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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예15활쏘기
년예14활쏘기 <책김집1410국궁교본>
# 활[궁 弓]
긴장과 이완의 철학 - 들뢰즈의 활의 예, Zenon의 la flèche(화살) Oe 328, 755-756, 1005, 1143, 당김과 이완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벩송에서 거울은 어제와 아제의 관계이다. 영혼은 현재이며 동시에 두 가지를 지각한다. 내부의 지각과 외부의 지각이다. 또한 내부의 기억과 외부의 상상에 의한 예견 또는 내부의 투영에 의한 상징이 있다. 벩송의 철학은 스토아처럼 표면의 현존에서 출발한다고 그리고 그 근거를 기억이라는 실재성에 두고, 미래를 잠식하는데 지성이 역할을 한다. (47VMI)
전추태양(前推太陽) 아침마다 태양을 향해 빈 활 당기기 연습을 한다. / 낚시와 활은 연관이 있을까? (강태공 여망을 활을 쏘았을까?) / 활의 시위를 떠나 잘 못 맞은 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고칠수 없다, 운명) 다시 당겨야 한다. (48WNB)
*** 활 ---활에 관한 년표
구석기 시대
전기 구석기
올도완 문화 / 아슐 문화 / 클락톤 문화
중기 구석기
무스테리안 문화 / 아테리아 문화
후기 구석기
샤텔페롱 문화 / 오리냐크 문화 / 그라베트 문화 / 솔류트레 문화 / 막달렌 문화
10만년 전 흔적
[대한 양궁협회의 자료라는데] “문명의 기원”(G. Child)[Childe]에 의하면 구석기 시대 말엽(1-3만년전)경 활을 사용했다고 하며 일부 고고학자는 약 10만년 전부터 사용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탄력을 응용한 활과 화살이 존재한 흔적은 구석기 시대 말기에 나타난다. / 즉 후기 구석기시대에 유럽의 남 러시아, 스페인, 북아프리카지역에서 화살촉이 발견되어 활이 후기 구석기 시대에 사용되었음이 증명되고 “대영백과 사전은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카스테론주 산악지역에 동굴벽화에서 활의 사용을 추정하고 있으며 최근의 ”기네스 북에는 스페인의 중석기 동굴벽화에서 활과 화살이 존재하였음을 증명하고 있어 후기 구석기시대와 중석기 시대에 이르는 사이에 인류의 생활도구 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고던 칠드(Vere Gordon Childe, 1892–1957) 오스트레일리아 고고학자 문헌학자. 아리안족: 인도유럽문명의 기원에 관한 연구(The Aryans: A Study of Indo-European Origins 1926) en.Wiki에는 따로 “문명의 기원”이란 작품은 없고, 고고학적 문화개념을 사용한 유럽문명의 여명(The Dawn of European Civilization 1925)이 있다.]
6만 4천 년 전, 최초의 활의 유물은 남아프리카 시부두 동굴에서(The earliest potential arrow heads date from about 64,000 years ago in the South African Sibudu Cave) - en.Wiki, "Bow and arrow"
3만 5천년전 최초의 현대인인 크로마뇽인이 3만 5,000년 전에 출현하여 정 또는 조각칼로 바늘, 낚싯바늘, 화살촉을 만들었다. 또한 활이 발명되어 이 활로 인류는 더 멀리 있는 사냥감을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2만년 전: 그라베뜨(Gravette)에서 발견된 조각들로서 추정한다. Néanmoins, la petite taille de certaines pointes découvertes à Gravette, fait penser que l’arc existe depuis au moins 20 000 ans.
2만년 활과 화살의 발명: 일반적인 설명이다.
구석기 동둘 벽화에 활이 있는 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1만 7천년전 활의 유물 : en.Wiki: "Bow and arrow"에서 문헌으로 두 가지 - 맥클런(James Edward McClellan s.d.)와 돈(Harold Dorn, s.d.), 세계 역사에서 과학과 기술: 입문(Science and Technology in World History: An Introduction, 2006))(Retrieved December 2010). 그리고 페레그린(Peter N. Peregrine, 1963-: 미국 인류학자. 고고학자)와 엠버(Melvin Lawrence Ember, 1933–2009) 미국 문화인류학자. 3인 공저(Carol R. Ember; Melvin Ember; Peter N. Peregrine) 인류학(Anthropology 2010)(13th ed.)에서 주장하고 있단다. .
1만 8백년전 화살, 독일에서 발견. La plus ancienne flèche trouvée date de -10800 (Stellmoor, Allemagne du Nord).
신석기 시대
(1) 활 : 활은 나무나 뿔, 뼈 같은 유기물질로 만들어졌던 관계로 출토되는 유물이 없다. 다만 이웃인 일본에서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다만 활촉은 많이 출토되고 있어서 활이 사냥이나 전투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활촉은 돌이나 짐승의 뼈, 이빨 등으로 만들었다. / 신석기 시대 흑요석 화살촉이 대량으로 발견된다.
