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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안재구1403할배왜놈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
안재구, 돌베개, 1997, P. 325.
안선생은 1994년에 구국전선위원회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감내하며 자식에게 쓴 편지글을 정리한 것이라 한다. 어린 시절 밀양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 자랐는데, 사실상 태어나서 어린시절은 집안 어른들과 주변에서 들어온 이야기를 재구성하였다. 예닐곱살이 지나면서부터 본인의 이야기를 좀 더 생생하게 그린다.
태어나서 자란 밀양과 대소가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이 책은 본인 스스로 말하듯이 “한 가족의 운명은 민족의 운명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나의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도 왕이나 국가적 인물일 경우에 가족사와 민족사가 같이 갈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역의 중심인물이라면 마찬가지로 그러할 것이다.
선생의 할배는 일제의 고난을 겪으면서 지조를 지키고 새로운 운동의 선구자가 될 수 있는 품성이 있다. 밀양이란 곳도 유학사로 보면 강직했던 김종직의 고향이고, 임란을 거치면서 남명 조식의 계열하에서 망우당 곽재우와 연관이든 승병 사명당과 연관이든 애민애족에 관심이 내재하고, 게다가 독립운동으로도 강성인 의혈단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의 전설과 황상규(黃尙奎, 1890-1930)같은 이들이 있어서, 새싹들이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겠는가. 어린시절 안선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 입학 면접에서 일화는 책의 제목이다. <챠트 그림에서 “이것이 무엇이고?” “소”, 일본말로 해보라고 “우시” “참 잘한다. 무어라고 우노?” “움머” 그 선생은 잘했다는 말도 없고 다 되었으니 그냥 나가라고 한다. 끝에 할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끝에 할배는 “빌어먹을 놈, 일본놈 소울음은 ‘모오’라고 안했다고 안 그러나.” 나는 누가 듣건 말건 큰소리로 말했다. “왜놈 소는 조선 소하고 우는 것도 다른강?” 곁에서 이 소리를 듣고 어른들이 껄껄 웃었다. (153)>
소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조선말을 쓴다고 당하는 이야기를 할배가 지도하는 장면은 할배의 교육이 안선생을 낳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말하다가 선생에 매 맞았는데, 맞다가 억울해서 정당한 사유를 말하고 도망치면서 <뒤로 돌아보면서 일본말로 “고노 이누 꼬로노 야쯔. 보꾸가 오오기꾸 낫따라 고로시데 시마우까라 간넹시로(이 개자식이, 내가 크면 죽여버릴 테다. 그리 알고 기다려라)”> .그리고 집에 와서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들은 할배는 < “이놈아 달아나려거든 좀 더 일찍 달아나지. 이토록 맞고 달아나?” 하시면서 “학교에 안 가지는 왜 안가! 그 놈이 때리거든 이제는 한 차리(한대)도 맞지 말고 날아나거라. 모질고 독한 놈이, 일 저질 놈이다. 아마 내일 학교에 가면 그 놈은 또 때리지 못할 거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학교에 갔다. 동무들은 그가 학교에 온 것을 보고 놀랐다. <첫 시간 호시노(일본선생)가 교실에 들어왔다. 호시노는 쓰윽 한 번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눈치더니 그만 모르는 체했다. ... 그 뒤 학교에서 동무들과 조선말을 해도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296)> 말하자면 일제라는 시대에 거슬려서 지냈고, 별종이 정상이며 순응은 비정상일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할배는 독립을 위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굳건히 밀로 나갔다. 그게 안선생의 오늘까지를 있게 한 것이리라. 즉 다음 책 끝나지 않은 길 1, 2.(2013)에서 어린 시절이지만 구체적인 활동, 즉 야산대와 레포 활동을 전한다. 그리고 그는 군사정권에서 활동한 것 이후의 이야기를 곧 전할 것이라 한다. (47NMC)
*** 목차
책머리에: 소영에게 4
추천의 글: 조선의 아이들 7
제1장. 이야기 하나 13
1. 내 고향집 밀양유림연계소 15 / 2. 어린 날의 자화상 28
제2장. 이야기 둘 57
1. 터실의 사계 59 / 2. 밀양의 젖줄 남천강 84 / 3. 사자평의 사람들 119
제3장. 이야기 셋 143
1. 무너지는 공동체 145 / 2. 통바우의 할아버지들 200 / 3. 그래도 너는 조선 사람 238 / 4. 그날이여 어서 오라 286 (목차정리)
*** 내용 -*** *** *** *** **** ****
목차
# 책머리에: 소영에게 4
지난 1994년 초여름 어느날, ...(4) [1994(예순하나) 6월 14일 구국전위 조직사건으로 무기징역.]
