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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성경에 관하여 9-10절
엡 2:20-22 성경은 해석되어야 한다 찬송: 266, 205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7) (본문 인용: 믿음의 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입문, 성약출판사)
1장 성경에 관하여
9절. 성경해석의 무오(無誤)한 준칙은 성경 자체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부분이 지닌 참되고 충만한 의미(여러 의미가 아닌, 단 하나의 의미)에 관하여 의문이 생길 때에는 좀 더 분명하게 말하는 다른 구절들을 헤아려 깨달을 것입니다(행 15:15-18; 요 5:46; 벧후 1:20-21).
10절. 신앙상의 모든 논쟁을 판가름하고, 또 모든 교회 회의의 결정들과 고대 저술가들의 견해와 사람들의 교훈과 사사로운 영들을 심사하며, 우리가 그 판결에 승복(承服)하여야 할 최고의 재판장은 오직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밖에 없습니다(마 22:29, 31; 엡 2:20; 행 28:25; 요일 4:1-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에서 성경에 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마지막은 성경의 해석과 권위에 대한 것이다.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66권 모든 책의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성경 각권을 기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유일한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분이 참되게 연결이 되어 있다. 그리하여 구약을 해석할 때에는 신약의 빛 아래에서, 신약을 해석할 때에는 구약의 그림자 안에서, 그리고 신약과 구약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아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자들이 고백한 성경 해석의 원리이다. 이런 내용의 고백이 9절과 10절에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다.
성경은 분명히 글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하나님의 권위로 기록된 것임을 인정한다. WCF 1.6을 보면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과 믿음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밝히 드러나 있음에도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해석이 필요하다. 성경 각권을 읽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면서 읽어야 하며, 또한 성경의 각 책들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만 한다. 이것에 실패하면, 성경은 그저 우리의 삶에 위로를 주는 말씀만 남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전에 배운 욥기의 말씀도 그러하다.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아무리 어려워도 조금만 참으면 나중에 많은 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정작 빌닷이 고백한 이 내용은 기복주의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말씀을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함이 필요하다. 한 구절만 따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구절이 속한 장에서의 의미, 그리고 그 장을 포함한 책 전체의 의미,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의 의미가 일관되게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9절에서 말하는 “성경해석의 무오(無誤)한 준칙은 성경 자체”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성경 전체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왜 이 책들을 정경으로 포함되게 하셨는가를 염두에 두고 각 책을 읽어야 하며, 그리하여 성경 자체를 통하여 우리의 해석이 검증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일관성’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성경의 말씀은 오직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의 이해에 대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러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어떠해야 하는가? 앞의 원리인 ‘성경의 일관성’을 적용할 수 있다. 애매한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좀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다른 구절들을 통하여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의 가르침이 여기에 해당한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우리의 모든 신앙하는 내용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존재한다. 사도들은 신약 성경을 의미하며, 선지자들은 구약 성경을 의미한다. 즉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전체가 지시하는 바 예수께서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배우며, 또한 성도로 부름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누가 하셨는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이토록 놀라운 자비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기초적인 내용이다. 이 가르침 위에 우리의 신앙이 선 것이다. 만약 우리의 성경해석이 이 내용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무시하는 처사가 된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신약시대 최초의 종교회의를 기록하여 우리의 신앙함이 말씀을 통해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행 15:15-20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행 15:1을 보면 안디옥 교회에 유대로부터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서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약의 말씀들을 연구한 후에 암 9:11-12과 렘 12:15의 말씀을 인용하여, 모세의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다만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다는(행 15:19-20) 결정을 내렸다. 