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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書契) 문제?
유신정부가 들어섰다. 메이지 천왕(天皇)이 왕정을 복원하면서, 조선에 통보하고 국교와 통상관계를 수립하러 천왕 국서(国書)를 지참한 사신을 조선에 파견했다.
일본국서에는 일본임금을 '황(皇)'이라 표기하고 천황의 명령서를 '칙(勅)'이라 적었다. 병자호란(1637년) 이후 청나라 황제의 신하국가가 된 조선조정으로서는 "皇과 勅은 중국황제만 쓸 수 있다"고 반발, 일본국서 접수를 회피하거나 거부한 사건이 바로 '서계 문제' 다.
1867년 11월9일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대권을 이양하는 '대정봉환'이 이루어져 왕정을 복구시켰다. 이에 따라 1868년 1월15일 일본은 모든 외교권을 신정부가 접수하여 일본주재 각국 외교공관에 통보하고, 다만 조선과의 외교는 종래대로 대마번(대마도) 번주(番主; 지역영주)에서 관할케 한다.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주에게 황실의 권위나 국체(國體)의 위엄을 손상하는 문구를 쓰지 말 것과 조선국왕에 대한 일본천황의 서열상 우위를 명확히 표현할 것을 요구했다.
1868년 6월28일 일본은 조선에 왕정복고 사실을 알리는 사절단을 구성하고, 1868년 12월19일 부산 동래에 일본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때 외교문서 등본을 조선에 전달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집권시절 조선측은 (1) 사절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2)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 을 사용한 점, (3) 황제, "황조"(皇祚), "황상(皇上)" 같은 중국의 천자만 쓸 수 있는 용어를 일본이 사용한 점 등을 문제삼아 왜의 외교문서를 접수조차 않았다.
이후 '서계문제'는 6년간 조선과 일본정부간 외교상 최대현안으로 대두됐다. 나라간 외교사절 파견은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함에도, 방자한 왜국(倭國)은 제멋 대로 작성한 외교문서를 조선에 들이대고는 "받아들이라" 며 억지를 부렸던 셈이다.
일본은 '서계문제'로 조선을 일방적으로 "은둔의 나라"라며 대내외 선전에 열을 올리 는가하면, 조선보다 조금일찍 "서구문명을 받아들였다"는 자만심하나로 조선을 마치 '미개국'인양 홀대하는 소인배 근성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을해왜요의 발단은 결국 일본이 의도적으로 제기한 '서계문제'가 꼬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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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2일; 왜선의 강화도 침입 및 정박
- 의정부(議政府) 보고.
"낯선 배가 내양(內洋; 조선 안쪽바다)에 들어왔는데 그들의 뜻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 무슨 일로 왔고 정박하는지 상세히 문정(問情; 질문으로 정황을 파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리에 밝은 역관(譯官) 몇 사람을 사역원(司譯院)에서 특별히 선정하여 파견하겠습니다"
- 경기감사(京畿監司) 민태호(閔台鎬) 보고.
“통진부사(通津府使)가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덕포(德浦)의 손돌목(孫石項)에서 파수(把守; 경계)하고 있습니다. 경기연안에 와서 정박한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됐으나 지금까지 그 배가 지나온 행적에 대해 보고한 적이 한번도 없으니 이런 변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경계하고 망보는 일이 이처럼 소홀하니 너무나 한심한 노릇입니다. 이런 내용을 우선 삼남(三南)과 양서(兩西)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관문(關文)으로 그 신칙하여 그 경위를 자세히 조사하여서 치문(馳聞)하게 하여 엄하게 감처(勘處)하도록 하고, 이후의 거행은 더욱 엄하게 단속하고 신칙하여 감히 게을리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일체 통지하겠습니다.”
하니, 고종임금이 윤허했다.
- 삼군부(三軍府)에서 이양선 감시 및 방어 건의.
“이양선(異樣船)이 강화도(江華道)와 아주 가까운 곳에 와서 정박하고 있는데 그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연해의 방수를 더욱 엄하게 신칙하여 임기응변하게 하도록 경기감사(京畿監司)와 강화유수(江華留守)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했다.
8월24일; 왜선의 강화도포격
삼군부(三軍府) 가 "경기연해(京畿沿海)에 정박하고 있는 낯선 배가 아직 어느 나라의 어느 지역 사람들인지 알 수 없으나 언제 내양(內洋)을 침범해 들어올지 예측하기 어려운데, 불을 지르고 포를 쏘아대니 더욱 가증스럽습니다. 이 배는 몇 해 전에 약탈하던 이양선과 같은 종류입니다. 항산도(項山島)에 불을 지르고 영종진(永宗鎭)에 포를 쏘아댄 일은 비록 경기와 강화(江華)의 두 군영에서 장본(狀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해당 방영(防營)에서는 동정(動靜)에 대하여 막연하여 장계(狀啓)를 올리지 않았으니, 변정(邊情)으로 헤아려볼 때 이보다 소홀한 것이 없습니다.
경기감영에서 해영과 해읍(該邑)에 파발마(擺撥馬)를 띄워 통지하여 형세를 빨리 치문(馳聞)하게 하소서. 저들의 속내는 허실을 헤아리기 어려운 만큼 한결같이 일전에 행회(行會)했던 방수의 절차에 의거하여 특별히 단속하여 연해의 고을과 진영이 서로 협력하여 돕고 호응해서 임기응변할 수 있도록 다시 경기도신과 강화유수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고 보고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8월25일; 영종진이 왜군의 공격으로 함락당함
영종첨사(永宗僉使) 이민덕(李敏德)의 영종진 피침(被侵)을 보고.
“저들의 배가 연기를 피우고 닻을 올린 후 앞바다로 내려오면서 연이어 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전군(全軍)이 전부(顚仆; 넘어지고 엎어짐)되고 화염이 성안에 가득하여 민가(民家)가 연이어 타면서 공해(公廨; 관가건물)까지 불길이 미쳤기 때문에 전패(殿牌; 임금의 나무패)를 모시고 토성(土城)으로 퇴군하였는데 죽거나 다친 군졸(軍卒)의 숫자를 아직 세지 못하였으며 첨사의 인신(印信)까지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종첨사는 직책이 방어하는 데 있는 것인데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진의 관속들을 이끌고 성을 버리고 피신하였습니다”
8월26일; 패장 영종진 첨사를 파직
- 삼군부(三軍府)에서 영종도가 함락됨을 보고.
“어떤 추악한 놈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외진 성의 잔군(殘軍; 남은 군사)으로는 설령 막아낼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많지도 않은 적도들이 함부로 날뛰도록 놓아두어 관청이 몽땅 불에 타버리고 인신(印信; 군인표식)이 섞여 들어가 녹아버렸는데도 한 놈의 괴수의 목도 베지 못한 채 밖으로 퇴각해버렷다니, 그렇다면 무엇을 방어했다는 말입니까?
사율(師律; 군대규율, 군기)로 헤아려볼 때 놀라운 일입니다. 해당 방어사 이민덕(李敏德)을 우선 파출(罷黜; 파면하여 퇴출)시키고 임무가 교대되는 대로 해부(該府; 해당부서)에서 나문(拿問; 체포하여 문책)하여 정죄(定罪; 형벌을 내림)하게 하소서. 그 후임은 해조(該曹; 해당부처)에서 상격(常格)에 구애되지 말고 각별히 가려서 차임(差任)하게 하여 당일로 말을 주어 내려보내게 하고, 인신도 즉시 만들어 주도록 예조(禮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 경기감사(京畿監司)의 장계(狀啓).
“적선(賊船)이 방금 외양(外洋)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여 실상과 종적을 헤아리기 어려운 만큼 이런 때에 계엄(戒嚴)하는 방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영종을 지켜내지 못한 뒤에 군사를 늘리고 군량을 보내는 방도를 경기 감사가 강화 유수(江華留守)와 함께 상의하고 계획해서 견고하게 수비할 대책을 도모하게 하고 연해(沿海)의 요충지들도 일체 단속하고 방어하도록 신칙하고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 고종임금의 하명.
“영종진(永宗鎭)에서 불에 탄 민가와 죽거나 다친 교졸(校卒)이 아직 숫자가 집계되어 등문(登聞)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장례비용을 넉넉히 지급하고 부상당한 사람에게는 약물을 베풀어 구호하며 안집(安輯)하게 하는 방도를 가장 급선무로 삼도록 할 것과 아울러 본도(本道)에서 특별히 위로하고 보살펴 즉시 집을 지어 주게 하여 조정에서 백성들을 돌보아주는 뜻을 보여주도록 하라.”
8월29일; 어전 대책회의 및 고종임금의 하명
병인년(1866)에 양요(洋擾)를 겪은 뒤에 10년 동안 군오(軍伍; 군사의 수)도 늘리고 성벽도 튼튼히 하고 무기도 수리하고 군량도 비축했으며 기예(技藝)를 단련하고 포상으로 격려하고 권장하는 등 조정에서 아주 주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건대, 천 날을 두고 군사는 양성하는 것은 한때에 쓰려고 해서인데, 그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대체로 통솔자(統率者)로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아무리 몇 만 명의 정예한 군사가 있다 해도 패하지 않으면 무너져 다시는 단 한 명도 과감하게 적을 죽이려는 마음을 갖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연해(沿海)를 방어하는 방도로써는 저들의 배가 방금 물러갔다고 하여 조금도 해이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곤수(梱帥; 육군과 해군병사)와 수령(守令)을 막론하고 오직 그 적임자를 뽑고 재능이 있는 자를 취해야 하니, 제일 급선무로 이보다 더 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처럼 외람되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념(聖念; 임금의 생각)에 깊이 유념하소서.”
고종임금의 하교
"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금법이 이와 같이 해이해졌으니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하되 별도로 규찰하도록 하라고 도신(道臣; 지방관리)과 수신(帥臣; 장수)에게 엄하게 신칙(임금의 하명을 알림)하라.”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 : “이양선이 지금 물러갔지만 저놈들이 물러갔다고 하여 조금도 경계를 늦출 수 없습니다. 앞일을 걱정하고 미리 준비를 갖추는 일은 늦출 수 없으며 안으로 국정을 닦고 밖으로 침략을 막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인천을 방어영으로 승격시키는 것이나 연해의 방어에 대하여 다시 신칙하여 단속하는 것은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것입니다.
안으로 국정을 닦는 요체(要諦; 핵심)로 말하면 재정을 절약하고 규율을 세우며 탐묵(貪墨; 더러운 욕심)을 징계하고 사치를 금지하는 것인데 그 근본은 오직 늘 학문에 힘쓰시는 일입니다. 신이 구태여 먼 옛날의 일을 끌어다가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지금은 초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생겼으니, 성지(聖知; 거룩한 임금의 뜻)를 분발하여 날마다 강연(講筵; 임금이 주관하는 강의)을 열어 시종일관 꾸준하게 공부하시고 잠시도 중단함이 없게 하시어 계속해서 밝히는 성상의 학문이 더욱더 밝게 되고 이르신 광명(光明)의 경지가 더욱더 광명하게 된다면 비단 눈앞의 시급한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북채가 닿자 북소리가 울리고 풀이 바람에 눕듯 꼭 하고자 하는 대로 다스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안으로 국정을 닦고 밖으로 침략을 막는 일도 다 제대로 될 것입니다. 힘쓰시고 힘쓰기 바랍니다."
