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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 이백년(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 낭장 이만년(李萬年), 참찬 이억년
(李億年),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 5형제 중 투금강(양화도)에서 문열공께서 형 유수공을
양 문정리로 전송하시든 역사와 또 백년 할아버지 사적지가 소재한 이곳에 문정리 소재 유
수공 할아버지 묘소를 대종회 시욱 회장, 문순 사무처장, 인포 부회장, 이옥수 함양군 종친회
장, 함양군 김성진 문화원장, 종길 유수공 종회장, 종천 시중공 종회장, 병한 경무공 종회장,
정상 부산종회장, 함양거주 정수종친, 외 유기태 외손 및 김진철 시공예정자, 필자, 모두 13
명이 묘정에서 참배 드리고 앞으로 유수공 묘역 정화사업관계를 아래와 같이 현장에서 충분
논의 후 공사 설계 및 견적관계를 (1차안 2차안 두안)동 문화원에서 추천한 김진철 시공예정
자에게 의뢰하기로 하고 최종결정은 행부에서 정하기로 하였다.
유수공 비는 지금으로부터 약 80여년 전 필자 직게 동곡 후예 후산공 (厚山公) 도복(道復) 선
조가 비문을 지였습니다. 그 당시 비문에 유수공 으로 관직을 표기 하시지 아니하고 고려처
사성산이공지묘(高麗處士星山李公之墓)로 기록된 연유는 아마도 1613년 癸丑譜에 (諱億年)
란에 출가(出家)로 되어 있어 문열공 다음에 형이 동생으로 기록하고, 비문에도 관직을 못
쓴 것이 아닌지 추정이 되옵니다. 그 緣由을 우리 보록에는 한곳도 기록된 곳을 발견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도 앞으로 구명 되여야 할 문제라고 보아 집니다. 아래에 공의 비문을 소개
한다.
高麗處士星山李公之墓
配慶州李氏祔左
勝國自中葉以降 權臣跋扈 外寇陸梁 宗社綴旒 生靈魚肉 當是時 能見幾而
作 隱遯不汚 其惟韓錄事惟韓 李樂山諱億年乎 錄事當神宗時 見崔忠獻用
事 蒙古蠶食 棄官隱遯于方丈之西 後蒙旌招 而以詩示志曰 一片絲綸飛入
洞 始知名字落人間 樂山公則 當忠烈王時 見胡元簒宋 王綱解紐 以新榜文
科 去隱于方丈之北 築一巖栖之室 牓曰道正精舍 嘗有詩云 十載紅塵夢外
事 靑山何處獨掩扉 祗此一事 可想公志尙 與金仁山許白雲同調而其顯晦
之相遜 如彼者何哉 且况錄事得南冥而峯頭冠玉 水面生月 有光於百世 若
吾樂山公 不得於一蠹濯纓 而見漏其頭流錄 又因子姓之零替 漏我大同譜
重可悲也 公卽我先祖隴西公之第四子 而梅雲堂文烈公諱兆年之叔兄 墓
在咸陽郡嚴川負壬之阡 時人至今指點其里曰億年洞 士林從享安山書院
夫人慶州李氏龍幹女 葬用魯人禮 子男台成密直司事 台文郎中 女壻廣平
君稜 孫男日芳長房出 涵芳次房出 曾玄不盡錄 後孫敎然等 將伐石以竪
陘 請余以記之 姑據其家傳所錄 抽演其說 如此云爾
旃蒙赤奮若淸明節傍裔孫道復謹撰
後學靑松沈相福謹書 (탁본 김용규 선생)
고려처사 성산이공의 묘
고려왕조는 중기 이후 권력자가 발호하고 외적이 침입하여 종묘사직이 위태하고 백성이 어
육이 되었다. 이때에 기미를 알고 은둔하여 물들지 않은 람으론 녹사 한유한①과 요산공 이
억년②이 유일할 것이다. 녹사는 려 신종 시기에 최충헌(1149~1219)이 집권하고 몽고가 국
토를 잠식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 서쪽으로 은둔하였다. 뒤에 나라의 초빙을
받게 되자 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그 시에,
“한 편의 조서가 산골짝에 날아 들어오니 비로소 이름이 인간 세계에 알려진 것을 알게 되었네”
고 하였다. 요산공은 충렬왕(재위 1274∼1308) 때에 원나라가 송나라(960∼1279)를 멸하고
나라의기강이 해이된 것을 보고 새로 문과 급제자의 신분으로 떠나 지리산 북쪽에 숨어 은
거하는 집을 한채 짓고 도정정사라고 이름 붙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로도 공의 고상한 뜻이 김이상(1232~1303), 허겸(김이상의 제자, 다
송말원초의 은사임)③과 상통함을 상상할 수 있는데 들은 드러나고 요산공은 묻힌 것이 이
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군다나 한 녹사는 남명의 평가를 얻어 산봉우리에 옥을 얹어놓
고 수면에 빛이 생긴 듯 백세에 빛나지만④ 요산공은 일두(정여창)선생과 탁영(김일손)선생
의 평가를 얻지 못하고 그 <두류록>에 누락되었고 또 자손이 영락하여 우리 대동보에도 빠
졌으니 거듭 비탄할 만하다.