우라누스 세대 3500년경 ? [크로노스 세대 2500년경 제우스 세대 1600년경?]
3650 미노스 문명 (3650-1170 BC) 크레타 중심 무역문명 ::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2300? 최초의 합성궁은 기원전 23세기에 수메르/악카드에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당시에 쓰이던 단순궁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유효 사거리가 약 45m~약 90m였고, 이 거리에서조차 간단한 갑옷을 뚫을 수 없었던 반면에, 이 때 만들어진 합성궁은 활시위를 당기는데 드는 힘이 단순궁의 것의 2~3배 정도였고, 사거리는 단순궁의 두 배나 되었으며, 가죽 갑옷이나 당시에 등장하던 초창기의 청동 갑옷도 뚫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청동기 시대
(1) 원거리 무기 : 원거리 무기에는 쏘는 무기인 활과 쇠뇌가 있다. 활은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화살촉을 살펴볼 때 단면이 능형인 양익유경촉이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전투용 무기로 개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익유경촉은 촉신이 좁아서 뚫는 힘이 세고, 미늘이 있어서 다시 뽑아내기가 힘들므로 사냥에서는 경제적이지 못하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살상력을 높여주었다. 또한 화살촉이 크고 무거워지는 점으로 미루어 강화궁 같은 강궁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209 주서기년 오제기 제순 유수씨 조에 의하면 기원전 2209년 숙신(肅愼)의 사신이 예물과 활과 화살을 가지고 중국을 방문하였다.
치우(蚩尤) 는 전쟁에 능해 싸우면 반드시 승리했으므로 군신(軍神)으로 알려져 있다. 또 그는 무기의 발명자로도 유명하다. 치우가 발명한 것으로 전해지는 무기는 검(劍), 갑옷[鎧], 자루가 긴 창[矛], 쌍날창[戟], 창[戈], 석궁[弩]이 있다. / 노(弩)란 어떤 종류의 활일까? [네이버 지식백과] 치우 [蚩尤] (중국환상세계, 초판 1쇄 2000, 7쇄 2007, 도서출판 들녘)
- 동이(東夷) 일찍이 우리 민족이 “동쪽에 사는 큰 활”이란 뜻인 ‘동이(東夷)’로 이름났습니다.
2060 멘투호테프 2세(재위 전2060-전2010) 이집트 제11왕조 검은 피부의 파라오. 제1중간기의 혼란을 끝내고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였다. 그의 이름은 '멘투(테베의 전쟁신)가 만족하신다'라는 뜻이다. 즉위명은 네브헤테프레로 '레가 기뻐하신다'라는 뜻이다. / 버넬(1987년 책)은 멘투를 황소의 신이라 한다. 황소 숭배는 크레타 문명에도 나타난다. / 멘투는 궁술(弓術)의 신이었다 (버낼 I, 109)
라다만튀스는 또한 헤라클레스의 호전적인 계부로서 그 영웅에게 활쏘기를 가르쳤다. 그런데 멘추(멘투)는 궁술의 신이었다. [그리스 라다만튀스(Rhadamante, Ῥαδάμανθυς,)는 이집트의 멘투호테프의 전설상 같은 이름에서 왔다.]
- 헤라클레스 신화에 활이 있던가? 당연히 있다. - 여섯째 과업에서, 6. Στυμφαλίδες όρνιθες : Abattre les oiseaux du lac Stymphale (여섯째 작업) 헤라클레스의 활을 쏘아 새들을 쫓아냈다. / 미케네 문명과 연관이 있다.
1991 제12왕조 이 왕조에는 왕세자와 공동통치 기간이 있어서 겹친다. / 제12왕조의 발흥과 더불어 왕실의 멘추[황소] 숭배를 폐지했다. 새 왕조는 상이집트의 숫양 신 아몬을 수호신으로 삼았다. 이 왕조의 개시자는 세소스트리스(Sésostris)로서 11왕조의 사제였다. qualifié de « père divin » selon une inscription à Thèbes, est un prêtre de la XIe dynastie, père du roi Amenemhat Ier. / 다음 왕은 세소스트리스 1세(Sésostris Ier, 전1964-전1919), / 이집트어로 센우세레트라는 이름이 케페르카라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아테네 건설자가 케크롭스라는 설도 있다. [황소에서 양으로 바뀌는 것은 농경위주에서 목축 위주로서 기후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일까? 파라오의 권력강화에서 전쟁을 기반으로 했을까? 전쟁강화는 활이 될 것인데.. (48OKG) ]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아테나 여신은 이집트 네이트 여신과 동일하다. 네이트 여신이 전쟁의 여신으로 방패와 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하왕조에 그 모습이 드러난다. (48OKF)
1600 카드모스 [ 마틴 버넬의 경우, 30)]
- 제우스 세대 1600년경? -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 교대 시기 [2000년 이전일 것이다.]
