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4. 남평 문씨, 광거당과 수봉정사의 숨은 뜻
글·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회 사무국장)
프롤로그
대구 달성군 화원읍 남평 문씨 인흥 세거지(南平文氏仁興世居地)에는 모두 열두 채의 집이 있다. 아홉 집은 주민들이 거주하는 민가요, 세 집은 공공건물이다. 공공건물은 다시 두 개의 재실과 한 개의 문중문고(門中文庫)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두 개의 재실이 수봉정사(壽峰精舍)와 광거당(廣居堂)이다. 그런데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이 두 재실을 보면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집이 너무 크고 화려하다는 점이다. 유가의 미덕중에는 ‘검소’라는 덕목이 있다. 옛 선비들이 거처를 마련할 때 그 규모를 검소하게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남평 문씨 세거지에 있는 이 거대한 규모의 두 채의 재실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의문에 대한 답, 기문에서 찾다
스토리텔링에 있어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스토리가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스토리보다 더 재미있을까?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보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롭고 감동을 줄때가 많기 때문이다. 필자가 재실을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라고 하는 것은 다 그 까닭이 있어서이다. 기본적으로 재실 스토리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왜냐하면 관련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실을 답사해보면 대부분의 재실들이 대청 벽에다 각종 ‘기문(記文)’을 걸어놓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창건기문에는 재실의 창건에 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중건기문에는 재실의 중수나 중건에 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건기문에는 재실을 옮기게 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상량문·집사분정판·관리규칙·시판(詩板) 등이 걸려 있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기록들로 인해 재실 스토리는 경쟁력과 함께 스토리텔링의 보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제기한 광거당과 수봉정사가 크고 화려한 까닭. 이 역시 기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만 권의 서책과 수많은 선비들을 모셔야 할 곳
광거당 기문은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1873-1933) 선생이 지었다. 선생은 구한말 영남의 큰 선비였다. 창녕 출신인 선생은 일제에 의해 국권이 유린되자 비슬산 동쪽 지금의 가창면 정대리에 정산서당(鼎山書堂)을 열고 두문불출했다. 만년에는 비슬산 서쪽인 현풍면 쌍계리에 쌍계서당[구계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선생은 정산서당 시절 산 너머 인흥의 문영박 선생을 자주 찾았다. 「광거당기」에 의하면 선생은 일 년 중 5분의 1을 인흥에서 보냈다고 한다. 바로 그 시절에 문영박 선생이 광거당을 짓기 시작했고, 조긍섭 선생에게 광거당기를 부탁했던 것이다. 아래는 「광거당기」 시작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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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년(1910년) 여름에 내가 인흥의 집으로 장지[문영박의 자(字)]를 찾아가니 그때 그는 큰 병을 앓다가 막 나아서 집[광거당] 짓는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도끼로 다듬고 자귀로 깎으며 삼태기로 메우고 삽으로 나르는 자들의 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기둥과 처마와 서까래와 담장과 섬돌이 높이 솟고 넓게 점유한 것이 하늘의 절반을 차지하고 백묘(百畝)에 달했다. 내가 속으로 너무 호화로운 것이 아닌가 하고 괴이하게 여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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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의 눈에도 너무 넓고, 호화로워 보이는 광거당이 그때 그 시절의 사람, 그것도 유학을 공부한 선비의 눈에는 오죽했을까! 「광거당기」는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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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君·문영박]이 말하기를, “이것은 제 부친의 뜻입니다. 부친은 일평생 당신을 위한 생활은 몹시 검박하게 하셔서 평소 기거하시는 방은 발을 뻗기에도 비좁았지만 이 집에 대해서만큼은 말씀하시기를, ‘이곳은 만 권의 서책을 모셔둘 곳이다. 사방의 명사와 귀인들이 말과 수레를 몰고 몰려올 곳이며 유생과 학자들이 책을 읽고 학문을 연마할 곳이다. 이와 같이 크지 않으면 그 수요에 걸맞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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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거니, 그럼 그렇지. 건물이 크고 화려했던 이유가 있었다. 문영박 선생은 아버지인 문봉성의 뜻을 받들어 광거당을 지었다. 그런데 기문에서 보다시피 문봉성의 생전 거처의 규모는 두 발을 뻗기에도 부족했다고 한다. 하지만 광거당 만큼은 넓고 크게 지을 것을 아들에게 명했다. 이곳에다 만 권의 서책을 모실 것이고, 이곳으로 수많은 학자들을 불러 모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거처는 검소함을 지키되, 책을 보관하고 학문을 논하는 공간만큼은 그에 걸맞게 크고 화려하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계인지지(繼人之志) 술인지사(術人之事)
광거당도 광거당이지만 수봉정사도 보통 건물이 아니다. 규모도 규모지만 사용된 목재의 품질과 치밀한 건축수법이 광거당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수봉정사기」는 구한말 영남에서 ‘좌심재 우회봉(左深齋右晦峰)’이라 칭송된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1870-1946) 선생이 지었다. 「수봉정사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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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의 군자(君子)들은 항상 그 다하지 못한 것을 남겨 후세에 물려주고 자손들은 반드시 조상이 다하지 못한 것을 넓히고 키워서 다하게 하였으니 전(傳)에 이른바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고 아버지의 일을 서술한다[繼人之志 術人之事]’는 것이니, 그 도리가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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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하자면 군자가 스스로 다하지 못한 것을 후인들을 위해 남겨 두었듯이, 아버지 역시 아들을 위해 일을 남겨둔다는 뜻이다. 이 말에 걸 맞는 예가 바로 광거당과 수봉정사이다. 앞서 살펴본 광거당은 문봉성 선생의 생각을 아들인 문영박 선생이 그대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에 반해 수봉정사는 문영박 선생의 뜻을 그의 다섯 아들이 실천에 옮긴 것이다. 말 그대로 ‘繼人之志 術人之事’이다. 광거당과 수봉정사. 매번 이 두 건물을 대할 때 마다 느껴졌던 알 수 없는 무게감에는 결국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수봉정사는 다른 말로 수백당(守白堂)이라고도 한다. 현재 수봉정사는 수백당으로 편액이 되어 있다. 몇 년 전까지는 수봉정사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근년에 수백당으로 교체되었다.
에필로그
안동의 도산서원은 앞쪽의 도산서당과 뒤쪽의 도산서원이 합쳐진 형태이다. 도산서당은 정면 3칸의 작은 집으로 가운데 방이 퇴계 선생 생전의 거처였다. 그런데 방바닥을 보면 방 북벽 아래의 바닥높이가 다른 곳 보다 한 뼘 정도 높다. 선생께서는 이곳에다 책을 두었다고 한다. 선인들의 귀한 말씀을 담고 있는 책을 그냥 방바닥에 둘 수 없어서였다. 만 권의 서책을 모셔둘 곳이기에 크고 넓어야 한다는 문봉성 선생의 생각, 이를 실천에 옮겼던 아들 문영박 선생과 또 그의 다섯 아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헤아려가며 기문을 지었던 조긍섭·하겸진 선생. 군자로서의 삶을 살다 가신 이 어른들이 눈물 나게 그리운 요즘이다.
광거당은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 ‘거천하지광거(居天下之廣居) 입천하지정위(立天下之正位) 행천하지대도(行天下之大道)’에서 취한 것이며, 수백당은 문영박 선생의 당호(堂號)로 청렴결백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광거당과 수봉정사에서 모셔오던 서책들은 지금은 수봉정사 옆 인수문고(仁壽文庫)에 모셔져 있다.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