공은 곧 우리 선조 농서공(이장경)의 제4자이고 매운당 문열공 이조년(1269~1343)⑤의 넷
째 형이다. 묘소는 함양군 엄천(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 임좌병향의 언덕에 있다. 사람들이
지금도 그 마을을 가리켜 년동⑥이라고 한다. 사림이 안산서원⑦(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
리, 주이씨 22현을 합사)에 배향하였다.
부인은 경주 이씨로 이용간의 딸이다. 쌍분으로 장례지냈다. 아들 태성은 직사사이고 태문
은 낭중이다. 사위는 광평군 이능⑧(이호성의 5세조)이다. 손자는 일방으로 장남 소생이고
함방은 차남 소생이다. 증손, 현손은 다 기록치 않는다.
후손 이교연 등이 비석을 다듬어 언덕에 세우고자 하여 내게 기록을 청하였다. 우선 그 가문
전승의 기록을 토대로 그 글을 부연하여 이렇게 적는다.
을축년(1925) 3월 방손 이도복⑨(1862~1935) 삼가 지음
후학 청송 심상복⑩(1876~1951)삼가 씀
번역 :후학 언양 김윤수
<문정리 출신 김용규 (48 남 교사) 선생님의 글을 꼭 읽어 보십시오>
성주이씨 종친회 회장님 귀하(1)
안녕하십니까?
초면인데 용기를 내어 성주이씨 종친회 회장님께 편지를 드립니다.
본인은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를 고향으로 둔 김용규라는 사람입니다. 현재 경남
통영시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며 고향 함양의 향토 역사에 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고향인 경남 함양에서는 7년간 근무를 하였는데 7차 교육과정에서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교
육과정은 그 지역의 문화 역사를 위시해 사회 전반에 걸쳐 좁게 학습을 하게 짜여진 탓에 지
역의 교사가 직접 사회과 도움자료를 만들어 교과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바, 본인이 교
재 집필진에 직접 참여를 하였고, 교재를 만들기 위하여 함양과 관련된 문화, 역사, 전통, 전
설 등등 제반 자료들을 검토하고 수집하고 탐색하여 지금은 함양군내 학생들이 제가 만든
교재를 가지고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이로 인해서 함양의 전설과 성주 이씨 집안과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너
무나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몇 학년 때인지는 몰라도 도덕 교과서의 내용 중 옛날에 두
형제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 두 개를 주워 사이좋게 금덩이를 나누어 가지게 되나 나
룻배로 강을 건널 때 동생이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형이 이 장면을 보
고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으니 형이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금덩이 두 개는 바로 자신 혼자만
의 몫이 되었을 거라는 시기심이 싹터 오름과 함께 필요 이상으로 형님을 미워해지기까지
한 것이 두려워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고 하자 형님 역시 그런 마음이 생겼음을 시인
하고 형 역시 그 아까운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는 내용입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이런 이야기는 도덕 교과서에만 있는, 어른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혼
자 생각해 본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선 세월과 함께 아름다운 두 형제의 이야기를 까맣
게 잊고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 김성진 함양문화원장님과 이백년 이억년님
김성진 함양문화원장과는 개인적으로 저와 인연이 많으신 분입니다. 중학교때 은사님이시
기도 하고 함양문학 회원이시기도 하여 그분과의 많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김성진 문화원장
님께서는 2005년도에 새 문화원장님으로 선출 되셨지만 사실 그 이전 부터 함양의 문화업무
에 많은 노고가 계셨는데, 지금은 교직을 정년 퇴임하시고 함양의 문화의 업무에만 열중하
고 계시지만 근 30여 년 동안 함양의 향토 역사에 대해서 많은 책을 저술하시었습니다.
10편의 시집 외에 함양 역사서인 의병장 문태서 연구, 우리고장의 전설, 함양의 뿌리(지명책
자), 학사루의 별, 다볕골 옥돌, 함양누정기, 함양 예찬, 함양역사 인물록, 함양금석문 총람록
등을 편찬하시었으며 10년 동안 함양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시면서 함양문학의 위치를 공
고히 하는데도 지대한 업적이 있으신 분입니다. 2001년 전국시인협회 세미나 개최, 2002년
도엔 전국 문인 대표자 대회를 함양에서 개최하여 지리산 작은 산골 마을인 함양을 홍보하
는데 일익을 담당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분을 장구하게 소개했느냐 하면, 함양 문협 회원인 제가 그분과 자주 모임에 접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때마다 묻혀진 함양의 전설이나 역사에 관해서 자주 들었던 이야기 때문입
니다.