고종임금의 하교
"안으로 국정을 닦고 밖으로 침략을 막는 일은 참으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학문에 모든 힘을 다하는 것이 곧 국정을 닦는 것이라는 것은 매우 적중한 말인데 어찌 가슴에 새겨두지 않겠는가?"
9월7일; 영종진방어군 선발
의정부(議政府)에서 영종진 방어 군사선발에 관하여 보고.
“영종진(永宗鎭)이 지금 이미 인천 방어영(仁川防禦營)에 이속(移屬)되어 해당 첨사의 직함을 우선 감하(減下)하였습니다. 해문(海門)의 요충지는 잠시도 비워둘 수 없으니 지키는 장수와 군사를 우선 해당 방어영에서 따로 택정(擇定)하여 보내어서 단속하고 감시하게 하여 혹시라도 소홀히 하는 한탄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30일; 영종진 본진설치 건의
의정부(議政府)보고.
“인천부(仁川府)를 승격하여 방어영(防禦營)으로 만들고 영종진(永宗鎭)을 인천에 이속시켰는데, 그 통제를 받고 계책을 마련하는 방도는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상의(商議)해서 등문(登聞)하라고 행회(行會)하였습니다. 도신(道臣)과 수신(守臣)의 장본(狀本)이 방금 도착하였는데, ‘영종진은 해문(海門)의 요충지이니, 본진(本鎭)을 다시 설치하자는 논의는 필시 심사숙고한 결과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해당 첨사(僉使)는 다시 변지과(邊地窠)로 시행하되 각별히 가려 차임(差任)할 것이며, 해우(廨宇) 역시 고쳐 지어야 할 것인데, 옛 고을 터의 형세(形勢)는 밖은 험하고 안은 넓어서 싸우고 지키는 데 믿을 만한 곳입니다. 이곳에 본진을 세우는 것은 다시 논의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물자와 인력을 적절히 헤아려서 의정부에 보고하여 획급(劃給)하게 할 것입니다. 그 외 전곡(錢穀)과 절제하는 각 항목의 조례(條例)는 삼가 별단(別單)을 갖추어 써서 들이도록 하고, 구진(舊鎭)의 성지(城址)를 조망하고 지키는 등의 일은 도신과 수신으로 하여금 특별히 단속하게 함으로써 소홀하다고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관문으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2차 : 부산 초량리의 왜인 난동
1875년(고종임금12년)
음력 10월11일; 부산거주 섬나라 오랑캐들의 오만한 준동
동래부사(東萊府使) 홍우창(洪祐昌)의 등보(謄報; 복사한 보고서).
“훈도(訓導; 지방벼슬) 현석운(玄昔運)과 별차(別差; 하급벼슬) 이준수(李濬秀) 등이 보고한 수본(手本; 손으로 쓴 보고서)에 따르면, 부산 사하면(沙下面) 구초량리(舊草梁里)는 바로 왜관(倭館)과 이웃한 곳인데, 11일에 화륜선(火輪船; 증기 외륜선) 곁꾼(格軍; 일꾼)7명 등이 메추리 사냥을 한다면서 본 마을에 난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갖가지 방법으로 막았더니 사람들을 향하여 칼을 빼어들기까지 하였는데, 얼마간 서로 대치하다가 돌아갔습니다.
10월12일; 섬나라 오랑캐들의 준동에 관한 상세보고
동래부사 홍우창의 등보.
“일본 화륜선 곁꾼 70명 등이 갑자기 왜관 이웃인 구 초량리 마을에 돌입하여 총소리를 울리기도 하고 칼을 빼어 들기도 하면서 여염집에 출입하며 마치 단서를 찾는 것 같았는데 보기에도 황당하였습니다. 전날처럼 막을 수는 없기 때문에 오직 법례(法例)상 옳지 않다고 효유(曉諭; 고함을 질러 경고함)하자 왜인들이 일제히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이틀 동안 벌어진 상황을 가지고 관수왜(館守倭; 일본인거주지역 관리자)에게 따지니, 『곁꾼의 무례한 행동은 마땅히 엄하게 신칙하여야 하나, 격군이 일본 해군성(海軍省)에 소속돼 있으므로 외무성(外務省)에 있는 내가 통제하기는 어렵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산 첨사(釜山僉使) 임백현(林白鉉)이 급히 통보한 것도 훈도와 별차 등이 보고한 수본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교린조약(交隣條約)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이번에 화륜선의 곁꾼들이 아무 제한도 받지 않고 민가에서 행패를 부렸으니 변괴에 해당하며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관수왜가 어물쩍 책임을 남에게 미루는 것은 더욱 지극히 교활합니다. 행패를 부린 왜인 곁꾼들에게 빨리 해당되는 율(律)을 시행하라는 뜻으로 임역(任譯; 통역)을 시켜서 두왜(頭倭; 왜인의 두령)에게 따지게 해야 하며, 왜관 근처에서 파수(把守; 순찰)하는 등의 일을 조심해서 거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공문을 발송하여 신칙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래부에서는 평시의 경계를 소홀히 한 죄를 면할 수 없으니, 훈도와 별차는 엄중히 처벌하는 것으로 묘당(廟堂; 최고 행정부)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신은 과분하게 총괄하는 직무를 맡고 있으므로 황공하여 대죄(待罪; 벌을 내려줄 것을 기다림)하였는데,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回諭; 답변)하라.」는 유지(有旨; 뜻을 전함)를 내리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함부로 뛰쳐나온 경계가 비록 관수(館守; 경비대)가 있는 근처 지역이고, 소란을 피운 무리들이 비록 무지한 곁꾼들이라 하더라도 법규가 본래 엄밀하고 법규를 감히 위반하여 넘지 말아야 하니, 이 사건을 그저 한때의 망동으로만 귀결시켜서는 안 됩니다. 변정(邊政)이 해이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미리 적절하게 단속하고 잘 제압하였더라면 어찌 이처럼 날뛰는 버릇이 생겼겠습니까?
해당 부사는 진실로 논죄(論罪)해야 마땅하지만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참작하여 용서하고, 우선 종중추고(從重推考; 관리의 죄를 엄격히 정함)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진 채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주선하고 사리에 근거하여 저들의 소란을 차단시키는 것이 바로 역관의 책임인데, 입다물고 팔짱끼고 앉아있으니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본부(本府)로 하여금 우선 각별히 징계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특별히 파견한 역관으로 말하면, 달이 가고 계절이 지나도록 한번도 그들을 만나 말하지 않고 제멋대로 왕래하도록 방임하였으니, 아마도 조정의 명령을 집행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니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해당 역관(譯官) 김계운(金繼雲)은 해부(該府; 해당관청)로 하여금 나문(拿問; 체포하여 심문)하여 감죄(勘罪; 마땅히 벌을 받음)하게 할 것이며, 훈도와 별차 등은 엄격히 신칙하여 지난번에 행회(行會; 하명)한 대로 빨리 거행하고 감히 세월만 흘려보내지 말라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16일; 부산 왜인들의 집단 난동으로 조선인 10여명 부상
- 동래부사(東萊府使) 홍우창(洪祐昌)의 등보(謄報).
“오시(午時; 정오)에 화륜선(火輪船)을 타고 온 일본인(日本人) 가운데서 두령(頭領) 1명이 말을 타고 각자 총과 칼을 가진 부하 58명을 거느리고 왜관(倭館)에서 나와, 두 개의 문을 부수고 곧바로 두모포(斗毛浦)와 개운포(開雲浦) 지역으로 향하였습니다. 본진(本鎭)에서 군교(軍校; 군관, 장교)와 백성들을 많이 풀어서 길을 막고 좋게 타일러 전진할 수 없게 하였더니, 그들은 발악하면서 칼을 빼들고 총을 쏘았는데 우리나라 사람 12인(人)이 부상을 입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훈도(訓導)와 별차(別差) 등이 보내온 수본(手本).
“왜관에 머물고 있는 일본인 모전허(牟田許)에게 여러 방법으로 책유(責諭; 책임을 물음)하니, 그들이 일제히 발길을 돌려 신시(申時; 오후3시-5시 사이)에 관소(館所)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이 함부로 뛰쳐나왔을 때 처음에는 사람을 직접 만나 아뢸 것이 있다고 말하더니, 나중에는 유람하러 나왔다고 말하며, 시종 말을 바꾸었으니 그 정상(情狀; 하는 짓)이 놀랍고 괴이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함부로 경계를 넘지 말라는 내용으로 관수(館守)에게 엄하게 책유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금령(禁令; 출입금지법)이 없는 것처럼 여기고 제멋대로 경계를 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만약 이를 금지시키려고 한다면 필시 끝없는 불화가 생길까봐 걱정됩니다. 그렇다고 이전의 잘못에 구애되어 금지하는 법을 조금 느슨하게 한다면 변문(邊門)의 금조(禁條)로는 전혀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니, 그들로 인한 폐해를 생각하면 사소한 걱정이 아닙니다.
동래부사는 평상시에 잘 단속하지 못한 죄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우선 파출(罷黜)하고, 부산 첨사(釜山僉使) 임백현(林白鉉), 두모포 만호(豆毛浦萬戶) 이중현(李重鉉), 개운포 만호(開雲浦萬戶) 유정현(劉鼎鉉) 등은 해당되는 죄를 면하기 어려우며, 훈도와 별차 등에게는 엄한 처벌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이를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그리고 신도 신칙하지 못한 죄가 있으니, 황공한 마음으로 처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대죄(待罪)하지 말라.”하였다.
10월26일; 갈수록 심해지는 섬나라 오랑캐의 불법 행패
부산첨사(釜山僉使) 임백현(林白鉉)의 치보(馳報).
“진하면(鎭下面) 좌일리(左一里)에 화륜선을 타고 온 왜인 85명이 6척의 작은 배에 나눠 타고 본 마을의 포구에 정박하였는데, 무기를 가지지 않은 55명이 뭍에 내리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군교(軍校)를 많이 보내어 이웃 나라와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의리로 타이르고 금조(禁條)가 엄격하다는 내용으로 책유(責諭)하여 전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인 55명은 일제히 발길을 돌려 동시에 육지를 통과하여 관소(館所)로 돌아갔으며 30명은 본래 타고 왔던 작은 배를 나눠 타고 돌아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훈도(訓導) 현석운(玄昔運)과 별차(別差) 이준수(李濬秀) 등이 보고한 수본(手本)에는, 「화륜선(火輪船)을 탄 일본인들이 유람한다고 애매하게 말하면서 거침없이 왕래하고 있으니 지극히 교활하고 간악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감히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일본인 배의 선두(船頭)와 일본 관수(館守)에게 책유(責諭)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각별히 책유하라는 뜻으로 명을 전해 신칙하니, 무기를 가지지 않은 왜인이 배를 타고 왔다가 민폐를 끼치지 않고 각각 돌아갔습니다. 비록 유람을 다닌다고 하지만 그들이 요즘 하는 행동을 궁구해보면 일부러 분쟁의 단서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임역(任譯)을 시켜 엄한 말로 준엄하게 질책하라는 내용으로 부산 첨사에게 공문을 보내 신칙하였습니다. 그러나 훈도와 별차 등의 경우로 말하자면, 왜인이 마을로 난입하고 부산포구에 상륙할 때 일을 주선하여 그들의 소란을 막아야 하는 역관의 본의가 과연 어디에 있었습니까?
