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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7 ~ 2/2 까지 "마산항"님의 탄도파 인수체험기입니다.>>
탄도파 인수 후기를 남겨야 하는데, 이미 한달이 지나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가네요.
인수 후기는 요트 초짜가 남겨야 한다는 주변분들의 가르침에 따라 이렇게 적어 봅니다.
혹시 사실과 다르거나 의견을 달리 하는 점이 있어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년 12월 초 김선장님과 최선장님은 새로운 요트를 구입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거래되는
유럽, 일본 등 해외 요트 매물을 이 잡듯이 뒤졌다. 명정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탄도파를 구입키로 결정을 하였다.
이후 최선장님과 일본 딜러와의 줄다리기 가격협상이 시작되었다.
최 : 탄도파 가격이 얼마인가요? 그 가격은 너무 비쌉니다.
딜 : 이 요트는 레이스정입니다, 이상하네요!? 한국에서는 대부분 크루징을 선호하는 것 같던데!
일단 오셔서 배를 본 후에 구입 여부를 결정하세요.
최 : 이 요트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으니, 가격을 조정해 보시오.
딜 : 오너는 일본 요트계에서 저명한 인사로서 자존심이 강하니 가격을 깍지 마세요.
안사도 상관없습니다! 가격을 깍으려고 한다면 아마 팔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선장님은 끈질기게 일본 오너를 설득하였다. 한 달 반 동안 20여 차례의 메일과
전화를 주고받으며 일본 오너의 거만하고 뻤뻣함도 사그러져 갔다.
1월 27일 밤 서울역을 출발한 6인(김선장님, 최선장님, 한선장님, 한재희님, 박광섭님 그리고 나 마산항)의
악당들은 열차 내에서 맥주를 주고받으면서 탄도파 인수 계획을 재점검하였다.
1월 28일 아침 부산항을 출발한 코비호는 10시 40분경 하카타항에 도착,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가니
일본 딜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7인승 승용차에 짐을 싣고 나니 거구 7명이 탈 자리가 없어,
짐 위에 걸터앉아 2시간 거리인 구마모토로 향하였다.
다시 후쿠오카로 돌아가야 하는 딜러는 마음이 급한지 시속 130킬로로 질주하였다.
차 안에서 우리는 일본 딜러와 인수 및 출국 일정 등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
딜 : 구마모토에서 후쿠오카까지 요트를 가지고 간 후, 수속을 밟아야 하니까. 후쿠오카에서
약 3일정도 체류를 해야 할 겁니다.
우 :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이요? 우리가 구마모토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동안 모든
서류를 준비해 주시오.(구구절절 우리의 타당성을 줄기차게 설명하였다)
딜 : 알았소! 일단 노력해 보겠소.(일본인 특유의 소심성과 원칙성이 돋보인다)
우 :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일단 점심 먹고 갑시다.
딜 : 밥 먹을 시간이 없어요! 배를 오늘 안에 인수받으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점심을 거른 채 구마모토로 가면서, 슈퍼에서 식수 쌀 등과 예비용 기름통을 준비하였다.
구마모토 이스턴 마리나에 도착하니, 이미 탄도파는 선대에서 내려져 있었고
조금 뚱뚱하고 거구인 40대 후반 가량의 오너(오가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해는 이미 서산에 저물어 가기 시작했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리는 탄도파 선실에 모여서 오가타氏로부터 요트의 성능과 장비 사용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오 : 이배는 조심스럽게 살살 다뤄야 합니다! 바람이 좋으면 20노트까지 나가기 때문에
우리도 겁이 날 정도입니다. 우리 클럽에는 크루가 15명이고 그중에는 일본에서 제일
유명한 셋팅 전문가가 있는데, 현 상태가 이 배의 베스트 컨디션입니다.
우 : 오! 굿!!
오 : 이 배의 특징은 카본 마스터로서, 마스터 가격이 배 값과 맞먹으니 신중하게 조정을 해야 합니다.
