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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수강, 황전천, 찬수강
황룡부주혈(黃龍負舟穴), 즉 황룡이 배를 타고 가는 형국이라는 마을.
청룡은 서해, 황룡은 동해에 산다 해서 동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마을.
동구밖 마을인데 동구밖이 축약되어 동해로 변했을 것이라는 마을.
그 이름과 관계 없이 내게 가장 인상적인 마을을 나설 때 간편해서 좋았다.
천막을 치지 않아서 그냥 배낭메고 일어서면 되었으니까.
마을을 떠날 때는 오늘 걸으며 할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다.
해불양수(海不讓水), 백선효위선(百善孝爲先)
마을 깊숙이 있는 약천사(藥泉寺)가 던져준 화두(話頭)다.
전한(前漢)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편찬한 회남자(淮南子)에 있는 말이지만 "해불
사수 고능성기대"(海不辭水 故能成其大/ 바다는 물을 마다 하지 않서서 크게 된다)라는
관자(管子)의 '형세해(形勢解)'편에서 유래했다.
효자즉충신(孝子卽忠臣/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충신도 되지 못한다)과 뜻을 같이하며
효가 으뜸임을 어찌 모르랴만 이른 아침부터 회한에 빠지게 했다.
무문정이 없었다면 순천 산업로가 지나가는 구례1교의 다리밑에 집을 지었을 것이다.
모기를 빼면 손색 없는 집터다.
황전천을 거슬러 올라가 황전면사무소 뒷산 허리에 걸려있는 운해가 움직이지 못한다.
무더운 하루를 알리는 예보일 것이다.
황전천 용문교를 건넜는데 충무공이 말에서 내려 걸어서 건넜다는 찬수강이 여기일까.
시멘트로 포장한 황전천 둑길을 따라 구례구역으로 가는 도중에 작년(2012년)에 세운
잔수진도 고적비(潺水津渡古跡碑)가 서있다.
"고려, 조선시대 이후 순천 구례 한양으로 통하는 나룻(船渡)길로 그 사적(史蹟)을 새긴
고적비를 세운다"고 했다.
황전천이 잔수강이었음을 뜻하며 충무공은 잔수강을 찬수강으로 기록한 것 아닐까.
구례구역 앞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순천땅인데도 구례 입구라 해서 구례구역(求禮口驛)이며 작은 역인데도 상권이 형성된
것은 지리산 들.날머리라는 조건 덕일 것이다.
서울발 순천, 여수행 심야열차는 구례구역 하차 승객이 가장 많다.
식당과 가게들이 신새벽에 도착하는 지리산 등산객들을 맞아 일제히 새벽 장사를 한다.
내게도 구례구역은 대부분의 경우, 지리산 종주의 들머리 또는 날머리다.
송치에서 끊고, 재개한 호남정맥 종주때는 송치에 거의 도착해 구례구역 구내에 스틱을
놓고 왔음을 알았을 때 난감했는데 택시기사의 기지로 해결했다.
순천으로 귀환하는 동료 택시기사에게 SOS를 보내어 송치에서 받게 한 그 택시기사를
잊지 못하나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구례구역에 들를 때마다 몹시 애석한 마음이다.
(구례구 역에 도착한 순천택시들은 영업지역의 제약으로 순천땅인 역 외의 지역에서는
영업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빈차로 돌아간다)
참, 멋 있는 경치다
구례교를 건넘으로서 아침에 잠시 순천길을 걷다가 다시 구례로 귀환한 셈이다.
이번에는 위치를 바꾸어 섬진강 우측, 동쪽을 따라 북상한다.
페인트 줄만 있을뿐 자전거길이 전혀 없는 구간이 태반이다.
차량의 왕래가 적어서 다행이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위험성이 더 높은 길이다.
차량이 많으면 번거롭기는 하나 함부로 달리지 못해서 오히려 덜 위험하다.
차량이 적기 때문에 폭주하게 되며 졸음운전하기 일쑤다.
더 위험한 이유다.
강을 건너(섬진대교) 황전3터널로 들어가는 순천~완주간 27번고속국도 밑을 지났다.
강 이쪽은 구례읍땅이지만 건너편은 순천 황전땅이다.
갈미봉옆 계산재 아래에 우뚝 앉아 살짝 맛만 보여주는 건물들이 구례구역 길에서 안내
하던 세심사 하늘공원이다.
하늘 문이 열렸다고 하나 납골당이다.
독자마을 독자정(讀字亭)에 짐을 벗어놓고 마을 교회에 들러 찬물을 마셨다.
