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 중인 태극기 전시전 보도(1882년 6월 제작 태극기 도안, 수업에서 소개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gYngIUGR3M
그럼 이 도안을 누가 만들었고, 여기에 조선 외교관 박영효, 조선 통역관 이응준, 청국 고문 마건충이 어떻게 개입했는가에 대한 "결론이 안 난 여러 학설"에 관해서는 이하 첨부파일 참조바랍니다.
마건충의 개입에 관해서는 권석봉 선생님의 논문 49∼52쪽을 특히 참조.
<청국문답>을 보면, 태극기는 조선인들, 중국인들, 미국인들의 "집단지성"의 창작물이 되네요...
현재까지 한국사학계 정설로 확립된 1959년 이선근 논문입니다. 태극도안 독자 창작 주장입니다.
논문에 한자가 많아서 원문 빼고 한글로 바꿔서 이 부분을 아래에 풀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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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문답(淸國問答)」에 보면 바로 그 내용이 되어 있는 바「初六日往淸船問答」이 그것이다.
“馬建忠은 金弘集과의 筆談途中 다음과 같이 問題를 擡頭시켰으니 現有一事奉告 貴國不可無國旗 以示遠人 昨李應俊袖知旗式以與日本相混 貴國旗式究竟何若 前黃贊謂貴國宜用中國龍旗 以觀之 似亦未妥” 라고 하였다.
즉 마건충은 조선에도 불가불 국기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리고 황준헌의 제안인 소위 「宣用中國龍旗」에 대하여서는 「似亦未妥」라 하여 반대하는 태도를 명백히 하였다. 마건충이 말한 가운데 주목을 끄는 것은 명백한 일자를 밝히고 있지 않으나 이응준에 의하여 일본의 국기와 相混되는 국기 도식이 일단 그에게 제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응준은 마건충이 來朝한 이후 양측의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수시로 그와 접촉하고 있으므로 「李應俊袖知旗式」하였다는 사실은 양인이 접촉하기 시작한 3月 22日부터 4月 5日까지 사이에 있었던 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였다고 하는 국기 도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似與日本相混」하였다는 것을 보던지 또는 同書 「十一日南館別時問答」에 김홍집이
李應俊鑒正本 謂與日本相混 若用紅質中 青白合成圈子 則可免相混否
라고 한 것을 보면 일본의 국기와 유사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여하간 김홍집은 이러한 마건충의 의견에 대하여
此論良是 更乞明敎
하고 하여 찬성을 표시하고 그의 교시를 요청하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마건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즉 그 하나는
國旗以昭示各國 甚難定式 僕當歸府乃可 仍問貴國王服用紅色蟒袍否
라 하여 국기의 定式이 매우 어렵다고 하면서, 조선국왕의 복식에 관하여 질문한 것이요, 또 하나는
貴國色尚白否
라 하여 일반 서민들이 즐겨하는 것이 백색인가를 질문한 것이니, 김홍집은 전자에 대하여서는
雲文紅袍 兩肩及胸背金繡外降龍
이라 하였고, 후자에 대하여서는
朝服服着 多尙靑 然庶民喜白色 此乃殷太師遺風云
이라 회답하고 있다. 마건충은 이러한 문답을 듣고 난 후 국기 도식에 대한 그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吾想貴國國旗 可用白底青雲紅龍 惟龍用四爪 暗示區劃 何以區別只在四爪五爪耳. 靑雲者亦取雲從龍之意 君臣以爲本 故質用白色
이라 하여 백색 바탕에 청운과 홍룡을 도식으로 하되 다만 용에는 四爪를 써서 중국의 龍旗와 구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 하였으니 이러한 국기의 모식은 그가 설명한 바와 같이 국왕의 복색 문양과 조선의 복색 및 백의를 기초로 하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이때에 마건충이 제안한 국기의 도식이 청국과 같은 용기는 용기이되 「白底青雲紅龍」였다는 것은 청국의 그것과 다른 구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술한 時事新報에서 일인이 국기에 대하여 논평한 가운데 「삼각형 푸른 바탕의 용기」를 마건충이 권고하였다는 설은 어느 면으로 보나 날조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아울러 여러 학설 정리는 아래 참조. 이하 정리한 것과 첨부파일 제공은 금요영역회의 손철배 교수님 제공입니다.
국기 제정의 유래에 대한 학설들
(1) 조선정부의 자주적인 판단에 의한 국기 (태극기) 제정과 최초의 공식적 사용
이선근 : 1882년 8월 임오군란 후 수신사로 일본에 가게 된 박영효가 고종으로부터 국기 제정 권한을 위임받아, 일본 汽船 明治丸 선상에서 영국 총영사 (W. G. Aston)과 영국인 선장 (James) 등과 太極 八卦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하다가 太極 四卦 도안을 국기로 결정하고 제작하여, 고오베에 상륙한 이래로 기회 있을 때마다 (숙소, 외교사절의 연회 등) 게양, 사용하였음. 아울러 박영효는 본국 機務處로도 상세한 경위를 보고하여, 마침내 1883년 1월 27일에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所啓로 조선정부가 전국에 국기의 제정사용을 최초로 공식으로 반포하게 되었음.
이선근, 「우리 국기 제정의 유래와 그 의의」 『국사상의 제 문제』 제2집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단기 4292년 7월)
한철호 : ‘박영효 태극기’ 사본과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제작한 ‘조선국기’ (Corean National Flag)원형을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The National Archives)에서 2008년 1월 발견함. 그러나 ‘박영호 태극기’는 조미조약시 사용한 ‘이응준 감정본’을 모본으로 삼았다고 함.
한철호,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 (박영효 태극기 1882)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제작 국기 (1884)의 원형 발견과 그 역사적 의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년 12월), 125–87.
(2) 조미조약 체결 직후, 馬建忠이 김홍집에게 太極 八卦 도안을 제안하였고, 이것이 박영효가
일본으로 건너 갈 때 휴대하여 제임스 선장에게 자문했던 태극 팔괘 도안임.
권석봉, 「국기 제정의 유래에 대한 管見」 『역사학보』 23 (역사학회: 1964년 4월), 41–54.
(3) 슈펠트의 조선국기 제작권고에 따라 스와타라호 함상에서 조선관리 (김홍집, 이응준)이 太
極圖形旗를 제작하여, 1882년 5월 22일 조미조약 조인식 때 성조기와 나란히 태극도형기를 게
한 것이 한국 최초의 국기 사용임.
김원모 역주, 「조미조약 체결사」 (The History of the Treaty with Korea, 1898: Shufeldt의 memoir)
『사학지』 25권 0호 (단국사학회, 1992), 187–209.
노영돈, 「태극기의 국기로서의 최초 사용과 인천」 『인천학연구』 26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7년 2월), 185–225.
(4) 태극기의 국기로서 성립과정을 single track으로 추적하지 말고, 복합적이고 협력적 과정으로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