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공체제: Outside"에 대한 질문(토, 3월 23일까지)
* 교재를 읽고 다음의 Questions에 대한 답해주세요.
각 교재 문헌에 관해 “새롭게 알게 된 점”,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을 각각 1개 이상 쓸 것.
1. 손성욱. (2016). 청대(淸代) 조선사관(朝鮮使館)으로 본 청(淸),조(朝)관계 -회동관(會同館)에서 주청공사관(駐淸公使館)으로-. 동국사학, 60, 227-262.
2. 손성욱.(2018).淸 朝貢國 使臣 儀禮의 形成과 變化.동양사학연구,143,273-315.
3. 구범진(2014), 조선의 청 황제 성절 축하와 건륭 칠순 ‘진하 외교’ , 한국문화 68, 2014
<오천융>
1: 중국 명·청 시대에 회통루는 한국 사신을 포함한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공식 기관이었다. 청나라에게 북한은 상대적으로 특별한 조공국이었고 다른 조공국보다 더 높은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청나라말에 이르러 정세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이러한 특별한 외교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884~1895년의 청일전쟁과 이 조공관계의 종말을 가르는 경계선이 한중무역조약으로 활용되었다. (틀린 곳)
질문: 북한(조선)이 주도적으로 조공관계를 단절했는가? 아니면 다른 나라의 영향으로 강제로 깨졌던 걸까요? 어떤 요소가 더 중요하다?
--> 조선에게는 국가의 보존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유용한 쪽으로 판단한 것임. 일본이 조공 관계의 단절과 독립을 선언하도록 압박한 것은, 조선의 보호국화를 위한 사전 포석이었고, 조선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압력도 있지만 이전부터 청의 과도한 개입에 반청 감정이 커졌고, 개화를 위해 일본과 손잡는 편이 낫다는 여론이 커졌기 때문임. 역사를 움직인 것은 당시의 상황과 그 주역들의 상황 판단이지, 인과관계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님.
2: 청나라가 세관에 들어오기 전에는 정치적 필요로 인해 북한을 강압, 유도하여 이 시기의 예절 처우가 불분명한 상태였다. 청나라의 국력이 강성하던 시기에 청나라는 조공국 사절 처우를 개선할 만큼 재정 수입이 충분했고, 이를 기회로 북한은 적극적으로 외교에 나서며 매우 좋은 대우를 받았다. 건륭시대에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후 청나라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사신에 대한 대우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공물 제도가 사라지면서 사라졌다.
3: 청군이 세관에 들어가기 전에 북한은 "1간 4공"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청군이 세관에 들어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김에 따라 북한의 조공 빈도는 1년에 한 번이 되었다. 건륭 45년, 북한은 그 해 건륭제의 생일을 기회로 삼아 '진하외교'를 펼치며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도현준>
1. 새롭게 알게 된 점: 주청공사관이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청이 조선과의 동등한 관계를 규정한 한청통상조약을 받아들인 이유가 궁금하다.
2. 새롭게 알게 된 점: 건륭제가 확대했던 의례가 19세기의 힘이 약해진 청에게 부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건륭제 시대에는 연회를 계속할 만큼의 재정적 여유가 있었는데, 19세기 초 가경제 시대부터 급속도로 청이 쇠락한 이유가 궁금하다.
3. 새롭게 알게 된 점: 진하 외교가 정조 대에 청나라와의 우호적 관계를 다질 필요성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 답변 완료. 성세와 말세는 한끝 차이입니다. 상황은 늘 바뀌고, 사람들의 태도도 계속 바뀌지요.
<박성재>
1. 3. 명나라의 멸망 이후 조선 중화주의가 확산되었으며, 조선 왕실 또한 청에 대한 소정의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청에게 자발적으로 진하 외교를 청하고 성실한 제후국의 역할을 자처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더 나아가 청에게 모범 조공국으로 인정받으며, 조선 전용 사신 숙소인 건어호동관방을 배정받았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1. 청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문서로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서방 세력의 압박으로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를 필요로 하였고,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과정 속에서 '청이 내세운 조건은 “조약체결은 안 되며, 사절을 파견해서도 국서를 전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다.(1번 논문 p.22) “사절을 파견해서도 국서를 전달해서도 안 된다”의 정확한 맥락이 궁금하며 청이 이러한 요구를 갑자기 철회한 이유도 궁금하다.
-->이동욱. (2021). 조선의 구미전권공사(歐美全權公使) 파견(派遣)에 대한 청 정부의 대응(1887~1890). 학림, 47(0), 309-354.
한철호. (2019). 초대 주미전권공사 朴定陽의 활동과 그 의의. 한국사학보,(77), 29-67, 10.21490/jskh.2019.11.77.29
복잡하므로 참조. 박정양 사례에서 보이는 것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단계의 방침이었고, 이런 조공 관계의 특수성을 다 포기한 것이 한청통상조약인데, 이후도 문제는 있었음.
구범진. (2006). 「한청통상조약(韓淸通商條約)」 일부 조문(條文)의 해석을 둘러싼 한(韓)-청(淸)의 외교 분쟁. 대구사학, 83(0), 193-231.
이은자. (2006). 한청통상조약(韓淸通商條約) 시기(1900~1905) - 중국의 재한(在韓) 치외법권 연구. 명청사연구, 26(0), 89-121.
<김다은>
1.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1727년 이후 두 관방이 생긴 후 기존의 옥하관이 사라진 이유(사라질 필요성이 있었는지)
-당시 이항억과 같은 조선 사관들이 아라사관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이유
-청의 조공국 중 조선만이 차별적 특권을 누린 이유
2. 회동관의 화재에 있어 청의 태도가 변한 결정적 원인
3. 중국에서 황제의 생일을 국가적으로 기념하게 된 계기
--> 논문에 대체로 나옵니다.
