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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모동(顧母洞), 모자(母子)의 애틋한 정이 서려 있는 마을
개관
고모동은 수성구 고산2동의 법정동으로 고모 마을과 팔현 마을이 중심 마을이다. 대덕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낮은 산줄기는 두리봉, 모봉, 형제봉을 지나 금호강에 이른다. 이 산줄기는 1980년대까지 경산과 대구의 경계였으며, 교통로를 따라 당고개, 담티, 고모령, 팔현 같은 고개가 있다. 모봉과 형제봉 사이의 넓고 평탄한 골짜기 동쪽 끝에 고모 마을, 북동쪽 끝 금호강 쪽에 팔현 마을이 있다.
고모동에 있는 고모역은 경부선의 작은 역이었다. 6.25 한국전쟁 때는 병원차가 항상 고모역에 대기하고 있다가 열차로 이송된 부상병을 대구와 김해에 있는 국군병원으로 후송했다고 한다.16) 고모역은 폐역 이후 현재 ‘고모역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팔현 마을 동쪽 금호강변 들판은 1970년대까지 사과밭이 즐비했으나 지금은 원예작물이 일부 재배되고 있으며, 금호강변에는 수성패밀리파크가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과 운동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6)수성구청 홈페이지, 수성구 지명 유래.
지명 유래
고모동은 조선 태조 때 옥산인(玉山人)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1345-1412) 선생이 처음 ‘고모촌’으로 이름했다고 전한다. 고모동은 지형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보인다. 고모동 서쪽에 모봉, 형봉, 제봉 세 봉우리가 있다. 산봉우리 모습이 마치 어머니(모봉)가 자식(형봉과 제봉)을 잊지 못해 돌아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되돌아볼 고(顧)’ 자를 써 고모(顧母)라 불렀다고 한다.17)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산군 경계 및 명칭을 변경할 때 고모동과 팔현동을 합쳐 고모동으로 했다.
고모동은 경산현읍지(1785)에는 고모촌(古毛村)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호구총수」(1789)에는 고모촌(顧母村),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는 고모(古毛)로 기록되어 있다. 고모(古毛)는 우리말 깊숙한 곳을 의미하는 ‘곰·굼’의 차자 표기로 마을이 금호강변 깊숙한 골짜기에 있어 붙인 이름으로도 볼 수 있다. 고모(顧母)는 고모(古毛)보다 뜻이 좋은 글자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고모동 자연부락으로는 고모, 팔현이 있으며, 자연 지명으로 성짓골, 큰갓골, 자맛골, 끝침이골, 돌무덤 등이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 60-70호 규모의 고모 마을과 15호 규모의 팔현 마을이 보인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고모동에 대해 “마을 서쪽에 이어지는 산맥 중에 모봉·형봉·제봉 3봉이 있는바, 그 앉아있는 모습이 어미(모봉)가 자식(형봉·제봉)을 잊지 못해 돌아보고 있는 형상이므로 고모동이라고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7) 수성구립 고산도서관, 고산, 비밀의 성산(城山), 2022, 49쪽. 지리연구소, 지명조사철, 1959..
18) 조선총독부경상북도고사 제24호(1911.9.21).
고모령(顧母嶺)
가수 현인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유명한 고모령은 모봉과 형제봉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본래 고모령은 고모동과 고모동 북서쪽에 있는 만촌동을 잇는 고개로 형봉과 제봉 사이에 있다. 지금은 2군사령부19) 영내에 있어 통행이 불가능하며, 고모령 만촌동 쪽 끝자락인 2군사령부 영내 골프장 한쪽에 ‘고모령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만촌동은 2군사령부에 수용돼 사라진 옛 마을로 현재 2군사령부 골프장 일대에 있었던 마을이다. 1970년대 지도를 참고하면 이 마을은 제봉과 만촌지 사이에 있었으며, 건물 동수가 70동쯤 된다. 2군사령부 영내에 있는 만촌지는 지금도 골프장 북쪽에 옛 모습을 유지하며 남아 있다. 만촌자전거경기장 남쪽 약 250m 지점이다.
19) 1968년 12월 3일 현 주둔지인 수성구 만촌동에 주둔.
