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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성은 고중상의 지휘 하에 굳건한 임전태세를 갖추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려가 다물한(되찾은) 땅 발해군渤海郡의 욕살褥薩이자 고려성의 성주인 진국장군振國將軍 고중상은 직접 망루에 올라가 적들의 동태를 관찰하며, 상기된 표정으로 그들의 진격로를 헤아리고 있었다.
“이십여 년 전처럼 정주定州(하북성 정주시)에 집결한 대군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네. 주력 부대는 유주幽州(북경) 쪽으로 올라가고, 일부 군사가 동진東進해 우리에게 다가올 걸세.”
고중상은, 뛰어올라온 부장副將에게 말하며 묻는다.
“척후병의 연락은 없는가?”
“방금 전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척후병의 보고에 의하면, 우리 쪽으로 동진해오는 군사들은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회로를 택해 우리 고려성을 기습하려는 작전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의 군사력을 분산시키려는 적의 유인술인지도 모르니, 좀 더 두고 보세.”
당나라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동쪽의 고려성 및 그 인근 발해바다 서북 연안에 흩어진 몇몇 성채들을 무시한 듯, 동북쪽으로 유유히 올라가 요수遼水(북경시를 서북-동남으로 관통하는 영정하나 바로 그 동편의 조선하[조하] 혹은, 동편으로 더 나아간 난하灤河)를 건너 요동신성新城(정확한 위치불명)의 서남쪽 산으로 가서 성책을 쌓았으니 이때가 서기 667년 정월 하순<신당서>, 아니면 2월초다<구당서>.
요동신성은 중원의 군대가 요동으로 들어가고자 할 때 반드시 질러가야 할 요새로서, 그냥 우회할 경우 고려군의 집결지가 될 수 있어 후환이 두려운 곳이다.
한 차례 공방전이 있은 후, 신성의 장수인 사부구師夫仇는 반역을 일으켜 성주를 결박하고 이세적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신성을 공격한 이세적의 군대가 가로막힌 여러 강들을 거칠 것 없이 건너고, 이에 북동쪽의 열여섯 개 성은 별다른 저항 없이 줄줄이 당군에 항복한다.
고중상은 고려성에서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고려성에서 봉수烽燧를 올렸을 때 곧장 응답했을 요수 동편 지방의 제성들이 맥없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여보게 부장,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고중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래도 연씨들(연개소문의 아들들)의 독재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중앙의 연씨 군대가 성마다 와서 우리 고씨 황족들을 억압하니, 분노가 폭발했을지도 모릅니다.”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한 후, 연개소문과 그 아들 연남건의 독재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고구려 장수들은 연달아 당나라에 백기를 들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신성의 장수 사부구가, 당나라로 가버린 연남생의 끄나풀이었는지도 모르네. 요동의 제성들도 연남생을 지지하고자 당군에 항복했을 수도 있어. 이건 필시 연남생이 앞장서서 당군을 이끌고 온 전쟁임이 분명하네.”
고중상의 추측은 일리가 있었다. 이 전쟁에 앞장 선 이들이, 연남생과 그가 거느린 군사들, 즉 당군에 투항한 고구려군이었다<연남생묘지명>.
“그렇다면 우리 최전방의 몇 개 성은 남북서 삼면으로 적군에 에워싸이고, 동으로는 발해바다에 막혔으니, 고립무원의 처지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까?”
“참새도 짹 하고 죽는다는 말처럼, 끝까지 고구려의 혼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수 밖엔 없네. 동편의 동서압록東西鴨綠(요하와 압록강 사이, 요동반도) 제성으로부터 바다 건너 원군이 올 가망성은 거의 없겠지?”
그러나 당나라군은 발해 서편 땅에 고립된 고중상 세력쯤이야 독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고구려 황성인 평양성을 표적으로 삼고 있는지, 그를 내버려두었다.
어쩌면 후자가 옳을지도 모른다. 이십여 년 전 당 태종 이세민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안시성에 도착한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그 때 당나라의 여러 장수들 사이에서는, 안시성을 버려두고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태종 이세민의 처남인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수양제의 평양성 패전을 거론하며, 안시성과 건안성부터 먼저 빼앗아 후방의 불안을 없앤 후 안전하게 전진하자고 강력히 주청했다.
삼십여 년 전 수양제는 성급하게 평양성을 먹으려다 처절한 굴욕을 당한 바 있었다. 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 군대 113만은 을지문덕 장군의 신 같은 전략에 걸려 궤멸되고 만다. 선봉 30만 대군 가운데 살아 돌아간 이는 겨우 수천 명이었다니, 세계 전쟁사상 그런 어처구니없는 패배는 드물 것이다.
태종 이세민은 수양제의 수치를 거울삼아, 장손무기의 견해를 따라서 뒤부터 안전하게 정리한 후 평양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안시성 싸움에서 태종은 참패를 당하고, 목숨은 겨우 부지했으나 눈에 부상까지 입은 몸으로 퇴각해야 했다.
그는 이 때 대對고려 출정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탄식했었다.
“아, 만일 위징魏徵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고려출정을 하지 못하도록 말렸을 것이다.”
참고로, 태종이 그토록 의지했던 명재상 위징과 방현령 등은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였다는 기록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나온다.
수양제의 치욕과 이십여 년 전 당태종의 피눈물을 거울삼아, 군대의 진격방향을 세밀히 물색하던 당나라 장군 이세적은, 괴물 같은 안시성에 대한 공략은 포기한 채, 요하(당시의 요수와 다른, 현대의 요하) 서쪽의 일부 성들을 장악하고 위무하는 한편, 충분한 군량과 보급로를 확보한 후, 고구려가 일부러 비워놓은(단재 신채호의 견해) 난하 동편의 다른 몇몇 성들만을 무너뜨린다.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고구려와 당 사이에서는 건곤일척의 대전이 벌어지고 이듬해인 668년 2월 이세적은 요하를 건너 고구려 내륙 깊숙이 들어간 후 설인귀와 함께 부여성을 공격, 점령한다.
부여성(길림시. 일설은 장춘시. 또 다른 일설은 길림성 서북쪽 송화강변의 옛 부여현 지금의 송원시)은 단군조선의 고도 백악산아사달로, 동북지방의 관문이요 군사 요새다. 이 성을 장악하고 있으면, 동북지방의 고구려 군을 감시하거나 묶어둘 수 있었으며, 그 북쪽에 있는 북부여성(하얼빈)까지 어거할 수 있었다.
그 사이의 당군 길은 가히 파죽지세라 할 만큼 승승장구로 이어졌다.
유서 깊은 고도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부여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비보를 듣고 대막리지 연남건은 고구려 군사 5만을 보내 수복 작전을 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하지만, 그 전에 고려성의 고중상에게는 하나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적의 수중으로 넘어간 줄로만 알았던 신성新城의 군사들은, 사부구가 성주를 결박해 당군에 항복하는 배역무도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요동하지 않고, 결사 항전으로 당군을 막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저 유명한 안시성과 요동성도 필사의 각오로 버티며 끝까지 성을 내주지 않고, 당군을 무찔렀다는 쾌거의 소식도 함께 들어왔다.
전술했듯이, 이십여 년 전 당나라 왕 이세민이 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부상당하는 등 무참한 패배의 잔을 마시고 본국으로 돌아간 후, 고구려 정복 전쟁에 대해 한없는 회한과 한탄을 쏟아내게 만들었던, 바로 그 성이 안시성이다.
그 때 연개소문과 안시성주 양만춘의 기병, 추정국의 마병은 이세민의 항복을 받고 당나라 장안에 당당하게 입성해 지금의 하북, 산서, 산동 황하 좌편(북서편)의 옛 고구려 영토를 다물했었다(되찾았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그렇게 해서 고구려 세력권으로 들어온 발해바다 서편의, 고구려영토 최남서단 요새 고려성과 그 일대를 고중상이 지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 요동성! 그 옛날 해모수 임금이 젊은 시절 한 때 쫓겨 가 있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군사들을 훈련했던 성. 해모수 임금과 대부여 공주 설이매, 번조선 공주 기진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 그 성의 고구려 군사들도 불굴의 의지로 당군을 격퇴했단다.
