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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꿰맞춰진 쓰레이. 훼손방지는 물론 도난범 때문에 접근을 제한할 정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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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96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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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성채라는 이름을 갖게할 정도로 핑크빛 사원과 연꽃의 조화가 일품 |
④내벽과 해자 : 제2 외벽의 동문을 통과하면 '여인들의 성채'라는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운 정경이 펼쳐진다. | |||
편 쉬바 신 곁에 바싹 다가가 어깨에 기댄 채 떨고 있는 모습, 그리고 쉬바신이 발가락으로 가볍게 카일라사 산을 눌러 건방진 라바나를 짓눌러 버리는 장면, 교만함을 깨닫은 라바나가 1천년 동안 쉬바를 찬양하는 항복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서쪽문 상인방 :
⑥성소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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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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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이 가는 길 |
쁘놈 꿀렌 (Phnom Kulen) 일대 지도위치보기 |
▷위치 시엠립에서 북동쪽으로 30km ▷개요 프놈은 크메르어로 산, 꿀렌 산은 크메르 왕조가 탄생된 신성한 곳이다. 서기 802년 첸라국의 왕자 자야바르만 2세가 이곳에서 모국인 쟈바에서 독립하여 크메르 왕조를 건국함을 선서했다. 당시 이 산은 마헨드라파르바타(Mahendraparvata, 마헨드라 산)이라 불리웠다. 산속이라 양식의 조달이 어려워 하리하랄리야(현재의 롤루오스)로 옮길 때까지 초기 크메르의 도읍지였다. ▷볼거리: ◎폭포 : 일천개 링가의 강에서 흐르는 물길은 15m 높이의 폭포를 이루며 떨어진다. 힘들 게 찾아온 관광객에게 시원한 그늘과 땀을 씻게하는 곳이면서 크메르 들판을 적셔 비옥한 옥토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
※꿀렌 산 일대를 다녀오지 못해 자료와 방문자의 소감을 근거로 기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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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위치 톤시엠립에서 16km 남쪽, 톤레삽 호수 북쪽끝, 137m 높이의 산 위에 호수를 내려다보며 위치. 개요 : 힌두교의 3대 주신인 파괴의 신 쉬바, 창조의 신 브라흐마 그리고 질서 유지의 신 비쉬누에게 바쳐진 사원이다. 야소바르만 1세는 드넓은 평원의 영토 중에서 높은 언덕이나 산을 골라 사원을 짓길 좋아했으며 그의 치세에 지은 3개(바켕, 프놈 복, 프놈 끄롬)의 산상 사원 3개의 언덕위 사원 중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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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9세기 말~10세기초 위 치 "프놈"이란 산 또는 언덕 등 고지대를 의미. 앙코르와트(1.3km)와 앙코르톰(400m) 중간에 위치한 높이 67m의 바켕 산 위에 선 사원 개 요 크메르 왕국 초기, 야소바르만 1세가 외적의 침범에 대비한 강력한 수도를 원하여 롤루오스를 버리고 이곳 앙코르 지역의 바켕 산을 둘러 새수도 야소다라푸라(Yasodharapura)를 건설하여 천도한 이래, 수도의 중심에 솟은 바켕 산에 신전을 지어 쉬바 신에게 헌납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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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지역을 최초의 앙코르라 불리우며 최초로 신에게 이 신전은 앙코르 지역에 최초로 건설된 사원이란 점에서 의미롭다. 그 중심에 우뚝 솟은 바켕 신전의 위용은 당시의 새 수도의 위엄을 엿보게 하지만 지금은 바켕 신전 만이 남아 옛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신전은 힌두교의 쉬바 신에게 바쳐진 것으로 상층에 쉬바의 상징인 링가(男根)가 모셔져 있다. 