모든 행동을 헤아려보면 매우 놀라운 일이므로 진실로 품처(稟處)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나, 이런 때에 잘못을 거론하고 논책하는 것은 변경의 일 처리에 지장이 있으니 우선 죄를 진 채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부산 첨사가 주진(主鎭)의 변경 방어를 엄하게 단속하였더라면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소홀히 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일을 담당한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를 본 영에 잡아다가 곤장으로 죄를 다스린 뒤에 장계(狀啓)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초량리(舊草梁里)의 민가에서 행패를 부린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또 좌일리에 상륙한 일이 있었으니 일본인의 속셈이 갈수록 더욱 교활해집니다. 특별히 방어를 잘하라는 내용으로 수영(水營)과 동래부(東萊府)에 공문을 보내 신칙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래 부사(東萊府使)는 변경을 잘 단속하지 못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고, 훈도와 별차 등은 엄하게 죄를 주어야 합니다. 부산 첨사는 직무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 매우 심하니, 그 죄상을 묘당에서 품처하도록 해야 하는데, 동래부에서 아직까지 그에 대한 보고가 없으므로 방금 조사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신이 평소에 제대로 신칙하지 못한 죄를 면할 수 없으므로 황송한 마음으로 처벌을 기다립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回諭)하라.” 하였다.
11월30일; 부산 왜관의 대책수립
해당 부사와 각 진장을 모두 도신의 장계대로 파직시키고 처벌하여야 하겠지만, 이런 때에 부사와 진장을 바뀌는 것이 염려됩니다. 그러니 우선 처벌을 보류하고 모두 죄명을 지닌 채로 직무를 수행하게 하며, 임역(任譯)들을 논죄하는 것도 용서하고, 이후로는 파수하는 일을 더욱 성실하게 하여 소홀히 하였다는 후회가 없게 하라고 특별히 신칙하여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1876)
▶ 왜의 침공과 행패의 결과물
1875.12 - 1876 (고종임금12-13년)
1875년 12월19일; 강화도조약 체결의 시발
- 동래부사(東萊府使) 홍우창(洪祐昌) 보고.
“일본의 사신배 7척(隻)이 흑암(黑巖) 앞바다에 와서 닿았는데, 4척은 강화도(江華島)를 향하여 떠났고 3척은 아직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관(倭館)을 지키는 일본 사람의 구두 진술서 등본(謄本)을 올려 보냅니다.”
- 왜관을 지키는 일본인 구두진술서 등본 내용.
“일본조정에서 변리대신(辨理大臣)을 조선국에 파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번에 우리 외무경(外務卿)이 이사관(理事官)을 파견하여 미리 알린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특명 전권 변리 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인 육군 중장(陸軍中將) 겸 참의 개척 장관(參議開拓長官)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特命副全權辨理大臣)인 의관(議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대마도(對馬島)에서 강화도로 가서 귀국의 대신(大臣)과 만나서 의논하려고 합니다.
나와서 접견하지 않으면 아마도 곧바로 경성(京城)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다만 때는 바야흐로 몹시 추운 겨울철이고 풍랑으로 길이 막히기 때문에 강화도까지 도달하려면 아마 7, 8일의 기간은 걸려야 할 것입니다. 상기의 내용을 다시 경성(京城)에 전달해 주기를 바랍니다. 명치(明治) 9년 1월 15일. 관장 대리 외무 4등 서기생(館長代理外務四等書記生) 야마노죠 유조(山之城祐長)”
- 의정부(議政府) 보고.
"동래부사 홍우창의 장계등보(狀啓謄報)를 보니, ‘왜관의 수문(水門) 밖에 와서 정박하고 있는 일본 화륜선(火輪船)의 이른바 구두 진술서란 것이 보통 문답과는 다르건만, 지난 달 23일에 봉하여 발송한 장계가 이제야 비로소 올라왔습니다. 이 같은 변경에 대한 보고가 열흘 남짓 늦어진 것은 직무를 수행하는 도리로 따져볼 때 매우 소홀한 행동입니다. 해당 부사에게는 우선 엄하게 추고하는 법을 시행하고, 평상시 잘 신칙하지 못한 해당 도신(道臣)도 역시 엄하게 추고하며, 이제부터는 형편을 신속히 보고하도록 엄하게 신칙해서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26일; 영문도 모르는 조정조정과 지방관리
의정부(議政府) 보고.
“이양선(異樣船)이 경기의 연해에 드나드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으니 사정을 자세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산훈도(釜山訓導)가 마침 올라왔으니 일을 잘 아는 역관 몇사람과 함께 하직인사를 면제하고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876년 1월1일; 조선조정의 답답한 대응
의정부(議政府) 보고.
“이양선(異樣船)이 경기(京畿) 연해에 머무른 지 벌써 며칠째 됩니다. 방금 별정 임역(別定任譯; 별정직 통역관)의 수본(手本)을 보니, ‘그 배와의 거리가 수 300리(里)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맡은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변경의 형편이 얼마나 급합니까? 그런데 이렇게 지체시키는 것은 매우 소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경기 감영(京畿監營)에 행회(行會)하여 곧바로 배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가서 자세히 사유를 물어본 다음에 급히 보고하도록 분부(分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지방관으로 말하자면 아직도 사유를 물어보고 보고를 낸 일이 없으니 무슨 어렵고 조심스러운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응당 논감(論勘)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지만 모두 우선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3일; 고종임금이 대책강구를 촉구
오늘부터 시임대신(時任大臣)과 원임대신(原任大臣), 의정부(議政府)의 당상(堂上)들은 본부(本府)에 모여 충분히
잘 의논하도록 하라.”
- 전 정언(正言) 최병대(崔炳大)의 상소.
“지금 안으로는 교외에서 명화적(明火賊)과 강도들의 약탈이 그치지 않고, 밖으로는 경기(京畿) 연해에 바다를 건너온 이양선(異樣船)이 정박해 있은 지 며칠 됩니다. 신은 조정에서 어떤 좋은 계책을 세우고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하지만, 며칠째 귀를 기울이고 들었어도 장수를 단 한 명이라도 임명하였다거나 군사를 한 명이라도 출발시켜 요해처(要害處)를 지키게 하라는 명령을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혹시 걱정할 것이 못 된다고 결론지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반드시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해서 그러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항간에서는 여론이 떠들썩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릴 방도를 강구하고 외적에 대비할 대책을 미리 토의하고 결정하여 선수를 쳐서 어떤 외적도 따를 수 없는 성과를 거두기 바랍니다.”
1월4일; 일본전함의 강화도 당도
- 강화유수(江華留守) 조병식(趙秉式) 보고.
“일본국 군함 맹춘호(孟春號)가 바다의 수심을 측량하기 위하여 강화부(江華府) 남쪽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함장은 해군 소좌(海軍少佐) 가사마 고오슌(笠間廣盾)이며, 판관(判官) 박제근(朴齊近)과 군관(軍官) 고영주(高永周)가 함께 그 배에 들어가서 정박한 사유를 물어보았습니다.”
- 일본함선을 문정한 사연(問情辭緣) 내용.
“묻기를, ‘지난번에 우리나라의 동래부(東萊府)에서 전해온 보고를 들어보니, 「일본국의 배가 지난 달 27, 28일 사이에 우리 지역으로 향하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귀 선박은 과연 일본국의 배인가? 이 추운 겨울에 멀리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일행은 무사하며, 또 땔나무와 식량이 모자랄 근심은 없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선박은 대일본 제국의 군함 ‘맹춘호’이고, 함장은 해군 소좌 가사마 고오슌이다.
우리나라에서 특명전권 변리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인 구로다기요타카(黑田淸隆)를 파견하여 장차 귀국의 경성(京城)에 갈 것이기 때문에 군함들이 남양만(南陽灣)의 당진포(唐津浦)에 모이기 위하여 먼저 이 배를 보내어 뱃길을 측량하게 한 것이다. 일행은 모두 편안하나, 다만 음료수가 부족할 뿐이다. 땔나무와 식량은 실로 부족할 걱정이 없다. 그러나 후의(厚意)에 감사하게 여긴다.’라고 하였습니다.
묻기를, ‘무슨 일로 여기에 왔으며 언제 돌아갈 것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오늘부터 모레까지 3일 동안 바다를 측량하여 깊은지 얕은지를 안 다음, 다시 당진포로 내려가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이 타고 있는 공사선(公事船) 1척(隻)과 그 밖의 배 4척을 인도하여 올 터이니 이 배까지 합하면 6척이 된다. 무슨 일로 왔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공사선이 와 닿은 뒤에 귀 조정과 토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리들은 다만 공사선을 보호할 뿐이다. 애초에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안다고 해도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묻기를, ‘와서 어디에 정박하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이 배가 돌아가서 보고한 다음에 공적 사무로 온 배가 머무르는 곳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니 어떻게 찍어서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묻기를, ‘지금 응답하는 사람은 무슨 벼슬을 지니고 있으며, 성과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외무성 역관(外務省譯官) 아비루 유사쿠〔阿比留祐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통역하는 일본 사람이 이내 함장의 말이라고 하면서 그가 거처하는 나무로 만든 방에 들어오면 감사의 뜻을 표시하려고 한다고 하기에 거절하기 어려워서 따라 들어가 자리를 정하고 앉아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어 그들이 묻기를, ‘여기서 강화(江華)까지는 몇 리(里)나 되며, 강화에서 경성(京城)까지는 몇 리나 되는가?’라고 하니, 우리가 대답하기를, ‘강화까지는 100여 리이고, 강화에서 경성까지는 200여 리가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함장이 통역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이렇게 수고로이 인사를 차려주니 대단히 고맙다. 당신네가 돌아간 다음 육지에 올라가 사의를 표하겠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음료수를 길어가는 것쯤은 좋으나 답례차 육지에 오르는 것은 규례를 살펴볼 때 매우 타당치 않다. 다시는 이를 괘념치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 배가 비록 이곳에 왔지만 이곳은 우리나라 영해(領海)이다. 우리나라의 법에 외국 선박이 영해에 마구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더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이것도 공사선이 올라온 후에 어떻게 하겠는지에 달려 있으니 과연 우리들이 대답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야채와 닭이나 생선을 좀 구했으면 하는데 현재 귀국의 상평전(常平錢)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으로 값을 치르겠다.’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을 친절히 대우하는 뜻에서 그런 사소한 물건을 사고팔고 할 것까지야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공짜로 주겠다는데 이것은 전례인가? 또 귀국 조령(朝令)으로 인해 그러는 것인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조령이 있을 겨를이나 있었는가? 또 어찌 전례가 있겠는가? 먼 지방 사람들을 친절히 대우하는 뜻에서 값을 가지고 따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니, 그가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 밖에는 별로 물을 말이 없어서 이에 작별하고 우리 배로 돌아왔습니다.”