마을사람들이 모여 글읽기를 좋아해서 독서동이라 했는데 독자동으로 바뀌었다는 마을.
시골의 아담한 교회인데 성미함(誠米函)이 비치되어 있다.
촌락의 교회들은 여전히 현물을 십일조로 바치고 있는 듯.
강 건너편은 여전히 순천시 황전면(비촌리)이다.
얼마 안가서 유곡(楡谷)마을에서도 찬물을 마셨다.
이번에는 오늘의 영업을 준비중인 유곡가든의 녹차물이다.
오전 10시 26분인데 거리에 선 디지털 온도계가 35도C를 가리키고 있으므로 얼음믈을
얻어도 금방 데워지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
다무락으로도 불리는 이 마을은 문을 걸어잠글 다무락체험장을 왜 만들었을까.
다무락은 불리기만 할 뿐 까닭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니.
드디어 강 저편의 파트너가 바뀌었다.
곡성군 죽곡면 조사마을로.
섬진강이 다른 강을 맞아들이는 지점에 당도했다.
호남정맥이며 철쭉으로 이름난 일림산(보성군 웅치면)에서 발원한 보성강이고 여기가
바로 압록(鴨綠/곡성군 오곡면) 유원지다.
섬진강과 보성강 양수가 합류하는곳이라 하여 합록(合綠)이었단다.
취락 형성 이 후 천어(川魚)가 많은 이 곳에 오리과의 철새들이 빈번하게 날아드는 것을
보고 '合'을 '鴨'으로 대치(代置)하여 압록(鴨綠)이 되었다는 곳.
80년대에 들른 후 처음 보는 압록은 전혀 딴 세상이다.
강산이 두번 이상 바뀔 세월이 갔으니 당연한 변화다.
이름난 강변 유원지 답게 예성교 다리밑을 중심으로 피서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구례구역~압록역~곡성역 사이는 가정지역의 일부 새 철로를 제하면 섬진강을 따라서
달리는 낭만열차 구간이다.
열차보다 조금 낮게 17번국도가 차량들을 태우고 강가를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 아래로 섬진강이 흐른다.
참, 멋있는 경치다.
경치 좋은 곳을 자연대로 놓아둘 리 없다.
펜션, 별장, 전원주택 부지를 만든다고 산자락을 파헤치고 있다.
국적이 애매한 서양이름(Zelkova)으로 유혹하는 곳도 있다.
절토부분은 사태로, 성토부분과 축대는 붕괴로 홍역을 치루는 동안 얼마나 마음 상할까.
하기는, 산을 보호하라고 있는 산림청이 휴양림이라는 이름으로 장사하기 위해 온산을
절단내 태풍, 폭우 때마다 인재를 양산하고 있는 현실에서 업자를 탓할 수 있는가.
논곡리(論谷)는 작은 마을에 불과한데 대형 이정표에 올라있다.
임진왜란 때 3성(임, 김, 류)이 피난지를 찾아 정착한 것을 계기로 형성된 마을이란다.
3성이 마을 이름을 짓자고 논의했다 해서 '논'자와 이름의 결실을 보자는 뜻에서 '실'자
를 써서 논실이라 했는데 일제가 한자화 할 때(1914년) 논곡으로 바뀌었다는 마을.
마을에는 임씨 김씨의 시혜비와 선적비가 있다.
씨족 마을이라 한 집에서 세우면 다른 씨족도 당연히 행동할 것이다.
류씨가 빠진 것이 이상할 뿐.
200년 넘었다는 나무들도 씨족과 관련된 설화가 있을법 한데 마을 보호수란다.
논곡구판장 간판에 끌려 마을로 갔다.
간판을 미리 달았을 뿐 준비가 아직 덜 되었다는 구판장에서 찬 막걸리 1병을 마셨다.
빵도 하나 먹었다.
이 일을 시작한 주인공은 이 마을산(産) 젊은이 임숭빈.
그도 도시물을 먹다가 어떤 연유에선지 모르지만 귀향을 결심했을 것이다.
구판장을 열어 생필품은 물론 부모가 경영하는 농장(매실, 감, 밤)과 마을의 생산품들을
판매하는 유통업을 키워보려는 청년이다.
늙은 길손이 성업을 축원하는 뜻으로 5천원을 쾌척했다.
각박한 인심 : 정자 사용료를 받는 마을
논곡리 본황(本黃)마을을 지나고 본황교를 건너서면 곡성땅(고달면 가정리)이다.