이 기나긴 세월에 대해 내가 너희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그러나 단지 우리 집안만의 이야기로 듣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한 가족의 운명은 민족의 운명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나의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5)
# 추천의 글: 조선의 아이들 - 윤정모(1946-) 7
선생님과 첫 만남이 떠오른다. 1988년 12월 21일. 그날은 300여명이나 되는 양심수들이 동시에 석방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時局(시국)사범 281명 釋放(석방) / 1988.12.20 동아일보 1면 정치 기사(뉴스) / 崔民(최민) 金成植(김성식)△구학련사건 金永煥(김영환)△남노련사건 崔圭曄(최규엽)△현대엔진노사분규 權容睦(권용목)씨 등의 시국사범과 金南柱(김남주)등 남민전 통혁당 사건관련자 12명 전원, 姜(강)종헌...] / 1988.05.19 경향신문 4면 정치 기사(발표 명단) 박기태(2) ▲남민전사건=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김병권 황금수 차성환 김남주 이수일 김종삼 박석삼 김영옥 노재창 임규영... 문용식 안병용 황인상(4) ▲구국학련사건=김영환 정대화(2) ▲제헌의회... ]
특히 일본이 패전을 감추기 위해 부겐빌 섬을 배경으로 있지도 않은 전투를 만들어 대대적인 전승을 올렸다고 조작 발표했다는 사실은 어디서도 읽은 적이 없었다. (8)
선생님의 어릴 적 용모를 가리켜 ‘앞뒤 짱구가 지독해 울퉁불퉁 모개라고 불렸다’라던가, ‘눈이 조그만 게 폭 들어가 있어서 아무리 세수를 시켜도 눈곱이 그냥 붙어 있었다’라고 쓴 대목 .. (9)
- 1997년 9월 윤정모 .
* 차례 10
제1장. 이야기 하나 13
1. 내 고향집 밀양유림연계소 15
* 솔향기 은은한 집 15 / 가족과 이웃들 21 / 아이들의 놀이터 24
밀양유림연계소(密陽儒林聯契所), 이 연계소는 1880년대 밀양 유림에서 지은 집이다. 당시 나의 고조부는 밀양유림을 대표하는 선비로서 한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으로 공부하다가 노론 권귀들의 행동이 비위에 거슬려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16)
연계소 정침은 비록 비스듬하게 기울기는 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밀양유도회’의 간판을 달고 있었는데 .. (21)
2. 어린 날의 자화상 28
* 울퉁불퉁 모개야 28 / 포근했던 이모의 품 31 / 큰고모의 녹의홍상 34 / 사진기자 아버지 36 / 아오 눈은 무서워 37 / 할매 손은 약손 41 / 대버리 큰할아버지 44 / 첫싸움 48 / 진아의 죽음 53
이발소에 가면 이발소 아저씨가 애를 먹는다. 뒤통수가 불거져 각도가 작아서 그걸 깍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다. (30)
할아버지는 이성적이면서 엄한데 아버지는 감성적이면서 고집이 세다. 예컨대 아이들의 옷가지를 살 때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활동에 적합한가, 튼튼한가’에 기준을 둔다. 그러나 아버지는 ‘색각이 고운가, 천이 고운가’에 기준을 두었기 때문에 ... (36)
‘아오 눈은 무서워, 37’: 생선의 눈을 아오(고양이) 눈이라 하여 무서워하게 만들었단다. 할배가 생선 먹이지 말라고 해서...
증조부(큰할아버지) 대머리 ..
[할배] “오봉이가 네보다 한 살이 많고 하니 기운은 틀림없이 셀 게다. 그런데 니는 그놈과 맞붙어 싸워봤나?” / “..... ” “이놈 싸워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진다고 탕치고 울면, ..” (50)
다섯 살 어린 내 가슴에 너무나 벅찬 슬픔을 안겨주는 소식을 들었다. 재진이의 죽음이었다. (54)
결국 모처럼의 양대 합가는 1939년에 깨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다시 방랑했고 그 뒤 경주에 한동안 정착했다. (56)
제2장. 이야기 둘 57
1. 터실의 사계 59
* 고향땅 밀양 59 / 터실의 봄 62 / 여름날의 추억 65 / 풍성한 가을 68 / 겨울 아이들 69 / 쥐불놀이와 달맞이 77 /
[밀양 지리지 다음에 나오는 사계절은 매우 잘 묘사한 고향 동네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다.]
