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반갑습니다. 틱낫한 스님 때문에 길이 늦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인도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어떤 활동을 했고, 인도에서 무엇을 꿈꾸고 활동하고 있는지 순차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80년대 후반 6년 간 대학에서 구약학으로 강의하는 일을 했습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민중신학이 민중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신앙적으로는 하느님이 한국농촌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미 농촌출신이지만 다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을 재미있고 신명나게 했었습니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천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우루과이라운드로 절망적인 농촌에 희망을 심으라고 한 것입니다. 단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봐야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농민들을 만나면서 삶을 듣고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용어들과 그들의 심정들이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글이 되지 않아서 말로 하는 것 이었습니다.작은 농촌교회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에게 희망을 가지십시요라고 하면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유기농업, 생명농업을 이야기하면서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목사님, 농사도 모르면서 농사를 이야기합니까? 이제 그만 하십시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농담 속에 진담이라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은 것은 희망으로 살아 보이는 것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년 반만에 완전한 농사꾼이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작은 교회를 떠맡다보면 도시에서 보내주는 돈도 있고 해서 91년에 100만원정도 받으면 아무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농민을 이해하는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딱 2년간 퇴직금 받고 다른 수익금 끊고 농사만으로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니까 깜깜하면서 농사꾼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떤 것도 삶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이 농사꾼이었습니다. 농협에 가서 영농자금 200만원을 타 쓰는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을걷이 끝내놓고 보니, 빚은 늘어났습니다. 1년간 열심히 농사지을 결과 500만원 빚지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도시친구가 '그래도 그만큼 밖에 빚지지 않고, 시시끌렁한 대학다녀도 빚지지 않고 안 되는데 기막힌 경험이 되는데 애태워하느냐?'고 하면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절망하고 있었는데 희망이 되었습니다. 2년째는 더 이상 빚이 지지 않았고 3년째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반농민들과 다른 것은 지혜와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것 이었습니다.농약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농사를 하고 생명을 죽이지 않는 농사를 짓겠다고 해서여기저기 다니면서 배우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제가 하는 농사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충분히 내가 생각하고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학문과 이론을 전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는 외국을 보고 싶었습니다. 선진국의 농민들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살고, 무엇을 먹고, 미래를 어떻게 꿈꾸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일본, 독일, 스위스 등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농민의 집에서 잠자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과 함께 논의하는 등의 시간을 3년을 보냈습니다. 농업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농민들이 공부하자고 하니까 말을 듣지 않던 농민들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거창에서도 20명이 공부하게 되었고, 97년부터는 합천으로 근거지를 옮겨서 자신감이 생겨 4명에서 10명, 30명으로 매월학습하고 연구하며, 토론하고 생산하고 공동출하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농민들도 자기들의 친구들로 받아들였고, 지도력도 인정받게 되었고, 농촌지도소도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지원도 해주었습니다. 농사하는 것이 신이 났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농사꾼으로 살아보임으로 해서 농민들에게 희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연세대에서 생명농업 세미나팀을 구성해서 지도해 달라고 해서 지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체계화된 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인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인도교회에서 인도에는 6억의 농업인구가 있지만 농사를 지도해줄 지도력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년에 한 달씩만 와서 농사를 지도해 줄 수 있냐고 요청해왔습니다. 농한기가 3개월 있는 저로서는 한 달간 인도를 본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현장조사차 보름간 다녀오기로 하고 갔습니다. 농민들을 만나고 공동워크샵을 하면서 방문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하나님이 한국대학에서 훈련하고 스스로 농사짓게 하고 어디에 쓰시려는가 했는데 한국농업에서 인도농촌으로 끌고 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도사람들이 '앞으로 5년간 우리들을 지도해 달라'고 요청이 변경되었습니다. 