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27리, 남쪽으로 영산현(靈山縣) 경계까지 10리, 서쪽으로 초계군(草溪郡) 경계까지 41리, 북쪽으로 현풍현(玄風縣) 경계까지 29리, 서울과의 거리는 7백54리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한다. 이던 것을 진흥왕(眞興王) 16년에 하주(下州)를 두었다가 21년에 혁파했고, 경덕왕(景德王)이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가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이 밀성군(密城郡)에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本朝)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비자화(比自火)ㆍ비사벌(比斯伐)ㆍ화왕(火王)ㆍ하주(下州)ㆍ창산(昌山)ㆍ창성(昌城)ㆍ하성(夏城)ㆍ하산(夏山).
【성씨】 본조 장(張)ㆍ성(成)ㆍ정(鄭)ㆍ조(曺)ㆍ한(韓)ㆍ표(表)ㆍ하(河), 육(六) 혹은 변(卞)이라고도 한다. 최(崔) 모두 내성(來姓)이다.
【산천】 화왕산(火王山) 현의 동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문방산(文房山) 현의 서북쪽 30리에 있다. 효자암산(孝子菴山)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합산(合山)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비슬산(琵瑟山)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유남산(楡南山)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마현(馬峴)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감물창진(甘物倉津) 현의 서쪽 41리에 있으니,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에 있다. 초계군(草溪郡) 조에도 나왔다. 물슬천(勿瑟川)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두 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화왕산(火王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유남산(楡南山)에서 나와서 합류하여 이지포(梨旨浦)로 들어간다. 남천(南川)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근원이 화왕산에서 나와서 영산현(靈山縣) 매포진(買浦津)으로 들어간다. 이지포(梨旨浦)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근원이 유남산(楡南山)에서 나와서 매포진(買浦津)으로 들어간다. 누구택(樓仇澤)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반개택(盤介澤)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신증』 용장택(龍壯澤) 현의 서북쪽 20리에 있으며 둘레가 5리다.
【토산】 죽전(竹箭) 화왕산(火王山)에서 난다. 붕어[鯽魚]ㆍ석류(石榴)ㆍ오미자(五味子)ㆍ백복령ㆍ산무애뱀[白花蛇]ㆍ꿀[蜂蜜].
『신증』 감초 밭에 있다.
【봉수】 합산봉수(合山烽燧) 남쪽으로는 영산현(靈山縣) 여통산(餘通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현풍현(玄風縣) 소산(所山)에 응한다.
【누정】 불일루(不日樓)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 이지강(李之剛)의 시(詩)에, “누(樓) 위에 바람은 가볍고 해는 긴데, 장미꽃 지고 나니 나무 그림자 서늘하네. 서늘한 기운 사람의 뼈를 맑게 함이 괴이타 했더니, 새 대나무 천 그루가 이미 담보다 높구나.” 하였다. 징원당(澄源堂)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신증』 추월헌(秋月軒) 이는 곧 객관의 서헌(西軒)이니 현감(縣監) 박한주(朴漢柱)가 세운 것이다. 헌(軒)의 북쪽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며 돌을 모아 섬을 만들었다. ○ 안침(安琛)의 시(詩)에, “달이 중추(中秋)를 맞으니 빛이 정히 촉촉하고, 작은 못에 연꽃이 고우니 물은 쪽[藍]같이 푸르다. 물결이 흔들리니 소동파(蘇東坡)가 백이 생기고, 그림자를 대하니 참으로 이태백(李太白)의 셋을 이루었네. 얼굴에 부는 좋은 바람 살살 불어오고, 옷을 적시는 서늘한 이슬은 촉촉히 떨어지네. 마루의 맑은 경치 시(詩)로는 형용키 어려워 다 쓰고 나서 우두커니 부끄러운 생각이 드네.” 하였다. 세심정(洗心亭) 공관(公館)에 있다.
