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 : 23 - 31절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인 기도”
1997년에 데뷔한 여자 그룹 중에 베이비복스라는 그룹이 있습니다. 그 중에 윤은혜라는 분이 있습니다. 가수로써 뿐만 아니라 배우로써도 성공을 한 유명한 사람인데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시작할 때 대개 고사를 지내는데 그런 고사 자리에 목사님을 초청해서 예배를 드렸을 정도라고 하니까 굉장한 믿음의 소유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일 년 전에 윤은혜씨가 교회에서 있었던 행사 중에 간증을 하고 기도를 인도했었는데 손을 들고 “주여”를 외치면서 기도하는 동영상이 유포가 되면서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무섭다. 놀랍다. 사이비 아니냐?”부터 시작을 해서 교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는 긍정적 반응까지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논란이 일어나게 됐느냐면 통성 기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가장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부분이 통성 기도이지 않나 싶습니다. 대표 기도나 묵상 기도나 설교 듣는 거나 찬송 부르는 것은 그럭저럭 적응을 하는데 통성 기도 같은 경우는 일단은 분위기 자체가 다른 것들하고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당황해 하시는 분들도 있고, 이것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갖는 분들도 있는 것 같고, 그 시간을 굉장히 싫어하거나 무서워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나 소원들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인데 굳이 큰 소리로 고백할 필요가 있느냐? 하나님의 귀가 먹었느냐?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안 하는 것 같던데 그런 기도를 왜 우리나라에서만 하느냐?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서 통성 기도를 한국식 기도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통성 기도를 하다 보면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기도 소리 때문에 더 신경이 쓰여서 기도가 안 된다.” 등 통성 기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들을 갖는 분들도 쉽게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면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통성 기도는 1907년 평양 대부흥 때였다고 합니다. 통성 기도가 우리나라에서만 하는 기도라면 평양 대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그 기도회가 통성기도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들이 맞지 않는 것이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누가 봐도 통성 기도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이런 전통을 이어 받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 보다 조금 더 열심히 했던 것이지 통성 기도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기도라든가 한국식 기도라는 주장은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던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마음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한마음”이라는 헬라어 원어의 뜻을 보면 “나뉘지 않은 믿음을 지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중구난방으로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외쳤던 것이 아니라 나뉘지 않게 한마음을 품고서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전통을 따라서 통성 기도를 할 때 보면 대부분 기도 인도자가 한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 제목을 제안한 다음에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과정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24절 후반부에 보면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이런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통성 기도할 때 인도자가 “전능한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이렇게 제안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기도 제목을 나누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두세 사람만 모여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나누는 경우들이 있는데 25, 26절이 그런 의미라고 보시면 됩니다. 25, 26절 말씀은 시편 2편 1, 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2편 1, 2절을 보면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편 2편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보고 있는데 이 당시 사람들은 시편 2편의 저자가 다윗이었을 것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시편 2편을 인용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냐면 시편 2편을 통해 예언 되었듯이 “이방나라들이, 로마 정부가 분노하며 / 민족들이, 유대인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 세상의 군왕들이, 헤롯이나 빌라도가 나서며 / 관원들이 유대인의 관리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상황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28절 보면 자신들이 지금 예루살렘 성에 모인 것도 하나님의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모인 것이기 때문에 한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기도 제목을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기도 제목은 29절 말씀입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여전히 위협을 받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것을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먼저 구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위협적인 분위기이고 위험한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굽어보시고 도와 달라고 간청을 하자는 기도 제목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 제목은 30절입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베드로와 요한처럼 치유의 능력을 달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베드로와 요한이 말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전파될 수 있게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 제목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를 했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나게 되냐면 31절을 보세요.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렇게 통성으로 두 가지 기도 제목을 놓고서 기도를 시작했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났냐면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성경에 보면 많은 기도의 모습들과 많은 응답의 역사들이 소개되어 있지만 기도했을 때 모인 곳이 진동한 일은 그렇게 흔한 일이지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산이 진동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을 들어가서 싸움을 할 때도 땅이 진동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땅이 진동을 했었고 사도행전 뒤쪽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를 했더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던 것 외에는 진동하는 일이 거의 나타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더니” 그곳이 진동을 하는 기묘한 일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정도로 소리를 높여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권세가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통성 기도를 더 열심히 하다 보니까 통성 기도를 한국식 기도라고 부를 정도인데 그렇게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니까 짧은 역사 속에서도 세계가 주목할 만한 수많은 교회들이 이 땅 가운데 세워졌고 세계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의 성장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땅이 진동하는 것보다 더 신비하고 더 놀라운 기적이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기도하고 났더니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죽었다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바로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무사히 풀려 나와서 조금은 안심이 되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엄청난 위험 가운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마치고 나니까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고, 용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기도가 바로 통성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가 통성 기도를 사모할 필요가 있고, 이런 기도를 통해 땅이 진동하는 은혜를 경험할 필요가 있고,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하는 일에 우리는 최선을 다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귀가 멀어서도 아니고 멀리 계셔서 그런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로 갈급하고 간절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까닭에 오늘 말씀처럼 땅이 진동을 하는 신묘막측한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를 하면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도의 도전을 주고, 용기를 주고, 뜨겁게 기도할 수 있도록 불을 지피는 경우들도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소개하고 있는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기도하는 통성 기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잘못된 시선과 생각은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통성 기도에 대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그래도 속에 있는 것을 입으로 토해 내면 기분이 상쾌해 지니 통성 기도 하세요.’ 이런 의견을 주시는 분들도 계시던데 우리가 그런 이유 때문에 통성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를 했더니 응답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소개하고 있는 이런 기도를 자신의 취향에 안 맞는다거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교단에 따라서 통성 기도를 하는 교단과 안 하는 교단이 나눠져 있었습니다. 장로교 같은 경우는 안 하는 교단이었고, 순복음이나 성결교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교단의 신학이나 목회자의 취향에 따라 하나님께서 소개하고 있는 기도가 선택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사실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진동시키실 정도로 감동을 받으시는 기도 중 하나가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하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때로는 통성으로 기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셔서 한마음으로 힘써 기도하여 성령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위협 속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오늘 본문 말씀 속의 사람들처럼 복음의 증인으로 살다가 칭찬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