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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왕” 조용필은 구태여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전설”로서 가요계 관계자들과 팬들, 평론가 집단 모두에게 최고의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너무나 유명해서 어찌 보면 뻔한 스토리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중가요 역사의 발자취를 조명하는 과정에서 조용필의 업적을 조명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왕”으로 널리 알려진 조용필이 가요계에 데뷔한 시기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1969년에 “화이브 핑거스”라는 ROCK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미8군 무대에서 데뷔한 조용필은 1971년에 김대환, 최이철과 함께 “김트리오”라는 ROCK 밴드를 결성해서 활동했습니다. “김트리오”가 해체된 뒤 솔로가수로 데뷔한 조용필은 그 유명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오랜 무명가수 시절을 마감하고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본래 1972년에 조용필이 “김트리오” 활동 시절에 잠시 부른 뒤, 1975년에 솔로가수 데뷔곡으로 취입했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처음 발표될 당시에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TV 프로그램 방송 화면에서 재일동포 모국 방문의 배경음악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삽입되었습니다. 이 방송이 계기가 되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인기는 부산을 시발점으로 해서 전국으로 확산되며 남녀노소를 불문한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오늘날까지도 조용필의 대표곡으로 명성을 떨치며 “국민가요”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지난 20세기의 한국 대중가요 역사를 통틀어서도 “사의 찬미”(윤심덕), “황성옛터”(이애리수), “타향살이”(고복수), “목포의 눈물”(이난영), “애수의 소야곡”(남인수), “나그네 설움”(백년설), “눈물젖은 두만강”(김정구), “신라의 달밤”(현인), “동백아가씨”(이미자), “님과함께”(남진), “고향역”(나훈아) 등의 노래와 함께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는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서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불멸의 히트곡이자 “국민가요”로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1976년에 한국 가요계에 불어닥친 “대마초 사건”의 파장은 조용필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대마초 파동에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톱스타, 뮤지션들이 대거 연루되었고, 그중에는 마구잡이식 수사에 의해서 누명을 쓴 사람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조용필의 경우에는 거의 신인으로 데뷔할 무렵인 무명시절에 잠시 손을 댄 것이 수년의 세월이 지나고 인기가수로서의 존재감이 알려질 무렵에 문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조용필이 1975년~1976년에 걸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히트로 인해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면서 오히려 문제가 불거졌고, 조용필은 1979년에 해금될 때까지 가수 활동이 정지되었습니다.
조용필이 1979년에 1집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할 당시의 나이는 이미 30살이었습니다. 오늘날 가요계를 주름잡고 있는 아이돌 가수들에게는 “환갑”으로 느껴질 만한 나이에 조용필의 진정한 전성기는 막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에 결성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은 1집 앨범에서 “창 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한국 대중가요계 최고의 톱스타로 올라섰습니다. 조용필의 1집 앨범에는 그의 대표곡으로서 조용필을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려준 노래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함께 수록되었습니다.
