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2. 한 편의 드라마틱한 역사,
박팽년 선생의 유복손(遺腹孫) 박일산
‘유복자(遺腹子)’라는 표현이 있다. 뱃속에 남겨진 자식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아이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유복손(遺腹孫)’이라는 표현도 있다. 이는 아이의 할아버지와 관련이 있다. 즉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아이의 할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이는 유복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아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심지어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까지 모두 돌아가시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아이는 유복손이자 유복자가 된다. 한마디로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참 딱한 아이가 아닌가!
1. 아! 박팽년 선생이여
옛글을 보면 인물에 대한 서술에는 나름 정형화된 틀이 있다. 마치 요즘의 ‘자기소개서’ 양식처럼 말이다. 만약 박팽년 선생을 소개하는 글을 옛날식 자기소개서 양식에 맞춰 한 번 작성해보면 어떨까?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참고로 글의 스타일까지 옛날식으로 하면 요즘 사람이 읽기에 너무 힘들 것이니, 문투는 적당히 하는 것으로 하자.
선생의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417년[태종 17]에 태어나 1456년[세조 2]에 졸하였다.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고려 개국공신인 삼중대광 박영규와 고려에서 정승을 지낸 평양군 박난봉을 먼 선조로 한다. 중시조이자 1세조인 고려 보문각 대제학 박숙정이 선생의 고조이며, 증조는 고려 전서 박원상이다. 조는 사후에 이조판서에 증직된 박안생이며, 부는 이조판서 문민공 박중림이다.
선생은 박중림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지금의 대전시 동구 가양동[또는 세종시 전의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기가 있어 세상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6세인 1432년[세종 14]에 생원시에 합격, 17세인 1434년[세종 16]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해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되었다. 31세인 1447년[세종 29]에 중시에 합격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 및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선생은 문장·도덕·경학에 밝았으며 서화에도 재능이 있어 세종 때의 각종 편찬사업에도 직접 관여했다. 특히 선생은 집현전 학사 시절 ‘경술·문장·필법’이 모두 좋아 동료 학사들로부터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최고의 칭호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40세인 1456년[세조 2]에 사육신 사건의 주모자로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그 후 선생은 1691년[숙종 17]에 신원·복관되었다. 세상을 떠난 지 무려 235년 만에 비로소 충신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1758년[영조 34]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렸다.
선생을 추모하는 서원·사우 및 유적지로는 ‘사육신묘[서울]·유허지[대전]·불천위사당[충주]·창절서원[영월]·세거지[세종]·동학사 숙모전[공주]·육신사[대구]·충곡서원[논산]·숭절사[대전]·집터[서울]’ 등이 있다.
한편 선생의 부친인 박중림(朴仲林)은 세종 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경기 관찰사를 지냈다. 문종 때는 공조참판으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으며, 집현전·예문관·수문전 대제학을 역임했다. 게다가 집현전 학사로 이름이 났던 박팽년·성삼문·하위지 같은 인물을 아들과 제자로 두었으니 그야말로 당대의 명신이자 대학자였다. 이렇듯 박중림·박팽년 부자는 조선 전기 ‘세종·문종·단종’ 조에서 왕좌지재(王佐之才)[왕을 보필하는 뛰어난 인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러나 1456년[세조 2] 음력 6월, 이들 부자를 비롯한 그 가족들은 참혹한 화를 당했다. 부자를 포함한 박팽년 선생의 남동생 4명과 3명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3대에 걸쳐 9명의 남자가 죽임을 당했다. 또한 이들의 부인·며느리·딸 등은 모두 관청이나 공신의 노비가 되었다. 세상은 이 끔찍했던 일을 ‘사육신 사건·단종복위운동·병자사화·병자화란’ 등으로 칭하고 있다. 일단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육신 사건의 전말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455년[세조 1] 윤 6월. 세조는 자신의 조카이자 조선 제6대 임금이었던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조선의 제7대 임금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년 뒤인 1456년[세조 2] 6월, 비극적인 사건이 터진다.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으로 일컬어지는 여섯 충신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추진 중이던 단종복위운동이 그만 탄로가 나고 만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사육신은 물론 무려 200여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세상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난 해가 병자년(丙子年)이므로 이를 ‘병자화란’ 또는 ‘병자사화’라고도 한다.