<김주찬>
1. 조선을 속박하려 한 청의 집착이 실제 역사보다 일찍 끝났더라면 (청일전쟁 이전) 조선의 근대화가 더 일찍, 더 순탄하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2. 나라별 조공사절단들끼리 친하게 지냈는지 불화가 있었는지, 또 그러한 사건들은 어디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3. 정조 이전 조선 조정이 청의 멸망을 바랐다면, 그 동기는 무엇인가? 그저 명이 멸망한 것에 대한 복수심이였던 것인가? 아님 청 대신에 자신들이 진정한 중원이라고 생각했던 소중화사상에 의했던 것인가?
p.s. 논문에서 제목이나 명사와 같이 중요한 단어가 처음 나올 때에는 한자로 표기가 되어있고 그 이후부터는 한글로 표기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한글로 적거나 괄호 안에 한글과 같이 적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1은 조선 자체의 문제가 관건이라고 봅니다. 2는 불화 사례는 있었겠지만 내 전공이 아니라 모르겠네요. 그런 사건은 역시 명실록, 청실록, 조선왕조실록에서 먼저 찾아봐야겠죠. 청 멸망을 바란 것은 당연히 예전부터 있던 청/여진족/만주족에 대한 우월감과 무시, 병자호란 때 당한 것에 대한 원한 등이 있겠죠. 한자를 표기하지 않으면 한글만으로 의미가 불명확한 경우가 많고, 또 사료 용어인 경우는 반드시 한자 표기를 해야 함. 예전에는 한자를 그대로 썼으나, 한글 전용이 되면서 처음 나올 때만 병기하게 된 것임.
<이상민>
1.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청이 조선을 타 조공국과 다르게 특별히 여긴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조선을 특별히 여긴 것이 청조만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이전 중원 왕조들에게도 조공책봉 체계에서 한반도 정권이 타 조공국에 비해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 당대에도 신라, 고구려, 백제 모두 긴밀한 관계였고, 송대에도 고려와 마찬가지였지만, 역시 명대에 영락제 이후 구축된 조공 질서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었고, 청 입장에서도 안보상의 이유에 더해서 “중화제국” 즉 자신을 억압했던 “명”이 이제 되려면, 조선에게 확실히 조공을 받아야 하는 거죠. 처음 청-조선 조공 관계를 맺을 때, 청은 조공 의례 같은 예법을 잘 모르니까, 조선에 요구한 것이 무조건 “명” 때와 똑같이 나한테 해라, 였습니다. 청은 이전 중국의 왕조와 달리 “유목 세계의 1인자”, “중화 세계의 1인자”를 둘 다 자임했는데, 그 중 후자의 지위 구축에 중요한 것이 바로 조선의 확실한 포섭이었습니다.
2.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건륭제 시기 이전까진 외번 사신만 참여하던 의례에 조공국 사신이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외번 사신이나 조공국 사신의 (격이 맞지 않는다거나 구례에 어긋난다거나 하는) 불만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3.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정조 대의 조선 조정의 청조를 향한 전례 없는 우호적인 외교 정책에 대해 기존 부정적 대청 인식을 갖고 있던 사대부들의 반발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 외번과 조공국은 카테고리가 다르고 세계가 다른 것이지, 격이 높고 낮은 것이 아닙니다. 구범진 선생님 왈, 사대부의 반발은 있었으나 소수였다. 일단 정조의 통치가 강했고,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도 많이 바뀜.
<홍지원>
1. 새롭게 알게된 점
: 사절들이 머물던 조선사관이 명칭, 시기에 따라 다 다른 의미와 역할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또한 조공관계나 조약의 체결 등의 상황 변화가 사절이 머무르다 가는 공간의 장소와 의미를 다르게 한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국가 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좋게 이어 나가기 위해 사절들이 머무르는 장소 하나하나 신경을 쓰고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의문이 남는 점: 건륭제가 어떤 방식으로 정치를 하고 다른 국가들과 교류하는 인물이었는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 청의 국내 사정이 악화됨에도 불구하고 연회를 모두 중지하지 않고 일부라도 진행시키거나 비정기적으로나마 이어가려고 했던 이유가 궁금하다.
토론해보고싶은 점: 청에게 연회의 개최와 조공국의 참석 및 축하 사절은 무슨 의미였을까
---> 의례는 “강성”을 과시하며 계속 나한테 잘해라고 말하는 메시지의 발신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부자였다가 가난해져도 티 안 내려고 옷 입는 것 신경 쓰잖아요? 연회는 조공 관계와는 무관했다가, 건륭제가 한 번 하더니 확대된 것인데, 돈 있고 힘 있으면 파티 자주 하고 싶죠. 과시의 장이기도 하고.
<이원준>
1. 새롭게 알게 된 점 : 조선이 청국의 조공체제에 있어서 중요한 국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조공단이 머무는 공간이 각 나라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이 신기했다.
토론하고 싶은점 : 정양문외횡가관방은 밖에 지은 사신의 거처이기에 그만큼 위협이 컸다고 생각하는데 사신의 죽음은 국가 간 분쟁, 전쟁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중국의 선택이 의아합니다. 저 방법 말고 늘어나는 사신을 감당할 방법은 없었는가?
궁금한점 : 조공무역을 끊고 독립국이 된다면 제국주의 침탈과 맞서야 하지만 자기주도적 성장, 새로운 신설 국가 탄생 등 장단점이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당시에는 조공무역을 끊는 방향으로 나아갔는가?