조용필은 본래 ROCK 밴드 출신이지만, 1980년 12월에 발매했던 2집 앨범에 이르기까지, 초창기에 인기를 얻고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된 원동력은 대중적인 장르인 트로트였습니다. 조용필은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 뒤인 1981년의 3집 앨범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ROCK 음악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필의 이러한 행보는 1990년대에 등장한 후배가수 서태지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서태지 역시 조용필처럼 ROCK 밴드의 연주자 출신이었지만, 우선 대중적인 장르(댄스뮤직)를 통해서 인기가수의 반열에 오른 뒤, 궁극적으로 추구해오던 ROCK 음악으로 회귀하면서 뮤지션의 길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필은 1981년에 발표한 3집 앨범에서도 타이틀곡으로는 트로트 음악인 “미워, 미워”를 통해서 히트를 기록했지만, 후속곡인 “고추잠자리”, “물망초” 등의 노래를 통해서 차츰 ROCK 음악에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필은 1980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와 “TBC 방송가요대상”의 “남자가수상”을 싹쓸이했습니다. 1981년부터 “TBC 방송가요대상”은 “KBS 가요대상”으로 주관 방송사를 옮겨서 이어졌는데, 조용필은 2년 연속으로 양대 공중파 방송의 연말 가요대상을 싹쓸이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때부터 조용필은 단순히 한국 대중가요의 톱스타로 올라선 것에 그치지 않고, 1940~50년대에 걸쳐서 “가요 황제”로 군림했던 남인수와 비교대상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은 예전에 “한겨레” 인터넷 토론장에서 가요계 역사에 대한 글을 올려주셨던 분이 작성한 글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광복 이후만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1960년대의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아성을 뛰어넘은 가수는 조용필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미 조용필은 동시대의 라이벌 중에서는 사실상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가요계 대선배였던 1960년대의 이미자, 1970년대의 남진, 나훈아와 같은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본래 “가수왕”이라는 타이틀은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를 뜻하는 말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부터는 사실상 조용필의 고유한 별명처럼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수왕”이라는 표현보다도 조금 더 격조가 높은 표현인 “가왕”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하면서, 오늘날까지도 “가왕 조용필”은 한국 대중가요의 상징,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1982년에는 조용필의 대항마로서 처음으로 이용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습니다. 이용은 “잊혀진 계절”을 통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1982년의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조용필을 제치고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했습니다. 1980~86년에 이르기까지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조용필의 아성을 무너뜨린 가수는 1982년의 이용이 유일했습니다. 당시 수상자 발표와 함께 위풍당당하게 등장하며 “감사합니다!”를 외치던 이용의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조용필과 이용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고, 이들의 팬클럽은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며 서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오빠부대”의 시초는 1970년대의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1980년대의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 역시 뜨겁게 달궈졌습니다. 조용필과 이용의 팬클럽 사이의 은근한 경쟁구도는 마치 오늘날 아이돌 그룹 팬클럽 간의 신경전을 연상케 할 만큼 뜨거웠습니다.
조용필의 전성기 시절의 팬문화를 오늘날의 “아이돌 팬클럽” 또는 “아이돌 팬덤 문화”와 단순비교하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주로 대중가요를 즐기는 팬들의 연령대가 “어르신” 세대 위주에서 “오빠부대” 위주로 옮겨오게 된 데에는 남진, 나훈아, 조용필 등이 그 시초가 되었습니다. 한편 이때부터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는 조용필과 이용으로 대표되는 “오빠”에 열광하고, 중장년층은 트로트에 열광하는 세대간 양극화 현상이 서서히 표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가요계의 최정상에 위치해 있는 조용필은 “오빠부대”와 “어르신”들 모두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한시대를 대표하는 톱스타로 장기집권했습니다.