1월5일; 일본 함선의 '수호조약' 생떼
- 의정부의 건의.
“접견 대관(接見大官)은 방금 계품(啓稟)하여 윤허 받았습니다만, 부관(副官)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부총관(副總管) 윤자승(尹滋承)으로 하여금 함께 내려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삼군부(三軍府)에서 건의.
“이양선(異樣船)이 경기(京畿) 연해에 와서 머무르고 있는 이 때에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어영청 중군(御營廳中軍) 양주태(梁柱台)와 금위영 중군(禁衛營中軍) 신숙(申橚)이 각각 훈련 도감(訓練都監)의 보군(步軍) 1초(哨),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의 보군 각각 1초와 표하군(標下軍) 30명(名)을 거느리고, 행주항(幸州項)과 염창항(鹽倉項)을 나누어 지키게 하면서 형편에 따라 지원하게 할 것이며, 군량은 필요한 만큼 운반할 것을 호조(戶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9일; 강화도의 일본함선 행방불명
- 접견대관(接見大官) 보고,
“그들의 배에 대한 소식을 계속 탐지해 보니, 팔미도(八尾島)의 영해에 정박하고 있는데 아직 아무 동정도 없습니다. 그대로 기다리고 앉아서 날만 보낼 수는 없기 때문에 신들은 지금 길을 떠나 인천부(仁川府)로 향하려고 합니다. 접견하는 절차는 날짜를 약속해 놓고 거행하려고 생각합니다.”
- 접견대관의 일본군함 문정(問情) 보고.
“오시(午時; 정오)에 김포 통진부(通津府)에 도착하여 곧 해당 부사(府使) 이규원(李奎遠)의 보고를 받아보니, 「그들의 큰 배 5척(隻)이 일제히 올라와서 항산도(項山島) 앞바다에 정박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배가 벌써 거슬러 올라오고 있으므로 신들이 출발할 수 없기 때문에 잠시 본부(本府)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의 배에 대한 소식을 계속 탐지하였습니다.
1월11일; 일본군함 추가문정
모리야마 시게루가 말하기를, 『귀국에서 이미 파견한 대관이 강화에 와서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인천부(仁川府) 지방관에게서 들었으며, 접견하는 절차와 날짜는 우리가 내일 강화성(江華城)으로 들어가 유수(留守)와 만나서 면담한 다음 의정하겠으니, 이것을 강화 유수(江華留守)에게 가서 알리고 군사와 백성들을 타일러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접견 절차와 날짜는 우리 대관이 바로 의정할 것이니 강화부(江華府)에 가서 의논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또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문제는 우리 조정의 명령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논의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시 말도 건네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저들의 배에서 내려가라고 독촉하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우리 배로 돌아왔습니다. 신들은 강화부로 급히 갑니다.“
1월13일; 일본함선의 수호조약 '협박공갈'
- 강화유수(江華留守) 조병식(趙秉式)의 장계.
“그들의 배에 우리 측의 의사를 통지하려고 훈도(訓導) 현석운(玄昔運)과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을 인천(仁川)땅으로 보냈더니, 그들의 회답 보고에 의하면, 그들의 배는 이미 연기를 뿜으면서 올라갔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었고, 정박하고 있는 항산도(項山島)로 뒤쫓아 가서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를 만나보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일전에 인천의 지방관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귀국(貴國)의 대관(大官)이 강화(江華)에 와서 머무르고 있다고 하기에 내일 뭍에 올라서 성(城)에 들어와 유수(留守)를 만나보고 대관(大官)과 만날 의절(儀節)을 의정(議定)하겠다. 귀국의 군사나 백성들이 만약 난폭한 행동을 하면 우리도 해당한 도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측에서 애초에 그들에게 먼저 손을 대지 않고 그들이 뭍으로 올라오도록 내버려둔다면 신이 접견하는 것을 어느 겨를에 다시 논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형편에 이르러 방어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 승문원(承文院)의 건의.
“방금 중국(中國)의 예부(禮部)에서 온 자문(咨文)을 보니, ‘일본(日本) 사신이 북경(北京)에 와서 우리나라와 수호(修好)를 맺으려 한다고 하기에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급히 공문을 보내어 알린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사신의 배가 지금 이미 도착하였으니, 조금 기다려서 상의하여 타결하고 전말을 자세히 적어 회자(回咨)하겠다는 내용으로 자문(咨文)을 지어 파발에 부쳐 만부(灣府)로 내려 보내어 북경(北京)에 전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14일; 일본군 만행을 대비하다
- 삼군부(三軍府)에서 건의.
“방비를 사전에 잘해야 할 이 때에 군사 관계의 정사를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도(各道)에서 뽑아 올린 포수들은 총융사(總戎使) 조희복(趙羲復)이 거느리고 연습에만 전념하게 하며, 삼영(三營)의 포수들도 각기 해영(該營)에서 다 같이 훈련을 시키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 의정부(議政府)에서 건의.
“방금 접견 대관(接見大官)과 부관(副官)의 연명 계사(聯名啓辭)를 보니, ‘강화부(江華府)는 중요한 지대이므로 성 안에 들어와 접견하는 것은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나, 수호(修好)를 칭탁하고 있어 또한 완강히 거절하기도 어려우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의 초기(草記)에서 편리한 대로 하라고 말한 만큼 지금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1월15일; 한강 양화진에 1천여명의 조선군 화승총부대 긴급배치
총융청(總戎廳)에서 보고.
“삼가 삼군부(三軍府)의 초기(草記)에 대한 비지(批旨)에 따라 본청(本廳)의 장관(將官) 10원(員), 장교(將校) 29원, 표하군(標下軍) 307명(名), 아병(牙兵) 1초(哨) 125명, 창수 아병(槍手牙兵) 50명, 광주 별파진(廣州別破陣) 50명, 초관(哨官) 1인, 차관(差官) 1인, 잡색군(雜色軍) 9명, 복마(卜馬) 3필(匹), 각도(各道)에서 뽑아 올린 포수(砲手) 842명을 총융사(總戎使) 조희복(趙羲復)이 거느리고 양화진(楊花津)을 방어하기 위하여 지금 막 떠났습니다.”
1월18일; 한강, 수도권방어 대책논의
삼군부(三軍府)에서 건의.
“염창항(鹽倉項) 방어에 대해서는 이미 계품(啓稟)하여 여의도(汝矣島)에 옮겨 주둔하였습니다. 지금 듣자니 용접(容接)하기가 불편하다고 하는데, 가까운 영등포(永登浦)에 이정(移定)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1월17일; 일본측의 일방적 '강화도조약' 통보
접견대관(接見大官)의 일본측 전권대신 접견과정 개록(開錄).
일본국(日本國) 관리 : 특명전권변리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 구로다기요타카(黑田淸隆)
부대신(副大臣)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조약비준 장소 : 강화도 군영(軍營) 안 연무당(鍊武堂)
<조선 대관(大官)과 일본 전권대신간 문답구어(問答句語) 기록내용>
일본 전권대신 : 두 나라에서 각각 대신(大臣)을 파견한 것은 곧 큰 일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고, 또 이전의 좋은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300년 간의 오랜 좋은 관계를 지금 다시 회복해서 신의를 보이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참으로 두 나라 간의 훌륭한 일이므로 매우 감격스럽고도 감격스럽습니다. 이번 사신의 임무는 바로 그 전에 히로쓰 히로노부(廣津弘信)가 별함(別函)에서 언급한 문제입니다. 이웃 나라를 사귀는 도리로써 어찌하여 화목하게 지내지 않고 이렇듯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까?
일본과 사귀어 온 이래 언제나 늘 격식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투는 것이 그만 오랜 전례로 되어버렸습니다. 당신네가 이미 이전의 격식을 어긴 상황에서 변경을 책임진 신하는 그저 종전의 관례만 지키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소한 말썽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이 마당에서 무슨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 배 운양함(雲楊艦)이 작년에 우장(牛莊)으로 가는 길에 귀국(貴國)의 영해를 지나가는데, 귀국 사람들이 포격을 하였으니 이웃 나라를 사귀는 정의(情誼)가 있는 것입니까?
조선 대관 : 남의 나라 경내에 들어갈 때 금지 사항을 물어봐야 한다는 것은 《예기(禮記)》에도 씌어 있는데, 작년 가을에 왔던 배는 애초에 어느 나라 배가 무슨 일로 간다는 것을 먼저 통지도 하지 않고 곧바로 방어 구역으로 들어왔으니, 변경을 지키는 군사들이 포를 쏜 것도 부득이 한 일입니다.
일본 전권대신 : 운양함에 있는 세 개의 돛에는 다 국기를 달아서 우리나라의 배라는 것을 표시하는데 어째서 알지 못하였다고 말합니까?
조선 대관 : 그때 배에 달았던 깃발은 바로 누런색 깃발이었으므로 다른 나라의 배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귀국의 깃발이었다고 하더라도 방어하는 군사는 혹 모를 수도 있습니다.
일본 전권대신 : 일본 깃발표시는 무슨 색이라는 것을 벌써 알렸는데 무엇 때문에 연해의 각지에 관문(關文)으로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조선 대관 : 여러가지 문제를 토의 중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미처 알려주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영종진(永宗鎭)의 군사 주둔지를 몽땅 태워버리고 군물(軍物)까지 약탈해간 것은 아마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의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득실에 대해서는 아마 양쪽이 양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먼저 동래(東萊)로부터 사신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손님에 대한 예의로 접대하는 것이니 또한 양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표류해 온 배에 대해서까지 먼 지방 사람을 잘 대우해주는 뜻으로 정성껏 대우하여 주는데 어찌 귀국의 군함을 마구 쏘겠습니까?
일본 전권대신 : 이번에 우리들의 사명에 대하여 두 나라의 대신이 직접 만나서 토의 결정하려 하는데 일의 가부(可否)를 귀 대신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까?
조선 대관 : 귀 대신은 봉명(奉命)하고 먼 지역에 나왔으므로 보고하고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전권(全權)이라는 직책을 가진 것이지만, 우리나라로 말하면 국내에서 전권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는데, 하물며 수도 부근의 연해인 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나는 그저 접견하러 왔으니 제기되는 일을 보고하여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일본 전권대신 : 지난번 히로쓰 히로노부가 우리나라에서 전권대신을 파견한다는 일을 보고한 것이 있고, 귀 대신이 이제 접견하러 왔는데, 어째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겠습니까?
조선 대관 : 조선에는 본래 전권이라는 직책이 없고, 또 어떤 사건이 있을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미리 품정(稟定)하여 올 수 있겠습니까?