그 주 이야기를 요약해 본다면
* 변강쇠 옹녀의 이야기 : 함양군 마천면의 등구 마천 오도재를 배경 무대로 한 가루지기 타
령인데 이는 판소리 12마당 중 6째 마당으로 판소리 가사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함양을 배경으
로 하였다.
* 고려말 목은 이색이 말년에 함양에 내려와 살았다는 기록이 여러곳에 있다. 함양 재궁이라
는 마을에 가 보면 목은이 들, 목은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곳이 있는데,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
다.
* 임진왜란때 왜장과 함께 남강 물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무덤이 함양군 서상 방지 마을에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 고려말 개성 유수를 지낸 이억년이 함양에 내려와 살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개성유수라는
직급은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격으로 당시의 수도가 개성이었으므로 아주 높은 직급이었던
분이 시끄러운 정계가 싫어 함양의 지리산으로 오게 되었으며 휴천면 백연마을과 아주 관계
가 많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백년 이억년 두 형제분과 관련된 내용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이며 많은 관심과 사료적
인 고증을 많이 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지만 그냥 여담 정도로만 인지했을 뿐 무관심으로만 일관
했지요. 막연한 전설로만 말입니다.
그러던 중 KBS2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지금도 인기 프로그램의 하나인 제 39회 스펀지 프로
그램 시청을 하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 고려 문인 이조년은 우애를 위해 (황금) 을 던졌다. (★★★☆)
: <형제의 우애를 다룬 유명한 이야기, 고교 한문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형제투금'>
두 형제가 길에서 황금 두 덩이를 우연히 발견, 하나는 형이 갖고 른 하나는 동생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 느닷없이 동생이 물 속으로 황금을 던져버렸다. 형
이 깜짝 놀라 왜 그랬냐고 묻자 황금을 본 순간, 형의 황금도 탐하려는 마음이 생겨 강에 던
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말에 형도 감동하여 형 역시 황금을 물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이조년과 그의 형 이억년이다.
이 형제가 황금을 던진 곳은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바로 강서구 두암공원의 한 연못이다.
바로 이억년님의 이야기가 방영된 것이지요. 또 하나의 깜짝 놀랄일은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교과서에 실려 있었으며 그 시조에 매료된 적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나라 사람중
이 시조에 대해서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바로 이조년의 시조이지요.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이 시조의 주인공이 황금보다도 형제간의 우애가 훨씬 높이 있다고 스스로 실천해 보였던그 두 형제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 아하! 저 아름다운 이야기는 내 고향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
김성진 문화원장님께서 여러 번 말씀 하셨던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였구나! '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이며 평생 생활을 하고도 남을 황금덩이를 버릴 정
도로 형제간의 사랑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던 두 분 형제 이야기는 어른이 되고 오랜 교직 생
활에서의 직업적 가치관에서 기인된 연유인가는 몰라도 저 이야기는 성주 이씨의 자랑스러
운 이야기로만 끝내서는 아니 된다고 여러 번 독백을 하여 보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주인공이 저의 고향인 함양 휴천과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에 무척 흥분이 되었
고 제 가슴속에는 가슴 뿌듯한 자부심과 함께 약 1000여 년 동안 묻혀 있던 사실 하나를 재
조명하여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꽉 메우더군요.
◈ 황금을 강물에 던져버린 두 형제의 이야기에 매료된 이유
저는 교직생활 28년 동안 학생 생활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참 많았고 학교 업무도 그쪽 분야
에 종사했었습니다. 교육잡지에 학생 생활 문제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써 보기도 했지요.
요즘 자라나는 세대에 대해서 학교에 근무를 하는 한사람으로서 느껴지는 오묘한 감정이 참
많기도 한데, 재작년으로 기억되는 사건 하나를 다시 꺼내 보고 싶군요.
사건의 주인공은 경찰 업무를 도와주는 의무경찰의 한사람이었는데 저녁에 근무지를 이탈
하여 밤샘을 하고는 새벽에 들어온 그를 보고 상사가 꾸지람을 하였다는 이유로 5층 옥상에
서 자살을 하였다는 신문 기사였습니다. 의무경찰이라는 업무는 군 복무와 유사한 일일 것
인데 근무지를 이탈하여 PC방에서 게임을 즐기고, 당연히 꾸지람을 받아야 할 자신의 잘못
에 대해서 죽음으로 표현을 하였다는 사안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더군요.
