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이한(李翰)
【주요파】▲시중공파 ▲평장사공파 ▲주부공파 ▲안천대군파 ▲안원대군파 ▲안풍대군파 ▲안창대군파 ▲안흥대군파 ▲함령대군파 ▲함창대군파 등 109개파.
전주이씨는 신라 문성왕(839-856)때 벼슬을 지낸 이한을 시조로 한다.
태조 이성계는 시조의 22세손이다. 전주이씨는 이자춘과 이성계가 고려말 고려 중앙정부에 진출하면서 여러 문벌 귀족들과 인척관계를 맺어 크게 번창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래 더욱 번성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의 하나가 된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전주의 유력한 세력가였다. 이때는 몽고군의 고려 침략이 한창이던 고종 후반기였다.
그는 그가 아끼던 관기의 일로 산성별감과 문제가 생겨 전주에 더 이상 살 수 없어 강원도 삼척으로 옮겨 두타산성에 의지하면서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때 그를 따라 삼척으로 옮긴 사람들이 모두 1백70호나 된다.
그러나 자신과 갈등을 일으켰던 산성별감이 이 지역 안렴사로 부임하게 되자 다시 동북면의 의주로 옮긴다. 그 뒤 이안사는 원나라의 벼슬자리에 임명됐으며 그이 직책은 아들 이행리에게 세습된다.
이행리의 아들 이춘도 역시 아버지의 관직을 세습하고 몽고식 이름까지 받는다. 그 뒤 이춘은 의주에서 함주로 옮긴다. 이춘의 아들 이자춘은 쌍성총관부 관내의 실력자로 있으면서 고려에 귀순한다.
공민왕도 원의 쇠퇴에 대응, 약 1세기 동안 잃었던 영토를 수복할 뜻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자춘을 잘 회유했다. 다음해 공민왕은 중앙정부에 포진한 원의 세력을 일소하고 99년 동안 원에 빼앗긴 쌍성총관부를 공격, 마침내 영토수복에 성공한다. 이 전쟁에서 이자춘은 고려군에 협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벼슬자리에 나선다.
이자춘이 죽은 뒤 그의 세력은 아들 이성계에게로 이어진다. 이성계는 고려에 벼슬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마침내는 정도전, 조준 등이 중심이 된 정치세력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를 건설한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이안사의 선대에서 갈라지는 파와, 그 이후에서 갈라지는 파가 있다.
이 중에서 조선조에 가장 번성한 파는 세종의 열세번째 아들 이침을 파조로 하는 ▲밀성군파다. 후손에서 정승 6명, 대제학 3명이 배출되었다.
이에 버금가는 파는 정종의 열번째 아들 이후생을 파조로 하는 ▲덕천군파다. 그 외에 세종의 다섯째 아들 이여를 파조로 하는 ▲광평대군파, 정종의 넷째 아들 이무생을 파조로 하는 ▲선성군파, 태종의 둘째 아들 이보를 파조로 하는 ▲효령대군파가 번성했다.
고려 때 무신정권의 주역 이의방은 전주이씨 자손으로 이성계의 6대조다. 그는 고려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 등과 함께 무신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다. 이의방은 명종 때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정중부의 아들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된다.
이 때 형인 이의준도 함께 잡혀 죽었고 태자빈이 되었던 그의 딸도 쫓겨난다. 이원익은 선조 2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임진왜란 후인 선조 30년 우의정에 오른다. 판무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598년 영의정이 되었다. 탄핵을 받아 벼슬이 떨어진 유성룡을 변호하다 오히려 사직하고 은퇴하기도 했다.
1608년 대동법의 실시를 건의, 경기와 강원도를 비롯 전국적으로 이를 실시, 불합리한 조세제도의 시정에 앞장섰다. 안주목사로 있을 때 군병방수제도를 개혁, 1년에 3개월 복무를 2개월로 단축했다. 이원익은 청백리로 유명하며, 남인에 속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받았다.
서민적인 인품으로 오리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지봉 이수광은 인조 때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를 이루는 “지봉유설”의 저자로 유명하다. 광해군 6년에 간행된 지봉유설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사상의학으로 유명한 동무 이제마(1838-1900)도 전주이씨가 배출한 인물이다. 그는 주역의 태극설인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사상을 인체에 적용했다. 기질과 성격의 차이에 따라 인간을 4가지로 나누고 그에 적합한 치료방법을 제시했다. 조선의 의병장 이석용은 잇헤이그 밀사사건의 주인공 이준 열사와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도 전주이씨가 배출한 인물이다.
우리나라에 덴마크 체조와 핸드볼을 처음으로 보급시킨 체육인 이병학(1898~1963)도 전주이씨 후손이다.
시조는 신라때 사공을 지낸 이한이다. 태조 이성계는 시조로 부터 22세, 즉 한의 21대 손이다. 그러나 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안사 이전의 사적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안사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 곳 지주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지주가 다시 그 곳으로 부임해 오자, 가족을 데리고 바다 건너 간도 지방으로 가서 원나라의 다루가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 행리, 또 그 아들 탁조 춘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로서 원나라의 벼슬을 했고, 춘의 아들 환조 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었다.
이성계는 영흥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에서 벼슬을 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가 되어 원군과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수문하시중에 이르러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게 되었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122파로서 거의가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의 상계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사 이전의 분파로는 시조 한의 14대손인 단신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 15대손 용부아들 차남 16대손 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 17대손 영습을 파조로 하는 주부동정공파, 안사의 종손 윤경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 한의 21대손 귀을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 등이 있다.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안사의 아들인 안천, 안원, 안풍, 안창, 안흥의 5대군파, 행리의 아들인 함령, 함창, 함원, 함천, 함릉, 함양, 함성의 7대군파, 춘의 아들인 완창, 완원, 완천, 완성의 4대군파, 자춘의 아들이자 태조의 서형제인 완풍군파와 의안대군파 등 도합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는 일반적으로 99파(25대군, 74군)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 즉 후사가 없는 대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조선의 왕권은 전주이씨인 왕족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 왕비, 왕세자비의 동성친과 이성친,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 유지되어 왔다.
따라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골육간의 다툼은 조선 500년을 통해 거의 끊일 사이가 없었다. 역사적으로 전주이씨는 그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내지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어 왔다.
전주이씨의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파로서 6명의 정승과 3대의 대제학을 배출했으며, 덕천군파가 부자 대제학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그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 정승 1명과 많은 문, 무과을 배출한 효령대군파 등이 뛰어나고, 무림군파와 덕흥대원군파는 무관의 집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전주이씨의 후예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측에서는 대략 2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가 으뜸이고 광평대군파, 덕천군파, 밀성군파, 양녕대군파 등이다
파보
출저 전주이씨
*註) ( )은 제왕별, 숫자는 족보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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