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와 어깨를 나란히(1970-1979)
[1976년 고등학교 본관과 신관의 건축은 힘차게 진행되고]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과 교육의 여건
1.시대적 배경
우리 국가 발전과 한국 교육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기록한 70년대는 우리 민족사에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민 각계 각층에서는 영광의 70년대니 대망의 70년대니 하며 민족적 기대 속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을 살펴보면 1970년대에 전국토의 동맥이라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이 되었고, 1972년 8.3조치로 기업의 사체를 동결, 기업 자금 사정을 호전시켜 기업들이 급성장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1973년 포항제철의 준공, 소양강 다목적댐 준공, 호남. 남해고속도로, 1974년엔 서울에 지하철 1호선이, 1975년엔 영동, 동해 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며, 1977년 국내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경남 고리에 세워져 경제적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1971년 11월 제26차 유엔총회에서 중공이 자유중국을 축출하고 대신 상임 이사국이 되면서 미. 중공간의 화해의 움직임이 보이자 우리 정부도 이에 대처하기 위한 의지로 다각도의 모색을 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 8.15선언에 이어 1971년 대한적십자사의 제안으로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했으며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화를 추진하였고 1973년엔 6.23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을 하게된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서울 잠입 사건, 그해 11월 울진 삼척 지구의 무장공비 출현 등 북한의 남침 야욕에 의한 도발이 자행되어 1972년 10월 17일 비상 조치와 함께 개정 헌법 안 공포, 이어 국민투표에 의한 유신 헌법이 확정되어 1974년에서 77년까지 4년 동안은 1972년에 출범한 유신 정부가 본격적인 유신 시대를 맞이하는 기간이 된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제1호가 선포된 이래 75년 긴급조치 9호의 공포에 이르기까지 국내 정치는 급박해지고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대통령 저격 사건이 발생, 이로 인해 육영수 여사가 피살되었으며 땅굴 발견, 그리고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1977년엔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국내가 소란하자 박대통령은 남북한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 미군 철수를 반대하지 않겠다고 천명하면서 그해 10월 통일을 위한 3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심각한 국가적 위기가 초래되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도기적인 제4공화국의 출범을 보인 시대이기도 하다.
한편 1970년대는 새마을 운동의 불길이 전국에 불붙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1972년도 정부의 새마을운동계획안을 보면 16,602개의 동리에 107억 원을 지원했다. 새마을 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잘살기 운동이요, 조국 근대화의 행동 철학이며 민족 통일을 위한 범국민적 일대 약진 운동이었다.
2. 교육여건
1970년대의 교육 여건을 살펴보자.
새마을 운동과 10월 유신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교육의 최대 과제는 국가 발전과 민족 중흥에 직결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생명 있는 교육, 생산적인 교육을 이룩하는 일이었다.
한편 국적 있는 교육은 1972년 3월 24일 대구에서 열린 총력안보 전국교육자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천명한 것으로 주체적 사관의 확립을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의 생존을 위한 국가 안보의식을 함양하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1970년 박대통령이 시달한 8개 항목의 '학교교육환경정상화에관한지침'은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을 공식화하자는 요지로 육성회 조직을 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각급 학교에서 징수해 오던 각종 잡부금을 양성화하여 종전까지 기성회를 발전적으로 해체, 학교 육성회로 개편함에 따라 교원의 처우 개선, 학생 복지 증진 및 학교 운영비로 충당하도록 하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 학교 육성회의 발족으로 학생, 교사, 학부모 사이에 고질적으로 팽배했던 불협화음의 종식은 물론 생계 불안정으로 증가 일로에 치닫던 교원의 퇴직률을 감소시킬 수 있어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기는 본격적인 유신 시대로 유신 교육의 심화라는 한마디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74년 문교부에서 각 시도교육위원회에 시달한 장학 지침을 보면 이 시대의 교육 여건을 가장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① 국적 있는 교육의 신장 ② 유신교육의 체제 확립 ③ 새마을 교육의 심화 ④ 보건 체육교육의 충실 등의 내용인데 1975년의 장학 지침은 여기에다 과학 기술 교육의 진흥이 더 첨가되었다. 1975년 유기춘 문교부 장관은 그 해의 문교 시책을 '교육 유신의 해'로 정하고 교육 지표를 '민족 중흥을 성취할 수 있는 국민 형성'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1975년 5월 21일 국무회의에서 학도호국단 창단을 결의하고 곧이어 6월 20일에서 30일 사이에 각 대학과 고등학교별로 학도호국단 발단식이 거행되었다. 이로 인해 종전의 학생 자율 선거에 의한 학생회는 해체되고 학생의 서클 활동도 호국단 안으로 흡수되었다.
한편 1973년 8월 31일 제3차 교육과정이 개편 고시되고 이어 초. 중. 고등학교의 교과서도 이 시기에 개편을 거듭하였는데 특히 국사 교과서는 투철한 주체적 민족사관 확립을 목표로 하는 내용으로 개정되었으며, 충. 효 교육에 관한 내용이 강화되었다. 1974년부터 시행된 고교 평준화가 서울과 부산에 이어 대구, 인천, 광주지역으로 확대되어 그 제도가 정착되어 갔고, 1975년부터 70년이래 지속해 온 중. 고교 교과서의 한글 전용 정책을 번복, 기초 1,800자 범위 내에서 한자 병기로 바뀌었다. 이어 1975년부터 사립학교 교원연금제도가 실시되어 공. 사립간의 교원처우개선이 균등화되고 사립 중. 고교 교원 채용을 학교장 재량에 맡겼다. 1977년에는 청소년 수련장을 전국에 확대하여 각 도마다 1개씩 설치하였으며 1977년에는 평준화 교육을 받은 고교생이 처음 대학에 진학하였는데 체위는 향상되었으나 학력은 저하되어 고교 평준화의 득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1970년대 학교 개관
1970년대의 남산 학원은 변화와 도약의 시대였다 라고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남산 학원의 낙양동 시대가 시작되어 형제 학교가 나란히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점이고, 둘째는 남산 학원 경영진의 변화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아쉬웠던 일은 28년간 남산 학원과 인연을 맺은 황의복 교장 선생의 퇴임이었다.
1970년 1월 황의복 남산중학교장 선생이 초대 상주실업고등학교장으로 겸무 발령을 받으면서 취임식을 가졌고, 3월 2일 김판영 경상북도교육감이 참석한 가운데 상주실업고등학교 개교식을 가졌다. 이어 남산 학원 산하 두 학교의 교직원 친목회가 정식으로 결성되어 조직적인 친목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해 12월엔 낙양동 388번지에 교사(4교실) 1동이 준공되어 본격적인 낙양동 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어 1971년 2월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중학교무시험추첨입학제도가 시행되어 남산중학교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을 뿐 아니라 몇 가지 문제점들이 해결됨으로 학교 발전에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무시험 추점 진학으로 인해 전국의 중학생 교복, 교모, 교표가 통일되기도 했다.
1971년 9월 30일엔 상주실업고등학교의 위치 변경인가를 얻었고, 다시 1972년 7월엔 상주실업고등학교의 교명이 상주종합고등학교로 변경되면서 고등학교 교실 2층 3교실이 준공되어 고등학교의 시설 확충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황의복 교장 선생은 '상록수 교장'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영남일보에 보도되기도 했으며 고등학교에선 교지 '송리'가 출간되었다.
1973년에 접어들면서 1월 11일 고등학교는 제1회 졸업식을 거행, 135명의 졸업생을 첫 배출하는 기쁨을 맛보았으며, 중학교는 학년 당 5학급인 학급 규모가 6학급으로 증설되는 학칙 변경인가를 얻어 중학교가 18학급의 규모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1975년 중학교에 사격부, 배구부, 검도부가 창단 되었는데 특히 배구부는 경북 대표로 선발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고, 같은 해 대성전 앞마당에 테니스장을 개장하여 테니스 저변 활동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같은 해 직장민방위대의 발대식이 태평루 앞마당에서 이루어졌다.
1976년 황의복 교장 선생은 대구의 매일신문과 인터뷰를 하여 '인간 헌신'이라는 고정란에 네 번째로 인터뷰한 기사가 게제 되기도 했다.