1600 미케네 문명 (1600-1100 BC) 펠로포네소스 반도의 미케네 정복문화.
1400? 외디푸스 신화에 활이 있던가? 카드모스의 후예이다.
아폴론(Apollon, Ἀπόλλων / Apóllôn, en latin Apollo) 노래, 음악, 시의 신. 정화와 치유의 신이기도 하며, 활로서 페스트(역병)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결국에는 예언, 상담(조언)의 신이다. 델포이(Δελφοί / Delphoí)에서 퓌티아(la Pythie 피티)에 의해 신탁을 전한다. 로마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존경을 받는다. 기원전 5세기 경에는 치유의 능력을 채택하고 사원을 지었다. / 이 명칭의 기원은 아나톨리에 근거한다. - 아나톨리(Anatolie)는 현재 터기지역 거의 전부를 지칭한다.
쌍둥이 자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무기인 활은 그리스의 것이 아니라 바바리안들의 것이라 한다. 아폴론이 샌들을 신지 않고 나막신을 신은 것은 아시아식 사냥꾼을 뜻한다는 것이다.
아르테미스(Artémis, Ἄρτεμις / Ártemis ou Artéminusus) 사냥의 여신, 달과 연상된 여신들 중의 하나이다(아폴론은 태양을 연상하게 하는 것인 반면). 로마에서 다이아나(Diane)이다. 그녀의 부속물들은 사슴, 황금 활, 화살, 전통(화살통)
활과 현(弦 시위, 수학의 현) 곡선의 선분은 호(弧). - 현(絃 현악기)과 활
전1500 또는 1400 아킬레우스(Achille, Ἀχιλλεύς / Akhilleús)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전설의 영웅,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트로이 군과의 전투 중 헥토르에게 전사하자 다시 전투에 참전하여 결투 끝에 헥토르를 죽였다. / 파트로클로스(Patrocle, Πάτροκλος ou Πατροκλῆς)와 남색관계였다.
전1500 또는 1400 경에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스가 죽을 때 화살에 맞아 죽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스가 성문을 넘어 성 안으로 쳐들어오려던 찰나 파리스가 쏜 화살이 우연히도 아킬레스의 발 뒤꿈치를 맞춰고, 이로서 아기 때 스틱스 강에 담궈서 금강불괴가 되었던 그의 몸의 마법이 풀리면서 또 다른 화살이 심장을 꿰뚫어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화살이 아니라 발 뒤꿈치를 맞춘 화살이 독화살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킬레우스는 아폴론의 팀블레 신전에서 트로이의 공주 폴릭세네와 결혼식을 올리려고 하였으나 아폴론의 신상 뒤에 숨어 있었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화살에 발뒤꿈치를 맞아서 죽고 말았다.
전1400 〈오뒤세이아 Odyssey〉의 절정은 제21장 오디세우스가 활솜씨로 페넬로페의 구혼자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것이다. [12개의 철기도끼 구멍을 통과하는 것... 철기가 아니라 청동기가 아닐까? ]
1200경에 모세의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이동에서도 활의 이야기가 없다?
1150 주례에서 나온 육예(六藝) 중에 활[射]은 셋째이다. 사분오사(射分五射): 백시(白矢), 참련(参连), 섬주(剡注), 양척(襄尺), 정의(井仪). ch.Wiki: 《周礼》中的六艺是西周之前贵族教育的六个学科:禮、樂、射、御、書、數。其中禮分五礼(吉、凶、宾、军、嘉); 乐分六乐(云门、大咸、大韶、大夏、大镬、大武), 射分五射(白矢、参连、剡注、襄尺、井仪), 御有五御(鸣和鸾、逐水曲、过君表、舞交衢、逐禽左), 书有六书(象形、指事、会意、形声、转注、假借), 数有九数[2][1]。
1110 기원전 1110에 중국 은나라와 주나라 전쟁 때, 동이족이 주나라에 가담하여 활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1085 이집트 말기왕조 시대 (기원전 1085~기원전 332)
1000? 이 시기에 네이트(Neith, Neit) 여신: 전쟁의 여신으로서 머리 위에 엇갈린 화살과 방패를 올린 네이트. 하이집트의 붉은 왕관을 쓴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 여신은 긴 창고 같은 홀대와 생명의 십자가를 쥐고 있다. //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 등장하는 초기의 여신으로서, 고대 이집트 선왕조의 수도였던 나일 강 델타 서안에 자리잡은 사이스의 수호신이었다. 후기에 그녀는 전쟁과 수호의 여신이 되었다. 또한 고대 이집트에서 서쪽은 죽음의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녀를 저승의 여주인이라고 여겨졌다. 몇몇 자료에서는 이집트 최초의 신인 누의 아내로 서술되어 있다. [서쪽을 죽음으로 여기는 것은 태양이 지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방정토는 불교색체를 입어서 그럴 것이고.. (48NLJ)] [아테네 여신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리스의 성립의 근거가 이집트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48PMD) ]
- 고조선 유적: 평안북도 영변 세죽리 유적(청천강 유역)에서 나온 고조선 활촉 거푸집입니다.