한편 현재 고모령 관련해 잘못 알려진 내용이 있다. 많은 시민이 ‘팔현 고개’를 고모령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91년 팔현 고개와 이어지는 망우당공원 영남제일관 인근에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세워지면서부터였다. 현재 2군사령부 영내에 있는 고모령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글은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이 쓰고, 제27대 군사령관 대장 박세환(朴世煥)이 세웠다.
고모령
해방 직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던 현인 씨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은 그 진원지가 대구직할시 수성구 고모동이며, 고모령 정상은 현 위치로부터 남방 200m 지점으로 고증되었다. 군 사령부에서는 ‘일 더 잘하는 해’를 맞이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님을 향한 영원한 사모곡으로 애창되기를 바라며, 고모령 중턱에 유래탑을 세우다. 1994. 4. 1 (이하 비 내리는 고모령 가사)
고모령과 모봉·형봉·제봉에는 많은 전설이 전한다. 대부분 전설은 모자(母子) 간의 애틋한 정을 담고 있다. 전설의 자세한 내용은 뒤에 나오는 ‘모봉·형제봉’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모자가 등장하지 않고 실제로 ‘고모’가 등장하는 고모령 전설 하나를 소개한다. 옛날 한 여인이 친정 조카를 양육했다. 세월이 흘러 조카는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길을 떠났다. 고모는 서울로 떠난 조카가 급제해 돌아오기를 이 고개에서 기다리다가 지쳐 죽었다.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온 조카가 죽은 고모를 그리워했다고 해서 고모령이라 불렀다는 전설이다.20) 참고로 광여도(1737)에는 고모령이 소장현(小墻峴)21)으로 표기되어 있다.
20) 지리연구소, 지명조사철, 1959.
21)고모령 동쪽 큰 고개였던 담티 고개는 옛 문헌에 장현(檣峴)·대장현(大墻峴)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모역·고모역복합문화공간22)
고모역복합문화공간(고모로 208)은 폐역된 고모역사를 리모델링한 공간이다. 옛 고모역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11월 1일 고모령 인근으로 경부선 철로가 부설되면서 세워진 역으로 1931년 6월 5일 보통역으로 승격됐다. 주민들 증언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아직 고모역 일대가 정비되지 않아 주변에 언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차가 정비를 위해 정차하거나, 느린 속도로 언덕을 통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래서 강제 징용을 당한 젊은이들을 태운 군용열차가 이 고개를 넘을 때면, ‘혹시라도 열차에 아들이 타고 있지 않을까’ 열차 안을 살피는 어머니들과 열차를 구경하기 위해 몰린 지역민들로 일대가 북적였다는 이야기가 지역에 전해온다.
고모역은 1949년 11월 12일 화재로 역사가 소실되어 한동안 소화물차 임시 역사로 사용됐다. 1957년 9월 29일 현재의 역사가 준공됐고, 통근열차와 완행열차 등이 정차했다. 이후 고모역은 1970년대까지 지역의 교통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아침 출근 열차는 늘 만원이었는데 통학하는 학생들, 통근하는 직장인·군인들, 그리고 가까운 시장에 과일과 농산물을 판매하려는 주민들이 많았다. 주민들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고모역 입구에는 국수, 막걸리, 얼음과자 등을 파는 포장마차들로 복잡하고 활기가 넘쳤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2004년 7월 15일 여객 취급이 중지되고, 2006년 12월 1일에는 보통역에서 역원이 배치되지 않는 간이역이 되었다가 같은 해 폐역이 됐다. 이후 2018년 10월 수성구청에서 고모역의 역사적 의미를 재발견하고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폐역된 고모역사를 고모역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했다. 이곳에는 고모역의 역사와 변천, 대중가요 ‘비 내리는 고모령’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 등이 여러 콘텐츠로 가공되어 시민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22) 수성구청,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무형문화유산, 2021, 209-212쪽.
귀샘·앞샘·육방골목샘·큰골목샘·작은골목샘
귀샘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다. 앞샘은 마을 앞에 있는 샘이다. 기타 육방골샘, 큰골목샘, 작은골목샘 등은 모두 마을 골목에서 유래한 샘 이름이다.
