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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식 풍경
1935년 11월30일,
경상북도 김천고등보통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
1931년 5월,
우여곡절 끝에 개교한 김천고보는 대구고보(현 경북고)에 이어 경상북도에서 두 번째,
사립으로는 최초로 설립된 중등학교였다.
당일 오전 10시30분에는 개교 기념식과 신축교사 낙성식, 행사가 차례로 거행될 예정이었다.
시간이 가까워오자 하객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행사가 거행될 김천고보 운동장에는 교직원 37명, 전교생 250명, 하객 700여 명 등 1000여 명이
운집해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오카자키(岡崎) 경상북도 도지사,
와타나베(渡邊) 학무국장,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
조선중앙일보 여운형 사장,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 이인 변호사 등 경향 각지의 저명인사가 총출동해 단 위에 앉았다.
단 가운데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든 노파가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다소곳이 앉아 밝은 얼굴로 하객을 맞았다.
1960 년대 초반
우리들이 국민학교 다닐 때쯤의
학교 뒷산에서 바라본 학교 전경
지금은 중앙의 2층 붉은 벽돌집 본관 건물과
왼편 붉은 벽돌 건물만 그대로 있습니다.
그 동안 나라가 어지러워 몇번 학교 명칭도 바꿨다.
김천고등보통학교 ( 일명 김천고보)
김천중학교
김천고등학교, 김천 중학교 분리
그 지역의 명문학교로 한 동안 이름이 있었다.
나름대로 많은 인재도 배출하였다.
우리들 고등학교 동기 김천고 21회(송설 37기) 360명 중 아마 40 명 정도는 이 땅을 하직했고
나머지 인원들은
대학교 근무 약 15명
중고등 근무 약 15명
초등학교 근무 약 15 명 등 교육계에 50 명 정도 근무하고 있다.
거의 다 김천이 아니고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다.
그외 나와 같이 회사에 근무하다가 퇴직하거나 현재 다니는 사람이나
회사 차려서 하는 사람
사관학교에 졸업 후 직업군으로 있다가 퇴직한 사람
아니면 건강이 따라주질 않아서 쉬고 있는 친구 등등 이다.
희안한 것은 학교 다닐 때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서울쪽으로 일산, 고양, 파주,성남 등지에 150명 이상 살고
대구에 50명 정도
부산 근처에 30 명 정도
고향 김천 근처에 사는 친구들은 50 명도 않된다는 것이다.
카페가 있어서 살펴보니
대학에 근무하는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있다.
서울대, 성심여대, 대구보건대학, 대구경일대학, 성균관대학, 숭실대학, 충남대학,
제주대학, 강원대학, 미국 신시내티 공대 , 어렇게 흩어져 있다.
교수하는 동기들은 학교 다닐 때 거의 공부 잘 했겠지요.
경북대 졸업하고 변호사 하는 동기도 한명 있고
그리고 사는 곳도
미국 2명,
호주 1명,
뉴질랜드 1명,
중국 1명,
베트남 1명 등이다.
참고로 그 당시 서울대 정원이 1500명 정도 되었는데
해 마다 4- 5 명 정도 들어갔다.
우리 동기들은 재수, 삼수 까지 합해서 6명 들어갔다.
진학지에 보니까
평준화가 되기 전이어서
서울고, 경기고, 경복고, 대구 경북고, 부산고, 부산 경남고 등
100 명 이상 합격 시키는 학교와는 게임도 되지 않지만
경북에서는 경북고를 제외하고 50 명 정도 들어가는 계성고등을 뒤 따르는 학교 이었다.
물론 대구고, 대륜고 등은 우리학교 비슷했는가 아니면 조금 앞섰는지 몰라도.
요즈음 카페가 있어서 자기들의 형편을 적어 놨는데
어떤 동기는 집에서 중학교 시킬 형편도 못되어 중학 포기 하고 농사 지을려고 하는데
학교 선생님이 찾아 와서 진학하라고 해서 어렵게 공부 하여 대구 경북대 졸업하고
사법고시 통과하여 변호사 하는 사람도 있다.
