절대 안 하지요.”
결국 2006년 지자체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공천을 받고 출마해 군정(郡政)을 맡게 됐다. 열린우리당 해체 후 지금은 자유선진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끈기로 유치한 육군종합행정학교> 그의 질긴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충북 영동군은 2007년 육군종합행정학교 유치를 놓고 경북 영주시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당시 많은 군청공무원이 유치에 부정적이었어요. 군정만 잘해도 재선에 지장이 없는데 뭐 하러 뛰어드느냐는 거였지요. 만약 유치전에서 지기라도 하면 재선에 악영향을 준다고요.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도전도 해보지 않고 손들 수 있나요. ‘그건 아니다’싶어 강행했죠.”
처음엔 불리한 상황이었다. 영동군의 이용희(당시 국회 부의장) 의원이 육군참모총장을 면담한 뒤 정 군수에게 “포기해야 되겠다”고 통보했다. 실망한 마음에 정 군수는 함께 유치작전을 논의해 온 군의원 한 명과 함께 밤새 통음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부터 전열을 정비해 육군 측이 왜 안 된다고 하는지 ‘취재’해 그에 대한 반박 논리를 세워나갔다.
“알고 봤더니 육군 고위 간부의 고향이 영주더라고요. 이용희 의원에게 안 된다는 이유로 든 것 가운데 엉터리 논리가 많았어요.”
한편으론 ‘강수’도 던졌다. 군측에 영동군에 있는 육군본부 직할의 탄약창을 ‘다 철거하라’고 으름장을 놨다. 군민들과 함께 혹한에 유치 궐기대회를 열어 가두시위도 했다. 결국 육군종합행정학교는 영동군으로 옮기게 됐다. “이용희 의원이 포기하라고 할 때 포기했으면 아무것도 못 얻었겠지요.”
<황금알을 낳은 영동 포도> 그는 요즘 ‘포도 전도사’로 변신해 있다. 성과도 있다. 영동군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지난해에만 90t의 포도를 수출했다. 올해는 200t을 수출할 계획이다. 2년 전까진 수출이 전무했던 곳이었다.
처음 포도를 수출할 땐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쇼’도 벌였다. “당시 영동포도와 N시의 포도, Y군의 포도가 미국 수퍼마켓에서 나란히 경쟁을 벌였어요. 우리는 시식용 포도를 많이 풀었죠. 영동 포도가 정말 맛있거든요. 미국 사람들이 맛보고 사갔습니다. 그런데 Y군과 N시에서 포도를 30% 디스카운트한다는 거예요.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하게 된 거죠.”
비상이 걸린 정 군수는 농협조합장과 함께 심사숙고에 돌입했다. 최종 결론은 ‘DC는 없다’였다.
“시식용을 더 풀기로 하되 원칙은 고수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밀고 나간 결과 영동 포도 먼저 다 팔리고 나머지 포도가 팔리더라고요. 우리 포도의 명품 포도 이미지만 강해졌고요. 그래서 올해는 지난해 물량의 배 이상을 수출할 수 있었던 거죠.” 그가 포도 수출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다.
“포도 1㎏ 단가가 국내에선 2000원인데 수출단가는 3700원이에요. 거의 두 배 정도 남는 장사입니다.”
그는 “식용포도는 국가 간 경쟁에서 우리가 우위에 있다”고 장담한다. 그의 장담에는 근거가 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당시만 해도 농민들은 위기의식에 휩싸였다.
영동군도 기류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칠레 FTA 이후 영동군의 포도재배 면적은 오히려 200㏊ 정도 늘어났다고 한다. 맛과 향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농가 수익도 올라갔음은 물론이다. 영동군의 포도로 인한 수입은 한 해 1000억원이 넘는다.
<포도와 국악 접목시켜 시너지> 백두대간 자락, 해발 1200m가 넘는 민주지산과 금강 상류가 만나는 충북 영동군. 한마디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고장이다.
“이경식 전 부총리는 고향이 영동군이 아닌데 여기서 살고 계십니다. 공직생활하면서 들러본 곳 가운데 영동군이 가장 좋았다더군요. 팝 칼럼니스트 이양일씨는 영동군에 둥지 튼 지가 20년이 넘어요. 영동군에서 작품활동에 전념하는 문인과 예술인도 많습니다.”
그는 영동군을 강원도처럼 만들겠다는 포부가 있다. 인근의 무주-금산-영동이 서로 관광상품을 개발해 하나의 벨트를 이루는 일도 추진하고 있다.
영동군을 대표적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또 하나 심혈을 쏟는 일이 포도와 국악의 접목이다. 국악과 포도를 결합해 시너지를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난계 박연은 영동군 출신이다. 그래서 9월 4일 영동군에선 ‘난계 국악축제’가 열린다. 국악축제와 함께 포도축제도 병행한다. 영동군은 포도 재배에까지 국악을 활용하고 있다.
“포도농가에서 와인 숙성 기간에 국악을 틀어 놓지요. 국악인들이 그렇게 만든 영동 와인을 2만 병 사주더라고요.”
실제 유럽의 와이너리에선 포도밭에 스피커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기도 한다. 아기를 키우듯이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이다.
포도 와이너리를 만들어 포도를 재배하는 게 1차 산업이라면 포도주·포도즙·포도잼 공장 등은 2차 산업이다. 여기에 정 군수는 국악축제와 포도축제를 접목시키거나 와인열차와 같은 관광상품을 개발해 3차 산업까지 연결할 생각이다.
“포도로 인한 1, 2, 3차 산업을 다 더하면 6차 아닙니까? 곱해도 그렇고.” 그의 꿈은 이렇게 포도로 ‘6차 산업’을 완결시키는 것이란다. 이를 위해 정 군수는 CEO라기보단 ‘영업사원’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