2. 새롭게 알게된 점 : 명대를 계승한 조공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에 더해 자신들 만의 새로운 조공체계 확대된 의례등을 통하여 독자적인 청의 체계를 갖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왕실에서 연회를 확대할 때 더 많은 재정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연회 확대에 대한 당시 청나라 평민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또는 연회의 확대가 당시 지배층의 사치라는 면이 있지 않았는가?
만약 연회가 조공국과의 기본적 의례를 중시하며 확대가 병행되었다면 중국의 위상을 알리는 긍정적인 문화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
3. 새롭게 알게된 점: 정조 이전에는 청에 대해 우호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과 이후에 정조 시대에 청에 대한 사절이 증가했다는 것을 알았다.
궁금한 점 : 정조의 청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과 영조대의 청에 대한 적대감은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하여 할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영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사신이 죽어도 분쟁이나 전쟁이 나지 않겠지요. 황제는 책임을 안 집니다. 위로금이나 주겠죠. 사신이 늘어나는 건, 그만큼 베이징에 많이들 오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학자에게는 책을 살, 상인에게는 돈을 벌 기회였으니. “궁금한 점”은 질문이 이해가 안 감. 이 시기 청 나라 평민들은 오늘날의 “시민”이 아닙니다. 연회를 하는 지도 몰랐을 걸요? 조세 인상이라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청은 조세가 매우 낮습니다. 할아버지??
<김예인>
1. 청나라에 있어서 조선이 특별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2.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만큼, 명나라 제도와의 단절을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사신을 받아들이는 의례에서 명의 제도를 답습했는지가 궁금합니다.
3. 영조와는 다른 태도로 대청외교에 임한 정조시기에도 만동묘 제사는 지속되었는데, 그러한 행보가 청나라에게는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이진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 청/만주족은 여진족 시절에 “몽골”과 “명”, “조선” 모두에게서 억압과 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유목세계에서는 “몽골”의 의례를, 중화세계에서는 “명”의 의례를 답습하고, 통치 역시 마찬가지. 실제로 그 넓은 지역을 다스리려면 여전에 하던 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요. 몇 차례 숙청을 통해 상층부만 순순히 말 잘 듣게 만든 다음에.
<임유태>
1. 궁금한 점: 청은 류큐와 베트남이 전통적 관계에서 이탈할 때 조선과 달리 왜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않았는가.
2. 새롭게 알게된 점: 건륭제가 중외일체를 추구하기 위해 확대한 연회가 후대에는 재정적인 압박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 같이 토론해보고 싶은점: 병자호란 이후 140년의 시간이 흘러 대청 외교에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약 80년이 흐른 지금보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대일 외교에 태도와 국민감정이 변할 수 있을까.
-->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고, 또 중요도가 살짝 계륵이었던 것이고, 조선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리스크를 무릅쓰고 개입한 것입니다. 내 책이지만, 강진아 <문명제국에서 국민국가로> 창비, 2009 참조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12984)
<원서연>
1. 새롭게 알게 된 점: 청은 조선과 근대적 조약 관계와 책봉-조공 관계라는 전통적 관계를 병립시키고 싶어하였으나, 결국 근대적 사무 비중이 커지며 전통적 관계의 약화를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대적 사무 비중이 커졌다는 것은, 근대화를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전통적 사무를 보는 곳은 북경이고, 근대적 사무를 보는 곳은 천진이라는 점에서 공간과 위치가 주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회동관에서 주진공관, 주청공사관으로 변모하는 동안의 공간적, 위치적 특성을 통해 정치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주진공관이 정확하게 공사관의 역할과 업무를 수행한 것인지 궁금하다. ---> 공사관보다는 영사관 역할. Consul.
2. 새롭게 알게 된 점: 부강한 황권이 만든 전통 의례도, 전쟁 등의 외부 상황이 개입된다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이러한 황실의 의례가 무너지는 것을 황권이 약화되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까?---> 돈 없고 힘 없어지면, 파티를 줄입니다. 물론 조선처럼 유교 이데올로기처럼,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작동하는 경우도 있지만요.
3.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영조 대에 부정적이었던 대청 인식이 왜 정조 대에는 자발적 성의 표시를 반복할 정도로 변화되었는지 궁금하다. 또한 영조 대에 대청에 부정적이었던 태도가 조청 관계에 긍정적이었을 리 없는데 영조 당시 조선의 외교 전략은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알고 싶다. 이를 가까이에서 보고 경험했을 정조가 청에 대한 태도를 변화하여 인식을 바꾼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 답변 완료. 조선의 외교 정책은 “명분론”으로 싸우지만 내용은 “생존 우선, 실리주의”인 경우가 많음(어느 나라든지 사실 마찬가지이지만). 다만 그 “생존” “실리”에 대한 해석이 다 달랐기 때문에 파벌과 당파가 작동합니다만.
<박지수>
1. ‘정양문외횡가관방’ 관련 서술에서 황도라는 공간 자체를 권력관계와 연관지어서 볼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되었다.
2. 건륭제가 실시한 상원절연의 정례화의 실과 득 중 어떤 게 더 클까? (토론하고 싶은 부분)
3. 정조는 바로 직전 왕이였던 영조와는 정반대인 외교 정책을 펼쳤는데 이에 관련하여 정조가 친청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이 있을까?
---> 2와 같은 질문은 글쎄요. 역사는 이거냐 저거냐를 묻기보다는, when, why, what에서 when을 중시해야합니다. 할 만할 때는 국위선양에 도움이 되고, 할 만하지 않은데 빚내서 하면 부담인 것과 같습니다.