순간적인 감정으로 답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기도하고 고민하는 과정에 한달 후 인도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한국에는 제가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지도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001년에는 열심히 인도 갈 준비를 햇습니다. 의학훈련, 선교사훈련을 해서는 작년부터 열심히 인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도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꾸었던 것과 무엇을 실천하고 있는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느 인도지도자들이 요청했던 것이 40만 평 되는 땅에, 1920년도에 의해 만들어진 농민훈련센터가 1950년까지 미국선교사가 떠날 때까지는 잘 되었는데 지지부진해서 거의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10년 전부터는 농민교육이 사라지고 우기가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아서 남은 사람들의 생계가 해결되지 못하는 아주 가난한 곳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곳이 한 두 곳이 아니고 인도교회는 아주 부자입니다. 인도는 교단적으로 부자입니다. 많은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도정부를 제외하고는 가장 땅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기도합니다. 제제 40만평을 맡기면서 살아 숨쉬는 농민센터로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한국에서 하고싶었던 일이었습니다. 제 혼자 농사 지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산실이 되겠다는 서원을 했는데 이미 망가져 가기는 하지만 무수히 많은 땅과, 건물과 값싼 노동력이 얼마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아니라 쓰러져 가는 현장이라고 느꼈던 것이었습니다. 황폐화되는 것을 보면서 제가 서야 할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공간을 잘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인도 땅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인류가 기뻐할까? 하느님이 기뻐할까? 나를 보냈던 사람들이 기뻐했던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나무심기 운동을 했습니다. 새로운 생태공동체를 만드는 첫걸음도 나무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도 산에는 나무가 많지만 시가지에는 나무가 너무도 없습니다. 산에만 나무를 두었지 거리에 땅에 나무를 많이 갖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인도는 생활공간에는 나무가 많은데 산에는 나무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몇 그루씩은 있습니다. 나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나무가 없습니다. 제가 있는 곳도 야산이 겹쳐져 있는 곳인데 50년 전에는 울창해서 표범이 출현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개발한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부 불때느라고, 그리고 장례식에서 제일 많이 나무를 없애는 것 같았습니다. 건축에는 많이 이용되지 않아요. 델리에도 수 백구의 시체를 태울 수 있는 나무의 양이 부자의 척도를 나무의 높이로 나타냅니다. 그렇게 까지 나무를 없애면서 나무를 다시 심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정부는 시작하고 있지만 민간단체도 나름대로 하고 있지만 정작 나무를 사랑해야 하는 국민들은 모릅니다. 왜 한발과 가뭄이 드는지 모릅니다. 나무심기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혼자 심는 것이 아니라 인도청년들이 함께 심고 한국의 방문객들이오면 나무 심는데 투여합니다. 묘목을 생산하는 일을 할 계획입니다. 사서 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3월부터 나무를 꽂아두면 살지만 인도는 8개월 동안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기 때문에 그냥 죽습니다. 울타리 없이 나무를 심으며 양떼와 소떼가 먹어버립니다. 물이 없어서 물을 주는 일을 개발하지 않으면 나무를 살려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하수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한강 만한 강폭이 있는 강이 있는데 이미 말라 버린지 오래 되었습니다. 우기가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고 비가 내려도 흘러가는 물이 없습니다. 우물이 있기는 한데 십여년 전에 역사적 유물이 되었습니다. 3년째 비가 내리지 않으니 물이 말라버렸습니다. 온통 지하수 개발하느라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 나름대로 코코넛과 나뭇가지 등을 이용해서 지하수 수맥을 탐사하는데 성공률은 30%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배운 수맥탐지봉으로 했는데 한 곳을 했는데 100%성공했고, 나중에 지하수 개발업자들이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양이 얼마나 커버할 수 있는지 제법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학교가 두 개가 있고, 수 백명의 학생들이 먹어야 하는 데 위생의 차원을 넘어서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농사의 자급자족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물이 없어서입니다. 4년 동안 거의 농사를 짓지 못하고 지냈던 것입니다. 네 개의 지하수를 개발하고 나니까 지하수전문가로 알려졌습니다. 가는 곳마다 요청이 있고 해서 50여 곳이 제 도움으로 지하수를 개발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것은 대기자들이 너무 많아서 조수들이 스케쥴을 짜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인도교회의 초청으로 갔고, 공적으로 갔기 때문에 위력이 컸습니다. 남인도 교단이 4개 주가 21개의 교구로 이루어졌습니다. 교구마다 전부 공동체를 만들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20시간씩 걸리는 곳을 가서 교육한다는 것은 무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제대로 된 정신으로 된 공간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총회에서 공문을 보내서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땅 두 군데 가운데 공동체의 땅으로 추천해주면 공동체로 개발하겠다'고 해서 현재 다섯 곳이 확정되었습니다. 단순히 농장개발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규모가 2-3만평으로 시작됩니다. 그 정도의 땅이면 10가정이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가면서 변모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나무를 심는 운동, 두 번째는 지하수를 개발해서 먹고 살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번에 가면서 탐사를 하면서 약속을 한 것이 지하수를 개발해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개신교의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곳인데 그 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노동자들을 불러서 교육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하기도 합니다. 약속을 하고 돌아와서는 얼마 전에 갔습니다. 주머니에 50%의 돈을 가지고 갔습니다. 자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큰 교회도 있고, 센터도 있는데 그 울타리만 넘어가면 온통 쓰레기 투성입니다. 돌아다니는 곳곳마다 쓰레기와 똥오줌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습니다. 처음에는 인도에 처음 갔을 때 이른 새벽에 물컵을 들고 나가더라구요. 따라가 봤더니 화장실을 갑니다. 자기 집 앞에서 볼일을 보지 않고 교회 앞에 가서 볼일을 봅니다. 거의 기본적으로는 화장실이 없습니다. 이른 새벽에 여성들이 먼저 볼일보고, 남성들이 다음에, 다음에 는 어린이들이
