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탈환(10월 22일)
10월 21일, 제 12연대 3대대 9중대(중대장 송호림 중위)는 동천강을 끼고 전진하여 순천농업학교까지 돌입했다가 포위를 당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송호림 중대장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차렷! 너희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총을 버려라”하고 고함을 쳤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반란군도 얼떨떨하여 1개 중대 187명이 총을 버리고 손을 들었고 송호림 중대장은 참으로 투철한 군인 정신으로써 기적적인 성과를 이뤄냈다. 187명 대부분은 좌익들에 의해 할 수 없이 반란군에 가입한 자들로 자수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제 3연대와 제 12연대는 외곽지를 확보하고 22일 여명을 기하여 일제히 시가지 소탕전에 들어갔다. 밤중에 반군들이 대부분 도주했기 때문에 오전 안에 순천은 완전히 진압됐다. 제 12연대는 순천탈환의 전공을 세운 제 5여단장 김백일 대령이 표창을 받았고, 2일간을 정비하면서 순천 시내의 질서회복에 임했다.
한편 반란군들의 주력이 이미 퇴각했음에도 지방 폭도들과 학생들의 무모한 저항은 계속됐다.
보성 ·고흥 · 광양 점령
정부는 순천을 진압한 후, 보성·고흥·광양 등 전남 동부지역 나머지 군들에 대해서도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순천의 서쪽 보성은 10월 21일부터 진압군 4연대가 공격을 시작, 10월 24일 4연대(오덕준 중령 지휘)와 수도경찰부대가 보성을 점령했다. 벌교는 순천 점령 후 진압군 6연대(김종갑 중령 지휘) 2중대, 3연대 3중대 수색대대가 10월 24일 12시에 점령했다. 진압군은 이어 남쪽인 고흥반도로 반군을 몰아넣고 봉쇄후, 6연대와 3연대 병력이 고흥으로 남진, 10월 25일 오전 8시 공격을 개시해 오전 10시 고흥을 점령했다.
광양으로 진격한 진압군 15연대는 10월 21일 반군의 공격을 받고 최남근 연대장이 그들에게 생포됐지만, 10월 23-24일에 걸쳐 제 4연대 2개 중대가 올라와 투입됐고, 12연대 2대대(김희준 대위)가 지원 병력으로 투입되어 10월 24일 17시 20분경 광양을 장악했다.
여수 탈환(10월 27일)
10월 21일 밤, 진압군 사령관 송호성과 참모장 백선엽, 연대장들이 모였다. 이때 백선엽 참모장은 광양과 백운산, 지리산 입구를 봉쇄하여 반란군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호성 사령관은 순천과 여수를 빨리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전은 송호성 사령관의 주장대로 진행됐다.
그러나 반란군 김지회는 백선엽 참모장이 지적한 대로 10월 21일 밤 10시를 기해 순천을 빠져 나와 광양과 백운산,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갈 계획으로 무기와 식량을 갖추고 출발을 서둘렀다.
순천을 단숨에 점령했던 국군은 10월 24일, 여수 탈환을 위해 진격했으나 반란군의 공격과 좌익 단체들의 기습은 만만치 않았다. 이에 따라 진압군의 희생이 계속 늘고 부상자가 속출하여 전열은 흩어지고 말았다. 이날 송호성 사령관은 장갑부대의 선발부대로 나서 지휘하다가 여수 근처 미평리에서 무장 폭도들의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받아 순천의 병원으로 후송됐다. 진압군 제 12연대는 순천으로 후퇴했다.
한편, 반란 근거지인 여수가 반란 발생 이래 6일간이나 반란군 치하에 있어 나라 안이 온통 떠들썩했고 민심은 동요했다. 이러한 상황이어서 전투사령부는 총력을 여수에 집중하기로 하고 해륙양면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육군부대는 순천 방면에서 남하하여 미평 방면에 집결했다.
여수 미평리 근처에서의 전투를 끝낸 지창수는 바로 그날 밤(10월 24일) 여수를 탈출했다. 여수의 잔류병력 대부분과 무장폭도들을 이끌고 백운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반란군이 여수에서 서둘러 빠져 나갔고, 남로당 무장세력 1천여 명과 동조세력 1,200여 명이 여수를 지키고 있었다. 시내에는 폭도들과 남녀학생들이 날뛰고 있었는데, 이들 중 가장 악질적이라고 알려진 것이 여수여중학생들이었다. 여학생 중에는 국군을 환영하는 척 하며 물을 준다고 유도하여 권총으로 국군을 사살한 예가 몇 건 있었다.