신전은 초기 앙코르 양식이여서 바켕 산에서 나는 사암 바위를 잘라서(동북쪽과 남동쪽 코너에 돌을 자른 흔적이 남아 있다) 쌓은 단순한 석탑 구조의 사원이지만 기단과 최상단을 비롯 5단 구조의 층을 층층히 쌓아 메루산을 상징케 하는 바켕 양식의 기원이 된 사원인 만큼 장엄함이 물씬 풍긴다 감 상 : 종일 유적지 감상에 지친 이들에게는 섬세한 부조는 없지만 무덤덤하게 쌓은 석탑들이 외려 부담감을 덜어주는 듯하다. 관광객이 꼭 들리는 곳인데 드넓은 평원과 밀림 속에 우뚝 솟은 산이여서 사방이 탁 트여 전경 감상에 그만이다. 무엇보다 고지대여서 일출과 일몰 감상에 최적이고 특히나 일몰 시에는 다투어 올라와 왕국의 영광을 비추던 태양이 하루 일정을 끝내고 밀림 속으로 지는 모습을 감상하며 우리들 역시 지친 일정을 마무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1.계단 제1단은 가로세로 각 76m의 정사각형이며 최상층까지의 높이는 13m, 탑의 갯수는 총 109개로서 108개 크고작은 첨답들이 | |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중앙성소탑을 호위하듯 서 있었다고 당시 크메르에서 이보다 더 크고 화려한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탑들은 유실되었으나 그래도 정경은 장엄하다. 하단에 총 44개의 석탑이 휘두르는데 동쪽과 서쪽에는 12개씩의 탑들이, 남쪽과 북쪽에는 10개씩의 탑들이 있다. 1단에서 5단에는 총 12열의 60개의 작은 석탑이, 그리고 최상층에는 동서남북 총 4개의 석탑이 중앙성소탑을 호위하는 구조이다. 프놈 바켕의 성소는 마치 천문대와도 같으며 농업이 주업인 크메르에서 태음력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듯 특이하게 천문학이 도입되어 있다. 1단에서 5단까지의 각단에 12개씩의 탑 배열은 십이궁도(서양의 별자리로서 1세기에 그리스에서 인도에 유입, 동남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다)를 의미한다.
한 방향에 4열 배열로 한 것은 달의 4번의 변화(초생달, 그뭄달, 보름달, 반달)을 의미하며 108개의 탑수는 그 4번의 변화에 27일을 곱한 것이며 각 사이드에서 보면 33개의 탑들만 보이게 배열한 것은 힌두 신화에 등장하는 33명의 신을 의미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의미의 종결은 신이며 중앙성소의 문에도 33인의 신의 두상을 새기고, 성소에는 최고신인 쉬바의 상징(링가)를 모심으로서 신전은 완벽하게 의미를 형상화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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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정경 감상 지도에도 표시해뒀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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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드넓은 서바라이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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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라삿 끄라반 (Prasat Kravan) 지도 위치보기 | ||
▲프라삿 크라반은 요거뿐. 지도를 그릴 필요가 없이 간결하다 ▲황색 가사의 스님들과 붉은 사원의 조화도 아름답다 ▼크라반의 부조들. 색이 바래어 잘 알아보기 어렵다. |
▷건축시기 : 921년 형태 : 기존에 보는 앙코르의 사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몇 안되는 계단과 오픈된 단층 기단이 해자를 형성하는 간결한 디자인으로, 남북으로 길게 오픈된 기단 위에 일렬로 선 타 탑들이 우아함을 뽐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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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을깍아 장식했으며 문은 모두 나란히 동쪽을 향해 열려 있다. ①중앙성소탑 : 가운데의 탑으로 사방 탁 트인 공간에 사암으로 쌓은 8각형 탑이다. 내부에는 쉬바 신의 상징인 링가(성기모양의 돌)가 모셔져 있고 문틀에는 "921년에 내부에 비쉬누 신상을 새웠다"는 기념비문이 새겨져있다. 탑 동쪽면에는 수문장이 새겨있고 벽감에는 갈메기살 무늬를, 벽 기둥에는 형상을, 문틀에는 작은 두상을 새겨 넣었다. 