섬진강도 양안(兩岸)을 곡성군이 독점한다.(오곡면과 고달면이)
한데, 구례땅에 있는 천문대 이름이 '곡성섬진강천문대'다.
시설의 특성상 산상에 있는 것이 정상이라는 인식을 깨고 보통사람들 곁으로 끌어내린
것은 획기적이라 하겠으나 곡성의 시설이 왜 구례땅에?
구례땅 깊숙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실개천 하나 사이다.
곡성군이 구례군에서 영업을 한다면 불법 월경(越耕) 아닌가.
사람이 모이는 유원지의 곡성쪽에 마땅한 곳이 없어서 구례군측의 양해 아래 그랬단다.
세금을 구례군에 바치는 것이 당연하며 양군(兩郡)의 의(誼)가 원만할 때는 문제거리가
아니지만 작은 휴화산일 수 있다.
구례군측에서 철거 또는 양도를 요청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곡성'이 빠진 '섬진강천문대' 안내판이 시사하는 점이 있다.
늙은 나그네에게 곡성의 첫 인상은 각박한 땅이라는 것.
녹색체험마을, 팜스테이마을, 범죄없는 마을, 청소년야영장 등 호감가는 간판이 아무리
인력(引力)을 발동해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곳.
정자마다 붙어있는'무더위쉼터'라는 노란 안내판의 글처럼 아무나 무더위를 피해 쉴 수
있고 머물다 가도 되는 구례땅을 벗어나 당도한 곡성의 첫 마을 가정(柯亭).
마을 정자 이용료를 받는 곳.
하루 이용료가 2만원(짧은 시간은 1만원)인 가정마을 가정각(柯亭閣).
평생을 나그네로 살아왔지만 마을의 정자 이용료를 받는 곳은 이 마을 뿐이다
경기도 김포의 민통선, 저수지낚시터를 운영하는 조강마을이 낚시터의 정자이용료 1만
원을 받지만 그들도 마을 정자는 모든 이에게 상시 무료개방한다.
마을앞에 있는 무성한 수림에서 앞강,섬진강을 관망하면 마치 명산대천을 혼자 만끽할
수 있는 정자에 앉은 것 같다하여 가정이라 불리운다지만 참으로 각박한 인심이다.
실망이 더욱 큰 것은 온 마을이 한통속이라는 점이다.
특정한 개인의 돌출적 행동이라면 천차만별의 사람 사는 세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온 정신인 주민이 있다면 마을 이미지에 먹칠하는 이런 짓을 시행할 수 없으며
이장이 불신임당할 중대한 사건이기에 그 이장에 그 주민으로 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쓰레기를 많이 남기고 가기 때문에 청소비를 받는 것이라고?
25% 이상의 바가지를 씌우며 유원지 재미를 톡톡히 보면서도 그깟 쓰레기가 이유인가.
더욱 분개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치사한 마을이다.
슈퍼는 어떤가 물건을 사봤기 때문에 바가지임을 알았다.
벽지 구멍가게도 800원 이상 받지 않는 우유 1팩이 1.000원이다.
25%의 바가지다.
잠시라도 머물 곳이 아님이 충분히 입증되었다.
두가현수교(출렁다리), 건너편 레일바이크, 난쟁이다리인 두가세월교 어떤 것도 이미
떠난 마음을 끌지 못하고, 바가지 쓰게 될 어느 지역 다문화가정들이 가엾게 보였다.
등하불명인가.
상거가 오리도 되지 않는 이웃 마을 영감도, 두계교(사곡교?) 이 쪽의 한옥펜션 두가헌
(斗佳軒)의 젊은 남자도 금시초문이라며 경악했다.
농로변 나무그늘의 의자에서 쉬어가라며 자리를 내준 그들은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지
확인 전화를 한 후 소탐대실의 우매한 짓이라고 개탄하며 시정하도록 노력하겠단다.
나그네의 격앙된 기분을 진정시키기 위함인가 이곳 인심의 본 모습인가.
영감이 동네 아낙이 내온 얼음물 패트병을 들고 길 떠난 나그네에게 달려왔다.
백년 전에는 지고의 선이 친절이었는데
가정마을 이후의 자전거전용도로는 백색 시멘트 길이다.
그래도 전용도로인 것이 다행인데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가.
그러나 급선회와 상하 급경사 등 섬진강 자전거전용도로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게다가, '자전거전용'은 안내판일 뿐 차량들의 왕래가 끊임 없다.