일본 전권대신 : 사신도 만나주지 않고 서계(書契)도 받아주지 않고 6, 7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지났는데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조선 대관 : 지난 정묘년(1867)에 중국에서 보내온 신문지(新聞紙)를 보니 귀국 사람 야도 마사요시(八戶順叔)가 보낸 신문지상에, 조선 국왕이 5년마다 반드시 에도(江戶)에 가서 대군(大君)을 배알하고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이 옛 규례였는데, 조선 국왕이 오랫동안 이 규례를 폐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동원하여 그 죄를 추궁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조선조정과 민간에서는 모두 귀국에서 우리나라를 몹시 무고(誣告)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또 《만국공보(萬國公報)》 가운데는 공물(貢物)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귀국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고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공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제환공(齊恒公)이 주(周) 나라 왕실을 위하여 초(楚) 나라의 왕을 꾸짖던 말이므로 비유하여 인용한 뜻도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실 서계를 막아버린 첫째가는 근본 이유입니다. 이번에 관계를 좋게 하자는 이 마당에서 지나간 일을 들추어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일본 전권대신 : 조선에서 이러한 곡절이 있었던 것을 일본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것도 떠도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이웃 간의 두터운 의리를 어떻게 이것 때문에 끊어버릴 수 있습니까? 설사 이런 황당한 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정부에서 귀국 정부에 통보한 일이 없는 이상 어떻게 믿고 이렇게 의절(義絶)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리어 귀국을 위해서 개탄할 일입니다.
조선 대관 : 신문은 일본사람이 간행하여 각국(各國)에 돌린 것인데 어떻게 황당한 것으로 돌려버릴 수 있겠습니까?
일본 전권대신 : 이른바 신문이라는 것은 비록 자기 나라 안의 고을에서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간혹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이 신문만을 믿는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 없을 것이니 그저 한 번 웃고 넘어가면 그만일 뿐입니다.
조선 대관 : 조선조정과 민간에서는 실상 의심을 품어온 지 오래됩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웃 나라를 사귀는 도리는 성신예경(誠信禮敬) 이 네 글자를 중요하게 삼고 있으니 피차간에 서로 예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두 나라에 모두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일본 전권대신 : 그 당시 사실여부를 우리나라에 물어왔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회답하였습니다. 무슨 지금까지 의혹을 품을 것이 있겠습니까?
조선 대관 : 이제부터는 설령 의심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서로 오가면서 의혹을 풀면 될 것입니다.
일본 전권대신 : 전날에 서로 대치하였던 일과 연전에 새 서계를 받아주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 다 뉘우칩니까?
조선 대관 : 한 마디로 말해서 전날의 사건은 얼음이 녹듯 완전히 풀렸는데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일본 전권대신 : 득실(得失)을 따지지 말고 덮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은 실로 부당한 말입니다. 설령 친구간의 약속이라도 저버릴 수 없는데 하물며 두 나라 사이에 좋게 지내는 우의(友誼)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조선 대관 : 7, 8년 동안 관계를 끊어버린 이유는 이미 남김없이 다 드러났습니다.
일본 전권대신 : 이제 운양함이 우리 배라는 것을 알았으니 옳고 그른 것이 어느 쪽에 있으며, 그 때에 포격을 한 변경 군사들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조선 대관 : 이것은 알면서 고의적으로 포를 사격한 것과는 다릅니다.
일본 전권대신 :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두 나라 간에 조약을 체결해서 영구히 변치 않게 된 다음에야 좋은 관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두 대신이 면담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수원(隨員)들을 시켜 서로 통지할 것입니다.
조선 대관 : 책임진 관리가 있는데 무슨 필요가 있어서 수원들을 시켜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겠습니까?
일본 전권대신 : 나의 수원들은 각기 봉명(奉命)한 직무가 있으며, 모두 공무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귀 수원들도 공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로써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선 대관 : 나의 수원들은 봉명한 것이 아니라 사신인 내가 임의로 데려온 사람들입니다.
일본 전권대신 : 그렇다면 나의 수원이 귀국의 부관(副官)과 서로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선 대관 : 서로 만나기에는 서로의 지위가 맞지 않지만, 만약 오갈 일이 있으면 내왕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일본 전권대신 : 무방할 것입니다.
조선 대관 : 간단하게 다과(茶果)를 준비하였으니 좀 들어보십시오.
일본 전권대신 : 호의는 감사하나 그만두는 것이 대단히 좋겠습니다.
조선 대관 : 이미 준비해 놓은 것이니 되도록 드십시오.
일본 전권대신 : 이렇게까지 권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습니다.
1월18일; 조선 접견대관과 일본 전권대신간 후속회견, 수호조약 요구
<문답구어(問答句語)>
일본 전권대신 : 오늘은 어제 끝맺지 못한 말을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야도 마사요시(八戶順叔)의 일과 신문 등의 일에 대해서 귀국(貴國)의 신하와 백성들치고 분개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이로 인해 300년 동안 이어온 이웃 간의 우의(友誼)를 끊어버리게 되었다고 말하였는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처분입니다. 신문지는 애초에 우리 정부에서 귀국 정부와 교환한 것도 아닌데 무엇에 근거하여 믿는단 말입니까?
무진년(1868) 이후 우리의 나라 제도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이웃 나라에 알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신을 시켜 공문을 가지고 동래부(東萊府)에 가서 만나줄 것을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요시오카 히로타케(吉岡弘毅)·히로쓰 히로노부(廣津弘信)도 동래부에 갔다가 역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연전에 외무성(外務省)에서 새로 서계(書契)를 만들어가지고 올 것을 허락한 일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만나주지 않고 있으니 이전의 좋은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이 마당에서 어찌 변명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조선 대관 : 신문 일은 어제 이미 이야기하였으므로 오늘 다시 끄집어낼 필요가 없으며, 그 동안의 정형을 낱낱이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종전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 하는 오늘 그저 화목하고 사이좋게 하면 그만입니다.
일본 전권대신 : 이번에 수호(修好)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미 잘 알았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여러 차례 보냈으나 접견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이유를 귀국에 물어보기 위해 이번과 같은 사명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국에서 우리 사신을 배척한 것 때문에 우리 조정에서는 논의가 분분하였으며, 심지어는 대신(大臣) 4원(員)이 교체되거나 파면되었고, 한 명은 죽음을 당하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군·육군과 백성 등 수만 명이 히젠(肥前) 주(州)와 사가(佐賀) 현(縣) 등지에 모여 반드시 조선에게 무력행사를 하자고 한 것이 바로 재작년 일입니다. 그때 내무경(內務卿) 오쿠보(大久保)를 시켜 사가현에 가서 군사와 백성들을 무마시켰는데 이런 호의를 알아주기나 합니까? 귀 대신은 지나간 일을 가지고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들의 사신(使臣)의 일도 돌아가서 보고할 말이 없게 될 것입니다. 뉘우쳤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딱 잘라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조선 대관 : 일본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분하게 생각하면서도 무력행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매우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단지 접견하러 온 것이니 이에 대하여 어떻게 확답할 수 있겠습니까? 「뉘우친다」는 두 글자는 어제도 말하였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우격다짐으로 물을 문제가 아닙니다.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 무진년(1868)에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서계를 바치려고 한 일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까?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동래부(東萊府)가 교환한 문건은 무진년부터 경오년(1870) 12월까지 한 두건이 아니었으며, 또 내가 요시오카 히로타케·히로쓰 히로노부와 함께 신미년(1871)에 동래부를 거쳐 서계를 바치려고 하다가 또 바치지 못하고, 부본(副本)을 베껴서 전 훈도(訓導)에게 준 것이 귀 정부에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부득이 구두로 진술한 문건은 두고 돌아왔습니다. 귀국에서는 단지 종전의 규례를 따르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종전의 제도를 크게 고치고 대마도주(對馬島主)도 혁파하여 이때부터는 더 근거하여 탐문할 길이 없는 까닭에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花房)와 함께 왔다가 또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표류하여 온 백성이 있는데도 돌보아주지 않았으며, 설문(設門)을 만들어 놓고 파수를 보게 한다는 전령(傳令)도 또한 마음에 거슬리는 어구가 있었습니다만, 우리들은 오히려 이웃나라와 사귀는 종전의 의리를 잊지 않고 왜관(倭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갑술년(1874) 가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계가 단절된 이유를 알고, 사신의 직무가 순조롭게 이행되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새 훈도가 내려온 다음 연전에 가지고 온 서계를 즉시 바치는 문제, 외무성(外務省)에서 새로 서계를 만들어가지고 오는 문제, 귀국 사신을 동경(東京)으로 초빙하는 문제, 이 3건 가운데서 1건을 지적하여 처분해 달라는 내용으로 훈도에게 주어서 조정에 삼가 품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회답에서는 두 번째 문제, 즉 새로운 서계를 만들어가지고 오는 문제로 결정지었다고 하기 때문에 과연 외무성에서 새로운 서계를 만들어가지고 왔지만, 아직까지 만나주지 않아서 헛되이 객관(客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실로 좋은 대책이 없던 차에 특별히 관리를 임명해서 내려 보낸다고 했으나, 또 의복 문제를 가지고 의견이 대립하여 서로 만나보지 못하고 부득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가 오늘에 와서야 사리를 밝히는 조치가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 대관 : 대략 알만 합니다.
일본 전권대신 : 꼭 조선조정의 확실한 대답을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직무인 만큼, 바라건대 조정에 전달하여 우리들이 돌아가서 보고할 말이 있게 하여준다면 아주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조선 대관 : 조정에 알리기는 하겠습니다.
일본 전권대신 : 이번에 귀국과 종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실로 두 나라의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신의와 친목을 강구하는 데서 특별히 상의해서 결정할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책자를 꺼내 보이며) 초록(抄錄)한 13개 조목의 조약을 모름지기 상세히 열람하고 귀 대신이 직접 조정에 나가 임금을 뵙고 품처(稟處)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조선 대관 : 조약이라니, 그게 무슨 일입니까?
일본 전권대신 : 조선의 지방에 관(館)을 열고 함께 통상하자는 것입니다.
조선 대관 : 지난 300년 동안 어느 때라도 통상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오늘 갑자기 이런 것을 가지고 따로 요청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바입니다.
일본 전권대신 : 지금 세계 각국에서 다 통행(通行; 관례로 행해짐)되고 있는 일이며, 일본에서도 또한 각국에 관을 이미 많이 열어놓고 있습니다.