【학교】 향교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내야역(內野驛)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서원(西院)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다견원(茶見院) 현의 북쪽 29리에 있다. 적현원(赤峴院)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경산원(京山院) 현의 북쪽 9리에 있다. 구곡원(仇谷院)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감물창원(甘物倉院) 감물창진(甘物倉津) 동쪽 언덕에 있다. 방문원(防文院) 현의 남쪽 11리에 있다.
【불우】 관룡사(觀龍寺)ㆍ자련사(紫連寺)ㆍ승지사(勝地寺) 모두 화왕산(火王山)에 있다. 연화사(蓮花寺) 비슬산(琵瑟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성산향(城山鄕) 현의 북쪽 23리에 있다. 화왕산고성(火王山古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천 9백 83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성 가운데 샘 아홉 개와 못[池] 세 개가 있었다. 신문부곡(薪文部曲)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옥천사(玉泉寺) 화왕산(火王山)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辛旽)의 어머니는 바로 이 절 종이다. 돈(旽)이 죽음을 당하자 절도 폐쇄되었는데, 뒤에 고쳐 지으려다가 완성되기 전에 돈(旽)의 일 때문에 다시 반대가 생겨 헐어버렸다.
【명환】 본조 금유(琴柔).
『신증』 박한주(朴漢柱)
【인물】 고려 장일(張鎰) 고종(高宗) 때 향리(鄕吏)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아, 공순하고 정직했으며 글을 잘했고 관리의 재목으로서 뛰어났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조광한(曺匡漢) 충렬왕(忠烈王) 때 사람으로 중시(重試) 괴과(魁科)에 뽑혀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 조자기(曺自奇)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조익청(曺益淸) 충혜왕(忠惠王)이 왕위를 이어받고 원(元) 나라에 있을 제, 정방길(鄭方吉) 등이 왕의 부자를 이간하였다. 이때 익청(益淸)이 충혜왕에게서 오자 충숙왕(忠肅王)이 불러 말하기를, “왕이 나를 따르던 신하들의 직책을 빼앗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비록 심왕(瀋王) 호(暠)가 왕이 된다 하더라도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내 원(元)에 들어가서 황제께 아뢰려 하는데 어떠냐?” 하였다. 익청은 더욱 부자간에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몹시 간절하게 역설하자, 충숙왕도 그 말을 받아들였다. 벼슬이 좌정승(左政丞)에 이르고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며 공민왕(恭愍王)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조계방(曺繼芳)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고향에 물러가 살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도(道)를 즐김)했다. 그의 시(詩)에, “한쪽 편에 듬성듬성한 울타리 이것이 내 집, 봄이 오면 산에 핀 꽃 사방으로 보이네. 회칠한 담 단청한 기둥이 제 어찌 오래 가랴? 혼자 뜰에 앉아 뜰에 가득한 달빛 사랑하노라.” ○ “세상 사람 부자만 부러워하고 가난은 싫다 하니, 뉘라서 이 강 마을 쓸쓸한 사람 기억하리. 그러나 하늘과 땅은 후하고 박함이 없어, 적막한 초가집에도 청춘(靑春)은 있네.” 하였다. 성여완(成汝完) 벼슬이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본조 성석린(成石璘) 여완의 아들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史館)에 뽑혔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 문하찬성사(藝文館大提學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본조(本朝)에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을 봉했고, 벼슬은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호(號)는 독곡(獨谷)이요,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글씨도 중진 대우를 받았다. 성석용(成石瑢) 석린의 아우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普文閣大提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성석인(成石因) 석용의 아우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고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성엄(成揜) 석연의 아들로 벼슬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고 시호는 공도(恭度)다. 성억(成抑) 엄의 아우로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고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성개(成槪) 석용(石瑢)의 아들로 해서(楷書)를 잘 썼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 이르렀다. 성염조(成念祖) 엄(揜)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고 시호는 공혜(恭惠)다. 성봉조(成奉祖) 염조(念祖)의 아우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뽑히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조석문(曺錫文) 과거에 급제하여 세조조(世祖朝) 때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뽑히고 이시애(李施愛)를 쳐서 이기고 돌아와서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어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성임(成任) 염조(念祖)의 아들로 사람됨이 너그럽고 아담하며 시(詩)를 잘하고 글씨를 잘 썼다. 벼슬이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성간(成侃) 임(任)의 아우며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벼슬이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에 이르렀지만 겨우 30세에 죽어서 사람들이 애석히 여겼다. 진일집(眞逸集)이 있다. 조효문(曺孝門) 석문(錫文)의 당숙(堂叔)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참례하고 벼슬이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으며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 성건(成健) 엄의 손자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고 시호는 문혜(文惠)다.
