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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6:1-17 진노의 큰 날에 일어날 일 찬송: 4, 46, 586장 교독문: 마 24:3-14
하늘 보좌 환상을 본 사도 요한은 이어서 보좌에서부터 시작되는 세상을 향한 심판의 환상을 보게 되었다. 이 심판들은 모두 세 가지 시리즈로 되어 있는데, 일곱 인, 일곱 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의 순으로 되어 있다. 각 심판은 일곱 가지의 심판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일곱 가지 가운데 앞의 네 가지가 하나의 단위로 함께 진행되고, 뒤의 세 가지는 각각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심판 시리즈들은 그 심판이 진행됨에 따라 강도는 더욱 세어지고, 그 심판의 내용들은 더욱 극한으로 치닫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읽을 때 성도들은 이러한 심판을 어떻게 견디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도 한다.
여기에서 세대주의 해석자들은 이러한 심판의 내용을 모두 예수님 재림 후에 있을 사건으로 바라본다. 즉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재림하시면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공중에 들림을 받아, 즉 휴거를 하여 공중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각 일곱 가지로 되어 있는 세 심판 시리즈는 이후 칠 년 대환난 때 일어날 일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휴거된 성도들은 이러한 심판을 받지 아니하며, 믿음이 부족하든지, 아니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만 이러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 방법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요한계시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해석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굳이 들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계시는 미래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예언으로 이 계시록의 편지를 처음 받은 1세기의 성도들이나, 현재를 사는 성도들에게는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1장을 시작하면서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요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는 자, 그리고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편지를 처음 받은 1세기의 성도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뒤로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 이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듣고 읽고 기억하여 지켜야 할 말씀인 것을 분명히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대주의처럼 해석하면 과거와 현재를 사는 성도와는 별 상관이 없는 책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무시하는 것으로, 우리가 반드시 배격해야만 하는 해석 방식이다.
그렇다면 6-16장에 기록된 세 심판 시리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 재림 전까지 이 세상이 받을 모든 심판을 의미한다. 타락한 이 세상은 분명히 심판을 받을 대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가? 이것을 교회에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6-16장에 기록된 환상의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심판들은 모두 세상을 향한 것들이지,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두려움을 버려야만 할 것이다. 오히려 이 심판에 대한 환상은 성도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한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방에 객이 되어 4대를 지나 돌아올 것인가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가나안 땅에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5:16).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칭하셨다(출 12:41).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조성이 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의 죄악을 심판하는 하나의 큰 군대를 이루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심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세상은 이러한 심판에 극렬히 반응하여 대적하기 때문에, 교회에 소속된 성도로서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박해와 극렬한 반대에 직면하여 있음을 먼저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렇게 반항하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은 심판으로 그들에게 멸망을 선포하고 계심을 우리는 이 세 심판 시리즈들을 통해 배우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계심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세 심판 시리즈 가운데 첫 번째 심판 시리즈인 일곱 인 심판에 대해 살펴보자.
이 일곱 인은 보좌에 앉으신 이께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책을 인봉했던 것으로, 어린 양께서 이 일곱 인들을 하나씩 제거하실 때마다 하나의 심판이 시작됨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 심판까지 색깔 있는 말들이 나온다. 이 말들을 탄 자들이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다. 이 심판의 배경은 슥 1:8-15과 6:1-8로,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시킨 나라를 심판하신 후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중건될 것에 대한 예언과 관련한다. 이 배경이 요한계시록으로 들어왔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 후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에 대한 것을 암시한다.
첫 번째 인을 뗄 때 나온 말은 흰색으로, “이기고 또 이긴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흰말은 승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이 전쟁은 나라간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상징한다. 두 번째 인을 뗄 때 나온 말은 붉은 색으로, “땅에서 화평을 제한다”고 말한다. 이것도 역시 전쟁을 의미하는데, 첫 번째와는 달리 국내전을 의미한다. 붉은 색은 피를 의미하며, 내전으로 인해 그 나라 안에 평화가 깨지고 화평이 사라지고 피 흘림이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상징이다. 따라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모두 나라와 나라 사이, 그리고 국내에서 일어나는 부족들 사이의 모든 전쟁들을 의미하며, 이러한 전쟁은 타락한 인류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세 번째로 나타나는 말은 검은 색인데, 그 탄 자가 저울을 가졌는데, 이는 기근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 보리 석 되”라고 말하는 것은 물가가 급등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이 쓰일 당시 로마 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물가는 1/8 데나리온에 밀 한 되였는데, 이것이 여덟 배가 급등했다는 것은 중류층이나 하층민들이 먹을 것을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명령을 듣는데, 이 두 가지는 비싼 물품에 해당하며, 비싼 물품에 대하여는 매매가 지속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 번째 심판은 이 땅에 기근이 계속 있게 될 것이지만, 상류층들은 영향을 받지 않음을 보여준다.
네 번째 말은 청황색인데, 이는 시체의 색깔이다. 그리고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다. 따라서 네 번째 심판은 전염병으로 많은 수가 죽게 될 것을 의미한다. 특히 “땅 1/4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서 죽이더라”(6:8)는 것은 바로 많은 수가 이러한 전염병으로 사망하게 될 것임을 말한다.
