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조선생(靜庵趙先生)은 성현(聖賢)의 학문(學問)으로써 격물치지(格物致知)와 택민(澤民)의 정치를 일으키려다가 도리어 뜻밖의 화를 만났으나, 그 언행(言行)이 가히 세상을 위한 법도가 될만한 것이지만 곧 세상의 꺼린 바 되어서 그의 도는 거의 끊어졌던 것이다. 친히 지결(旨訣)을 이어 받고 독실히 믿어 죽음으로 지키며 여러 사람이 떠드는 가운데서도 공공연히 칭송하여 그를 다시 세상에 밝히려고 한 자가 있지 아니하였다면 사문(斯文)에 어찌 오늘이 있었으리오, 이는 곧 휴암충숙백공(休庵忠肅白公)이니 위는 인걸(仁傑)이요 자는 사위(士偉)이신 그 사람이다. 대개 우리 중묘조의 성대에 이러 어진이가 일어났으니 김공 식(金公 湜)의 뛰어난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서 성균관 장이 되니 개연히 구도의 마음을 갖고 매양 여러 유생들의 예를 다라서 강학을 하는 외에 공은 홀로 글의 어렵고 의심나는 데를 잡아서 반드시 그 의리(義理)의 바름을 얻은 뒤에 그만두었으며 더욱 조선생을 높이 믿고 몸을 맡기어 사사(師事)하며 나아가 그 집 곁에 방을 꾸미고 살았는데 얼마 후에 북문(北門)의 화(禍)가 일어나서 스승과 벗들이 모두 선멸되니 공은 아픈 생각과 슬픈 상처로 곧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서 오래된 연후에 돌아왔고 간간히 태학(太學)에 놀러가면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에 사문(師門)의 옛 법도를 고치지 아니하니 뭇 사람들이 지목하고 문강(文綱)을 가하려하므로 공은 고의로 그 모난 행동을 조금 버렸다. 또한 어머니의 나이가 높아짐으로 마침내 사마(司馬)와 급제(及第)를 했으나 당신의 사람들이 조선생의 무리라 하면서 빈척하여 성균관에 예속시키고 오래된 후에 비로소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다. 고사에 이조(吏曹)에서 정사를 열면 예문관의 한 사람이 정청(政廳)으로 나아가 그 득실을 기록하는데 공은 아득한 신진으로써 그 폐지된 것을 복구시켜서 붓을 들고 오직 근엄히 기록하니 정조(政曹)에서는 심히 이것을 꺼려했었다. 승급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어서 모부인(母夫人) 봉양을 위하여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었는데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택하여 그 사람으로써 가르치게 하고 또 친히 이르러 구독(句讀)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명도(明道)가 진성(晋城) 고을에서 함과 같았다. 부역을 고르게 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여 백성의 삶을 후하게 하고 창고와 관사 등의 퇴락한 곳을 모두 수리했으며 청탁으로써 법을 문란하게 하는 자가 있었으나 공은 한결같이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다스린 공적이 제일로 되어 특별히 한 계급 승진시키어 헌납(獻納)으로 불렀으나 꺼린 자의 참언으로 도로 옛 직책에 머물렀다가 마침내 지평(持平)에 임명되고 다시 호조정랑(戶曹正浪)으로 전보되어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註官)을 겸하였다. 을사(乙巳)에 인묘(仁廟)가 돌아 가시어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문정대비(文定大妃)가 밀지를 윤원형(尹元衡)에게 내리어 인묘의 외삼촌 윤임(尹任) 및 대신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모두 제거하게 했다. 