- 고조선의 일부였던 숙신은 서주 무왕에게 활과 화살촉을 선물로 보냈는데 무왕은 그의 딸에게 이것들을 선물로 주었는데... [무왕의 딸: 강태공에게 시집간?, 문왕의 딸이 강태공에게 시집갔던가? )
전800년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는 활의 사용이 이야기가 없다.
725 관중(管仲, 전725-645) 管氏, 名 夷吾, 字 仲, 활을 잘 쏘았다. 관포지교(管鮑之交)로서 포숙아(鲍叔牙)의 우정이 알려져 있다. /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재상. 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이름이 이오(夷吾)인데 이자를 보면 활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
685 제환공적 대구구(齐桓公的带钩): 관중이 제환공의 허리띠를 맞춘 사건. 제환공 재위 43년간(전685~전642)인데 재위 7년(전 679년)에 위(衛)의 견(甄)에서 회맹을 열고 패자의 지위에 오른 것은 관중의 덕분이다.
600? 양유기(養由基 ? -전559) 중국 춘추전국시대 장군, 명사수(名射手) ‘백보천양(百步穿楊), 천엽지공(穿葉之功)’ 전606 초장왕(楚莊王)시절 투월초와 3시 시합(鬥越椒互射三箭)일화, 전575년 일화 초공왕(楚共王)시절에 위기(魏錡)를 한발로 죽인 일화가 있다. /ch.wiki, 양유기(養由基, ?-前559年), 嬴姓, 养氏, 春秋時楚國將領,是中國古代著名的神射手。周代有養國,後來被楚國滅掉,其族入楚世为楚国大夫。相傳養由基能在百步之外射穿作標記的柳葉,並曾一箭射穿七層鎧甲。
60? 반당:(-- ? ?) 전국시대 초나라 장수. 양유기와 동시대 사람인데요.. 명궁이라기보다는 강궁입니다.
551 공자(孔子, 전551-전479) 활을 쏘는 것을 觀德(관덕)
관덕(觀德)이란 이름은 유교 경전 《예기》 사의 편에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의 대목에서 유래했다.
- 觀德(관덕)과 反求(반구)를 아주 멋지게 새겨 넣은 화살 통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 관덕은 ... 반구는 반구저기에서 온 것으로 맹자의 말이다
두 상징어는 공맹(孔孟)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 시절, 활은 백성의 뜻을 하늘에 기원하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하늘의 호응을 얻어야 하는 지상의 염원이라면 사람끼리 더불어 어질게 살아야 함인데, 그러자면 두루 “덕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해서 관덕이고, 이 말이 마침내 활쏘기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 활쏘기는 상대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놀이가 아닙니다. 과녁을 바라보며 자신과 싸우는 경기입니다. 본질적으로 맞고 안 맞고가 남 탓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내 탓으로 돌림(反求諸己)”의 원칙을 강조한 말이 ‘반구’였습니다.
- 중용 14장에 다음과 같은 공자의말이 나온다. 子曰:「射有似乎君子。失諸正鵠,反求諸其身。」(자왈: 사유사호군자 실저정곡 반구저기신)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활쏘기는 군자의 도와 비슷하다.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돌이켜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기 때문이다.”
5?? 공자시대
육예(六藝)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 칠예(七藝) 시서예악사어수(詩書禮樂射御數) 사이에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칠예라는 개념은 학술용어가 아닌 모양이다. 누가 지어낸 것인 모양인데, 일곱색갈의 미신과 같은 계보일 것이다. 게다가 시서를 앞에서 세운 것으로 보아 그 부류가 만든 것일 것이다. 참조로 ‘중국위키’에서 칠예(七藝)란 서양의 3학(trivium: grammaire, dialectique et rhétorique), 4학(quadrivium: l'arithmétique, de la musique, de la géométrie et de l’astronomie))을 합하여 지칭한다. 在古希腊时期,柏拉图就提出了“七艺”,也称为“自由七艺”(Liberal arts)。到欧洲中世纪初期成为学校中的七门课程:文法(包括拉丁文和文学)、修辞(包括散文与诗的写作,以及历史)、逻辑(即形式逻辑)、算术、几何(包括地理)、天文、音乐。圣伊西多尔又将前三科定为初级学科,称为“三艺”(trivium),后四科定为高级学科,称为“四术”(quadrivium)[1]。
칠예는 어디서 나온 용어일까?