저는 인도에서 존경하는 인물은 비노바바입니다. 비노바바벤은 브라흐만 출신이면서 땅을 나눠주기 위한 운동을 했습니다. 남한 만한 땅을 부자들로부터 받아서 나눠준 인물입니다. 그렇게 걸어다니기도 하고 불가촉천민들이 싸 놓은 똥오줌을 치운 인물입니다. 제가 그 공동체에 돈을 주면서 나머지 돈을 받으려면 깨끗이 청소하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6-70명의 교육생들과 이 동네에 살고있는 청소년들과 함께 쓰레기를 치우고 똥오줌을 치우는 일을 하라고 햇습니다. 그래서 집 한 채를 짓더라도 얼마나 싸고 실질적인 집을 지을 수 있는지를 압니다. 정말 재료가 싸면서 생태적인 집을 짓는 것을 교육하려 합니다. 깨끗하게 짓는 것 외에 화장실 짓는 일을 하겠습니다. 생태공동체를 만들려면 생태적인 화장실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똥오줌을 주워가려는 인도농민들이 생겨나기를 희망하면서 시범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냥 원두막처럼 가림막만 있으면 됩니다. 거기에 아무 재료가 없으면 흙만 담아서 똥오줌이 노출되지만 않으면 훌륭한 거름이 됩니다. 똥오줌은 질소질입니다. 식물성으로 오는 탄소질 왕겨 등으로 섞이면 흙과 질소질, 탄소질이 섞이면 훌륭한 거름이 됩니다. 소똥과 소오줌은 밭으로 내면서 사람의 것은 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보여지는 현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런 것이 지속되고 확산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되는 생태교육장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교육공간이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망가져가고 있는 것을 수리해서 100명 정도 숙식을 할 수 있는 교육공간이 있습니다. 교육을 위해서는 오는 차비, 가는 차비, 체류비용을 대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올 수 있는 농민은 드뭅니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부자가 되어버린 농민들은 공동체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가난하면 포기도 쉽고, 새로운 희망도 있습니다. 좋은 것으로 좋은 것으로 교육하면 변화의 인물들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함께 하는 교육을 통해서 무수한 인도의 청년들이 제2의 간디와 비노바바벤이 되기를 바라는 공동체를 꿈꾸고 있습니다.
지금은 공동체라는 이름보다 선교사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살아 있는 생태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가 있는 곳은 생명누리공동체라는 이름을 가진 공동체로 만들어갈 생각이고 그것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습니다만 많은 문제점들을 여러분들과 논의했으면 합니다. 좋은 공동체가 제 개인만이 아니라 좋은 공동체가 여러분들과 함께 이루어가기를 희망합니다.
아난다 마르가 인사소개
고철기 : 아난다마르가의 출가승려도 있는데 이 분은 묵세샤난지입니다. 저는 짓아트만입니다. 평소에 제가 속해 있는 아난다마르가를 만든 분이 지역공동체가 중심이 되는 경제체제가 해결책이라고 합니다. 그런 지역공동체를 인도에서도 만들고 세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 인 곳이 아난다 싯트입니다. 캘커다에서 400km떨어진 곳입니다. 공산주의의 압박으로 진행이 늦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난다마르가에서는 앞으로 새로운 사회를 끌어갈 정치체제로 프라우트를 이야기하는데 핵심내용은 소유권문제, 특히 부의 분배에 있어서 공동체의 동의 없이 어떤 사람이 소유를 많이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정치민주화, 경제의 독점화로 보는 것 보다 정치의 민주화가 아니라 정치가 민주화가 되면 돈에 의한 지배로 가기 때문에 정치는 엘리트가 나와서 하고 경제의 민주화가 이루어져 분배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공동체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사상을 접하고 감명을 받아서 결국을 출가를 해서는 대가정을 위해서 살고 싶어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봉사하기 위해서 출가를 했습니다.
묵데샤난지 : 이름은 묵데샤난지입니다. 묵데는 해방시킨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남미 페루에서 고아를 위해 일을 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는 요가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하고 있는 것은 PCACP라고 하는 동식물에 대한 잔학행위방지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소개하는 팜플렛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에 와서 일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한국인들의 심리성향들이 파악이 되고 한국은 할 일이 많아서 가능성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공동체, 환경 등에 중심적으로 한국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려고 하시고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바그람과 오로빌공동체 탐방이야기
황대권
([야생초편지] 저자, 생태공동체연구모임 으뜸지기)
시간을 많이 할애할 만큼 많은 준비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인도현지에 대한 경험을 생생하게 전해 주신 정호진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보다 잘 생긴 사람이기도 하고 생태공동체를 위해서 수많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한국의 생태공동체운동 하시는 분들과 많은 교류를 했으면 합니다. 자기만족적이고 고립적이라는 것이 비판받고 있습니다. 생태공동체운동은 지역적 연대, 세계적 연대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생태공동체운동을 하시는 분들과 관심을 가진 분들과 지속적인 정보교류를 통해서 이 세상을 공동체세상을 만들어 가는 일을 했으면 합니다.