1976년 11월 1일은 남산학원 경영진이 권희태 현 이사장의 체제로 바뀌어 본격적인 발전의 계기가 된 날이다. 그동안 상주실업고등학교 설립과 개교 및 교실의 신축 등 무리한 시설 투자가 학교의 재정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드러나 어려움을 겪던 중 교육에 대한 열정이 그 어느 누구보다 강했던 권희태 현 법인이사장과 황의복 교장 선생과의 조우가 새로운 출발의 시작이었다. 11월 1일 제4대 권세환 법인 이사장이 취임하게 되고, 1977년 2월 황의복 교장 선생의 퇴임식이 낙양동 상주종합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렸다. 한편 같은 해 3월 박동창 상주종합고학교장과 노황석 남산중학교장이 취임을 하였으며 중학교는 교훈을 '바르고 참되게'로, 고등학교는 '자주, 협동, 창의'로 바뀌게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상주종합고등학교의 교명이 상주공업고등학교로 변경 인가되기도 했다. 이어 1978년 8월 정휘동 제5대 법인 이사장이 취임하고 9월에는 중학교 최초로 M.B.C 라디오 공개 방송이 열렸으며 고등학교에는 신관(교실 11칸)이 증축되면서 공업고등학교의 외형적 면모를 세우는 대 역사를 시작했다.
1970년대 중학교의 교육 활동은 특히 특별 활동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앞서 제시한 각종 체육부서의 창단이 그러했고 특히 주산부, 배구부, 웅변부는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여 남산중학교의 이름을 상주 지역 사회와 경북은 물론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초대 상주실업고등학교 황의복(黃義福)교장 취임
법인 정관 변경인가와 더불어 상주실업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마친 남산학원은 1970년 1월 28일 황의복 남산중학교 교장선생을 상주실업고등학교 교장으로 겸무 발령하고 취임식을 가졌다.
황의복 교장 선생은 1949년 9월 1일부터 상주고등공민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남산중학교와 인연을 맺어 1951년 남산중학교 교감으로 다시 1954년 2월 24일 제3대 남산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었다.
상주실업고등학교 개교식
1970년 3월 2일 새 학기가 시작되는 시업식 자리에서 상주실업고등학교 개교식을 가졌다.
김 인 이사장을 비롯한 법인 이사들과 황의복 교장 선생을 비롯한 여러 교직원, 그리고 안상구 교육장을 비롯한 교육계 여러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성전 앞뜰에서 성대히 열렸다.
새로 입학을 하게된 185명의 신입생들과 남산중학교 재학생들이 함께 한 이 자리에서 김 인 이사장과 황의복 교장선생은 식사와 치사를 통해 상주실업고등학교가 학교 설립의 취지에 맞게 실업에 관한 전문 교육기관으로 성장할 것과 이 지역뿐만 아니라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기능인 양성을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
상주실업고등학교의 상징 제작
1. 교명
1968년 8월 12일 제80회 법인 이사회에서 가칭 상주상업고등학교 설립을 위한 안건이 상정되었다. 그러나 그후 여러 차례 논의를 하여 상주실업고등학교로 교명이 확정되어 1969년 12월 15일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고 12월 31일에 정관변경인가를 얻었다. 설립인가 당시 설립 목적을 보면 '교육법에 의하여 고등보통교육 및 실업에 관한 전문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어 실업교육의 중흥을 목표로 했기에 교명으로 정하였다.
2. 교훈
교훈은 자주 자립, 협동 단결, 성실 노력이었다. 이 교훈은 중학교와 함께 사용하였는데 중학교는 이미 1979년 3월 2일 교훈 2차 변경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교훈이 제정된 배경은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고 이는 새마을 교육의 이념적인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이 교훈의 제정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3. 교표
교표는 개교 당시 다음의 사진과 같이 3개의 나뭇잎을 정삼각형으로 배치를 하고 그 안에 '고(高)'자를 도안했는데 삼각형의 나뭇잎은 푸르게 성장하는 학교의 이미지와 삼각형의 방향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학교의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교표는 1972년 7월 25일 교명이 상주종합고등학교로 바뀌면서 겨우 2년 4개월만에 바뀌게 되었다.
4. 교가
'새 아침 밝은 해 힘차게 솟고'로 시작되는 고등학교 교가는 상주실업고등학교 개교와 함께 당시 국어교사인 김주태 선생이 작사를 하고 경상북도 교육위원회 음악과 장학사인 석종환 선생의 작곡으로 탄생되었다.
곡은 벗어난 세 도막 형식의 악곡에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진취적인 기상을 살렸으며 가사의 내용은 낙양동과 개운동을 아늑하게 둘러싼 주산의 정기와 본교 교훈의 세 번째 덕목인 성실, 노력을 주제로 새 역사 창조의 역군을 기르는 영원히 빛나고 무궁할 학교상을 내용에 담았다. 그 동안 가사는 교명이 변경인가 될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는데 상주종합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될 때 여섯째 소절의 '빛 나라 우리 배곳 상주실업고교'를 '상주종합고교'로 바꾸었고 다시 교명이 상주공업고등학교로 바뀌면서 교가의 가사 중 '우리 배곳(배움의 터라는 뜻)을 '우리 학교'로 '상주종합고교'를 '상주공업고교'로 바꾸어 지금까지 불리우고 있다.
5. 교모, 교복, 머리, 이름표
교모는 일반 고등학생들이 사용하는 검정색 둥근 테 모양이었고 교모 앞에 교표(모표)를 달았다.
교복은 동복일 경우 아래 위 검정색이었고 상의의 목 부문은 직각형의 깃에 깃 받침을 덧대었고 백색의 뿔 칼라를 안쪽에 끼워 상의 목 깃으로부터 5mm 돋보이게 입었다. 카라 왼쪽에는 학교의 뺏지를 오른쪽에 학과를 표시하는 영문자 첫 대문자를 부착했다.
하복은 쑥색(쑥떡 빛이라고도 불렀음) 바지에 흰색 발팔 상의를 입었는데 머리는 짧게 막 깎았고 이름표의 부착은 1회 졸업생까지는 흰색의 직사각형에 검정색 글씨로 이름을 새겼으며, 2회 졸업생부터 교복이 자율화 되기 전까지 다이아몬드형의 흰색 이름표를 달았다.
남산중학교 교직원 친목회
'본 회는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우의를 돈독히 함을 목적으로 한다.'
남산중학교 교직원 친목회칙 제2조의 내용이다. 남산중학교 교직원친목회가 언제부터 조직되었는지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모른다. 다만 교직원들이 길.흉사 간의 일들에 대해 서로 부조하고 그 때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했으리라 본다. 이러한 친목회의 활동이 정식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 1970년대 초반부터라고 생각한다. 주로 길흉사의 상호 부조, 대외 교직원의 활동에 대한 지원, 그리고 교내 친목 행사로서 교내 친목회, 직원 여행 등이 친목회의 주된 업무가 되었다.
기록에 나타난 역대 친목 회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박성해(1970-72), 강범구(1975), 박창수(1976), 김재수(1977), 박종철(1978), 권창희(1979-80), 이희원(1981), 신기숙(1982), 박기성(1983-84), 김주삼(1985-88), 권응칠(1989-90), 김주삼(1991-94), 오무섭(1995-97), 박기성(1998-1999)
한편 교직원 친목 여행은 주로 문경 새재를 경유한 수안보 온천, 서해안을 돌아 오면서 도고 온천, 삼천포를 지나 한려 해상 공원, 부곡 온천, 동해안 및 백암 온천, 마산의 돗섬, 독립 기념관과 민속촌, 설악산과 환선동굴 등을 여행했고, 일일 등산 코스로 갑장산, 노악산, 문경 새재를 중심으로 한 삼관문 등이었다. 이러한 친목 여행을 할 때마다 늘 삼삼오오 일으킨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로 여행 후일담들을 더 풍성히 꽃피우기도 했다
중학교 교사 완성 계획 수립
1970년에 들어오면서 4월 5일, 15학급에 24개의 교실을 보유한 중학교 1971년도에서 1973년도에 걸쳐 특별 교실 3교실을 증축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이 완성되면 15학급에 보통 교실 15, 특별 교실 9실과 관리실로 교장실, 서무실, 교무실을 포함하여 모두 27개의 교실을 보유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본관 앞 부지 매입의 어려움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1974년 3월 4일(2교실)과 1976년 9월 23일(1교실)에 가서야 목조 교사 북편 농구장 자리에 개방 복도형 교사 1동(3교실)을 준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요시다(吉田) 회장 중학교 방문
1970년 11월 1일 일본인 요시다 회장이 중학교를 방문했다. 요시다회장은 일본 동경에서 회사를 경영하는 분으로서 우리 나라의 여러 학교를 방문하여 일본에서 준비한 학습 기자재를 기증하는 사업을 여러 해 전부터 해왔다. 요시다 회장의 방문은 조성묵 씨의 주선으로 이루어 졌는데 교육 기재로 당시에 매우 귀한 8mm 영사기 1대와 전자 오르간을 기증하였다.
