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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걸어서 건넌 한강다리 일산대교
귀가길을 택한 시점에서 바부산님(더불어人)의 전화를 받았다.
백두대간과 정맥 종주를 비롯해 나의 홀로산길에 음양으로 많은 도움을 준 그의 근황이
궁금했기에 반가웠고 그래서 바로 상봉하기를 약속했을 것이다.
내 예측 착오로 1시간 반 이상을 기다린 그는 이번 휴전선 길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도
지극하게 마음을 썼다.
어쩌다 함께 산행할 때면 먹지 않는 내 체질로 인해 억지 금식하느라 고생 많았던 그다.
나의 특성을 내 아내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그는 영양식인 메디푸드(medifood) '파워웰'
(power well)을 잔뜩 들고 온 것.
날을 바꿔가며 대작함으로서 대취하였다.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온다는 우탁(禹倬: 고려 때 학자)의 말대로 내게도 이미
백발(체력의 한계)이 왔나.
과음했다고 길 떠나기를 미루다니.
하루를 쉬고 집을 나서는 5월 10일의 새벽길에는 밤을 새운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김포 역시 비에 젖고 있었다.
노면이 고르지 못한 시골길에서 물벼락을 치고 달아나는 차량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다
보고 있어야 하는 나그네의 아침 기분이 몹시 스산했다.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정립했던 시대부터 세 나라의 각축장이었다는 김포.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는 휴전선 지역 최전방인데도 인접한 수도 서울은 물론 해당 지역
주민들 마저도 위기감은 커녕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은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면역이 된 것일까 동족이라는 정서의 힘일까.
천안함 피폭, 연평 해전, 북의 도발....
아무리 그림을 확대하고 볼륨을 높혀도 권력을 쥔 자들과 턱없이 많이 가진 자들에게만
절박한 위기감을 줄뿐 민초들에게는 그것마저도 사치다.
김포에도 인력(引力)을 발하는 문화재들이 있으나 오로지 민통선 지역으로 제한한 여정
이므로 역사적 또는 문화적 유적과 유산에 관심 갖는 것은 외도에 다름 아니다.
미련 떨쳐버리고 일산대교로 갔다.
김포시 걸포동 걸포IC와 고양시 법곶동(일산서구) 이산포IC를 잇는 길이1.84km 다리다.
강원도 태백의 검용소에서 발원해 514km를 달려 서해로 빠지는 한강의 27개 대교(철교
4개제외)중 27번째로 놓인 이 다리는 민자로 건설되어 유료 운영되고 있다.
일제때 건설된 2개의 인도교(한강대교와 광진교)가 27개로 늘어났으니 언젠가는 한강
복개론이 대두할지도 모르겠다.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가기는 한강에서 여름물놀이가 금지된 이후 3번째로 기억된다.
옛길 해남대로(삼남대로)와 동래대로(영남대로)를 걸을 때의 도강 이후로는 처음이다.
그러나, 비오는 날에 시야가 전혀 없는 긴 다리 위를 걷는 것이야 말로 무미한 일이다.
고기를 잡는지 세월을 낚는지 녹초청강(綠草淸江)에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의 쪽배는
운치라도 있지만 비내리는 이른 아침부터 누런 강심에 고깃배를 띄우고 비에 젖고 있는
어부의 모습에서는 찌든 삶의 비애만 보일 뿐이다.
이 무렵의 이른 아침에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다가 국경의 강, 미뇨강 다리위
에서 한참을 넋놓고 내려다 보게 한 푸른 강물의 어부는 참으로 신선같은 모습이었는데.
통일은 구두선일 뿐인가
일산대교에서 자유로로 들어섰다.
자동차전용도로임을 어찌 모르랴만 18년전(1995년)만 생각하며 나아갔다.
그 때, 동해를 일주한 경력의 자전거를 타고 의정부~백석~법원리~문산을 거쳐 임진각
에서 자유로를 일주한 후 벽제~송추~의정부로 해서 귀가한 하루를 회상하며.
오락가락 하는 비에 시야가 여전히 없으므로 진도는 오히려 빨랐다.
일산서구(고양시)를 뒤로 하고 파주출판도시가 지근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지점에서 군 초병에게 붙들렸다.
한참 전의 초소로부터 연락을 받고 대기중이었다는 것이 강화도 민통선의 재판이다.
