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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삶에의 관조와 음지(陰地)에 대한 관심
조동화(시인)
1
이서원 시인은 나와는 겹으로 사제(師弟)의 연(緣)을 맺은 사람이다. 그 하나는 내가 M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 그는 그 학교의 까까머리 학생으로 나의 수업을 들은 사람이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활동 부서 가운데 내가 맡아 지도했던 문학 동아리에 그가 속하여 활동을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후자의 연은 아주 각별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 그의 마음 밭에 시조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 바로 나였고, 훗날 그에게 시조창작의 중요 원리들을 직접 전수해준 사람도 역시 나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건대 이서원 시인은 고교시절에는 시나 시조 쪽보다는 산문 쪽에 더 재능이 있었다. 그 무렵 해마다 가을이 되면 경상북도 교육청에서 개최하는 화랑문화제에 그는 산문 분야에 학교 대표로 나가 좋은 성적을 올리곤 하던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고 생각난다. 그러나 고교 졸업 후 십 수 년이 흐른 뒤 우연히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대면한 그는 산문보다 시조를 더 많이 쓰고 있었고, 작품의 수준도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나는 서둘러 그에게 연락을 취했고, 마침 나의 주거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에서 국내 유수의 자동차회사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는 어느 주말 선뜻 나의 집을 방문해 주었다. 나는 30대 중반이 된 그에게 민족시 시조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것을 권했고, 그가 그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음은 물론이다. 그 후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조창작에 전념하여 2004년 대구시조공모전에서 장원으로 당선했으며, 다시 2008년에는 부산일보 신춘문예에도 당선하여 명실 공히 실력 있는 이 땅의 시조시인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2012년 벽두에 그가 불쑥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대뜸 그동안 써온 작품들을 시집으로 묶어야겠다며 발문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드러나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마침내 그가 그동안의 노고에 헛되지 않게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당당히 소담스런 열매 한 덩이를 거두게 되었다는 뿌듯함에서다. 사실 그동안 나는 이따금 이서원 시인이 생각나면 이제는 한 권쯤 묶을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날이 이렇게 느닷없이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다.
2
이번 이서원 시인의 첫 시집 『달빛을 동이다』의 원고를 일별하며 가장 우선적으로 떠올린 그의 시의 특징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자연과 사물에 대한 넉넉한 관조(觀照)였다. 이것을 좀 더 세분화하여 가닥을 잡으면 그의 관조는 자연의 대표적 존재인 산과 강 등을 매개로 하는 경우와 매듭, 꽃, 향기, 볼트와 너트 등 잡다한 사물들을 매개로 하는 경우로 대별(大別)이 되고 있었다. 우선 산과 강을 매개로 하는 경우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둥지 속 새알처럼 바위 아래 놓인 거울
솔바람 이는 골에 꽃향기도 함께 일면
몰랐네, 선사의 아침
저리 고운 천상일 줄
갇혀도 썩지 않고 고여서 더욱 맑은
물이끼, 골풀, 당귀개… 눈 시린 하늘 한 장
뉘 있어 아득한 시공
여기까지 건너왔나
툭하면 흐르고자 내 안에 수로 내고
무엇이든 담지 못해 흘려보낸 날들 보면
난 언제 어느 능선쯤 늪이 되어 고일까
평화를 탄주하는 목숨들의 정갈한 고향
어느 가식도 허울도 가까이 오지 말라
태초의 나직한 울림
메아리를 흩고 간다
―<무제치늪> 전문