공은 이때 다시 헌납이 되었는데 주모자들은 공을 어렵게 생각하고 허자(許磁)로 하여금 공을 설유하게 지정했는데 그는 옛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자(磁)는 여러 가지로 말했으나 공은 거절하여 듣지 아니하니 자는 노하여 말하기를 "앞일을 위곡(委曲)한다면 노친이 계심을 알아라. 작은 사고가 아니냐"라 하였고 혹자는 말하기를 "병으로 사양하여 면할 수 있지 않는가"했으나 공은 말하기를 "일에 임하여 난을 피하는 것은 나는 하지 아니한다"하고 다음날 대간(臺諫)에 모두 모여서 논의함에 공을 많이 쫓았기에 이을 발설치 못했다. 이어서 정순붕(鄭順朋), 이기(李 ), 임백령(林百齡), 허자는 바로 대궐로 들어가서 삼인의 죄를 청하였다. 때에 이회재언적(李晦齋彦迪)은 원상(院相)으로 있으면서도 감히 구하지 못하였다. 공은 "장차 동지들과 이를 싸우겠다"했으나 동료들은 목을 움추리고 감히 응하는 자가 없으므로 공은 이에 홀로 장계를 올려 이르기를 "국가의 일은 마땅히 광명정대하게 나와야 하는 것인데 지금 이 세 사람을 벌한 것은 조정에서 의논도 아니했으며 죄명도 열거하지 아니하고 왕후의 아우가 밀지를 받들어서 행사했으니 어이 이것을 후세에 보일 것이며 또한 간인들로 하여금 컴컴한 곳에서 선동하여 싫어하는 사람들을 모함하라니 그런 무리의 해독을 어찌 말로 다하리이까 원형은 내지를 받들어서 그 악을 자행하고 대사헌(大司憲) 민제인(閔齊仁)은 내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제재가를 기웃거림이 전령, 군졸과 같았으니 모두 죄주기를 청하며 또한 양사에서도 그 언관의 책임을 잃었음을 탁핵하옵니다." 했던 바 문정이 크게 노하여 공을 옥에 내리고 말하기를 "임들이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괴하였는데도 이 사람은 공정을 칭탁하여 역적을 옹호한다"고 했으니 일은 장차 측정하기 어려웠었다. 때에 북창 정공렴(北窓 鄭公 )은 순붕(順朋)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의 옷소매를 붙들고 간하여 말하기를 "백공은 충직한 사람인데 지금 만일 죽이게 된다면 아버지는 장차 만세에 죄를 얻게 될 것입니다"하니 순붕도 이에 소를 올려 이르기를 "백공은 국가의 중대한 일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밀지의 비를 말하니 미련하고 망년된 말이나 반드시 깊이 벌줄 것은 없습니다."하니 문정도 이로 연유하여 노기가 가시어 다만 관을 교체하였기 파주(坡州)로 돌아갔다. 이에 유.윤 삼인은 역적으로 논난되어서 죽고 3년을 지나서 정미(丁未)에 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를 가지고 고변(告變)을 하여 마침내 안변(安邊)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안되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공은 분상(奔喪)치 못하고 슬픔과 비통함이 평상시의 배나 더했다. 5년을 지나서 대사(大赦)가 있었음으로 전리(田里)로 방환되었으나 공은 평소 가난한데다가 이에 이르러 생리(生理)에는 더욱 소연하나 진실로 안연하였다. 이에 앞서 기유년(己酉年)에 어떤 간사한 사람이 또 변(變)을 아뢰어 을사사옥에서 남은 사람으로 면죄된 자가 드물었으나 공은 역시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손이 오면 술을 권하고 노래를 부르며 담론하는 것이 자약함으로 사람들은 그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매일 밤에는 반드시 태극도설(太極圖說), 정주제서(程朱諸書)를 외우며 일찍이 좌우에 두지 않음이 없이 20여생을 살다가 원형이 패사하고 공의가 조금 열리어 공은 다시 서용되어 사관(四官)을 역임하고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시어 백성을 위하여 이(利)를 일으키고 폐란을 제거하여 없애니 유민들이 비를 세워 그를 칭송하였다. 