<박해주>
1. 새롭게 알게 된 점: 논문에서 청 조선사관의 발전과 변화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제공되어, 청조 관계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조선사관과 청 조 관계에 대한 주요 요소 중 일부가 아직 충분히 이해가 안 됩니다.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논문에서 제시된 주요 주장들에 대한 다른 관점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2. 새롭게 알게 된 점: 논문에서는 청의 朝貢國 使臣 儀禮의 형성과 변화에 대한 연구가 제공되어, 중국의 외교적 관례와 그 변천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사실 잘 몰라서 모르겠습니다..!!
-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논문에서 제시된 중국의 朝貢國 使臣 儀禮의 변화에 대한 이론이 어떻게 현대 중국의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지.
3. - 새롭게 알게 된 점: 이 논문에서는 조선의 청 황제 성절 축하와 건륭 칠순 '진하 외교'에 대한 연구가 제공되어, 조선의 외교적 관행과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알수 있었습니다!!
-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논문에서 제기된 '진하 외교'의 정확한 의미와 그 역사적 맥락에 대해.---> ‘진하’=congratulation! (your birthday)
-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조선의 '진하 외교'가 어떻게 중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는지.
---> 역사가 영향을 주지요. 현대 중국도 사회주의 시기(1950-70년대)에는 조공체제도 봉건질서로 비판했지만(모든 피압박민족을 해방해야하니까), 1980년대 발전 시기에는 해외투자를 유치해야하니 조공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고, 1990년대부터 교류가 많아져서 역사 인식에 충돌이 생기고 자신감도 붙으니 원래 조공국도 다 우리 속국이었다는 말을 ‘소수’가 했다가, 2000년대 이후 우리가 대국이니 ‘대국’과 ‘소국’은 원래 다른게 아니냐, 대국으로서 우리가 돌봐준다로 레토릭이 바뀌고, 2010년대 이후는 시진핑 체제 이후 국내 빈부, 도농, 지역 격차 등 내부모순을 돌리기 위해 신흥대국으로서 미국과 대등의식을 높이면서(G2) 초등,중등,고등,대학교육 전반에서 “애국주의” 교육을 강화해나가자 “중화문명” “유교” “조공질서” 등에 대한 전면적 재평가로 바뀝니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이 사상통제가 강하기 때문에 좀 더 노골적이기는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 역시 역사 평가가 시기마다 정권이 바뀌면서 크게 바뀌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거꾸로 보자면, 사회적 수요가 있어서 대응했다는 말도 되구요. 다만, 역사가는 한 발 뒤에서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원>
1. 새롭게 알게 된 점: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외교와 무역관계를 맺게 된다. 조선사관의 위치와 역할은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였으며, 전통적인 회동관에서 보다 현대적인 주진공관으로의 전환은 조선이 전통적인 조공체계에서 독립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 내용이 아님)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청나라 내부에서는 조선과의 관계 변화에 대한 태도, 특히 조선의 종속국에서 독립국으로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였나?)
---> 논문의 핵심 내용은 이런 내용이 아닌데요???
새롭게 알게 된 점: 청나라와의 국제관계에서 조선의 특별한 지위, 그리고 이러한 관계 변화에 회동관과 주청공사관의 역할, 그리고 주청공사관의 설립은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 신분을 벗어나 현대국가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중요한 절차였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청나라는 조선의 종속국 지위에서 독립국 지위로의 전환, 특히 외교적인 태도와 책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변화에서 주청공사관의 역할과 의의는 무엇인가?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清末 시기 중국과 조선의 관계 변화는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관계와 정치 방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2. 3, 새롭게 알게 된 점: 청나라 초기에는 明制를 계승하고, 책봉과 조공 관계의 수립을 통해 조공국 사신의 예의를 갖추었다. 그리고 건륭제 이후 청나라의 조공 사신 접대와 의례에 현저한 변화가 나타나 '성세'에 대한 건륭제의 자신감과 제국의 영광을 보여준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청나라의 조공 체계와 의례의 변화가 그 장기적인 정치적 안정과 국제적 지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청나라가 의례를 통해 문화적·정치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책략의 효과는 어땠을까? 그리고 청나라 의례의 변화가 청나라와 조공국의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 위에서 대체로 설명. 의례가 크게 뭘 바꾸지는 않고, 일종의 과시이지요. 하지만 그런 대동단결의 파티를 통해 서로 결속력을 다지기도 하고, 교류할 기회도 생기는 것이구요.
<이정렬>
1. 새롭게 알게 된 점: 조선과 청의 조공같은 외교관계를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고, 조선사관의 역할과 황도 안에 있는 것에 대해 어떤 해석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류큐의 사신은 청으로 가서 옥하관을 들어갔지만 조선 사신이 북경에 도착하자 류큐 사신은 거처를 옮기게 되었던 것처럼 류큐도 다른 나라보다 우위에 있는 경우 옥하관을 우선적으로 사용할수 있는게 맞는 거 같은데 왜 류큐는 조선과 같은 그런 특권을 누리지 못했을까가 궁금하다.---> 류큐는 나라가 작고 덜 중요하니까요. 류큐가 중국과 교류하는 것이 더 아쉬운 것입니다. 이 나라는 무역 말고는 산업이 별로 없었어요.
2. 조공에서의 어떤 의례가 있는지 알게 되었고 청과 다른나라간의 조공관계가 어떻게 변화를 하고 그 변화가 의미하는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이것을 읽다 보면 조선이 조공국에선 좀 좋은 위치에 있던 것 같았는데 외번은 외번연으로 원래 다양한 연회에 참석했지만 조공국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런 걸 보면 외번과 조공국은 어떤 차이점이 있고 그걸로 인해 청이 어떤 다른 대우를 했는지 궁금하다.---> 설명함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조선이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진하표문을 청에 전달하지 않았다면 조선과 같은 조공국들은 계속 외번연에 참여하지 못했을까?---> 설명한 것과 달리, 참여 못한 것이 아니라 원래 조공국은 그냥 조공만 하면 땡인 사이라고 보면 됩니다. 파티까지 같이 할 사이 아닌거죠.
