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적 싸움 :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4)
- 영적 싸움에 있는 마귀와의 전쟁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 -
에베소서 6장 10-20절 / 10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8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악한 영인 마귀를 상대로 싸움에 있는 그리스도인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보내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할 것과 함께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을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싸움은 혈과 육인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이요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마귀는 간사한 꾀를 사용하고 갖은 모략을 써서 미혹하여 인간적인 수준의 것에 욕망을 갖고 사는 것에 인생의 전부가 있는 것 인양 여기게 하여서 원하는 바를 세상으로부터 얻고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것에 온 마음을 빼앗김에 있게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슬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슬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갈 5:17)며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 것을 말하였습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성도의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옛사람의 소욕을 건드려서 충동질하여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마음이 원하는 욕심대로 살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자신을 보면서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두 마음이 싸움에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18-25)
마귀는 언제든지 항상 그리스도인에게서 그의 옛사람의 본성인 육체의 욕망을 건드려 이것을 충동하여 일어나게 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에게서 옛사람의 성질인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특별하다거나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럴 때 그리스도인은 죄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 아닌 까닭에 마귀가 이끄는 대로 죄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까닭에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옛사람의 성질이 마귀의 미혹에 쉽게 이끌림에 있음을 인식하고서 그대로 살려는 것에 주의를 하고 경계를 가지며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 것에 마음을 씁니다.
악한 영인 마귀와의 싸움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것을 권면함
그럴 수 있기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래야 악한 날에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고 모든 싸움이 끝나서는 하나님 앞에 굳건히 서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14-19절에서 알려주었습니다.
첫째,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섯째,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하였습니다. 여섯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섯 가지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것을 비유적으로 해 주시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하나님의 무기’를 이르는 표현으로, 군인이 전쟁에 나가면서 자신을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입은 갑옷은 물론 공격용 병기까치 총칭하는 용어입니다. 여기에는 허리 띠(현대에는 요대), 호심경(문자적으로는 가슴막이로 현대의 방탄복), 신(현대에는 군화), 방패, 투구(현대에는 철모), 검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러한 것에서 11절에서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단순히 옷을 입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기의 모든 장비를 갖춘다는 의미에서 ‘무장을 갖추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13절에서 전투에 사용할 병기를 갖추는 것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것에서 무장할 하나님의 병기로 언급해 주시고 있는 것이 (1) 띠 – 진리 (2) 흉배 – 의 (3) 신 – 평안 (4) 방패 – 믿음 (5) 투구 – 구원 (6) 검 –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장할 하나님의 병기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 진리, 의, 평안, 믿음, 구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 하나하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함에 있는 첫 번째의 무기인 허리 띠 : 진리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할 첫째의 장비를 갖추는 것은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입니다. 원문에는 ‘허리 띠’라는 말이 없습니다만,. 바울은 ‘허리를 졸라매다’라는 뜻의 분사와 ‘허리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여 “진리로 여러분의 허리를 동이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전쟁에 임하기 전에 전투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허리를 동여매는 것, 곧 허리를 묶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의 허리를 졸라매는 장비는 분리된 보호용 허리띠나 칼을 차는 허리띠가 아니라 허벅지를 보호하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입는 짧은 바지처럼 생긴 앞치마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전투할 때 동작을 원활히 하려고 옷을 허리에 붙들어 매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허리를 동여매야 할 ‘진리’는 무엇인지요.
(1) 이는 먼저 복음의 진리로 볼 수 있습니다(엡 1;13; 4:21; 참조. 골 1:5). 즉, 복음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다른 본문에서 진리는 명백하게 복음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에 진리로 허리를 동이라는 것은 말씀의 진리를 굳게 의지하라는 권면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온갖 술책을 동원하여 성도들을 속이고 미혹하려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복음의 순전한 진리를 굳게 붙들고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다른 모든 것을 붙들어 매고 제자리에 있게 하는 허리띠와 같습니다.