선묘(宣廟)가 즉위하여 현준한 사람을 구하여 힘쓰니 공은 조야의 인망이 대단하여서 몇 달 동안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직으로부터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승지(承旨)에 오르고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옮겨졌었다. 대사간이던 때에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공이 진언하기를 "뒤를 이은 임금이 어리지 아니하니 여주께서 국정을 오래도록 들음이 불가합니다"하였더니 여주가 즐겨하지 아니했으나 역시 얼마 안되어서 수렴을 거두었다. 공은 상을 위하여 차(箚)를 올려 말하기를 "옛 성왕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근본을 세웠으니 요순의 이른바 정일집중(精一執中)이란 것이 곧 그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체득하시어 능히 그 법을 세우면 뭇 신하의 한 마음은 깨끗치 아니할 수 없을 것이며, 크게 뜻을 같이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여염집에서 생장했다 하시나 이는 상왕(商王)이 오래도록 밖에서 노고하다가 소인들의 의지할 바를 안 것과 같음이니 진실로 시종을 능히 하시어 학문으로 법을 삼고 뜻을 겸손히 하시고 때로는 기민하시어 마음과 이치가 하나가 되며 정치와 학문이 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른바 경(敬)이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진 것이니 전하께서는 이것을 생각하지고 이에 마음을 두시어 동할 때나 정할 때나 잃지 아니한다면 이른바 [독실히 공경하여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것이니 가히 익혀서 쫓으면 이루게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 동방의 도학은 정몽주와 김굉필로부터 비로소 연원이 있었는데 조광조(趙光祖)의 걸출한 재주로써 정주의 학문을 천명하여서 법도에 맞는 행동을 하였고 예가 아니면 동하지 아니했으며 명절을 크게 장려하였고 사문(斯文)을 일으켜서 이제삼왕(二帝三王)의 성대를 거의 다시 보려다가 곤(袞)?정(貞)이 그 귀역(鬼 )을 자행하여 결국 원통히 죽었지마는 조야의 동분함은 오래 갈수록 더욱 깊어 가오니 마땅히 참선비를 미루어 포상하기고 고관미시(高官美諡)를 주시어 문묘에 종사한다 하시면 천리도 가히 밝아질 것이요, 인심도 가히 바르게 되어서 도덕도 한결같을 것이요, 풍속도 가히 순(淳)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교체되어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전직으로 돌아갔다. 상께서 사친의 제사에 대하여 논의하니 "공으로는 대통을 이은 의리가 비록 엄하다 하겠으니 사은(私恩)도 모두 끊을 수 없는 것이니 지금 제관을 파견하여 지정(至情)을 펴시더라도 옳을 것입니다."하였는데, 언자들은 비라 하여서 이것을 논박하여 공을 바꾸게 하였으나, 다시 공조참의가 되시었다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전보되었지마는 공은 이것으로 인하여 드디어 퇴귀하시었다. 상께서 공의 풍도와 절의를 생각하여 몇 번이나 병조참지대사간으로 불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였는데 갑자기 가선(嘉善)으로 올려서 대사헌을 제수했으나 공은 세 번 사양하기니 수찰을 내려서 이르기를 "군자가 세상에 나서 임금을 요순으로 이루고 이름을 죽백(竹帛)에 드리움이 옳커늘 경은 충성이 일월을 꿰뚫고 절의는 빙상(氷霜)을 능가하니 마땅히 속히 부름에 응해야 할 것이다."