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신상옥 감독의이 만든 영화 '상록수'입니다.
그의 영화 포스터를 2007년 8월에 나온 그의 책 '난 영화였다'에서 나온것입니다.
영어로 만들어진 포스터로 봐서 해외에 출품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의 그 모습도 함께 올린다.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상록수'와 '쌀'
근년에 와서 알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상록수'의 제작 시기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주창한 이후에 정부 지원을 받아서 만들어진 줄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상록수'는 5.16이 나던 해인 1961년에 개봉되었고 새마을운동은 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1970년도에서야 시작되었다. 다들 알겠지만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 현상 공모에 당선된 심훈의 장편소설이다. 내용은 피폐한 농촌을 살리고 계몽하기 위해 뛰어든 젊은이들 이야기인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960년대의 농촌 역시 별다른 발전이 없는 상태였다. 나는 오직 영화만을 생각하는 영화 한길주의자(?)지만 '개발도상국의 영화 예술가들은 30퍼센트 정도는 현실 기여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왔고 지금도 그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영화에는 흥미를 넘어선 인간 승리, 정의, 사필귀정 등의 당위적인 진리가 살아 있어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정말 순수한 심정으로 만든 것이 '상록수'다. 이런 열정이 관객들에게도 전달되었는지 이 영화는 사회적으로 큰 파급 효과를 일으키면서 후일 일어난 새마을운동에도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동하여 농민운동을 시작했다는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는 이 작품의 주인공처럼 살아야겠다고 너무 노력을 하다가 숨진 여성 농민운동가까지 있었다. 16미리로 대량 카피를 해서 전국적으로 돌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본 작품이기도 하다.
▲ 동아일보 61.9.24일자 영화평
'신 감독은 문학을 좋아해서 늘 소설책을 끼고 다녔고,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책을 늘 쌓아 놓고 읽었다. 신 감독 영화의 바탕은 문학이고, 거기서 출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문예작품 중의 하나가 심훈의 실화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상록수'이다.
같이 출연한 배우로는 신영균. 허장강. 도금봉. 신성일. 한은진. 윤일봉씨 등이다. 일제시대에 젊은 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농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하는 이야기다. 나는 신여성 최용신 역(실명은 채용신)을 맡았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작업이었다. 일제시대 학생운동과 그 시대 여학생들의 복장 등에 대한 고증은 필수였고, 농민들과 더불어 고생스럽게 생활하며 오로지 민족을 살리기 위해 애쓰던 학생들의 정신을 표현하는 일도 중요했다. 가난에 찌든 생활상을 표현하기 위해 멀쩡한 옷을 돌바닥에 짓이겨 누더기로 만들거나, 농가에 새 옷을 가져다주고 낡은 옷으로 바꿔 오기도 하면서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이 영화로 나는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신영균도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다. 몇년 전 미국의 모마(현대미술관)에서 '신상옥 감독 회고전'을 했을 때 '상록수'도 상영
되었다. 그때 불란서 라고시에 영화제에 소개하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영화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옛날 가장 못살고 발전되지 못한 농가의 이야기여서 요즘 같은 시대에 반응이 어떨까 했는데, 의외로 호평을 받았다. 그들도 이 영화처럼 국가적인 가난을 겪어 봤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다면서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다. '상록수'는 2005년에 부산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1960년대엔 '상록수'가 우리들에게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일제 때 고생스럽던 시기를 경험한 관객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상록수'를 보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새마을운동을 구상했다는 말이 들리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신 감독과 나에게 큰 관심을 보이며 자주 만찬에 초대했다. 그때 나는 육영수 여사와 친분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 촬영 때문에 참석 못할 때도 많았다. 영화 스케줄이란 여러 배우들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약속된 시간이 어긋나면 다시 스케줄을 잡기까지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그래서 한 번 펑크가 나면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세간에서는 김종필 총리와 신 감독이 많이 닯았다고 해서 서로 친근감을 느껴 만나고 싶어했다. 한번은 김종필씨가 우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러나 마침 밤 촬영 스케줄 때문에 초대에 응하지 못해서 하마터면 괘씸죄에 걸릴 뻔했다. 얼마 후 다시 초대를 받았을 때는 또 거절할 수가 없어서 우리는 스케줄을 취소하고 저녁 대접을 받았다. 정말 김종필씨와 신 감독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김종필씨는 그림을 직접 그리는 등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 신
감독을 도와주려고 했다. 당시 한국일보 사장이며 부총리였던 장기영씨와 함께 우리가 안양촬영소와 허리우드극장을 인수하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다. 안양촬영소가 생기면서 영화를 대량으로 양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기도 했다.'
제1회 대종상 수상작 및 수상자(1962년)
우수작품상-연산군(신필림)
감독상-신상옥(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남우주연상-신영균(연산군)
영우주연상-최은희(상록수)
공로상-신필림(상록수)
첫댓글 상록수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