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하였다.
그러자 그분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마태8,24-26)
실제로 그들은 같이 배에 타고 계신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결코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위험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 '믿음이 약한' 자들이 되었습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리스도께 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배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거룩한 키잡이가 없으면 교회라는 배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수 없으며, 하늘의 항구에 가닿을 가능성이 아주 낮습니다.(페크루스 크리솔로구스)
예수님이라는 키잡이가 없으면 교회라는 배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수 없다는 부분에서 현실에서의 교회를 생각해본다. 한 교회를 이끌어가는 신부님이 없으면 교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신부님에 대한 공경이 없으면 성소는 더 줄어들텐데...
교회를 이끌어가는 신부님이 본분을 잊으면, 예수님의 대리자임을 잊고 세상일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교회라는 배가 하늘의 항구에 가 닿겠는가.
한 교회를 이끄는 신부님도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도 명심할 일이 아닐까싶다.
그보다 더 나의 마음 깊은 곳을 친 것은 우리의 믿음의 깊이가 어디까지여야할까. 무궁무진한 진리를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을까 묵상해본다.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고 있으면서도 풍랑에 쉽게 겁먹는 우리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에 쉽게 원망하고 의심하고 나약한 인간인 우리들.
제자들은 풍랑이 일어도 그리스도를 믿고 묵묵히 가야 할 길을 가야하듯이 우리들에게 오는 십자가도 묵묵히 지고가면 더한 선으로 인도해 주심을 믿어야 할것이다.
일요일날 시골 텃밭에 잠시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장모님께 이야기를 들었냐며 조카가 장가를 갔는데 밥도 한번 안사냐며 형부가 곧 환갑인데 밥이라도 사라고 하셨다고 했다.
밥 한번 사는것 어렵지 않지만 그동안 나의 서운함이 폭발했다. 나는 언니애들 어릴때 옷도 사주고 입학 졸업때 용돈도 주는 등 열심히 했고 언니가 이사나 개업을 할때도 잘해주려고 애를 썼는데 내가 혜린이를 낳고보니 너무 무심함에 실망했고 결정적으로 직장다니며 혜린이를 맡길 곳을 고민하던 중 언니에게 맡기게 되었는데 맡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친구와 놀러간다고 혜린이를 못본다해서 월차내서 놀러가도록 하기도 하고, 보수가 적다고 엄마를 통해 또 말하기도 하고.. 그래서 2개월인가 맡겼다가 혜린이를 더이상 맡기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자라면서 엄마는 언니와 나의 사이에서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언제나 언니편을 들고 심지어 내가 자수놓은 액자를 언니가 갖고 싶어하기에 안준다고 했더니, 엄마한테 말해서 엄마가 강제로 언니에게 주게 만들기도 했다.
엄마는 언제나 언니편이었기에 언니는 내게 불만이나 내가 가진것에 욕심이 나면 언제나 엄마를 통하여 취하곤 했었다. 반면 나는 불만이 있어도 한번도 엄마에게 말해보지 못했다. 아니 말은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말해봤자 언제나 언니 편이라는 것을 알기에 포기하곤 했었다.
그런저런 상황이 떠오르며 속이 상해서 전화로 하소연을 할까, 아니 언니한테도 전화해서 따져보고 엄마한테도 전화해서 어째 그럴수 있냐고 평생 그렇게 언니입장만 생각할 거냐고 언니는 평생 언니로서 동생에게 뭘 해줬고 이모로서 조카에게 뭘 해줬냐고 따져보고 싶었다. 전후를 따지자면 조카결혼한다고 축의금을 냈으면 언니가 우리를 불러서 밥한그릇 사주며 고맙다고 했어야 하는것이 먼저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동안 아무생각없이 살아왔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여러 생각들이 내 속에서 회오리를 쳤다.
그런데 어제 아침 기도 중에 하느님께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면서 내가 따지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가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다음순간 평정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으면 하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으면 하지 않는게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내가 지금 상태에서 여기저기 전화를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좋게 보시지 않을 것 같아 포기, 아니 미루었다.
그런데 오후쯤 조배하러 성당에 가려고 나섰는데, 그것도 차를 몰고 디디바바에서 필요한 걸 좀 사고 성당으로 향하는 도중 우회전으로 골목으로 들어서려는 그 순간 한의원으로 향하는 엄마와 마주치게 되었다. 일년에 한번 마주치기도 어려운 일인데.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차를 몰고 가기에 마주치기에는 정말 순간이 필요한 것인데. 대로에서 운전중이었다면 길을 가는 엄마를 본다고 해도 그냥지나쳐야 하는데 골목에 들어서는 그 순간 마주친다는 것은. 그래서 엄마에게 간단히 내 생각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이는 우연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심임을 믿는다.
각 사람의 특성에 맞게 다가오시는 주님, 옹졸한 내 마음에 맞게 서운함을 풀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나의 주님,
어제 나의 조배는 감사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지 않나.
서운함이 내 마음을 가득채울 때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지 묵상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심에 감사.
그로인해 하느님이 그 서운함을 풀 기회를 직접 만들어 주심에 감사.
옹졸한 내게 맞춰 적절하게 항상 나타나 주심에 감사 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