조용필은 1982년에 라이벌 이용에게 “MBC 10대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가수”를 내주기는 했지만, “못 찾겠다 꾀꼬리”가 히트하면서 여전히 톱스타의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조용필은 1983년~1986년에 이르기까지 전성기를 이어가며 “나는 너 좋아”, “눈물의 파티”, “미지의 세계”, “허공”, “비련”, “친구여”, “여행을 떠나요” 등의 주옥같은 히트곡 퍼레이드를 펼치며 가요계의 절대강자로 군림했습니다. 조용필은 1983년 이후로 다시 독주체제를 구축했고, 그의 라이벌이었던 이용과 전영록이 2인자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여자가수 부문에서는 윤시내, 정수라, 이선희 등이 8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조용필과 함께 남녀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1984년에는 조용필에게 김수철이라는 새로운 라이벌이 등장했습니다. 김수철은 “못 다 핀 꽃 한 송이”, “젊은 그대” “정신차려 이 친구야”와 같은 히트곡을 남기면서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했고, 1984년 “KBS 가요대상”에서는 조용필을 제치고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1986년과 87년에는 “만능 엔터테이너” 전영록이 조용필을 제치고 KBS 가요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조용필의 최전성기였던 1980~86년에 이르는 7년간 조용필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가수는 이용, 김수철, 전영록 이외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조용필은 국내 최고권위의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를 무려 6차례나 수상했습니다. 1980~86년까지, 1982년(이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용필이 독식하는 구도였습니다. 또 양대 공중파 방송인 “KBS 가요대상”에서도 조용필은 1980~83년까지 4년연속으로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고 1985년에 통산 5번째로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KBS 가요대상”은 1987년부터 남녀 통합 시상식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986년에는 음반판매량을 주축으로 하는 “골든디스크”라는 시상식이 신설되었는데, 조용필은 “제1회 골든디스크”에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조용필의 존재는 “가수왕” 그 자체였고, 1980년대의 한국 대중가요계는 그야말로 “조용필 천하”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 국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가요대상을 독식했던 조용필은 1986년을 마지막으로 방송출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조용필은 1987년 이후로는 모든 가요대상 수상을 사양했습니다. “조용필=가수왕”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던 당시의 가요계 풍토에서 조용필이 방송출연 중단을 선언한 것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이 때문에 1987년에는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MBC 10대가수 가요제”가 조용필의 공백으로 인해서 시상식의 개최 자체를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 @부연설명 - 조용필의 라이벌 @
=> 1980년대의 가요계를 주름잡은 조용필은 사실상 라이벌의 존재가 무색하다 싶을 정도의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며 철옹성과 같은 1인독주 시대를 구가했습니다. 조용필은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대상인 “최고 인기가수”를 무려 6차례나 수상했고, “KBS 가요대상”의 대상을 무려 5차례나 수상했습니다. 그렇지만, 한때나마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할 만한 도전자들이 몇차례 등장했던 시기가 있었고, 그 시절에 활동했던 거의 모든 가수들이 최고의 톱스타인 조용필을 목표로 삼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했던 가장 강력한 도전자는 이용, 김수철, 전영록으로 대표됩니다. 그 외에는 윤시내, 정수라, 이선희, 혜은이, 이은하, 현숙, 방미, 구창모(송골매), 김범룡, 윤수일, 최성수, 송창식, 최백호 등이 자천타천으로 조용필의 라이벌로 거론되기도 했고, 이문세, 이승철, 변진섭, 현철, 주현미 등이 자천타천으로 조용필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누렸던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조성모 등도 전성기 시절에 한번쯤은 조용필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의 전성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1980년대 초반에 그의 아성을 위협했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도전자는 이용이었습니다. 조용필은 이미 1975~76년에 걸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불멸의 국민가요를 탄생시킨 주인공이었고, 1980년에는 “창밖의 여자”, 1981년에는 “고추잠자리”가 연달아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가요계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이때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용은 1982년에 “잊혀진 계절”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조용필을 제치고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했습니다.