이 네 가지 심판은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이 땅에 지속되는 심판임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에 존재한 인간의 역사는 모두 전쟁의 역사요, 피 흘리는 역사요, 기근과 전염병이 계속되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 초림 전에도 있었고, 초림 후에도 지속되었고,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이 요한계시록을 쓸 때에도 로마 제국은 계속하여 전쟁을 벌여 왔고, 또한 계속되었음을 우리는 로마 제국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으며, 모든 인류의 역사도 바로 전쟁의 역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타락한 인류의 역사는 또한 기근과 배고픔의 역사요, 질병의 역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네 가지 심판은 하나로 묶어서 동시에 일어나는 심판으로 생각해야 하며, 그 기간도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에게 주어지는 심판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세상을 향한 심판이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경우, 이러한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레위기 26장(레 26:14-39)과 신명기 28장(28:15-68)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징계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러한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은 심판을 의미하지 않고 징계에 해당한다. 심판은 분명히 멸망과 연결이 된다. 하지만 징계는 회복과 연결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징계를 받은 후 언제나 하나님의 회복케 하심이 약속으로 주어진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네 가지의 심판이 이 땅에 지속될 때 다섯 번째 인을 떼신다. 이때 제단 밑에서 순교자들의 기도가 들려온다. 계 6:9-11을 보면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다고 가르쳐주는데, 이들은 바로 일찍이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기도한다.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지상은 네 가지 심판으로 극심한데, 이제 배경은 하늘로 옮겨져, 순교자들이 지상에 남아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어느 때가지” 참아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이것은 성도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원수를 갚아주시기를 요청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고 예수님을 신실하게 증거하고자 했던 성도들의 억울함을 돌아보아달라는 선지자들의 외침에 하나님은 이렇게 답변을 주신다.
계 6: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공의로우신 재판관께서 그들에게 각각 흰 두루마리를 주신다. 이것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음을 의미하며, 지상의 성도들은 아직 이 옷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 수가 차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은 완결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세상의 악이 찰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함을 가르쳐준다. 마치 가나안 땅에 악이 가득찰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있다가, 이제 때가 되면 여호와의 군대가 되어 그들을 심판하러 들어가게 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렇다. 세상은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그때가 될 때까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으로부터의 박해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이 받는 네 가지 심판을 같이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고통이다. 하지만 지상의 삶을 마감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늘 보좌 앞 제단 아래에서 흰 두루마리를 받고 잠시 동안 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지상에 있는 모든 성도들보다 앞서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지상의 성도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로하시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수가 찰 때까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증거하는 삶은 박해를 받는 삶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쉼을 허락하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다.
이 위로 후에 이제 여섯 번째 심판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 위로가 없이 여섯 번째 심판을 듣게 되면 성도들이 두려움으로 인해 낙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섯 번째 인을 떼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우주적인 천재지변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이는 최후 심판에 대한 예고이다. 큰 지진이 나고, 해가 검어지고, 달은 피 같이 되고,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말려 떠나가고, 산과 섬이 옮겨진다. 이 내용들은 진노의 날에 있을 자연재해를 의미하며, 마 24:29-30과 막 13:24-25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동일한 내용을 가르쳐주셨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심판은 세상을 향한 심판일 뿐, 성도들은 이미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땅에 거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이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다), 그들이 상류층이든 중산층이든 하류층이든지 상관없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문 계 6:15-16을 보면 회개하기보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죽게 해달라고 외치고 있다. 공포로 가득하여 자신들이 숨어 있는 산과 바위를 향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해달라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을 빨리 끝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함이 아니다. 이 말씀은 호 10:8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으로, 하나님께 회개하느니 죽음을 달라는 요청에 다름이 아니다. 물론 타락한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느니 죽음을 달라고 외친다. 이들이 왜 이렇게 외치는가? 그것은 계 6:17의 선언 때문이다.
계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여기에서 진노의 큰 날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생은 없다.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이것은 당연한 결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무엇인가? 두려움인가? 무서움인가? 둘 다일 것이다. 겔 14:8은 우상을 마음에 들이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놀라움과 표징과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에서 끊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게는 구원의 길을 약속하신다.
겔 14:21-23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에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첫 번째 인부터 네 번째 인까지 이 지상에 내리는 심판의 내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도 포함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의 안식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분명히 약속하신다. “그 가운데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곧 하나님의 안식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때가 언제인가? 오직 이 세상 끝 날, 그리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위해 고난받는 자의 숫자가 다 찼을 때, 그때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핍박한 자들을 향하여 신원(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줌)하실 것이다.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에 내려지는 것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계획과 목적을 갖고 진행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신다고 겔 14:23은 말한다.
이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신원하심이 없다면 성도는 여기에서 박해를 받으며 괴로움에 처하다가 생명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일 뿐이다.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자리, 아무 이유 없이 환난과 박해의 삶을 산다면 그 누가 이런 삶을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위로를 주신다. 그것은 첫 번째부터 네 번째 인을 뗄 때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먼저 가르쳐준다. 세상에는 이런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고통이 심판이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러한 현실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이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시며, 마지막 날에는 이 심판을 끝낼 것이며, 성도들을 위로와 안식으로 들여보내실 것임을 가르쳐주신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약속이요,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역사를 배울 때 과연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가, 욥기와 하박국을 통해 배운 대로 의인이 고난을 받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악인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이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바로 여섯 가지 인을 떼심으로써 우리에게 직접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통해 배워야 할 것들이다.
요한계시록 4-5장에서 하늘 보좌 환상으로 시작하여, 6장부터 심판이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하늘 보좌에서 이 모든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며, 마지막에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시는 분은 바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시고,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교회의 중심이요, 머리가 되셔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백성들을 친히 인도하신다. 따라서 성도는 이 땅에서 잠시 사는 동안 일시적인 고난을 겪을 수도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겪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원한 안전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는 분명한 믿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