오두산통일전망대 이남 한강지역은 군사분계선, 남방한계선은 커녕 민간인통제 지역도
아니며 단지 자동차전용도로일 뿐인데 왜 군의 해안초소가 좌지우지하는가.
오호 통재라! 손을 흔들며 건투를 빌어주었던 그 때보다 더 악화된 현실이어.
통일은 구두선일 뿐 요원한가.
곧 도착한 선임자(?)는 이미 경찰의 순찰차를 불렀단다.
경찰이 안전하게 모실 것이라며 진퇴를 막았다.
일산과 파주의 경계라 어느 쪽이 개입할지 애매하기 때문이었는지 더디 온 순찰차.
경위를 대충 들은 일산경찰서 소속 순찰차는 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달렸다.
달리는 동안에도 그들에게는 새 임무를 하달하는 전화가 계속해서 왔다.
바쁜 공무를 훼방하게 되어 미안해 하는 나를 되레 위로하는 그들.
오두산 통일전망대 입구 가는 버스정류장(지하철3호선대화역) 앞에서 그들은 늙은이의
건투를 빌어주며 다음 임무를 위해 떠났다.
8도 곳곳에서 순찰중인 경찰은 내게 성심껏 도움을 주었다.
그 성심이 늙은이에게만 국한되는 것이겠는가.
오랜 세월에 걸쳐 민중의 지팡이는 슬로건이었을 뿐 민중의 뭉둥이로 비하되었던 경찰.
해바라기성(向日性) 상층부는 여전해도 민초들과 더불어 호흡하는 저변 경찰의 진화야
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민중의 지팡이로 거듭나기를 거듭하고 있다.
통일동산 버스종점(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는 전망대 왕래 전용버스가 대기중이다.
7면의 잔디구장을 갖춘 NFC(National Football Center/축구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
바로 옆이다.
재향군인회와 지자체가 운영하는 타지역 민통선전망대들과 달리 유일하게 민간업체가
위탁받아 운영한다는데 무료 셔틀버스를 비롯해 방문객을 위한 배려가 세심한 편이다.
노령자도 우대는 하지만 입장료를 징구한다.
늙은이들의 저항때문에 용이한 일이 아닐 텐데 업체의 용기있는 소신에 갈채를 보낸다.
늙은이라 해서 무임(無賃), 무료(無料) 이용, 사용의 특혜를 주는 것은 잘못된 제도다.
노령층의 표를 얻기 위한 선심책이었으나 바뀌어야 한다.
그럼에도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를 한다는 자들은 역시 표를 의식해 벙어리 냉가슴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 궁리만 하다 마는 쥐들에 다름 아니다.
공짜를 없애는 대신 할인을 전면화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고 합리적인 경로우대다.
표를 먹고 사는 생물이 정치라고는 하지만 표를 의식하지 않고 이같은 소신을 과감하게
펴는 정치인의 출현은 과연 연목구어인가.
비는 그쳤으나 짙은 운무로 인해 시야가 전혀 없는 전망대.
어버이주간의 경로행사인지 서울 D지자체의 리본을 단 남녀노인들이 대거 몰려왔으나
전망 없는 전망대에 실망의 푸념들을 쏟아내 실내외 공기가 어수선했다.
겨우 3곳을 방문했을 뿐인데 전시물과 전망의 한계 때문인지 벌써 식상하려 하여 남은
전망대들의 방문은 포기할 수도 있겠다.
더구나 민족통일을 열망하기 보다 주적(主敵) 의식의 고취 선동장이라 할까.
북쪽을 이대올로기를 극복하고 일각이라도 빨리 합쳐야 할 내 나라가 아니라 박멸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곳에서 통일을 전망할 수 있겠는가.
전망대 경내에는 고당(古堂曺晩植/1883 ~ 1950)의 동상이 서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였으며 교육자, 종교인, 언론인, 시민사회단체인, 정치인이다.
한국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했으며 초대 총재였다.
"북한 동포를 버리고 나만 월남할 수 없다"며 이북에서 반탁(反託) 반분단, 통일 조선의
건국 운동을 주관하다가 감금된 뒤 6.25 동란중 김일성 측근에 의해 살해된 분이다.
나는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은 고당의 동상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통일전망대 방문객들의 동향을 살펴보려고.