480? 제논(Zénon, Ζήνων, 기원전480경-420경) 엘레아학파: 변증법(상대부정을 통한 자기긍정)의 발명자. 나는 화살의 예(le Paradoxe de la flèche)
372 맹자(孟子, 기원전372?- 289?) 이름은 맹가(孟軻)이다. 선(先)진대 중국 전국시대의 유교 사상가.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 孟子 〈公孫丑上〉, 孟子曰:「仁者如射,射者正己而後發,發而不中,不怨勝己者,反求諸己而已矣。」 인이라는 것은 활을 쏘는 것과 같으니, 활을 쏘는 것은 그 몸을 바로 한 후에 쏘는 것이다. 쏘아 맞지 않으면 나를 이긴 자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이켜 구할 뿐이다.
로마의 설화에서 큐피트가 활을 든 것은 어느 시절인가?
아르키메데스의 활과 같은 무기...
58 고주몽(동명성왕, 東明聖王, 전58-전19, 재위 전37-전19) 그는 전37년에 고구려를 세웠다. 천제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를 부모로 두고 태어나, 주몽은 활쏘기를 잘했다. - 누가 물동이를 맞추어 물이 새는데, 주몽을 그 구멍을 맞추어 물이 새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 고구려의 시조(始祖) 주몽(朱蒙)은 활 잘 쏘는 이[其俗言 朱蒙者 善射也--魏書 百卷 列傳 88 高句麗條]를 가리키는데, 기마 민족인 우리는 활을 잘 다루는 민족이었다. 중국인은 한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 했는데, 이는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 [夷→大+弓, 夷→立人+弓, 혹은 화살(丿)로 활(弓)을 잘 쏘는 사람(人)들 ]임을 나타낸다.
오늘의 우리 활이 고구려 무덤 벽화 수렵도에 등장하는 활과 그 모양이 놀랄 정도로 같다는 사실에서 열쇠가 있을 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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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남만정벌... 마원(馬援, 전14년 ~후49년) 장군이 남만을 평정하려 출정하여 이 복파산 부근에서 남만족과의 전투에 앞서 남만족의 장군과 활쏘기 내기를 제안하여 지는 편이 철군하자고 하는 내기를 했는데, 마원 장군이 쏜 화살은 복파산 인근의 천산(穿山)에 큰 구멍을 내고 계속 날아가 남만쪽에 떨어지자 남만족이 패배를 시인하고 철수 했고 결국 전쟁에 승리하여 이를 기념해 복파산 입구에 말을 탄 채 화살을 쏘는 복파장군 마원의 동상이 세워졌다.
위지동이전(魏誌東夷傳)에 “읍루(挹婁)의 활의 길이는 4척이고 그 힘은 노(弩)와 같다.”(24) [읍루(邑婁) 고대 만주지역에 있었던 부족. / 읍루(挹婁)는 숙신(肅愼)의 후예이자 말갈(靺鞨)의 전신이다.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 제75, 후한에서 오호십육국 시대 사이에 연해주와 그 부근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50? 여포(呂布, ?-198)는 중국 후한 말의 장군. 자는 봉선(奉先), 병주(幷州)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사람이다. ‘마중적토 인중여포(馬中赤兎 人中呂布)’라는 말로 표상되듯 신기에 가까운 무예로 천하의 명성을 얻었다. 동탁의 부하였으나 왕윤과 공모하고 동탁을 죽여 왕윤 정권의 군사적 중추에 있었으며, 이각, 곽사, 장제, 번조와 싸워 져 왕윤 정권을 몰락시켰다. 이후 각지를 떠돌다 서주(徐州)를 근거지로 조조와 맞섰으나 패망하고 처형되었다. .. 유비는 원술에게 패하고 갈 곳이 없게 되자 여포에게 귀의했는데, 원술이 기령(紀靈)을 보내 유비를 토벌하려 하자, 여포는 화극(畫戟: 화: 의장용 무기)에 화살을 맞추는 무용을 선보이며 기령을 돌려보냈다. ../ 천자문 115. 포사료환 혜금원소(布射僚丸하며 嵆琴阮嘯라): 여포(呂布)는 활, 웅의료(熊宜僚)는 공, 혜강(嵇康)은 거문고, 완적(阮籍)은 휘파람이다.