“홍다꿍 홍다꿍 이완용이 배때기” (63) [홍다구(洪茶丘, 1244-1291) 고려시대에 원나라에 귀화한 무장. 고려에 들어와 봉주에 둔전총관부를 설치했고 삼별초의 난을 토벌했다. 할애비 홍대순(洪大純) 애비 홍봉원(洪鳳源) 동족을 원나라에 팔아먹은 자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예순둘) 선생이 [밀양] 감내 마을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 점필재 후손이 사는 “계실”이라는 마을 (64)
내일동 성내 사람(조선시대의 성(城)은 왜놈들이 허물어 없앴지만 그 후에도 밀양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81)
2. 밀양의 젖줄 남천강 84
* 영남루와 밀양교 84 / 활천 할매와 영등 할마씨 86 / 아랑의 전설 89 / 남천강의 물놀이 98 / 수박서리 103 / 큰물 107 / 백중 풍경 109 / 천렵과 밤서리 112 / 겨울강 어는 소리 116 /
영등 할마씨와 용두목의 용의 이야기는 밀양 고을의 농민들이 왜놈의 침략에 대해 조직적인 저항을 하여 물리친 사실을 나타낸다. (87)
[아랑의 전설] 사또에게 예쁜 딸, 동옥이 있는데, 관청의 통인이 반해서 딸의 몸종에게 호박 반지를 주고 꼬아서 영남루에 나오게 했다.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통인은 동옥을 칼로 찔러 죽이고 영남루 대나무 밭에 버렸다. 사또는 딸을 찾지 못하고 이임하고, 다음 사또는 오는 쪽쪽 첫날밤에 죽는다. 한 과객이 임금의 명을 받고 사또로 와서 밤에 기다리니 손에 붉은 기를 들고 목에 칼을 꽂은 여인이 나타났다... 주기(朱旗)라 통인을 찾아내 벌을 주었다. 동옥의 이름을 아랑이라 캤다.](91-97)
이들 중에는 [수영을] 아주 잘해서 ‘대미’(물고기를 찍어 잡을 때 쓰는 삼지창)를 가지고 꼬부랑 바우에 붙어 있는 메기와 뱀장어를 찍어올렸다. (99)
참샘물은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나고 물이 따뜻해서 여기에서 냉수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름에는 더워지지 않고 겨울에는 차거워지지 않으며 .. (100)
삼문동의 이른바 뱃다리 건너부터 용두목 앞까지는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밀양초등학교는 이 공동묘지를 깔아뭉개고 터을 잡았다. .. 밀양 아이들 사이에서는 비가 부슬부슬내리면 밀양초등하교에 도깨비가 나오고 변소에는 달걀귀신이 나온다는 말이 무성했다. (102)
[할배의 교육 둘째] “예 사람한테 돌을 던지면 다친다는 걸 알고도 돌을 던져서 잘 못했심더.” “또” “사람이 다쳤으면 당장 잘못했다고 밀고 병원에 댓꼬(데리고) 가야 하는 데..” “그라고 또” “책임 안지고 달아나서 비겁 했심더” “또” “집에 와서 어른께 말씀드리지 안했심더” .. 매를 맞다.... ( 105)
음력으로 7월 보름은 백중날이다. 양력으로 8월 중순쯤되고, 절후는 입추 지나 처서 전이다. (109)
백중날 이후 농촌에서는 하는 일이래야 .. 이때부터 남천강에서는 본격적인 천렵시기가 된다. 주로 여울낚시와 좽이(그물) 던지기였다. (112)
1970년대 고향 친구들과 섬불 밤 밭에 놀러 간적이 있었다. 그곳 사람들에게 밤 얘기를 했더니 지금은 모두 개량종으로 바뀌어 있다고 했다. (114)
3. 사자평의 사람들 119
* 사자바위 가는 길 119 / 아름다운 무릉동 121 / 사명대사 이야기 127 / 호박소의 지킴이 136
125공자는, 학정은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했다. 산 아래의 가난하고 힘 없는 백성이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다가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하여 천신만고 이 사자평으로 와서 평화를 찾았던 것이다. (125)
사명당의 속성은 풍천 임씨(豊川任氏)로 속명은 응규(應奎)이다. 조선 중종 때 밀양 무안면 괴마루골에서 태어났다. (127)
“왜놈 자석들 때려잡는 얘긴데 들어야지” 라고 하자 할매는 / “그런 소리 아무데나 하면 큰일 난다. 그런 소리 하면 안된다이” (133)
사명당의 일본행, 방에 불을 때니, 얼음 빙(氷)를 붙이니 수염에 고드럼이 맺힌 이야기 ... 쇠로된 벌건 철마를 타고 냉(冷)이라 쓰고 말을 타다. (134) [내가 들은 이야기로 말을 타고 병풍을 죽 읽었는데 한자가 빠졌다. 그 자리에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등.. ]
이 비[표충사적비(表忠事蹟碑)]는 조선 영조 18년 임술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그대로 건해져 내려오고 있다. 사람들은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는 이 비가 꼭 땀을 흘린다고 해서 ‘땀나는 비’라고 부른다. (135)
용과 이무기 이야기 .. 이무기놈은 못된 탐관오리들이고 용은 정의로운 장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140)
마구 밀어서 파헤친 산허리를 보고 돌격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은 적진을 공격해 놓은 기분이 들지 모르겠으나 우리 민초들은 어머니땅 조국이 발가벗겨 능욕을 당한 것처럼 처량한 기분이 든다. (141)
옛날 고려시대 밀양 고을 무안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주도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그 후에 삼별초의 유격대오 이 쪽으로 들어와서 몽고 침략자의 앞잡이 관군의 토벌에 대항해서 싸웠다고 한다. (142) [김사미 효심의 난: 고려시대 1193년(명종 23) 김사미(金沙彌)가 농민들을 모아 경상도 운문산(雲門山)을 본거지로 일으킨 반란이다. 김사미의 난 시발은 1190년에 동경(東京:지금의 경주)에서 일어난 남적(南賊)이다. 1196년 고려, 노비 만적의 난.]