또 한명은 국민학교 졸업하고 파출소에 가서 심부름 하다가 2년 늦게
중학교 졸업하고 김천고에 왔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군대 영장이 나와서 선생님들이
앞장서서 군대 연기 하고 미군부대에 입대 하였다가
그 후에 꾸준히 호텔에 근무하면서 지금 대구보건대학에 교수로 근무하는
동기도 있다.
공부란 자기가 하고 싶은 사람들은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나름대로 환경은 극복 하면 되는 것이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경우도 있지만
어려움을 박차고 나가는 능력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특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후원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요셉의 경우도 취직하러 이집트로 간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 그는 공부도 하고
어려운 시절에 아버지 야곱도 봉양하고
원수 같은 형들도 먹여 살렸다.
그 것은 단순한 요셉이나 형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었던 것이다.
물론 연락이 끊긴 동기들은 뭣하는지 잘 모르고
캐나다로 이민간 목사도 1명 있었는데 지난 해인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들었다.
1970 년 3 월 대망의 김천고등학교에 입학 하였다.
1학년 3반
담임 이재민 수학 선생님
바로 옆에 반장 정동화가 앉았다.
동화는 후생 주택이 집이라서 나를 좀 촌 놈 취급했다.
지금 처가집이 후생 주택이다가 보니
집 사람이 나이는 좀 작아도
정동화, 정윤영, 고수현은
집 사람이 알고들 있다.
장재우도 알고 있다.
집 사람이 그 당시 장재우 형님 화장품 대리점에 근무 했기 때문이다.
80 번지에서 학교에 가려면
걷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후생주택 근처의 대성 양복점 사잇길로 해서
김천역 한쪽 끝을 무단 횡단 하는 것이다.
철길이 몇개 있고
석탄차나, 화물차가 1-3 대 가로 막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기차 밑으로는 다니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통학생들이 가끔 기차 밑으로 다니는데
그러다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기 대문이었다.
그 때는 기차 통학생이 참으로 많았다. 금릉은 역에서 좀 가까우니
전체 100 명도 더 되었으리라.
아천, 옥산, 청리, 대신, 아포, 영동 등 사방으로 부터.
김천중고, 농고, 성의, 시온, 김천여중고, 금릉 등
1000-2000 명 되었으리라.
그러니 김천 역전은 항상 붐볐다.
김천역에는 석탄 싣고 와서 석탄 내리는 기차들도 많고.
그렇게 철길을 무단 횡단 해서 다니다가 가끔 못다니게 감시가 나온다.
그러면 금릉중학 쪽으로 해서 성남교로 가야 하는데 영락 없이 지각이다.
고 1 때 출석부에 기록된 공식 적인 기록이 11 번이다.
헐레 벌떡 오다가 조회 마치고 나오시는 담임 선생 만나서 면제 해준 거 합하면
족히 20번은 되었을 것이다.
성적은 어떠했겠느냐고.
그게 그래 맘대로 잘 안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맘이야 전교 50등 안에 좋게 지만 우리 친구들도 아다 싶이
그건 자식들 말 안듣는 것보다 더 잘 안듣고
요즈음 서울 강남에 산다는 자들이야 돈으로 성적을 질들이고 싶으나
말 잘 않듣기로 소문 났잖어요.
내 석차는 전교 360명 중에 1학년 때는 150-200, 2학년 때는 200 등 정도,
3학년 최종 생활 기록 부에는 자연계 55/165 정도로 되어 있더라구요.
아주 솔직한 답변 일 거 입니다.
이렇게 자서전에 석차 까지 적는 것 본적이 있나요.
금릉 중학교때는 1학년 때 7-10/240 등
3학년 때는 15/240 이래되고요
곡송 학교 때는 6학년 때가 가장 좋았는게 6/ 76
국민 학교 때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시험 다 끝나고 언젠가 무엇 때문에 묻지도 않았는데
정선이는 6등이다.
우등상은 5등까지만 준다.
이말 아직도 기억 합니다.
머리도 그렇게 좋지도 않은지 몰라도 ㄱ공부도 그렇게 열심히 한ㄱ것은 아니고요.