상주실업고등학교 학칙 변경
- 상업과, 토목과 각 2학급으로 증설인가 -
1970년 3월 2일 개교한 상주실업고등학교는 12월 3일에 토목과와 상업과에 각각 1학급을 증설하여 토목과 2학급, 상업과 2학급으로 증설인가를 받았다. 이는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과 수출의 증대로 상업과 및 토목 기능인을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3년 후에는 총 15학급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고등학교 낙양동 교사(校舍 4교실) 1차 준공
낙양동 교사 1차 준공식
1차 준공된 낙양동 교사 모습
상주읍 신봉동 203번지에서 개교한 상주실업고등학교는 1970년 12월 6일 상주읍 낙양동 388번지에 학교 부지를 확보하고 신축 교사(4교실) 1동을 1차로 준공하게 되었다. 상주읍 낙양동에 터를 잡은 본교는 신봉동 시대에서 낙양동 시대를 여는 첫 출발이기도 했다. 비록 당시로 봐서는 황량한 언덕에 4개의 교실 1동이 초라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이 교사는 남산학원에 소속된 모든 구성원들의 땀으로 이룩한 것이기에 더욱 감회가 깊었다. 이 날 황의복 교장 선생은 식사(式辭)를 통해 '우리의 피와 땀으로 낙양 원두에 우뚝 선 새 보금자리를 만들었으니 이 자리가 지역 사회와 나아가 이 나라 산업 발전을 위해 참으로 쓰임 받는 유능한 기능인의 산실(産室)이 되도록 힘을 모으자'고 역설했다.
이날 준공식에는 김 인 이사장의 치사(致辭)와 김판영 경상북도 교육감, 안상구 상주군 교육장의 축사로 이어져 참석한 교육 동지들과 지역 내빈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중학교 무시험 추점제 입학
- 은행 알 추첨으로 학교 배정 -
1971년 2월 15일은 남산중학교 역사에서 주요한 획을 긋는 새로운 출발점이자 새 시대를 향한 도전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동안 정부는 중학교 입시에 대하여 다양한 제도를 시도했지만 입시 지옥을 해소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칭 일류 학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입시 경쟁은 극에 달하여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 그래서 1968년 7월 15일에 교육 혁명(敎育革命)이라고 불리는 대 혁신이 이루어 졌으니 바로 중학교무시험추첨제 입학이었다. 1969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1970년엔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의 6개 시에서 적용했으며 1971년부터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추첨 방법은 행정 구역과 국민학교 수를 고려한 학교군(學校群)을 설치하고 학군 내에는 중학교 지원자들이 지정된 장소에 모여 직접 은행 알을 추첨하여 진학토록 하였다. 1971년에 입시 제도가 무시험추첨으로 학교를 배정하게 됨에 따라 추첨 은행 알 번호의 향방에 따라 성적과는 관계없이 입학하게 되어 우수한 학생들이 본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정한 출발점에서 타 학교와 경쟁이 가능하게 되었고 신입생 모집 정원 미달이라는 어려움도 완전히 해소되었다. 이 후 몇 년간은 중학교 배정을 받은 학생이나 학부형들이 울음을 우는 헤프닝도 여러 차례 있었다.
어떻든 본교 교직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본격적인 교육을 위해 옷소매를 걷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고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중학교 교복, 교모, 교표의 통일
1971학년도부터 전국의 중학교가 무시험추첨으로 배정하는 입시 제도로 바뀜에 따라 세칭 명문 중학교라는 이름이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대구의 경우 일류 학교라 불리던 경북중학교는 경운 중학교로, 경북 여자 중학교는 경혜 여자 중학교로 이름마저 바꾸어 일류 학교 병을 없이하려 하였고 이러한 시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1969년 이후의 문교 시책은 평준화(平準化)를 추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지원자의 원에서가 아닌 은행 알의 번호에 따라 학교가 선택되자 전국의 중학교에서는 1971년 3월을 기하여 교복, 교모, 교표가 통일되었다. 이 때부터 1983년 교복자율화로 인해 교복이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전국의 중학교에는 중 자로 된 교표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제도로 중등 교육의 기회가 확충되어 진학률이 1985년에는 99%를 넘겼고 학교 차의 해소 및 평준화를 위한 시설, 설비, 기타 교육 여건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었다. 한편 국민학교 교육의 정상화로 전인 교육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상주실업고등학교 위치 변경인가
1969년 12월 15일 상주실업고등학교 설립인가시 학교의 위치는 신봉동 203번지였으나 1차로 교사 1동(4교실)이 낙양동에 완공됨에 따라 1971년 9월 30일 상주실업고등학교의 위치를 낙양동 388번지로 변경하여 인가를 받았다. 이로서 남산학원의 낙양동 시대가 열리게 된 셈이다.
노황석(盧滉錫)선생 고등학교 교감 취임
1971년 10월 1일 중학교 노황석(盧滉錫) 선생이 상주 실업고등학교로 전보 발령을 받으면서 교감 직무 대리로 취임을 했다. 노황석 교감 선생은 상주 낙동면 출신으로 1856년 3월 2일 상주농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3월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를 졸업, 1962년 3월 26일 남산중학교 과학 교사로 교직을 출발하여 1971년 3월에 남산중학교 교무주임교사를 역임했다. 한편 노황석 교감 선생은 1975년 3월 1일 상주종합고등학교의 교감으로 재직 중 1977년 3월 1일 남산중학교 교감으로 전보발령을 받았다가 같은 해 남산중학교 교장 직무대리를 거쳐 1983년 3월 퇴임할 때까지 중학교 교장으로 봉직했다.
엄상묵(嚴尙默)선생 중학교 교감 취임
1972년 3월 1일 중학교 교감 선생으로 엄상묵 선생이 취임했다. 엄상묵 선생은 상주 출신으로 1943년 3월 1일 일본 히로시마 현립 제1야간중학교를 졸업, 1944년 3월 30일 일분 도오쿄 이송학사 전문학교 1년 중퇴, 1945년 8월 15일 일본 도오쿄 공옥사 고등공업학교 3년 중퇴한 후 광복과 함께 조국에 돌아와 1945년 12월 1일 상주주둔 미군정청 통역관과 1946년 5월 24일 경상북도 제5관구 경찰서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1950년 1월 19일 상주고등공민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남산학원과 인연을 맺었다. 이어 1971년에는 남산중학교 주임교사를 역임했고 1972년 3월 1일 남산중학교 교감 직무대리와 1975년 3월 1일 남산중학교 교감으로 승진하여 근무하다가 1977년 3월 5일 상주종합고등학교 교감으로 발령을 받아 취임 하게되었다.
