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성왕일까? 동명성왕일까?
우리는 고구려의 시조를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서 중 하나인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시조를 동명성왕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과 동명왕은 다른 인물이다. 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왕(鄒牟王)으로, 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후대 사가들이 쓴 기록과 고구려인이 남긴 기록중 어느게 더 고구려 역사의 진실을 알릴까? 바로 고구려인들이 남긴 기록 즉 광개토태왕릉비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왕은 부여의 건국시조이다. 이제부터 왜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이 동명성왕으로 둔갑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아닌 부여의 시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추모왕과 동명왕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인데 어느 시점부터 고구려 사람들에 의해 한 명의 영웅이 된 것이다. 서기 60년경 쓰여진 후한 시대 왕충의 『논형』< 길험편>에는 우리에게 낯익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북쪽 이민족의 탁리국에 왕을 모시는 여자 시종이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 시종은 계란 같은 큰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놓고는 말에 밟혀 죽도록 했으나 말들 역시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아마 하늘 신의 자식일 것이라 생각하여 그의 모친에게 노비로 거두어 기르게 했으며, 동명(東明)이라 부르며 소나 말을 치게 하였다. 동명의 활솜씨가 뛰어나자 왕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그를 죽이려고 했다.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고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적하던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그는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에 부여국이 생기게 된 유래이다"
『후한서』의 부여국 기록을 보면 부여를 건국한 시조 설화가 논형과 비슷하다.
"색리국(索離國) 왕이 출타했을 때 그의 시녀가 임신하자 죽이려다가 계란만한 기(氣)가 들어와 임신했다 하여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 우리, 마굿간에 버렸으나 돼지와 말이 보호해 죽지 않자 어머니에게 주어 기르도록 하니 이가 바로 동명(東明)이다. 동명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자 왕이 그 용맹함을 꺼리어 죽이려 하자 남쪽으로 도망하는데 고기와 자라들이 엄체수를 건너게 도와주어 무사히 건넌 후 부여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고주몽) 이야기와 거의 모든 것이 같다. 그러나 이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국의 건국 신화이다. 그리고 추모왕이 아닌 동명왕의 이야기이다.
위와 같이 동명왕과 추모왕은 차이가 있다. 기록상으로 본다면 동명왕계 기록이 원형이고, 추모왕의 이야기는 동명왕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수정한 것에 불과하다.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가 부여와 건국신화를 공유할 수 있을만큼 동일한 문화적 전통을 가졌다는 것과 또 동명과 추모왕이 알과 관련있는 난생설화를 통해 범 동이족의 공통정서(부여의 동명왕, 고구려의 추모왕, 중국 동해안에 살던 서이족의 서언왕, 가야의 김수로왕, 신라의 박혁거세가 전부 난생설화를 가지고 있다)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에 의해 사라진 부여의 시조 동명왕
부여의 건국영웅인 동명왕은 건국신화를 제외한 일반 역사서에는 그 실체가 누구인지 나타나있지 않는다. 해모수나 해부루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동명왕은 부여족이 숭배한 뛰어난 영웅이었음은 분명하다. 고구려에서 그의 건국신화를 채용해야 할 만큼 그가 부여족에서 차지한 위상은 대단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출신지마저 다른 동명왕과 추모왕의 이야기가 언제 어떻게 혼합되어 우리가 한 사람의 이야기로 알게 되었을까?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무신왕 5년(22년) 부여 공격을 기점으로 부여를 능가하는 강대국이 된다. 서기 3세기에 이르러 부여는 선비족의 공격에 밀려 겨우 명백을 유지하는 약소국이 되고, 고구려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의 즉위를 통해 왕실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게 되면서 왕실의 역사를 재정립하게 된다. 이 무렵, 계루부는 그들의 시조인 추모왕의 건국을 신화로써 미화하기 시작한 것 같다. 391년에 등극한 광개토호태왕 시절에는 추모왕의 건국신화가 확립되어 일반 백성들도 건국신화를 전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추모왕을 미화하기 위하여 부여의 건국영웅인 동명왕의 건국신화가 그대로 채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정리되어 대내외에 과시되자 430년경 고구려를 방문한 북위 사신의 견문을 듣고 적은 『위서』에서 비로소 중국인들도 추모왕의 건국신화를 고구려전에 수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삼국사기, 동명왕편, 삼국유사 등 고려에서 만들어진 역사서에서도 고구려에서 전해지는 건국신화를 그대로 전하게 되었다. 특히 삼국사기는 추모왕을 곧 동명성왕이라 못받고 있어 두 사람 간의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므로 동명왕의 건국신화는 거의 사라질 뻔하고 대신 추모왕의 건국신화가 우리에게 더 많이 전해졌던 것이다.
동명왕은 북부여 5세 고두막 단제?
한단고기 북부여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계유 13년 한의 유철(무제)이 평나를 노략질항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니 그 지방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호응하면서 싸우는 군사를 도와 크게 떨쳤다.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람을 시켜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 곳에 도읍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라고 하니 단제(고우루)는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고두막한)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君臣)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에 국상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은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라 하며 또는 동부여라고도 한다. " -『북부여기』 제4세 고우루 단제 조 -
위 기록은 동명(고두막한)이 한나라 군대를 쳐부수어, 군을 장악하자, 당시 부여의 임금이었던 고우루를 핍박하여 해부루를 동쪽으로 내쫓고 자신이 북부여의 임금이 되는 것을 말한다. 북부여기를 보면 동명이 부여 왕에 오르게 된 내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유 원년(기원전 108) 이 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제(帝:동명=고두막한)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고조선 마지막 단군)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중략) 을미 23년(기원전 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동명)가 이를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 『북부여기』 제5세 단군 고두막 조 -
북부여기에 의하면 동명은 바로 부여 5세 단군이자, 북부여의 시조인 고두막한이다. 현재 한단고기는 위서 취급을 받지만, 그 내용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더욱이 한국 고대 사서가 부족한 우리에게 있어 한단고기는 조선상고사와 함께, 베일에 가려진 한국 고대사를 복원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하겠다. 그러니 무조건 배척하기 보다는 일단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검토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단고기 북부여기의 내용이 맞다면 동명은 북부여의 개국조 고두막한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은 고두막한의 아들인 부여 6세 임금 고무서의 사위가 되어, 고무서가 죽자 그 뒤를 이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한다.
고구려의 존속년도가 700년이 아닌 900년이라는 얘기가 많은데 북부여기 내용이 사실이라면 고구려의 존속년도의 해답은 자연히 풀린다. 부여의 역년 + 부여를 계승한 고주몽이 개국한 고구려의 역년을 합하면 자연스레 고구려 900년 역사라는 실마리가 풀린다.
참고문헌: 고구려의 발견(김용만 저),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이덕일 저), 바로보인 한단고기(문재현 저) |
출처: 개벽 !! 포커스 원문보기 글쓴이: 9천년 역사의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