무제치늪은 널리 알려진 대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조일리 정족산에 있는 국내 최고(最古)의 산지습지로 1998년 환경부로부터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자연의 보고이다. 시인은 어느 날 여기에 이르러 ‘둥지 속 새알처럼 바위 아래 놓인 거울’, 곧 ‘갇혀도 썩지 않고 고여서 더욱 맑은’ ‘눈 시린 하늘 한 장’을 본다. 그곳은 ‘선사(先史)의 아침’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하늘 아래 첫 분지로 자신과는 사뭇 다른 생리(生理)를 지닌 자연이다.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물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온갖 식물들과 동물들의 낙원이 되어 있는 늪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담아내거나 포용하지 못하고 다 흘려보낸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다. 그리고 ‘난 언제 어느 능선쯤 늪이 되어 고일까’라고 반문해본다. 무제치늪은 평화롭다. 그러기에 그곳은 목숨들의 정갈한 고향이다. 그 어떤 가식도 허울도 없다. 태초의 나직한 생명의 울림이 메아리를 흩고 갈 뿐이다. 조금의 괴로움도 감내하지 못하고 작은 분노도 그냥은 삭이지 못하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의 인간 앞에 자연은 이렇게 마냥 크고 아득하기만 한 존재로서 태초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강물은 한 번도 제 울음을 보이지 않는다
속 깊은 유속을 따라 다만 몸을 맡긴 채
두고 온 상류의 산과 들 깊이 품어 흐를 뿐
너나없이 돌팔매질에도 둥글게 감싸 안아
잠시 잠깐 흔들려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한생을 그렇게 꼬박 순연하게 낮출 뿐
먹물이 엷게 퍼지듯 해 저문 노을 녘에
종소리 닮은 저녁별이 하나 둘 등을 켜면
길게 휜 끝을 되감아 새 하늘을 받들 뿐
―<다시 강가에서> 전문
앞서의 <무제치늪>은 시인이 그 대상(對象) 안에 있거나 그 대상의 지척지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다시 강가에서>의 경우 대상인 강은 어디까지나 저만치 흘러가는 존재다. 첫째 수에서 강은 한 번도 겉으로 제 서러움을 토로하지 않고 다만 주어진 길을 따라 몸을 맡기되, 떠나온 상류의 산과 들, 곧 제 근본을 속 깊이 간직한 채 묵묵히 흘러간다. 둘째 수에서 강은 무수한 돌팔매질들을 모두 감싸 안아 잠시 잠간의 출렁임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독이며 한 생애 내내 자신을 낮추면서 흘러간다. 셋째 수에서 강은 먹물이 엷게 퍼지듯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노을 녘을 거치고, 종소리 닮은 저녁별이 하나둘 등을 켜는 밤을 가로질러, 길게 휜 끝을 되감으며 새 하늘을 받든다. 여기에 이르면 강은 그냥 강이 아니다. 강은 어느새 우리 모두가 멘토로 삼아 한평생 본받고 싶은 바로 그 성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강을 본받자든가, 강은 우리의 스승이라든가 하는 말을 끝내 하지 않고 침묵(沈黙)을 지킨다. 시의 효용(效用) 면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지만 그는 끝끝내 뒷말을 붙이지 않고 있다. 대신 그는 독자에게 주는 말을 어디까지나 시의 밖에다 숨겨두고 있다. 마치 산굽이를 돌아오는 미세한 바람소리처럼, 아니면 산 너머서 울려오는 아득한 천둥소리처럼 그렇게 자신의 말을 시 밖에다 숨기고 있다. 시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시의 외부에까지도 두루 시선이 미치는 사람만이 그 말을 듣거나 읽을 수 있도록.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길 없는
난해한 사기(史記)의 한 단면 같은 먼 산
그 아래 새 몇 마리가
밑줄 긋듯 날고 있다
시대의 휘몰이가 핏빛으로 물들어도
어둠을 품어 안고 새아침을 기다렸듯
한 획을 다시 써 내려가는
푸름 속의 먼 산하(山下)
한생을 봐라 봐도 우뚝 솟아 늘 그 자린데
나는 왜 흥얼흥얼 소리 내어 읽고 있나
길 하나 깊숙이 품은 뜻
헤어보는 저물녘
―<먼 산의 문장> 전체
이 작품은 <무제치늪>이나 <다시 강가에서>와는 또 달리 제목이 보여 주고 있는 그대로 대상(對象)이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시인은 가물가물한 먼 하늘가에 아른아른 물결치는 먼 능선을 난해한 사기(史記)의 한 단면 같은 문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책을 읽다가 우리가 곧잘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 밑줄을 치듯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그 먼 문장에는 몇 마리의 새들이 밑줄을 긋는다. 휘몰이 같은 격동의 시대에 세상이 온통 피범벅이 되어도 그 어둔 밤을 견뎌 새아침을 기다렸듯이 때때로 먼 능선은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한생을 바라봐도 늘 그 모습으로 자리한 능선이건만 바라볼 때마다 새로워 흥얼흥얼 소리 내어 그 절묘한 문장을 읽어본다. 하루해가 저물녘이면 핏줄과도 같은 길을 드러나지 않게 깊숙이 숨긴 산들의 의미를 곰곰 새겨보는 것이다.