법인 정관의 변경 및
상주종합고등학교로 교명 변경인가
상주실업고등학교로 출발한 고등학교는 1972년 7월 25일에 법인 정관을 변경하고 교명을 상주종합고등학교로 변경인가를 얻게 되었다. 1972년 6월 8일 제104회 법인 이사회의록을 보면 교명 변경의 불가피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김 인 이상장의 제안 설명을 보면 상주실업고등학교는 농공 병진의 국가 정책과 상주 지역 사회를 공업 번영의 일조로 전위적 역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상주실업고등학교로 발족하였으나 3개년간 경영하여온 바
1, 현 전국적인 추세가 실업학교가 겪는 공통적인 경영상의 문제, 지역 사회에서 실업 학교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학생 모집에 늘 미달을 초래하여 왔고
2. 상주에 인문계 고등학교가 있으나 내년부터 늘어나는 고등학교 진학 희망자의 수와 본 교에 보통과(인문과) 설치를 지방민이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으며
3. 본교와 불과 60M의 거리에 농업기술학교와 상주상업전수학교가 있어 본교와 동일시하는 지방민들의 그릇된 인식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현 상업과 2학급을 1학급으로 줄이고 그 대신 지역 주민이 갈망하는 보통과 1학급으로 대체함과 동시에 교명을 '상주종합고등학교'로 변경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제안에 의해 1972년 6월 15일 법인 정관 변경인가를 신청하여 1972년 7월 25일, 교행 1042호로 정관이 변경인가 되었고 아울러 보통과 1학급, 상업과 1학급, 토목과 2학급으로 학칙도 변경인가가 되어 상주종합고등학교로 새 출발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교표, 교기, 뺏지의 변경
1972년 7월 25일 교명이 상주종합고등학교로 변경됨에 따라 학교의 교표도 변경되었다. 교표는 '綜'자와 '高'자를 복합시켜 디자인함으로 한 눈에 종합고등학교의 이미지를 나타내었으며, 뺏지 역시 감청색 직사각형 형태에 흰 글씨로 '종고'라는 글씨를 고딕체로 디자인하였다. 뺏지의 진한 감청색은 미래의 희망과 번영을 상징하는 색으로 상주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기 전까지 사용하였다.
고등학교 첫 교지 '松里' 출판
1972년 10월 20일 '문화의 달'을 기념하면서 상주종합고등학교 첫 교지 '松里(송리)'가 출간되었다.
당시 고등학교 문예반 지도 교사이자 국어 교사인 김주태 선생의 지도로 발간된 이 교지는 주로 학생들의 문예작품과 관심있는 교사들의 논단 및 작품을 중심으로 꾸며졌는데 당시의 사정으로 활판 인쇄본이 아닌 프린트 필사본으로 크기는 국판, 80쪽의 문집이었다.
'송리'란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의 기개처럼 곧고 당당한 의지와 꿈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큰 뜻을 담고 첫 출발하여 1973년 제2호를 발간하는 등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1974년 김주태 선생이 서울 중동고등학교로 전출함에 따라 2호를 끝으로 아깝게 종간하고 말았다.
고입 체력 검사
1961년 8월 12일 법률 제681호로 중. 고 .대 입시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각급 학교 입학에 체능 검사 결과를 반영하도록 하였다. 당시 체능 검사의 배점은 1/7을 차지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1972년 9월부터 체력 검사로 그 명칭을 바꾸어 중. 고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8개 종목(100m, 턱걸이, 여자:오래매달리기, 제자리 멀리뛰기, 윗몸 일으키기, 던지기, 윗몸 앞으로 굽히기, 던지기, 오래 달리기)을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체력 검사로 제도화하여 실시하였다. 이에 맞추어 각 시군 교육청에서는 상급학교입시를 위한 체력검사요원을 따로 선발하여 지구별로 검사 요원을 파견하면서 검사의 공정성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체력 검사 요원들이 일부 학생의 검사 결과를 부정으로 조작하는 사건이 일어나 일부 교사들이 해임되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검사의 공정성 문제가 강조되었고, 일부종목 중 '윗몸 앞으로 굽히기'는 없어지기도 했다. 한편 오래 달리기는 오래 달리기 검사를 받던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자 오래 달리기 종목의 점수를 하향 조정하여 여학생의 경우 조금 빨리 걷는 수준만 되어도 대부분만점을 얻었고 다른 종목을 만점 맞으면 오래 달리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시. 군별 체력 검사 요원을 선발하여 공동 시행하던 이 제도는 다시 학교 자체 검사로 방법이 바뀌어 이로 인해 자기 학교의 졸업생에게 유리한 점수를 부여하여 3학년 재적의 98%이상이 특급을 맞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리하여 내신성적을 위한 체력 검사가 실제로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제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어 1997학년도부터 사실상 폐지가 되고 체육 교과 성적을 환산하여 입시에 반영하게 되었으며 학생 체력 검사는 원래의 체력 검사 기능만 유지하게 되었다.
황의복 교장 선생 영남일보에 보도
황의복 교장 선생의 순수한 교육애 실천이 1972년 10월 15일 영남일보에 게제 되었다. '상록수(常綠樹) 교장 상주종합고등학교 황의복 씨'란 제하의 기사는 상주종합고등학교 전경 사진과 '판공비 절약으로 도서 구입', '가난한 진학생엔 입학금', '어려운 환경의 남산중학교를 큰 학교로 성장시키고 이어 상주종합고등학교 세움' 등의 소제목으로 '학교를 일으켜 큰 일꾼을 기르기에 여념이 없다'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는 20여 년 간 재단이 빈약한 사립학교 교장으로 봉급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오직 고향의 후진들에게 배움을 일깨워 주자는 신념아래 모든 것을 바쳐왔다고 전제하고 그간의 학교 경영에 어려움을 극복한 사례들을 자세히 전하고 있어 황의복 교장 선생의 교육 철학과 남산중학교, 상주종합고등학교의 위상을 높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교실 준공
1971년 12월 6일 낙양동에 고등학교 교실이 1차 준공된 후 1년 뒤인 1972년 10월 30일 고 교실 2층 3교실이 준공되어 학교의 모습을 점차 갖추게 되었다.
고등학교 제1회 졸업식
1973년 1월 11일 고등학교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김 인 이사장을 비롯한 학부형과 내빈 여러분이 참석한 이 날은 뜻 있는 졸업식이었다. 특히 졸업생들은 학교의 어려움만큼이나 학교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입학 당시 상주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상주종합고등학교의 졸업생이 되었다는 것도 그 중 하나이며 신봉동 향교의 대성전 뜰에서 입학식을 하여 낙양동 운동장에서 졸업을 한 것도 그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형편과 가정 사정으로 인해 185명이 입학하여 135명만 졸업을 하게된 것이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1회 졸업생들은 참으로 많은 땀을 흘렸다. 초창기 학교 환경을 꾸미기 위해 땅을 고르고 나무를 심었으며 낙양교가 놓이기 전엔 토관을 놓아 간이 다리를 만들어 물을 건너기도 했다.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수고가 그 어느 누구보다 많았기에 보내는 이나 떠나는 이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중학교 학칙 변경인가
- 학년 당 5학급을 6학급으로 증설 -
1963년 1월 11일 학년 당 5학급으로 학칙이 변경인가 후 10년 만인 1973년 2월 12일 학년 당 6학급으로 증설인가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1973년 3월 신입생 411명을 배정 받게 되고 학급당 68-69명씩 학급을 편성하기에 이르러 오늘의 남산중학교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주종합고등학교 동창회 조직
1973년 상주종합고등학교 동창회가 정식으로 조직이 되었다. 역대 회장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73년-1982년 회장 안영호(1회), 1983년-1986년 김남현(1회), 1987년-1992년 조동희(1회), 1993년-1999년 김인식(1회)
고등학교 배구부, 씨름부 도민체전 우승
1974년 5월 20일 대구에서 열린 제12회 도민체육대회에서 고등학교 배구부와 씨름부가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한 편 씨름부는 그 해 9월 3일 상주에서 열린 상주 북부시장 개설 전국씨름대회에서 고등부 우승 및 개인 준우승을 차지하여 씨름 공고의 명예를 높였다. 그러나 배구부는 학교의 형편에 의해 교기로서 계속 유지를 하지못하고 팀이 해체되는 불운을 격게 되었지만 다행이 씨름부는 1981년 교기 종목으로 육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교 신문 '상주종고' 발간(高)
1975년 1월 10일 학교 신문 「상주종고」가 발간되었다. 양상길 선생을 편집 책임자로 하여 발간된 이 신문은 '졸업생을 보내며' 라는 황의복 교장 선생의 발간사와 함께 졸업생, 재학생의 작품과 학교 소식을 주로 실었는데 신문을 발행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상주종고가 개교한 이래 처음으로 내는 창간호 학교신문이라 여러 가지로 편집이 불비하고 내용이 부족한 점이 많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신문이 아니라 2호까지 낸 교지 『松里』를 이어 3호를 발간하려고 계획을 했는데 재학생 여러분들의 원고가 아주 부족하여 도저히 교지를 낼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학교신문 「상주종고」는 27.5cm × 39cm 4면 타브로이드판 활판 인쇄본이었는데 이후 여러 가지 학교 사정으로 발간이 중단되었다.