이용의 돌풍에 휘말리며 잠시 주춤했던 조용필은 이듬해인 1983년부터 다시 독주체제에 들어갔고, 1984년에는 김수철이 “못다핀 꽃 한 송이”의 빅히트에 힘입어서 “KBS 가요대상”의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하며 조용필의 새로운 라이벌로 떠올랐습니다. 조용필은 1982년에 최대의 라이벌인 이용에 의해서 톱스타로서의 아성을 잠시 위협받았고, 1984년에는 김수철이라는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으로 인해서 역시 톱스타로서의 아성을 잠시 위협받았습니다. 오늘날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는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를 1980년대를 대표하는 라이벌 구도로 기억하고 있으며, 평론가 집단에서는 김수철을 조용필에 필적할 만한 뮤지션으로서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글의 필자인 저는 일단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4대 톱스타의 이름을 조용필, 이용, 김수철, 전영록의 순서로 나열했습니다. 조용필이 최고의 정점에 올라있던 시절에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했던 가장 강력했던 도전자가 1982년의 이용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1984년의 김수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필자 역시 80년대 당시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나중에 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 옛날 신문기사 수집이나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그 시절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는 다소의 어려움과 미흡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은 4대 톱스타 중에서 제 글에서는 비록 전영록의 이름을 가장 마지막에 나열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시절에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냈던 세대의 가요 팬들의 기억 속에서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라이벌 구도를 “조용필 vs 이용, 전영록”의 구도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실질적으로는 조용필의 독주체제 속에서 이용과 전영록의 2위다툼이 불을 뿜었던 것이 그 시절의 대체적인 분위기였고, 대다수의 팬들의 기억 속에서도 조용필, 이용, 전영록의 이름은 당대를 풍미했던 “빅3”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용은 조용필, 전영록에 비해서 데뷔도 늦었고, 활동년수도 짧은 편이지만 “잊혀진 계절”이라는 초대박 히트곡의 존재로 인해서 조용필의 대표적인 라이벌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가수로서 활동하며 이룬 “통산성적”에서는 사실 조용필과 이용은 라이벌이라 부르기가 무색할 정도의 현격한 격차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1980년대 가요계를 휩쓸었던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고추잠자리”에 필적할 만한 국민가요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사실상 유일했습니다. 이용은 누구보다도 “짧고 굵은” 전성기를 누린 뒤, 1985년에 치명적인 스캔들이 발생하면서 가요계를 사실상 떠났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복귀했습니다.
전영록은 이미 1970년대부터 “원조 아이돌 스타”로서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고, 198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도 조용필과 함께 가장 꾸준한 인기를 누리며 “오빠부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통했습니다. 실제로 1980년대 최고 권위의 시상식인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본상격인 "10대가수"의 연도별 수상자의 면면을 보면 거의 해마다 꾸준히 "10대가수"를 수상한 가수가 조용필과 전영록이었습니다. 전영록은 "10대가수상"을 통산 10회나 수상하면서 조용필(8회)을 능가하는 수상횟수를 기록했습니다.
전영록은 비록 이용, 김수철처럼 특정 시기의 초대박 임팩트에 있어서는 조용필의 아성을 넘어서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던 측면이 있지만, 가요계에 데뷔하고 인기를 얻은 시기도 조용필 다음으로 빠른 편이었고, 조용필의 시대가 거의 막을 내릴 무렵까지도 가장 꾸준하게 가요계의 정상을 다투며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라이벌 관계 자체는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가 부각되었지만, 1980년대 조용필 시대의 실질적인 2인자는 사실상 전영록이었다고 설명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전영록의 가수활동 성적은 화려했습니다.
대략적인 추이를 보자면 1980년대 초반에는 조용필이 독주체제를 이루는 가운데 이용과 전영록이 2인자 다툼을 벌이는 구도였고, 조용필, 이용, 전영록은 “빅3”로 불리며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대표적인 톱스타였습니다. 조용필에 대항하는 도전자 그룹 중에서는 이용이 순간적으로나마 조용필의 아성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최강의 라이벌로 각인되었고, 그 이후에는 김수철이 순간적으로나마 조용필의 아성을 또한번 위협했던 강력한 도전자로 각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용과 김수철의 돌풍이 사그러든 이후에도 조용필의 독주체제는 여전히 계속되었고, 전영록은 여전히 조용필과 함께 대표적인 “청춘스타”로서 가요계의 톱스타로 군림했습니다.
조용필은 1986년까지 “MBC 10대가수 가요제”, “KBS 가요대상”, “골든디스크”와 같은 그 시절에 존재했던 모든 연말 가요 시상식의 대상을 독식한 뒤, 1987년 이후부터는 방송 은퇴를 선언하고, 모든 가요대상 수상을 사양했습니다. 이 때문에 1987년에는 당대 최고 권위의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개최가 무산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필이 떠난 가요계는 세대교체기로 접어들었습니다.