하여 공은 드디어 조정으로 들어와 얼마 아니되어 여러 차례 교체되어 동추(同樞),병조참판(兵曹參判),공조참판겸경연의금부사(工曹參判兼經筵義禁府事)에 배수되었다가 다시 헌부(憲府)의 장이 되시었다. 다시 일찍 가뭄으로 소를 올려 이르기를 옛날 한나라 신하의 말에 " 천재가 피부를 하프게 하지 아니하고 진귀한 음식이 성체에 상함이 없음으로 삼광(三光 : 日月星의 광채)의 어그러짐도 멸시하고 상천(上天)의 노여움도 가벼이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진실로 오늘의 약석(藥石)이 될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게서는 깨끗이 스스로를 반성하시고 통쾌히 폐습을 씻어내어 진상한 공물을 적당한 양으로 감손하고 각 방면의 군졸노예에게 그 괴롭고 쉬운 것을 고르게 하며 일족에게 침해된 풍습을 제거하며 이름없는 세금을 금할 것이며 그렇게 하므로써 나라를 이익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기필코 행할 것을 기약한다면 지금에 와서도 오히려 잘 되어 나갈 것입니다. 지금 이미 억울한 자를 풀어주시고 있으나 그러나 누가 을사, 기유의 원통함에 더함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원하건대 옥음을 내리시어 그때 죄를 입은 자에게 모두 관작을 복구시키고 적몰한 물건은 모두 환급하게 하면 충성된 혼은 감격할 것이며 사람들은 흥기할 것입니다. 또한 이황(李滉)은 학문을 매우 좋아하며 성리학을 극명하게 강론하오니 올바른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이 사람에게 위임치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또 조정암(趙靜庵)의 문묘종사를 아뢰어 청하였는데 상께서는 많이 채용하시었다. 또한 정의(廷議)는 을사의 위훈을 삭탈코자 하였지만 권신 중에서 하고자 하지 아니한 자가 있었다. 공은 면책하여 말하기를 " 이 논의가 행하지 못한다면 공의 죄는 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병조로부터 형조를 거쳐 대사헌으로 옮겼을 때에 문득 공이 장차 조귀(朝貴) 약간을 논택할 것이라는 뜬 소문이 있어서 도성안이 떠들석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나의 심사는 청천백일과 같으나 일찍이 물러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하고 곧 사퇴하고 돌아가시었다. 뒤에 어느 사람이 상서한 말에 "백모(白某)는 사림을 모해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물러섰다"하였는데 상께서 노하여 말하기를 "백모(白某)는 정충(精忠)이 관일(貫日)하다." 하며 그 사람을 규명하여 다스리고자 하였다. 공은 관에 있을 때에 마부의 수당(手當)을 받지 아니하였고 받은 것이 있을 때면 번번히 모든 친척에게 나누어주었기에 물러나게 되자 조석의 양식도 없어서 감사(監司) 윤공근수(尹公根壽)가 장계로써 보고하니 다시 명하여 미두(米豆)를 보내었으므로 글을 올리어 감사하고 이어서 다시 조광조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공은 조선생의 묘액을 청하고자 병을 이겨내며 서울로 들어서니 원생들이 이미 진정하여 빌었으나 얻지 못하였다 하기에 곧 돌아갔다. 특별한 뜻으로 참찬(參贊)으로 올리어 제수하여 글을 내려 불렀으나 거듭 사양하였으되 윤허가지 않자 조정에 들어와서 비로소 지극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미 80이나 다사 천안(天顔)을 볼 생각으로 이에 입시하였습니다."하니 쌍께서 위문하심이 지극하였다. 