중학교 사격부(射擊部)의 창단
1975월 3월 4일 1960년대 후반부터 고등학교에 군사교육이 전면 실시되면서 중학교에도 1975년 사격 기본 교본이 배부되었고 학교마다 칼빈형 공기 소총(대구 동기총포공업사 제품)이 배부되었다.
남산중학교의 사격부도 이때 태어났다. 첫 해에 모두 5정의 공기총이 배부되었으나 체육 교사가 지도를 하기에는 당시 주당 수업시간이 너무 많아 사격부 지도를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서무과 김 욱 서기(사진,해병대 제대)가 맡기로 하고 본격적인 지도를 시작했다. 약 1개월에 걸쳐 기본 훈련을 했고, 이 훈련을 마친 후 숙직실 뒤뜰로 장소를 옮겨 주로 조준 자세, 사격 자세, 사격, 점수 관리, 시간 관리 등을 정확하게 소화하는 반복 훈련을 거듭했다. 그 해 5월 상주군내 남, 여 중학교 사격 평가 대회가 열렸다. 남자부 8개교, 여자부 5개교가 모인 이 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의 영광을 얻게 되었고 이어 도 예선대회에 출전하는 영광을 얻었다. 이로 인해 선수들의 사기는 높았고 부지런히 연습하여 1975년 10월에 경상북도 시군평가대회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형 소총이었고 다른 팀들은 경기용 소총이었기 때문에 도 대회는 4위에 입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국산 경기용 소총 1정을 구입하고 이어 1976년에 다시 1정을 구입하여 다시 1976년 4월에 열린 상주군 대회에서 군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도 대회에서는 3위 입상밖에 하지를 못했다. 그 원인은 이번에는 타 시. 군의 대표들이 모두 서독제 공기총과 실탄을 구입하여 출전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77년 경북사격연맹에서 대한체육회를 통해 독일제 공기 소총을 구입하도록 공문의 시달이 있었다. 이로 인해 수입관세 면세로 대당 135,000원에 서독제 경기용 공기 소총을 구입할 수 있었으나 공기총의 물품 인수가 너무 늦어져 충분한 연습이 되지 못해 도 대회에 출전하여 5위에 머물게 되었고 1978년도를 위해 1977년 겨울 방학동안 중점적인 훈련을 했으나 1978년 3월 1일 자로 김 욱 지도 교사가 동일 법인인 상주공업고등학교로 전보되면서 사격부는 그 명맥만 유지되어 왔다. 그 후 사회의 변화와 국내 정세의 변화로 고등학교에 학도호국단이 폐지가 되고 사격부의 활동이 정지되면서 공기총은 무기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1993년에 이르러 각종 보안상의 문제가 제기되어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중학교 배구부 창단
1954년을 중심으로 김천, 상주, 문경, 예천 4개 지구가 연합하여 체육대회가 열렸다. 이른바 '경북선 연선 체육대회'였다. 본교는 이 대회에 이미 좋은 성적을 얻었다. 초창기에 학력으로는 타 학교와 견줄만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운동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요 종목은 육상, 농구, 배구, 축구였는데 육상, 농구, 축구 등의 우승 실적이 가장 많았다. 이리하여 배구 종목의 강화와 당시 상주 지역엔 교기로 배구를 선택한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1975년 4월 학기초에 교기를 배구로 정하고 지역 및 인근 학교에서 특기자를 선발하여 배구부를 창단하게 되었다.
처음엔 황영주 선생이 지도 교사로 활약하다가 전신전화국에 근무하던 한평화(경북 도 대표 선수 역임)씨를 코치로 선임하여 지도를 하게 하였고 한 코치가 직장 관계로 충분한 시간의 할애를 받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어 한평화씨의 소개로 손도운 코치를 다시 초빙하면서 학교 옆 성춘발 씨 댁 근처에 합숙소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당시의 배구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좋은 실력을 발휘하여 상주 지역에서는 최강을 자랑하여 1976년 상주군 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도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고, 이어 도 대회에 우승을 하여 부산에서 열린 제5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비록 4위의 성적을 얻었으나 경상북도 대표 선수단으로 출전을 하기도 했다. 전국체육대회 출전을 고비로 유명 선수들이 졸업을 하고 후속 선수들의 보충이 어렵게 되자 배구부는 상주종합고등학교로 이관되었고 고등학교 역시 과다한 선수 관리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해체되고 말았다.
중학교 테니스장 개장
1971년 제9회 도민체육대회에 테니스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에 상주 지역에도 동호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본교의 테니스장 설치도 이와 같은 상주 지역의 테니스 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1974년 5월 9일 강범구 선생이 본교에 수학 교사로 부임했는데 강 선생은 구기 종목에 우수한 기능을 가진 분으로 특히 테니스에 남다른 기량을 가졌다. 이에 본교에서도 김성식, 김재수, 김창인, 김종환, 홍영옥, 이희원, 조태희 선생이 강 선생으로부터 지도를 받아 테니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테니스장이 없었다. 할 수없이 상주고등학교나 당시 상주농잠고등학교 테니스장을 찾아다니며 눈치 운동을 하던 중 가장 적지로 선정된 곳이 바로 대성전 앞마당이었다. 향교(鄕校)측에서는 대성전 앞마당을 운동장으로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했지만 1975년 봄부터 남산의 산 흙을 깎아 대성전 앞마당을 고르는 작업을 2개월 남짓하여 테니스장을 마련하였다. 자비(自費) 출연으로 로울러를 제작하기도 하여 6월 7일에 가서 개장을 하게 된 것이다. 테니스장의 개장이래야 학교의 공식적인 행사는 하지도 못하고 교직원들과 동호인들이 함께 모여 자축 파티를 연 것이 고작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때 그 테니스장은 어느 고급 운동장보다 더 좋았다. 테니스장의 북쪽은 대성전으로 막혀 바람을 잘 막아주었고 동편과 서편 역시 동무와 서무의 건물로 천연적인 바람막이가 되었다. 그러나 남쪽이 문제였다. 학생들의 출입으로 공을 막아내는 망을 설치할 수가 없어 그냥 비워둔 채였기에 한 번 공이 나가면 30m가 넘는 아래층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통에 한참이나 공을 찾으려 다니는 고충이 있었다.
그후1980년에 운동장 정지 작업을 하면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서무 서쪽 화장실이 있던 자리를 정리하여 테
니스장을 옮기고 주변으로 망을 설치한 후 제1회 교직원 친목 테니스 대회를 제2의 테니스장에서 개최했다. 그러나 학교 이전 후 향교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테니스장은 없어지고 그 자리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직장 민방위대 발대식
1975년 7월 25일 법률 제2776호로 제정된 민방위 기본법을 근거로 우리 나라는 민방위 체제를 갖추었다.
민방위(民防衛)란 적의 침공이나 전국 또는 일부 지방의 안녕 질서를 위태롭게 할 재난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부의 지도하에 주민이 수행해야 할 방공(防空), 응급적인 방재(防災), 구조, 복구 및 군사 작전상 필요한 노력 지원 등 일체의 자위적(自衛的) 활동을 말한다고 법 제2조는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민방위 기본법 정신에 따라 지역 민방위대가 편성이 되고, 1975년 9월 30일 본교에서도 '내 직장은 내가 지킨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태평루 앞 운동장에 모여 직장 민방위대 발대식을 가졌다.