고려성 성주 고중상은 몇몇 성들의 건재 소식을 듣고, 은근히 희망을 노래했다. 안시성, 요동성, 요동신성 등과 함께 요서의 남은 성들이 연합 전선을 편다면, 의외로 요서와 발해바다 서편 땅을 지키면서, 적들의 보급로를 차단해 동북으로 진격한 당군을 격리시킬 수 있을지도 모를 터였다.
하지만 바로 그 날, 일군의 병사들이 야음을 틈타 고려성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서남쪽에서 새로 올라오던 당군의 후발부대였다. 이들은 당군 주력부대의 후방을 안전하게 하고자, 고려성을 노리고 다가왔음이 분명했다.
진즉부터 잔뜩 긴장한 채 이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고중상은 고려성의 남문 문루에 올라, 잔뜩 찌푸린 하늘을 쳐다보며 근심에 잠겨 있었다. 사위에 어둠이 깃들고 삼경三更이 지났을 무렵, 고중상의 귀에 갑자기 소란스런 외침이 들려왔다.
“불이야!”
“불이야!”
그 외침은 밤바람을 타고 성 밖에서부터 오는 소리였다. 그 때 부장이 황급히 뛰어오며 소리쳤다.
“장군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북문이 불길에 휩싸여 있고, 당군들이 북문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고중상이 아무 말도 못하고 부장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북문을 맡은 장수가 적과 내통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 때 북문근처에서 처절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북쪽뿐만 아니라 동쪽과 서쪽에서도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횃불을 들고 내닫는 마병들의 고함소리, 북소리, 백성들의 비명소리 등이 고요했던 고려성의 대기를 갈기갈기 찢었다.
“이건 분명히 우리 안에 섞여 있던 저 반역도들의 소행이렷다!”
고중상은 성중 곳곳이 불바다로 변해가는 모습을 망연자실,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자다가 불길에 놀란 성중의 백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고 아우성을 칠 때, 적군과 아군은 한데 뒤엉켜 피아의 구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드잡이질을 벌이기 시작했다.
성중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마에 희생을 당하거나 아군끼리 싸우는 이들, 아이들과 여인들의 비명, 군마들의 포효소리, 당나라 군사들의 외침, 시끄러운 북소리, 징소리, 꽹과리 소리 등이 고막을 찢을 듯했다.
그 때 일진의 군마가 고중상이 서있는 남문을 향해 돌진해왔다.
“장군님! 장군님! 어디 계십니까?!”
누군가가 소리쳐 외쳤다.
고중상이 부장과 함께 밑으로 달려 내려가니, 십여 기의 군사들이 나타나 고중상에게 재촉했다.
“장군님! 저희들이 혈로를 열겠습니다. 어서 빨리 성에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가 급한 목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백성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어디를 간단 말이냐?!”
고중상이 고함을 질렀다.
“난 여기서 백성과 함께 죽겠으니, 너희들이나 가라!”
“장군님, 온 성이 다 불바다가 되어가고 있고 적군의 수는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백성들을 피난시킬 수도 없습니다.”
“적과 내통한, 패역부도의 반역자들이 어찌 이다지도 악랄하단 말이냐!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한밤중 몰래 성중에 불을 놓아 몰살시키려 하다니.”
“여기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백성도 구할 수 없을 뿐더러 모두 개죽음을 당합니다. 저들에게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혈로를 뚫어야 합니다. 다행히 하늘이 우리를 도우신다면, 이 난을 피해 훗날의 복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장군님, 헤아려주소서!”
부복한 장수가 간절히 애걸했다.
고중상은 엎드린 부하들을 내려다보고 명했다.
“다들 일어나라.”
무겁게 한 마디 내뱉고 말 위에 오른 고중상은 성문에 포진한 백여 기를 거느리고 좌충우돌하며 남문을 빠져나온 후 길을 우회해 안시성과 요동성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길을 가로막는 적군이 없었다.
그 사이 고려성의 변고를 알게 된 인근 몇몇 성채의 장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며 그들과 당군 사이에 일대 혼란한 접전이 벌어지느라, 당군의 이목이 모두 그쪽으로 쏠리고 고중상의 길에는 적군이 없었던 것이다.
밤새 불에 타던 고려성은 새벽녘에 이르러 장대비가 내리는 바람에 불길이 진화되었다. 그런데 장대비 후에 글자 그대로 붉은 색 피비가 내렸다. 그것은 고려인들이 흘린, 그리고 하늘이 흘린 피눈물이었으리라.
몇 년 전에는 평양성의 강물이 핏빛으로 물든 적이 있었다. 보장태왕 “19년[서기 660년] [음력] 7월 가을, 평양성의 강물이 사흘 동안이나 핏빛을 띠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고중상은 뼈저린 자책감 가운데 고려성을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았다. 분한과 분루를 삼키며 밤길을 재촉했다. 동이 트자 그 사이에 고려성의 패잔병들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불타버린 성을 뒤로 하고 가족도 모두 잃은 채, 억장을 치며 따라온 부하들의 정황을 보고 고중상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여러 날 후 요택遼澤의 진흙지대를 피해 겨우 안시성에 도착한 고중상 일행은 안시성주로부터 따스한 환대를 받는다.
거기서 당군과 고구려군의 전황을 파악하던 고중상은 며칠 후 양식을 얻어 수백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다시 고달픈 행군의 길로 들어선다. 고중상이 부장에게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여보게, 부장. 우리가 가족들을 모두 잃고 우리만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곳곳의 패잔병들을 규합하고 군사를 모아, 앞서 간 당군의 퇴로를 끊어 버리세. 그리고 그들과 건곤일척의 혈전을 벌여 동귀어진同歸於盡하는 게 좋겠네.”
“그렇다면, 어디로 가서 진을 칠까요?”
“일단 서압록의 해구성海口城이 적에게 장악당하지 않았다 하니, 그리로 가는 게 좋겠네. 거기서 길목을 지키며 서압록(현 요하)의 윗물과 동압록(현 압록강) 지방까지 척후병을 보내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한편, 당군에 항복하지 않은 각지의 영웅들과 연락해 힘을 규합하는 게 급선무네.”
고구려의 후예인 고중상이 미련을 두고 포기할 수 없었던 곳은 서압록하였는데, 거기엔 아래와 같은 여러 이유가 있었다.
서압록은 옛 고리국 땅으로서 고구려의 발상지다. 훗날 대진발해국의 3대 황제인 무황제가 서압록 강변에서 삼신일체 상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 것은<태백일사/대진국본기>, 대진발해국 황실이 고구려의 후손이고, 그곳이 고구려 시조들의 옛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서압록은 고구려의 건국지이다. 고구려의 첫 임금으로 보통 일컬어지는 고주몽의 성장지가 서압록 땅이며 그의 부친이 그 땅 고리국의 왕이었다<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고주몽의 고조할아버지이자 고구려의 원시조인 해모수가 태어난 곳도 옛 고리국 땅인 서압록하 근처다<단군세기>.
게다가 고구려인들이 해마다 제사를 지냈던 그들의 중시조 고등高登(해모수의 먼 선조이자 단군조선 22세 색불루 임금의 조부. 색불루 임금은 우리 소설에서, "별유진보"라는 유명한 시를 남긴 바로 그 임금임)이 세력을 일으킨 곳도 서압록하다<북부여기>.
고등은 단군왕검의 4남 부여의 후손이다. 고등의 손자 색불루 때부터 단군조선의 임금 혈통은, 장자인 부루 계에서, 4남인 부여 계로 바뀐다.
고구려인들은 그 사실에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해, 해마다 단군왕검의 4남 부여 뿐만 아니라 고등에게도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삼국사기/잡지><주서>.
