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수성문화원에서 계간지로 발간하는 수성문화 2022년 봄호(통권63호)에
저의 원고 하나와 제가 관여한 활동 소식 하나가 실렸네요^^
원고는 조선시대 지금의 '수성구 범어역과 시지원'에 대한 문화칼럼이고..
소식은 '랜선으로 떠나는 수성문화유적탐방'입니다^^
참고하십시오^^
수성문화원 문화칼럼
송은석(수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위원)
e-mail: 3169179@hanmail.net
조선시대 범어역과 시지원을 아시나요?
조선시대 대구 교통·통신의 중심 범어역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네거리는 대구 수성구에 있다. 왕복 10차로 달구벌대로와 왕복 13차로 동대구로가 만나는 범어네거리다. 범어네거리는 역사적으로도 대구 교통·통신의 중심지였다. 범어네거리에 범어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은 교통·통신제도로 ‘역원’과 ‘봉수’를 운영했다. 역원(驛院)은 역과 원을 함께 이르는 말로 행정 중심 교통·통신망이고, 봉수는 군사 통신망이다. 이중 역은 왕명이나 공문서 전달, 공무로 출장 중인 관원에게 역마와 휴식처 제공, 사신 접대, 공물 운송 등을 담당했던 관공서였다.
조선은 역과 관련해 고려시대 역참제도를 계승한 ‘역도(驛道)’ 제도를 시행했다. 역도는 하나의 큰 역 아래 여러 개 작은 역을 묶은 교통체계로, 단순히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하듯) 역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교통행정구역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모두 41개 역도에 531개 역이 있었다. 이중 경상도에 11개 역도가 있었는데, 범어역은 청도 성현역을 중심으로 하는 ‘성현도(省峴道)’에 속한 속역으로 성현도에는 모두 17개 속역이 있었다.
범어역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규모가 커졌다. 성현역지(1871년)에 의하면 범어역은 역촌에 속한 호구수가 212호, 역리 215명, 역노비 307명, 역마 15필로 성현도 속역 중에서 규모가 제일 컸다. 이처럼 범어역이 커진 것은 인근에 경상감영이 있어 내왕하는 이와 공문서 출납이 많았기 때문이다. 역을 이용하는 이는 소지한 마패에 따라 역마를 제공 받았는데 정1품 대군이나 정승은 상등마 한 필과 하등마 여섯 필을, 7품에서 9품관은 중등마 한 필과 하등마 한 필을 제공 받았다.
한 역도를 관장하는 관리는 찰방이다. 찰방은 현감과 같은 종6품이지만 현감보다 서열이 높았으며, 관찰사의 명만 따랐다. 찰방이 머무르는 역은 군현 관아건물과 거의 유사했다. 찰방 집무소이자 숙소인 동헌과 내동헌, 역리 집무소인 작청을 비롯해, 사령청·형방청·장청·서청·창고·문루·마단[馬壇·마신을 모시는 제단, 마당이라고도 한다] 등이 있었다. 일반 역은 역장과 역리 집무소인 역관(驛官), 마구, 마단 등이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누정도 있었다.
조선시대 역원제도는 1895년 폐지됐다. 범어역은 지금의 범어네거리 일원에 있었는데 그 터는 완전히 사라져 찾아볼 수 없다. 다행히 범어역 유물로 ‘입마시정전방금절목비(立馬時情錢防禁節目碑)’가 전하는데 현재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있다. 이 비는 임오년[1762년 혹은 1822년]에 세워진 것으로 1970년 범어네거리 인근 대구여고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비에는 범어역 역마 공급과 관련한 악습을 막기 위한 여러 조치가 사례별로 기록되어 있다.
시지 지명 유래가 된 시지원
역원제도의 또 다른 한 축이었던 ‘원’은 사신 접대나 공무로 출장 중인 관원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관공서였다. 하지만 역에 비해 제도적 장치나 위상이 낮아 조선 후기로 오면서 사설 주막으로 대체됐다. 종종 사찰을 사원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불교가 왕성했던 고려시대 때 원 역할을 사찰에서 많이 한 것에 기원한 표현이다.
원은 기본적으로 공무 여행자를 위한 시설인 탓에 교통 요충지인 역참, 진(津), 도(渡), 고개, 계곡 등에 많이 있었다. 조선시대 수성구에는 ‘시지원(時至院)’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시지원 위치를 “경산현 서쪽 11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고산초등학교가 자리한 시지동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시지라는 지명도 시지원에 유래한 것이다.
조선 후기 영조 조에 편찬된 대구읍지 「역원」에는 역 5개소와 원 7개소가 소개되어 있는데, 책 편찬 당시 존재했던 역원은 범어역·금천역·설화역·유산역 4개소와 오동원 1개소였다. 참고로 범어역은 고려사(1451년)·경국대전(1484년)·여지도서(1757년)에는 ‘凡於驛’으로, 대동지지(1861-1866)에는 ‘凡魚驛’, 성현지(1871년)에는 ‘汎魚驛’으로 표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