제3장. 이야기 셋 143
1. 무너지는 공동체 145
* 모진 바람 145 / 밀양 제이공립심상소학교 150 / 예비검속 155 / 삼성의원 김형달 선생 / 10만의 장례식 인파 160 / 흩어지는 연계소 사람들 165 / 경주 생활 168 / 떡반텡이와 요시노 173 / 할아버지의 대수술 176 / 샘에 빠진 재두 180 / 사나운 시절 185 / 병갑이 형 188 / 출이 아지매 190 / 남양으로 가는 아버지 195
1937년 7월 7일 북경 교외 노구교에서 중국군을 기습하여 전면적인 중일 전쟁을 도발했다. (146)
당시에 ‘노라꾸로’라는 만화 .... 돼지부대 ‘돈꼬로’ ...(147)
제놈들의 총알받이 몸뚱이의 소모가 심해지자 조선 사람의 몸뚱이로 대신하기 위해 지원병 제도를 실시했다. (148)
밀양 고을에서 존경받고 있는 우리 가족공동체에 대한 왜놈들의 이러한 공세는 1939년부터 더욱 거세지시 시작했다. .. 먼저 우리집에 출입하는 사람에 대해 불심검문하고 문을 부라렸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우리집을 고립시키려는 것이었다. 다음은 우리 아버지가 경영하는 사진관을 말려 죽이려고 했다. 사진관 건너편 길가에서 ‘도리우치’(수렵) 모자를 쓰고 콧수염을 기른 놈이 세퍼드 눈깔을 하고서 사진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째보고 있으니 손님이 올 수가 없었다. .. (148) [현재도 친일파는 이런 수법을 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단 한 가지, 할아버지가 경찰서 서장이나 고등계 계장을 만나서 일제통치에 협력하겠다고 서약하고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동포들에게도 일제 통치에 협력하라고 연설하고 다니는 것이다. (148-149)
150-31940년[여덜] 봄 나는 심상(尋常)소학교라고 부르는 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 교육도 내선일체로 한다고 떠들고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면서 우리가 바라지도 않는 간살을 떨었다. (150)
그때는 의무교육제도가 아니라서 지원자를 받아서 선발했다. (151)
[입학전형, 가족과 본인 나이등 신상, 신체검사, 그리고] “이것이 무엇이고?” “소”, 일본말로해보라고 “우시” “참 잘한다. 무어라고 우노?” “움머” 그 선생은 잘했다는 말도 없고 다 되었으니 그냥 나가라고 한다. 끝에 할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끝에 할배는 “빌어먹을 놈, 일본놈 소울음은 ‘모오’라고 안했다고 안 그러나.” 나는 누가 듣건 말건 큰소리로 말했다. “왜놈 소는 조선 소하고 우는 것도 다른강?” 곁에서 이 소리를 듣고 어른들이 껄껄 웃었다. (153)
1학년 입학식 때 여러 가지 책을 받았다. .. 책 첫머리의 기억인데 국어(그때는 일본어가 국어라 했다) 책을 열어보니 첫장에는 일본기가 펄럭이는 그림에 ‘하다’(기旗) ‘히노마루다 하나’(해 동그라니의 기)부터 나왔다. .. 조선어 독본의 첫장은 황소가 한마리 그려놓고 ‘소’라고 씌어 있다. 조선놈은 소처럼 일이나 꾸벅꾸벅하고 말은 하지도 말라는 것인가. (154)‘
왜놈 경찰은 할아버지를 잡아가서는 할아버지가 창씨개명을 안하는 것은 창씨개명 정책을 반대한다는 것이라고 하고, 사상전향서를 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회주의운동과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156)
황용암 선생은 백민 황상규(黃尙奎) 선생의 아들이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를 무력공격하신 약산 김원봉(金元鳳) 장군의 생질이다. (161)
1941 1월 나는 경주로, 겨울방학 후 1월부터 3월까지(제3학기)를 경주로 가서 경주계림공립심상소학교에 전학했다. (166)
[경주에서 학교] 나의 별명은 ‘오리엔트’가 되었다. 이 아이는 창씨한 성이 하라야마(평산, 平山)였고 집에서는 수일이라 불렀다. (172)
할아버지는 “절하지 마라. 아파 누운 어른에게 절하는 법이 아니라. 이리 오너라.” (177)
1941년 여름에는 경주일대에 장티브스가 유행했다. 7월에 방학이 되자 나는 장티브스에 걸리고 말았다. (180)
185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은 몰래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진주만으로 기동함대를 살금살금 기어보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185) [태평양전쟁(Pacific War):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수정은 원판에 생긴 흠도 없애지만 얼굴에 나 있는 흠이나 여드름 등 그밖의 여러 가지 흠이 찍혀나온 것도 없애준다. ...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으로 선본다는 것은 말짱 헛일이라 할 수 있다. (190)
20대에게는 강제지원병제도 .. 30대는 국민 징용령 .. 40대는 보국대... 1943년부터는 학병 1944년 위안부로 (196)
... 왜놈의 마지막 발악 3년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199)
2. 통바우의 할아버지들 200
* 통바우 200 / 고조부와 이씨 할매 202 / 영감 할배 204 / 증조부와 선비 할매 207 / 참위 할배 210 / 이덤 할배 215 / 한목 할배 218 / 나의 할배 221/ 할배 할매들 232
우리집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약 520년 전 조선 성종때에 영남 함안에서 대대로 살다가, 18eoi조 할아버지가 밀양으로 이거하여 금포라는 동네에 정착했다. (200)
지금부터 170년전이었고 고향에서는 우리집안을 ‘통바우’ 안씨라고 부른다. (201)
5대조 증조 할아버지는 자신의 호를 계엄(溪广)이라 짓고 .. 계엄처사로고 불렀다. (201)
202고조 할아버지는 삼형제 중 믿이가 나의 고조부이다. 석엄(石广)이고, 이름은 안종철(安鍾哲)이다. (220) 그 동생 석하(石下) 안종덕(安鍾悳)이라...