인도에서 지도상으로 꼭 가고 싶은 공동체를 네 군데를 선정해서 갔는데 분포가 남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분포해서 이틀 사흘씩 걸려서 한 달로는 부족했습니다. 비행기까지 타가면서 강행군을 했습니다. 첫 번째 방문한 곳이 아난다마르가입니다. 아난다마르가를 왜 찾아갔느냐 하면, 한국에 소개된 것은 요가, 명상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녹색평론에서 나온 [공동체경제를 위하여]를 보면 명상보다는 구체적으로 공동체사회를 어떻게 변모시켜나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현해 가는 것을 보고 싶어서 찾아갔습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캘커타 북쪽의 나고푸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간디가 말년에 죽기 12년 전에 이 마을에 살았습니다. 한참 소금행진을 하고 있었는데 독립이 되기 전에는 이 마을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서는 소금행진을 떠났습니다. 간디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겠습니다. 인도의 지도를 보고 중심에 자리를 잡고는 앞으로 인도가 어떻게 살아야되는지를 마을을 정해서 마을공동체를 만들겠다고 생각해서 정착한 곳이 세바그라함입니다. 인도의 70여 곳의 마을연합으로 보고, 간디의 사후 네루는 간디와 다른 정치방향으로 보았습니다. 전 국가를 관료적으로 통합해서 대량생산, 대량교육 쪽으로 사회주의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효과를 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간디는 정반대로 제시하고 실천했던 세바그람이라는 마을입니다. 간디의 세바그람이 있는 마을이 있는 곳이 와비그람입니다. 차를 타고 20분 정도 가까운 거리에 비노바바베 공동체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 일찍이 간디에 의해서 이 사람은 나의 후계자라고 찍힐 정도입니다. 비노바바베공동체를 다녀왔고, 밑으로 내려와서 한국에서도 KBS를 통해서 알려진 오로빌을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세바그람과 오로빌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비디오를 구해서 찍었는데 너무 흔들리고 편집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어제밤에 졸리운 눈으로 한 개의 비디오로 만들었는데 시간계산을 못해서 한 시간 짜리를 만들었습니다. 진행은 비디오화면을 보면서 하겠지만 간단한 기초정보를 드리겠습니다.
먼저 세바그람인데 세바그람은 지금현재 간디의 아슈람이라고도 하고 박물관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서글픈 일입니다. 살아있는 마을 공동체로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간디의 의도는 간곳 없고 박물관이 되어 있습니다. 간디가 갈 때에는 숲풀이라고 하는데 간디가 간 후로 길이 생겼다고 합니다. 큰 길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간디기념관이 있습니다. 간디에 관한 사진 수천점을 모아서 기념관을 만들었고, 게스트하우스가 있고, 간디아슈람이 있습니다. 아슈람은 우리말로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인도에서 쓰는 독특한 늬앙스가 있습니다. 영적인 토대를 갖춘 공동체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쉬람에서 무수한 일을 합니다. 처음에는 일체 친구들이나 동료들을 끌고 가지 않고 부인하고만 살았습니다. 주변에 추종자들이 꼬여들어서 결국에는 인도정부의 헤트쿼트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쉬람에는 간디가 살았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간디가 델리의 시민행진에 참가하기 위해서 몇 시에 떠났다고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세바그람은 간디의 말년의 이상과 정열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장소인데 이것이 불행하게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 기념관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필름에는 같이 소개하지 않았는데 아쉬람만 찍었습니다. 일부러 아쉬람과 가까운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간디는 마을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갔는데 세바그람은 70년이 지났는데 변화된 것이 없었습니다. 전부 공터에 나가서 놀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이 가니까 사진 찍자고 난리입니다. 자진해서 안내해줘서 마을구경을 잘 했습니다. 마을에 똥 투성이입니다. 저도 지겹게 많이 보고 왔습니다. 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우리는 숨어서 똥을 누고 싶은데 이 사람들은 대면하고 눕니다. 기차 변에는 기차를 보고서는 똥을 눕니다. 대로 한가운데서도 똥을 눕니다. 여자 초등학생인데 똥을 누는 것을 봤어요. 인도는 똥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상당한 곤란에 직면하리라고 봅니다.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전에는 생태적인 곳이었습니다. 집들도 간단합니다. 옷은 천 하나만 가리고 삽니다. 숟가락, 젓가락도 필요 없습니다. 화장지도 안 닦고 삽니다. 저도 인도를 이해하려고 손으로 자기 항문을 만져보는 게 아주 좋다고 봅니다. 건강도 진단하고 말랑말랑한 느낌도 있습니다. 일체 종이를 안쓰니까 그 변을 땅으로 돌려줍니다. 시골에는 아침에 논두렁에 눕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전에 누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사람들이 도구를 쓰지 않고 자연에 순화되는 자연밀착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태친화적이었다고 봅니다. 인구가 10억이 되고 도시로 집중화되면서 끔찍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여자분들은 가게 되면 거의 자지러지게 된다고 봅니다. 그 이야기는 주제가 아닙니다. 똥 이야기만 나오면 괴로움이 있어서.