단군왕검 - 부여(단군왕검의 4남) - 고등 - 색불루 - 해모수 - 고주몽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이 계보에서, 부여라는 인물이 다스리던 땅도 바로 서압록하 지방인 고리국이다<단기고사>.
고중상 일행이 험로를 뚫고 겨우 서압록하의 해구성에 당도했을 때는, 고구려 진국장국 고중상의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서 모인 군사들이 근 삼천에 이르렀다. 모여든 군사들에 용기백배한 고중상은, 그 곳에 머무는 수개월 동안 전의를 불태우며 양곡을 모으고, 각처로 사람을 보내 격문을 띄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장군님! 큰일 났습니다!”
“뭐가 큰일이란 말인가? 제발 큰 일 났다는 소리 좀 하지 말게. 간이 떨어지겠네.”
부장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격정을 삼키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님! 폐하께서는 이미 당군에 항복하시고, 평양성은 적군의 발아래 짓밟혔다 하옵니다!”
“······.”
고중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고구려의 옛 터전 서압록하를 지키던 고중상에게, 그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아, 평양성! 난공불락, 금성탕지金城湯池의 평양성! 그 평양성문을 오합지졸 당나라 군사가 깨뜨렸단 말인가?
당시의 평양성이 어디였는가에 관해서는, 지금의 요동반도 위 요양遼陽 근방으로 보는 요양설과, 현재의 북한 평양이라고 확신하는 입장이 있다. 어디였든 그건 덜 중요한 문제다.
철벽 요새 평양성은 결코 당군의 힘에 의해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평양성을 점령하는데 있어서 일등 공로자는 아무래도 연남생과, 그와 내통하고 평양성 성문을 열어준, 평양성 수비 총책임자 불교 승僧 신성信誠일 것이다.
둘째 공로자는 신라군이다<삼국사기/신라본기>. 당나라 군대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평양성을 거저먹은 셈이다.
평양성 하늘을 노려보던 고중상은 한참 후 신음하듯 내뱉었다.
“어떻게 평양성이 열렸단 말인가?”
“우리 고려성처럼 아군에 의해 열렸다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고중상의 머리털과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어떻게?”
“고려군을 이끌고 간 연남생 부자가 평양성 수비책 요승妖僧 신성과 사통했습니다.”
평양성은 내부의 첩자에 의해 무너졌다. 그 첩자는 연남건으로부터 평양성의 군사軍事 일체를 위임받았던 신성信誠이라는 석교釋敎(불교) 승려였다<삼국사기><신구당서>.
삼국 중에서 이방종교를 맨 먼저 받아들였던 신교神敎(배달겨레 전통의 하나님신앙)의 나라 고구려는 그 이방종교 승려의 농간으로 결국 역사의 황혼 속으로 저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태 전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 연헌성 부자가 투항고려군을 이끌고 이세적의 앞잡이로 평양성문에 다가섰을 때 이미 사태는 결딴 나 있었다.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당군에게 사로잡히고, 대막리지 연남건은 자결하려다 미수에 그쳐 역시 당군에 포로가 되었다 합니다.”
치욕의 그 날, 고구려의 국치일 아니 망국일은 서기 668년 음력 9월 21일이다(<삼국사기/신라본기><태백일사/대진국본기>. 그러나 <구당서>에서는 11월).
단군조선의 후신 대부여가 망하고 대신들의 6년 공화정이 있은 후, 해모수가 대부여의 황권을 정식으로 장악한 서기전 232년부터 계산할 때(해모수는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의 고조부다. 그 시대 사람들은 해모수를 고구려의 국조로 보기도 함), 제국 고구려는, <신당서>에서 가언충이 당 고종 이치에게 보고한 것처럼 간신히 900년을 채울까말까 하던 해에, 팔십 먹은 당나라 노장 이세적에게 허망하게 망해버린 것이다.
이세적의 본성은 서徐 가다. 이가 성은 당왕 이세민이 그에게 하사한 것이다. 서가 하면 떠오르는 것이, 고대 서국徐國의 언왕偃王이다. 기원전 10세기 주나라 시대에 동부평원(화북평야) 회대淮岱지방(회하와 태산 일대)의 패자였던 서국은 우리 동이족의 국가였다. 서세적은 혹시 그 서국의 후예가 아니었을까?
난공불락의 요새가 반역도 요승妖僧에 의해 열렸다는 소식에, 울분을 삼키던 고중상은, 나라를 되찾는 길이 어디에 있을지 골똘히 생각하며 온갖 방책을 저울질한다.
“여보게, 부장. 지금 즉시 각지의 영웅들에게 격문을 띄우게. 남부여성(단군조선의 장당경, 현 요령성 개원시)이 적에게 넘어가지 않았다니 우린 일단 거기로 올라가, 거기서 사람을 보내 동북부의 상황을 알아보아야겠네.”
동북부에는 당나라 군사의 세력이 아직 미치지 않았을 것으로 고중상은 추정했던 것이다.
“그곳은, 우리와 우리 조상들의 땅이고 우리 고려의 뿌리이자 발원지이니 차라리 거기서 훗날을 도모하신다면······.”
남부여성, 장당경은 고구려의 중시조 고등高登(? - 서기전 1286)이 군사를 일으킨 곳으로서, 고구려의 발상지나 마찬가지다.
그가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것도 일리가 있네. 하지만 전방의 당군이 문제야. 자칫하다가는 사면으로 포위를 당하게 되네.”
남부여성에 도착했을 때 근 팔천 명으로 증가한 고중상의 군대는 남부여성 욕살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하지만 앞날은 너무나 암담했다. 당군이 이미 북부여의 고도 부여성(옛 백악산아사달, 현 길림시)까지 접수했다는 소식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 부여성을 끼고 있는 속말수(송화강) 북류北流 서남쪽의 사십 여개 성까지 당군에게 항복했다는<삼국사기>, 남부여 성주의 설명에 고중상은 아연했다.
그 사십여 성들은 부여성 욕살褥薩의 관할 하에 있었으므로 일면 수긍이 가는 바도 없지 않았으나,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자청해서 투항했다는 소식에 고중상은 분노와 비애를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속말수를 넘어 그 위쪽에 있는 웅심산성熊心山城(서란)이나 북아리하(속말수, 송화강) 동류東流 남쪽의 아남성阿南城(아성), 단군왕검의 개국도성인 그 위의 북부여성(아사달, 하얼빈시) 등은 당군에 항복하지 아니하고 의연히 버티고 있었다<삼국사기>.
“적들이 점거하고 있는 부여성으로 간다!”
고중상은 독백하듯 나직이, 그러나 힘있게 외쳤다.
부여성이 어떤 곳인가?
고중상은 남부여성의 욕살과 각지의 호웅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장에게 명했다.
“여보게, 부장. 우리나라 지도를 펴보게나.”
지도를 펼쳐놓고 고중상이 설명했다.
“제공들도 보시다시피, 여기 속말수(송화강)와 백산(백두산)을 잇는 선이 우리 고구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소. 이 줄이 끊어지면 우리는 죽고, 이 줄이 이어지면 우리는 살게 되오.”
군웅들을 둘러보는 고중상의 눈빛이 칼날처럼 번득였다.
“하지만 이세적과 설인귀가 이미 부여성을 점령해 그 천연장성天然長城의 중간을 끊어버렸소.”
누군가가 탄식하며 내뱉었다.
속말수(송화강)와 백산을 일직선으로 이어서 고구려 동북 지방의 요지를 방어해주는, 혹은 동북지방으로부터 서남지방으로의 진출을 막는, 천연장성天然長成이 있다. 백산(백두산)에서 발원한 북아리하, 속말수가 북으로 흘러내려가다가 동으로 꺾어지는 지점까지가 그 천연장성이다.
천연장성의 남반부는 첩첩산악으로 둘러싸여 있다. 속말수는 그 산중을 뚫고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사곡蛇谷을 형성하며 부여성까지 흐르고, 부여성에서 한바탕 소리 없는 요란한 굉음을 터뜨리며 리을(ㄹ) 자로 굽이굽이 감돌다가 서북쪽의 평원지대로 나아가 북에서 흘러오는 눈수嫩水와 만난다.