직장 민방위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대 장 : 황의복 교장
부대장 : 엄상묵 교감
본부 분대장 : 황영주 선생 및 대원 : 이해영, 홍영옥, 박창수 선생
기동 분대장 : 성백춘 선생 및 대원 : 성백일, 석종섭, 김수동 선생
화생방 분대장 : 박인석 선생 및 대원 : 김창인, 김재수, 강범구 선생
소수방 분대장 : 김성식 선생 및 대원 : 송상훈, 이희원, 박만용 선생
방호 복구 분대장 : 성백진 선생 및 대원 : 조태희, 이호근, 황흡 선생
의료 구호 분대장 : 강지수 서무과장 및 김동원, 윤용화, 박효신 선생
중학교 웅변부(雄辯部)의 활동(1973-1980)
1973년부터 1978년까지 중학교 웅변부는 대단한 활동을 했다. 그 때만 해도 반공 어린이 이승복 군을 추모하는 제1회 웅변대회가 1973년부터 열렸었고, 세무서가 주관하는 조세의 날 웅변대회, 반공연맹에서 주관하는 대통령상패타기 전국남여웅변대회, 충효사상선양 웅변대회, 불조심, 산림 애호 등 웅변 대회의 전성시기였다. 이 시기에 권오궐, 지해구, 조성민, 노대형, 김인규 군의 활동은 대단하였다. 특히 권오궐, 노대형군은 중학생으로는 키가 아주 작아 연단에 올라 설 때는 자신이 올라 설 받침대를 놓고 올라서야 연사의 가슴이 연단위로 보일 정도였다. 웅변을 하려고 등단하는 연사가 웅변 원고 대신 받침대를 옆구리에 끼고 등단하는 모습에 청중들은 먼저 의아해 했고 받침대를 놓고서 그 위에 올라서는 연사를 보고는 격려의 박수를 다시 보내기도 했다. 특히 두 학생의 작은 몸집에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할 때면 청중들은 그들의 웅변에 매료되어 정신을 잃고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들은 상주와 경북권에서 이름을 떨쳤고, 뿐만 아니라 1979년 김인규 군은 제5회 전국남여웅변대회에 출전하여 우수상을 획득하여 남산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기도 했다..
1970년대를 빛낸 중학교 학생들
1982년 이전의 대외 수상자의 현황을 살펴볼 자료가 없어 이 시대의 학생 활동 또한 정확한 자료를 갖지 못함은 50년대, 60년대와 마찬가지다. 각 동기회 별로 좋은 자료를 얻도록 노력했지만 오래 전의 일이라 충분한 협력을 얻지 못해 안타까웠다. 졸업 앨범을 넘기면서 재직 교사들이 함께 자료를 찾아 그나마 기억에 남는 학생들의 이름을 찾을 수 있어 기록에 남긴다.
22회(1973) 김진팔 김영조, 백학성(육상)
25회(1976) 깅성종 김상운, 김현수, 최영현(배구) 송창식, 고영환(육상) 김현,
손종호(문예) 김완식, 권오궐(웅변)
26회(1977) 권오일(탁구) 임창용(복싱) 이성호(배구) 고기환(축구) 전성찬,
오진석(문예) 정재수(사격) 지해구(웅변)
27회(1978) 이상원 황정환(축구), 이상기(배구) 박선학(육상) 김상렬(미술)
윤두환(컴퓨터) 김정구, 이정욱(주산) 신동현, 정상일(문예)
조성민(웅변)
28회(1979) 정동수 김용원 진영종(축구) 강민구 정원상(미술) 박재호(문예)
김대한 오원근 이정호 한상국(육상) 오진석 이태희(주산)
노대형, 김인규, 이종식(웅변)
29회(1980) 정영욱, 함경식(육상) 백해진, 김형섭(미술) 김정배(사격)
김상균, 양시우, 조석래(문예)
30회(1981) 심홍섭, 안기성, 이희영, 정태식, 김명수, 박창성, 김응용(육상)
김주휘, 손인철(미술) 김대한(문예)
31회(1982) 전풍엽, 김진기, 정석만, 서근식, 김동희, 김성근, 노평문, 곽두일,
김형구, 김해수, 강현석, 문준하, 강현구(체육부)
김경진(미술) 전창남(문예) 이홍주(웅변)
황의복 교장 매일신문과 인터뷰
1976년 1월 25일 일요일 대구에서 발행되는 매일신문(每日新聞) 일요 연재 코너 '인간 헌신(人間獻身) 씨리즈 ④번째로 매일신문 임덕치 기자와 황의복 교장 선생과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다.
교육계에 투신하게 된 동기와 인간 교육에 집착한 이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본교의 교훈인 자주 자립, 협동 단결, 성실 노력을 강하게 강조했다. '국가 형성 과정 중 두 번째인 국민 형성은 매우 중요한 과제인데 이것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은 교육밖에 없고 새 국민을 형성하는 방법으로 자주 자립, 협동 단결, 성실 노력해야 이룰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교육 현실을 극복하자면 사회의 학교화, 학교의 사회화를 강조하고 학교, 사회, 가정의 깊은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참된 교육자의 길은 부귀공명(富貴功名)이 타인사(他人事)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지육(智育)과 덕육(德育)의 조화를 힘 주어 강조했다.
김충언군 전국 중. 고등부 미술대회 은상
- 전국 문화원연합회주관 새마을 미술 공모전 입선도 -
1976년 5월 20일 경희대학교 교정에서 열린 전국 중. 고등학교 학생미술대회에서 고등학교 김충언군이 참가하여 은상을 수상하는 개가를 올렸다. 김 군은 그 해 11월 9일 경북 교유위원회 주관 제4회 화랑문화제 미술실기대회에서도 준특선의 영광을 안았으며, 1977년 7월 2일 전국 문화원연합회가 주관한 새마을 미술 공모전에서도 입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고등학교 전기 실습실 준공
1976년 6월 23일 본관 뒤쪽 언덕을 깎아 땅을 고르고 고등학교 전기과 전기 실습실이 준공되었다. 50평 규모 스레이트 시멘트 벽돌로 지어진 이 특별교실은 전기과 학생들이 옥내 배선을 위한 제반 실습을 할 수 있도록 전기 실습 자재가 준비되어 학생들의 실습 의욕을 크게 개선하였다.
고등학교 악대부 창단
1976년 10월 6일 학교 음악과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해 창단된 고등학교 악대부는 실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직원 및 모든 학생들의 염원으로 이루어졌다. 해 마다 열리는 군민체육대회를 비롯한 많은 행사 때 악대부가 없는 서러움은 참으로 대단했다. 1975년 군민체육대회가 공설운동장에서 열리고 있을 때 중학교의 응원단들이 오전에 모두 응원을 포기한 채 학교로 돌아오는 일이 생겼다. 이유는 아무리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해도 이웃해 있는 상주고등학교와 상주중학교의 악대부 응원 때문에 효과도 나지 않고 사기도 떨어져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꼭 이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악대부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양 교에서는 고등학교에 악대부 설치를 공식적으로 논의하고 이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 교직원들도 협력하기로 하고 악기 구입을 위한 성금을 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창단된 악대부는 비록 좋은 악기는 아니었으나 부지런히 연습을 했고 이어 권희태 이사장이 남산학원을 인수하면서 대구 경희여자상업고등학교 관악부와 협력을 하여 1977년에는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프레이드를 벌여 우수상을 차지하여 많은 이들의 칭찬을 받았다. 이 외에도 고등학교 관악대는 학교 행사는 물론지역사회 민, 관의 많은 행사에 함께 하여 자리를 빛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1996년 상주에서 개최된 제34회 경북 도민체전에서는 선도 악대로서 맨 처음 입장하여 체전의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격년으로 개최되는 상주시민체전의 선도 악대, 매년 현충일, 광복절, 상주문화제 등 각종 캠페인에도 지역사회를 위해 협력하여 칭송을 듣고 있다.
권희태 현 이사장 남산학원 인수
1976년 11월 1일 권희태 현 이사장이 남산학원을 인수하게 되었다.
1970년 3월 1일 학교법인 남산학원은 상주실업고등학교를 개교하여 중. 고 병설학교로 운영하고 상주시 낙양동 388번지에 교사(校舍)를 신축, 이전하여 외형적으로는 학교가 변모하였다.