(2) 또한 영적 군사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신실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메시야는 공의로 허리띠를 삼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사 11:5).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LXX)은 이사야서 본문의 ‘성실’이라는 단어를 ‘알레데이아’로 번역하였습니다. 에베소서에서도 이 단어는 하나님을 따라 창조된 새사람의 특성을 가리키며(엡 4:24), 또한 빛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맺어야 할 빛의 열매를 가리킵니다(엡 5:9). 사도가 이곳 본문에서도 진리를 이런 의미로 사용했다면, 성도들이 허리를 졸라매야 할 영적 장비는 복음의 진리가 임함에 의해 진리로 말미암아 살려는 믿음에서 가져지는 마음과 행동의 진실성을 가리킬 것입니다. 해서, 성도의 마음에 심어진 복음의 진리에서 나오는 생명력의 힘에 의해서 믿음의 주께 뿌리를 내려 굳건히 서서 마음의 진실함에서 나오는 행동에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한 것에서 칼빈은 진리의 허리띠를 성도들의 거짓 없는 진실한 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믿고 그 영향력 아래 사는 성도들은 모든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진실을 말해야 하며, 진실하게 살 것을 권면하였습니다(엡 4:25; 5:9). 이렇게 함으로써 마귀가 공격당할 여지를 주지 않게 되며, 마귀의 공격을 받더라도 능히 대적하여 이기게 됩니다.
복음의 진리를 믿고 그 영향력 아래 사는 성도들은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않게 하며 땅엣 것을 바라봄에 있는 탐심으로 살게 하는 악한 마귀의 간계를 간파함에 있어 여기에 미혹되어 넘어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마귀를 어떻게 대적하여 물리칠 것인지의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악한 마귀를 물리친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귀가 이런 방법 저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해도, 예수님은 말씀의 진리에 확고히 서 있음으로 마귀를 물리쳐 패배를 안겼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3-11)
2.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함에 있는 두 번째의 무기인 호심경 : 의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할 둘째의 장비를 갖추는 것은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입니다. 여기에서 ‘호심경’은 ‘가슴막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의의 가슴막이를 붙이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이 ‘호심경’, 곧 ‘가슴막이’를 ‘흉배’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오역에 의한 오류입니다. 흉배는 조선 시대 관리들이 관복의 가슴 부분과 등 부분에 붙이던 학이나 호랑이 형상을 수톻은 네모난 헝겊 표장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에서 사용한 호심경이란 단어는 병사가 전투에 나갈 때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착용하는 놋쇠로 만든 방어요 장구를 가리키는데, 단순히 가슴만이 아니라 목에서부터 허리까지, 혹은 넓적다리를 감싸는 보호대였습니다. 이는 병사의 가슴과 심장과 폐 등 신체의 중요한 기관들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이사야 59:17에서는 가슴을 보호하는 의복을 입는 것에서 '갑옷'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본문에서도 ‘흉배’(胸背)가 아니라, ‘흉갑’(胸甲)이나 ‘가슴막이’로 번역해야 합니다. 한글성경에서 바른성경, 새번역성경이 가슴막이로 번역을 취하고 있으며, 공동번역은 ‘가슴에 무장을 하고’라고 번역하였고, 우리말성경, 현대인의성경은 ‘가슴받이’로 번역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단어인 헬라어가 ‘가슴에 대는 방패’에서 사용된 용어라고 하면서 목 밑에서부터 허벅다리 윗부분까지 늘어져 있는 것으로 흉부와 복부를 비롯한 몸통이라고 부르는 모든 곳의 여러 기관을 보호하는 갑옷이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영들을 대적하기 위해 성도들이 입어야 할 ‘가슴막이’는 ‘의의 가슴막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앞에서의 진리로 띠를 삼아 허리를 동일 것에서 보게 되는 것처럼, 에베소서에서 ‘의’ 또한 하나님을 따라 창조된 새사람의 특성을 나타냅니다(4:24). 또한 빛의 자녀인 성도들이 맺어야 하는 삶의 열매, 즉 의로운 성품이나 행동을 가리킵니다(5:9). 따라서 주석가들은 여기서의 ‘의’를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앤드류 T. 링컨(Andrew T. Lincoln)의 견해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는 “의의 흉배(가슴막이-흉갑에서의 여호와의 의 혹은 여호와의 공의는 신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본질적인 특성이다. 이것은 로마서 3:21-26의 의롭게 하는 의가 아니라 윤리적 특성을 말한다. 로마 군인들이 취하는 무장에 비추어 볼 때 가슴, 폐, 그리고 심장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앞부분의 금속 부분이다. 