제목도 새롭고 대상을 관조하는 시의 전개도 그만큼 새롭다. 유사 이래 아무도 문장으로 인식하지 않은 먼 산을 홀연히 난해한 문장으로 인식하여 시인은 미답(未踏)의 길을 성큼 내딛고 있다. 시인이 왜 시인인가? 남들이 이미 간 길을 그냥 따라가는 사람은 결코 참된 시인일 수 없다. 남이 가지 않은 길, 그 외로운 상상력 속의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이 바로 참된 시인이 아니던가!
다음은 잡다한 사물을 매개로 하는 그의 또 다른 관조(觀照)를 보기로 하자.
풀어진 실타래도 보듬으면 꽃이 되는
사위도 가라앉은 시간의 간극 위로
가만히 벽을 오르는 순례자의 저 묵도
묶이면 묶인 채로 결박마저 자유로이
미동도 하지 않고 면벽하는 숙연함
한 매듭 엇걸고 맺은 무지갯빛 사유여
돌아보면 이 악문 삶도 때로는 처지던 것
누구든 제 안의 저를 다독이며 산다지만
어쩌면 온 길을 지우는 강물 같은 거 아니리
몇 바퀴 돌려 감아 엉클린 듯 허리질러
끈목 속에 잡고 당기며 조여본다
갓 돋은 꽃잎 하나가 새로 피어 환하다
―<벽에 꽃을 걸다> 전문
붙어 있는 부제 그대로 인공의 사물인 매듭을 통해 삶의 이치를 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매듭의 본래 재료는 꼬여 있는 실타래다. 이것을 이리저리 얽어 묶고 조이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데 시인은 이것을 ‘순례자의 묵도(黙禱)’와 ‘무지갯빛 사유’라고 명명한다. 이어서 매듭은 다시 셋째 수에서 ‘이 악문 삶’이 되고, 바로 여기서 ‘누구든 제 안의 저를 다독이며 산다’는 삶의 이치를 보아냄과 동시에 삶이란 ‘온 길을 지우는 강물 같은 거 아니’냐고 반문해 본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서 체념하지 않는다. ‘몇 바퀴 돌려 감아 엉클린 듯 허리질러/ 끈목 손에 잡고 당기며’ 가만히 조여 ‘갓 돋은 꽃잎 하나가 새로 피어 환’한 장면을 구현(具現)하고야 만다. 그의 관조의 미학이 새삼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희망과 절망이 종이 한 겹 차이인 것을 숙지하고 있는 그는 기어이 절망을 헤치고 희망을 꽃 피우고야 마는 것이다.
사물을 매개로 하는 그의 관조의 시편을 하나더 음미해 보기로 하자.
닳을수록 밀고 가는 아집의 정점에서
너를 감아 돌아 내가 꿈꾸는 길은
빛나는 생의 정수리, 솟구치는 불꽃이다
좁으면 좁을수록 깎여지는 나선(螺旋)의 길
형형한 눈을 밝혀 어둠 속 밀고 가면
서서히 느려지는 발걸음, 숨이 가쁜 고개턱
너와 나 서로 죄어 그 얼얼한 통점에서
포개어 맞잡은 손 맞물려 돌아가다
터질 듯 고요한 멈춤의 황홀이여, 결박이여!
―<볼트와 너트> 전문
볼트와 너트는 보다 큰 두 개의 금속을 결합시키는 구실을 하는 요긴한 기계요소이다. 즉 볼트는 수나사이고 너트는 암나사로 그 둘이 결합하면서 두 개의 금속판을 하나로 고정시키는 사물인 것이다. 볼트와 너트는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키는 사랑의 대유(代喩)이다. 시인은 이를 ‘너를 감아 돌아 내가 꿈꾸는 길은/ 빛나는 생의 정수리, 솟구치는 불꽃’이라고 갈파한다. 볼트와 너트가 조이는 원리는 ‘좁으면 좁을수록 깎여지는 나선(螺線)의 길’이다. 너무 과도하게 조이면 볼트가 끊어지거나 너트가 마모되어 겉돌게 되지만 서서히 조여져 ‘숨이 가쁜 고개턱’까지 조일 만큼은 조여야 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것을 ‘너와 나 서로 죄어 그 얼얼한 통점에서/ 포개어 맞잡은 손 맞물려 돌아가다’라고 묘사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터질 듯 고요한 멈춤’의 단계에 이르러 조임은 끝난다. 이것이 볼트와 너트를 통해 관조하는 사랑의 절정(絶頂)이다. 그는 이것을 황홀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사랑의 결합은 항상 양면성을 가진다. 곧 내면적으로는 황홀이지만 외면적으로는 강하게 배타적(排他的)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는 이것을 다시 ‘결박’이라고 명명하며 결말을 짓는 것이다.