222 최초의 기록으로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때 222년 오나라 손권이 황제로 즉위할 때 고구려가 각궁을 선물했다. (23)
3?? 카펠라(Martianus Minneus Felix Capella 4세기-439??) 4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활동한 북아프리카 태생 카르타고의 변호사. 산문과 시로 쓴 그의 일반 교양학(Les arts libéraux)은 중세말기까지 막대한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les Noces de Philologie et de Mercure, en latin, De nuptiis Philologiae et Mercurii)(entre 410 et 429) / 서양의 칠예(七藝)란 일반교양학(Les arts libéraux)을 지칭하며, 카펠라가 시로 표현했다. 그 다음으로 보에티우스(Boèce, Boethius, 470경-524)가 4학(quadrivium 수에 관한)을 산술학(l’arithmétique), 음악(la musique), 천문학(l’astronomie), 기하학(la géométrie)으로 정의했다. 동시대인이었던 카시오도루스(Cassiodore, Cassiodorus, 485경-580경)는 3학(언어에 관한 trivium)을 세 그룹, 문법학(la grammaire), 수사학(la rhétorique), 변증법(la dialectique)으로 나누었다.
550?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국보 제78호)
645 양만춘(梁萬春, ? ~ ?) 또는 양만춘(楊萬春)은 고구려 말기의 군인이다. / 645년 당 태종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그러나 안시성에서는 군관민 일체로 협동하여 당나라 군대와의 3개월에 걸쳐 하루 평균 5~6회의 포위 공격을 막아내며 농성하였고 당군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 당 태종이 안시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야설도 있다. 또한 당나라 측 사서에는 당태종이 끝까지 안시성 방어를 성공한 안시성 성주에게 비단 백필을 하사하였고 이에 안시성 성주가 절하여 하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격렬한 전투를 치루었고 긴급히 퇴각하던 당나라의 당시 사정을 볼 때 당나라 측 사서의 과장된 기록으로 추측된다.
900? ** (fr.Wiki) 900년경 래그나가의 바이킹이 영국의 노스섬브리 지역의 약탈에 대한 이야기(Vers 900, les Vikings menés par leur chef Ragnar ravagent régulièrement la Northumbrie en Angleterre)이다. / 미국영화 리처드 플레이셔(Richard Fleischer, 1916-2006)감독의 바이킹(The Vikings, 1958)(fr. Les Vikings)에서 불화살을 쏘아 죽은 자를 수장시키는 장면이 있다.
945 구당서(舊唐書, 940-945) 중국 당나라 왕조의 정사(正史). 10세기에 중국 후진(後晉)의의 유구(劉昫) 등이 편찬함. 본기 20권, 지(志) 30권, 열전 1백 50권, 모두 2백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송나라 때 신당서가 편찬되자 그리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었으나, 청나라 때에 와서 이 책의 가치가 재평가되어 구당서보다 귀중하게 취급되었다. 외교 및 문화 교류 등 우리나라에 관한 사실을 적지 않게 기록하고 있다. / 장소원(張昭遠), 가위(賈緯), 조희(趙熙) 등이 편찬하고, 조영(趙瑩)이 감수(監修)하였다. 고, 유후[유구?]가 일을 총괄하였다. .. 동이(東夷) 1권, 북적(北狄) 1권을 합쳐서 150권으로, 총계 200권으로 되어 있다.
- '선배제도의 조의선인은 학문에 힘쓰며 수박(手搏)과 활쏘기 등의 기예를 익히고 원근 산수를 탐험하며 시가와 음악을 익히며 공동으로 일처에 숙식했다. 평시에는 환난 구제를 자임했고, 전시에는 전장에 나가 목숨을 걸고 일신을 희생했다. 지방의 교육기관이었던 경당에서도 문무가 분리되지 않았다. 지방 서민의 아들들이 결혼하기 전까지 밤낮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혔다고 전해진다.' (<태조본기>, <구당서 동이 고려조>)
1187 소학(小學)(1187): 중국 송(宋)나라 개인 도덕 수양서. 주자(朱子: 朱熹)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소년들을 학습시켜 교화시킬 수 있는 내용의 서적을 편집하게 하여, 주자가 교열, 가필한 것이다. 1185년에 착수하여 2년 뒤 완성하였다. 내외의 2편으로 되어 있는데, 내편은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계고(稽古)의 4개 항목을 기본으로 하여 유교의 윤리사상의 요강을 논하였으며, 외편은 가언(嘉言) 선행(善行)의 2개 항목 밑에 한(漢)나라 이후 송나라까지 현철(賢哲)의 언행을 기록하여 내편과 대조시켰다. / 이 책에 육예(六藝)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1228 로빈 후드의 이야기가 언제부터 전해 내려왔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미 1228년부터 "로빈후드"(Robinhood), "로버호드"(Robehod), "호버호드"(Hobbehod)와 같은 이름들이 잉글랜드에서 산발적으로 전해오기 시작하였다. 13세기에 들어선 1261년에서 1300년사이의 기간에 버크셔 북부와 요크셔 남부에서 "라번호드"(Rabunhod)와 관련된 최소 8개 이상의 문헌이 기록되었다.[6]
1316 최영(崔瑩, 1316-1388) 고려 말, 그는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왕실을 지키려 한 명장군이자 재상이었다. 그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 용봉산(龍鳳山 381m)의 정상 서남쪽 능선에는 ‘최영의 활터’가 있다. 이성계에 밀려나 억울한 죽음으로 무당계에는 그를 덕물장군으로 숭배하고 있다. 그의 무덤은 파주에 있다.
