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10.1 폭동사건이란? 조선노동당 당수 박헌영과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이 주동이 되어 1946년 9월 24일 전평 조직을 총동원한 철도파업과 9월 전국 노동자 총파업에 연이어 일으킨 사건으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박헌영이 이북 해주로 올라가 폭력 전술(신전술)로 노선을 변경한 이후 일어난 전국적 규모의 폭동이었다. 이 배후에는 북한의 소련군정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1) 대구 10.1 폭동사건의 전개
10. 1폭동이 있기 전부터 우리나라는 쌀값이 60배로 뛰어오르는 등 식량 상황이 매우 어려워, 수많은 국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당시 실시된 ‘쌀 배급제’는 미군정이 쌀을 모두 모아 균등하게 배급하려는 정책으로, 매점매석(買占賣惜)을 못하게 하여 어려운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의도로 실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어 쌀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해지고 반미 운동이 확산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남로당은 이런 사회 분위기를 이용, 그들의 투쟁이 사상 문제가 아니라 ‘쌀’이라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순수한 항의인 것처럼 포장함으로써 수많은 민중을 선동하여 반미 시위를 일으켰고 그렇게 해서 박헌영의 위조지폐 사건을 덮으려 했다.
1946년 10월 1일 화요일 오전, 전평 선동자들은 쌀 배급을 받으러 가자고 시민들을 부추기면서 주로 부녀자 위주로 1,000여 명을 동원, 대구 시청으로 몰려가 “쌀을 달라”고 외쳤다.
10월 1일 오후 6시, 경찰 150여 명이 조용히 경계만 서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노평 사무실 2층에서 누군가가 “경찰 저놈들 죽여라!”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경계를 서던 경찰을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고 사정없이 돌을 던졌다. 정체불명의 돌에 맞은 경찰이 깜짝 놀라 2층의 노동자들을 향하여 순간적으로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하였고, 경찰의 갑작스런 총격에 서로 도망치느라 아비규환이었다. 이때 사격으로 여러 명이 쓰러져 “경찰이 사람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대구 전역으로 퍼졌다. 실제로 경찰의 사격으로 죽은 사람은 대팔(大八) 연탄 공장에서 근무하던 황말용(혹은 황팔용) 한 사람이었다.
10월 2일 오전 8시, 대구경찰서 앞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시민들은 전날 경찰이 발포한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다시 난동을 일으켰으며, 좌익 계열의 선동으로 흥분한 군중들은 경찰관의 가택을 파괴하는가 하면 경찰관과 그 가족을 학살하는 폭도로 변했다. 경찰 가족과 우익 인사와 그 가족들을 살해한 것은 조선공산당, 각 노조,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부녀동맹, 민주청년동맹(민청) 등에 속한 극렬분자들이었다.
10월 2일 오전 9시, 대구의대(현 경북 의대) 학생회장 최무학과 4명의 학생들이 콜레라로 죽은 시체에 시트를 덮고, ‘어제 대구역에서 경찰에 의해 죽은 노동자의 시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학생들을 선동했다. 미리 준비된 듯 흰 마스크에 실습용 흰 가운을 걸친 의료인 차림의 학생 4명이 시신을 누인 들것을 들었으며 그 뒤를 150여 명의 의대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따랐다. 섬뜩한 시체 데모 행렬과 자극적인 구호는 충격적일 만큼 호소력이 있어서, 지나가는 구경꾼들까지도 순식간에 흥분하며 뒤를 따랐다. 단숨에 학생과 시민 수만 여 명이 대구경찰서 앞에 모여들었다.
공산당 도당 책임자 장적우가 경찰이 먼저 무장해제하면 군중을 책임지고 해산시키겠다고 이성옥 대구서장에게 압력을 넣었다. 오전 11시 30분경, 이성옥 서장은 이 말을 믿고 경찰들과 특경대들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하였다. 순식간에 총기는 무기고로 들어갔다. 그러나 12시경 저들은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여 유리창을 부수고 100여 명의 죄수들을 석방시켰고, 모든 무기를 탈취하고 대구경찰서를 장악하였다.