운전자들의 반응도 다양하다.
미안하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볼멘소리를 넘어 항의하는 이도 있다.
그들을 탓할 수 없도 없겠다.
이 길은 본래 섬진강 이쪽 산골마을들의 차량과 농기계 통로였다.
자전거가 주인으로 군림하게 됨으로서 그들은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딴 길이 없는데 어찌하란 말이냐"다.
자기네의 길을 달리면서도 범법자처럼 기를 죽이고 눈치를 살펴야 하다니.
대안도 없이 푯말을 박아놓은 당국자들의 머리와 가슴이 과연 보통사람의 것일까.
유유히 흐르는 맑고 푸른 섬진강만이 아는데 누구의 편도 아닌 자연은 증언을 거부한다.
얼마 가지 않아 돌도깨비 세상이다.
섬진강의 이 일대는 마천목 장군과 도깨비살 전설, 전동전설 등의 산실이란다.
그래서 곡성군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도깨비공원을 조성하고 있다는데 예산탓
인지 무더위 때문이지 중단된 공사장이 어지럽다.
마천목(馬天牧/1359~1431)은 고려말(공민왕)에 태어나서 이조 개국초 1차,2차 왕자의
난때 거푸 세운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세종때 병조판서가 된 인물이다.
도깨비살은 지극하고 간절했던 마천목의 효심이 도깨비를 감동시켰다는 전설이다.
호곡마을 표석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호랑이가 잠자는 숙허(宿虛)형 형국이라 해서 이름이 ‘범실’로 출발했다는 마을.
몇 되지 않은 주민이 모두 노인이라는데 그들이 세상을 뜨면 절로 폐촌될 것 아닌가.
정선에서 줄배를 타고 영월로 건넜던 때가 아득한데 섬진강에서 줄배나루 흔적이라도
보게 되어 반가웠다.
하지만 섬진강 유일이라는 줄배나루(호곡나루)도 이미 전설의 장에 들어가고 있나보다.
자전거 전용도로라 하나 차량 통행이 빈번한 이쪽 시멘트 둑길보다 석양의 조명을 받아
17번국도와 레일바이크, 강변의 정취가 조화된 저쪽이 더 낭만적이라고 보였다.
지근에 다리가 있으면 아마 건너갔을 것이다.
남의 떡이 더 맛있어 보이고 이웃집 잔디가 더 푸르러 보이는 심리 탓일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에고센트릭 바이어스(Egocentric Bias/자기중심적 편향)의 일종?
침수교가 있기는 하나 출입구가 애매해서 포기하고 직진했는데 섬진강둑길은 고달천을
바로 건너가지 못하고 고달천둑 따라 고달마을로 유턴한다.
교량공사에 도가 터있는 우리의 기술력으로 작은 다리 하나 놓으면 모두에게 수월할 뿐
아니라 경제성도 있을 텐데.
어라, 이대로 곧장 가면 수월 마을이네.
늙은 길손 앞에 냉장고에서 물과 수박을 내놓는 고수정(古守亭/古達마을)의 노파들.
염천에 걷는 늙은이의 건강을 걱정해 주며 이 정자에서 자고 가란다.
두 살 아래 영감은 오토바이로 횡탄정까지 태워다 주겠단다.
어느 쪽이 진짜 고달의 인심인지 헷갈리게 하는 고달리 사람들.
이쪽이 고달의 본 모습이라면 저쪽은 왜 그리 되었을까.
유원지 때문일까.
마을과 유원지는 인심의 악화일로에 상호관계일 것이다.
유원지 때문에 마을 인심이 각박해졌고 각박한 인심이 유원지를 흐려놓고, 그 유원지가
다시 마을을.....
서가의 책들을 훑어보다가 100여년 전에 출판된 문학독본(Reading in Literature) 안에
있는 "무엇이 선인가(what is good)" 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보았다.
"법관은 법, 학자는 지식, 현자는 진리, 우매자는 향락, 묘령 여인은 사랑, 기사는 미(美),
몽상가는 자유, 영리한 사람은 가정, 군인은 명성, 미래를 보는 사람은 주식"을 선이라고
말하지만 각자의 가슴 속 깊이 숨어있는 단어는 친절(kindness)이다" 라는 글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기고만장하지만 1c 동안에 엄청 변했다.
지고의 선은 친절이 아니라 '권력과 부'라고 믿기 때문에 그 둘만이 상호관계다.
권력을 갖지 못하면 돈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집착하게 되었다.