높은배미
고모 마을 북쪽 산자락에 있는 들로 마을보다 높은 곳에 있어 높은배미라고 부른다. 높은배미는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다.
당딩이골
팔현 마을 북서쪽 경부선 너머에 있는 팔현지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다.
돌무덤·동무덤
돌무덤(조산)은 돌을 쌓아놓은 것으로 서낭당의 한 유형이다. 고모동 돌무덤에는 ‘돌무덤 전설’이 전한다. 한 여인이 혼인을 했는데 남편이 집안일은 신경 쓰지 않고 공부만 했다. 비가 내려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이 빗물에 쓸려 내려가도 신경 쓰지 않고 공부만 했다. 결국 여인은 도망가 다른 사람과 혼인했다. 하지만 새 남편 역시 집안 살림은 신경 쓰지 않고 공부만 했다. 그러던 중 전 남편이 과거에 급제했다. 여인은 전 남편에게 돌아와 몸종이라도 좋으니 다시 같이 살자며 애원했다. 그때 전 남편은 여인에게 물이 담긴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오라고 했다. 여인이 물을 길러오자 전 남편은 물을 바닥에 쏟아버리며, “한번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인은 쏟아진 물을 두 손으로 주워 담다가 힘이 다해 죽었다. 그 후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이 허망하게 죽은 여인을 비웃으며 여인이 죽은 자리에 돌을 던진 것이 쌓여 커다란 돌무덤이 됐다는 전설이다. 예전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이 돌무덤에 애기를 점지해달라고 빌기도 했다. 옛 지도에 ‘동무덤’이란 지명이 보이는데 돌무덤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모봉(母峰), 형봉(兄峰)(형제봉), 제봉(弟峰)
대구지명유래총람(2009)에 의하면 형제봉은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산으로 숫형제봉과 암형제봉으로 각각 구분된다. 형제봉은 『대동지지』(1860년대)에 처음 나타난다. 『교남지』(1937)에는 ‘형제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형제봉은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으로도 유명했다. 수성구청에서 발간한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무형문화유산(2021)에 의하면 팔현 마을, 고모 마을 주민들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제단은 형봉과 제봉 사이에 위치한 ‘범굴’이라는 커다란 바위 아래 샘이었다. 기우제 과정에서 봉우리에 암장(暗葬·남몰래 쓴 묘)된 묘가 발견되면 주민들이 다 함께 파묘(破墓)했다고 한다.
모봉과 형제봉은 인근 고모령과 관련해 여러 전설이 전한다. 대부분 모자(母子)의 애틋한 정을 담은 전설이다. 제일 유명한 전설은 ‘힘센 오누이 전설’ 또는 ‘장군 남매 전설’이다. 아득한 옛날 이곳에 힘센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오누이의 힘은 나라에서 당해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특히 누이동생은 여자임에도 힘이 오빠와 맞먹을 정도여서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다. 이를 안 오빠는 심술이 나 여동생과 산 쌓기 시합을 했다. 자신이 동생보다 힘이 더 세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심상이었다. 오누이는 열심히 흙과 바위를 옮겨 산을 쌓기 시작했다. 오빠는 옷섶으로 흙과 돌을 날랐고 누이동생은 치마폭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자 시합이 끝났다. 결과는 치마폭으로 돌을 날랐던 누이동생 산이 더 높았다. 화가 난 오빠는 큰 바위를 던져서 누이동생이 쌓은 산 정상부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누이동생 산(제봉)은 정상부가 평평해지고 오빠 산(형봉)은 뾰족하게 됐다고 한다. 한편 남매가 싸우는 모습을 본 어머니는 슬픔에 잠겨 집을 나와 버렸다. 어머니는 한참 걸어가다 어느 산마루에 이르러 자식들이 있는 집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이 고개를 어머니(母)가 되돌아보았다(顧)는 뜻에서 고모령(顧母嶺)이라 불렀다고 한다.23)
23) 대구시, 대구지명유래총람, 2009.
