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현우가 엄마하고 즐겁게 눈놀이하는 모습
올 해는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슬프다.
초등 2학년이 방학 때 학원에 다닌다고
아니 그럼 방학은 왜 하냐구!
사방 십리 안에 놀 친구가 없어 유일하게 엄마와 눈놀이를 하며.....
무슨 만화영화를 보더니 저런 포즈를 늘 취하는데.....
나도 어릴 때 이렇게 강화도 본가 마당에 눈을 쌓아놓고
눈 터널 속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ㅎ
그 시절이 정말 그립다!
눈사람을 만들려고 꼬맹이 아들 녀석이 애를 쓰는 모습
애들은 저렇게 자라야 하는데~~~ 에고 ㅠㅠ
산넘어 무주구천동 계곡에는 폭설에 휩싸였다는데
해발 1500미터 덕유산맥에 가로막혀 해발 518미터에 위치한 우리집에는
어제 오늘 눈발만 휘날리고 있다.
세찬 바람은 집을 송두리채 집어심키려는 듯 끊임없이 불어오고.....
처마끝에 매달아 놓은 풍경소리는 은은한게 아니라
시끄럽기까지 하다. 저놈의 풍경 당장 떼어버릴 수도 없고 에고~~~
나는 작년 가을 43년만에 유골을 통해서나마 어머니를 만나고
왠지 친구들이 그리워지고 그러면서 내 어린시절에 대해서 좀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곤 이렇게 독백을 하고 있다.
친구들이 읽어주건 말건
내 삶을 지금쯤은 한 번 뒤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삶을 다시 엮어가고 싶어서다.
언젠가 어떤 친구가 내 생년월일을 물었다.
기해년 정월 스무이틀!
그러자 "외롭게 살 팔자군"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년에는 좀 나아지겠어"
나이 이야기를 했으니 정확한 내 나이가 몇 살일까?
나도 잘 모른다.
주민등록상에는 60년 1월로 되어있어
올해 나는 49세이다. 만으로 ㅎㅎ
하지만 아버지의 일기장이나 창원황씨 족보에는 기해년 정월로 되어 있어서
몇년 전에는 내 나이를 그대로 사용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나이가 많은게 결코 자랑이 아닌데.....
그래서 나는 3년 전부터 49살이고 올해도 물론 49살이라고
아들에게 말해 준다.
그러자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은
"아빠는 3년 동안 49살이래" 한다. ㅎㅎ
그래도 난 나이를 제대로 말 안한다.
왜냐하면 가끔 현우를 데리고 가다가 애들친구를 만나면
"야! 현우 할아버지다"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오늘은 머리에 염색을 하려고 한다.
아니! 나같은 젊은 할아버지도 다 있나? 못된 놈들 ㅎㅎ
* 작년 추석 대 아들과....정말
할아버지와 손주 같은가? ㅎㅎ
어릴 때 부터 한 동안 나는 정말 외롭게 살아왔다.
친어머니만 없었지
조부모님이 30세에 돌아가셨으니 대가족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살아왔는데도
나는 왜 스스로 이렇게 살아왔을까?
그게 팔자라는 건가?
팔자는 또 어느 정도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데
나도 내 삶을 그렇게 엮어갔던 것일까?
쉽게 치료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 때문에
얻은 육신의 병은 나를 점점 자신없게 만들었다.
학교에 오가는 것도 힘들었으니
학교생활이 즐거울리가 있겠는가?
난 우리 동창 황재주가 무척 부러웠다.
아이큐가 150이 넘는 수재였을 뿐 아니라
짓궂은 장난을 많이 하면서 신나게 학교생활을 하였으니.
지금도 재미있게 잘 사는지 궁금하다.
또 육상을 잘하는 선환이가 정말 부러웠다.
학교 운동회 뿐만 아니라 강화체육대회 때도 늘 영광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힘이 센 친구들(정병, 시민,모연 등등)이 부러웠다.
건강에 자신이 없다는 것 때문에 난 모든게 자신이 없고 의기소침했다.
가을운동회 때 난 해중이 신구 등과 같이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늘 3등 아니면 4등이었다. 신구는 달리기를 잘해서 늘 일 등이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세상을 달리했던 착하기만 했던 단짝친구 해중이가
2등을 했었는지?
해중이는 왜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났는지 너무 불쌍하다.
소식을 듣고 문현이와 함께 신당리 해중이네 집으로 방문을 갔을 때 정말
안타까웠다. 허름한 초가집이 어둠컴컴했고 살림살이가 거의 없었으니
그 때는 왜 그렇게 가난했었는지 모르겠다.
해중이 동창 생각하면서 또 생각나는 것이 내가 강원도 성당에 있을 때였는지
인자 소식이었다.