의를 행하고 공의를 수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군인들이 악한 권세들과 전투할 때 동일하게 중요한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8에서 바울은 믿음과 사랑이라는 덕목들을 그리스도인의 흉배에 붙일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6:7에서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라고 말할 때 그는 의를 전투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의가 그리스도인에게서 군사로 무장함에 있는 무기로 사용됨에 있는 것은 이 의가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에서의 주해에서는 “바울은 성도가 지녀야 할 ’의‘를 바로 그 ‘호심경(가슴막이-흉갑)’으로 묘사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의에 해당하는단어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 곧 사람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이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로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음으로써 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심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의를 주셔서 입히심으로 되는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대속물로 바쳐 다 쏟으심에 있는 피를 통해서 죄 사함을 얻게 하실 것을 새언약으로 주신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나눠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나눠주신 ‘의로 여기시는 것’에 의해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인 ‘의롭다 함을 받음’에 있는 ‘믿음에 의한 칭의’로 말해져 왔는데, 로이드 존스는 이로써 하나님의 의가 주입되어 심어져 그 의가 자람에 있다고 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누어 주신 그 은혜 안에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의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의인 동시에 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살려는 의로운 생활로 구체화됩니다. 해서 ‘믿음에 의한 믿음’, 곧 ‘믿음으로 믿음에 이름’에 있으니,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는 악의 원흉인 사단의 세력의 악한 공격을 훌륭히 막아내며 무력화시킵니다. 5:9에서는 이 의가 빛에 속한 자가 맺는 빛의 열매로 묘사되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영들의 강력한 공격에서 성도들의 가슴과 심장을 보호해 주는 가슴막이 역할을 하니, 이보다 더 훌륭한 영적 보호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음에 있는 것이야말로 마귀와 악한 영들의 정면 공격에서 성도들을 보호해 주는 굳건한 가슴막이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을 확신할 뿐 아니라, 의를 행하며 의의 열매를 맺어나가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부여하신 의와 성도의 덕목으로서의 의가 날줄과 씨줄이 되어서 뚫을 수 없는 의의 가슴막이를 이룹니다. 이는 마치 옷감을 짤 때 가로세로로 엮여 있는 중에 가로의 줄인 씨줄과 세로의 줄인 날줄이 함께 엮여서 짜지는 것과 같고, 두 가닥의 새끼줄이 꼬아져서 질기고 튼튼한 줄로 짜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는 의는 견고한 성을 이루고 있음으로써 그 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영생이 보장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음이 주는 영생의 확신에 있습니다. 그런 그는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기뻐함에 있습니다. 이는 에스라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이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에 대한 진리를 자기 것으로 함으로써만 발휘되는 힘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기뻐함이 없이는 여호와로 살 기분도 힘도 없어 매우 약하며, 무력하기까지 합니다. 악한 마귀의 공격 대상에 가장 적합한 표적이 되어 유린당하니, 악한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 맥없이 당하여 가장 영적이지 않게 됩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로부터 해방시켜 땅엣 것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의 것을 바라봄에 있는 자유한 자가 되게 해 주셨는데, 그 권세를 의지해 있는 힘으로 사는 영적인 힘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마치 육신의 사람인 것처럼 살게 됩니다.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를 단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심에 있는 것으로만 여기고, 그 의를 힘입어 의의 생명, 의의 힘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야 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감에서 있게 되는 힘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아무런 힘이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 악한 마귀는 할 수 있는 모든 간계를 다 써서 접근하여 공격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 4:6-15)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에 가장 약한 모습, 게으른 상태, 생각 없이 살아가며 다만 세상적인 사람으로 있어가는 자신을 보게 될 때 영적으로 가장 바닥에 있는 침체의 상태임을 알고 그 각성에 있어 영적 싸움에 들어가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함에 있는 세 번째의 무기인 신(군화): 평안의 복음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는 “평화의 복음이 준비된 신을 신으라”는 것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인데, ‘평안의 복음’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함에 있는 셋째 장비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여러 겹의 가죽을 붙여 만든 두꺼운 밑창에 징을 박은 ‘칼리가’(Caliga)라는 반장화를 신었습니다. 