이와 비슷한 전설로는 다음과 같은 전설도 있다. 옛날 고모령에 어린 남매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승려가 와서 이들에게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을 면치 못한다고 했다. 어머니와 어린 남매는 덕을 쌓기 위해 흙으로 산을 쌓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고모령 근처에 모봉(母峰, 149.8m), 형봉(兄弟峰, 192.5m), 제봉(弟峰, 약170m)이 생겨났다. 이때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과 딸이 산 높이를 두고 다투는 모습에 실망해 집을 나왔다. 자식이 걱정된 어머니는 어느 고개에 이르러 집 쪽으로 되돌아보았는데 여기에서 ‘고모(顧母)’가 유래됐다고 한다.24)
24) 국토지리원 지명 유래.
‘동삼(童參·모양이 어린아이처럼 생긴 산삼) 전설’도 있다. 아주 오랜 옛날 고모동에 효심이 지극한 젊은 부부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였다. 시주를 왔던 한 스님이 젊은 부부의 딱한 사정을 보고 홀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세 살짜리 아들을 가마솥에 삶아 그 물을 마시면 낫는다는 것이었다. 부부는 갈등하다 결국 아들을 삶기로 했다. 젊은 엄마는 가마솥에 아들을 넣은 후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 아이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아들은 생긋 웃고 있었다. 솥뚜껑을 닫은 젊은 부부는 한참을 넋 놓고 울었다. 그때였다. 가마솥 안에 있어야 할 아들이 “엄마” 하며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놀란 부부가 솥뚜껑을 열어보니 솥 안에는 아들이 아닌 커다란 동삼이 들어 있었다. 부부의 효심이 하늘까지 닿았던 것이었다.
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일제강점기였다. 고산에 사는 한 홀어머니가 아들 둘을 키웠는데, 두 아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대구 감옥에 수감됐다. 홀어머니는 매일 대구 감옥으로 면회를 갔다가 돌아올 때는 고모령을 넘었다. 어머니는 항상 고모령 정상에 이르면 뒤돌아서서 아들이 있는 대구 감옥 쪽을 한참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홀어머니가 뒤돌아 바라본 고개라는 뜻에서 고모령이 됐다는 전설이다. 또 하나는 1940-70년대 징병·입영열차 관련한 이야기다. 고모령(사실은 팔현고개)을 끼고 있는 고모역은 경산에서 대구 방면으로 약간 오르막 구간이다. 그래서 고모역에서 대구 방면으로 출발하는 열차는 가속이 잘 붙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고모역에서 아들을 입영열차에 태워 보내면 다른 역보다 좀 더 오래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물어부리
물어부리는 고모동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이천동·연호동에서 발원해 고모동과 가천동 사이로 흐르는 하천이 고모역 인근에서 금호강·남천과 합수하는 지점이다. 물어부리는 ‘물’과 ‘어불리다·어울리다’의 합성어이며, 위치는 고모역 동쪽 지금의 범안대교 인근이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경부선 철로와 금호강 사이 넓은 들인 물어부리가 보인다. 1970-80년 지도에는 논농사를 짓는 ‘안골들’로 표시되어 있다.
방아듬·백등산·흰등골·흰덤·흰서미
방아듬(103.1m)은 팔현 마을 뒷산(북쪽)으로 금호강에 접해있다. 팔현 마을에서는 1970년대까지 이곳 방아듬에서 달집태우기를 했다. 마을 주민들은 정월대보름달이 뜨기 전 남녀노소 상관없이 40-50명이 방아듬에 올라 달집을 쌓았다. 방아듬은 팔현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전망이 좋아 달을 일찍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 위에서 고산지역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백등산·흰덤이란 이름은 먹이를 찾아 금호강으로 날아온 백로가 이 산에 모여들어, 마치 흰 언덕이 생긴 것 같아 붙은 이름이다. 지금도 이 지역 금호강 일대는 철새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1980-90년대 지도자료를 참고하면 방아듬과 백등산은 각각 다른 산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팔현 마을 앞쪽(남쪽)에 있는 산(116.2m) 남동쪽 골짜기를 흰등골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지도를 참고하면 방아듬은 팔현 뒷산, 백등산·흰덤은 팔현 앞산이 된다.