‘가왕’ 조용필이 최고의 정점에서 스스로 내려온 뒤, 1986~88년에 걸쳐서는 가요계의 본격적인 세대교체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에는 조용필의 라이벌 그룹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건재함을 과시한 전영록, 발라드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이문세, 트로트 부문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주현미가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떠올랐습니다. 전영록은 1986~87년에 걸쳐서 “KBS 가요대상”의 대상을 2년 연속으로 수상했고, 이문세는 1987년에 “골든디스크”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주현미는 1988년에 “MBC 10대가수 가요제”와 “KBS 가요대상”, “골든디스크”의 대상을 모두 휩쓸며 3관왕에 올랐습니다. ]
조용필이 전성기를 누리던 1980년대 중반까지는 가요계의 세대간 양극화 현상이 노골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조용필이 방송출연을 중단하며 대중매체의 전면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부터는 이러한 세대간 양극화 현상이 노골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부터는 “기성세대 vs 신세대”가 대립하는 양극화 현상이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신세대”라 불리는 30대 이하의 청소년, 청년 팬층마저도 “대중 vs 매니아”로 양분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필이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선배가수들의 시대에는 국내 가요계를 대표하는 장르가 사실상 트로트 일색이었고, 그 외에는 팝송을 즐겨듣는 매니아층과 언더그라운드의 포크락 가수들에 의해 주도되는 청년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광복 이전의 일제시대부터 광복 직후에 이르기까지 국민가수로 군림했던 윤심덕, 이애리수,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에 이어서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인 1960년대의 이미자와 패티김, 1970년대의 남진과 나훈아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가요계의 전설적인 톱스타들은 모두 트로트를 통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한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1960년대의 대표주자인 이미자, 1970년대의 대표주자인 나훈아는 좀더 전통적인 트로트에 충실했고, 이미자의 라이벌이었던 패티김과 나훈아의 라이벌이었던 남진은 트로트에 기반을 둔 상태에서도 좀더 세련된 팝음악적 성향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은 본래 ROCK 밴드의 기타리스트 출신으로 데뷔했지만, 당시 가요계의 대세가 트로트였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고, 트로트 성향의 노래인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그 겨울의 찻집”,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의 노래들의 빅히트에 힘입어서 남녀노소를 막론한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이로써 조용필은 1960년대의 이미자와 1970년대의 나훈아의 계보를 잇는 1980년대 가요계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리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국민적인 지지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국민가수”의 계보는 조용필을 마지막으로 그 명맥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를 기준으로 할 때,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고 만인의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국민가수로서는 이미자, 남진, 나훈아, 조용필의 이름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조용필은 한국 대중가요계에서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용필은 그의 선배나 후배 가수들이 데뷔할 무렵부터 톱스타로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과는 달리, 약 10년에 가까운 무명 ROCKER의 설움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나이인 30살 무렵에 처음으로 가요계의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스타덤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가수왕”으로서 모든 가요차트와 가요 시상식을 독점할 정도의 대성공을 거둔 조용필은 그야말로 “대기만성형 스타”이자 “인간승리의 드라마의 주역”이었습니다.
조용필은 대중적인 장르인 트로트를 통해서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무명시절에서부터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선 이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ROCK 음악을 추구해왔습니다. 조용필의 전성기가 지난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도 조용필과 그의 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음악은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조용필은 끊임없이 새롭고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음악들을 발표했습니다.
조용필의 전성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음악을 듣고는 오늘날에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초현대식의 사운드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조용필에 대해서 한물간 트로트 가수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콘서트를 관람하게 되면 나이를 잊은 듯한 열정적인 무대와 초현대식 무대장비, 세련된 최신식 사운드에 다시한번 놀라게 되곤 합니다.