2005년도엔 이와 비슷한 큰 사건 하나가 있었지요. 휴전선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
던 한 병사가 자신을 자주 나무란다는 이유만으로 수류탄 투척과 함께 총기를 난사하여 동
료 병사 8명이 사망하였다는 사건 외에 상사가 나무란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고 동료들이 먹
는 식수에다가 제초제를 넣어 동료를 중태에 빠트린 사건, OECD국가 중 이혼율 세계 1위,
학교 폭력 매우 심각한 상태라는 각종 매스컴의 보도 내용은 이미 세인들에게 너무나 잘 알
려진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런 사건 외에 얼마전의 사건이 또 생각나는군요. '60억 재산가 70대 할머니 한강에 투신-
자살로 추정' 이라는 기사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남편과 별거 생활을 하면서 홀로 살
고 있던 할머니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고민이 참 많았겠지요. 얼핏 흘림 기
사로 난 내용 중 딸과 재산 문제 갈등, 아들과 재산 문제 갈등 등의 문제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 봅니다.
이런 사건들과 연관시켜 요즘 세상을 평해 보라고 한다면 영혼의 상실 시대라고 단언을 해
봅니다. 그러면서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낱말은 케케묵은 고전이 되어 버렸다는 자학적인
비애마저 앞서더군요.
문제는 이런 사건에 대해서 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일까요? 너무나 버릇없이 구는 학생의 생
활지도를 위해 훈계나 꾸중 내지는 기합을 주었다고 경찰에게 폭력교사로 고발을 하는 시대
입니다.
'왜 우리 아이의 기를 죽이느냐!' 하는 논지이지요.
세상의 분위기가 돈만이 전부이다 라는 가치관으로 흘러가는 것은 제가 본 관점만은 아닐
것입니다.
돈은 생활을 참 편리하게 하고 우리네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필수 요소니까 돈의 중요성과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라나는 우리네 아이들마저 정신이 혼탁해져 가고, 인터넷이나 핸드폰, 각종 유해
매체 등을 통해 무방비로 저질 문화에 너무나 쉽게 접해져 가고 있으며, 아니나 다를까 제가
교직 생활을 통해서 경험한 바로는 익히 보도된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의 사건 기사 외에
보도되지 않은 위험 사건이 너무나 많다는데 있습니다.
제가 보아온 관점은 정신 문화의 황폐화에 대해서 위기 의식을 너무나 많이 느껴 보곤 했습
니다.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열해 보았으나 고려시대 때 이억년 이조년 님들께서 보여주신 투금탄
이야기 속에서 요즘의 황폐해진 정신 문화의 새로운 정립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형제 사이에서 물질욕 때문에 금이 간다면 그 물질은 이미 죽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겠지요.
그 분들의 일화에서 새로운 정신문화를 일깨우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 경남 함양군 휴천면 백연마을에 대해서
형제간의 우애 때문에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린 주인공은 이억년과 이조년 두 형제분들이었
고, 경남 함양에 와서 사셨던 분은 이백년 이억년 두 형제 분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인터넷에 조회를 했더니 고려 고종 때 시조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이 호장을 지내면서 덕
망이 높았고 이장경의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 가서 벼슬할 때 공이 많아 원나라 황
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郡公)에 추봉하였으므로 처음에 농서 이씨로 하였으
나, 그후 그의 아들 5형제 밀직사사 이백년(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 낭장 이만년
(李萬年), 참찬 이억년(李億年),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가 문과에 급제하고 가세가 번성해
지자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에따라 본관을 성주라 했다라고 적혀 있더군요.
함양군 휴천면 백연마을에서 이백년 이억년 두 형제분이 사셨다는 기록은 「함양군지(옛 천
령지)」에 있으며 「한국인의 족보」 971페이지 성주이씨 편에도 잘 나와 있더군요.
*이억년 : 자 (인녀) 호 (락산제) 관직 (개성유수), 1285년(충렬왕 11) 문과에 급제 개성유수
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 갑섭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千載紅塵夢外
事靑山何處獨掩扉라는 시를 남기고 위성 엄천리로 들어가 도정정사를 짓고 孔孟의 도를 강
론하였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위성이라는 지명은 경남 함양군의 옛 지명을 말하며 지금도 함양군 함양읍에는 위성
초등학교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엄천리라는 지명은 현재의 행정구역상 함양군 휴천면 엄천
골짜기를 말하며 함양군 유림면 엄천강 쪽에서 마천면 아래쪽까지를 엄천골 또는 휴천계곡
이라고 합니다.
※ 이 내용은 성주이씨 대종회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내용을 내고향 엄천에서 옮겨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