이 선을 확보하는 자가 고구려의 동북지방 요지를 차지할 수 있었고 서남지방까지 호령할 수 있었다.
직선거리로 일천리가 넘는 이 천연장성의 중앙에, 수문장처럼 우뚝 서있는 관문의 요새가 바로 옛 조선의 백악산아사달, 고구려의 부여성이다. 그 성을 장악하는 것은, 천연장성의 급소를 쥐는 것과 다름없다.
그 성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당군의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금산金山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쳐부순 데에 힘입어, 내친 김에 부여성까지 진격하자고 주장했을 때, 당나라 장수들은 병력과 힘의 분산을 우려해 모두 반대했었다.
하지만 설인귀는 날랜 군사 삼천 명을 빼고 뽑아 부여성으로 돌격한다. 뒤이어 따라온 당군이 공성퇴, 운제雲梯, 부교浮橋, 기타 온갖 공성장비를 들이대어 부여성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자 겁을 먹은 부여성의 욕살 고정문高定問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당나라 군사가 이 급소를 꽉 쥐고 중부 고구려를 위협하자 사십여 개의 성들도 줄줄이 당군에 문을 열어주었다.
“위아래 구름장벽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고, 폐하까지 항복하며 도성이 유린당한 이 마당에 우리가 살 길은, 동북으로 가는 것뿐이오.”
고중상이 말한 “위아래 구름장벽”이란 이른 바 상하운장上下雲障을 가리킨다. 중원지방에서 우리 동이족의 땅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뚫어야 하는 장벽이다. 연산燕山산맥이 동남으로 나아가 지금의 난하 하류 동편과 맞닿고 발해바다 연안까지 이어지는 북위 40도선 지대에 상하운장 즉 고구려 방어요새가 있었다.
그곳은 천연장벽인데다, 그곳을 구름과 발해바다의 안개가 자욱이 덮고 있으면 마치 하늘이 양쪽을 갈라놓고 서로 침범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곳은 대부분의 날에 안개구름이 자욱이 끼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중화인들은 그곳에 장성을 쌓아 동이족의 남침을 방어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하면서, 고구려를 지켜주던 일차 방어선, 천연의 요새이자 인공의 방어선인 위아래 구름장벽은 당나라 군사가 유린하는 땅이 되고 말았다.
고중상이 뭇 군웅들의 표정을 살피며 굳건한 목소리로 의견을 피력하자 한 장수가 물었다.
“하지만, 당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일차 방어선인 상하운장을 점령한 후 요동을 휩쓸고, 우리의 최후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천연장성의 동북관문 부여성과 속말수 서남의 사십 여개 성까지 적군에 가담했다는데, 어떻게 동북방면을 도모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급소를 쥐면 됩니다. 당군이 쓰던 방식 그대로 우리도 이 급소를 찔러야 합니다.”
“당군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방비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을 것입니다. 대막리지 연남건이 오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보냈지만 그 성을 탈환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우리 평양성은, 방비가 허술하고 성문이 썩어서 무너졌단 말입니까?”
고중상이 목소리를 높였다.
“공들이 그렇게 두렵다면, 나 홀로 가겠소. 구백년 사직이 망해버린 이 마당에 그런 불가론만을 주장하고 있어야 합니까?”
고중상이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장군! 잠시만 앉으시오. 이건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지, 전혀 불가하다는 말은 아니지 않소?”
“내 의견보다 좋은 의견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보시오.”
고중상이 음성을 가라앉히며 자리에 앉았다.
“······.”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이것은 분초를 다투는 화급한 일이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동북 요지로 물밀 듯 들어가기 전, 우리가 먼저 급소를 탈환한 후 동북 강토를 사수해야 하오.”
고중상은 다시 한 번 자리에 모인 여러 장수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제장들이 시인하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중국에 대한 고구려의 천연 방어선은 크게 네 군데였다. 첫째 최전방의 방어선이 연산산맥과 난하 하류에 있었던 상하운장이며, 제이차 방어선은 서압록 곧 요하와 그 동편 산악지대다.
셋째 최후의 방어선은 둘이다. 동남 지역 즉 평양성이 위치한 한반도 북부지방 방어선은 동압록 즉 압록강으로서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평양성(북한 평양)을 방어하는 천험의 저지선이고, 다른 하나, 동북지역 방어선은 속말수 즉 송화강과 백두산 줄기로서 나중 대진발해국의 왕성이 서게 되는 곳을 방어해준다.
압록강과 송화강은 둘 다 삼한의 성산인 백두산에서 발원한다. 백두산 줄기와 거기서 발원하는 강들은 결국 삼한의 성지이자 최후 요새인 셈이다.
단군조선 삼한의 모든 문명은 이 몇 군데 강줄기 방어선들에서 발생했다. 난하 유역, 요하유역, 송화강, 압록강 유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동강변이 그것이다.
동남쪽 최후 방어선인 압록강이 뚫려 평양성(북한 평양)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망했기 때문에, 고중상은 하나 남은 최후방어선 즉 동북방어선을 확보하고자, 송화강 줄기 중심급소인 부여성을 탈환하려 했을 것이다.
평양성이 함락되기 전이지만, 연남건이 부여성(길림시)을 되찾고자 5만 대군을 보낸 것도, 부여성이 동북지방 방어선의 최전방 중심보루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연남건은 당군과 당에 항복한 고구려군의 결사저항으로 부여성 탈환에 실패한다.
훗날의 일이지만, 대진발해국의 16세 임금 대인선의 치세에 요나라가 부여성을 먼저 점령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요나라 군사는 급소이자 동북 관문인 부여성을 장악하자, 큰 저항 없이 상경 용천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위키백과> “부여성” 참조).
고중상이 “백두산의 동북을 확보하고, 오루하와 산악지대를 천험의 방어선과 벽으로 삼아 스스로를 견고하게 했다 保太白山之東北, 阻奥婁河, 樹壁自固”는 <신당서>의 표현도, 바로 이 최후방어선, 즉 백두산에서 송화강 북류까지 이어지는 천연장성을 지적한 것이리라.
고중상은 전열을 가다듬은 후 각지에서 달려온 군사 삼 만을 거느리고, 충분한 군량을 갖춘 후 남부여성으로부터 부여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수백 리 길을 간 후 부여성을 백여 리 남겨 두고 있을 때, 고중상의 군대는 당군의 복병에 걸린다. 고중상은 거기서 태반의 군사를 잃고 겨우 당군을 격퇴한 후, 칠천여 기만을 수습해서 서둘러 부여성으로 행군했다.
고중상이 비장한 태도로 손발처럼 따라다니는 부장에게 말했다.
“우리가 앞으로 수일 안에 부여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우린 전멸이네. 우리의 길목을 막던 당군은 모두 흩어져버렸지만, 언제 그들이 세를 모아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네. 그렇게 되면 우린 앞뒤에서 협공을 받게 되겠지. 부여성을 되찾지 못한다면, 살아서 도피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네.”
“당나라 군사는 막강한 장비들을 동원해 부여성을 점령했을 터인데, 우린 급하게 오는 바람에 충차衝車와 변변한 공성장비 하나도 마련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성을 공격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부장이 중얼거렸다.
“여보게 맥 빠지는 소리 하지 말게. 힘으로 어떻게 수일 안에 그 성을 점령한단 말인가?”
부여성은 특이한 방어요새를 갖추고 있었다. 성의 북편과 남쪽은 속말수가 자연 해자를 이루고 있었고, 동편의 상반부와 서편의 하반부도 속말수가 해자를 제공하고 있었다.
속말수는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부여성을 “ㄹ” 자 모양으로 휘돌아 흐르고 있다. 해자가 없는 서쪽의 북부와 동편의 남부는 산들에 둘러싸여, 성 전체는 대단히 견고한 천연요새를 형성했다.