(유압 자키로 마스터 장력을 조정하면서 열심히 설명을 한다)
1시간가량 배의 성능 등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창고에서 세일 등 장비를 수령하였다.
거구이며 힘이 장사인 오가타氏는 한손으로 세일을 배 위에 올려놓으면서, 세일의 성능과
사용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오랜지색으로 표시를 해 놓은 것은 ?!?&% 라고 설명을 한다)
배에 대한 설명을 모두 들은 후, 박광섭님과 몇몇 대원은 선대 해체작업에 들어갔고
다른 일행은 클럽하우스에서 딜러와 일본선적 말소 등 서류정리와 향후 일정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
딜러는 후쿠오카로 돌아가는 대로 선적 말소, 세관을 통관하는 방법 등을 확인해 주기로 하였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져 주변의 가로등만이 하버를 밝히고 있었다. 대륙의 한랭전선이
멀리 큐슈지역까지 확장을 했는지 평소 보다 조금 추운 날씨라고 한다.
오가타氏는 딜러에게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모든 것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할 때까지
당신이 책임을 지고 도와 주세요” 라고 강력하게 주문을 한다.
(오가타氏는 일본인답지 않게 대범하고 서글서글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 같다)
점심을 거른 채 피곤한 기색이 확연한 딜러는 자기 부인과 통화를 한다. “지금 구마모토에 있는데,
앞으로 1시간 후에나 출발을 하게 되면 집에는 3-4시간 후에 도착하니, 나 걱정하지 말고 식사를
먼저 하라”고 부인을 다독거린다.(빨리 마치고 집으로 가고 싶은 심정인것 같다)
금년 4월경에 오가타氏는 딜러와 52피트 요트를 가지러 뉴질랜드에 간다고 한다.
큐슈지역에서의 요트 거물인 오가타氏의 주문에 대해,
딜러는 고분고분 잘 순응하여 우리를 최대한 지원해 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오가타氏는 우리에게 계속 안전항해를 주문한다.
오 :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요?
우 : !?
오 : 나 같으면, 집 세일만 사용하고 메인 세일은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이 배를 처음타면서 메일 세일을 올리는 것은 너무너무 위험합니다.
한국에 돌아가신 다음에 천 천히 메일 세일에 대한 것을 습득한 후에 사용하십시오.
우 : 잘 알겠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 : 일기예보에 의하면, 앞으로 2일간 만 날씨가 좋을 것 같고, 큐슈지역은 암초가 많으니
중간에 기항을 하지 말고 곧장 후쿠오카로 가십시오.
우 :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 : 저는 종종 한국에 출장을 가니, 한국에서 만나서 같이 세일링을 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오너 및 딜러와 작별 인사를 한 후, 클럽하우스에서 간단히 샤워를 했다
우리 6인의 악당들은 일본에서의 첫 밤을 선실 내에서 김치찌개에 소주잔을 돌리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피곤한 몸에 알코올 기운이 서서히 퍼지듯이 밤은 깊어갔고...
내일의 항해를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6시, 큐슈지역은 암초투성이라서 만조 시각에 맞춰 이스턴 마리나를 출항하기로 했다.
하지만 세면을 하랴 변을 보랴 1시간가량 지체되어 7시경에 출항하였다.
킬 높이가 2.9미터인 탄도파는 조심스럽게 구마모토의 이스턴 마리나항을 출항하였다.
엔진 속력으로만 7-8노트를 주파하였다.
마치 물찬 제비마냥날렵한 탄도파는 물위를 S라인을 그리면서 부드럽게 질주해 나갔다.
이른 아침에 출항하는 어선 몇 척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우리의 뒤를 뒤쫓아 왔다.
아침 햇살이 따스한 요트 콕핏에 앉아 주위의 풍광을 즐기면서 아침 식사를 간단히 때웠다.