함병선 소령이 여수여중을 수색했는 때, 여수반란의 민간총지휘자가 그 학교 교장 송욱임을 알게 됐다. 반란군은 선량한 시민들과 철없는 여중생들까지 선동하여 진압하는 군경들은 동족 살상자이고, 반란군은 인민 해방을 위해 봉기한 군대라고 선전했다.
장갑부대가 선발부대가 되어 전진하고, 12연대가 동쪽, 3연대는 200고지와 종고산, 2연대는 여수 서부를 공격했다. 그런데 구봉산, 종고산, 장군산 등 야산 고지를 공격했으나 반란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27일 오후 3시 30분, 진압군은 하루 종일 시가전을 해서 여수를 완전히 탈환했다. 이틈에 반란군은 백운산에서 지리산 화엄사 옆 문수골로 진압군의 저항 없이 들어갔다.
반도들의 처단은 상당한 시일을 두고 계속됐는데,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양민들이 군경부대에 의하여 무고하게 희생당하기도 했다.
여수와 순천에서의 피해
백선엽 참모장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반란군을 막고 있던 12연대, 2연대 1개 대대, 5연대 1개 대대를 10월 26일 오전 6시 여수에 모두 투입하여 10월 27일 오후 3시 30분, 여수를 완전히 탈환했다.
1948년 11월 6일 호남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됐고, 국방부는 10월 21일부터 10월 31일까지의 종합전과를 11월 10일에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사살 363명 |
M1소총 911정 |
포로 2116명
(장교1, 사병 1465, 선동자 650) |
38식 소총 679정 |
칼빈소총 142정 |
기관단총 1정 |
99식 소총 863정 |
포 8문 |
자동소총 28정 |
대검 523개 |
81mm 박격포 14문 |
무전기 6대 |
다이나마이트 4상자 |
피복 적재트럭 10대 |
자동차 30대 |
기타, 연료, 식량, 실탄 다수 |
전 사 61명 |
(장교 9, 하사관 29, 사병 23) |
부 상 119 |
(장교 7, 하사관 33, 사병 79) |
실 종 4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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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서의 민간 희생자는 반란군에게 학살 당한 양민 1,200여 명, 반란군에 부상 당한 양민 1,150여 명, 소실 및 파괴된 가옥 1,538동, 행방불명자 3,500여 명, 이재민 9,800여 명이었다.
반란군들과 좌익 폭도들이 순천에서 저지른 만행들은 여수에서보다 더욱 잔인했다. 반란에 가장 선봉적으로 가담했던 것은 민주학연의 남녀학생들이었다. 특히 순천 중학교의 학생들은 소위 인민재판에서 형이 결정되면 서슴지 않고 나서서 총살, 타살(打殺: 때려서 죽임), 소살(燒殺: 불태워 죽임)을 했다.
당시 순천에서 반란군에 학살 당한 양민이 1,134명, 행방불명자가 818명, 사살된 반란군이 392명, 포로가 1,512명이었다.
기타 지방에서 학살된 인명 피해는 광양이 57명, 보성이 80명, 구례가 30명, 고흥이 26명, 곡성이 6명 등이었다.
여수 순천 양 지방을 비롯한 도내 각지의 반란 사건에 직접 가담한 일반 폭도들에 대한 고등군법회의가 11월 13, 14일 양일간에 걸쳐 순천에서 개정됐다. 동 군법회의(당시 담당법무관 김완용 대령 주심)에서는 12일 현재 검거된 458명의 피의자에 대하여 심리를 열었는데 양민으로 판명되어 석방된 자가 190명이고, 나머지 268명중 사형이 102명에 달했고 20년 징역 79명, 5년 징역 79명, 무죄석방 11명이었다.
한편 전라남도 당국에서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된 불순 교원 숙청을 단행, 11월 17일 제 1차로 초등학교 교사 61명을 파면했다. 또 제 8관구 경찰청에서는 반란 사건을 예기로 11월 3일부터 11일까지 활동을 개시한 후 3,539명을 검거했는데 그 중 순천 여수 등지의 반란 관계자가 3,293명에 달했다.
여수 14연대는 1948년 10월 28일 날짜로 영구히 해체됐다.
1949년 1월 10일, 육군사령부에서는 여수·순천 사건과 관련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된 반란군 혐의자의 재판결과를 발표했는데, 총 2,817명의 반란 가담자가 재판에 회부되고 410명이 사형, 568명이 종신형, 나머지는 유죄 혹은 석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