사육신 사건은 ‘김질(金礩)’이라는 한 밀고자에 의해 거사를 해보지도 못하고 실패한 사건이다. 당시 세조는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연회를 열 계획이었다. 이때 연회장에 별운검(別雲劍)[경호원]을 세우기로 했는데 여기에 선발된 이가 성승·박쟁·유응부 등이었다. 이들 별운검이 연회장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복위시킨다는 것이 단종복위운동의 전모였다. 하지만 희대의 모사꾼 한명회(韓明澮)에 의해 별운검 배치 계획은 취소된다. 연회장이 너무 좁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하튼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거사에 동참했던 인물 중 한 명이 배신을 하고 말았다. 바로 김질이라는 자다. 결국 김질의 밀고로 인해 단종복위운동은 실패했고, 수백 명의 사람이 이 일에 연루되어 화를 당했다.
당시 박팽년(朴彭年) 선생은 국문을 받은 후 옥중에서 졸하였고, 류성원(柳誠源)은 자신의 집 사당에서 자결을 하는 등 무려 200여명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그중에서 특히 사육신(死六臣)의 죽음은 정말 참혹했다. 먼저 혹독한 고문을 가한 뒤 사지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을 행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박팽년·류성원 두 선생의 경우는 그 시신을 거두어 다시 거열형에 처했다.
그런데 거열형으로 형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육신의 머리는 저자거리에 내걸렸고, 찢기고 토막이 난 사지는 소금에 절여져 팔도에 내려 보내졌다. 반역(?)을 도모한 자의 비참한 최후를 백성에게 보이고자 함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육신을 포함한 주모자의 경우는 3대를 멸족시켜 그 가문의 씨를 완전히 말려버렸다. 이처럼 3대를 멸족시킨다는 것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박팽년 선생을 예로 들어 한 번 살펴보자.
선생의 부친인 박중림은 당시 현직 이조판서의 신분으로 단종복위운동에 직접 가담했으니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선생의 동생인 ‘박인년·박기년·박대년·박영년’ 네 형제도 모두 죽임을 당했으며, 선생의 세 아들인 ‘박헌·박순·박분’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처럼 남자의 경우는 3대에 걸쳐 9명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사육신 사건 주모자의 여성들은 ‘대명률(大明律)[중국 명나라 법전]’에 의거해 공신 또는 관아의 노비로 보내졌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의금부에서는 이 일을 두 달이 넘도록 시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의금부 관헌의 입장에서는 한때 조정의 중신이자 자신의 동료이기도 했던 인물의 처·첩·딸·며느리를 하루아침에 노비로 만드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결국 보다 못한 세조가 직접 나서 공신에게 분배할 명단을 작성했다고 한다. 이로써 충신의 여인네들이 하루아침에 노비가 되고 말았다. 당시 세조는 박팽년(朴彭年) 선생의 부인을 정인지(鄭麟趾)의 집 노비로 보내버렸다.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사육신의 경우는 3대를 멸족시켰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말이다. 따라서 사육신 가문은 후대에 와서 별도로 양자(養子)를 세우지 않는 한 그 대를 이어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참 묘한 일도 다 있다. 사육신 여섯 인물 중 박팽년 선생은 ‘양자’가 아닌 ‘직계 혈육’으로 지금까지 대를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달성역사인물 동산에 세워져 있는 취금헌 박팽년 선생 흉상
육신사에 봉안된 박팽년 선생의 위패(位牌). ‘충정공취금헌박선생(忠正公醉琴軒朴先生)’
영월 장릉[단종의 능] 배식단에 올라 있는 충신위(忠臣位) 32인의 위패. 붉은 표시 안에 박중림(朴仲林) 이하 사육신의 이름이 보인다. 위패 가장 오른쪽에 안평대군(安平大君), 가장 왼쪽에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嚴興道)의 이름도 보인다.