이 신발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발을 보호해 줍니다. 바울은 이를 떠올려 그리스도의 군사에게 적용하여 악한 영들과의 싸움을 준비하는 것에서 튼튼한 군화가 그것을 신은 군인을 마음에 안심을 갖게 하고 견고하게 설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복음이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주는 견고성이나 확고부동함을 의미하는 것에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복음이 준비된 신을 발에 신는다는 것은 적의 공격에 대항하려고 견고하게 서 있음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평화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복음 안에 굳게 서서 복음을 군화처럼 단단히 신고 서 있음으로써 악한 영들과 싸움 준비에 있어야 합니다. 평화의 복음을 굳게 붙드는 그리스도의 군사는 악한 영들의 공격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않으며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그리고 성도들과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악한 영들과 싸울 수 있는 가장 튼튼한 신발, 곧 견고한 발판인 셈입니다.
4.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함에 있는 네 번째의 무기인 방패 : 믿음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넷째 장비로 믿음의 방패를 가질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들을 몸으로부터 막아 꺼버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의 방패는 고대 로마 군인들이 전신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던 직사각형 모양의 큰 방패입니다. 길이가 대략 120cm 폭이 대략 75cm, 두께가 손바닥 넓이 정도로, 두꺼운 나무판 두 개를 붙여 만들었으며 위와 아래 부분을 쇠로 보강하였고, 방패의 겉면에는 천을 씌우고 그 위에 송아지 가죽을 덮었습니다. 이렇게 만드는 것은 천과 가죽에 물을 적시면 방패에 꽂힌 적의 불화살을 소멸시켜 막아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방패를 믿음과 연결시켜 ‘믿음의 방패’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취해야 할 방패는 다름 아닌 믿음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을 방패로 삼을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는 그들이 따르는 믿음의 주께서 영적 전쟁으로부터의 부상과 죽음의 해로부터 보호해 주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31-39에서 다음과 같이 큰 확신에 찬 우렁찬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렇기 때문에 악한 영인 마귀가 쏘아대는 불화살은 믿음의 방패에 의해 막아지고 소멸됩니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악한 마귀가 사용하는 불화살은 "고난, 고뇌, 박해, 기근, 의심, 욕정, 탐욕, 허영, 시기"라고 했으며, 존 스토트 목사는 우리의 양심에 불을 붙이는 "사탄의 참소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의심, 낙담, 불순종, 배반, 탐욕, 가난, 질병, 두려움 등"이라 했습니다. 마귀는 이 모두를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을 주께로부터 떼어내며 넘어지게 합니다만, 바울이 외치는 소리에 보는 믿음의 방패에 의해 차단되고 소멸됩니다.
5.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함에 있는 다섯 번째의 무기인 투구 : 구원
바울은 앞서의 무기로 무장할 것과 함께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다섯째 장비로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말한 진리의 띠, 의의 호심경, 믿음의 방패, 평안의 복음이 준비된 신과 함께 구원의 투구는 모두 수호용, 곧 방어용으로 갖출 영적 전쟁에 사용될 무기로 말해졌습니다. 투구는 적과의 싸움에 있을 때 신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전쟁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이 치르시는 전쟁으로 대적을 물리치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갑옷을 입히시는데 구원을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게 하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을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사 59:17). 바울은 거기에서 보게 되는 구원의 투구를 쓸 것을 권면하는 것에서 “너희는 (구원의 투구를)받아라”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구원의 투구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시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8에서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말하여 구원을 장차 얻게 될 미래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을 주신데 따라 과거적으로 이미 얻은 구원을 현재적으로 누림에 있으며 또한 미래적으로 얻게 됨에 있는 구원의 시제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힘에 있는 자입니다. 그 그리스도께 두 번째 강림하시어 그와 함께 한 자들을 죽음에서 부활시켜 하나님의 나라에로 데려가실 때까지 성도들을 악한 마귀와의 싸움에서 보호해 주고, 그들이 확신과 기쁨으로 머리를 들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확신과 기쁨은 악한 마귀와의 싸움에서 쏟아지는 불화살로부터도 한없는 안도감을 주는 구원의 투구입니다.