그러나 상주실업고등학교는 신설학교로서 학생모집에 애로가 많았으며 학교 재정도 원활하지 못했고 무리한 시설투자로 학교 경영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더욱이 김 인 이사장께서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쓰러져 사실상 학교 경영을 할 수 없는 실정에 이르자 당시 황의복 교장과 김동영 상무, 류시완 이사는 학교의 장래를 걱정하여 학교를 맡아 운영할 유력한 인사를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역사회 내의 유력한 인사들은 경영상태가 극히 악화된 학교법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으며 더욱이 교육에 대한 애정과 후진 양성을 위한 학교 경영에 뜻을 두고 있는 분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 당시 경희여자상업고등학교(현 경상여자고등학교) 설립자인 권희태 이사장은 상주와 인접한 예천군 감천면 출신으로 남산학원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학교 경영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셨고, 권 이사장의 교육에 대한 깊은 정열과 관심에 감명을 받고 있던 황의복 교장, 김동영 상무이사, 류시완 이사가 권희태 선생이 학교를 맡아 준다면 학교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역사회의 명문교로 발돋움 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1976년 10월 대구역 앞 대구관광호텔에서 권희태 이사장을 만나 학교 경영을 간곡하게 부탁하게 되었다. 권희태 이사장은 그 자리에서 흔쾌히 이를 수락하고 경영권 인수에 관한 모든 절차를 마치게 되었으며, 이로서 학교법인 남산학원은 권희태 이사장의 취임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고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권희태 이사장은 6.25 사변이 끝난 직후 어려움에 처한 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교육을 통해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닌 인간, 자립과 어울림을 더불어 하는 인간, 전통과 새로움을 인습과 방종으로부터 구분할 수 있는 인간, 냉철한 판단과 뜨거운 감성을 함께 갖춘 인간, 그럼으로써 자유로운 사고. 표현. 행동이 곧 진리. 아름다움. 정의로 이어질 수 있는 참된 인간을 도야. 배출하여 시민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게 하는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는 권희태 이사장의 교육 철학을 펴고자 당시 어려움에 처한 남산학원을 인수하여 경영을 정상화함으로써, 향리 예천과 인접한 이 지역 두 학교를 향토 명문 사학으로 발전시켜 지역 주민들의 기대에 부응함은 물론, 지역사회 발전과 나아가 국가와 인류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는 유능한 인재를 육성 배출하기 시작했다.
권희태 이사장은 1957년 오늘의 경상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셨고, 1985년에 경상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현재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사단법인 한국 사립중. 고등학교 법인협의회 부회장 및 대구광역시회장, 동 협의회 경상북도회장 역임, 전국 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부회장, 한중천주교 친선협의회 회장, 천주교 대구 대교구 해외선교후원회 회장, 사립학교 연금관리공단 이사, 청구 로타리클럽 3700지구 사무총장, 예천 향우회 회장 역임, 계명대학교 대학원 총동창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제4대 권세환(權世煥) 이사장 취임
1976년 11월 1일 제3대 김 인 이사장의 뒤를 이어 제4대 권세환 선생이 법인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권세환 이사장은 1918년 7월 24일 경북 예천군 용문면 하학동 401번지에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5년, 영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40년 4월 1일부터 대구남산국민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직에 투신하여 예천중학교 교사, 대구신명여자고등학교 교사, 대구남산여자고등학교 교무주임으로 교직을 그만두신 후 세신공업사 대표로 재임 중 제4대 학교법인 남산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황의복 교장 선생 퇴임
1977년 2월 23일 상주종합고등학교 운동장에는 남산학원에서 28년간 봉직하시며 남산학원의 설립과 남산중학교, 상주종합고등학교 개교에 기초를 놓으셨던 황의복 교장선생의 퇴임식이 열리고 있었다. 권희태 학교법인 남산학원 이사장, 김해인 상주군 교육장, 조영래 동창회장 등 교육계 인사와 지역사회 내빈들과 동창회원, 남산학원 산하 교직원 그리고 상주종합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보내는 이와 떠나는 이에 대한 석별의 예식이 진행되었다. 기념사와 축사, 재학생 대표의 송별사에 이어 황의복 교장 선생은 남산학원 28년을 회고하며 평소 교실에서, 교단에서, 운동장에서 강조한 교육의 신념들을 충실히 다 펴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교육에 최선을 다했음을 보람으로 여긴다는 퇴임사를 통해 길고도 험난했던 교육자의 길을 마무리 하셨다. 이 날 각계 각층으로부터 기념품 전달이 있어 원로 교육자의 퇴임의 길을 축하했고 교가 제창에 이어 상주종합고등학교 총학생회의 마지막 사열을 받음으로 퇴임식을 마쳤다. 황의복 선생은 1911년 9월 24일(음력) 경상북도 상주군 화동면 판곡리에서 조선 초 세종시 유명한 영의정 방촌 황희의 18대 후손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큰집인 화동면 선교리에서 화령보통학교를 1회로 졸업, 서울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3월 8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1949년 9월 1일 상주고등공민학교를 시작, 38세의 젊은 나이로 교육계에 투신하여 첫 남산학원과 인연을 맺었고 그 후 조국의 발전은 오로지 인재 양성에 있다는 굳은 신념 하나로 28년간 교직에 봉직하셨다. 1950년에 상주고등공민학교 교감으로 재임하시면서 남산학원의 설립과 남산중학교 개교에 기초를 놓으셨고, 1951년 남산중학교 교감과 1954년부터 교장으로 다시 1970년 상주실업고등학교 초대 교장을 겸임하시면서 66세로 퇴임하기까지 남산중학교와 상주종합고등학교의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황의복 교장 선생의 평소 능력 있는 사람, 도덕률에 충실한 사람, 인간미가 있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믿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인간미를 강조했다. 비록 선생은 퇴임을 하셨지만 상주고등공민학교 졸업생과 남산중학교 1회부터 26회 졸업생 6,241명, 상주종합고등학교 제1회부터 제5회까지의 867명의 졸업생 등 모두 7,000여명 제자들의 가슴에 황의복 교장 선생이 심어준 교훈들은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중학교 제4대 노황석(盧滉錫)교장 취임
1977년 2월 23일 황의복 교장 선생이 퇴임함에 따라 1977년 3월 1일 상주종합고등학교 교감인 노황석 선생 이 제4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노황석 교장 선생은 상주농잠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1962년 3월 26일 남산중학교 과학 교사로 부임하여 1972년 3월 1일 상주실업고등학교 교감 직무 대리, 1975년 3월 1일 교감으로 승진 후 1977년 2월 28일 다시 남산중학교 교감으로 전보되었다가 3월 1일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고등학교 제2대 박동창(朴東昌) 교장 취임
1977년 3월 2일 상주종합고등학교 제2대 교장으로 박동창 선생이 취임했다. 박동창 교장 선생은 대구 출생으로 1953년 3월 21일 대구사범학교 본과와 1963년 2월 23일 영남대학교 경상대학 상학과 졸업하고 1953년 3월 31일 청화국민학교를 시작으로 교직에 봉직하였다. 이어 대구신암국민학교, 옥산국민학교를 거쳐 1964년 4월 1일 경북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1968년 3월 1일에는 경희여자상업고등학교 교감으로재직하다가 1977년 3월 2일 상주공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박동창 교장 선생은 1983년 3월 20일엔 남산중학교 교장을 겸무 하기도 했으며, 이어 1985년 1월 10일부터는 제5대 남산중학교장으로 다시 1990년 9월 1일에 제4대 상주공업고등학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중학교 교훈 3차 변경 - 바르고 참되게 -
노황석 교장 선생이 취임하면서 1977년 3월 2일 중학교의 교훈이 변경되었다.
'자주 자립, 협동 단결, 성실 노력'이 8년만에 새롭게 바뀐 것이다.