조선 대관 : 우리나라는 바다 동쪽에 치우쳐 있어 갈대만 무성하고 척박한 땅으로써 단 한 곳도 물품이 집결되는 곳이 없습니다. 토산물로 말하더라도 곡식과 무명뿐이며 금·은·진주·옥 같은 보물이나 능라(綾羅)나 금수(錦繡) 같은 사치품은 전혀 없습니다. 나라의 풍속이 검박하여 옛 습관에 푹 빠져 있고 새로운 법령을 귀찮아하니 설사 조정에서 강제로 명령을 내려 실행하도록 하더라도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물품을 서로 무역하여 곳곳으로 분주하게 나돌게 된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법을 어겨 반드시 이 일로 하여 번잡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영원토록 좋은 관계를 맺으려던 계획이 다른 때에 가서는 화목을 깨뜨리는 계기로 쉽게 뒤바뀌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귀국에는 별로 이로울 것이 없고, 우리나라에는 손해가 클 것입니다. 뒷날의 이해관계를 생각해보면 이전과 같이 수백 년 동안 이미 실행해오던 동래부 왜관(倭館)에서 교역하는 것만 못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전권대신 : 두 나라의 관계가 그간에 막혔던 것은 바로 조례(條例)가 분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약을 체결해서 영원히 변치 않는 장정(章程)으로 삼지 않을 수 없으니, 그렇게 된다면 두 나라 사이에는 다시 교류가 끊어질 일은 없게 될 것이며 또 이것은 모두 없앨 수 없는 만국의 공법(公法)입니다.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조선 대관 : 지금 관을 열어 통상하자는 이 같은 논의는 조선으로서는 아직 있어본 적이 없는 일이며, 우리 백성들은 아직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니,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을 어떻게 백성들의 의향을 들어보지 않고 승낙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 정부라 하더라도 즉시 자의로 승인하기는 어렵겠는데 하물며 파견되어 나온 사신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일본 전권대신 : 귀 대신이 전권을 행사할 수 없다면 대사를 토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무래도 늦어지게 될 것입니다. 귀국의 정권을 잡은 대신이 와서 만나본 이후에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 대관 : (얼굴을 붉히며) 나 역시 대관인데, 이미 대신을 만나고 있으면서 어째서 다시 다른 대신을 청하여 와서 만나자는 것입니까? 결코 들어줄 만한 일도, 시행할 만한 일도 아니니,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일본 전권대신 : 이 일을 누구와 의논하여 결정해야겠습니까?
조선 대관 : 이 일은 조정에 보고한 다음에 가부를 회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 전권대신 : 그렇다면 두 분이 직접 올라가서 임금을 뵙고 보고하고 토의해서 회답해주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조선 대관 : 이미 명령을 받고 내려왔으며 마음대로 자리를 떠나기도 어려우니 문건으로 교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일본 전권대신 : “문건이 오가는 동안에 날짜가 걸릴 것인데, 우리들의 형편이 실로 난감하니 며칠 안으로 회답해줄 수는 없겠습니까?
조선 대관 : 문건이 오고가고 의논도 하노라면 며칠 날짜가 걸릴 것입니다.
일본 전권대신 : 우리들이 명령을 받고 나라를 떠나온 지도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또 배 한 척이 오로지 우리가 복명(復命)할 것을 재촉하기 위하여 왔으니 한시가 급합니다. 만일 또다시 늦어진다면 어떻게 여기서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속히 일을 도모하여 우리들을 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조선 대관 : 이런 취지로 문건을 보내겠습니다.
1월20일; 고종임금이 일본수교 문제로 대신들과 논의(召見).
- 참석자는 시임대신(時任大臣)과 원임대신(原任大臣) 및 의정부(議政府) 당상(堂上).
고종임금 : 일본과 300년 동안이나 좋은 관계를 맺어왔는데, 지금 서계(書契)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여러 날 서로 버티고 있으니 정말 모를 일이다. 의정부에서 미리 의논하여 적당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영부사(領府事) 이유원(李裕元) : 신들이 날마다 의정부에 모여서 의논한 지 오래지만, 지금 저 사람들의 정상을 보면 귀순(歸順; 순순히 물러남)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학(金炳學) : 저 사람들이 좋은 관계를 맺으러 왔다고 말은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 아니라 불화를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될지 아직 몰라, 신들은 지금 날마다 모여서 의논하고 있습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 : 적국의 외환(外患)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만, 조정이 옳게 처리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굳건하다면 저절로 귀순하게 될 것입니다.
판중추부사 박규수(朴珪壽) : 일본이 좋은 관계를 맺자고 하면서도 병선(兵船)을 끌고 오니 그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삼천리강토가 안으로는 정사를 잘하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도를 다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해지는 성과를 얻는다면 어찌 감히 함부로 수도 부근에 와서 엿보며 마음대로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분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 : 신들이 등문(登聞)한 장계(狀啓)를 보니 저 사람들의 속셈은 매우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날마다 의정부에 모여서 처리할 방도를 의논해야 하겠습니다.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 : 저들의 정상이 과연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내려간 대관(大官)이 여러 날 그들을 만나고 있으니 그의 보고를 기다려서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고종임금의 하교 : 오늘 시임대신과 원임 대신들을 입시(入侍)하게 한 것이 바로 이 일 때문이다. 여러 대신들은 충분히 의논하고 적당한 대책을 잘 세우도록 하라. 지금 심도(沁都)에서 온 장계(狀啓)를 보면, 저 사람들이 조약 13건이 있다고 하였는데 아직 보고가 오지 않았다. 아직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첫째 관(館)을 개설하여 통상하자는 것은 이미 동래부(東萊府) 왜관(倭館)에서 설치하고 시장을 열고 있는데 무엇을 또다시 설치하겠는가?
우의정 김병국 : 지금의 우환을 보면 어느 때가 지금과 같았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사전에 대처하는 방도는 오직 재정 뿐입니다. 그러나 공납(公納)은 기일을 지체시키면서 이럭저럭 날을 보내고, 중앙과 지방의 저축은 도처에서 고갈되었으나 위급한 상황에 따르는 대책을 세울 길이 없습니다. 공적이건 사적이건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실로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항산(恒産)도 없고 항심(恒心)도 없는 자들이 이런 일이 있는 때를 타서 작게는 도적질을 하고 크게는 강도질을 하여 수도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소란하여 형세는 위급해지고,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모두 곤경에 빠져 엎치락뒤치락하니 이것은 다 기강이 서지 않아 두려울 게 없기 때문입니다. 무릇 기강이란 저절로 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우는 사람이 있어야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쁜 사람은 내쫓고 좋은 사람을 등용하여 조정의 기강을 세우며, 표창과 책벌을 정확히 적용하여 온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것은 전하가 한 번 변경하기에 달려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힘쓰소서. 힘쓰소서.
고종임금 하교 : 여러 가지 예비책은 묘당(廟堂)에서 잘 의논하여 조처하기에 달렸지만, 지금 이처럼 힘쓸 것을 당부하니 어찌 감히 명심하지 않겠는가?
- 전 지평(持平) 이학년(李學年)이 강화도방어 상소와 고종임금의 묵살.
"지금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위급한 형세가 눈앞에 닥쳤고, 이양선(異樣船)은 연해에 가득합니다. 심도(沁都; 강화도)는 사람의 목구멍과 같은 곳인데, 거리낌 없이 들어와도 지키는 군사며 훈련된 병졸들은 감히 화살 한 발 쏘지 못하고 포 한 방 쏘지 못하니 철벽의 요충지가 저것들의 소굴로 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은 혁연히 성을 내시어 장수를 임명하고 군사를 뽑아 며칠 안으로 토벌하소서." 하니, 고종임금은 "묘당(廟堂)에서 조처가 있을 것이니 네가 이와 같이 번거롭게 굴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1월21일; 강화도조약 등본보고, 일본의 노골적 공갈협박
<문답구어(問答句語) 기록>
일본 전권대신 : 일본정부에서 우리 사신을 빨리 돌아오라고 보낸 화륜선(火輪船)이 제물진(濟物津)에 와 닿았습니다. 돌아갈 시일이 한시가 급하니 어제 말하던 서계에 대한 문제와 조약 문제를 속히 품달(稟達)함으로써 혹시라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조선 대관 : 모두 품달하였으나, 조정의 처분을 알 수 없습니다. 통상 문제와 같은 것은 온 조정의 의견을 충분히 참작하고, 온 나라의 의향을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그 가부(可否)를 의논하는 것을 어떻게 쉽사리 며칠 사이에 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 전권대신 : 조약 책자의 등본은 귀 대신이 훈도(訓導)에게 분부한 것입니까?
조선 대관 : 원본은 감히 마음대로 받을 수 없으므로 갑작스럽게 훈도를 시켜 베껴오게 하였습니다. 귀 대신이 함부로 베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에 근거하여 조정에 보고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 전권대신 : 귀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곧 역관(譯官)을 시켜 베껴가서 귀 조정에서 이 조약을 토의한 후 만약 승인하여 시행한다면 즉시 되돌아갈 것이지만, 만일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번의 사명은 끝장나는 것이니 다시 만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조선 대관 : 임금에게 보고는 하겠으나, 조정의 처분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겠습니까?
일본 전권대신 : 오늘 또 말하는 것은 이전의 좋은 관계를 서로 보존하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이 문제가 옳게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두 나라의 불행이니, 혹시 후회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만일 화목하던 관계가 나빠지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 군사들이 상륙할 염려가 있을 것이니, 이것을 미리 헤아려 이전의 좋은 관계가 변하지 말 것을 바라는 바입니다.
조선 대관 : 어제 이미 다 말하였는데 어째서 또다시 제기합니까? 이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자는 마당에 하필 군사를 발동하겠다는 말을 갑자기 남에게 하니 참으로 성실한 예의가 아니며 또 남과 잘 사귀자는 도리도 아닙니다.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아마도 잘 알 것입니다. 뉘우친다(悔悟)는 두 글자의 사과를 여러 차례 추궁하는 것도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난번에 들으니 귀 대신의 배를 뒤따라 온 일본군사들이 장차 인천(仁川)과 부평(富坪) 등지에 상륙하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비록 그 말을 다 믿지는 않더라도 이미 말한 사람이 있으니 이런 말을 어떻게 경솔하게 입 밖에 낼 수 있습니까? 연해의 황폐한 마을에는 원래 군사를 주둔시킬 수 없으며, 백성들이 만약 군사를 본다면 놀라서 흩어져 버릴 근심이 있는데, 더구나 남의 나라에 들어오면서 그 나라의 금령(禁令)은 물어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마음대로 상륙한다면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방어지역 근처에서 피차 뜻밖의 변란이 있게 된다면 어찌 걱정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귀하의 배에 특별히 신칙하여 변란을 일으킬 우려가 없게 하기 바랍니다.
일본 전권대신 : 전번에 있었던 말들은 이미 귀 대신의 의견을 들었기 때문에 명하여 금지시켰으니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1월23일; 최익현의 반일 상소
- 전 참판(參判) 최익현(崔益鉉)의 일본수교에 대한 상소.
“신은 적들의 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의정부(議政府)에서 응당 확정적인 의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으나 아직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항간에는 그들의 속셈이 화친을 요구하는 데 있을 것이라고 소문이 떠돌아 입 가진 사람은 모두 분격하며 온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이 소문이 시행된다면 전하의 일은 잘못되고 말 것입니다.