아마, 옛 백악산아사달 성은 북부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고구려 시대의 부여성은 남부까지도 포괄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중상은 여러 장수들 앞에서 큰 소리 치고 대군을 몰고 왔으나 복병에 걸려 군사 이만 삼천 명을 잃은 이 마당에, 칠천의 기마병으로 어떻게 부여성을 되찾을 것인지,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했다.
‘오, 하늘이여, 하늘이여!’
고중상의 군대는 밤중에 부여성의 서편에 조용히 진을 쳤다.
그 날 밤 척후병이 급보를 가지고 고중상의 막사에 도착했다.
“장군님! 지금 남쪽으로부터 당군의 마병과 보병 도합 삼만 여명이 이쪽을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속도라면 적어도 내일 오정쯤에는 부여성에 도착하리라 사료됩니다.”
“그게 사실이냐?”
고중상이 침착하게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목표지점이 여기 부여성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내일 정오 안으로 이 성을 점령하든지 아니면 죽든지, 양자택일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군.”
고중상은 하늘을 우러러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우리 칠천 군사는 내일 오정 안으로 이 성을 점령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후의 일인까지 당나라의 강도들과 싸우다 죽을 것이다.”
고중상이 부장을 돌아보며 명했다.
“부장, 지금 즉시 척후병의 보고사항을 각 장수들에게 알리고 군령을 하달하게. 죽음이 두려운 자는 모두 떠나가고 나와 함께 죽을 자만 여기에 남으라고.”
천하의 대장부, 대고구려 진국振國장군 고중상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주먹을 꽉 쥐는 순간, 그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얼마 후 고중상의 막사에 얼굴이 검고 다부진 한 장수를 필두로 여러 장수들이 들어왔다.
“어서들 오시오.”
고중상이 자리를 권했다.
제장이 자리에 앉자 고중상은 그들에게 물었다.
“여기를 떠날 사람은 아무도 없소?”
“제게 오늘 밤 군사 삼천 기를 주시면, 당나라 도둑놈들이 오는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그들을 흩어버리겠습니다.”
얼굴빛이 검은 장수가 요청했다.
“좋소. 임 장군. 지금 즉시 삼천을 거느리고 이곳을 떠나가 적당한 곳에 매복해 주시오.”
그에게 이렇게 명한 고중상은 촛불에 번득이는 눈빛으로 나이가 아주 젊어 보이는 다른 한 장수에게 말했다.
“유 장군은 수영을 할 수 있는 날랜 경기마병輕騎馬兵 일천 기를 거느리고 오늘 밤 남동으로 달려 내려가 적당한 곳에서 강을 건너시오. 만일 다리가 있고 군사들의 진이 있다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제압하시오. 남동문을 기습하는 시각은 인시寅時 정각(새벽 4시)이오.”
“······?”
유 장군이라 불린 이가 의아한 눈초리로 고중상을 쳐다보았다. 경기마병으로 어떻게 성문을 공격할 수 있느냐는 뜻이리라. 고중상이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대답한다.
“성동격서聲東擊西네. 우리가 북서쪽에서 불화살을 날리는 등 온갖 소란을 피우는 동안, 유 장군은 십이 용사를 데리고 가서 은밀히 성벽으로 오르게 해, 동남쪽 성문을 점령하라는 뜻이네.”
“목숨을 걸고 명을 완수하겠습니다.”
그가 굳은 각오로 대답했다.
고중상이 부장에게 얼굴을 돌렸다.
“고려성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열두 용사들을 지금 즉시 이리로 소집하게.”
그들이 나타나자 고중상이 그들을 유 장군에게 인수인계하며 부탁했다.
“제군은 우리 조국의 마지막 영웅들이다. 여러분 열 두 용사의 어깨에 우리 고려가 다시 사느냐 죽느냐가 달려 있다. 모두 유장군의 명을 따르라.”
고중상의 표정이 엄정했다.
“네! 장군님! 조국을 위해 오늘 밤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그들이 일제히 우렁차게 대답한다.
유씨 성의 장수는 십이 용사와 일천 기를 거느리고 밤길을 나섰다. 속말수를 건너 부여성의 남동문으로 우회하는 길은 수월치 않았다. 때는 동짓달 초, 부여성의 날씨는 엄동설한이다. 살을 에는 북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눈발이 하나씩 날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말과 군사가 함께 강을 건너야 했으며, 깊은 곳이 있을 경우 살얼음을 깨어가며 강을 헤엄쳐서 도강해야 했다.
고중상은 번득이는 눈으로 제장들을 바라보며 굳게 확언했다.
“우린 반드시 이 성을 탈환할 것이오. 내일 정오 안으로. 그렇지 않으면 그 시각에 우린 모두 죽어 있을 것이오.”
뭇 장수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제대로 된 공성장비가 거의 없는 마당에 어떻게 성을 공격해야 할지 그저 암담할 뿐이었다. 고중상은 다시 제장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오늘 밤 성안으로 수천 개의 화살을 날려야겠소.”
제장들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가득 퍼졌다. 잠시 후 누군가가 묻는다.
“불화살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높하늬바람이 세차게 불어 불화살이 매우 효과적일 수 있으나, 어찌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 백성의 집과 가족을 태울 수 있단 말이오?”
“성문에 불을 붙이기는 가능할 겁니다.”
고중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과 누각들에 불을 붙여 요란하게 함과 동시에, 성 안으로 수 천 개의 화살을 날릴 것이오. 하지만 눈발이 거칠고 세지면 불화살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오.”
술시戌時(저녁 8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밖에서는 강한 바람과 함께 어느 덧 하늘 가득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거대한 부여성은 마치 흑암 속의 괴물처럼 고중상의 군대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다음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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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5. 20. 아직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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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관심 있는 분만 읽어보십시오.)
질문 1. 하북성 동북부의 난하 유역은 고구려와 수당隋唐 전쟁 당시 고구려의 영토였는가?
<신구당서>나 <자치통감>, <삼국사기> 등을 읽어보면, 대체적으로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패배한 645년의 고구려 당나라 간 전쟁이나, 그 후 고구려 멸망전쟁(668)이 현금의 요하 동쪽에서만 일어난 것처럼 기술되어 있어서, 난하 유역은 물론, 지금의 요서 지방까지 죄다 당나라 영토였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고적古跡을 답사하면 매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다. 김호림의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에 따르면, 고구려성의 고적이 하북성의 난하 서쪽에 두루 분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기며 죽을 고비를 넘기던 사건들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 다수가 난하 서편 특히 지금의 당산시 근방에 집중되어 있다.
이세민은 현재의 당산시 낙정현 상운도에서 고구려 수군에게 추격당해 죽을 뻔하기도 한다. 그 때 이세민은 “오늘이 나 이세민이 죽는 날이로구나”라고 탄식했단다.
당시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얼마나 혼이 났는지, 연개소문은 명청明靑 시대부터 중화민국(1911-1949) 연간까지 하북성 석가장 일대 및 여러 곳에서 대문에 붙은 수호신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하북성의 많은 지역에서는, 어린아이가 울 때 “(연)개소문이 왔다!”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는 얘기도 있다. 이는, 임진왜란 후 일본인들이 아이를 달래려고 할 때 “저기 이순신 온다!”하면 울던 애들도 울음을 그쳤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양만춘과 추정국의 기마군대가 이세민을 추격해 발해바다 서편의 신성과 하간현까지 나아갔다는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의 기록이 사실무근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같은 책은 645년의 고구려 당나라 전쟁 결과 당태종의 패배와 항복으로, 황하 이북 즉 산동성의 일부를 포함해, 산서성, 하북성이 고구려 영토로 귀속되었다고 기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 당나라 간의 격전지가 요하 동쪽으로 축소되어 있는 것은, 중국 사가들의 취사선택, 특히 춘추필법에 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도 특히 당나라 시기에 춘추필법에 따라 많은 문헌이 왜곡되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예컨대, 645년의 고구려 당나라 간 전쟁에서 중국의 출정 군대는 1백만 대군이었으나 기록상에는 이것이 십만으로 축소되었다. 추측컨대, 100만 대군으로 나아갔다가 돌아올 때는, 사망, 부대이탈, 포로 됨 등의 이유로 십만으로 줄어들지 않았나 한다.