6.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함에 있는 여섯 번째의 무기인 검 : 하나님의 말씀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에 있는 그리스도도의 군사가 무장할 마지막 여섯 번째 장비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앞에서의 다섯 가지 무장에 있는 무기가 방어용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인 반면에 여기서의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 것은 유일하게 공격과 방어 모두에 사용되는 공용 무기입니다. 로마 군사는 적과 맞붙어 싸울 때 왼손으로는 방패를 들었으며, 오른 손으로는 길이 60cm, 폭 5cm정도의 비교적 짧고 예리한 칼을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칼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의 군사가 무장할 무기에 적용하였습니다.
이 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인데, 주께서 사도들에 의해 기록하게 하셔서 교회에 맡기신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며, 그에 따라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직분을 맡은 주의 종들이 입을 열어 담대히 알려야 하는 '복음의 비밀'입니다.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 복음의 비밀인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계획에 관한 것으로(엡 1:9-10),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되어 연합과 평화를 누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에 관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복음의 비밀을 알리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선포함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의 일원이 되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어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는 악한 영인 마귀의 공격이 따르기 마련이기에 그와의 싸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이 쇠사슬에 매여 있는 옥중에 갇혀 있는 상태에 있은 것도 복음의 진보를 막으려는 마귀의 책동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비록 자신의 몸이 쇠사슬에 매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복음은 매이지 않기에(딤후 2:9),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권면하였으니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엡 6:19)이라면서 "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20)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기도를 구한 것은, 그 자신에게서는 살아 있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면 죽게되는 그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지간에 다만 주께서 자신을 사도로 부르셔서 맡기신 구원의 복음인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고자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복음은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검이니 그들을 마귀에 묶여 있는 쇠사슬로부터 끊고 해방시켜 자유하게 합니다. 이는 죄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또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인 검은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까닭에 ‘성령의 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또 성령을 통해 예리한 검과 같은 효력을 발휘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와 함께 하며 진리와 더불어 기동하게 합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니(히 4:12), 하나님의 말씀에서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참으로 예리합니다. 이러한 검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손에 들려져 영적 각성을 통해 용맹함을 발휘하는데 악한 마귀를 대항하여 능히 이기는 무기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리는 생명의 힘을 행사하니 이 힘은 사람들에게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비추는 빛을 주어 그 빛에게로 나아오게 합니다(요 1:4). 그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간 곳, 곧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그 말씀에 복종하여 생명의 빛에게로 나아오는 생명의 왕성한 활동이 있습니다(행 6:7; 12:24). 그리하여 주께서 두 번째 강림하실 때는 동서남북 사방에 있는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서 나아온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심에 있으니, 그때까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을 빼앗김에 있지 않으며(참조. 요 17:12), 마귀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 중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모두 찾음으로 구원의 충만수에 있게 하십니다. 그 사실을 알고 그 믿음에 있기에 그들은 무장한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미혹하며 시험하고 넘어지게 하려는 마귀와의 싸움에 임하여 능히 이기니 자신들의 믿음의 주이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름에 있습니다(참조. 마 24:13-14; 계 7:4-10; 14:1-5).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악한 영인 마귀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갈 수 있기 위해서 항상 기도에 있어야 할 것을 권면하다
사도 바울은 13-17절에서 그리스도의 군사인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에 있는 무장의 무기를 허리 띠, 호심경, 방패, 신, 투구, 검을 들어서 진리, 의, 믿음, 평안의 복음, 구원, 하나님의 말씀 여섯 가지를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18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악한 영과의 싸움을 승리로 가져가는 것은 기도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무장한 하나님의 병기로 각각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기도에서 의존함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실례가 창세기에서의 아브라함이 치른 전쟁(318 : 4국의 연합군), 그리고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와 치른 전쟁(300 : 135,000) 등 입니다. 