조용필은 한국 가요계에서 기네스북에 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록들을 갈아치웠습니다. 조용필의 1집 “창 밖의 여자”는 한국 최초로 음반판매 100만장을 돌파했고, 조용필은 한국 최초로 음반판매 통산 1000만장을 돌파했습니다. 1981년에는 “고추잠자리”가 KBS 라디오에서 무려 24주 연속으로 가요순위 1위를 차지했고 이때부터 방송 프로그램 1위 횟수 제한 제도가 생겨났습니다. 1982년에는 KBS “가요톱10”에서 조용필의 “못찾겠다 꾀꼬리”가 10주 연속 1위의 대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이때부터 “가요톱10”의 골든컵은 “5주 연속 1위”로 제한하는 제도로 변경되었습니다. 1985년에는 “TV가이드”에서 조용필의 노래가 혼자서 1, 2, 3위를 독식했습니다. (‘그대여’, ‘어제 오늘 그리고’, ‘바람이 전하는 말’)
조용필이 전성기가 정점을 찍은 이후인 1980년대 중~후반에 발표했던 “여행을 떠나요”는 오늘날 신세대 가요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국민가요”로 통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요”는 각종 스포츠 행사와 레크리에이션 등에서 응원가로 단골메뉴로 사용되고 있으며, 장기자랑, 회식 등에서도 널리 애창되고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요”는 2008년에는 신세대 가수 이승기에 의해서 리메이크되었습니다.
조용필의 전성기 시절의 대표적인 히트곡으로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고추잠자리”가 첫손에 꼽히고 있으며 그 외에도 “못찾겠다 꾀꼬리”, “그 겨울의 찻집”, “단발머리”, “허공”, “Q”, “비련”, “친구여”, “추억 속의 재회”, “여행을 떠나요”, “어제 오늘 그리고”, “나는 너 좋아”, “그대여”, “물망초”, “미지의 세계”, “눈물의 파티”, “꿈” 등의 수많은 히트곡 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오늘날 조용필 콘서트의 엔딩곡으로는 “여행을 떠나요”, “친구여”가 가장 많이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조용필은 1980년에 국내 대중가수 최초로 미국의 “카네기홀”에서 공연했으며, 1982년에는 국내 대중가수 최초로 일본의 “골든디스크” 상을 수상했습니다. 1983년에는 국내 대중가수 최초로 일본 “NHK홀”에서 공연했고, 1987년에는 국내 대중가수 최초로 일본의 연말 가요축제인 “홍백가합전”에 출연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서는 “한류열풍”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국내 톱가수, 톱배우들이 일본에 진출해서 “오리콘 차트”를 장식하며 뉴스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조용필은 “한류열풍”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20년 전에 이미 이러한 위업들을 달성한 “원조 한류스타”이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은 1990년대 이후에도 라이브 콘서트 위주로 꾸준히 활동하면서 자신의 오랜 팬들과의 교감을 이어갔고, 1999년에는 한국 대중가수 최초로 “예술의 전당”에서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후배 가수들은 조용필과 자신의 이름이 나란히 거론되는 것 자체를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고 있으며, 조용필은 모든 가수들이 꿈꾸는 최고의 롤모델이자 목표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이후에 등장한 후배가수 중에서 조용필의 아성에 견줄만한 가수를 “굳이” 찾아본다면 서태지와 신승훈, 김건모, 조성모의 이름이 대표적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스타성”에서는 서태지가 조용필의 대표적인 후계자로 꼽히고 있으며, “가요계의 큰형님으로서의 면모”에서는 신승훈이 조용필의 대표적인 후계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부터는 특정 세대 또는 특정 계층의 집중적인 지지를 받는 가수들만이 존재할 뿐, “남녀노소의 모든 세대의 대중에게 사랑받는 국민가수”의 계보는 사실상 조용필을 마지막으로 그 계보가 끊겼습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국민가수”의 계보는 “1940~50년대의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 “1960년대의 이미자와 패티김”, “1970년대의 남진과 나훈아”, “1980년대의 조용필”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굳이 시대별로 한 명씩만 대표적으로 거론할 경우 “남인수(40년대)->현인(50년대)->이미자(60년대)->나훈아(70년대)->조용필(80년대)”로 이어지는 계보가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조용필과 이미자가 한국 대중가요 최고의 전설로 추앙받고 있으며, 광복 이전까지 포함할 경우에는 “광복 이전의 가요황제 남인수”와 “광복 이후의 가왕 조용필”이 종종 비교대상에 오르고 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조용필과 대등하게 비교대상에 오를 수 있는 가수들은 사실상 윤심덕, 이애리수,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 이미자, 남진, 나훈아와 같은 “선배 국민가수”들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용필 이후에 등장한 후배 가수들은 사실상 그와 견주기에는 미흡한 측면이 있지만, 굳이 조용필의 라이벌 또는 비교대상을 찾을 경우, 동시대의 라이벌로서는 이용, 김수철, 전영록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편이고,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누린 후배가수 중에서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태진아, 송대관, 조성모 정도의 가수들이 그 후계자로 거론되며 비교대상에 오르고 있습니다.