화친이 상대편의 구걸에서 나오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능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그 화친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겁나서 화친을 요구한다면 지금 당장은 좀 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이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그들의 물건은 모두 지나치게 사치한 것과 괴상한 노리갯감들이지만, 우리의 물건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것들이므로 통상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나라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핑계대지만 실제로는 서양 도적들이니, 화친이 일단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이 전파되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뭍에 올라와 왕래하고 집을 짓고 살게 된다면 재물과 부녀들을 제 마음대로 취할 것이니,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이런 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병자년(1636)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끌어들여 말하기를, ‘병자년에 화친을 한 뒤로 두 나라가 서로 좋게 지내게 되어 오늘까지 관계가 반석 같은데, 지금은 왜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합니다. 저들은 재물과 여자만 알고 사람의 도리라고는 전혀 모르는데, 그들과 화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뒷날에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크게 쓰기를, ‘아무 해 아무 달에 서양 사람이 조선에 들어와 아무 곳에서 동맹을 맺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순조(純祖) 때에는 서양 사람이 몰래 들어왔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고, 우리 헌종(憲宗)도 들어와서 염탐하는 자들을 모두 주륙하였으니 이것이 전하의 가법(家法)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기어들어 온 왜인들은 서양 옷을 입고 서양 포를 쏘며 서양 배를 타고 다니니, 이는 왜인이나 서양 사람이나 한 가지라는 것의 뚜렷한 증거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속겠습니까? 감히 고려 때의 우탁(禹倬)과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고사를 본받아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렸으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큰 계책을 세우고, 조정 관리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짐승을 끌어들여 사람을 해치려고 꾀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으로 처단하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도끼로 신에게 죽음을 내리신다면 조정의 큰 은혜로 여기겠습니다.
▲ 조선말, 대쪽 같았던 '항일선비' 최익현(崔益鉉, 1833 -1907)
- 최익현의 상소문과 관련 고종임금이 체포를 하명.
“최익현(崔益鉉)은 지금 대계(臺啓)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중에 있으면서 나라와 관련되는 문제를 말한다고 하면서 어려움 없이 상소를 올렸으며, 도끼를 가지고 와서 임금이 행차하는 길옆에 엎드렸다니 참으로 놀랍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나수(拿囚; 체포하여 옥에 가둠)하라.”
- 전 사간(司諫) 장호근(張皓根)이 조약과 관련해 상소.
“추악한 무리들이 심도(沁都)에 불쑥 들어왔는데, 상륙한 자들의 수가 400명에 이릅니다. 몇 백 년 동안 요새였던 땅에 문을 열고 도적을 들여 놓았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이 약속하여 결정하자고 하는 13건의 조약은 더욱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 위로는 임금과 아래로는 신하들이 오직 의리로써 죽기를 맹세하고 배척하여야 할 것입니다.
조정의 관리들은 날마다 의정부(議政府)에 모이지만, 시행할 만한 대책을 세웠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혹시 의견을 올렸다가는 도리어 파출(罷黜)되기 때문에 충심으로 간언(諫言)할 길이 막히고, 근본 대책이 아직 세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재 급선무는 군영(軍營)의 제도를 엄격히 단속하고, 특별히 인재를 가려 뽑아서 요충지를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양선(異樣船)을 소탕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어찌하여 먼저 건드리지 말라(不先犯)는 세 글자를 가지고 세월만 보내는 좋은 방책으로 삼는 것입니까? 올라온 포군들도 분개하여 하나같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려 하니 모든 사람들의 심정은 의논하지 않아도 같습니다. 속히 애통한 명령을 내려 군사와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城)에 의지하여 한 번 싸운다면 위험한 고비가 도리어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하니 고종임금은 “원소(原疏)를 환급(還給)하라.”하교.
1월24일; 조선조정의 수호통상조약 논의시작
- 의정부에서 접견대관을 통해 서술책자(敍述冊子)를 일본 전권대신에게 보냄.
<서술책자(敍述冊子) 개요>
“두 나라는 화목하게 지낸 지 300년이나 됩니다. 정분은 형제와 같으며 옛 제도를 준수하면서 각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서로 다툰 적이 없었고, 서로 사신을 보내는 범절은 한계를 넘지 않았으며, 위로하거나 축하하는 인사는 서로 폐단이 없게 하였습니다. 가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오는 것이 있었고 주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마도(對馬島)에서 서신을 받아 사정을 전달하였으며 동래 왜관(東萊倭館)의 시장에서는 경계를 넘어 다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길이 보존하는 길을 말한다면 바로 예의와 의리, 성의와 신뢰 이 네 가지뿐인데 어찌 근래에 들어 서계(書契) 문제를 갖고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고 멀리하는 단서가 되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으니 두 나라의 서계는 원래 신중하고 엄격하여 한 글자라도 격식에 맞지 않으면 꼬치꼬치 따져 밝혀내는 것이 두 나라의 옛 규례였습니다.
동래 수신(東萊守臣)과 임역(任譯)이 감히 선뜻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바로 이 규례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일찍이 정묘년(1867) 봄에 중국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전해져 왔는데 총리 각국 사무 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서 천진(天津)과 상해(上海)의 통상 대신(通商大臣)이 보낸 신문(新聞)의 내용을 들면서 아뢰기를, ‘일본 객관(客館)의 야도 마사요시〔八戶順叔〕라는 사람이 보내온 신문 원고에 이르기를, 「근래에 일본국이 실제로 화륜군함 80척을 가지고 있는데 조선을 치려는 뜻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이 5년에 한 번씩 꼭 강호(江湖)에 와서 대군(大君)을 배알(拜謁)하고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은 옛 규례인데 조선 왕이 규례를 폐지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따지려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지금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치려는 의도가 있으니, 그것은 조선에서 5년에 한 번씩 공물을 바치게 되어 있으나 지금 나라가 견고하다는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아 이 규례가 오랫동안 폐지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야도 마사요시가 귀국(貴國) 사람이기 때문에 귀국의 일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거짓말을 만들어내서 ‘배알하고 조공한다.’는 욕된 말로써 서로 관계를 맺고 공경하는 나라를 무함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군사를 일으켜 가서 치겠다는 말을 우호를 맺어 불화가 없는 나라 사이에 써서야 되겠습니까? 이와 같은 말을 국내외에 퍼뜨린 것은 과연 무슨 의도입니까?
우리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어찌 의아해하지 않겠으며 어찌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진년(1868)부터 경오년(1870)까지 서계를 선뜻 접수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규식에 장애가 있어서였을 뿐 아니라 진실로 근거없는 말이 의심을 일으키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의와 의리, 성의와 신뢰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령(傳令)을 강요한 동래 수신은 변방의 먼 곳으로 귀양 보냈으며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한 훈도(訓導)는 효수(梟首)하였습니다. 그리고 귀국의 외무성(外務省)에서 새로운 서계를 만들어가지고 온 뒤에도 예복과 정문(正門) 출입 문제로 오랫동안 의견이 대립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에서 동래 수신에게 소소한 의식 절차에 구애되지 말고 즉시 받아서 조정에 바치라고 관문(關文)을 띄워 신칙하였습니다.
때마침 외무성의 관리가 돌아갔으나 미처 관청 사무를 보기도 전에 도리어 귀 대신이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귀 대신과 우리나라 사신이 서로 문답한 것을 들으니 우리나라가 귀국의 사신을 배척하였다고 말한다는데 서계가 지연된 이유를 위에서 다 이야기하였습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사신을 배척할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두 나라 사이에 서로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 것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부끄럽고 통탄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조정의 의견이 분분하여 파면과 사형이 계속되고 군사와 백성들이 무력행사를 하려고 하면 관리를 파견하여 무마하였으니 귀국의 후의(厚意)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천만 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동래 수신을 귀양 보냈고 훈도도 효수하여 우리의 도리를 다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귀국에서 야도 마사요시가 속이고 욕된 일을 한 데 대하여 어떻게 처벌하였는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귀 대신은 우리나라 사신과 접견하는 데서 말씨가 성실하고 온순하며 일의 처리를 명백히 하여서 두 나라 사이의 의심을 하루아침에 모두 풀리게 하였으며, 대인 군자(大人君子)로서 평화에 전심하고 나라를 위하여 신중하는 것을 보여 주었기에 존경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서계나 예물 같은 것을 다시 의좋게 교환하는 것은 응당 300년간의 옛 규례에 근거해서 하되 큰 문제는 귀국 정부와 우리나라 정부에서 하고 작은 문제는 귀국 외무성과 우리나라의 예조에서 동등하게 주고받음으로써 영원토록 우호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조약을 새로 정할 것이 있으면 두 나라의 이해에 각기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두 나라 사이에 다 편리하도록 강구할 것이며 만일 한쪽에만 이롭고 다른 쪽에는 해롭다거나 한쪽에만 통하고 다른 쪽에는 막히게 된다면 사리로 보아 응당 고려할 점이 있을 것이니, 원컨대 인서(仁恕)를 가지고 추론하여 충분히 의논하기 바랍니다.
조선국 의정부에서 일본국 판리 대신에게 보냅니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85년 병자년(1876) 정월(正月)”
- 고종임금,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최익현을 추국하도록 연명차자(聯名箚子).
“최익현(崔益鉉)이 감히 해괴망측한 말을 방자하게 입에 올렸으니 국청(鞫廳)을 열어 실정을 캐내소서.”하니 고종임금은 “최익현(崔益鉉)의 패악한 상소는 임금을 속이고 협박하는 말이 아닌 것이 없다. 더구나 그의 이름이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는데 이와 같이 무엄하단 말인가? 이번에 연명으로 아뢴 것은 진실로 대간(臺諫)의 체례(體禮)에 맞으며, 충분(忠憤)을 볼 수 있다. 응당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교.
1월26일; 고종임금의 잇단 '반일상소자 처벌하명'
- 고종임금이 상소를 올린 장호근을 귀양보내도록 하교.
“장호근(張皓根)이 상소하여 묘당(廟堂)을 비난한 것이 이미 무엄한 짓이거니와 마지막 부분의 말은 더욱 고약한 것으로 위협 공갈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다. 이 무리들의 심보와 태도에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장호근(張皓根)에게 도배(島配)하는 법을 시행하라.”
- 홍문관(弘文館), 시임대신(時任大臣)과 원임대신(原任大臣) 등에서 잇달아 최익현의 죄상을 연명차자(聯名箚子)하니 고종임금은 “최익현(崔益鉉)의 패악한 상소는 비단 경들을 모함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을 속이고 핍박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경들이 통탄하여 일제히 성토하는 것은 충분(忠憤)에서 나온 것이다. 응당 처분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하교.
1월27일; 고종임금, 최익현을 끝내 유배보냄
지적하여 규탄하는 것도 모자라서 공동(恐動)하기까지 하였고, 공동하는 것도 모자라서 헐뜯어 욕하였으니, 그 가운데서 두세 마디의 말은 어찌 신하로서 감히 할 말이며 차마 할 말이겠는가? 가늠할 수 없는 행동과 음흉하고 간사한 속셈에 대해서는 마땅히 전형(典刑)으로 단죄해야 하겠지만 참작해 볼 것이 있으니 최익현은 특별히 한 가닥 남은 목숨을 용서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시철조망으로 둘러처진 곳에 감금)하고 삼배도(三倍道)로 당일에 압송하라.”