탑 왼편에는 팔이 4개 달린 비쉬누 신이 그의 상징물인 법라패(고둥형상), 법륜(바퀴모양으로 우주 회전과 질서를 의미), 그리고 곤봉과 공을 든채 스스로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신임을 알리며 우주를 향해 세 발자국 내딛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그의 한쪽 발이 기단에 올려져 있다 그 옆에는 명상 중인 사람과 비쉬누의 아내 락쉬미 여신을 잡고 연꽃 위를 걷는 사람이 있으며 그 뒤편으로는 대양에 물결치는 파도를 의미하는 물결모양 배경으로 새겼다. 오른편에는 비쉬누 신이 가루다(독수리)를 탄 채 두 명의 신도 사이에 서 있다. 또 팔이 여덟 개 달린 비쉬누 신이 6명의 명상 중인 신도들 사이에 서 있으며 거대한 도마뱀이 위쪽으로 기어올라가고 있다. 사실 이들 부조는 부조 위에 석회칠을 하여 채색한 것이라 지금은 색이 바래어 내용을 잘 알아보기 어렵다. ②남쪽탑 : 내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문 바깥쪽 상인방에 가루다(독수리)를 탄 비쉬누 신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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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라삿 수오르 쁘랏(Prasat Suor Prat) 지도 위치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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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위치 코끼리/문둥왕 테라스 맞은편, 끌리앙 사이의 평지에 길게 나열. |
관광 코끼리/문둥왕 테라스 중앙에서 승리의 문쪽으로 쪼옥 곧게 난 도로 건너편, 숲을 배경으로 넓은 평지에 선 건물들이라 눈짐작으로 찾아도 된다.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일본 고고학팀의 지원으로 장기 복구 중이라 건물은 작업대로 뒤덮혀 있고 내부 관람도 불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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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명칭 : 크메르 어로 쁘레아는 "신성함" , 칸은 "칼", 즉 "신성한 칼"이란 뜻이다. 이 명칭은 전설과 비문에 의해 전해 온다. 자야바르만 7세 시절 챰족(중부 베트남 지역)의 대대적인 침공을 맞아 전쟁을 치루던 시기에 건립되었다. 현대에 발굴된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당시 샴어(태국어)로 나가라쟈아크리(Nagarajayakri)라 불리웠다고 하는데 크메르어로 번역하면 "쁘레아 칸의 도시"라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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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의하면 크메르왕조의 시조인 자야바르만 2세가 왕조를 연 뒤 후계자인 왕자에게 국가의 위기를 지켜주는 신검을 물려주었고 자야바르만 7세가 챰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그 신검을 이 사원에 모셔왔다고 한다 감상 먼저, 벽 : 쁘레아칸은 4겹의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다. 제1외벽은 해자를 형성하고 있는데 아마도 종교적 의미보다는 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는 거의 밀림화되어 버렸다. 당시 승려들이나 참배객들의 거처가 제1외벽 인근에 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동쪽 탑문쪽 외벽에는 비쉬누 신이 타고 다니는 천상의 영물 독수리 가루다(독수리)와 물의 정령 나가(뱀)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신성한 쁘레아 칸을 둘러싼 하늘과 물과 땅을 통틀어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의미한다. 중앙 사원을 에워싼 2 겹의 내벽에는 수많은 부처상이 벽감 형태로 새겨져 쁘레아칸의 신성함을 더해준다. 관광객에게 오픈하면서부터 서쪽문을 주출입구로 사용한다. 길에서부터 서쪽 탑문까지 좀 걸어가면 석상들이 나열된 보도를 만난다. 이어 아래쪽에 불상이 새겨졌던(힌두교 시절 교체) 거대한 석등을 선두로 유해교반(우유바다 휘젖기) 다리가 해자를 형성한다. 이런 해자의 모습은 앙코르톰의 (남)성문과 흡사한데 이것은 쁘레아 칸이 왕궁으로 사용되면서 도입된 대표적인 왕궁 건축 양식이다. 바수키(뱀)의 긴 몸통을 잡고 1천년동안 영생의 약을 얻기 위해 열심히 휘젖는 신들(왼편)과 악마(오른편)의 행렬을 지나면 드디어 서쪽 탑문. |