증조부의 둘째 할아버지 .. 안봉수(安鳳洙).. 1902년 대한제국무관학교 졸업... 시위연대 보병참위로 임관했다. (210)
증조부 삼형제 중 끝에 할아버지는 모두 한목 할아버지라 불렀다... (218)..
221나의 할아버지는 큰집 장손으로 6대째의 장손이니 나는 8대째 장손이다. (221)
안병희(安秉禧 1890-1953).. 호를 일컬어 우정(于正) 선생이라 불렀다. (222)
1906년 그때 나이 열일곱이었는데,. 노비문서를 꺼내어 태웠다. .. 왜놈 이발관에 들어가 왜놈 주인을 보고 상투를 자르고, 개화머리를 해달라고 했더니... (225)
집안의 장손이 개화 바람이 나서 머리를 깎고 달아났으니 당시로서는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 큰할아버지는 .. 아침마다 하시던 사당 참배를 화가 진정되는 날까지 못하셨다고 한다. (226)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공부하시다가 1910년 국권이 왜놈들에게 침탈되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일단 포기하고 고양에 오셨다. 이때 할아버지는 아마 기독교 신자였던 것 같다. (226)
할아버지는 선교사들이 총독부에 들락거리고. .. 아마 그러고는 예배당에 발걸음을 끊었는갑더라. (228)
당시에는 조국 광복운동은 청년들의 실력양성에 달렸다고 하면서 ... ‘초동학교’라는 이름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229)
할아버지는 1920년대 서대문 근처의 한 회관을 빌려 ‘조선노동학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노동자들을 혁명전사, 해방전사로 키워내어 투쟁의 일선에 나서게 했다. .. 나중에 노동학원은 할아버지가 ‘적박단’(赤雹團)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징역을 살게 되어 저절로 폐쇄되고 말았다. (230) [할배는 사회주의 운동도 했구먼 .. (47NMB) ]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자, 할아버지는 한때 그 산하에서 청년교양 사업을 했다. .. “당시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살마들은 반드시 어떤 파벌에 속해야 당사업을 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 이처럼 처음부터 여러 파벌이 모여 당을 만들었는데 모두 다 헤게모니는 자기 파가 쥐어야 한다면서 기를 쓰고 설치면서 서로 쥐어 뜯고 싸웠다. ... 공산주의 운동가는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꼈다.”(230).
종파하다가 밀정인 줄도 모르고 모두 제편으로 끌어들이려고만 했으니 명색이 당이지 그 안에는 밀정이 우글우글했다. (231)
끝에 할배 .. 끝에 할매는 소박맞았다... .. 친정집에 살았는데 집안의 제사 때 그리고 잔치, 초상 때는 곡 오셔서 며느리의 본분을 다했다. 옛날 법이란 게 참 이상도 했지.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친정도 시집도 그 매듭을 풀지 못했고 부부 당사자도 풀지 못했다. (237)
3. 그래도 너는 조선 사람 238
* 다시 밀양집으로 238 / 공출 소동 243 / 이잡기 250 / 학생들의 근로동원 256 / 정신대와 새아재 263 / 족보 편집 269
1942년의 여름은 그냥 덥기보다 바로 불이었다. (238)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왜놈들은 1942년 5.6월까지만 해도 승승장구하여 판도를 한껏 넓혔지만, ... (243)
팔에 한자로 국민총력이라소 쓴 완장을 팔에 두른 ‘조선 왜놈’ 몇놈이 와서 .. “우리는 국민총력연맹 밀양지부에서 나왔소.” .. “우리집에 있는 유기는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기명으로 대물립해서 내려오는 것이오. ...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게 못가지고 가게 할 힘이 없소. 그 유기들은 저기 뒤주 안에 있소. 가지고 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하고선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244)
특별배급을 받으려면 전시시국에 대해 당국에 협력할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사상전향서’를 써서 ‘황국신민’이 되겠다는 맹세를 하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냥 일어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249)
‘개뚜뱅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개뚜뱅이는 커다란 놋그릇 두껑인데 그릇 뚜껑으로만 쓰이지만 다른 그릇을 담거나 음식을 퍼담기도 해서 두루 쓰이기에 이리저리 부딪혀 ‘쨍그랑 땡그랑’ 소리가 요란하다. (256)
1943년 가을부터 이상한 소리가 자주 들린다. 처자를 잡아간다는 소리였다. .. ‘처자 공출’ .. (263)
고모 .. 밀성 손씨집으로 시집가다. (264)
1944년 8월부터 조선 처녀들에게 전면적으로 정신대 동원을 실시한다고 공포했다.(268)
1943년 [5월 29일 알류산 열도] 아쯔 섬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약 3.000명이 미국의 공격으로 전멸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69)