남북통일을 바라는 이들이라면 목숨을 걸고 반분단, 하나의 조선건국을 주창한 이 분의
동상을 방문할 것이라는 내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늙은이가 물때도 모르는 거냐 순진한 거냐.
하나같이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멍청히 바라보며 혼자말로 푸념했다.
통일은 무슨......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짧은 여생이라 해도 희망 없이 산다는 것은 생활이 아니고 연명일 뿐이기 때문이다.
MB는 대통령이었을 때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기독교 장로 답게 성구를 인용한 듯 한데 참 뜻을 모르는 인용이다.
한밤의 도둑처럼 예고없이 와도 당황하지 않고 맞을 만큼 완벽한 준비를 하라는 경고성
당부대로 과연 통일에 대비하면서 그렇게 말했는가.
"최악의 통일이라도 최선의 분단보다 낫다"는 내 신념은 이미 표했다.
절로 굴러올 통일은 영원히 없다.
지연될 수록 더 많은 대가를 치뤄야 하기 때문에 빠를 수록 좋다는 것이다.
나는 종북이다
어떤 까닭인지 4대 윤보선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대통령들이 남북통일에 대해 한마디씩
쓴 글이 한 데 모여있다.
그들의 통일 의지가 읽혀지는 글들이다.
장기집권하다가 4. 19민주혁명을 유발하고 불행한 만년을 보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야
말로 통일을 열망한 분이다.
동란의 참화 속에서도 그의 의지는 '統一最先'이었다.
통일을 우선순위 제일로 함은 통일 이상의 선(善)이 없다는 뜻이며 그에게 모양새(格式)
시비는 민족의식이 없는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부산까지 밀리고 쫓겨가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해 있을 때의 일화다.
어데선가 일본의 도움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 대통령은
"대포를 현해탄 건너 일본쪽으로 돌려라. 북한은 미구에 하나가 될 내 나라 내 동포지만
일본은 영원한 적이니까 일본인이 우리 땅에 올라오게 해서는 안된다."
제2의 이완용을 자처하며 비굴하게 일본과 손잡은 군사쿠데타 권력과 대조되지 않는가.
하긴, 그 쿠데타세력의 정점이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서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니까.
그리고 그의 딸도 대통령이 되었다.
이 여인은 아버지와 달리 친미다.
우리의 성군 세종대왕이 굽어보시는 데서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운운하며 호기있게
영어를 사용할 정도로 친미 일변도다.
미국에서 영어로 연설했는데 칭찬이 자자하다고 온 나라가 떠들석대고 있다.
그녀의 외국어 과시에는 국격도 없다.
중국에서는 중국어로 말하고 5개국어 능통이라고 치켜올리느라 혈안이다.
귀여워서 칭찬하니까 우쭐대는 어린애의 치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민망하기 짝이 없다.
일본에 간 우리나라 대통령이 사석에서 한 일본말로 인해 언론에 씹혔다.
우리나라를 침탈, 박해했던 일본이라는 정서 때문으로 이해했다.
우리 말과 글 말살정책으로 그 시대를 산 한국인은 대개 일본말에 능통하다.
그래서, 무심결에 일본 말이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어떤가.
개혁, 개방은 하고 있으나 여전히 공산주의국가로 북한과 혈맹의 형제지국이다.
공산주의와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며 특히 중국공산당정부는 100만명의 인해전술로
우리의 민족동란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고 통일의 기회를 무산시킨 나라다.
그런데도 북한에는 격식을 내세우고 중국에는 그쪽 비위 맞추느라 온갖 곡예를 한다면
원칙도 소신도 모두 고무줄 아닌가.
더구나, 외국어 못하면 대통령직 수행에 지장이 있는가.
YS는 영어 못해도 군벌(하나회)을 척결했고 금융실명제를 도입, 정착시켰다.
비록, 경제국치라는 외환위기를 불러왔지만 원인이 영어 못해서인가.
그렇다면, 미국 경제가 저 꼴인 것이 미국 대통령 이하 위정자들이 영어를 못해서인가.
인수위가 영어타령으로 시작한 전임 대통령도 미국에서 영어연설하였으며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이라고 홍보에 열올렸다.
그랬음에도 나라가 이 꼴이라면 한국 대통령에게 영어는 무의미함을 뜻하는 것 아닌가.