1358 중위키: 朝鲜国学名成均馆,始建于1358年。朝鲜时代儒敎界提倡文武双全,礼、乐、射、御、书、数 谓之“六礼”。六礼中的“射”,是儒生必备的基本技能之一。课程内容主要是儒教经典和修身养性等学问,读经典都有时间限定,如《大学》1个月,《中庸》2个月,《论语》、《孟子》各4个月,《书经》、《诗经》、《春秋》各6个月,《周易》、《礼记》各7个月等;儒生书写以工整的楷书为基础。[16]
1388 이성계가 왕명으로 중국 명나라를 치러 가다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와 왕을 내쫓고 최영을 유배시킨 사건 /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결정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사불가(射不可),즉 활을 쏘지 못하는 날씨 탓이었다고 한다.
1492 컬럼버스가 서인도제도 한 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만난 원주민이 활가지고 있었다. 총을 나는 새를 맞추지 못했을 때, 원주민은 활로 나는 새를 맞추었다고 한다.
1550k 이정분(李呈芬 1550k-1610k)의 사경(이정분, 김해성 해역, 자유문고, 1999, P.280) 다만 이정분의 편찬으로 된 『황명경세전서(皇明經世全書)』라는 책이 발견되었는데 이 저서에 하동여(何棟如 1572-1637)라는 사람에 의해 붙여진 서문과 이정분의 자서(自敍)가 존재함으로써 어느 정도 그의 윤곽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 척계광(간체: 戚继光, 정체: 戚繼光, 병음: Qī Jìgūang 치지광, 1528년 11월 12일 - 1588년 1월 5일)은 중국 명나라 후기의 무신이다. 이정분은 척세광과 동시대 인물이라 한다. {중D1550k이정분1610k}
1592 임란에서 조총과 국궁: 국궁이 총보다 사거리가 더 길고 원거리 명중률이 좋았는데 왜 국궁이 조총에게 밀렸을까? 라는 이야기가 있다. 나로서는 조총은 몸을 숨기고 쏘지만 활은 몸을 내놓고 쏘는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1638 고영숙이 쓴 무경사학정종(武經射學正宗, 1638): 명나라 때인 1638년 고영숙(高穎叔)이 쓴 책이며, 사법비전공가(射法秘傳攻가)는 청나라 때에 와서 이 책을 재편집 발간하였다. [1638 명나라가 망했을 때인데..]
1674 숙종(肅宗, 1661-1720) 조선 제19대 왕[재위 1674-1720]이다. 이순(李焞), 본관은 전주(全州)
- 숙종 임금 때는 전주에서 대사습(大射習)을 열게 했고,
1724 영조(英祖, 1694-1776) 조선 제21대 임금[재위 1724-1776] 이금(李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 영조임금 때는 청계천 준설을 기념해서 활 대회를 크게 배설[排設]했습니다.
1785 대학지(太學志 1785)(정조 9), 편저자 대사성 민종현(閔鍾顯), 14권 14책 <조선에 들어서 성균관에서는 쉬는 날에 사냥을 나가거나 검술을 연마하는 자는 학교에서 쫓겨나거나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입시 위주, 성적 위주의 학문 교육만을 강조한 것이지요.' (<태학지> 권5학령 참조) [- 이 기록의 근거가 미약하다. 정조인데 말이다. 여기서 성균관은 조선조 초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한다(47UNA)]
신궁으로 불렸던 정조대왕이 49발을 명중시키면서 마지막 한 발을 일부러 빗맞혔으며, / ‘조선왕조실록’에 ‘정조임금이 10순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임금이 10번을 쏘았다’로 번역되어 있다. 1순(巡)은 5발이기 때문에 ‘50발을 쏘았다’고 해야 맞다. 또 활을 가득 당기는 상태를 ‘만작’이라고 하는데 기록에는 ‘滿作’과 ‘滿酌’이 교차한다. 김 교수는 고증을 통해 술잔 작(酌)자가 맞다는 것을 밝혀냈다.
1790 정조(正祖)의 명에 따라 이덕무와 박제가 등이 1790년에 펴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만 올라 있을 뿐이다. <수박(手搏)에 대한 자료> / 이 책에는 활에 대한 자료도 들어있다.