신약의 상황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과 관련하여 구약의 말씀을 해석하여 적용함으로써 바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예는 신약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달리 성령 하나님의 영감으로 구약을 해석하고 적용한 신약성경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이 일관되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언약의 내용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참되게 읽기를 원한다면 성경 전체를 밝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참되고 충만한 의미는 오직 하나임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바른 성경 해석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런 해석 방법을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향한 열심은 있지만, 그 열심이 자신의 열심인 경우에는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빠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중세 시대의 성경 해석법은 4중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언제나 성경의 말씀은 항상 네 가지, 즉 문자적, 도덕적, 풍유적, 천상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예루살렘’이란 단어를 읽을 때, 문자적 의미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도시요, 도덕적 의미는 인간의 영혼을 상징하며, 풍유적 의미는 교회요, 영적 의미는 하늘의 도성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처럼 중세 시대의 신학자들은 성경 각 구절에서 이 네 가지 의미를 찾는데 온 힘을 기울였지만, 이 해석의 맹점은 신학자 개인의 사견이 너무 많이 들어가며, 성경 전체의 일관성을 무시한다는 데 있다. 또 다른 예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3대지를 찾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선호하는 분들은 성도들의 삶에 진리의 말씀을 분명하게 적용할 수 있으며, 분명한 설교의 개요를 보여주기 때문에 성도들이 설교를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 방법은 설교자가 본문에서 무조건 3대지를 찾아야 하는 어려움으로 인해 설교자의 주관이 들어갈 위험이 크고, 이로 인해 말씀 자체가 배제되고 설교자가 정한 3대지가 크게 부각될 위험이 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오직 역사적, 문법적 해석 방법뿐이다. 역사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성품을 갖고 계시며, 또 그 일하심 가운데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성경은 “참되고 충만한 의미, 즉 여러 의미가 아닌 단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영적이거나 신령하다는 해석을 반드시 배제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본문 자체에서 객관적으로 발견할 수 없는 기괴한 해석들을 만들어 내며, 이렇게 되면 ‘행운의 뽑기’처럼 무작위로 성경을 펼쳐 손가락으로 찍은 후 나에게 오늘 주시는 말씀이라거나,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성경을 잘못 사용하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책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66권의 책들을 단 하나의 책으로 읽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읽기의 기초에는 오직 성경만이 온갖 신령한 진리들을 판단하는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다는 고백이 있다. 성경 학자들과 교회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교회가 바른 길에 서 있는가를 검증했다. 심지어 교회 역사에서 있었던 모든 종교 회의에서 결정한 내용들까지도 항상 검증의 대상이 되었으며, 더욱이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1646년 최초로 발간된 이후로 성경으로부터 검증을 받아왔다. 물론 그렇게 많은 부분이 수정된 것은 아니지만, 신앙고백서가 그 당시의 시대적인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에 적용점에 있어서는 수정이 불가피한 부분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온 교회에서 검증한 내용들이 이렇게 확정되어 우리에게 문서로 만들어지고, 우리에게 유산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받은 신앙고백서도 무오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아직은 깨닫지 못했지만 어느 때든지 성경을 통해 잘못된 부분이 드러난다면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그 부분을 수정하여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고백되도록 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할 때에도 똑같이 이 원리를 사용할 수 있다. 10절에서 말한 바, “신앙상의 모든 논쟁”, “모든 교회 회의의 결정들”은 앞에서 말한 것이요, “사람들의 교훈과 사사로운 영들”의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때 성경이 최고 권위를 갖고 있음을 고백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오직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밝히 적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디도서의 권면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딛 3:9-11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자는 이단과 같은 자가 될 것이다. 이들은 성경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기보다 논쟁하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자이기 때문에, 부패하여 스스로 죄를 짓는 자가 될 뿐이다. 이것이 10절에서 강조하여 고백하는 바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의 삶을 살아갈 때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신앙과 생활의 무오한 규칙이 되는 성경이며, 모든 판단을 성경에 근거하여 해야만 하며, 이 판단을 위하여 성경의 말씀을 전체로 알려고 애를 써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성경 말씀을 해석한다는 자들의 해석을 들을 때 그 해석이 바른 해석인지 잘못된 해석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영이 참된 영인지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조명하시고 지도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 하며, 사적인 감정을 말씀에 넣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오직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일이 계시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을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이토록 귀하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배우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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