『신증』 성준(成俊) 엄(揜)의 손자로 과거에 급제, 연산조(燕山朝) 때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시호는 명숙(明肅)이다. 성현(成俔) 간(侃)의 아우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대제학(大提學)으로 있었고 시호는 문대(文戴)다. 허백당집(虛白堂集)이 세상에 전한다. 성희안(成希顔) 자는 우옹(愚翁)이며,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강개(慷槪)하고 큰 절개가 있으며 아는 것이 많았다. 연산조(燕山朝) 말년에 종사(宗社)가 장차 무너지는 것을 보고 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과 함께 계획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았다.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성담년(成聃年) 개(槪)의 손자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성질이 소탈하고 정직하여 재산 증식을 일삼지 않았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성몽정(成夢井) 담년(聃年)의 아들이다. 과거에 뽑혀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성운(成雲) 개(槪)의 증손(曾孫)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성세정(成世貞)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이르렀다. 성세순(成世純) 세정(世貞)의 아우다. 과거에 급제,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우거】 본조 장계이(張繼弛) 과거에 급제, 벼슬이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렀고, 이학(理學)에 조예가 깊었고 조행(操行)이 있었다.
【효자】 본조 박근인(朴近仁) 부모상을 당해서 3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영락(永樂) 8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박주(朴冑) 부모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이 세워졌다. 벼슬이 인산군사(麟山郡事)에 이르렀다. 박운(朴云) 나이 14세, 그 아우 운산(云山)은 8세 때였다. 그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가니 운이 조그만 도끼를 들고 운산(云山)과 함께 30여 보(步)를 쫓아가면서 하늘을 부르며 크게 울자, 범이 버리고 갔다. 운(云)은 시체를 업고 운산은 도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문이 세워졌다.
【열녀】 고려 윤씨(尹氏) 진사(進士) 양호생(梁虎生)의 아내다. 나이 23세에 과부가 되자 외삼촌 판사(判事) 성윤덕(成允德)이 다시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 뜻을 뺏지 못하였다. 51세에 죽었다. 이기(二紀 1기(紀)는 12년)를 수절(守節)하는 동안 집안이 화목하니 국가에서 그의 절개와 행실을 가상히 여겨 비석과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신증』 본조 강씨(姜氏) 하호(河濩)의 아내다. 호(濩)가 여러 해 풍질(風疾)을 앓는 동안 약을 매우 정성껏 썼다. 남편이 죽자 슬픔이 지극했으며 초상을 마친 뒤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인조 9년에 혁파되어 영산현(靈山縣)에 속하였다. 반역(反逆)의 변란 때문이다. 15년에 나누어 설치하였다.
【방면】 현내 끝이 5리다. 고암(高巖)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다. 성산(城山)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다. 합산(合山) 서쪽으로 15리, 끝은 30리다. 대곡(大谷)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다. 옥야(沃野) 서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다. 이언(利彦)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다. 장유(長遊)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다. 지포(池浦)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다. 대송(大松) 위와 같다. 창락(昌樂)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다. 어촌(漁村) 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다. 남곡(南谷)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다. ○ 신문부곡(薪文部曲)은 남쪽으로 20리다. 성산향(城山鄕)은 북쪽으로 23리인데 지금의 성산면(城山面)이다.
【봉수】 태백산(太白山) 서북쪽으로 30리다.