1868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Sheriff Curtis, 1868–1952) 미국민족지학자. 미국 원주민에 대한 사진가 The North American Indian 1907, Portraits from North American Indian Life s.d.), 아메리카 북인디언: 활들, 화살들, 전통들(North American, Bows, Arrows and Quivers s.d.) - 이 책들을 김진원(황학정) 소장.
1881 이중화 선생(1881-1950?)은 서울 출생으로 興化학교 영어과를 졸업,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 8.15광복이후 한글학회 이사, 재단법인 한글집 이사장, 6.25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 하였다. 저서로 京城記略, 조선의 궁술(1929) 등이 있다.
1882(고종 19) 6월 9일. 임오군란: 구식군대가 일으킨 병란. 훈국병(訓局兵)들의 군료분쟁(軍料紛爭)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政變).
- 1882 국궁이 사라진 이유는 임오군란 이후에 신식군대가 집총이 중심이었기에 국궁이 점차 밀려나 사라진 것으로 본다는 것이 유력한 설이다.
1899 황학정 설립, 충정공 민영환 - “습사서현(習射序賢)”이란 휘호를 남기다. 前推泰山 發如虎尾(전추태산 발여호미)
1900 루스트(Alfred Friedrich Wilhelm Rust, 1900-1983) 독일 선사시대 연구 학자. 고고학자
1909 조각 헤라클레스 궁수(Héraklès archer, 1909) - 에밀 앙투안 부르델(Emile Antoine Bourdelle, 1861-1929)이 1909년에 완성한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괴물새를 겨냥하여 활을 겨누고 있다. 활 시위를 힘껏 끌어당기며 목표를 노려보는 헤라클레스의 눈초리는 긴장돼 있고 왼발은 바위에 밀어붙인 채 오른발은 몸을 지탱하려고 굽히고 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전신의 근육은 터질 듯 힘 있고 팽팽하게 솟구쳐 있다. / un Héraklès archer d'après l'épisode des oiseaux du lac Stymphale.
(fr.Wiki) - Héraklès archer réalisé en 1909, devait être initialement réalisé en un seul exemplaire selon Gabriel Thomas qui avait commandé l'œuvre. Mais dès 1916, d'autres exemplaires furent vendus, tant le succès fut important. Le modèle de la sculpture est le commandant Doyen-Parigot, qu'il avait rencontré aux Samedis Auguste Rodin. Ce militaire, sportif accompli, inspira Bourdelle qui se tourna vers la légende d'Héraclès. Parmi les douze travaux, Bourdelle choisit l'extermination des Oiseaux du lac Stymphale. Toutefois Bourdelle modifia la tête de son modèle, celui-ci ayant demandé qu'il ne soit pas identifiable. La sculpture fit sensation au salon de 1910.
1919 황금화살(The Arrow of Gold 1919)(La Flèche d'or). /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vrai nom Teodor Józef Konrad Korzeniowski, 1857-1924) 폴란드 귀족가계 출신, 영국작가.
1929 조선의 궁술(1929)(이중화, 조선궁술연구회)은 1929년 조선궁술연구회가 펴낸 우리나라의 거의 유일한 궁술교범이다.
1942 김형국(金炯國 1942-) 서울대 명예교수. 활을 쏘다(2006)의 저자, 경남 마산 출생,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도시계획학 박사. 1975년 이래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데 그동안 동 대학원 원장,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한국미래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56 활과 리라(El Arco y la Lira 1956: L'Arc et la Lyre),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Octavio Paz Lozano, 1914-1998)의 작품이다.
1971년 대연각 화재 현장에도 황학정 궁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 "고가 사다리 차량은 안간힘을 써서 세워봤자 5층 높이밖에 안 되었고 (...) 궁여지책 중에 사직동 소재 국궁 양성소인 황학정의 궁사들을 불러서 화살에 로프를 묶어 쏘게 했지만 화살이 로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무용지물." / 천야(2014/12/15 18:20) : 머리를 써야? 처음에는 가늘고 질긴 나일론 같은 것을 묶어서 쏘아 일단 끈을 먼저 올리고, 그 다음에 그 줄 밑에 로푸를 묶던지 다른 것을 묶어서 올리면 될 것인데, 처음부터 화살에 그 무거운 로프를 매는 것이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ㅋㅋ (47WLE)
2006 활을 쏘다 저자 김형국(金炯國), 효형출판, 2006.04.05, 페이지 262
2010 국궁교본(김집, 황학정 간, 2005. 388쪽) : 김집(金鏶, 1928-), 평남 강서 출생, 1979년 KBS 궁도부에서 집궁, 1988년 KBS 정년퇴직 황학정 제30대 사두(1999-2000), 국궁1번지(1994-1999, 편집발행인) 궁도입문, 1997 황학정 100년사, 1999(편찬)
(4:19 47ULG, 책김집1410국궁교본) (8:36 48LLI) (12:3, 48WN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