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임금님과 당나귀 귀 임금님 - 정직한 믿음과 무오설(無誤說)의 무요(無要)
어렸을 때 들었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
옛날 어느 임금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옷을 지어오라고 명령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재단사가 임금에게 와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옷감으로 가장 훌륭한 옷을 지어왔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옷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단사가 지어서 가져왔다는 옷이 임금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는 처지. 옷이 아주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면서 그 보이지 않는 옷을 입었다.
신하들 모두 자기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옷을 아름답기 그지없는 옷이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렇게 훌륭한 옷을
백성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임금님이 궁 밖으로 행차를 하시게 했다. 백성들 모두 자기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곳이 기가 막힌 옷이라 하며 서로 경탄의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임금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임금님이 발가벗었다."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좀더 확대해 보자. 그 어린아이가 "임금님이 발가벗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신하들은 분명 임금님 옷의 아름다움을 서로 자기가 가장 잘 알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나라 안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학자들을 불러다가 그 옷에 대해 연구하라고 한다. 그러면 학자들은 옷에 관한 참고문헌이란
문헌은 다 뒤적여 그 옷의 천이 분명 페르시아의 비단임에 틀림이 없다고 보고한다.
또 다른 학자는 그 이론을 연장시켜 페르시아 비단의 기원과 역사, 그 제조 과정 등을 연구하고, 다른 학자는 다시 페르시아
비단과 중국 비단의 차이, 페르시아 비단의 미래 등을 연구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페르시아 비단에 수놓인 황금 무늬의 특색
등등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를 계속해 간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연구 성과를 백성들에게도 가르쳐준다. 드디어 임금님의
옷에 얽힌 이 모든 이론, 이 모든 역사를 다 아는 것이 훌륭한 신하나 백성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서로
다투어 이를 학습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웃지 못할 희극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런 웃지 못할 희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황금빛 찬란한 페르시아 비단으로 만든 임금님의
옷을 눈을 닦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임금님의 알몸뿐. 임금님의 알몸에 관한 것이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지만 비단 옷이라. 큰일이구나. 내가 믿음이 약한 탓일까? 믿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자. 그러나 우선은 사람들에게 분명
비단 옷이 보인다고 하고, 그 비단 옷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면은 임금님의 키에 딱 맞게 재단된 재단법쯤이라고 해두자.'
그뿐이 아니다. 이런 학자들이 엮어 놓은 이론 체제를 '교리'라는 이름 아래 마치 하늘에서 그대로 떨어진 진리나 되는 것처럼
여겨야 하겠는데, 지금 같은 개명시대에, 그렇게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지성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그런 엉뚱한
이야기를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참자. 믿는 척 정도로 하고 살자. 좋은 것이 좋은 것.'
그러나 만에 하나 우리가 지금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고 남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벌거벗은 임금님 못지 않게 딱한 임금님이 한 분 더 있다. 바로 당나귀 귀 임금님이다. 이발사에게 자기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 발설하는 날에는 반드시 엄벌에......"하고 엄명을 내렸다는.
그런데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면 어떻단 말인가?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해서 임금 노릇을 하는데 치명적인 장애가 생긴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귀가 당나귀 귀면 어떻고 고양이 귀면 어떤가? 임금 노릇만 잘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피상적인 결함
때문에 본질적인 것 자체를 배척할 필요가 없다. 영어식 표현으로 하면 목욕물을 버리기 위해 아기까지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당장 딴 나라로 이민가겠다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임금님이 임금님으로서 지금까지 잘 해 왔는데, 지금 와서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임금님의 임금님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할 것인가.
오히려 당나귀 귀를 가진 임금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철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철수가 철이 들어, 자기 아버지가 객관적으로 모든 면에서 누구보다 뛰어나거나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자기 아버지를 덜 사랑하거나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다리가 한쪽 없다 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욱, 그를 사랑할 수도 있다.
기독교가, 혹은 성경이, 혹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교회의 가르침이, 혹은 어느 지도자가, 우리 모두 지금껏 생각하던 것과 같이
완전무결해야 믿고 따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유치한 생각이거나 좋게 말해 소박한 생각이다. 임금님에게 당나귀 귀가
있어도 임금님 노릇 하는데 지장이 없듯이, 성경이나 기독교의 가르침 등이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 없이 완전무결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 본래의 역할을 충실히 해오고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임금님이나 부모나 기독교나 모두 객관적으로 최고이기 때문에 따른다는 믿음은 필요없는 믿음이다. 어느면엥서 이것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류병 증상이거나 지나친 결벽증 현상이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지켜주도록 되어야 한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옹호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를 주눅들게 하고 거짓되게 하는 믿음 아닌 믿음을 믿음이라 붙들고 있어야 믿음이 있는 것으로 믿는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가 없다. 믿음은 임금님의 비단 옷이나 거기에 관련된 이론 체계나 의식(儀式) 등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어떤 특정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일종의 마음가짐이요 신뢰와 귀의
같은 것(commitment)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가르침 중 새로운 환경과 처지 때문에 분명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 있으면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한 그 아이처럼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쳐나가야 한다. 처음부터 그런 결함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무오설(無誤說)' 같은 것을 주장하거나,
그런 결함을 발견했을 때 일거에 관계를 청산해버리려 하거나, 그런 결함을 쉬쉬하며 호도하기 위해 안간힘 쓰거나 하는 것은
아직도 성숙한 지경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성숙한 믿음은 우리를 신나게 한다. 우리에게 시원함과 툭트임을 가져다 준다.
첫댓글 이렇게 미화시키기에는 기독교가 저지른 과오가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