1월30일; 강화도수호조약 준비완료
의정부(議政府)에서 비준문서(比準文書)와 수호조규(守護條規) 책자를 준비완료.
2월3일; 강화도조약 비준 보고
조선측 접견대관(接見大官)의 강화도수호조규 보고.
“3일 진시(辰時)에 판중추부사 신헌(申櫶)과 부총관 윤자승(尹滋承)이 일본국 특명전권변리 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특명 부전권변리 대신(特命副全權辨理大臣)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수호조관(修好條款) 2책(冊)에 상호간에 서명 날인하고 이어서 영하(營下)의 연무당(鍊武堂)에서 연회를 차렸으며 수원(隨員)도 참여하였습니다.
연회가 끝나고 오시(午時)에 그들 일행(一行)이 출발하여 배로 돌아갔으며 미야모토 쇼이치(宮本小一) 이하 및 남은 병사 70여 명(名)은 잠시 이전에 주둔하고 있던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수호조규(修好條規)의 한문(漢文)과 일본문(日本文) 역본(譯本) 각각 1책, 비준(比準)한 원본 1책, 일본 전권 대신(日本全權大臣)이 의안(擬案)하여 비준한 것 1책, 조규 원본 1책, 일본 사신이 준 편지 1본(本), 미야모토 쇼이치(宮本小一)의 수록(手錄) 1본을 의정부(議政府)에 올립니다.”
2월4일; 일본사신이 조선조정에 보낸 선물목록 - 게이틀링 포(Gatling gun)도 포함됐다.
- 강화유수(江華留守) 조병식(趙秉式)이 일본사신의 선물목록을 장계(狀啓)로 보고.
“일본 사신이 바친 물건이 접견 대관(接見大官) 신헌(申櫶)으로부터 본영(本營)에 전해져 왔기에 우선 영고(營庫)에 봉류(封留)해 두고 물품 목록은 아래에 개록합니다. 회선포(回旋砲) 1문(門), 탄약(彈藥) 2,000발(發), 전차(前車) 1량(輛), 육연단총(六連短銃) 1정(挺), 탄약 100발, 칠연총(七連銃) 2정, 탄약 200발, 비추(緋縐) 2필(疋), 추(縐) 2필, 수진장금시진표(袖珍裝金時辰表) 1개, 금련(金鍊) 1조(條), 청우침(晴雨鍼) 1개(箇), 자침(磁鍼) 1개입니다.”
- 의정부(議政府)에서 일본전권대신에게 하사품을 건의.
“일본국 전권대신(日本國全權大臣)이 이미 진헌(進獻)한 물종(物種)이 있으니, 증급(贈給)하는 절차가 없을 수 없습니다. 즉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장만하여 내려 보내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 조선측 접견대관이 일본 전권대신에게 하사품을 보냄.
“대내(大內)에서 일본 전권 대신(日本全權大臣)에게 사급(賜給)한 사서(四書) 각각 1질(袟), 시전지(詩箋紙) 5권(卷), 색필(色筆) 100병(柄), 채묵(彩墨) 50정(丁), 백세저(白細苧) 10필(疋), 백면주(白綿紬) 10필을 훈도(訓導) 현석운(玄昔運)으로 하여금 전송(傳送)하게 하였습니다.”
2월5일; 일본함대 철수로 조선군 계엄해제
삼군부(三軍府)에서 각처의 계엄해제를 건의.
“일본 배가 지금 이미 물러갔습니다. 양화진(楊花津)·행주항(幸州港)·영등포(永登浦)를 방수(防守)하던 장수와 군사들을 모두 표신(標信) 없이 해산하며 각 고을의 방수도 일체 해산하도록 경기 감영(京畿監營)과 강화영(江華營)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6일; 고종임금과 접견대관(大官) 신헌(申櫶)의 면담내용.
- 접견대관(大官) 신헌(申櫶)과 부관(副官) 윤자승(尹滋承)을 고종임금이 소견(召見).
고종임금 : “이번에는 수고가 많았다.”
신헌 : “왕사(王事)가 편안치 못한데 신들이 어떻게 감히 노고를 말하겠습니까?”
고종임금 : “문답 장계(問答狀啓)를 보니 과연 말을 잘하였다.”
신헌 : “다행히 전하의 위엄에 의지하고 묘당의 계책에 힘입어 전하의 명을 욕되게 하는 것은 면하였습니다.”
고종임금 : “이번의 노고를 내가 알고 있다.”
신헌 : “따뜻한 말씀이 이러하시니 황송하고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고종임금 : “장계(狀啓)한 것 외에도 또 접견하여 수작(酬酌)한 것 가운데서 아뢸 만한 것이 있는가? 자세히 아뢰도록 하라.”
신헌 :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은 천하의 각국(各國)에서 무력을 사용하고 있는 때인데 귀국(貴國)은 산과 강이 험해 싸우고 지키기에 유리한 점이 있지만 군비(軍備)가 매우 허술합니다.’라면서 부국강병(富國强兵)하는 방도에 대해 누누이 말하였습니다.”
고종임금 : “그 말은 교린(交隣)하는 성심에서 나온 것 같다. 우리나라는 군사 수효가 매우 부족하다.”
신헌 : “신은 지금 어영청(御營廳)을 맡고 있는데 정병(正兵)이 많지 못합니다. 금위영(禁衛營)도 마찬가지이며 훈련 도감(訓練都監)은 비록 좀 크기는 하지만 정병을 낸다면 역시 얼마 되지 않고 외방(外方)은 또 절제(節制)하는 군사가 없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군사를 쓴다면 비록 지혜 있는 사람일지라도 어떻게 장수 노릇을 하겠습니까? 병력을 떨치지 못하는 것을 이미 오랑캐들이 아는데, 신이 무장(武將)으로서 이미 걱정스러운 것을 보고도 사실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면 신의 죄는 만 번죽어도 마땅할 것입니다.
지금 천하의 대세를 보건대 각 국에서 병력을 사용하여, 전후로 수모를 받은 것도 벌써 여러 차례이거니와, 병력이 이러한 것이 만일 각 국에 전파되기라도 하면 그들의 멸시가 앞으로 어떠할는지 모르겠으니, 신은 정말 몹시 걱정됩니다. 병지(兵志)에, ‘공격하기엔 부족하나 지키기에는 여유가 있다.(攻則不足 守則有餘)’라고 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자기 나라를 가지고 자기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등(滕) 나라나 설(辥) 나라 같은 작은 나라들도 한편으로는 큰 나라를 섬기면서 교린하고 또 한편으로는 방어를 갖추고 나라를 지켜 전국(戰國) 시대에서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삼천리 강토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지켜낼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 이것은 이른바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성지(聖志)를 분발하여 빨리 변란에 대비하도록 처분을 내리신다면 군국(軍國)의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이미 늙었고 또 어두워서 군사를 거느리는 반열에 있기에는 부족하나, 몸소 눈으로 보아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감히 이처럼 두려움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고종임금 : “경의 말이 매우 마땅하다.”
2월9일; 강화도조약 내용을 전국관리에게 알림
- 의정부(議政府)에서 일본과 조약에 관해 전국의 관리에게 공문발송.
발송처 : 팔도(八道)의 감사(監司)와 사도(四都)의 유수(留守),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번에 일본 사신이 강화도(江華島)에 온 것은 사실 이웃 나라와 다시 우호를 가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그들과 우리가 의논하여 정한 비준 책자(比準冊子)와 조규 책자(條規冊子) 및 그들의 수록 책자(手錄冊子) 각 1건(件)을 내려 보내니 비치해두고 증거 문건으로 삼도록 하라. 이제부터 그들의 배가 지나간다든가 혹은 와서 정박하게 되면 깃발 표식을 자세히 살피고 만약 흰 바탕에 붉은 것으로 가운데 표시하였으면 분명 일본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통행 증서가 있어 항해 공증(航海公證)으로 삼으니 비록 화륜선(火輪船)인 경우에도 꼭 깃발의 표식을 기준으로 삼아 절대로 경솔하게 범하지 말며 서로 좋게 지내는 도리에 힘쓸 것에 대하여 연해(沿海)의 각읍(各邑)에 관문을 띄워 관할 지역에 통지하며 세 가지 책자를 다 베껴서 공포함으로써 모두 잘 알게 하라.”
윤(閏) 5월19일; 영종진 패장 이민덕의 관직파면, 귀향조치
고종임금은 을해왜요때 일본군함 운요호가 영종진에 닥칠 때 성을 버리고 부하를 데리고 달아난 전 영종진방어사 이민덕(李敏德)을 방축향리(放逐鄕里)하라고 하명. 방축향리는 유배형벌보다 가벼운 처벌로 관직을 파면하고 자신의 고향에 내려 보내는 것이다.
훗날 '강화도조약' 을 보도한 조선신보(朝鮮新報) 기사전문
* '조선신보'는 1881년 일본인이 부산에서 창간했던 신문이다.
일본의 사기와 협박에 굴복한 조선왕조.
사쓰마반(薩摩藩; 일본 규슈남부의 다이묘)출신의 구로다(黑田)를 특명대사로, 조슈반(長州藩; 현재의 일본 야마구치현 지역 다이묘)출신 이노우에(井上)를 부대사로 임명해 ‘친선사절단’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들은 강화도일대에서 벌어졌던 ‘운요호사건’에 관해 조선정부와 담판을 요구했다. 조선왕조는 전현직 대신회의를 소집해 대응책을 논의했고 회의는 전쟁을 불사하는 주전파와 화의를 주장하는 측이 충돌했고 결국은 민비집단(閔妃集団)이 주장한 투항(投降; 항복)주의로 결론났다.
구로다(黑田) 특명대사는 조선정부와의 담판에서 적반하장격으로 조선측에 ‘배상’을 요구했다. 배상금액이 너무 커서 조선정부가 깜짝 놀라자 구로다는 “조약을 체결한다면 배상금은 없던일로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결과 1876년 2월27일, 강화도에서 (1) 일본측의 치외법권 인정 (2) 일본측의 무관세(無關稅) 인정 (3) 일본화폐(紙幣)의 유통인정이라는 불평등조약의 ‘조일수교조규(朝日修交条規; 江華島条約)이 체결됐다.
일본은 일본화폐로 조선의 금괴(金塊)등을 여기저기서 사모아 그걸로 군비를 확장했다. 사기와 협박에 굴복한 이씨왕조(李王朝)도 잘한 짓은 아니지만, 일본측의 행위는 모략적인 강도행위였다. 운요호사건과 강화도조약은 침략세력에 약간이라도 양보하면, 그들은 우리의 뼈까지 빨아먹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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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을해왜요(乙亥倭擾)와 강화화승총 - 조선측 기록. 끝
* 본문내용은 강화 화승총동호인회의 소중한 지적재산입니다.
사전허락없는 무단전재 및 임의복사를 엄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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