영월 장릉 배식단에 올라 있는 조사위(朝士位) 186인의 위패. 붉은 표시 안에 박팽년 선생의 동생인 ‘기년·인년·대년·영년’과 선생의 아들인 ‘헌·순·분’의 이름이 보인다.
2. 아! 박일산[박비]이여
세조에 의해 3대가 멸족되는 화를 입은 박팽년 선생의 가문. 상식적으로는 대가 끊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 가문은 그렇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무려 560년의 세월이 넘도록 선생의 직계 후손들이 이곳 묘골에서 대를 이어 번창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묘골 순천 박씨문중 번창의 출발은 선생의 둘째 며느리였던 성주 이씨 부인에 있다.
사육신 사건 당시 성주 이씨 부인은 임신 중에 있었다. 다시 말해 부인의 뱃속에 박팽년 선생의 유복손이자, 선생의 둘째 아들인 박순(朴珣)의 유복자가 잉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말 하늘이 도운 것일까? 충신의 여인들이 노비로 보내질 때, 성주 이씨 부인은 자신의 친정인 묘골 인근 대구 관아의 관비로 보내진 것이다.[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1456) 9월 7일 기사에는 그녀(옥덕·玉德)가 자신의 손위 동서(경비·敬非)와 함께 외삼촌인 이조참판 구치관의 집 노비로 보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지금의 묘골은 순천 박씨 집성촌이지만 본래 이곳은 성주 이씨의 세거지였다고 한다. 여하튼 시간이 흘러 부인이 묘골 친정집에서 해산을 하던 날, 세조의 엄명이 있었다.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노비로 만들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상황이 그리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이와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접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이점에서는 560년 전 묘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이쯤 되면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2가지 시나리오 중 어느 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첫 번째는 의문의 인물이 나타나 아들을 빼돌린다. 두 번째는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여자아이와 바꿔치기 한다.
묘골 박씨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한다. 성주 이씨 부인이 아들을 낳고, 친정집 여종이 딸을 낳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자식을 바꿈으로써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박팽년 선생의 손자(孫子)는 박씨 성을 가진 천한 노비라는 뜻의 ‘박비(朴婢·朴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여종의 아들로 살아가게 된다. 그로부터 17년 뒤, 박비의 나이가 17세[1472년·성종 3]가 되자 비로소 그는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박비의 이모부였던 이극균(李克均)[1437-1504]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다.[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 시기에 이극균은 경상도 관찰사가 아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이 된다.] 이때 이극균은 17년 동안 묘골에 숨어 살던 조카 박비를 만나 자수를 권했다. 당시의 왕은 세조·예종을 거쳐 성종(成宗)이었다. 왕실에서 사육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때까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세상 사람이 사육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왕실과는 달랐다.
박비는 서울로 올라가 자수를 했다. 성종은 그의 자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사육신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귀한 혈육이라는 의미에서 ‘일산(壹珊·一珊)’이라는 새로운 이름도 지어주었다. 이로써 박팽년 선생의 유복손 ‘박비’는 17년간의 비밀스런 자신의 과거를 정리했다. 그리고 성종 임금이 내려준 ‘박일산’이라는 이름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박일산의 나이 24세 되던 1479[성종 10]년, 자신을 20여 년간 길러준 묘골 외가 성주 이씨 문중에 무슨 변고가 있었던 모양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묘골 문중의 가전(家傳)에 의하면 당시 외가의 재산이 모두 외손인 박일산에게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박일산은 그 재산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숨어 자란 외가 곳 묘골에다 99칸 종택을 짓고 정착을 했다.
여기까지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박팽년 선생의 후손인 순천 박씨 충정공파(忠正公派)가 터를 잡게 된 내력이다. 어떠한가! 묘골 박씨의 내력이 정말 ‘드라마틱’하고 ‘서프라이즈’하지 않은가!
묘골 모형. 상단의 붉은 색 경계 안쪽이 육신사 경내이다.
이 육신사 일원에 과거 박일산이 지었다는 99칸 종택이 있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