좁은 灣을 빠져나와 주위가 탁 트이자 집 세일을 펼쳤다.
탄도파는 갑자기 용트림을 하더니 속도계가 11노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 모두 탄성을 지르면서 힐링하는 탄도파의 육체위에서 환희를 갈구했다.
탄도파의 유연한 몸매를 감지하기 위해 몇 번 태킹을 시도해 봤다.
최선장님 왈 “아니 이거 시트를 윈치에 몇 바퀴 안 감았는데 태킹이 끝났네!! 너무 싱겁잖아!?”라면서
탄도파의 심플한 몸매를 극찬하였다.
나가사키 반도를 향해서 탄도파는 질주를 계속하였다. 멀리 아니 가깝게 느끼는 곳에
큐슈에서 제일 높은 아소산이 눈앞에 들어왔다. 아소산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관광객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활화산인 아소산에서 유황가스가 분출될 경우에는 관광이 금지된다)
나가사키 外海로 나가자 파고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3미터의 파도가탄도파의 뱃머리를 때리자.
“이대로 야간 항해를 하는 것은 무리이나 중간에서 하룻밤 묵고 가자, 이참에 사세보항에 들러
나가사키의 명물인 하우스텐보를 구경하고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최선장님은 “주위의 지형도 잘 파악이 안 되고, 前 오너의 조언대로
안전하게 후쿠오카까지 스트레이트로 가자”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높게 일던 파도도 잦아져서 탄도파는 순조롭게 큐슈의 서부지역을 통과하였다.
가까이 사세보 군항에는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함정이 위용을 자랑하며 들락거리고 있었다.
사세보항을 뒤로 하면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사세보항은 일본 군사력의 요충지이다. 일본은 5척의 이지스함을 보유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한척도 없다.
답답한 현실에 마음이 아프다.
우리의 요트가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야만 해양국가가 될 수 있고,
우리의 해군 군사력도 덩달아 발전하여 일본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퍼스트코리아팀의 임무는 그야말로 막중하다 할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고려 말기부터 우리나라의 동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들의 노략질과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많은 동족들이 노예로 잡혀가서 큐슈지역에서 비통한 생애를 마쳤다.
사세보항에는 아직도 왜구의 후손들이 우글우글 거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언젠가는 한번 가서 눈으로 확인을 해봐야겠다.
사세보항을 벗어나자 해는 서산에 기울어 점점 어두워졌으나
달빛이 파도에 반사되어 우리들의 시야를 밝게 해주었다.
멀리 어선의 불빛과 등대의 점멸등을 눈동자에 담고 키의 방향을 가늠하였다.
큐슈 북쪽지역으로 돌아서니 너울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아마 강풍이 몰아치고 간 후에 우리가 통과를 하는 것 같다.
새벽 물안개의 이슬이 한 방울씩 갑 판 위를 적시듯이 장시간의 항해에 우리 몸도 서서히 피곤해 지고 있었다.
후쿠오카의 하카타항이 가까워지자 팀원들의 동작이 민첩해 졌다.
하카타항구를 오가는 거대한 외항선과 어선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였다.
거의 다왔다고 생각을 했지만 좀처럼 항구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윽고, 탄도파는 구마모토의 이스턴 마리나를 출발한 후 26시간이 지난
30일 오전 9시경에 하카타항의 마리노아 하버에 계류를 할 수 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긴 항해를 하였다.
오면서 잠시잠시 눈을 부쳤지만 피곤이 엄습해 왔다.
하지만 딜러에게 전화를 걸어 마리노아 하버 도착 사실을 알리고
속히 통관절차를 밟아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마침 근처에 와있던 딜러는 10분도 안되어 우리 배로 왔다.
"오늘 중에 통관과 출국수속을 마치는 것은 불가능 하니, 내일까지 해주겠다”고 한다.