충격이었다. 얼굴이 하얗고 입술은 통통하고 이쁘고 건강하게만 보였던 인자가 벌써.....
군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였는지 어떻게 연락이 닿아서 인자와 선익이 등과 함께
종각역 지하 음악다방 "초원다방"에서 만났던 기억이 있는데....
인자 아이들이 불쌍했다. 내 모습을 그려보면서 마음으로만 슬피 울었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약먹는 것을 그만두었지만
약해질 때로 약해진 몸과 마음을 스스로 추스려서 힘을 낸다는게 쉽지 않았을 터.
그렇다고 새어머니 사이에 이쁜 여동생들을 연이어 난 아버지는
거의 새아버지와 다름없었다.
언젠가 새어머니가 낳은 남동생이 안타깝게도 6살 때 뇌수막염으로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우리 집은 또 한 번 풍파에 시달리는 사건이 있었다. 정말 똑똑한 녀석이었는데.
그 때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는지.....
그러자 읍내에서 초등학교 다니던 남동생 인철이가
"우리집에는 세 명이 죽었어.
엄마하고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 인혁'
아버지는 나를 일꾼으로 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약을 먹지 않겠다고 하다가 매맏는게 싫어서
도망쳐서 동네 한 바퀴 돌아 짝순이 용란이네 집으로 숨어들어갔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는 정말 나를 위해서 약을 먹으라고 야단을 치신 것일까?
지난 가을에 강화집에 갔을 때
아버지는
"예전에는 왜 그랬는지 모른다.
식구들은 많고 농사일로 너무 바빠서
너희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었어"
아버지도 정신 없이 살아오신 것 같다.
그게 이제야 이해가 된다. 나이가 들어가고 자식을 키우다 보니.
특히 시골살이를 해보니 더욱 절실하게 알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생활이니.
형님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자 마자
초등학교 4학년 때 대학에 다니는 막내고모를 따라서 서울로
유학을 가버리고
나는 꼬맹이라도 농사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중학교를 마치고 인천으로 고등학교를 간 것도 일하기 싫어서였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학교갔다 집으로 돌아오면 농사일로 바쁘니 힘들어도 내색도 못하고
혼자서 사랑방에서 드러누어 앓아도 누구 하나 돌봐줄 여유가 없는 삶!
백일해라는 무슨 병이 있는데 낮에 어지러워 드러누우면
천정이 빙빙 돌아가기도 했다. 싸구려 벽지 모양이 아상하게 합쳐졌다
펼쳐졌다 하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아른 거린다.
그러고 보니 아마 빈혈이었을 게다.
할머니는 손주가 아픈 것은 뒷전이고
당신의 귀한 외아들이 조강지처를 잃고 새어머니를 얻으면서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농사일로 힘들어하는 게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그래서인지 우리를 먹여주고 입혀주었는데도
나는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더 그립다.
두 살 터울 소띠 여동생이 태어나자 마자
바로 사랑방으로 거처를 옮긴 후(이건 전적으로 추측이다 ㅎ)
할아버지하고 늘 생활해왔기 때문인지 난 할아버지에 대한 정이 각별하다.
실제로 내가 자취생활하면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도
자취방에 와보신 분은 할아버지 뿐이다.
어느날 강의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니 반지하 자취방에서
국수를 끓여놓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기억이 난다.
** 할아버지와 할머님이 대학축제때 구경 오셨다. 가운데는 양오리 사시던 큰 고모님
1978년 1학년 당시에는 서울로 이사와서 종로 안국동 90번지에 사셨다.
아무튼 할머니는 아버지를 도와서 일을 해야한다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셨다. 손주가 어떻게 자라는지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당신의 아들 걱정에.....
나도 손주가 낳으면 그렇게 될까 ㅎㅎ
정말 일은 많이 해 보았다.
지게질 부터 온갖 농사일을.....
그래서 그런지 세월이 지나 내가 이렇게 시골살이를 시작해서도
일하는 게 힘들거나 두렵지 않다.
그래서 어렸을 때 일을 많이 할 때는 정말 싫었지만
지금은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군에서 모내기 대민지원을 나갔는데 주민들이
어디서 살다 왔는데 작은 체구에서 그렇게 일을 잘 하냐는 소리도 들었었다.
** 군대 말년에 찍은 사진. 상병 말년 부터 잠시 군종병으로 근무하기도~~어릴 때부터
말랐던 모습은 군에서도 마찬가지다. 마눌이 이 사진을 보더니 "왜 이렇게 말랐어?" 한다.
매일 일을 해야하는 내 자신이 그 때는 싫기도 했지만
부끄럽게 생각이 되었다.