【창고】 읍창(邑倉)ㆍ사창 대곡면(大谷面)에 있다. 감물창(甘勿倉).
【진도】 박지곡진(朴只谷津) 박진(朴津)이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10리며 의령(宜寧)과 통한다. 우산진(牛山津) 서쪽으로 40리며, 초계(草溪)와 통한다. 마수원진(馬首院津) 서쪽으로 40리다. 감물창진(甘勿倉津) 서쪽으로 40리다. 만향정(滿香亭).
【사원】 관산서원 광해주(光海主) 경신년에 건립되고 숙종(肅宗) 신묘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정구(鄭逑) 충주(忠州) 조에 보라.
東至密陽府界二十七里,南至靈山縣界十里,西至草溪郡界四十一里,北至玄風縣界二十九里。距京都七百五十四里。
建置沿革
本新羅比自火郡。
一云比斯伐。眞興王十六年置下州,二十一年罷。景德王改
火王郡。高麗太祖改今名,顯宗屬密城郡,明宗置監務。本朝例改縣監。
官員 縣監,訓導。各一人。
郡名
比自火,比斯伐,火王,下州,昌山,昌城,夏城,夏山。
姓氏
本縣 張,成,鄭,曺,韓,表,河。六,一作“卞”。崔。竝來。
山川
火王山。在縣東四里。鎭山。
文房山。在縣西北三十里。
孝子菴山。在縣南二十五里。
合山。在縣北二十里。
琵瑟山。在縣北三十里。
楡南山。
在縣北十里。 馬峴。在縣北三十里。
甘勿倉津。在縣西四十一里。洛東江下流。又見草溪郡。
勿瑟川。在縣西十五里。有二源:一出火王山,一出楡南山。合流入梨旨浦。
南川。在縣南二里。源出火王山,入于靈山縣買浦津。
梨旨浦。在縣西二十五里。源出楡南山,入買浦津。
樓仇澤。在縣西二十五里。
盤介澤。在縣南三十里。
〔新增〕 龍壯澤。在縣西北二十里。周迴五里。
土産
竹箭,出火王山。鯽魚,石榴,五味子,白茯苓,白花蛇,蜂蜜。〔新增〕 甘草。有田。
烽燧
合山烽燧。南應靈山縣餘通山,北應玄風縣所山。
樓亭
不日樓。在客館西。○李之剛詩:“樓上風微日正長,薔薇花謝樹陰涼。怪來爽氣淸人骨,新竹千竿已過墻。”
澄源堂。在客館東。
〔新增〕 秋月軒。卽客館西軒。縣監朴漢柱構。軒北鑿池種蓮,累石爲島。○安琛詩:“月到中秋色政涵,小池荷淨水如藍。搖波散作東坡百,對影眞成李白三。吹面好風來細細,濕衣涼露落毿毿。一軒淸致詩難狀,題罷茫然意自慙。”
洗心亭。在公衙。
學校
鄕校。在縣北一里。
驛院
內野驛。在縣北七里。
西院。在縣西三里。
茶見院。在縣北二十九里。
赤峴院。在縣北二十五里。
京山院。在縣北九里。
仇
谷院。
在縣西二十五里。 甘勿倉院。在甘勿倉津東岸。
防文院。在縣南十一里。
佛宇
觀龍寺,紫蓮寺,勝地寺。俱在火王山。
蓮花寺。在琵瑟山。
祠廟
社稷壇。在縣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縣東一里。
厲壇。在縣北。
古跡
城山鄕。在縣北二十三里。
火王山古城。石築。周五千九百八十三尺。今廢。中有泉九、池三。
薪文部曲。在縣南二十里。
玉泉寺。