3
이서원 시인의 첫 시집 『달빛을 동이다』에서 두 번째로 두드러진 특징은 삶의 음지(陰地)에 대한 조명이다.
문학 이론가들은 진작부터 순수문학(純粹文學)과 그 반대 개념으로 참여문학(參與文學)을 거론해왔다. 곧 현실과 시대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예술로서의 작품 자체에 목적을 둔 문학이 전자라면, 문학이 사회 현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사회문제 해결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곧 후자이다. 그러나 개개의 시인으로 볼 때는 아무리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시인이라 해도 얼마간은 참여문학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며, 또 아무리 참여문학을 추구하는 시인이라 해도 얼마간은 순수문학적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따라서 시인이 부르는 노래가 자신의 느낌이나 아픔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따금은 눈길을 외부로 돌려 세상의 그늘진 곳을 조명한다는 것은 순수니 참여니 하는 문제를 떠나 곧 시인의 본령(本領)이요 또 마땅히 수행해야 할 책무(責務)이기도 한 것이다.
부대끼지 않고서야 어찌 봄을 맞겠느냐
작은 학교 양지 녘
담벼락에 모여서서
혀 대신 두 손을 놀려 말을 접는 아이들
속 깊은 이야기를 저토록 능숙하게
텅 빈 허공 가득
피워내는 솜씨 좀 봐
잎잎이 초록을 수놓는 봄 나무가 따로 없어…
장갑 다 벗어던진 말마저도 시린 오후
훗훗한 입김 속에
그려 넣는 모국어여!
한겨울 익은 귓불들이 동백인 양 뜨거워라
―<메아리학교> 전문
<메아리학교>는 농아(聾兒)들이 공부하는 특수학교를 방문한 체험을 노래한 작품으로 손의 동작, 곧 수화(手話)를 통해 말을 주고받는 광경을 희망적 이미지로 노래한 작품이다. 봄이 아직 오지 아니한 겨울 어느 날, 학교 담벼락 양지쪽에 모여서 혀 대신 두 손을 놀려 능숙하게 말을 접어내는 아이들을 본다. 시인은 속 깊은 이야기를 텅 빈 허공 가득 피워내는 광경을 보며 잎잎이 초록을 수놓는 봄 나무가 따로 없다는 생각에 잠긴다. 장갑을 다 벗은 맨손이기에 접어내는 말마저도 시려오는 겨울 오후이지만 훈훈한 입김 속에 피워내는 모국어의 현란한 말 숭어리들! 시인은 한겨울 농아들의 달아오른 귓불들이 동백인양 뜨겁다고 노래한다.
온몸이 건강하고 의사소통이 자유롭다 해도 마음속에 희망이 없으면 완전한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귀가 먹고 말 못하는 벙어리지만 손으로 말을 접어내는 아이들은 가지마다 가득히 새 잎을 피워내는 봄 나무들이다. 시인은 나무들에게 울울창창한 희망이 있듯이 큰 장애(障碍)를 지닌 아이들에게도 정상인 못지않은 희망이 있음을 보아내고 있는 것이다.