권력만이 돈의 상위개념이지만 때로는 돈이 권력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업과 연령, 성을 가리지 않고 돈에 무력하며 모든 추태가 돈과 관련되어 있다.
내 몸을 위해 걱정할 일이 있는가
돈을 받건 말건 머물지 않고 지나쳐버릴 마을에 대해 길손이 왜 그리도 예민했을까.
아마, 인심을 먹고 사는 나그네라 그랬을 것이다.
드디어 아침에 오늘의 화두로 던져진 '해불양수'를 정리할 때가 되었나 보다.
바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해서 과연 말이 없는가.
사람도 "말이 없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말한다.
바다가 침묵하는 것 같지만 성내면 얼마나 무서운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마침내 말한다.
대표적인 말이 해일이다.
"천마산(天馬山) 기슭의 고달면, 함께 잘사는 청정고을"표석이 서있는 고달교 앞에서 더
좋아 보이던 곡성읍 쪽으로 건너갔으나 허탕치고 되돌아 왔다.
자전거도로 안내 표지가 없다.
아예 조성하지 않았는데 표지가 있을 리 있는가.
어두워지려는 시각에 다리 옆 비닐하우스 앞에서 하마터면 봉변당할 뻔 했다.
길을 물으려 하우스로 갔으나 사람이 없어서 되돌아 나오다가 트럭을 몰고 자전거 전용
도로를 달려온 주인과 마주쳤다.
"왜 거기서 나오느냐" 는 첫 마디에 분노가 서려있다.
그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다.
자전거길을 만든자들에 대한 분노가 자전거 주자들에게로 확대되었고 급기야 그 길을
걷고 있는 늙으니에게 까지 와닿은 것이다.
자전기길 따라 서있는 하우스 농사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아니 그러겠는가.
누군가가 점화만 하면 불길이 거세게 일어날 기세임을 그들의 체온에서 느낄 수 있다.
2km남짓 더 걸어 섬진강가 외딴 횡탄정에 도착함으로서 하루를 마감했다.
도중 어느 분의 친절한 안내 대로 시멘트바닥 횡탄정과 마루로 된 보인정이 있다.
다행히도 한 낚시가족이 횡탄정을 점유했고 보인정이 내 차지가 되었다.
동해마을 무문정에서 잠시 순천을 경유해 구례읍, 곡성 고달면의 끝자락까지 왔으니까
30km쯤 되는 거리다.
구례구역의 아침식사와 논곡에서 마신 막걸리, 가정의 작은 우유1팩, 고수정의 수박1쪽,
많이 마신 물이 오늘 섭취량의 전부니까 저녁식사가 꼭 필요했으나 대책이 없다.
그럼에도, 천막을 치고 등을 대고 누울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길들여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다른 어느 밤보다 풍요로운 밤이 되었다.
옆 횡탄정의 낚시가족이 저녁을 주었고 깊은 밤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인 식혜와
섬진강의 보물 다슬기 농축액이 선물로 들어왔으니까.
밤8시 남짓 되어 다슬기를 잡으러 온 한 장년을 만났다.
정자 앞에 차를 세우고 잠수부처럼 장비를 갖춘 후 강으로 가기 전에 내게 인사한 그는
고달교를 건너오다가 인상적인 나를 보았는데 여기에서 인사하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채취허가증 소지자가 섬진강과 보성강을 통틀어 30명인데 하루에 최고 1톤을 잡는단다.
심야의 작업이라는 핸디캡이 있지만 30명의 하룻밤 수입이 최고 1천5백만원이다.
번식력이 강해서 걱정되는 것은 강의 오염뿐이란다.
물 맑은 섬진강은 그들의 노다지다.
그는 물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나왔다.
친구의 자원방래(自遠方來)로 철수한다는 그는 그 새에 2kg을 잡아 업자에게 넘겼단다.
밤이 깊어갈 때 그가 다시 왔다.
자기가 직접 만든다는 다슬기 농축액 한보따리와 1.5L들이 냉(冷)식헤 1병을 가지고.
가방끈은 짧아도 기죽는 일 없이 열심히 산다고 자평하는 그는 고달교 옆마을 뇌연마을
(뇌죽리) 거주 공천석.
중기사업(동산중기)이 주업이고 다슬기 채취를 야간업으로 하는 믿음이 가는 장년이다.
아무리 강렬한 인상이기로 심야에 천막으로 다시 찾아온 그를 어떻게 이해할까.
야훼 이레!
내 몸을 위해 걱정할 일이 있는가.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