공은 수만언을 올리었는데 모두 지치(至治)의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늙고 귀가 멀어 열에서 하나 밖에 듣지 못하여 마음 스스로 개탄하고 다시 봉사(封事)로서 진언하고자 널리 생각하고 괴롭게 사색해서 몇 달이 지난 후에 곧 올리었는데 대개 그 전후는 재앙이 닥치는 이유와 임금의 마음에 병이 되는 근원에 언급하였으며 또 동서분당의 폐를 극론하였고 또 우계(牛溪)와 율곡의 도덕을 말하였으며 또 조정암(趙靜庵)의 도덕, 학문 공덕의 아름다움을 극진히 아뢰어 원액(院額)의 막혔음을 애석하다 했고 끝으로 남북융만(南北戎蠻)의 형세를 말하고 군정을 닦을 것을 청하였다. 상께서 우대하여 대답하시고 다시 명하여 등사하여서 안으로 보내라 했다. 그때의 무리들은 붕당을 논한 바가 자기에게 부당하다 해서 양사(兩司)가 글을 교대하여 이것을 탄핵하였고 또 일찍이 소본(疏本)을 율곡선생에게 부탁하여 윤문시킨 것을 가지고 언자들은 "이이가 스스로 소를 초해서 백공을 유인하여 상소했다"하고 장차 법으로 다스리려 하니 공은 소하여 말하기를 "신은 문장이 부족하여 이이로 하여금 닦아 윤문시겼습니다. 옛날 정자(程子)께서도 여공을 대신하여 응소봉사를 지었고 부필을 위하여서 산능소를 초했기에 신도 또한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지 아니했습니다." 했던 바 상께서는 노여움이 풀리여 이를 위로하여 달래었으나 이제부터는 더욱 시배(時輩)들과 서로 거슬리었다. 일찍이 수레를 명하여 정암서원으로 가서 옛 자취를 우러러 보며 배회하고 차마 떠나지 놋하였고 그의 봉록을 원의 창고에 돌려 보내 주었다. 기묘(1579) 9월 29일에 서울에서 돌아가시니 나이는 83세이었다. 병이 들때부터 장사할 때까지 어의를 보내어 문병하고 부의하고 제사하는 것에 은전의 더함이 있었다. 하교하여 말하기를 "현제(賢帝)가 죽으니 지극히 놀라웁고 슬프고나"라고 하였다 그해 겨울에 양주 석적리에 장사지냈다. 공은 고매하고 소탈하고 광할하며 강개하여 기개와 절의가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도에 뜻을 두고 현인되기를 바랬으며 따습고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였고 조정에 선 후부터는 더욱 스스로 연마하여 비록 폐척을 당해도 막히지 아니하고 좌절하지 아니했으니 을사의 화같은 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말로 항거했으며 그 곧은 쌍수로서 세도를 붙잡고자 하였으며 의표는 기강을 바르게 하였으니 그 외로운 충성과 바른 기상은 가히 산악을 흔들고 북두성을 어루만질 것 같았다. 이러하므로 그 성명은 한 세상에 넘쳐흘렀고 사론은 흡연히 돌아왔었다. 그 계를 초할 때에 유공 회춘은 이를 보고 혀를 두르며 말하기를 "장(壯)하도다" 하였고 소인으로 자기와 다른 자들도 또한 탄복하고 부끄러워하였다. 슬프도다 이 어찌 세리로써 능히 옮길 바며 위무로써 능히 굴할 바이겠는가? 사람들은 조금만이라도 풍상을 겪으면 꺾이지 아니함이 없지마는 공은 험함을 밟음이 더욱 많았고 굳은 뜻은 더욱 괴로웠으나 그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에 허락한 마음은 백수(白首)에도 변하지 아니하여 일로 인하여 말을 드릴 때는 반드시 그 뜻을 다한 후에야 그쳤다. 말년에 글을 올리는데 몸은 이미 병들었지만 생각은 정밀하고 간절하여 조금도 쉬지 아니하니 자질들은 서로 간했으나 모두 이것을 물리치고 그 마음은 물이 동으로 흘러서 쉬지 아니하는 것 같았다. 대개 들어보니 정암이 조정에 있을 때에 그 뜻을 다해서 충성을 원하는 정성도 이와 같았다고 한다. 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모부인을 섬기는데 반드시 그 뜻을 따랐고 형을 섬김은 엄부와 같이 하였다. 연산이 혼암잔학하여 민가를 철거시키는데 공은 8세의 나이로 나와서 중사와 응구 접대함을 보고 중사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그 집을 헐지 않게 되었다. 