한 번은 집에서 일을 하는데 집 앞 행길(이게 무슨 말인지?)로
여자동창들이 지나가는게 보였다. 일요일날 명숙이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던
선익이 은이 침목이 등등이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지금 같으면 쫓아가서 손이라고 붙잡고 반갑게 인사했을 텐데
등신같은 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 숨어버렸다.
몸이 약한 나는 마음도 약해지고
그러다 보니 가족 중에 누구 하나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자
스스로 소외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따스한 정을 느끼며 편안하게 안주할 수 없는
쓸쓸함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더라도 어딘가 그늘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이 내 삶을 최근까지 지배해 왔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첫댓글 ^^* 사진만 봐도..행복함이...^^*
^*미영친구님 눈에 행복하게 보인다니 정말 기쁘네
^^* 오마..난...전혀 몰랐네.^^* 그러나,,지금 이렇게 행복한 푸념아닌,,아팠을 기억,,추억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현실 이게 중요한것이지.^^ 우리들 자라던는 시절..참으로 할 얘기 많은,,정도 많은 세상이었잖아.^^* 지금서 생각하면 우리들 자라던 때의 그 정을 앞으로는 정말로 찾기 힘든 고려적 이야기로 남을것 같네용.^^
나는 5남매의 큰 딸이다보니,,동생들 보는게 지겨워서 할머님들이 계시는 집이 참으로 부러웠다네.^^하루는 지금나이 42살이 되는 남동생(그당시 34살정도)을 엄마가 보라고 맡겨놓고 일을 하시는데..꽤를 부려..아이를 억지로 자장자장 해가면서 재워 놓고는 잠든사이 얼른 나가 버렸는데...아..이 아이가 강제로 자라하니깐 눈만 감았다 떴는지...실컷놀고 저녁에 들어왔더니,,엄마가 난리..난리 ^^ 나는 렸지.. 그런데 울엄마...끝까지 쫓아오면서 거기 서라는데... 와 남의집 뒷간을 서너바퀴 돌다가는 결국 잡혀와서...얼마나 혼이 났는지... 울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모이면 가끔 얘기 했는데.. _()_
호호^^ 동생들 돌보는 게 어지간히 힘이 드셨나 보네^^ 나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이젠 아련한 추억이기도 하고 친구들도 공감하는 이야기도 있을 거 같구 어찌보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웠어도 되돌릴 수 없는 아름다운 날들이기도 하지. 행복지수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해....이럴 때 지민이가 있어야 좀 우리들에 대한 정한 정보를 제공해 줄 텐데 난 모든 게 다 희미하기만 해서 미영친구님은 큰 딸이었으니 마음 씀씀이도 넉넉하고 부모님의 재산이셨군
너도나도 모두가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지만 지금 우리들의 추억이 되어줍니다... 이야기보따리를 앞으로 쭈우욱 풀어주세요~~~ 다음편을 기다립니다?????
"to be continued!"하겠습니다. 애독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작가는 글을 계속 써야하겠지요^* 힘들어하면서도 삶에 대한 강한 집념이 서서히 생겼던 시절 같아요!
그래 인찬인 중핵교 까지 같이 다녔지! 자그마한 키에 자그마한 몸, 그런 사정이 있어 그런줄 몰랐네! 신당리 오해중 울 친구제일 먼저 유명을 달리한 친구지 ! 울 동창 친구들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친구가 벌써 남자 4 명 여자 2명 총 6 명이라네 ! 몰랐지?
아! 먼저간 친구들에게 영원한 안식이 있기를 두손 모아 기도하겠네! 졸업 후 한 번도 못만나 봤는데 미안하네 친구들아! 정말 몰랐네....내 가 아는 한 해중이와 인자 정도인데~~~
남 : 오해중, 김기정, 김진일, 윤광석, 이고 여 : 이명숙 인가 ?(신당리) ,이고 인자가 아닐세 (황??) 대산리 고인자 옆에 사는 칭구디 이름 기억이 나질 안는구먼 !
아! 기정,진일,광석 친구도 ㅠㅠ 여자친구 이름은 전확하지 않구만.....잘못하면 큰 실수하겠는걸~~~
신당리는 고이명옥님이고 대산리는 고황은자님이라네. 고인자는 예쁘고 건강하게 부평에서 알콩살콩 살고 있다네
아! 신당리 이명옥과 황은자 두 여자친구들이 ㅠㅠ. 황인자가 아니라 황은자였구나. 은자 소식은 란이가 알려주었었지.....내가 강원도 있을 때.....예전에 종각 지하다방에서 란이하고 은자하고 함께 만난 적 있었는지? 아무튼 란이라 은자 모두 한참 금값이었을 때 만났었는데.....은자가 무슨 의류매장을 잘 하던 중에 하늘나라고 떠났다고....그 때 난 그 애들이 너무 많이 생각나서 눈물을 훔친 적이 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