악한 영인 마귀와의 싸움은 사람을 상대로 하여서 치르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악한 영인 마귀를 상대로 그리스도인이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무장을 사람이 취하는 갑옷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 의, 믿음, 평안의 복음, 구원,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신에 갑옷으로 취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서 악한 영을 상대로 싸우시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존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승리를 바라봄에 있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할 것이 명령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도와 간구를 하되’는 기도가 반복되고 있는 것인데, 악한 영인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며 그 이해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가는데, 그럴 수 있기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과 도움을 간청함에서 전적 의존에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와 간구를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는 ‘항상 기도하라, 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에서입니다. 먼저 ‘항상 기도하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언제든지 악한 영인 마귀의 대적에 직면해 있는 까닭에 모든 시간이 영적 전투에 돌입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한 것은 ‘성령의 도움으로’, ‘성령의 권능 안에서’ 혹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면서’입니다. 성령은 돕는 자(Helper)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이 무엇을 간구해야할지 모를 때조차 그들을 도우시고 그들을 위해 간구하십니다(롬 8:26-27). 이렇게 항상 기도할 것과 성령 안에서 기도할 것을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의 ‘모든’은 ‘모든 경우에’를 뜻하는 것으로, 앞서인 13-17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에 있는 여섯 가지의 무장된 하나님의 무기(병기)로 악한 영인 마귀와의 싸움에 대처하는 그 모든 경우에 항상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할 것을 권면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고 영적 싸움을 수행하는 방식은 항상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가 없이는 영적 싸움에 필요한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을 수 없으니, 아무리 좋은 갑옷과 무기로 무장을 한다고 할지라도 기도가 없이는 무력하여 악한 영인 마귀를 대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사도 바울은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를 위하여 깨어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며” 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13-17절과 연관하여 영적 싸움에 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에 있을 것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항상 깨어 기도하면서 영적 싸움에 수행해야 한다는 뜻에서입니다. 해서, 그리스도의 군사는 항상 깨어 있어서 언제든지 악한 영인 마귀와의 싸움에 임할 수 있는 전쟁 준비의 상태를 갖추고 있을 것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에 있어야 하고, 또한 항상 깨어 기도하여 영적 싸움을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이 영적 싸움은 평생에 한 번 있거나, 한 두 번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닌, 일생동안 계속해서 지속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하여 깨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고 깨어 영적 싸움을 싸워나감을 인내를 가지고 해 나갈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이 영적 싸움은 그리스도인 자신의 싸움일 뿐만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에 있는 성도 모든 자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저지하려는 마귀와 악한 영들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군대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에 속한 그리스도의 군사인 성도는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악한 영인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기도하여 주 안에서 강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인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로 쇠사슬에 매여 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매임에 있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비록 자신의 몸이 쇠사슬에 매임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런 자기에게 말씀을 주셔서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말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에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는 성도들에게도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소원과 기도 요청은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 4:3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를 우히ㅏ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말씀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담대히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자기 몸에서 쇠사슬이 풀려지거나 감옥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문’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든지 살든지 자신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이 충만히 전파되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성도를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를 위해서 요구되고 있으니, 이것이 교회가 구함에 있는 ‘교회적 기도’입니다. (*)
* 본 글은 '주일예배 및 성경강론' 방 81번의 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1)배종열, 『문맥에 따라 읽는 에베소서』(기독교문서선교회) (2)길성남, 『에베소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3)제자원편,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 121 : 갈라디아서-에베소서』(제자원) (4) Andrew T. Lincoln, 『WBC 주석 42 : 에베소서』, 배용덕 역(도서출판솔로몬) (5)M. D. Lloyd Jones,『에베소서 강해 7-8 : 영적투쟁-영적군사』(기독교문서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하오니,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 책들을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