결국, 나는 종북이 되고 말았다.
외국어를 선호하는 대통령과 이에 환호하는 무리들이 나를 종북 속으로 몰아넣었다.
오두산통일전망대 안에 전시중인 북한의 소학교 교실과 교재, 판매장의 제품 등 북쪽의
어떤 것에도 혈맹관계와 형제지국이라는 러시아와 중국의 글이 한자도 없다.
최고 권력자를 비롯해 내로라 하는 상층부는 물론 그 밖의 누구도 공식적으로는 러시아
어와 중국어 단어 하나도 사용하지 않는다
김정은은 스위스에 유학했으므로 독일어를 잘 할 것이다.
그들 권력층에도 러시아를 비롯해 북유럽, 중국 등 유학파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외국어를 즐겨 사용한다는 말 들은 적이 없는 것은 나의 과문 탓인가.
북한의 우리말, 우리글 열정을 어찌 부인하겠는가.
억지가 더러 있으나 지엽에 불과하다.
우리의 영명하신 세종대왕께서는 남과 북, 어느 편을 들어주시겠는가.
이래도 나의 종북을 매도하겠는가.
그래도, 우리 말과 우리 글에 있어서만은 당당하게 큰 소리로 외친다.
나는 영렬한 종북이라고.
나도 우리 말 외에도 몇개 외국어에는 맹농아(盲聾啞)가 아니다.
늙은이가 홀로 여행을 하기 위해 부득이 익혔다.
그러나 미구에 이 말들을 전혀 못하게 될 것이다.
외국어는 지속적으로 사랑해 주지 않으면 달아나버리는 연인과 같은데 이제는 사랑할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국어와 다른 외국어의 한계다.
나는 우리 대통령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국격을 생각해서라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치기는 제발 그만 하라고.
대한민국 대표도시 파주에서 생각나는 일들(1)
괜히 이런 저런 생각을 끄집어내어 날씨 만큼이나 기분이 흐리고 무거워졌다.
셔틀버스를 버리고 걸어서 내려오면서 기분 전환을 시도했다.
경기도에서 파주는 김포와 더불어 휴전선으로 인해 최전방이 된 지역이다.
북으로는 38도선에 접했으며 남동쪽 한강과 임진강 건너 위치한 김포, 파주를 이웃으로
했던 개풍군이 송두리째 북한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북쪽을 휴전선으로 가로막은 최전방인데도 '대한민국 대표도시'라고 홍보하고 있다.
도성에서 개성,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구한말 이전까지도 평양, 개성과 함께
대도시 역할을 하였다 해서 그러는가.
중국과 사신들이 왕래하던 육로였으며 조선십대로의 하나인 의주대로가 파주땅을 경유
하고 분단 후에도 1번국도는 '통일로'가 되어 쉽지 안은 남북교류에 이용되고 있다.
수도권방위를 담당하는 군사도시지만 민통선지역 외에는(그지역까지도 군부대의 저지
를 받는 경우 외에는) 긴장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도농 복합형 도시로의 변화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는가.
통일의 전진기지, 대륙으로 가는 기점, 세계로의 출발점 임을 자임하며 굵직한 일들을
통크게 벌이고 있는 것 같다.
오두산통일전망대 일대에도 NFC뒤 높직한 곳에 고려태조와 역대왕, 고려역사 475년의
충신과 공신들의 위패를 봉안하는 '고려통일대전'이 위풍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헤이리예술마을'도 넓게 차지하고 있는데 "예술인들이 꿈꾸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 과연 실현될지 관심이 가는 공동체 실험마을이다.
이 지역에서도 자유로로 들어서려 시도했으나 실패만 거듭하고 성동사거리에서 동화
경모공원(同和敬慕)을 지나는 헤이리로를 택했다.
월남 이북도민들을 위한 너른 묘역인데 파주시민도 사용할 수는 있으나 비용차가 과도
하게 많아서 파주땅에서 파주시민이 홀대받는 별난 지역이라 할까.
야산 하나를 절단내고 있는 금산리 한국자원개발(주) 앞과 보현산밑 부대앞을 지났다.
헤이리로가 끝나는 금산삼거리에서 문산쪽(359번지방도로)으로 들어선 후에도 자유로
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나 이 일대야 말로 민통선지역으로 얼씬도 못하게 했다.
