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종인(捨己從人)
2010년 새해 첫 나들이 코스로 화순을 택했다. 오전 8시30분 남광주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세 사람은 군내버스(218)를 타고 능주로 가다 지석강변에서 하차하여 남평 드들강을 목표로 정하고 걷기 시작했다. 지석강은 섬진강 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천변 따라 강둑길이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고 오가는 사람이 없어 데이트 코스로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홀로 먼 산 바라보고 있는 재두루미와 강물에 둥둥 떠 있는 청둥오리 떼들이 한가롭게 보이고 지석천 갈대 숲 사이로 드나든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산자락에는 작은 마을들이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깝게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었는데, 한 때 행복마을단지를 만들려고 했다는 남정리와 죽청리, 미곡리, 신덕리…그 중 신덕리(新德里)는 소설가 지석선생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 했다.
세 사람은 지석의 생가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고 신덕리 마을로 향했다. 작지만 예쁘장하고 소담스러워 보인 18평형의 양옥은 무욕청정(無慾淸淨)한 지석선생의 마음을 닮은 것 같았다. 앞마당엔 잔디가 융단처럼 푹신하게 자랐고 거대한 은행나무가 수문장같이 버티고 서있었다. 그리고 보름 후엔 터질 것 같은 보송보송한 목련꽃 봉오리들이 새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미완성 돌탑2개가 있었다. 봄이 오면 우리들끼리 함께 돌탑을 다시 쌓기로 약속하고 마당에 있는 대나무 평상에 앉아 오이+귤+양갱이를 안주삼아 매실주 한잔을 들이키니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다.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바로 이 순간의 이러한 재미와 행복감은 직접 느껴 보지 않고는 맛볼 수 없으리라!
그럭저럭 시간이 지났기에 남평 드들강 까지 걷기로 한 우리의 목표를 수정하여 도곡 온천 쪽으로 방향을 선회, 두부집에서 동동주 한 사발씩 마시고 식사를 한 후 앵남역에서 시내버스 편으로 귀가하여 샤워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편안한 마음 비할 것이 없었다.
지석과 남곡 그리고 필자(뜰못)와 함께 섬진강을 비롯해 강변걷기를 시작 한 것은 지난해 12월 초순으로 이번이 세 번째다. 어느 날, 모임에서 소설가인 지석선생이 섬진강변을 걷는다는 얘기를 꺼내자 동행했으면 좋겠다는 필자의 제의가 받아들여져 시도한 것이 이렇게 된 것이다.
맨 처음, “정년퇴임 선물로 아내로부터 섬진강과 강변도로를 선물 받았다.”는 지석선생의 말에 황당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 금메달감이다. 지석선생이 정년한 후 다소 무료함을 느낄 것이란 걸 예감하고 현직 광주시내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부인께서 궁리 끝에 대자연을 정년퇴임 선물로 드리고 부부동반으로 도보여행을 즐겁게 했다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석선생께서 정년퇴임한 며칠 후, 부인은 곡성행 버스를 타자고 했다 한다. 곡성읍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고달면 섬진강변에 도착하자 “당신에게 정년퇴임 선물로 마땅히 드릴 것이 없어 섬진강과 강변도로를 선물로 드린다.”면서 오늘 함께 도보여행을 하고 앞으로 많이 애용하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값진 선물인가. 아니 얼마나 훌륭한 아내인가. 지석선생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값진 선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 아내의 그 남편이 틀림없다. 만일 부인의 정서가 남편인 지석선생 구미에 맞지 않았다면 어찌했을까. 이렇게 뜻 깊은 선물을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사람끼리 다시 만나 덕분에 자연을 만끽하고 건강도 살피게 됐으니 더 이상 좋은 일이 또 있겠는가.
무섭게 춥던 혹한이 봄날처럼 풀어진 지석강변의 기온은 세 사람의 우정을 감싸 주는 듯 했다. 선비정신으로 귀감 되게 살아가고 있는 남곡은 앞으로 서로의 호칭은 ‘아호’로 부르자고 해 김신운 교수는 ‘지석’, 문기정 교수는 ‘남곡’, 필자는 ‘뜰못’으로 부르기로 했다.
오늘의 화두는 사기종인(舍己從人)이였다. '자기의 이전 행위를 버리고 남의 착한 행동을 따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곧 자기의 고집만 집착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고 주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헤아려 좋은 행동으로 따라가자는 뜻이다.
요즈음 세종시 문제나 정치인들 특히 오는 6.2지자체 선거를 통해 입신출세를 노리는 사람들도 한번쯤 깊게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는지... (호남매일신문 편집 논설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