앞서간 어머니의 가슴 아린 발자국 길
혼자서 더듬더듬 그믐밤 걸어간다
눈 내린 책갈피에도 무릎 꺾어 세우며
손끝에 힘을 모아 온몸으로 읽는 음절
어두운 마음속을 뇌문(雷紋)처럼 뻗어 와서
하나둘 놓는 징검돌 꽃이 되어 피는데…
점자가 등불이라면 손끝은 눈동자인 것
애벌레 기어가듯 느릿한 보행 끝에
아득히 잔돌들 박힌 길 하나가 열려온다
―<눈길을 걷다> 전문
‘-점자 읽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작품은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앞서의 <메아리학교>가 청각장애(聽覺障碍)를 노래한 작품인데 반해 이 작품은 가장 암담하다고 할 수 있는 시각장애자(視覺장애자(障碍者))를 희망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첫째 수에서 시인은 시각장애자가 읽어야 하는 점자책을 ‘앞서 간 어머니의 가슴 아린 발자국 길’이라고 명명(命名)하고, 한 자 한 자 손끝으로 더듬어가는 읽기를 ‘그믐밤을 걸어간다’고 하고 있으며, 그리고 온통 희기만 한 책갈피를 눈이 내렸다고 형용한다. 둘째 수에서는 시각장애자가 손끝으로 읽는 행위를 ‘손끝에 힘을 모아 온몸으로 읽는 음절’이라 하고, 점자가 손끝의 감지를 통해 마음으로 전달되는 과정을 뻗어오는 뇌문(雷紋)으로, 점자가 의미로 형상화되는 과정을 징검돌과 피어나는 꽃으로 각각 표현한다. 셋째 수 초장에서 시인은 ‘점자가 등불이라면 손끝은 눈동자’라는 보석 같은 중복 은유를 배치하고, 중장에서 시각장애인의 독서행위를 ‘애벌레 기어가듯 느릿한 보행’이라고 빛나는 직유를 한 번 더 배치한 다음, 종장에서 점자판을 연상시키는 ‘잔돌들 박힌’ 희망의 길 하나를 열어줌으로써 대미(大尾)를 짓고 있다.
장애인의 아픔을 노래한 수많은 명편들이 이미 있어왔지만 풀 것은 풀고 묶을 것은 묶는 언어의 자유자재한 운용(運用)도 그렇거니와, 내용의 곡진(曲盡)함에서도 실로 가슴 뭉클해오는 명편이 아닐 수 없다.
핏기 없는 얼굴에 살결만 희디희어
볼터치 화장에도 분가루만 떨어지던
눈이 큰 카자흐스탄의 한 여인이 있었다
낯선 땅인 줄 뻔히 알면서도 척박한 본토인 양
층층계 틈새마다 몰래몰래 발을 딛고
혀 꼬인 모국어를 찾아 홀씨 마구 흩더니,
허스키한 목소리로 까레이스키를 부르며
할아버지 고국 땅에 밀입국 민들레로 피어
금발의 긴 생머리로 봄밤 마구 흔들더니,
24시 하루가 짧게 낮밤을 잊고 살다
오늘은 간병인도 없는 불법체류 병동에서
꼬레아 환상의 꿈을 꼬깃꼬깃 접고 있다
―<밀입국 민들레로 피어> 전문
까레이스키란 고려인(高麗人)이란 뜻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살고 있는 한국인 교포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1994년 말경에 ‘까레이스키’란 제목의 드라마가 방영되어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 대한 전 국민의 관심이 고조된 적이 있었다.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주인공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 그대로 이 땅에 밀입국한 한 여인이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조국 꼬레아가 잘 산다는 소문만 믿고 무작정 밀입국한 카자흐스탄 출신의 교포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층층계 틈새마다 몰래몰래 발을 딛’었다는 둘째 수, 그리고 ‘할아버지 고국 땅에 밀입국 민들레로 피’었다는 셋째 수가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결국 마지막 수에서 그녀는 병자가 되어 ‘간병인도 없는 불법체류 병동에서/ 꼬레아 환상의 꿈을 꼬깃꼬깃 접’는 신세로 전락해 있다.
시조의 정제된 형식은 만단설화(萬端說話)를 효과적으로 담기엔 너무 한정된 그릇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눈물겨운 한 편의 긴 드라마로 방영된 내용을 무난히 네 수의 연시조에다 담아냈으니 이 또한 시인의 남다른 능력에 말미암았다 할 것이다.