세바그람의 전통마을은 전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인도사람들이 간디의 마을을 받아들여지지 않고, 인도 곳곳에 간디의 동상은 있지만 그 이념을 따르는 사람은 없어요. 오늘 자료를 나눠준 것은 김진씨가 쓴 책 변역서인데 [인도에는 간디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수도자들인데 11명이 살고 있습니다. 남자가 6명, 여자가 5명입니다. 일생동안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간디처럼 금욕,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독신이 원칙은 아닌데 스스로 그렇게 지키면서 살고 있고, 결혼을 하게 되면 나간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부속농장이 있어서 자급자족을 합니다. 일을 하고 오후에는 물레를 돌려서 자기 옷감을 짭니다. 입구에 상점이 있는데 물레를 짜서 만든 간단한 옷감을 팔고 있습니다. 인도사람들은 머리에 두르기도 하고 남자들은 바지대신 두르기도 합니다. 두건, 목도리, 이불, 수건, 수영복 등의 다양한 옷이 됩니다. 한 가지로 다양한 기능을 하는 것을 발견하라고 하는 것이 퍼머컬쳐의 기본내용입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도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일정을 모르고 갔는데 사건들을 만났습니다. 그 공동체의 특별한 날이죠. 세바그람에 간 다음날 간디 부인의 기일에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행사 내용을 고스란히 담아왔습니다. 우리의 행사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행사를 대 여섯시간 쉬는 시간없이 앉아서 진행합니다. 그 대신 재미가 있습니다. 중심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야기하고 대화하고 노래하고 무용하고 연극하는 등 저는 재미있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말이 어찌나 많고 꼬치꼬치 묻길래 상대하기 싫었는데 계속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신부라고 했습니다. 명색이 카톨릭신자라서 대화했습니다. 자기 일을 이야기했는데 인도의 민중운동가였습니다. 인도의 뿌나에서 사역하고 있는 분들인데 인도에서 간디신학을 위해서 박사학위논문을 쓰기 위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세바그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저녁에 기도로 마감합니다. 간디가 기도하던 곳에 가서 기도를 합니다. 세계 여러 종교의 기도문을 모두 모아놨습니다. 처음에는 들었더니 처음에는 나묘호랑겡교라고 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간디기도문의 첫 마디에 들어있습니다. 그만큼 열려있습니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트교 등의 기도문이 모두 모아놓았습니다.. 그 기도문을 모두 욉니다. 물론 간디가 종교의 화합을 외치다가 흉탄에 돌아가셨지만 간디의 이념과 실천들이 인도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비디오를 보면서
하얀옷을 입은 사람은 고등학교 학생들입니다. 어린이들의 공연도 있었습니다. 저기 노인네는 선그라스를 끼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맹인입니다. 제일 고참이고 인도민속의 대가라고 합니다. 인도의 잃어버린 토속음악을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들이 많습니다. 집들과 농경지, 화장실, 텃밭 등입니다.
텃밭을 찍었는데 여러 가지 푸성귀를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설거지를 재로 하고 있습니다. 재로 하면 기름기가 잘 닦입니다.
간디가 사무실로 쓰이던 곳입니다.
여기 안내판에 나오는 글귀들을 복사해준 인쇄물에 있습니다.
간디가 마지막에 살았던 곳입니다.
아쉬람을 거닌다는 생각으로 보십시오.
여기는 굉장히 넓은데 게스트하우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받고 있습니다.
연설하다가 노래를 하고, 노래하고 연설하는 등 재미있습니다. 고대의 게송들을 노래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간디가 기도하던 곳입니다.
큰 길을 가운데 두고 왼쪽은 기념관, 오른쪽은 아쉬람입니다. 길에서 찍은 것입니다.
여기가 간디기념관입니다. 민가들이 서너채 나오는데 공동체를 유지하는 인원이 11명밖에 안됩니다. 손님들이 1년에 수 천명이 오는데 그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노동력으로는 부족해서 농가들의 주변노동력을 이용합니다. 그 집을 공짜처럼 사용하고 있구요.