3. 위에 다른 논문에서 건륭제에 칠순을 축하하는 진하 표문을 전달하고 그 영향을 설명했는데 이 논문에서 칠순을 축하하는 진하 표문을 전달하는 과정과 그 이후에 일들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1년 4공을 1년에 한 번만 가는 것으로 해결하는 것이 놀라웠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만약 내가 당시 청나라 황제였으면 생일을 일찍이나 늦게 축하 해준다고 그러면 약간 마음이 상할 것 같은데 청나라 황제들은 왜 그렇게 예부의 제안도 거절하고 다 허용해주었을까가 궁금하다.---> 마음 안 상하는 것이, 의례란 상호 안보 및 특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므로 그것만 확실하면 별 상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있는 의례를 깨는 것은 안정된 국제 관계에 변수가 생기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신호이므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겁니다. 정말 생일 축하가 중요하겠습니까? 하지만 생일 축하가 “정례화”되었다고 상상한다면, 어느날 갑자기 축하 사절을 안 하면 이건 “이상” 신호이므로 문제가 되는 것임.
<예진>
1. 새롭게 알게 된 점 : 조선과 청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 조선 사신이 거주, 상주하던 공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청일전쟁으로 와해된 책봉,조공 관계를 확실하게 표현하기 위해 주청공사관을 북경에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때 북경이 과거 청이 책봉, 조공관계를 대외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용했던 공간이었다는 것을 이용했다. 외교관계에서 ‘상징성’이 지니는 의미가 큰 것 같다.
2. 토론해보고 싶은 점: 건륭제 때 확대된 연회는 제국을 드러내고 다양한 민족을 통치하는 보편군주의 욕망이 투영되었다. 황지련은 이를 천조예치주의를 왜곡하며 청과 조선의 관계를 건륭제 개인적 유희로 변질시켰다고 비판한다. 반면 파멜라 크로슬리는 연회의 확대를 제국의 통치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황지련과 파멜라 크로슬리 입장 중 누구의 의견이 옳은가?---> 중국학계에서는 “신청사”를 매우 공격하는데, 핵심은 현재 중국학계와 중국정부는 “청”이 정복왕조가 아니고, 중화제국의 “하나”로 강조하고 싶어하고, 미국학계의 “신청사”가 청의 독특한 이중지배적 성격이나 유목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을 미국이 현재 중국의 변경 지역(신강위구르, 티벳 등)의 분리주의를 지지하는 분열 책동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중국학계인 황지련은 청이 명과 달리 뭔가 새롭게 한 것을 비판하는 것이고, 파멜라는 독특한 통치 행위의 일종으로보는 것임. 황지련의 비판은 이데올로기적 기준이 있고, 거기에서 비판을 하는 것이므로 역사라기보다는 정치철학적 비판이지요.
3. 새롭게 알게 된 점: 조선에서 자발적으로 진하, 사은사행을 파견하는 경우가 정조 때에만 나타난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는 점: 영조 때에도 북학파가 있었는데 왜 정조 때에만 파격적인 진하외교가 이루어졌는지 궁금하다.
<김민찬>
1. 의문이 남는점 : 청은 왜 회동관과 주청공사관을 통해서 서양인들에게 조선을 속방임과 동시에 독립국이라고 했을까요? (외교적인 이유 혹은 경제적인 이유가 있나요?)
2. 토론해 보고 싶은 점 : 정말 건륭제의 행위가 원활한 제국 운영을 위한 수단이었을까?
3. 새롭게 알게 된 점 : 건륭제를 축하하기 위한 사행파견이 생각보다 많았음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놀라기도 하였다
---> (유구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인 조공체제에서 볼 때) 속방이기도 하고 (서구의 조약, 공법체제에서 내정, 외교에서 독립하고, 주권 영토 국민이 있다는 면에서) 독립국이기도 한 것이 맞습니다. ^^
<이유미>
1. 조선은 청에게 있어 다른 조공국과는 달랐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는데, 회동관 우선권을 제외한, 타 조공국과의 차별성을 강조할 수 있는 또 다른 구체적인 사례는 없는지 더 알고 싶음.
2. 308p의 ‘확대된 연회와 함께 기본적인 의례조차 느슨해지는 것도 제국의 쇠락에서 봐야 할까.’ 라는 문장에 대해 토론 해보면 좋을 것 같음. 특히 교수님의 의견이 궁금함.
3. 사실 ‘진하 외교’라는 말 자체를 처음 접해서 논문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되고,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음.
---> 조공 회수가 가장 많은 것. 회수가 많을수록 중요한 국가라서 많이 하게 해주기도 하고, 많이 하라고 해서 괴롭히기도 합니다. 명, 청 모두 조선이 1등.
<두소윤>
<권승현>
1-1. 고등과정에서 카흐타 조약이나 네르친스크 조약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러시아와 청이 영토 때문에 맺은 조약이라 배웠는데 이 차이를 알 수 있었다.
1-2. 서구열강이나 일본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 오고 환궁하여 세운 대한제국을 하나의 독립국으로 봤는지 의문이 든다.
1-3. 조청관계의 역사에 대해 토론해보고 싶다.
2-1. 정조와 건륭제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연회에 많은 돈을 투자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2-2. 청이 조선을 외번과 조공국이라 불렀다는 내용을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논문을 볼 때 둘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 외번과 조공국의 차이가 뭔지 궁금하다.
2-3. 조선이 북벌론을 주장하여 청에게 대항했으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는 지에 대해 토론해보고 싶다.