장기간 항해에 몸도 마음도 피곤한터에 사우나에 가서 푹 담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때마침 마리노아 요트 하버의 시설 보수공사로 인해 간편한 샤워시설 조차 없었다.
게다가 근처에는 목욕탕조차 없다고 한다. 딜러는 이러한 사정을 눈치 챘는지,
인근 요트클럽 샤워장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서울을 출발한 후 3일간 정신없이 서둘러 움직이다가,
1박2일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어 모처럼 느긋한 기분을 만끽하였다.
샤워를 마친 후 오후 내내 근처 백화점과 할인매장에서 쇼핑을 하면서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딜러가 우리 요트를 찾았다.
“어제 쓰시마 북단에서 한국인 요트가 침몰을 한 사고가 발생했는데,
선장이 박氏인것 같고, 승선한 모두가 헬기에 의해 구조되었다”는 비보를 전해왔다
최선장님이 한국에 전화를 걸어보니, 한국에서도 전혀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선체는 침몰했어도 인명피해가 없었다니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구경삼아 인근 오도 하버를 찾았다. 요트들이 빼곡하게 계류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 탄도파와 견줄만한 요트는 없어 보였다.
오도 하버 클럽하우스에 들어서니, 요트 장비가게 주인이 우리를 향해서 대뜸
“혹시 한국에서 탄도파를 인수하러 오신 분들이시오?”라고 묻는다.
우리도 놀랐다.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알아봤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장비가게 주인 왈 “탄도파는 큐슈지역에서 가장 빠른 명정으로서 한국에서 구입을 했다
는 소문이 쫙 깔렸다”라고 열을 내면서 이야기 한다.
또한 前 오너인 오가타氏에 대한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어깨도 으쓱해졌지만, 아리랑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체면이 설 것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이 엄습해 왔다.
배로 돌아오니, 이미 세관 통과를 마쳤다고 딜러가 전해왔다.
마지막 출항 점검을 하고 식량과 연료를 채우고, 딜러와 함께 출국신고 차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았다.
과거에 아가씨호 통관을 맡았던, 젊은 여성 통관사가 김선장님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는다.
박광섭님이 이 여성에게 “나는 총각인데 우리 앞으로 잘 사귀어 보자“고 치근덕거리자,
여성 통관사는 “나도 미혼인데 잘 되었다”고 응수를 했다. 우리 모두 낄낄 거리며 웃었다.
다시 배로 돌아와, 딜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에게 안전 운항을 계속해서 당부한다.
자그마한 체구에 지나치게 원칙적이고 사무적이어서 호감이 가지 않았던 그였지만
몇 일 동안 대화를 나무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정이 든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 많고 친절한척 하는 사람 보다 무뚝뚝하고 말없는 사람의 인간성이 더욱 따뜻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2월 1일 새벽 3시경 귀국길에 올랐다.
수영만 도착 예정시간을 감안하고 또한 야간항해를 피해 주간항해를 길게 하기 위해 새벽 출항을 한 것이다.
출발하기 전에 기상예보를 확인했지만, 예상보다 파도가 높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출항해서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바닷물보라에 옷과 장갑은 젖어 몸에 한기를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바람의 방향마저 부산 방향에서 불어와 우리 배는 쓰시마에서 점점 멀리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풍을 맞다 보니 속도도 5-6 노트에 불과한데다, 파도 또한 점차 거세져만 가고 있었다.
4-5미터의 파도는 계속해서 뱃전을 꽝꽝 때렸고 몸을 가누기가 어려운 상태에서
선실 내에 잡동사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이렇게 8-9시간을 항해했지만 우리는 고작 쓰시마 동쪽을 통과하고 있었다.
피항을 할것이냐 그대로 갈 것이냐 라는 기로에서, 최선장님은 피항을 하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2월 1일 12시경에 침로를 쓰시마로 돌렸다. 하지만 피항 할 만한 항구가 부근에 없었고,
온 만큼 돌아가야 하는 이즈하라항 뿐 이었다.