조용필은 굳이 설명 자체가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매니아층과 평론가 집단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뮤지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상대적으로 1980년대 이전의 전설적인 국민가수들이 부당한 폄하를 당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신세대 매니아층이나 평론가 집단에서는 과거의 선배 “국민가수”들의 주력장르가 “트로트”(전통가요)라는 이유 자체만으로도 선입견을 갖고 평가절하를 하는 경향이 있지만, “가왕 조용필”만큼은 여기서도 예외로 통하고 있습니다.
조용필은 단순히 남녀노소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일본에서까지 인기를 얻으며 국위선양을 한 것에 그치지 않고, 매니아층과 평론가 집단에서도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뮤지션”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조용필의 인기와 스타성은 이미 “기네스북”에 올라가 있는 통계자료 자체만으로도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거기에 조용필은 “가창력”에서부터 “작사, 작곡 능력”, “음악의 참신성”, “프로정신” 등에 이르는 거의 모든 덕목에서 완벽에 가까운 인물로 찬사를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용필은 “전통가요”(트로트), “전통가요”(국악), “ROCK”, “발라드”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장르를 소화해내는 음악적인 스펙트럼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중이든 매니아이든”, “가요계 종사자이든 팬이든 평론가이든”, 거의 모든 계층에 걸쳐서 “가왕 조용필”은 결코 폄하해서도 안 되고 범접할 수도 없는 “성역”으로서 경외의 대상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조용필은 2003년에 “데뷔 35주년 콘서트”를 개최한 데 이어서 2008년에는 “데뷔 40주년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2010년에는 환갑을 맞았고, 대부분의 활동을 중단한 채 휴식기를 가졌습니다. 이 때문에 언론매체에서는 조용필이 큰 병에 걸렸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유포되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은 2011년에 다시 공식활동을 재개하면서, 그와 관련된 근거없는 루머들을 불식시켰습니다. 조용필은 소록도 공연을 통해서 온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했고, MBC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위대한 탄생”에 출연해서 후배들을 격려하면서 다시한번 “살아있는 전설”로서의 위상을 각인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조용필과는 동떨어진 세대였던 10대 청소년들에게도 조용필과 그의 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존재감이 새삼 부각되었습니다.
조용필은 2011년에도 변함없이 전국을 돌며 콘서트를 통해서 팬들과의 교감을 이어갔습니다. 오늘날 조용필의 가장 열성적인 팬층은 40~50대 정도의 중년층이 주축을 이루는 가운데, 60대 이상의 어르신 세대에게도 과거에 빅히트를 쳤던 트로트 성향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그 겨울의 찻집”, “허공” 등의 노래들이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10대~30대의 신세대에게도 “여행을 떠나요”, “모나리자” 등의 강렬한 ROCK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음악들이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출처: 과거 신문기사와 TV 방송 등을 기본 토대로 해서, 인터넷 검색(네이버, 다음, 가수 홈페이지)을 통해서 얻은 정보들을 참고했습니다. 특히, 옛날 가요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의 자료에 더욱 많은 부분을 의존했습니다.}
** 원문 작성자 => JOHN CENA
** 원문 작성 날짜 => 2011년 6월 25일
** 원문 출처 => http://johncena07.blog.me/70112046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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