난 문에만 적용된 걸로 봐서 쁘레아 칸도 왕 자신이 거처로 사용했기에 적용한 게 아닌가 한다. 이러한 왕궁 표현은 탑문 앞의 뱀을 쥔 거상(巨像)들도 마찬가지. <신전에서 헤매다...> 위와 같은 이유로 갑자기 설명의 순서는 동쪽관문으로 바뀐다. 나무에 매혹되어 사진촬영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만 동쪽 탑문에서부터 제대로 돌아보고 가자. 무희들의 홀/광장 : 동쪽 탑문을 들어서면 드넓은 광장 잔해가 맞이한다. 이쪽은 원래의 모습을 다 갖추면 얼마나 멋있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4개의 드넓은 직사각형 공간(소광장)을 끼고 난 광장에서 기둥으로 떠받혀진 회랑 형태의 건물 잔해가 성소쪽으로 인도하는데 이 방은 무희들의 홀이라 불린다. 물론 잔해의 상인방, 벽면 등에 새겨진 압사라(춤추는 천녀들) 부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궁중 연회가 개최되거나 사원에 제사를 드리거나 봉헌식을 할때 무희들이 이곳에서 춤을 추어 분위기를 돋우고 축하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압사라들이 그려진 이 홀의 대형 상인방(문틀위)은 공사 실수로 무너졌다. 이 홀에서부터 사원 내부로 통로가 연결되니 홀의 용도는 사원의 화려함을 더해주는 거대한 장식물이기도 했다. 중앙 성소 중앙 성소는 벽돌 위에 목재 프레임을 넣고 그 위에 청동으로 돋새김을 하는 등 인테리어에 무척 세심한 배려를 하였고 자야바르만 7세의 아버지를 보살로 형상화한 상이 놓여있었는데 16세기에 스투파(탑)으로 교체되었다. 이후는 최초에 설명한 서쪽 탑문, 유해교반 다리 등을 참조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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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벽과 상인방의 부조들. ▲이것이 벽감. 내벽 벽감에는 부처님이 새겨져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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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879년 | |
개요 : 새 도읍지 하리하랄라야에 들어선 최초의 사원이란 점에서 의미깊다. 인드라바르만 1세의 조상과 선대왕의 영혼을 기리는 왕가의 장례전(葬禮殿)으로 쉬바 신에게 봉헌했다. 중앙 성소의 6개의 탑은 각각의 조상의 무덤으로 세웠지만 실제로 그 탑에 시체가 안장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단지, 자신을 즉위시킨 조상의 영광을 기리고 조상의 영생을 기원하는 공묘(空墓)일 것으로 추정한다. 감상 : ②건물잔해 : 보도 좌우로 갤러리를 가진 직사각형 건물들이 대칭하여 서 있지만 대부분 유실되어 잔해만 남아 있다. 남쪽 갤러리 건물 아래쪽의 건물은, 원래 크메르 건축물은 좌우대칭형을 중요시하는데 이것만 홀로 서 있는데, 확실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건물 위쪽에 환기를 목적으로 낸 숭숭 뚫린 구멍을 보건데 화장터가 아닌가 한다. 구멍 위쪽에도 벽감을 넣어 장식한 걸로 보아 예사로운 용도가 아닌 듯하다.
쁘레아꼬 건축 양식의 핵심은 벽돌 위에 석회를 두텁게 발라서 그 위에 부조를 새기는 것과 문의 상인방(문틀위)에 의미로운 신화 부조를 새겨넣는 것이다. 탑들의 기둥들은 나뭇잎이나 꽃잎 또는 기하학적인 무늬를 넣어 장식하고 고리 모양으로 엮어 밋밋함을 없앴고 수문장이나 여신 부조 또한 잿빛 사암이나 붉은 벽돌과 조화를 이루게 세심하게 배려했으며 특히 동쪽 탑에 새겨진 수문장 부조는 크메르 부조의 우수함을 알게한다. 남서쪽 탑에 새겨진 여신은 길다란 줄기의 연꽃을 들고 서 있어 락쉬미 여신이 아닌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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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96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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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황금 햇살을 방안 가득 보담는 아름다운 사원이다. | |
늠름한 사자상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전체적인 사원 분위기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⑥일출과 일몰 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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