모부인은 가난이 심해서 밤중까지 길쌈을 하는데 공은 옆에 앉아서 한밤이 되도록 반드시 모부인의 취침을 기다린 후에야 곧 잠을 잤다. 모부인은 이것을 가엾이 여겨 매양 등불을 가리고 거짓 잠을 자다가 공이 잠들면 일어났다. 하루는 구용,구사를 좌우에 써 놓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앉아서 석달을 지냈는데 친구가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의 용모는 사기(辭氣)가 전보다 크게 달라졌다"고 하였다. 진유(靜庵)를 섬기어 대도의 요점을 들어서 소견은 더욱 높고 교양은 더욱 바루어져서 이익과 해와 기쁨과 슬픔이 하나도 그 마음에 들어 갈 바가 없었으며 마중에 덕기로 성취되었으니 관후하고 평화롭고 탄탄하고 평이하여 한계를 두지 아니하고 사람과 같이 있으면 그 폐부를 뚫어보며 사람의 선함을 들으면 지성으로 칭찬하며 사모하고 횡역이 온다해도 받아서 비교하지 아니하며 비록 미천하고 어린아이라도 진실로 그 허물을 말하면 반드시 즐겁게 듣고 이것을 모두 고쳤으며 평소에 즐기고 좋아한 것이 없었고 입고 먹는 것은 소홀하고 허술하여 먼지가 자리에 가득해도 쓸지를 아니하였다. 오직 성리학만은 이미 늙었으나 오히려 탐독하고 낮에는 외우고 밤에는 생각하면서 얻은 것이 있으면 번번히 기록하여 동지가 보러 오면 즐겁게 강론하고 토의하며 궁구함에 밤낮으로 게을리 아니했으니 진실로 면학한다고 할 바이며 자자하여 나이 얼마 남지 아니함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대개 공은 정암선생에게 진실로 감복하고 마음으로 취해서 죽을 때까지 우러러보았으며 비록 그 전체를 모두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그 서로 가까운 것으로써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서 모든 행한 일을 보고 후생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으니 그 공은 실로 적지 아니한 것이다. 만약 하늘이 사문(斯文)을 도와서 사화를 일으키지 아니하고 공으로 하여금 사문에서 그 재주를 다하게 하였다면 그의 성취한 바가 어찌 이에서 그쳤겠으며 강성한 나이에 궁지에 얽매어 궁하게 하지 아니하고 그 깊은 뜻을 펴게 했더라면 그 사업이 또한 어찌 다 헤아렸겠는가? 슬프고 애석하도다. 선묘께서는 일찍 공의 청렴과 근엄함을 포상하였고 인조조에는 시호의 성전을 내려 주었으나 우계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휴암(休庵)은 후일에 마땅히 근학호문(勤學好問)의 문자시호(文字諡號)를 얻을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세상에 공의가 없어서 그 말을 행하지 못하니 아는 자는 이를 한스러워 하였다. 남평의 사민들이 사우를 지어서 사액했으니 봉산이라 하고 파산 사람들이 또 율곡원묘의 옆에서 향사를 지낸다. 공은 수원사람이다. 상조는 경신으로 고려시중이 되었고 증조는 효참으로 지평이요, 조부는 사수로 참교이며 아버지는 익견으로 왕자사부이었는데 공이 귀히 됨으로써 모두 추작이 있었다. 비는 단양우씨로 사직 중은의 딸이다. 공의 초취는 평택임씨로 아들 유공을 낳았으나 일찍이 죽었고 계비는 순홍안씨로 만호 찬의 딸이오 문성공 유의 후예다. 부덕이 잘 닦아져 제자(諸子)를 가르치며 항상 "급류(急流)에서 용퇴(勇退)하라"는 것으로써 경계를 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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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을 두었는데 유항은 현령이오, 유함은 승지였다. 주부 조감 안수기, 진사 신세영, 의령감 윤조, 현감 임색은 그의 다섯 사위이다. 유향이 두 아들과 다섯 딸을 두었는데 효민은 형감이요, 제민은 생원이다. 