태만공 할아버지는 ..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무오사화에 화를 입지 않은 것은 김종직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벼슬길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73-274)
[안여경(安餘慶) 1538(중종 33)∼1592(선조 25).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계(善繼). 호는 옥천(玉川). 아버지는 하양훈도(河陽訓導) 응운(應雲)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 1570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안숙(安璹, 1572∼1624) 낙원(樂園)은 사맹공파. 동만(東巒)은 그 아들 안상한(安翔漢, 1604-1661)공의 호이다. /그는 이이첨과 정인홍과 섞이지 않았다고 한다. ]
족보는 1944년 봄에 인쇄되어 완료되었다. 표지는 붉은 색으로 된 조선종이에 목판으로 찍은 것이다. 두툼하고 큼직한 책이었다. 책표지의 붉은 빛깔은 할아버지가 나에게 ‘누가 뭐래도 너는 조선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할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난 바로 그 불그스레한 빛깔이다. .. / 나는 집안이 무엇인지 겨레가 무엇인지 나라가 무엇인지 딱히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선조들이 집안과 겨레 그리고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살아왔다는 것, 지로를 중히 여겨 함부로 굽히지 않았다는 것 등을 배우면서 나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뜻있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84)
4. 그날이여 어서 오라 286
* 전쟁 그리고 굶주림 286 / 악질 선생 호시노 292 / 다섯 동무 296 / 독립군 이야기 301 / 짐이 뜻밖에 방귀를 뀌었다 305 / 해방전야 310 / 조선독립 만세 317
[1943년 2월 9일 과달카날 전투(the Battle of Guadalcanal): 1942년 8월 7일부터 1943년 2월 9일까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일어났던 전투이다. 이 회전은 육해공 모두에서 일본군과 연합군이 싸웠으며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인 회전이었다. 전투는 남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 근처에서 벌어졌으며 일본 제국에 대한 연합군의 첫 번째 공세였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1884-1943)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다. 4월 18일 솔로몬 제도의 부건빌 섬 시찰 중 미국의 공격으로 사망한다. ]
있지도 않은 전투의 결과를 조작해서 발표했다. 이른바 ‘다이홍에이핫뾰(大本營發表)라는 것이다. (286)
1944년 2월부터 전면적으로 강제징요이 실시되었다. 징병 적령기를 넘어선 40세까지의 남자는 신체장애자를 제외하고 총동원을 했다.(287)
5학년이 되자 새담임선생은 호시노였다. 별명이 도사껭으로 늘 ‘시나이’[죽도]를 들고 다니면서 아이들을 마구 팼다. (292)
[할배의 셋째교육] / [학교에서 조선 말한다고 누가 일러바쳐, 호시노에게 매 맞다가] 그냥 내뺐다. 뒤로 돌아보면서 일본말로 “고노 이누 꼬로노 야쯔. 보꾸가 오오기꾸 낫따라 고로시데 시마우까라 간넹시로(이 개자식이, 내가 크면 죽여버릴 테다. 그리 알고 기다려라)” .../... [할아버지] “이놈아 달아나려거든 좀 더 일찍 달아나지. 이토록 맞고 달아나?” 하시면서 “학교에 안 가지는 왜 안가! 그 놈이 때리거든 이제는 한 차리(한대)도 맞지 말고 날아나거라. 모질고 독한 놈이, 일 저질 놈이다. 아마 내일 학교에 가면 그 놈은 또 때리지 못할 거다.”
학교에 갔더니 동무들이 내가 학교에 온 것을 보고 놀랐다. .. 다시 붙을 일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 첫시간 호시노가 교실에 들어왔다. 호시노는 쓰윽 한 번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눈치더니 그만 모르는 체했다./ ... 그 뒤 학교에서 동무들과 조선말을 해도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296)
파리똥, 평팔이, 매랭이, 개병쟁이, 개뚜뱅이, 세 살위 평팔이, 두 살위 파리똥, 매랭이와 개병쟁이는 한 살위이다. ... 매랭이 부모는 친일 유지이고 ‘국민총력연맹’지부의 간부.. (298)
[의혈단 김원봉 장군 제삿날 다녀간 이야기] 김원뵝이는 집안 식구들에게 ‘내가 왔는거 봤다는 애기만 안하면 된다’고 말하고는 도술을 부렸는데 그만 한 마리 땡삐(땅벌의 밀양 사투리)가 돼 부릿는기라. 왜놈이 육혈포를 들고 문을 벌컥 열었더니 그만 땡삐가 '왱‘하면서 밖으로 날아가 버렸제. (303)
“ .. 백두산에서는 김일성 장군이 축지법을 해서 동에 뻔쩍 서에 뻔쩍하고 솔 잎사귀가 모두 총알이 되고 갈방잎사귀(갈잎사귀)가 모두 독립군이 된다 카는 소문이고, 수만 왜놈들을 족쳤다는데 너그 그말 들어봤나?” / “응 그런 얘기는 벌써 하더만” / “그런데 그 많은 독립군은 다 어디 갔노?” / “지금 그 독립군이 둔갑술을 배워갖고 백두산에서 다 내려와 깊은 산 속에 숨어 있다 카더라. 숨어 있다가 천기(天機)를 뵈서 한꺼번에 나와 왜놈들을 모조리 요정내고 조선나라를 맹근다 카더라.” (303) [박씨전의 20세기 버전이다.]