세바그람은 끝이 났습니다.
김진의 세바그람 여행기를 보면 찬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세바그람에 대해서 몇 가지 추가를 하겠습니다. 간디는 세바그람을 만든 목적이 인도라는 나라를 마을공동체의 연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을공동체 하나하나가 건강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도는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물자가 모두 영국에서 공급하고 있었는데 자립적인 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의식주가 자급자족이 되어야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상징적인 것으로 먹는 것은 자기 영토에서 지어먹고, 집은 널려있고, 옷이 문제였습니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제국주의로 나선 것이 옷이었습니다. 간디의 물레가 인도독립의 상징이었습니다. 자급자족, 자활의 상징이 물레가 되었습니다. 세바그람에서 옷을 잣고, 여성, 청년, 불가촉천민들을 교육하고 효과적으로 농사짓는 법등을 교육하고 마을을 활성화하는 방안으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세바그람을 만들었는데 70년이 지난 지금 변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간디는 존경받는데 왜 그렇게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누가 요즘 간디처럼 금욕적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느냐?, 새벽 4시반에 일어나서 기도하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거칠지만 세끼에 우리돈으로 1천원도 안되는 돈으로 먹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금욕적이고, 검소한 생활에 있어서 인도인들이 따라서 할 수 없다느 것입니다. 인도의 하층민들은 서구자본이 침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전래대로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온 것입니다. 방송, 매채 등을 장악하고 있는 인도상층부 사회는 완전 서구자본주의 방식대로 사고하고 있습니다. 인도사람들은 전래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서구자본주의 방식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정호진목사님이 인도에서 농촌공동체를 만들어가면서 농민들의 자활의지를 어떻게 구체화하는지는 두고 보아야 합니다. 서구자본주의가 인도민중들에게 침투하지 못하는 것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전래의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것, 즉 신관입니다. 신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인데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은 힘듭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생태공동체와 인도인들의 전통생활방식이 다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난다마르가에 가서 아름다운 농촌공동체를 보았습니다. 흙집들이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고 아름답습니다.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떨어지고 나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이 컴컴한 집에 오두막에 앉아있었던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어둠에 앉아서 무엇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무료해서 그렇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난다마르가를 건설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들은 너무나 볼품이 없었습니다. 번듯한 시멘트 집이었는데 제가 싫어하는 것이 시멘트 집이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계몽을 해서 잘 살게 되었는데 자기들은 시멘트 집에서 살고있었습니다. 그 점은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고, 연구를 했으면 합니다.
오로빌은 인도남부의 마두라스라고 하는 4대도시중의 하나인데 남쪽으로 세 시간 정도 내려가면 있습니다. 오로빌은 인도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많은데 인도의 독립투사중의 한 명인 스리오로빈도라고 하는 철학사상자와 사회운동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인간은 낮은 단계부터 진화해서 신적인 단계까지 갈 수 있다고 말씀했고, 정치사상은 전 세계인류가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로빈도사회협의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유엔과 말이 되어 1968년에 마두라스남쪽에 자리를 잡고는 시작했습니다. 시작한 사람이 오로빈도가 아니고 영적인 교류를 하던 프랑스의 여자가 시작했습니다. 오로빈도를 따르던 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오로빈도의 오로와 빌리지의 빌을 따서 오로빌을 만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세계인의 단합이라는 주제로 탄생시켰습니다. 수많은 다양한 인류가 있지만 여기서 그 인간들의 조화, 단합을 보여주자고 했습니다. 탄생을 하는 날 세계 각국 124개국의 흙을 가져와서 합토식을 하고 기념탑을 만들고 시작했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계획된 공동체입니다. 어마어마하게 규모가 큽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군 두 세군데의 규모인데 도시계획을 인구 5만명을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오로빌리안이 1500명입니다. 인구가 별로 늘어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오로빌에 살아봐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저는 외부 방문객의 처지에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로빌안에 무수한 소공동체가 포진되어 있습니다. 오로빌에서 운영하는 기업체가 100개가 넘습니다. 조그만 크라프샵이라던지, 옷가게, 수공예가게 등입니다. 오로빌에서 특히 자랑하고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건축입니다. 건축에서 강한 인상을 받습니다. 건축과 건설에 관한 회사가 열 개가 넘습니다. 건축을 디자인하고 생산하는 등 많습니다. 의류와 관련해서는 13개가 있습니다. 식품회사가 10개, 전자제품관련 12개가 있는 등 100개가 넘는 사업체가 포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공동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업체뿐만 아니라 거주하고 있느 곳도 공동체별로 하고 있어서 성격이 모두 다릅니다. 어떤 곳은 영성을 강조해서 규칙이 엄해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정해진 시간에 밥 먹는 등 그렇습니다. 느슨한 데도 있습니다. 저는 농장에서 포니하우스라는 곳에서 잤는데 벨기에 여자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오로빌내에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50개가 넘습니다. 잠자리를 구하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오로빌에서 자고 왔다고 해서 오로빌을 파악하기 힘듭니다.