4
이서원 시인의 시집 『달빛을 동이다』에서 세 번째로 두드러진 특징은 좋은 단형시조를 적지 않게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시조부흥운동 이래 단시조에 비해 연시조가 점차 주류를 형성해왔지만 뜻 있는 사람은 그래도 시조의 본령은 단수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연시조가 대세인 오늘날에도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적지 않아서 단수들만 모아 시집을 내는 사람도 있고, 아예 연시조와는 담을 쌓고 단시조만 쓰기를 고집하는 시인도 있다.
이 근래 이웃 나라 일본이 자신들의 고유시가인 하이쿠를 나라 밖에까지 두루 선전하여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우리의 잘 쓴 단시조는 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지 그 문학적 가치에 있어서는 일본의 하이쿠에 전혀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훨씬 그 윗길임을 뜻있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잘된 단수는 모든 시조의 압권(壓卷)이다. 아울러 긴 연시조 한 수를 얻기보다 잘 된 단수 한 수를 얻는 일이 더욱 지난한 일임도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서원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좋은 단형시조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그가 그만큼 시조의 묘미(妙味)를 터득했다는 의미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쯤에서 그의 단형시조 몇 수를 음미해 보기로 하자.
강보에 싸여 우는
첫 울음 같은 아침
붉은 혈육 하나
가슴 깊이 받아 안고
바다는
비린 살내의
탯줄 하나
끊고 있다
―<구룡포 일출> 전문
잘 빚어진 단수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어리기 시작하는 바닷가의 아침을 ‘강보에 싸여 우는/ 첫 울음 같은 아침’이라고 묘사한다. 참으로 신선한 비유다. 중장의 ‘붉은 혈육 하나’는 원관념이 해이고, ‘가슴 깊이 받아 안고’의 주체는 바다다. ‘바다는/ 비린 살내의/ 탯줄 하나/ 끊고 있다’는 종장은 실로 놀라운 역동적 표현으로 회심(會心)의 일구라 할 만하다. 중장과 종장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바다는 흡사 충실한 산파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면 ‘혈육 하나’를 낳은 주체(主體)는 과연 누구인가? ‘첫 울음 같은 아침’인가, 아니면 바다가 스스로 해를 낳고 산파 역할도 홀로 도맡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 문제는 불분명한 대로 두어도 크게 상관은 없다. 종장의 눈부신 표현이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강아지 오요요요
불러보는 3월 아침
멍
멍
멍
대답처럼
물이 오른 가지 끝에
새하얀
방울 소리가
보송보송
앉았네
―<버들강아지> 전문
역시 단수로서 성공을 거둔 경우이다. ‘강아지 오요요요/ 불러보는 3월 아침’이라는 초장의 내디딤이 예사롭지 않고, 멍/ 멍/ 멍/ 대답처럼// 물이 오른 가지 끝에‘라는 중장의 이어받음도 적격이며, 특히 종장의 빼어난 마무리는 우리의 눈길을 오래오래 머물게 한다. 3장이 모두 소리로 가득 차 있으나, “새하얀/ 방울 소리가/ 보송보송/ 앉았네”라는 종장의 공감각 하나는 초장과 중장의 소리들을 일순에 압도해 버리는 위력이 있다. 이 단수의 성공이 9할은 여기에 말미암았음은 물론이다.
감으면
감을수록
오히려 더
풀어지는
물소리
한 타래가
돌탑들을
쌓고 있다
치마 끝
살짝 든 설악
하얀 발을
담글 때
―<백담 계곡에서> 전문
이 작품 역시 절조(絶調)다. 내설악 백담사 앞을 흐르는 시냇가에 인상적으로 쌓여 있던 돌탑들에 대한 인상을 노래한 작품이다. ‘물소리/ 한 타래가/ 돌탑들을/ 쌓고 있다’는 중장이 득의(得意)의 한 구절이다. 좋은 공감각이 아닐 수 없다. 전체적으로 이 단수에는 도치법도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데, 정치법으로 하자면 종장은 맨 처음에 놓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을 맨 나중으로 도치시킴으로써 단조로움을 거뜬히 극복하고 있다. 특히 ‘치마 끝/ 살짝 든 설악/ 하얀 발을/ 담글 때’라는 이 종장은 우람하기 그지없는 설악을 흡사 미인도(美人圖) 속의 단아한 여인처럼 묘사하여 한결 그윽하게 마무리를 했다는 점에서 더욱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하겠다.
내친 김에 단형시조 한 편만 더 음미해 보기로 하자.