[밀성 손씨의 손장군 이야기..] 옛날 왜놈을 물리친 이야기.. 밤중에 수박 따러가서 방망이로 깨부수는 이야기... 왜놈 머리를 박살낸 설화 (304) / [이순신의 설화에 병사에게 밤중에 술을 마시고 놀개 하면서 배 난간을 칼로서 장단을 맞추게 했는데 다음날 배안에 손가락이 가득하더라... ]
수백 명 군중이 앞으로 나가고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모두 함께 어울렸다. 나와 개병쟁이 그리고 평팔이와 파리똥, 넷은 어깨동무를 하고 목이 쉬도록 만세를 불렀다. / 만세소리와 농악소리는 어우러져 조선의 하늘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325)
아침 조회에서, ‘가미노 구니데 아아루’(신의 나라이다)가 나올 것을 알고 ... 아이들이 들을 만한 소리로 ‘가미노 쿠소데 아아루’(신은 똥이다)라고 달아 준다. ...(306) // .. 파리똥이 방귀를 뀌다. .. 개병장이가 “징가 오모와즈 해오 다시사”(짐이 뜻밖에 방귀를 뀌었다) 교장이 “징 오모오니 와가 고오소 고오소”라고 읽는 소리와 꼭 맞게 나왔다. ... ‘너희들 신민들은 구린내가 날 것이다. 인고 단련이니 참고 견디어라’ (307-308)
“교장 선생님이 황공하온 칙어를 읽고 있는데 누가 웃었는지 웃은 사람은 정직하게 나왓!” .. 제일 먼저 평팔이가 나갔다. .. “왜 웃었는지 말해보라” 후끼가 묻자. 이번에는 내가 나서서 말했다. “... 방귀가 .. 오모와즈(뜻밖에) 나왔습니다.” ... 참다가 나오는 쿡쿡 웃으이 아니라 그냥 소리 내어 ‘하하하’웃었다. (309) .
8.15 해방 후 폭로된 일이지만 왜놈들은 연합군이 상륙하기 직전에 조선의 모든 애국역량을 말살하기 위하여 약 4만명의 학살대상자들 정해놓았다고 한다. 8월 중순부터 예비검속을 해두었다가 적당한 시기에 모두 그들의 용어로 ‘처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316-317)
“면소에 라지오(라디오)를 듣는데 잡음이 심해서 똑똑히 다 듣지 못하겠더라... 듣디 못해오 슈우셍(종전終戰)한다는 소리는 모두 들었다. (318-319)
이튿날(8월 16일) .. 거리가 조용하기만 했다. .. 할배 오신다. “우리 할배가 곧 오신다고 하더라. 여기서[집] 기다릴 란다.” 라고 했더니 개병장이 웃으면서 “너그 할배가 온다고 공회당에서 모두 기다리고 있는데, 오실 때 바로 그쪽으로 오실끼다. 이 자석아, 어서 가자.” (321) [종전 소식을 듣고 저항 운동의 움직임은 재빨랐던 것 같다. 밀양에서도 마지막에 어디론가 숨어 있던 할배가 16일에 바로 등장하는 것이다. (47NMC)]
할배의 군중연설 “여러분! 밀양의 우리 동포 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습니까. 이제 왜놈들은 연합국에 항복했고 우리는 왜놈들의 종살이에서 벗어났습니다. 왜놈들은 연합국 지도다들이 결정한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습닏.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지도자들은 조선은 독립된다고 약속을 했고, 포츠담선언은 이 세 나라 지도자들이 결정한 카이로 선언을 소련의 지도자도 포함해서 네나라의 지도자들이 다시 확인하고 일본에다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것입니다. 어제 일황 유인이 라지오에서 우는 소리로....” (323) [지방의 저항운동가들도 45년 7월 26일 포츠담회담을 내용을 알았다면, 전국적인 조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47NMC)]
수백 명 군중이 앞으로 나가고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모두 함께 어울렸다. 나와 개병쟁이 그리고 평팔이와 파리똥, 넷은 어깨동무를 하고 목이 쉬도록 만세를 불렀다. / 만세소리와 농악소리는 어우러져 조선의 하늘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325)
(47N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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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가(54VLE)
책1933안재구2013끝나지
안재구(1933-2020): 끝나지 않은 길(2013, 두권)
물밤 추천 0 조회 390 20.07.08 12:12 - (옮김 54LMI)
오늘 7월 8일, 새벽 별세 하셨다.