在火王山南。高麗辛旽母,乃此寺婢也。旽誅,寺廢。後改創,未旣,以旽之故,復有論列者,撤去。 名宦
本朝 琴柔。
〔新增〕 朴漢柱。
人物
高麗 張鎰。高宗朝以鄕吏登第,官至僉議參理。性溫恭正直,善屬文,長於吏才。諡章簡。
曺匡漢。忠烈王時人。捷重試魁科,官至政堂文學,封昌城君。
曺自奇。登第,累官至平章事。
曺益淸。忠惠王襲位在元,鄭方吉等交構王父子。時益淸自忠惠所來,忠肅召謂曰:“王奪吾從臣職,何也?雖潘王暠爲王,豈至如此?吾欲如元奏帝,何如?” 益淸力陳父子相傳之法,言甚切至,忠肅納之。累官至左政丞,封夏城府院君。諡襄平。配享恭愍王廟庭。
曺繼芳。
登第,官至直提學。退居于鄕,安貧樂道。有詩云:“一面疎籬是我家,春來不隔四山花。粉墻丹柱何能久?坐愛庭中月色多。” ○“世間從富不從貧,誰記江村冷瘦人?唯有乾坤無厚薄,寂寥茅屋亦靑春。” 成汝完。官至昌寧府院君。諡文靖。
本朝 成石璘。汝完之子。恭愍朝登第,選補史館,累遷至藝文館大提學、門下贊成事。本朝佐命功臣,封昌寧府院君,官至左政丞。號獨谷,諡文景。筆法爲一時所重。
成石瑢。石璘之弟。登第,官至寶文閣大提學。諡文肅。
成石因。石瑢之弟。登第,官至禮曹判書。諡靖平。
成揜。石因之子。官至同知中樞院事。諡恭度。
成抑。揜之弟。官至判中樞院事。諡僖靖。
成槪。石瑢之子。善楷書。登第,官至京畿觀察使。
成念祖。揜之子。登第,官至知中樞院事。諡恭惠。
成奉祖。念祖之弟。佐理功臣,封昌城府院君。官至右議政。諡襄靖。
曺錫文。
登第。世祖朝佐翼功臣。征李施愛,奏凱而還,爲敵愾功臣,拜領議政,封昌寧府院君。諡忠簡。 成任。念祖之子。爲人寬厚博雅,能詩善書。官至議政府左參贊。諡文安。
成侃。任之弟。文名重一時。官至集賢殿修撰。僅三十而卒,時人惜之。有《眞逸集》。
曺孝門。錫文從父弟。登第。參佐翼功臣,官至禮曹參判,封昌城君。
成健。揜之孫。登第,官至刑曹判書。諡文惠。
〔新增〕 成俊。揜之孫。登第。燕山朝,官至領議政,竟被殺。諡明肅。
成俔。侃之弟。登第,累官至禮曹判書,久典文衡。諡文戴。有《虛白堂集》行于世。
成希顔。字愚翁。早登第。慷慨有大節,多鑑識。燕山末,見宗社將顚,與朴元宗、柳順汀決策靖國。官至領議政,封昌山府院君。諡忠定。
成聃年。槪之孫。登第,官至正郞。性疎直,不事生産。有文名。
成夢井。聃年之子。擢第,官至吏曹參判。
成雲。
槪之曾孫。登第,官至兵曹判書。 成世貞。登第,官至開城府留守。
成世純。世貞之弟。擢第,官至吏曹參判。
寓居
本朝 張繼弛。登第,官至成均館司。成理學精博,有操行。
孝子
本朝 朴近仁。爲父母廬墓三年。永樂八年旌門。
朴冑。爲父母居廬三載。事聞旌閭。官至麟山郡事。
朴云。年十四,其弟云山年八,其父爲虎所攬。云持小斧,與云山追至三十餘步,呼天大哭,虎乃棄之。云負屍,云山執斧以隨。事聞旌閭。
烈女
高麗 尹氏。進士梁虎生之妻。年二十三而寡,舅判事成允德欲改嫁,不克奪志。五十一而歿。守節二紀,家門雍睦,國家嘉其節行,立石旌異之。
〔新增〕 本朝 姜氏。河濩妻。濩風疾累年,護藥甚謹。及歿,哀毁盡禮,喪畢猶不脫衰。事聞旌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