굳이
말 안 해도
이미 다
안다는 듯
나보다
먼저 와서
귀뚜리
밤 새 운다
아파라,
달빛을 동이는
네 금은의
포승줄!
―<가을밤> 전문
사람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곧잘 으스대지만 계절의 변화에는 정작 민감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면 오래 전에 봄이 왔는데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야 알아챈다든지, 가을이 상당히 깊어졌는데도 전혀 낌새조차 못 채다가 우수수 지는 낙엽을 보고서야 비로소 계절의 변화를 깨닫기가 일쑤인 것이다. 그러나 미물들의 계절에 대한 반응은 인간보다 훨씬 예민하고 즉각적이다. 귀뚜라미도 예외가 아니다. 아직 잔서(殘暑)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름이 저물어가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일라치면 벌써 밤을 새워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초장과 중장의 상황이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보다시피 이 대목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이 밋밋하다. 그러나 종장은 이 시집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비점(批點)을 찍어야 할 만큼 출중한 구절이 아닌가 한다. 수준 높은 공감각을 겸하고 있는 이 하나의 은유는 보면 볼수록 오묘하여 독자는 절로 찬탄을 머금지 않으려야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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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서원 시인의 첫 시집 『달빛을 동이다』의 작품들을 대략 세 갈래로 큰 가닥을 잡아 살펴보았다. 보통의 경우 세 가지 정도의 큰 가닥을 잡아 가로세로 훑으면 대략 절반 내지 5분의3 정도의 작품들이 커버되는 것이 상례인데, 이써원 시인의 경우는 5분의 3 그 이상이 오히려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음을 본다. 이것은 그의 시적 사유의 진폭(振幅)이 그리 단순하지 않고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증거다.
제목만 일별해 보아도 그의 관심은 매우 다양하고 폭이 넓게 뻗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달항아리, 호미곶, 솟대, 귀신고래가 돌아가는 길 등 토속적인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가 하면, 강아지풀, 물봉선, 동자꽃, 갯메꽃 이 땅의 풀꽃들에 대한 산뜻한 인상들이 있고, 오후 한시, 초저녁, 봄밤, 4월 아침 등 시간이나 계절을 노래한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경칩 무렵, 추억, 아내의 하품 등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한 작품들도 있다. 그뿐이 아니다. 옹이, 범퍼, SPRING, 팔레트, 압력밥솥 등 일상으로 접하는 크고 작은 사물들에 대한 조명이 있는가 하면, 마흔Ⅰ, 마흔 Ⅱ, 남자의 기도 등 자신의 내부를 향한 깊은 성찰도 있다.
한 마디로 그의 시편들은 매우 다양한 소재들을 그 나름의 독특한 감각과 미학에 의해 잘 다듬어지고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글을 쓰면서 욕심 같아선 보다 많은 항목에 걸쳐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지만, 쓰다 보니 어느덧 정해진 분량이 차 버려 그것도 여의치 못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쪽을 취하면 저쪽이 미진하고, 이것을 취하면 저것이 소외되는 것이 바로 한정된 발문(跋文)의 속성인 것을.
다만 이번 시집에서 좀 의아하다 싶은 대목이 있다면 이렇다 할 연작 형태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체를 유심히 살펴보아도 마흔Ⅰ, 마흔 Ⅱ와 시Ⅰ, 시Ⅱ 정도가 간신히 눈에 띌 뿐이다. 이는 그의 시가 아직은 영토 확장에만 주력해왔을 뿐, 사유의 보습을 땅속 깊이 대어 충분히 갈아엎지 않았다는 증좌가 아닐까 싶다. 물론 좋은 작품을 위해서는 감각과 재치, 영역의 무한한 확장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자신의 주된 관심사항에 대한 깊은 천착(穿鑿)도 있어야 하리라고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시를 보다 웅숭깊게 하는 첩경(捷徑)이기 때문이다.
이서원 시인, 그는 재주 있고 우리 시조에 대한 애정도 남다른 전도가 양양한 젊은 시인이다. 아무쪼록 지치지 말고 뚜벅뚜벅 이 한 길에 매진하여 민족시의 제단에 아름드리 돌 한 덩이를 포개는 큰 시인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쯤에서 글의 매듭을 짓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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