안재구: 끝나지 않은 길 1: 가짜 해방 / 끝나지 않은 길 2: 찢어진 산하 (2013)
<마실에서 천이틀밤의 글이지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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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길 1: 가짜 해방 통일운동가 수학자 안재구의 어떤 현대사,
끝나지 않은 길 2: 찢어진 산하 통일운동가 수학자 안재구의 어떤 현대사,
안재구, 내일을여는책, 2013, 제1권(500), 제2권(434)
- 안재구(安在求, 1933) 경북대 수학과 교수, 숙명대 교수. 남민전 중앙위원.
안 선생은 친가와 외가 모두가 명문가이다. 친가는 밀양에서 항일운동 투사이고, 외가는 대구 부근의 구지에서 사는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후손이다. 해방 정국에서 친가는 좌파의 지역 지도자이고 외가는 우파로서 대구지역 중심인물이었다. 가족사 자체가 역사의 경과와 맞물려가는 과정이라, 민족통일 운동가로서 성장하였고, 남조민족민주해방전선에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서 행동하는 토양이 내재해 있었다. 나는 안 선생이 일찍이 수학에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여 혼자서 공부했다는 점에 놀랐다. 가족사에 비추어 선생의 삶에 숙명과 같은 것이 내재해 있으며, 그래서 민족 민중 해방으로 길로 가야할 운명으로 보인다. 그 길을 회피하지 않고 감내하면서 갈 수 있다는 용기와 투지는 본받을 만하다.
이 책은 부제가 알려주듯이 1945년 해방은 우리의 해방이 아니라 가짜 해방이며, 미군정이 우리를 그들의 그물에 옭아매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서툴렀으면서 집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서툰 수를 받아칠 수 있는데도, 우리의 인재들은 그것을 잘 해독하지 못했다. 이익에 눈먼 자들이 많았고, 게다가 일제 부역(부일) 잔제들이 살려고 발버둥 치면서 미국의 이익과 맞아 들어간 것이다. 결국 통일을 염원한 인민들의 요구는 이권정치의 야바위놀음에 휩쓸렸다. 정의도 자유도 미제국주의 형상논리에 말려들었다. 미제의 등을 엎은 종교가 우리 문화를 잠식하고 갈아엎고 자본주의 식민지 토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46W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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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 폭압으로 산으로 들어간 저항자들의 이야기는 이병주의 지리산에 나와 있다. 이 지리산이 3년 전쟁 동안에 유격대의 활동이 있었다. 이 유격대를 이현상(남도부)의 남부군이기도 하다. 알려진 바로는 박현채 선생이 1950년(16살)의 나이로 빨치산 소년돌격부대 문화부 중대장으로서 지리산과 백아산 일대를 활동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안재구 선생은 경남 천황산(天皇山)을 중심으로 가지산(伽智山)가 운문산(雲門山)에서 야산대(野山隊) 훈련을 하고 군당과 면당을 잇는 레포활동을 하였다. 두 분다, 우여곡절 끝에, 한분은 경제학으로 다른 한분은 수학으로 학문의 한분야를 성취하기도 했다. 현대사의 소용돌이에서 전자는 일차인혁당에 후자는 남민전에 연관 있다.
두 권으로 된 이 책 끝나지 않은 길 1, 2는 1945년 8.15에서부터 195년 전쟁에 이르기까지 가족사와 더불어 서술했다. 친가의 항일운동경력으로 좌파로, 외가의 오랜 전통의 가문으로 우파로 나설 수 밖에 없는 가족사는 현대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현실적으로는 인민자치의 역량을 짓밟은 미군정의 행태가 인민의 공분을 일으키나, 권력의 부나비들이 일제보다더 교활해져 자기 인민들 찢고 부순다. 밀양이라는 작은 도시를 중심으로 서술하면서도 한반도의 전체를 아우르는 조망을 할 수 있게 한다.
8.15 해방,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 1945년 인민대회, 1946년 대구 시월항쟁, 어린 나이에 1947(14살) 5월 1일 노동절 대회 참여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구금, 1947 7월 19일 여운형은 백의사에 의해 저격, 1948(15살) 밀양에서 2.7구국투쟁(단선반대투쟁)에 참가, 1948년 2월말 신덕생이란 이름으로 야산대 훈련, 1948년 제주도 4.3항쟁, 1948년 7월부터 최덕출이란 이름으로 레포활동,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사건(麗水順天事件)은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제주도 4·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 1949년 4월 8일 조직선이 끊어지고 외가로, 1949(16살)년 6월 초등교원 준교사 시험에 합격, 1949년 6월 보도연맹(保導聯盟)은 비극의 서막,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 살해 사건,. 1950(17살) 6.25 남북 전쟁, 1950년 7월 4일 불문곡직 검거당함과 풀림, 그리고 나서 도피와 교원으로 복직, 그리고 1952년 9월 1일 경북대학교 수학과 입학으로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1960년 3.15부정선거로 일어난 청년학생들의 의거에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남민전 중앙위원으로, 그리고 그는 이 나이(여든살)에도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이 책의 출판 기념은 서강대에서 열렸다. (46W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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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길 1: 가짜 해방 / 끝나지 않은 길 2: 찢어진 산하
안재구, 내일을여는책, 2013, 제1권(500), 제2권(434)
- 안재구(安在求, 1933)
목차
제1권 (500쪽)
... (이하는 파일참조 -54V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