그 전 수양제의 군대도 113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그 중 고구려 땅 깊숙이 들어간 30만 대군 가운데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당태종의 패배도 그 때보다 나은 게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난하 유역이 수당 대 고구려 전쟁 당시 고구려 땅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료가 또 있는데, 그것은 수양제 양광과 당태종 이세민이 내린 조서다. 먼저 수양제는 그 참혹한 패배를 가져오게 될 전쟁에 출정하기 전 이렇게 말한다.
“고구려의 무리가 어리석고 불손하여 발해바다와 갈석산 사이에 군집群集했으며 요수 지경과 예의 땅을 먹었다. 비록 한나라와 위나라 시대에 그들을 죽이고 그 소굴을 잠시 뒤집어엎어 놓아도 그 종족이 또 다시 모여들어 전대의 취락을 회복하고 번식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高句麗 小醜, 迷昏不恭, 崇聚勃碣之間, 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訖今”<삼국사기>.
여기서 말하는 갈석산은,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서 옛 요동성이라 칭하는, 지금의 창려현성 북쪽, 난하 하류의 동쪽에 있다.
644년 11월에 내린, 당태종의 거병 전 조서도 이와 흡사하다. “이제 유주와 계주를 순행하며 요수와 갈석에서 죄를 묻고자 한다 今欲巡幸幽薊 問罪遼碣”<자치통감>.
당시 고구려 땅이 지금의 요하 동쪽이라면, 당태종이 어찌하여 유주(북경)와 계(계현) 지방을 순회하며 요수와 갈석산(창려현)에서 고구려 연개소문이 주군을 시해한 죄를 묻겠다고 말하고 있는가?
당시 북경과 계현 지방, 요수, 창려현을 동서로 잇는 북위 40도 지역이 당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이거나 고구려 영토였음을 이 조서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나라 패잔군과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군에 쫓긴 이야기가 그 근방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이 지역부터 공략하는 것이 순서였다. <노령현지>에 노룡현성 동북쪽 약 20킬로미터 지점인 신나채를, 당태종 이세민이 동정東征할 때 공략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북위 40도 선에 위치한 노룡현은 창려현에서 직선거리로 약 30킬로미터 서북쪽에 있으며 난하 하류의 동편에 위치한다.
난하 하류 동편, 진황도시 무녕현의 토이산도 당나라 군대가 공략하면서 숙영한 곳이라는 <무녕현지>의 기록, 그리고 그 근방에 고高씨 마을이 있다는 사실은, 그 곳이 당시 고구려 영토였음을 입증한다. 고씨는 고구려 왕족의 성이다.
토이산의 다른 이름은 려산이다. 즉 고려산이라는 뜻이다. 이 산의 동북쪽에서 밭을 만들 때 고려인의 무텀이 여러 기 발견되었다고 한다.
려산 아래에는 전한의 려성현이 있었다. <사기/하본기>의 주석은, <색은지리지>를 인용해 “갈석산이 북평 려성현 서남에 있다 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고 말한다. “驪”는 중국인들이 고구려 혹은 조선을 낮추어 부르기 위해 바꾼 낱말로서 원래는 “麗”다. “려성”은 조선성 내지 고려성이다. 갈석산의 동북에 북평의 조선성 혹은 고려성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주석이 달려있는 본문(夾右碣石入於海)을 보면, 이때의 갈석산은 고구려의 좌갈석 즉 창려현의 갈석산이 아니라, 황하와 바다가 만나는 지점의 우갈석산이다. 우갈석에 대해서는 뒤를 보라.
이는 황하 하구 동북에 조선성 혹은 고려성이 있었다는 의미다.
진황도시 서남, 창려 동북의 무녕현에서는 고려성의 유적도 발견되었다. 지금도 무녕현성에는 려성로麗城路가 있다고 한다. 려성은 물론 고려성을 의미한다(김호림<같은 책>). 그 밖에도 북경에서 동서로 당산, 난하, 갈석산, 산해관을 잇는 북위 40도 지역에는 다수의 고구려 유적이 존재한다고 한다.
하간현의 고려성은 본서 서두에서 언급했다. 북경시 중심가인 옛 도성(지하철 2호선 권내) 북쪽 정문인 안정문安定門(지하철 2호선 안정문 역) 북북동쪽 25킬로미터 지점에는 고려영 혹은 고려진도 존재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용도성이었다.
<삼국사기>와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태조무열제는 서기 55년 경, 한나라의 열 개 성에 대비해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았다고 기록한다. 뒤에서 거론하겠지만, 이 10성의 위치가 후자의 책에서 거의 다 지금의 난하 서쪽으로 나타나있다.
중국의 사서도 요하 서쪽이 수당 때 고구려 영토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고구려가 망하기 전 당나라의 영호덕분(583-666)이 지은 <주서周書>는 고구려 영토가 “서쪽으로 요수를 건너 2천리 西渡遼水二千里”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수를 지금의 요하로 비정할 때 요하 건너 2천리 거리라면, 요령성 심양 서쪽의 요하 줄기부터 북경 서쪽의 산서성 대동시 정북방까지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다.
위도를 약간 낮출 경우 하북성 정주시까지 포괄한다. 물론 그 안에는 난하 유역과 발해바다 서편 지역이 들어가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당나라 때 두우(735-812)가 지은 <통전>은 고구려의 영토가 “수나라 때에 이르러 점점 커져서 동서 6천리가 되었다 至隋漸大東西六千里”고 명시한다. 동서 육천 리는 지금의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시 동북쪽 해안으로부터 북경 서편 산서성을 지나 호화호특시까지며, 위도를 낮추면 하북성 정주시를 넘어 석가장시에 이른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패배한 결과 하북성과 산서성까지 고구려 영토에 편입되었다는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의 기록이 결코 과장된 허언이 아님을, 중국사서가 입증하고 있다.
고구려의 요서 경영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있으니 구구한 언설은 생략한다.
이런 여러 증거에 비추어, 지금의 난하 유역과 그 아래 발해바다 연안이, 옛 고구려 영토였다고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
질문 2. 위의 당태종 조서에서 언급한 “요수”는 지금의 어느 강인가? 난하인가, 요하인가?
“이제 유주와 계주를 순행하며 요수와 갈석에서 죄를 묻고자 한다
今欲巡幸幽薊 問罪遼碣”
그의 조서가, 정서에서 정동으로 북위 40도 근방의 일직선상에 놓인 북경, 계현, 갈석산 등을 이야기하면서, 요수를 함께 거론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요하를 상상하고 읽으면 매우 이상해 보인다.
혹자는 여기의 갈석산이 요하 동쪽의 어느 갈석산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북경과 계현을 순행하면서 그로부터 직선거리로 무려 천오백리 떨어져있는 요동에서 죄를 묻겠다면, 그건 대단히 괴이한 표현이 아닌가?
백번 양보해, 현금 요하의 동쪽에서 죄를 묻겠다고 말한 것이, 당태종 조서의 본뜻이라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 오늘날의 지명을 사용해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요하를 순행하며 요동 땅 요양, 심양에서 고구려 연개소문의 죄를 묻겠노라.” 하지만 당태종은 “북경과 계현을 순행하며, 요수와 갈석산에서 고구려 연개소문의 죄를 묻겠다”고 표현했다. 그 요수를 오늘날의 난하로 상정하면, 조서의 문장에 대한 해석은 완벽해진다. 북경, 계현, 난하, 갈석이 위도 40도, 동서 일직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연산燕山산맥과 난하가 천연 장벽을 이루어 예로부터 동이세력과 화하세력의 국경 완충지대였다. 고구려 국경 요새 상하운장上下雲障이 바로 이 지역에 있었다.