3-1. 청 황제의 생일이 조선과 청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박지원이나 박제가 등 북학론이 당대에 활발하게 논의 될 수 있던 게 정조의 대청 외교 덕분임을 알 수 있었다.
3-2. 정조의 대청 외교가 과연 실효성이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청이랑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내정 간섭이 심해졌고, 북학론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3-3. 박지원의 열하일기 같은 당시 조청관계가 나타난 서적들이 무엇이 있을 지에 대해 토론해보고 싶다.
---> 오늘 소개한 책을 추천합니다.
<최준영>
1. 새롭게 알 게 된 점: 조선 사관에 관하여 시기 별로 이름과 사용하던 건물의 이름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조선이 청과의 근대적 관계에서 대등함을 나타내기 위해 주청공사관을 설치한 것을 알게 되었다.
2, 더 알고 싶은 점: 섭정왕 도르곤은 어떤 사람이고 어느 정도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상의 황제입니다. 홍타이지 동생. 홍타이지가 죽자 5살짜리 조카 순치제를 황제에 앉히는데,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한 것이 순치제 6살 때입니다. 군사작전은 물론 도르곤이 다 했지요.
토론 해보고 싶은 점: 건륭 25년에 제작한 '平定西域獻俘禮圖' 조선 류큐 안남 등 많은 조공국이 참석하지 않았다고 나타난다. 그렇다면 왜 그림에 참석하지 않은 조공국을 임의대로 그려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논문에 나옴.
3. 새롭게 알게 된 점: 삼절 및 연공으로 구분하여 여러 번 방물을 바치고 이와 관련하여 황제에 따라 재확인하는 섬세한 행위임을 알게 되었다.
더 알고 싶은 점: 왜 정조 이후의 왕들은 진하외교를 이어나가지 않았는지에 대해 궁금합니다. --> 진하외교라는 게 결국 축하편지 따로 보내고 생일 파티에도 참가하는 것인데, 정조가 그런 이유는 청과 관계 강화를 하는 것이 낫겠다 싶은 것이고, 청이 이를 환영한 것은 건륭제가 자신의 위신을 드러내고 싶고 그럴 능력도 되기 때문입니다만, 양쪽 사정이 바뀌면 안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청이 약화되거나, 청이 오는 사신을 일일이 접대할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진다거나...
<이지연>
1. 진공관 건물이 청의 지원이 아닌 자비로 지어진 것은 ‘공법체제’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공법체제가 의미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2. 북경은 중화적 질서의 표상, 열하는 청제국의 다원적 성격을 나타낸 공간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식으로 다원적 성격을 나타낸 것인지 예시가 궁금합니다.
3. 동지사가 정말 동지에 방문해서 동지사인 줄 알았는데, 순치 2년 이후부터는 그저 관행적 명명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어 신기했습니다.
--> 설명함. 베이징은 “명”의 수도로 중화제국의 정체성 계승, 열하는 만주 황실에서 이렇게 베이징에서만 살다가 만주족 정체성을 잃어버리겠다면서 역대 황제들에게 무조건 “열하”(여름 피서산장 있음)에 가서 초원에서 말 달리면서 사냥하고 조상에 제사를 지내면서 유목민 스피릿!을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이수아>
1. 새롭게 알게 된 점: 조선사관이라는 장소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단순히 유숙하는 장소의 의미를 넘어 청과 주변국 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이를 통해 조선과 청의 조공관계가 특별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기존의 조공 책봉 관계에서 더 나아가 근대적 조약 관계로 연속성있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역사의 시대적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2.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 건륭제가 연회를 확대한 이유가 자신이 이룩한 제국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보편군주의 강한 욕망 때문이라고 했는데, 건륭제가 국제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있었는지 궁금하다. 건륭제가 가진 청의 영토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손에 꼽는 수준인지, 또한 건륭제 당시 청의 재정 능력과 외교관계가 얼마나 뛰어나면 연회를 확대하는 데 치중하는지 알고 싶다.
3.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 상황을 가정하여 토론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둘 중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 때, 청나라가 더 이득을 볼 수 있을까?
(1) 우선 흔히 생각하는 조공책봉체제의 방법이 있다. 조선은 청에게 조공품을 바치고, 이에 대하여 청은 조선에게 더 큰 규모의 물품을 하사한다.
(2) 또한 조선이 청에게 조공을 바쳤을 때, 청나라는 자신들이 더 강하다는 이유로 조선이 바치는 조공품을 받기만 한다. 이에 대한 하사품을 주지 않고 청은 오직 이득만을 취한다.
--> 건륭제, 설명함. 토론 (1)(2)는 잘 이해가 안 갔음.
<정선우>
1. 새롭게 알게 된 점 : 조선이 다른 국가에 비해 조공횟수가 월등히 많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2.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 주청공사관을 세우는 것으로 청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했음을 보여주지만 청과 조선이 대등한 관계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른 조공국들 사이에서 조선의 특별한 위치와 조공 횟수에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3. 같이 토론해보고 싶은 점 : 만일 청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책봉-조공 관계'와 '근대적 조약 관계'의 병존 얼마나 더 이어졌을지 토론해 보고 싶다
--> 주청공사관과 대등성은 “국제법”의 레벨입니다. 물론 큰 나라와 작은 나라는 힘 차이에서 대등하지 않구요. 조공 횟수는 위에서 설명.
<김찬오>
1. 조선의 기존의 조공체계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특정 조약에서 확인하는 것이 아닌, 회동관 -> 회동관 ㆍ주진공관 병립 -> 주청 공사관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서양에는 책봉 - 조공 관계와 유사한 질서가 장기적으로는 존재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동양과 서양의 어떠한 차이가 그것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합니다. --> 설명함. 지정학적 이유가 가장 큼.