사위는 첨정 기기원, 이상, 최홍운, 유신붕, 이함이다. 유함은 8남1녀를 두었는데 해민,선민-현감, 신민-도사, 현민-첨지 헌민,철민, 시민,계민 이며 사위는 김홍록이다. 조감은 1남1녀를 두고 아들 의도는 첨정이요, 사위는 성문준이며 현감이다. 안수기는 1남1녀를 두고 아들은 건이요, 사위는 이경진이다. 신세영은 무후했다. 의령감은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 이춘영은 첨정이요, 사위는 조대굉이다. 임색은 1녀인데 사위는 이중기로 현감이다. 효민의 아들은 봉사 홍명, 첨지 홍성, 홍중, 군수 홍일이다. 제민의 아들은 좌랑 홍우, 참봉 홍적이다. 선민의 아들은 홍망, 홍기, 홍헌이다. 신민의 아들은 홍규, 홍겸이요 현민의 아들은 홍제, 홍윤, 홍원이다. 지금 4,5세 내외의 자손은 많아서 모두 기록치 못한다. 그 외손으로 뛰어난 사람은 현령 조익, 좌랑 익, 첨정 성락, 첨지 직, 이시제, 동지 이행건, 우의정 이행원, 참판 이시해, 이시매, 통정 신향, 감사 이만웅, 장령 정시성, 군수 시대, 현령 조붕원, 정언 최상익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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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공은 청송 성공과 동문우가 되었고 우계선생이 공을 섬김이 극진해서 일찍이 공의 시말을 기록하여 행장을 만들었고 지금 홍일, 홍우가 장차 신도비를 세운다고 나에게 그 일을 써 달라고 요구하난 나는 공의 성덕과 대업을 생각할 때 후생 말학으로 가히 형용할 바가 못 되어서 삼가 우계가 쓰신 행장을 줄이어 이와같이 기록하고 또한 명을 이어 두나니 명하여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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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조(箕條 : 기자의 가르침)는 아득해서 글을 폐하고 말은 막혔다. 참선비 우뚝 일어나 도(道)를 넓히고 학순(學淳)한데 그 서통(緖統)을 누가 이었나 위대하신 휴암(休庵)이여 정자문인(程子門人) 비유하면 남방사는 양시(楊時 ; 송(宋)나라사람 정자(程子)의 제자로 도(道)를 주자(朱子)에게 전함)로다 노교(魯郊 : 공자님이 살던 나라의 들판)에서 기린 죽고 단당( 堂 : 전당으로 강학(講學)하는 강당)에는 슬픔도네, 저 골짝 비어 으슥한데 나 혼자서 결방(潔芳)찾네 이치(理致)에 신굴(伸屈)있어 왕정(王廷)에 들어서니 원우(元祐 : 송나라 철종의 년호로서 송학(宋學)을 뜻함)의 남은 자취 기여(羈旅)속에 홀로 근심 무리 휩쓸려도 한기둥이 정정했네. 진사년(辰巳年)에 이르러서 두 임금이 이어나니 소인들은 흉모(凶謀)꾸며 대신(大臣)들과 석보(碩輔)들도 입을 막고 손묶였네 공(公)의 분낸 그 충성은 분(賁)과 육(育 : 맹분과 하육을 말한다. 모두 직관(職關)시대의 역사(力士)도 못 뺏으리 곤경에서 유리(流離)하나 내 마음은 더욱 밝네 선조즉위 처음부터 호영(豪英)을 갈구하니 폐출(廢出)에서 일으키어 은영(恩榮) 날로 더해졌네 늙은 시절 장한 마음 그 절조 뉘 굴리리 뒤틀린 것 즐긴 자들 나의 폄을 막지마라 오직 하나 사문(師門)있어 구사(九死)한들 잊을 손가. 산과 같이 우러보니 강한(江漢)같고 추양(秋陽)같네 그 향기를 찾아내서 그 여광(餘光)을 발(發)했으니 사문(斯文)의 부절(不絶)함이 어느 누구 공이었나 참 근원 끌어내어 동류(東流)하는 백천(百川)일세 어이 밝게 믿게하랴 파옹(坡翁)에서 깨달으니 내가 지은 이 명사(銘辭)로 무궁(無窮)함을 고(告)하오나 어이 감(敢)히 지으랴만 파옹(坡翁)것을 보고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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