현재의 당산시와 천진시 사이에 있는 발해바다 왼편의 난하가 고대의 요수라는 주장은, 한두 사람 혹은 어제 오늘의 견해가 아니며 여러 문헌의 증빙을 받고 있다. 예컨대 석학 최태영의 <한국상고사>,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윤내현의 <우리고대사> 등에서도, 지금의 난하가 고구려 시대의 요수라고 단언한다.
현 난하가 고대의 요수임을 입증하는 것으로 흔히 거론되는 첫 번째 문서는, 전한 때 편찬된 <설원>이다. 이 책에는 춘추시대 초기의 유명한 패자인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고죽孤竹이라는 나라를 정벌할 때 요수遼水라는 이름의 강을 건넌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 여러 지리서에서, 이 고죽국은 바로 난하 하류에 존재하던 나라로 설명하고 있다.
둘째, 유향(서기전 79 - 서기 8)의 저서 <홍범오행>이 요수를 지금의 난하로 비정한다(김호림 <같은 책>).
셋째, 거란족 요나라의 발상지는 요수인데, 그들의 설화에서 그곳은 난하 상류로 나타난다<상기서>.
넷째, 당나라 사람 두우杜佑(735-812)가 편찬한 <통전通典>의, 고구려 항목에서 나오는 말이다.
“갈석산은 한漢 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으며 장성長城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검증해보면,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끊고 고려에 들어가는데 유적이 아직도 존재한다.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이 문장의 고려는 물론 고구려이다. 장성이 요수를 끊고 장성의 동쪽 기점인 해변의 갈석산까지 나아갔다.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려에 들어간다”고 했으니, 그 요수 동쪽의 장성을 쌓은 땅은, 장성의 기점인 해변의 갈석산을 포함해, 고구려 영토였다. 고구려가 망한 이후 <통전>이 저작되던 시기인 서기 800년 무렵에도 갈석산에 고구려 유적이 남아있었다.
여기서 설명한 지형을 살펴보면, 난하 및 창려 북쪽의 갈석산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 구절의 “요수”는 난하임이 확실하다.
위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주注가 달려 있다. “살펴보건대, <상서>는 ‘우갈석을 끼고 황하[<사기/하본기>에는 河가 海로 되어 있는데, 후자가 옳은 표기인 듯]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즉 우갈석은 황하가 해변과 맞닿은 곳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북평군 남쪽 20여리 지점이다. 그렇다면, 고려에 있는 갈석산[장성의 기점]은 좌갈석인 셈이다.
按 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爲左碣石.”
<상서>에 나온다는 우갈석은 <사기/하본기>의 황하를 설명하는 대목에도 등장한다. 황하는 “우갈석산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 夾右碣石入於海.”
위의 두 인용문은 송나라 때 작성된 지도인 “기주협우갈석도冀州夾右碣石圖”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그 지도를 보면, 황하 이북의 기주 땅, 황하 하구에, 우갈석산이 그려져 있다.
요컨대, 갈석산은 두 개다. 하나는 창려 북쪽의 좌갈석이고 다른 하나는 황하 하구의 우갈석이다. 수양제와 당태종이 조서에서 말한 갈석산은 창려 북쪽의 좌갈석이다. 우갈석산은 지각변동으로 황하 하구가 바다로 변하면서 고대에 이미 바다에 묻혔다는 것이, 옛날의 문헌들에 나타난다.
다섯째, 난하가 요수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전적은 <염철론鹽鐵論>이다. 이 책은 중국 전한前漢의 선제宣帝(재위 서기전 74–서기전 49) 때에 환관桓寬이 편찬한 것이다. 그 책의 “험고險固” 편은 전국시대의 연燕 나라 지리를 설명하면서 “연은 갈석碣石에 막히고 사곡을 끊으며 요遼를 둘러 감았다 燕塞碣石 絶邪谷 繞援遼”라고 기술한다.
동북쪽으로 갈석산에 막히고 요수를 둘러 감았다면, 그 요수는 당연히 난하 아니면 영정하다. 여기의 갈석을 우갈석으로 보면 요는 영정하고, 좌갈석으로 해석하면 요는 난하다.
여섯째, <한단고기/북부여기>는 전한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202년에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가 패수였으며, 패수는 오늘의 난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위의 <염철론>에 나오는 전한 때의 연나라 국경 설명과 일치한다.
애독자님이 여기서 알아둘 것은, “요수”라는 명칭이 중국인들에 의해 불린 이름이지 우리 조선인들 즉 삼한의 백성들이 사용한 명칭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요수는 “머나먼 강”이란 뜻으로서, 중국인들이 동북으로 멀리 떨어진 강을 가리킬 때 사용한 이름이다.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대진국본기> 등에 따르면, 원래 현 요하를 우리 조상들은 서압록(서아리수)이라고 불렀다. <요사>와 <삼국유사>에서 요하를 “일명 압록”이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를 입증한다.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동아리수)이라 일컬었다.
지금의 압록강인 동압록과, 지금의 요하인 서압록은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이 동서 압록 사이와 서압록의 서쪽 지방이, 송화강 유역과 더불어 우리민족의 발상지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현재의 요하 즉 서압록을 “구려하” 즉 “고려하,” “고구려하”라고 부르기도 했다. “구려=고리”는 우리 민족의 시원지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는 최소한 네 곳에서 명약관화하게, 수당 대 고구려 전쟁 시의 요수가 지금의 난하임을 드러내고 있다.
제일第一은 태조무열제가 서기 55년에 쌓은 요서 열 개 성의 위치가 거의 모두 지금의 난하 서쪽에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제이第二는 645년의 고구려 당나라 간 전쟁 시 안시성 싸움에서 연개소문이 전장을 돌아볼 때, “난하 언덕”을 순시했다고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게 바르다면, 당시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고 당시의 안시성은 <고구려국본기>의 기술대로 현재의 난하 서편 즉 오늘날의 당산시 개평구 동북 칠십리 지점에 있어야 한다.
제삼第三은, 당태종 이세민이 안시성에 이르렀을 때, 지금의 당산시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했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면, 위에서 말한 대로 안시성은 난하 서쪽에 있었고, 난하는 당대의 요수다.
제사第四는, 상기한 <고구려국본기>의 고구려 당나라 전쟁 기록에서 난하 동편에 있는 지금의 창려가 고구려의 요동성이라 했다는 사실이다.
여덟째, 난하가 요수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자료는, 관용어구 “료갈遼碣”이다. 상기한 당태종의 조서에 나온 바로 그 어구로서 “요수지역과 갈석산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 관용어구는 11세기의 저작물들인 <자치통감>과 <책부원구>에서 각각 5회, 4회 등장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나라 현종 때 “동쪽 영토가‘료갈’에 이르렀다.”
당태종이 “친히 갑옷을 입고 ‘료갈’에 이르렀다.”
“옛 경계 료갈”
“수양제가 ‘료갈’에 일을 벌이고자 군부를 증강했다.”
“왕이 노하여 그대를 ‘료갈’ 근처로 보내버린다면, 어찌 하려는가?”
“그들은 공의 위명을 두려워해 바람소리만 들어도 반드시 도주해 북쪽 ‘료갈’로 돌아갈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료갈’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폐하께서 ‘료갈’에 용처럼 날으시니.”
“유주와 계주 지방을 순행하며 ‘료갈’에서 죄를 묻겠노라.”
이상의 용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다.
1) ‘료’와 ‘갈’은 지역 이름으로서 함께 묶여 사용되었다.
2) 료갈은 원래 중국의 국경 밖, 조선의 변경이었다.
3) ‘료’ 지역은, 중국의 내지로부터 갈석산碣石山 지역보다 가까운 곳이었다. 만일 ‘료’ 지역이, 갈석산으로부터 근 천리나 떨어진 지금의 요하유역을 의미한다면, “갈료”라고 말하지 “료갈”이라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실에서, 료는 현재의 요하유역이 아니라 중국내지로부터 갈석산보다 더 가까운 난하 유역이었음이 입증된다.