조선을 특별히 취급한 이유가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설명함.
전에 읽은 논문에서 조선은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통해 직접 획득한 조공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외의 정치적인, 혹은 군사적인 추가적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설명함. 직접 획득...은 구범진 선생님 다른 논문에서 다룬 내용입니다만, 군사 작전을 한 것도 설명했듯이 안보에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정혜원>
논문을 통해 새로 알게된 점은 청과 조선이 근대적 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이후에도 조공사절이 오갔다는 점이다. 아편전쟁 이후 중화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깨졌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따라 조공 또한 중지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2. 소현세자가 심양에 있을 당시 사신으로서 어떤 일을 수행하였고 그것이 청이 입관한 후 사신의 책무와 무엇이 다른지 궁금하다..--> 소현세자는 사신 아닙니다. 논문에 설명있음.
3. 정조가 진하외교를 통해 청과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갔다면, 이러한 특별사행은 다음 왕에게 청과의 관계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을지 부담이 되었을지 토론해 보고싶다..--> 위에서 설명함.
<공유진>
1.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함에 따라 조청 간 ‘책봉-조공 관계’와 한청 간 대등한 ‘조약 관계’가 차례로 와해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또한 청이 조선 사절에게 옥하관 유숙에 있어 여러 특혜를 주어 조선을 특별히 대우하였다는 점을 통해 청일전쟁의 패배 전까지 청이 조선에 대한 지위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청이 전통적 조공관계를 지속시키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진공관을 새롭게 만들어 조공관계에서 근대적 통상 관계로의 새로운 관계 변통을 꾀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3. 건륭제의 칠순을 맞아 조선이 시작한 진하 외교로 인해 조선 사신 의례에 변화가 생겼고, 청이 조선과의 관계를 타 조공국과의 구별지어 인식한 계기임을 알게 되었다.
정조 대부터 조선 조정이 청조를 대상으로 자발적인 사은사행의 외교를 펼치지 않았다면 조선과 류큐(유구), 안남과 같은 타 조공국들과의 입장이 비슷했을지, 그렇다면 이후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 서양 열강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을지 추측하여 이야기해보고 싶다..--> 글쎄요. 왜 그런 가정을 하는 지 모르겠으나, 사은 외교 정도로 바뀔 관계가 아닙니다. 원래 중국-한반도 관계는 지정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깊이 연동되어 있음.
<장문혁>
1. 새롭게 알게 된 점: 회동관이나 공사관의 위치가 각국의 지위를 상징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황도가 제국의 질서의 축소판이라고 나왔고 외성에 지어진 다른 회동관들도 있었다고 설명이 되어있는데 조선의 경우는 내성에 위치한 회동관에 주로 거처를 하였는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나 조공 질서에 편입되지 않았던 일본은 어떻게 했었는지 궁금합니다.
2. 토론하고 싶은 점: 사신 의례가 느슨해지기 시작한 것과 서양 열강의 침탈과 근대화 입장에서 본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에 대한 토론을 하고 싶습니다.
3.
--> 일본은 당연히 거처가 없습니다. 베이징까지 간 적이 없습니다. 명대에는 있지요.
<윤윤상>
1. 논문에서 '책봉-조공관계' 와 '근대적 조약관계' 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 둘 사이의 주요한 외교적 변화점(서구 열강의 침탈 변화,청의 보호 정도 등)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알고싶다.
2. 지금까지 청의 역사를 보면서 쇠락할 때 서구 열강과의 관계 변화나 국방의 약화를 위주로만 생각했었는데 연회나 조공국들을 상대할 때같이 자신의 위상을 유지해야 하는 자리에서도 영향을 크게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 앞선 논문 2번에서 건륭 이후로 청의 연회의 규모가 위축되었다고 했는데 그때 조선 조정의 반응과 황제의 생일에 대한 축하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지 토론해 보고 싶다.
--> 대체로 설명함. 3은 디테일한 문제라 나는 모릅니다.
<안지우>
1-1. 서양 공사관의 담장 높이가 기존 동아시아의 질서를 깨는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1-2. 조선 사신들이 회동관에 들어갈 수 없게 되고, 숙소를 옮긴 것이 조공 사신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건물에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2-1. 조선은 단순히 청의 조공국이 아니라, 청에 정통성을 제공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통일된 조공국 사무 및 의례의 모델이기도 했다는 점을 새로 알았다.
2-2. 이번원과 예부의 이원적 대외관계 체제가 구축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다. (8p)
3-1. 잦은 파견 기록을 통해 양국 간 긴밀한 책봉-조공 관계의 깊이를 체감할 수 있었다.
--> 설명함.
<박건우>
1. 새롭게 알게 된 점: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조공-책봉 체제에서 근대적 외교 관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에 조선 사신이 머물던 공관의 구체적인 변천 과정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또한 류큐, 안남 등 다른 조공국들과 다르게 조선은 이미 18세기에 ‘옥하교관방’ 이라는 독자 공관을 할당받았고 여타 다른 조공국들과는 다른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드는 점: 현재 대한민국에서 파견한 주중대사는 차관급 직책이지만 장관급 대우를 받는 6개국 대사들 중 한 명일 정도로 중요한 직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자료에서는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의 세력이 축소되어 주청공사가 한직으로 취급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무리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했어도 여전히 강대국이며 조선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국가임을 고려했을 때 주청공사 관직을 한직으로 취급한 대한제국 정부의 태도에 의문점이 들었다. 따라서 청일전쟁 이후 주청공사가 한직으로 취급되었던 또 다른 구체적인 이유와 시대적 맥락을 더 알아보고 싶다.--> 청이 한반도에서 손을 뗐으니, 조선 입장에서도 주청공사는 안 중요하지요. 한직으로 취급한 것이 당연한 것임.