몇 달을 살았다고 해도 다른데서 살아보지 않고서는 오로빌을 알기 어렵습니다. 인상깊게 본 것은 지구촌의 생태공동체를 돌아봤지만 생태적인 기술, 대체기술에 있어서는 첨단을 달리고 있습니다. 주력하고 있는 생태기술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솔라에너지, 흙벽돌, 플러시멘트라는 것입니다.
오로빌의 모든 건축물은 이 사람들이 지었고, 자재도 직접 만들었고 서양사람들입니다. 하룻강아지가 함부로 오로빌을 평가할 수 없지만 비판한다면 이게 오로빌이 인도에 있는 서양사람들의 식민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3세계에 들어가서 식민지를 형성해서 외부의 돈이 들어와서 돌아가고 기존의 토착경제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것입니 . 공동체의 기본모습은 자체 내에서 생산해서 순환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하고 지속가능하다고 보는데 오로빌은 그렇게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빌의 유지는 제가 볼 때에는 정확한 수치가 아닙니다만 상당한 부분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본으로 유지됩니다.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이 일부분은 생활수준이 놀라울 정도로 높습니다. 서양사람들의 수준과 비슷하게 삽니다. Western Life Style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로빌을 서양사람들에게 매력 있게 합니다. 돈을 조금만 들고 와도 오로빌에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로빌이 아닌 곳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똥이 많고 거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로빌은 서양사람들의 천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돈만 있으면 천국입니다.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천국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네 나라에 가서 몇 달을 일하고 벌은 돈을 가지고 와서 오로빌에 와서 1년을 먹고삽니다. 텔레비젼이 무섭긴 무섭더군요. KBS에서 방영된 것을 보고는 시쳇말로 뻑 가서 공동체의 공자도 모르고 오로빌을 찾아온 사람들이 한국사람들이 7-80명이 왔다고 하더라구요. TV를 보니까 지상천국이 여기 있구나하고는 왔다는 것입니다. 절반은 오로빌에서 살겠다고 작정을 하고 왔습니다.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어떤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직장생활 했는데 한편으로는 인생을 즐기면서 여유로움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직장생활해서 번 돈으로 빌딩을 샀는데 월세로 오로빌에서 잘 살겠다'는 구상을 하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공동체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노후에 이민가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오로빌이 어떻게 비쳐지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로빌 자체가 그런 것으로 유인하는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니까 오로빌 초기에 참여했던 사람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오로빌의 초기 공동체정신이 변질되었다, 되돌가갔으면 좋겠다는 고백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운 좋게 오로빌의 적자를 만났습니다. 오로빌의 상속자가 있겠습니까? 프랑스여자가 건설을 시작했고, 인도인들이 30% 정도 되고 프랑스사람이 다음 많은데 헤게모니를 갖고 있습니다. 다음은 독일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머지는 여러나라에서 30여 개국의 사람이 모여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몇 년전에는 두 명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7명이나 됩니다. 오로빌의 창시자가 마더인데 친한 친구가 프랑스사람인데 아기 때부터 귀엽게 봐서 오로빌에서 태어나서 자란 토박이가 젊은 세대가 꽤 있습니다. 마더가 너는 오로빌의 son이다라고 지정했다고 합니다. 오로빌의 어디를 가던 마더를 중심으로 종교집단화되었습니다. 그 청년의 아이의 이름을 모르고 오로손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저보고 바둑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자기집 주소를 적어줘서 다음날 갔습니다. 이 사람이 오로손이었습니다. 바둑동아리가 있었고 바둑을 잘 두었습니다. 한 판을 두고 어렵게 이기고 왔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이 친구의 집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TV에서 보면 어리어리한 집처럼 마당에는 공작새와 연못에는 금붕어가 있고, 집 손질은 인도의 인부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식민지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피부색 하얀색이 삽 들고 땅파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공동체를 만드는 노하우를 모두 서양사람들이 들고 온 것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치명적인 것인지 지역적인 것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오로빌 중앙에 오로빌의 상징인 신전입니다. 인류화합의 중심이라고 하는 상징물입니다. 유사종교로 말하면 신전인데 거기서 명상을 합니다. 노란 것이 순금입니다. 이 돈은 모두 서구에서 들어온 돈입니다. 저 안에 들어오면 직경 70cm 정도의 수정이 있는데 그 주위로 둘러앉아 명상을 합니다. 그것보다 맨땅에 나무한 그루 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오로빌의 비지터센터입니다. 안내를 받고 카페도 있고, 건물도 아름답습니다. 여기서 생산한 벽돌로 짓습니다.