공부 한다고 밤 11시 넘겨본 것은 내 생애 20번도 안될거 같네요.
그 대신 새벽에 좀 일찍 일어 납니다.
시험 기간에는 4시나 5시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아침에 오전 6시 이후에 일어 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2학년 때에는 5반으로 이곤선 선생으로 마음이 좋았다.
학생들은 그것을 역이용 하는 자들도 있었다.
등록금 독촉은 괴로왔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담임선생을 통해 독촉하고.
겨울이 다가 가는 어느 가을 날
보충 수업이 끝나면 어두웠다.
누군가 선동하여 청소를 하지 않고 도망 가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날 당번 모두들 도망 갔다.
그 다음날 학교에 가니 선생님이 단단히 화가 나셨다.
그래서 온 종일 교무실 복도에 굵어 앉아 수업 마칠 때 마다
이 선생님 저 선생님 잔소리 들어 가면서 보냈다.
그해 겨울 방학 때는 지금은 중학교 건물이 그 당시 신축 교실에서 합숙을 했다.
교실 한가운데 석유 난로 놓고
돌아 가면서 도장의 다다미 깔아 놓고.
취침은 10 시인데
10시 지나고 선생님 잠자리에 들기가 무섭게 여기 저기서 빨간 담배 불빛이 보인다.
몇 번 혼 나고
어떤 날은 오전 수업하러 가면 선생님들이 돌아 다니면서 짐들을 조사한 흔적들이 있다.
밥은 자취 생활 보다 훨씬 좋았다.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생활이 오히려 편 했다.
3학년이 되었다.
4반 담임은 윤 현목 선생님
반장은 차 영 현
뭔가 결정할 시기도 되엇다.
집에서는 교대나 사범대 같은 돈 적게 드는데 가라고 하신다.
하지만 붙고 안 붙고는 둘째 치고 2학년 겨울 방학 때 부터 조선을 하고 싶었다.
누구 표현 처럼 하자면 허파에 바람이 들어 갔다.
아부지 한테 그 이야기를 하니
노발 대발이다.
하기사 고등학교도 근근히 시키는 마당에
그것도 김천에서도 아니고 타지에가서
우리 어머니 말로는 교대정도 시킬 작신은 있었다 한다.
고향 감문 중학교와 농고를 졸업한 6촌 형이 대구 교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집 형편이 우리와 비슷 했으니
그 형님 아직도 고향 근처에서 선생 하고 있다.
그 집 아들은 고등학교 우리 후배로서 부산 고신 의대 졸업하고
지금 어디서 의사 과정 밟고 있는지 아니면 군 복무 대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을 하고 싶다 보니 학교가 곧 정해진다.
해양대는 지원하기 싫고, 남쪽에는 부산대 밖에 없었다.
그 때의 정보라고는 나같은 경우는 '진학지' 라는 잡지 밖에 없었다.
이리 저리 검토해 보니 대충 될거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이 었다.
얼마나 상심이 컸는지.
떨어져 본 사람들은 그 심정을 알 거구먼.
진학지에 보니까 핑계 같은 것인지 몰라도
조선과가 그 해 공과 계통에서 가장 커트라인이 높았다.
그 다음 해에도 떨어 졌다.
그래서 조선과가 있는 곳을 찾아 울산공대로 간 것이다.
3학년 보충 수업시간에인가 라디오로 7.4 공동 성명 발표가 중계되고 있었다.
교덕이가 레시바를 빌려 주던구머.
그래서 창가에서 선생님 몰래 그 방송을 좀 들은 적도 있었다.
2014년 방문
2014년 4월 12일
토요일
오전 10-11 시
모교를 구경하고
사진을 올리다.
구름끼고 보슬비 조금 내리는 날씨
40년 세월이 흘러가니
고목 벛나무들도 바람과 같이 사라지고
거의 보이지 않았다.
3-4 반 교실에서
요즈음은 1 학년 지구과학 교실로 이용되고 있더라구요
나는 학교 다닐 때 도 저정도 위치에 앉았지요
주위에
장상태,문정배,편재길,차영현,우정화,김정두,백칠석,김정범,김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