서당골
고모 마을 서쪽 서당지 너머 대구명복공원 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서당못을 중심으로 아래쪽(동쪽)에 못밑마을, 위쪽(서쪽)에 못안마을이 있었다.25) 지금은 못안마을은 사라지고 동대사(東大寺)26)라는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옛날처럼 서당골에는 두 개 못이 이웃해 있는데 서쪽이 옥내지, 동쪽이 서당지다. 1954년 항공사진에 옥내지, 서당지, 못안마을, 못밑마을 등이 보인다. 못안·못밑 마을에는 각각 민가 4호가 보인다. 참고로 1980년대 지도에는 못밑마을을 ‘동무덤(돌무덤)’으로 표기하고 있다.
25) 수성구립 고산도서관, 고산, 비밀의 성산(城山), 2022, 49쪽.
26) 1998년 지도에는 천불사, 2005년 지도에는 우암사로 표기되어 있다.
앞들, 성짓골, 큰갓골, 자맛골, 끝침이골
고모동에 있는 들 이름이다. 앞들은 고모 마을 남쪽에 동서로 길게 펼쳐진 들이다. 마을 앞에 있어 앞들이라 부르며 과거에는 대부분 논이었다. 고모동에는 고모 마을 입구에서 서쪽 서당지 방향으로 가면서 왼쪽으로 다섯 골짜기가 있다. 첫 번째와 네 번째 골짜기는 성짓골인데 옛날 절이 있었던 골짜기라고 한다. 두 번째는 큰갓골인데 큰 산(갓)에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세 번째는 자맛골(자모골)로 작은 산에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다섯 번째는 끝침이골(끄치목골)로 끝에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이 다섯 골짜기는 대부분 과수원으로 이용됐다.
팔현동(八峴洞)
팔현동은 만촌동 인터불고호텔 남동쪽 금호강변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지리적 이유로 팔현은 예로부터 인근 금호강을 기준으로 북쪽 반야월과 남쪽 대구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조선 초 전백영(全伯英)이란 선비가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러 지명 유래가 전한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옛날 전백영의 후손들이 선조의 산소에 향나무를 심었는데 나뭇가지가 팔자(八字) 모양으로 쳐져 자랐고, 마을이 고개에 있어 팔현(八峴)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이 마을이 산과 물에 둘러싸인 오지 마을이기 때문에 여덟 고개를 넘어야 들어올 수 있다고 팔현 마을로 불렸다고도 한다. 그 외 두 유형의 ‘8형제설’도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 한 거지가 아들 8형제와 함께 이곳에 살았는데, 나중에 아들 8형제가 모두 어진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해 팔현이 됐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에 어떤 노파가 8형제를 데리고 마을 서쪽 고개를 넘어와 강변에 오막살이집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해 생활했다고 팔현이라 불렸다는 설이다.27)
27) 지리연구소, 지명조사철, 1959..
팔현동은 팔현 고개 동쪽 입구에 있는 마을로 방아듬 아래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팔현동은 원래 고모촌에 속했으나 뒤에 분동(分洞)됐다가 다시 고모동에 합동(合洞)됐다. 경산현읍지(1871)에는 팔이현리(八利峴里),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는 팔현동(八峴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팔현(八峴)은 ‘양팔을 펼친 모습의 고개’, 즉 팔이현(八利峴)을 차자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1737)에는 승현(蠅峴), 즉 ‘파리현’으로 표기하고 있다. 팔현 마을에서 바라본 고개가 파리가 날아오르듯 높고 험해 파리현, 팔현으로 불렀다고 생각된다. 반면 조선 후기에 편찬된 지승, 여지도, 해동지도(1724)에는 ‘눌현(訥峴)’으로 표기하고 있다. 눌(訥)은 ‘누르’의 줄임말로, 우리말 ‘늘어지다’의 ‘늘어’를 뜻한다. 팔현 고개는 팔현 마을에서 고갯마루까지는 급경사지만, 고갯마루에서 만촌동 쪽으로는 매우 완만한 지형이다. 그래서 만촌동 쪽에서 본 고개를 눌현(訥峴)으로 불렀다고 생각된다. 팔(八)을 지명으로 사용하는 고개는 대부분 ‘두 지역을 구분하는 곳’에 있으며, 고갯길이 한쪽은 급경사인데 비해 다른 쪽은 완경사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황승지골
팔현 마을 남서쪽 고모로 너머 지금의 능화사가 있는 골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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