폭도들은, 공산당원들은 물론 좌익 혐의로 잡혀 온 수감자와 온갖 잡범들을 유치장에서 풀어주고 무기고에서 소총, 대검 등으로 무장하고 급히 시내로 나왔다. 인민보안대장 나윤출은 시위대를 100명씩 묶어 조를 짜서 시내에 배치하였고, 평소 불만을 품었던 인사들을 찾아가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10?1폭동사건에 총포가 쓰인 것은 이때부터였다. 폭도들은 경찰과 우익 지도자와 민족진영 인사와 그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하였고, 대구 시내는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잡범들은 상점과 주점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으며, 온 대구 시내는 완전히 무법천지가 되었다.
(2) 경북 도내 군청과 경찰서의 피해
① 칠곡 경찰서
경찰직에서 파면당해 있던 서장 윤상탕(35세) 경감을 죽창, 낫, 곤봉 등을 가진 황점암 일행 60-70명이 집 앞 거리에서 처참하게 죽임
② 화원 지서
지서장 김현대(43세)를 10여 명의 청년들이 개 패듯이 때려죽임
③ 달성 경찰서
경찰관 6명 사망, 17명 중경상, 가옥 107채 파괴. 폭도들은 경찰의 얼굴과 몸뚱이를 칼과 도끼로 난자하고, 큰 돌을 머리에 떨어뜨려 짓이기는 야만적인 행동을 저지름
④ 왜관 경찰서
소총과 수류탄, 낫과 창으로 무장한 1천여 명의 폭도가 집결, 10월 3일 새벽 5시 30분쯤 왜관 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장석한의 눈을 파내고 혀를 잘라낸 뒤 전화선으로 묶어 시내를 한 바퀴 돌게 한 다음, 몽둥이로 타살하고 시체는 길거리에 버림. 경관 네 명은 도끼로 참살, 세 명의 경관은 구타당함
⑤ 영천 경찰서
- 죽창, 낫, 도끼로 무장한 2천 명의 폭도들이 경찰서를 포위하고 습격하였다. 총격전을 벌여 경찰 15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 폭도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 폭도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대구에서 100명의 지원경찰이 내려오기까지 만 이틀 동안 영천을 지배. 당시 경북 도내에서 가장 심한 참극이 벌어지고 막대한 피해를 입음
- 각 면에 산재해 있던 지방 본토박이 좌익분자 700여명이 합류, 신녕, 임고, 청통, 화산, 고경 등 5개 지서가 전소.
- 영천 군수 이태수를 잡아 새끼줄로 묶은 뒤 도끼와 죽창, 낫 등으로 난도질하여 죽이고 군청에 불을 지름. 19명의 면직원과 관리들 살해, 5만여명이 시위, 공무원 15명 사망, 100여 채의 공공기관과 가옥 전소
⑥ 구미 경찰서
10월 3일 오전 9시, 선산군 좌익들이 구미 경찰서에 집입, 배상철 서장에게 경찰 권한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고 위협하고 경찰서 안의 경찰들을 모두 유치장에 감금
⑦ 상주 경찰서
10월 3일 폭도들이 습격하여 경관 5명을 폭행 후 생매장
⑧ 자양 지서
폭도들은 경찰관과 그 가족들을 사지를 찢어 죽임
(3) 경관들의 치료를 거부한 대구의사회
대구의사회는 경관들의 치료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 부상당한 경관들이 병원으로 호송되어 와서 도리어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의료인들이 경관들의 치료를 거부하고 따돌리는 방법으로 폭도들의 항쟁대열에 참가한 것이다.