점심은커녕 아침식사도 거른 채 였지만 배가 고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냥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초콜릿 과자와 생 라면을 부숴 깨물어 먹었다.
선실 내의 잡동사니가 날아다니는 와중에서도 팀원들의 체력을 우려한 최선장님은
달걀 후라이를 만들어 팀원들에게 돌렸다.
(후라이판에 기름을 안 붓고 후라이를 해서 반은 새까맣게 탔다, 이런 후라이는 처음 먹어봤다)
나만 빼놓고 전원이 교대로 키를 잡았다. 하기사 요트 초짜에게 키를 맡기기에는 파도가 너무 높았다.
밀려드는 파도에 뱃머리가 팩팩 돌아가고 피칭과 로링으로 인해 몸을 지탱하기 어려웠으며
거대한 물보라가 계속해서 콕핏을 뒤덮었다.
김선장님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계속해서 18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아마 수십곡은 너끈히 부른 것 같다)
코앞에 보이는 것만 같은 이즈하라항이것만 가도가도 같은 거리를 두고 우리를 조롱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항구에 도착을 하니 이미 어두워졌고 모두 파김치가 되었지만
우리 모두는 눈동자만큼은 빛났고 가슴 뿌듯한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
먼저 이즈하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입국신고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모두들의 의견에 따라
출입국관리사무실 건물을 찾았지만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되었다.
인근 선박회사 직원에게 “우리는 폭풍우를 만나 잠시 피항을 한 사람들인데 출입국 신고를 하고자 한다”고
도움을 청했다.
잠시 후, 해상보안청. 세관.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우리 주위를 둘러쌌다.
우리가 이들 일본 공무원들을 비상훈련을 시킨 셈이다.
해상보안청 :“당신들은 불법 입국을 했으므로 처벌을 받아야 하오”
우리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입국 수속을 하고 있잖소”
출입국 : “이해합니다. 일단 입국 수속을 해드리겠습니다”
(해상보안청 보다 출입국측이 더 합리적인 것 같다)
세관 : “일단 요트로 가서 자초지종을 들어봅시다, 높은 파도로 대단히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요트에서 주무시지 말고 인근 호텔로 가서 편히 쉬세요”
(아주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혹시 나중에 이즈하라 세관에 볼 일이 있는 사람은 이 세관원을 만나봐라,
이름은‘아오루’이다)
세관원이 이야기 해 준대로 인근 비즈니스호텔을 찾았다.
대충 샤워를 하고 난 뒤 이자카야(선술집)를 들렀다.
메뉴가 한국어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인 낚시꾼들이 자주 들르는 것 같다.
다음날 2월 2일,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후경에는 바람이 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 마산항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일행에서 떨어져나와 혼자 페리를 타고 부산으로 입항하였다.
지금도 다른이에게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탄도파는 2월 2일 오후에 이즈하라를 출발하여 2월 3일 새벽에 부산 수영만에 입항하였다.
탄도파를 타고 전우애를 같이하면서, 값진 체험을 하게 해준데 대해
훈훈한 포용력이 있는 김선장님
슬기롭고 치밀한 최선장님
항상 솔선수범하는 한선장님
경험이 풍부한 한재희님
기발한 아이디어맨 박광섭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번 항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이라면?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느끼는 요트의 매력은 남달랐다.
현해탄의 높은 파도와 물보라 속에서, 내가 아직 살아 숨쉬고 있다는 희열감을 만끽하게 해준 것이다.
이래서 나는 요트맨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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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나 재미있게 잘 읽어습니다. 탄도파호 역사를 잠시 기억하게 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함께 동승한것 마냥 생생한 기분이 드네요. 탄도파의 역사도 조금은 알게 되고. 낭만으로만 바라보던 요트에 대한 생각도 조금은 달라진듯 합니다. 도전해 보고 싶군요 ^^
값진 경험을 간접적으로 느껴봅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