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와 기원
우리 인동장씨의 시조(始祖)는 고려초에 인동현(仁同縣)의 옥산(玉山)땅에 처음 복거(卜居)하신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의 벼슬을 지내신 휘금용부군(諱金用府君)이시다. |
◎문강공(文康公) 여헌선생(旅軒先生) 유록에 기록하기를 「고려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공(高麗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公)을 시조(始祖)로 모시는 것은 우리가 선대 조상으로 알 수 있는 최초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조상은 몇 대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 선대조상이 이곳 인동(옥산)땅에 전거(奠居)하신 내력을 살펴보면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이십대뿐인데 그 이상의 선조께서도 이곳 인동)(옥산)땅에 본래 적을 두었는데도 아득히 멀어서 전해오지 않는 것 인가 증거 할 수 없고 얻어듣지도 못하였다]고 하셨다.
◎우리 족보와 종중 선부노(先父老)의 시장(諡狀), 가장(家狀), 행장(行狀), 신도비(神道碑), 유허비명(遺墟碑銘), 묘비(墓碑) 등 종족사의 모든 문헌에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휘금용(諱金用))부군(府君)을 시조(始祖)로 삼았으며 그이상의 선조는 전해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장씨의 조상이 중국에서 들어 왔다는 것이 통설이나 우리 인동장문은 중국에서 들어온 조상이 누구인지 전해오는 문헌의 증거가 없어 알 수 없다.
◎문강공(文康公) 여헌선생(旅軒先生) 수록에서 우리 장씨는 혹자가 말하기를 본래 중국사람으로 옛날 한 장수가 천자의 명을 받들고 우리나라를 정벌하러 와서 아들 한 사람이 남아 살았으니 드디어 우리나라 사람이 되었다. (吾張或云本以中原人(오장혹운본이중원인), 古有一將(고유일장), 奉帝命來(봉제명래), 征(정), 我東而征之因留一子以居焉(아동이정지인류일자이거언), 遂爲東人(수위동인)) 고 하였으나 이것은 약 170년뒤에 문강공선생(文康公先生) 오세손 동추공(同樞公)(휘지학(諱趾學))이 영조 45년(1769년)에 우리 옥산(인동)장씨 족보서문(族譜序文)에서 이는 다만 전해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지 확실한 것이 아니다
◎(此乃但記其所聞非以爲的然也(차내단기기소문비이위적연야)) 라고 하였으며 우리나라를 정벌하러 나온 중국 장수가 어느때 누구인지 시조이신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과의 관계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삼중대광(三重大匡)은 고려때 정일품의 품계이고 신호위(神虎衛)는 국방을 맡은 6위중 하나이고 상장군(上將軍)은 각 군영의 수직(首職)이며 2군6위에 각1인씩을 두어 군병을 통솔하였다. 우리가 통칭 시조를 말할 때는 벼슬의 이름을 따서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 또는상장군공(上將軍公)이라 한다.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께서는 고려의 국기를 닦은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부월(斧鉞)의 현직을 맡아 경방정사(經邦靖社)의 공적과 익위보리(翼衛補理)한 사적이 많았으나 세월이 오래 되고, 세대가 멀어지므로 인하여 문헌이 일실되어 전해 오지 않아 상고 할 수 없으니 안타가운 일이다.
◎시조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께서 인동의 옥산하에 조기(肇基)한 이후 천여년을 내려오면서 그 후손이 현재 십팔대까지 세계가 이어지고 있다. 三重大匡公(삼중대광공) 이전의 선대 조상은 몇대나 되는지 또는 어느 때 누구인지 휘(諱)와 관직이 우리 장문의 족보나 다른 문헌에 전해 오지 않으니 오직 족보상에 기록된 최상의 선조이신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인동(仁同)의 인의동(仁義洞)에 옥산사를 세워 숭의묘(崇義廟)에 신위(神位)를 봉안하여 매년 청명일에 제향(祭享)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