같은 공간인데 백인들은 의자에 앉아서 밥먹고 있고, 인도인들은 땅파고 있습니다. 이런 광경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태양열전지를 이용하여 하수처리하는 것입니다.
솔라키친이라고 해서 천명이 앉아서 식사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 옥상에는 카페가 있어서 서양애들이 스케이트타고 놀고 합니다.
태양열 집열판인데 태양열을 모아서 초점을 모아 물을 끓입니다. 중앙의 관을 통해서 물이 끓어서 수증기로 주방을 보내서 요리를 하게 됩니다.
오로빌 주변에 현지여성들을 직업교육시키는 시설들이 많이 있습니다. 해먹이나 가방을 만드는 공장인데 인도여성들이 고용되어 만들고 있습니다. 모두 수작업인데 오로빌주변의 여자들과 젊은 남자들이 4천명 정도가 고용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숲 속의 기막힌 집들이 개인집들입니다.
오로빌의 학교입니다. 학교이름이 After School입니다. 그 앞에 또 하나의 학교가 있는데 Last School이랍니다. 제가 본 아름다운 학교입니다. 이렇게 멋있는 학교건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빌에는 10여 개의 학교가 있는데 오로빌의 이념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다고 합니다. 그 문제점을 인식해서 Last School을 지어서 오로빌의 이념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학생은 2-30명 밖에 안되고, 졸업장은 여기서 주는 것이 아니라 이 곳에 학교로 오지 않으려 한다고 합니다. 안이 뚫려서 정원이 있고 주 위로 교실들이 있습니다. 건물자체가 통자로 열려있는 구조입니다. 너무나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이것이 학교라는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건물외곽의 모습입니다. 숲 속에 괴수처럼 큰 나무가 있는데
오로빌농장은 굉장히 넓습니다. 제일 많이 기르는게 오이, 가지, 콩, 상추 같은 것입니다. 주변은 과수나무로 둘러있습니다. 나무마다 열매가 달려서 과수종류가 10여가지가 있습니다. 큰 농장인데 일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열 몇 명의 사람이 일하고 있습니다. 오로빌리안이 아닙니다. 책임자와 부책임자만 빼고는 오로빌리안이 아닙니다. 책임자는 스위스젠틀맨입니다. 부책임자는 인도여성입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하루 일당이 50루피 정도입니다. 공동체에서 왜 그렇게 싸게 주는가 하는 정도입니다.
정호진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농업노동은 하루일당 30루피가 기준이라고 하는데 이 공동체는 많이 주는 편인가요? 그렇다면 정목사님은 100루피 씩 준다면서요? 50루피로서는 생활이 안된다구요?
오로빌의 시멘트건물이 보이는 기술센터가 있습니다. 일체목조를 사용하지 않고 시멘트로만 사용해서 4층건물을 지었습니다. 시멘트로 짓고 철판을 대고는 다시 시멘트를 바릅니다. 문짝도 시멘트로 만듭니다. 절대 깨지지 않아요. 파라오시멘트라고 하는 것은 돔 형식이나 문짝, 바이오가스 으는 것 등을 만들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압축 흙벽돌 기계입니다. 약간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합니다. 흙벽돌과 관련된 기술을 개발을 많이 했어요. 기존의 구운 벽돌보다 강도가 강한 흙벽돌로 시멘트를 조금 섞어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벽돌집을 보급한다고 합니다. 흙벽돌 연구소도 있습니다. 주변에 전시를 해서는 돔형식의 벽돌쌓기 방법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1968년 2월 28일에 오로빌이 탄생하게 됩니다. 새벽4시부터 기념식을 합니다. 세계의 흙을 가져와서 합토식을 한 탑 옆에 모닥불을 피워놓고는 명상을 합니다. 마더라는 음성이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라는데 두 시간정도 나옵니다. 4시부터 시작해서 해가뜰 때까지 진행합니다.
뱅골만옆의 바다가 있고 해수욕장이 있는데 거기에 인도인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로빌리안이라는 증서가 없으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을아이들이 구걸하는 것 때문에 금지하고 있나본데 비애를 느낍니다. 그런데서 현재 마을사람들과 느끼는 격차, 차별 등을 통해서 이상한 감정들을 느낍니다.
오로빌게스트 하우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스트하우스입니다. 오로빌 도서관 옆에 있는데 하루 밤 자는데 300 루피 정도 듭니다. 인도전통의 정원양식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다보니 부족합니다. 오늘은 주마간산격으로 이런 공동체가 있다는 것만 보여준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인터넷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