2. 새롭게 알게 된 점 : 조선과 청나라가 처음 조공-책봉 관계를 구축할 때 만주어로만 구성된 인장을 사용했지만,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 통일을 달성한 후에는 만주어/한문이 모두 각인된 인장을 사용하여 명이 구축했던 세계를 수용하였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의문이 드는 점 & 토론해보고 싶은 점 : 자료에서는 건륭제가 세초연, 상원절연 등 각종 연회에 조공국 사신들까지 참석시키면서 연회를 확장하는 모습과 자신의 확장된 영향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투영된 그림까지 제작했다는 점이 언급되어 있다. 자료에서는 이러한 모습의 원인을 다양한 민족을 통치하는 보편군주의 모습을 외부에 드러내고 자신의 치세와 천하를 시각적으로 인식하고 싶은 욕구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읽으면서 건륭제의 자아도취적 성향과 연회 확대의 원인이 남한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인 ‘파에톤 콤플렉스’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겼다.
3. 새롭게 알게 된 점: 진하특사가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열하에 가서 티베트의 수장인 판첸 라마를 만난 사건과 판첸 라마에게 도금된 불상을 선물 받아 조선으로 귀국하면서 ‘봉불지사’ 라는 오해를 받고 문제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토론해보고 싶은 점 - 자료에서 언급된 <피서록>에서 박지원은 판첸 라마가 준 금불을 압록강에 버리려고 하고 있고 <행재잡록>에서는 열하에서 북경으로 복귀한 사신들이 판첸 라마가 준 나머지 패물들을 역관에게 넘겼으며 역관들 또한 이를 불결하게 여겨 은을 받고 팔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단순히 유교 기반 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판첸 라마가 준 선물들을 불결하게 여기며 불상은 압록강에 버릴 생각을 하고 패물들은 팔아버린 조선 사신들의 태도에 대해 의견을 나눠보고 싶다.--> 이 열하일기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구범진 선생님 설명. 그 열하일기 다룬 책을 추천하심. 일단 책 쓴 이유가 귀국 후 불상 가져왔다고 비판을 받게 되니까,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제대로 행동했어라고 밝히려고 쓴 것임.
<신세라>
1. 알게 된 점: 과거 조선이 중국에 대한 다른 조공국에 비해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기는 했지만, 머무는 사관으로써 이 사실이 증명된 것이 새로웠다.
질문: 주청공사관의 외관에 대해 더 자세히 묘사된 자료가 있는지 궁금하다.
2. 질문 1: 건륭제가 추구한 '중외일체'의 실현으로 연회가 확대된 것이 조선 내부에 실제로 미친 영향(단순히 감사했다는 것 외에)이 궁금하다.
질문 2: 일전에 읽은 신청사 논문에서 건륭제가 보편군주상을 추구하여, 구체적으로는 그가 전륜성왕, 칭기스칸의 후예, 게세르 칸 등을 구현하고자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공국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성질의 군주로서 보이고자 했다는 의견이 있는지 궁금하다.
3. 토의: 정조 연간에만 시행된 파격적인 사은사행의 특파를 들어 정조를 실리적인 외교가로 평가할 수 있을 지에 대해 토의해 보고 싶다.
--> 설명함. 연회 확대가 내부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지는 않네요. 이 논문의 의의는 의례를 통해 양국 외교의 스타일과 태도가 바뀌었음을 관찰해낸 것이지, 그것이 조선, 청 각 나라에 큰 변화를 일으킨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박다연>
1. 예부가 사무를 관할하는 조공국 사신 중 왜 조선만 특권을 누렸나? 청에게 조선이 다른 조공국과는 다르게 인식된 이유는 무엇인가?
2번째 논문의 <조선은 유교를 국치로 하고, 명 중심의 중화질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조공국이 었다. 그렇기에 조선이 청 질서에 편입되는 것은 청의 정당성과 명분을 강
화시켜 줄 수 있었다.> 이 부분이 그 이유일까?
2. 건륭제가 세초연, 빙희 등 수많은 연회를 정례화함으로써 청의 조공 의례를 강화하고 발전시켰음을 알게 되었다.
외번국의 개념을 처음 접해보았는데, 청나라 당시 외번국에는 어떤 나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
3. 정조의 다양한 업적을 알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청에 대한 사은 행위를 했으며, 이러한 경향이 북학파 지식인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청나라 말고도 책봉-조공관계를 가졌던 나라가 있는지 더 알고 싶다.
--> 3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음. 한반도에 있던 국가들이 조공한 나라는 여럿이고 동시에 여럿 조공한 경우도 있지만, 모두 중국 안의 왕조들(통일왕조였던 시절도 있고, 여러 국가로 분열되었던 시절도 있고)임.
<박준석>
1. 변화하는 한중관계 흐름 속에서 청대 조선 사관의 변천 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으며
조선과 달리 베트남과 류큐가 전통적 관계에서 이탈할 때 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궁금합니다.
2. 청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치세를 기려 자신이 이룩한 제국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건륭제의 욕망이 확대된 연회를 통해 드러났고, 이 확대된 연회가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재정에 부담을 주어 내우외환을 거치며 점차 축소되어 갔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3. 영조 연간의 조선 조정과 달리 청을 사대 외교의 대상이 되는 대국으로 정조 연간 조정이 인식하였기 때문에 자발적인 진하 외교 현상이 나타났음을 새롭게 알 수 있었습니다.
--> 역시 앞에서 소개한 <문명국가에서 국민국가로>에 자세함. 혹은 19세기 중국 수업을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