4) 당나라 현종 때, 영주지방은 거란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거란의 재귀부歸附로 현종 개원 5년, 717년에 영주가 재설치되긴 했으나), 지금의 요하유역은 당나라의 영토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나라 국경이 “료갈에 이르렀다”고 표현한다. 무슨 뜻인가? 료는 갈석산 근처 난하유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5) 상호 인접해 있는 “유 계”(유주, 계주)처럼, 료 지역과 갈 지역도 서로 가까우므로 ‘료’와 ‘갈’ 두 낱글자를 함께 결합해 사용한 것이다. 둘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상호 연결해, 한 지역의 고유명사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실에서도 “료”가 갈석산에서 가까운 난하 유역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6) 전술했듯이 유주, 계주, 요수, 갈석 지역은 모두 서로 이웃해 있다는 사실이 당태종 조서의 문구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현대 중국의 석학이었던 부사년도 이 네 군데를 잇는 구역을 통틀어, “유, 계, 료, 갈” 네 글자 중 중간의 두 글자를 따서 “계료薊遼” 지역이라고 표현한다(<이하동서설> 236).
7) 수양제 조서에는 “료갈”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지만 그와 유사한 어구들이 나온다. “고구려인들이 발갈지간에 모여, 요예지경에 자리를 깔고 그곳을 먹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수양제 조서의 표현 “발갈지간”과 “요예지경”은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병렬 어법이다. “발과 갈 사이”란, 발해연안 특히 난하 유역과 갈석산 사이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료갈”의 실질적인 동의어다.
“료와 예의 지경”이란, 료수 즉 난하 유역과 고래로 우리 부여족(예족)의 땅인 갈석산 지방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것도 위와 동일한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동일한 한 지역을 상호 다른 문구로 묘사한 것이다.
이상의 제 사료들은 난하요수설을 강력히 입증한다.
한편, 옛 요수는 지금의 요하라는 주장, 즉 난하요수설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첫째, <사기/흉노열전>과 <위략>에 따르면, (번)조선에 볼모로 와 있던 연나라의 현장賢將 진개는 신임을 얻어 본국으로 돌아간 후, (번)조선을 침략해 (번)조선의 서쪽 지역 1천리를 점령하고 연나라는 그곳에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등 다섯 개 군을 설치하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구축한다. 이 사건은 최소한 서기전 220년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양평은 요동군의 통치 좌소였다. 당시의 양평을 오늘날의 요양遼陽시 근교로 추정할 경우, 요서는 지금의 요하 서쪽지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기한 다섯 개 군 중 나머지 세 개 군 즉 상곡, 어양, 우북평은 모두 지금의 북경과 계현, 난하, 갈석을 잇는 선 즉 북위 40도 선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연나라가 단군조선의 번조선(당시에는 기자조선)을 쳐서 얻은 1천리 땅에 이 다섯 개 군을 설치했다고 볼 때, 지금의 요동까지 포함하려면, 직선거리로 1천리가 아닌 2천리 영토가 필요하다.
게다가, <북부여기>는 연나라가 번조선 땅 1천리를 정복한 결과 연나라와 번조선(대부여)의 국경이 “만번한”으로 정해졌다고 서술한다. 그 뒤 서기전 202년에 연나라와 번조선(대부여) 간의 국경은 난하였다고 같은 책이 말한다.
그렇다면, “만번한”은 구구한 해석을 뒤로하고 (후대의) “위만의 번한성(험독성, 창려현 근방)”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연나라가 설치한 요서군은 난하 서쪽, 요동군은 난하 동쪽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연나라가 그 다섯 개 군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장성 유적은 난하를 넘어 내몽고 적봉 및 그 동쪽까지 잔존하고 있다. 그리고 요양시에서 요양이 연나라 요동군의 통치좌소 양평이었음을 입증하는 유적과 “양평襄平”이 새겨진 동전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고 한다. 연나라 요동군이 지금의 요하 동편에 있었음이 확실하다면, 그 당시에도 지금의 요하를 요수로 불렀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둘째, 서기 800년 전후의 책 <통전>은 말한다. “압록수는 수원이 동북 발해의 백두산에서 나오고··· 평양성 서북 450 리, 요수 동남쪽 480 리에 있다. 鴨綠水, 水源出東北靺鞨白山···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 이 거리는, 지금 재어보아도 매우 정확한 직선거리다. 이것을 보면 요수는 현 요하임이 확실하다.
셋째, 송나라 시대의 <기주협우갈석도>는 지금의 요하를 대요수로 표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상, 난하요수설에 관한 입증과 반증을 살펴보았다. 그 밖에도 다른 입증이나 반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경주> 등 기타 지리지의 요수에 관한 묘사는 난하요수설 입증 자료 혹은 반대 자료로 삼기가 심히 어렵다. 지리지를 만든 이들은, 들은 대로 혹은 옛 자료에 의지해 기록했고, 또 시대가 흘러 강이 흐르는 방향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요수가 흐르는 방향에 관한 지리서의 기록들을 오늘날의 난하, 영정하, 요하 등과 정직하게 대입해보면 그 중 어느 하나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나의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 적어도 춘추시대까지는 중국인들이 난하 혹은 영정하 등만을, 아니면 그 서남쪽의 강을 요수로 불렀다.
둘. 그러나 전국시대 이후부터는, 난하와 요하가 함께 요수로 불렸다. 최소한 당나라 시기까지도 난하는 요하와 함께 요수로 불렸다.
셋. 요수의 이런 위치 이동은, 단군조선 판도의 축소와 중국 판도의 확장에서 기인한다.
단군조선이 현 난하 유역과 유주 영주 및 회대지방(태산지역으로부터 회하유역)까지 장악할 때는 영정하 혹은 난하만이 중국인들에 의해 “머나먼 변방의 강”이라는 뜻에서 요수로 불렸으나, 연나라와 한나라가 현재의 요동을 침략한 후부터는, 단군조선의 세력이 와해되고 한민족이 열국시대로 접어듦에 따라 현 요하가 난하와 더불어, 중국인들에 의해 요수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넷, 훗날 요나라(916-1125)가 세워지고 현 요하의 이름이 정착된 후에는, 현 요하가 요수로 불리는 예가 훨씬 많아졌으며 난하가 요수로 지칭되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을 것이다.
질문 3. 난하도 요하도 옛날 요수로 불렸다면, 고구려 당나라 전쟁 때의 요수는 어디였는가? 격전지인 요동성과 안시성은 지금의 난하 유역인가, 요하 근처인가?
난하였는가? 그에 관한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호림이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에서 증언한대로, 중국 당산시 근방의 유적과 전설, 현지縣誌 등을 살펴보면, 그 당시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로 나타난다.
둘째, 당태종의 조서, “이제 유주와 계薊를 순행하며 요수와 갈석산에서 문죄하고자 한다 今欲巡幸幽薊, 問罪遼碣”라는 문구에서, 요수는 지금의 난하라고 해석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우며, 그 요수를 현재의 요하로 볼 경우에는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다.
셋째, 이맥의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는 전술한 네 군데서 당시의 요수가 지금의 난하임을 입증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경내인 개평에 당시의 고구려 건안성이 있었고 그 북으로 칠십 리 되는 곳에 안시성이 위치해 있었으며, 요동성은 거기로부터 동쪽으로 나아와 난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지점인 지금의 창려 남쪽 근방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는 <조대기>를 인용해 말한다.
아니면 요하였는가?
<신구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 등에 나타난 수당 대 고구려 전쟁에 관한 기록은 죄다 현 요하의 동편에서 안시성 전투 등이 일어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듯하다.
이건 좀 다른 얘기일 수도 있는데, <수서>의 동이전, 고구려 항목을 읽어보면 춘추필법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113만 대군을 잃고 겨우 수천 명이 살아 돌아간 처절한 패배는 모두 감춘 채, 오히려 수양제가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에서 마침내 승리한 것처럼, 고구려가 항복했다고 거짓으로 기술해 놓았다.
결론은 무엇인가?
애독자님의 판단에 맡긴다. 본 소설은 전자前者의 입장, 즉 “난하요수설”을 적극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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