“어떤 부상한 경찰관이 살려달라고 병원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그 경관은 계단의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는데 위에서 그 병원의 의사가 떠밀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일이었다. ”(이원만, 「나의 정경(政經) 50년」)
“대구에 있는 병원들은 부상당한 경찰들이 폭도들에 의해 끌려나가 살해 당한 이후 부상경찰의 수용을 거부하였다고 한다.”(미 제24군의 G-2 보고서)
“도립병원을 비롯 일부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원들이 공동성명을 냈다. “발포를 중지하지 않는 이상 환자의 치료와 진찰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 실제로 이 때는 이미 도립병원 안에 폭도가 끼어 있어 입원한 경찰관을 죽이기도 했다.」(석정길,「새벽을 달리는 동지들」)
(4) 경북, 경남, 전남 지역 등 전국으로 폭동 확산
조선공산당 시위대들은 50-100여명씩 조를 구성, 환이자동차 회사의 차량을 탈취하여 경북 22개 군청 소재지로 흩어졌다. 폭동은 대구에서 경북 전역으로 다시 경남으로 전남으로 순차적으로 번져 갔다. 또한 조선공산당은 각 지방당부에 10월 폭동에 대한 ‘호응투쟁’을 전개하라는 지령을 내려 각 지방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11월에도 계속됐다. 전남 장성군에서 지서 습격?파괴, 보성군 득량 지서 습격, 독촉(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 2명 학살, 면력 지서 습격, 11월 11일 전주형무소 죄수 417명 탈옥, 전남 해남군에서 지서?면사무소 방화 소각 등이 이어졌다.
(5) 대구 10.1 폭동 사건의 배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폭동은 자연발생적 폭동이 아니라, 북한의 소군정이 깊숙이 관여한 사건이었다. 이는 소련 스티코프의 비망록을 통해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다.
① 9월 총파업 시기
전평 상무위원회는 당의 신전술 지령에 입각해 1946년 10월 파업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실제로는 9월에 일으켰다. 이는 소군정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1946년 9월 9일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 이에 대해 스티코프는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9월 11일, 16일 두 차례에 걸쳐 내려졌다고 기록했다.
② 북로당의 지원
9월 총파업이 일어난 지 사흘 뒤 1946년 9월 27일 북로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전 당원들이 총동원해 남조선 노동자의 영웅적 총궐기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이며, 적극적으로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북조선직업동맹은 전 당원들의 노동시간을 한 시간 연장, 그 소득액을 남조선 노동자들에게 위문금으로 보낼 것을 결의하였다.
③ 소군정의 자금 지원
소군정은 9월 총파업 때 200만원을 지원한 데 이어 10월 폭동이 계속된 약 3개월 동안 남조선 투쟁기금으로 300만원과 39만원, 그리고 122만 루블을 조선공산당 측에 보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조선공산당이 폭동의 상황전개에 따라 소군정과 지속적으로 교감을 가지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진 셈이다.
④ 구체적 배후 인물
박헌영과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
(6) 대구 10.1 폭동사건의 결과
대구 10?1폭동은 해방 이후 1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가 얼마나 급속히 파급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잔인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① 피해 규모
대구 시내에서만 경찰 38명,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 사망. 부상 1천 명, 행방불명 30명, 시위혐의자 7,400명. 776동의 건물 파괴, 경북 도내 경찰인명피해는 사망 80명, 행방불명 및 납치 145명, 부상이 96명, 관리 또는 우익인사들 등 민간인 사망자 24명, 부상 41명, 납치 21명
② 폭동의 진압
- 경찰 4,500명, 김두한(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이끄는 우익 청년 3,000명, 대전 2연대 1개 중대, 미 2연대 등이 총출동하여 겨우 진압되었다.
- 시위 가담자들의 대구 6연대 입대 : 밤낮 없는 경찰들의 수색에 시위 가담자들은 북한으로 탈출하거나 야산대가 되어 산에 숨어 버렸고 그들 중 일부는 국방경비대 대구 6연대에 입대하였다. 그 결과 대구 6연대는 좌익 소굴이 되어 여수 14연대 반란 이후 1948년 11월까지 3차에 걸쳐 반란을 일으키다가 결국은 해체되고 말았다.
- 빨치산의 시작 야산대 : 미군과 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수배하자, 이들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우리나라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野山隊)’를 만들었다. 뒤에 이들은 ‘구(舊)빨치산’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