시간과 체력만 낭비한 부질없는 집착을 버리고 오금교를 건넜다.
임진강으로 빠지는 만우천 다리중 하나다.
이 길은 공효공 박중손 묘역 장명등(恭孝公 朴仲孫墓域 長明燈/탄현면 오금리) 입구를
지나 문산읍 도심으로 진입하는 359번 지방도로(방촌로)다.
박중손은 수양대군(世祖)이 어린 조카(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일으킨 계유정난(癸
酉靖難/1453년)의 1등공신으로 대사헌과 주요 판서를 거친 문신이다.
한데, 박중손 묘에 있는 2기의 장명등이 우리나라의 보물(제13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쿠데타 세력의 무덤이 아니고 등(燈)인 것이 다행이다.
도로는 탄현국가산업단지, 파주시제2공설운동장을 지나 잠시 자유로와 나란히 가다가
문산천을 건너서 문산읍소재지에 당도한다.
5년전 의주대로를 걸을 때 한밤을 보냈던, 문산역 지근의 청도훼미리랜드를 찾아갔다.
그 때, 휴전선접경 소읍에까지 침투한 고가의 중국마사지(massage/按摩)에 당혹스러
웠는데 도태되기는 커녕 건재한 것이 더욱 의아스러웠다.
퇴폐업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닥을 헤매는 경기 상황에도 거액의 마사지를 즐겨 받는
사람이 이 시골에 꾸준하다는 것이 의아한 것이다.
문산은 6.25동란중 1950년 8월 말경 어느 날에도 하룻밤 잤던 곳이다.
굶기를 밥먹듯 하다가 문산에 연고가 있는 어느분과 식량을 구하러 갔는데 문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기억되는데도 하도 많이 변하여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당시에는 고가의 옷감들과 옥수수 1말을 바꾸며 생각난 것이 속담 "비단이 한끼"였으나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었는데 지금은 퇴행하는 시국으로 인한 분노뿐이다.
그 때는 삼순구식에도 깡마른 소크라테스가 자부심이었는데 지금은 살찐 돼지소굴이다.
18년 전(1995)에는 자전거 패달을 밟으며 손을 흔들어주면 총을 쥐지 않은 손을 흔들어
화답하는 자유로의 군인들이 훈남이었다.
같은 우리의 젊은이들이건만 지금은 심장을 탈취당한 박제들 같이만 보인다.
훈남을 박제로 만든 자들에 대한 증오로 잠 못이루는 밤인데 엎친 데 덮치기 하긴가.
오두산 통일동산에 장준하 추모공원이 있음을 미쳐 모르고 지나쳐 왔기 때문이다.
광탄면 신산리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서 새로 조성한 이곳으로 이장했다는데도.
일본군 장교출신과 독립군 출신, 군사쿠데타권력 유신대통령과 재야대통령,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 분에 대해서는 중언부언하는 것이 오히려 결례일 것이다.
다만 내게 겸손과 근면이 있다면 그것은 그 분이 몸으로 가르쳐준 것이다.
1950년대 중반, 대학 재학중일 때다.
나는 리포트(report) 작성에 필요한 자료들이 담긴 사상계(월간)를 구하기 위해 보신각
(종로네거리 화신 월편/현 보신각이 아님) 옆 한청빌딩에 있는 사상계사를 방문했다.
내가 제시한 과년도 잡지들을 찾느라 좁은 창고에서 무진 애를 쓴 중년남이 장준하선생
임을 안 것은 10여권의 책을 손수 포장할 때 들어온 직원을 통해서 였다.
본의는 아니지만 이 분을 참배하지 않고 온 것이 어찌 송구스런 일이 아닌가 <계 속>
일산대교(위)와 자유로(아래)
오두산 통일전망대 셔틀버스 승강장(위)과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땅(아래)
오두산 통일전망대(위)와 북한 소, 중학교 교육환경(아래)
오두산 통일전망대(위)와 고당 동상(아래)
통일전망대 자유로(위)와 통일전망대 인도(아래)
고려통일대전(위)과 헤이리예술마을(아래)
동화경모공원(위)과 금산리 헤이리로(아래)
금산 삼거리~문산 359번지방도로(위)와 문산 청도훼미리랜드(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