'바르다'는 '옳다. 굽지 않고 곧다. 정당하다. 틀리거나 삐뚤어지거나 굽지 아니하고 도리나 사실에 맞다' 라는 뜻이요
'참되게' 라는 말은 겉과 속이 맞아 거짓이 없음. 옳고 바른 일. 진리. 거짓이 없고 실상스러움을 뜻하니 '바르고 참되게' 라는 교훈의 속뜻을 짐작할 수 있다.
본관 3층 및 남관 2층 교실 증축
1977년 4월 26일 고등학교의 본관 건물 2층을 다시 3층으로 증축하고 남관 2층의 교실 공사가 완공이 되었다. 이 공사의 준공으로 본관 3층은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이 되었고 이어 1973년 12월에 1층 4실의 교실만 지었던 남관(이 후엔 신관이라고 불렀음)에 2층 교실이 증축됨으로 계속 발전하는 학교의 모습을 이룰 수 있었다.
상주공업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및 학칙 변경인가
-토목과 3학급, 전기과 3학급-
상주종합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 된지 5년 만인 1977년 9월 5일 교명이 다시 상주공업고등학교로 변경인가를 받았다. 이는 1970년대부터 이 땅에 전개된 새마을 운동으로 인하여 근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근대화는 곧 공업화로 내달아 시대적인 요청이 공업고등학교로의 전환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상주종합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된 후 다섯 번에 걸쳐 학과의 신설과 개편에 대한 학칙 변경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종래의 토목과 2학급이 3학급으로 증설되었고, 상업과 1학급, 보통과 1학급을 줄이는 대신 기존의 전기과를 3학급으로 증설함으로 공업고등학교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등학교 교표, 뺏지의 변경 및 교기의 제작
교명이 상주공업고등학교로 변경 인가됨에 따라 학교의 교표와 뺏지도 다시 제작하였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교표와 뺏지를 공모한 결과 지도과장인 박성해 선생의 도안이 확정되었다. 먼저 교표는 고등학교를 상징하는 한자 '高'자를 중심으로 그 아래 상주를 나타내기 위한 '상'자를 'ㅅ'과 'ㅏ'를 풀어쓰기로 배치하고 '상'자의 'o'안에 '공업'을 나타내는 '工'자를 배치한 도안이었다. 특히 'ㅅ'과 'ㅏ'의 풀어쓰기의 형상이 하늘을 나르는 새와 같아 미래를 향한 비상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한편 뺏지는 한자의 '工'자를 기본 틀로 하여 직사각형을 이루고 삼각형의 피라밋 뿔을 사각형 위로 솟아오르게 함으로 약진하는 학교의 기상을 나타내었다고 도안자는 설명을 하였다.
고등학교 교훈 2차 변경 - 자주, 협동, 창의 -
1978년 3월 3일 고등학교에 박동창 교장 선생이 취임하면서 교훈이 변경되었다.
자주 자립, 협동 단결, 성실 노력이라는 기존의 교훈이 덕목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새마을 운동의 이념이 너무 드러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또한 상주종합고등학교 시절에 제정된 교훈이 공업고등학교로 전환된 학교의 덕목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많았다. 이리하여 기존의 '자주 자립'에서 '자립'을, '협동 단결'에서 '협동'을, '성실 노력'은 공업고등학교에 맞도록 '창의'로 결정하였다.
박성해(朴成海)선생 고등학교 교감 취임
1978년 3월 1일 고등학교에 박성해 교감이 취임했다. 박성해 교감은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를 졸업, 1965년 8월 1일부터 남산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부임한 이래 1974년 2월 28일까지 남산중학교 교사로, 1978년 2월 28일까지 상주공업고등학교의 교사 및 주임교사로 근무하다가 이 날 교감 직무대리로 승진 발령을 받아 취임하였다.
중학교 M.B.C '라디오 우등생' 공개 방송
1978년 7월 15일 대구 M.B.C 라디오는 주식회사 삼성의 협찬으로 경북 지역을 순회하면서 '라디오 우등생'이라는 공개 방송을 실시하였다. 목조 교실 임시 강당에서 열린 이 날 공개 방송은 당시 방송 매체의 전파를 타는 일은 시골 학교로서는 매우 드문 일로써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가 미리 질문에 대한 예상 대답, 필요한 부분에서의 박수, 환호 등을 말해 사전 연습을 하고 곧 녹음에 들어갔다. 사전 연습은 했지만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어 다시 연습을 하기도 하고 몇 차례 중지가 되었다가 다시 녹음을 하기도 했다.
순서는 사회자의 인사, 노황석 교장선생의 학교 소개, 학생들이 꾸민 유모어 한마당에 이어서 재치 문답, 그리고 청룡팀과 백마팀으로 나뉘어 학습 문제를 푸는 이날 방송에서 숙달되지 못한 학생들이 때로는 웃지 못할 대답을 하여 모두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고 웃음바다로 내몰기도 했다. 이 날 라디오 우등생은 백마팀에게 돌아갔고 출연자 모두 기념품을 받기도 했다. 한편 이 날 녹음된 방송은 한 주일 후 방송되어 모두들 라디오에 귀를 열어놓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제5대 정휘동(鄭輝東) 이사장 취임
제4대 권세환 이사장이 사임함에 따라 1978년 9월 1일 제5대 법인 이사장에 정휘동 선생이 취임하게 되었다. 정휘동 이사장은 1925년 5월 30일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오랜 생활을 하다가 고향의 발전을 위하여 1968년 상주 새마을 교육원을 설립하여 지방인들의 생활 개선과 환경 개선 그리고 농업 방법의 개선 및 소득 증대를 위해 일본산 볍씨 100여 품종을 적응 시험 및 보급 품종을 개발하고 일본 후지 사과 세계1품종을 최초에 농가에 보급한바 있으며 국내 영농후계자 2만 여명을 연수 교육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1978년 12월에는 김천, 금릉, 상주 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 민정당 농림수산 분과위원장, 상주농대건립추진위원장, 상주문화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 사회 발전에 앞장섰으며 국제적으로도 한일의원연맹 간사 및 한일협력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국제적인 활동을 한 바 있으며 현 한일합자주식회사 Pacific Hotel 대표 이사 이다.
고등학교 학칙변경인가
-전기공사과 3학급, 토목측량과 2학급, 토목제도과 1학급, 건축제도과 2학급-
1978년 10월 26일 고등학교가 교명을 변경한 후 첫 번째 학칙 변경인가를 얻었다. 이는 본격적인 공업고등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시도로 종래의 전기과 3학급을 전기 공사과로, 토목과 3학급을 토목 측량과 2학급과 토목 제도과 1학급으로, 그리고 건축 제도과 2학급을 신설하는 등 과의 신설과 과명을 새롭게 변경하였다. 이로써 학년당 8학급의 규모로 성장하는 발판을 놓게 되었다
중학교 주산부 활약(1975-1980)
1970년대 후반 남산중학교의 주산부는 역사에 또 하나의 금자탑을 쌓았다. 1975년 3월부터 박인석 선생의 지도로 시작한 주산부는 그 해 상주군내 주산대회는 물론 경북에서도 그 이름을 떨쳤다. 특히 이정욱, 윤두환, 김정구 군의 주산팀은 1976년 충주여자상업고등학교가 주최한 제1회 전국 주산경기대회를 시작으로 1977년 10월 8일 경산군 하양중학교가 주최하고 경산군 교육청과 한국주산교육회가 후원한 도내 초. 중학교대항 주산경기대회에서 당당히 종합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 1977년 11월 5일 김천성의여자고등학교가 주최하고 김천교육청이 후원한 주산경기대회에서도 우승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주산부의 활동은 이태희 군이 다시 합세를 하여 이어지다가 마침내 1980년 5월 3일 충주여자상업고등학교가 주최한 제5회 전국주산실기대회에서 중등부 1위로 우승을 하는 등 전국적인 명성을 과시했다.
고등학교 신관 증축(교실 11실)
1978년 10월 26일 학칙 변경으로 고등학교의 학급이 7학급(전기공사과 3학급, 토목측량과 2학급, 토목제도과 1학급, 건축제도과 2학급)으로 증설됨에 따라 부족한 교실을 해소해야 했다. 이리하여 1979년 1월 20일 신관 3층이 증축되고 신관 좌측에 이어 현관부를 달아 좌측으로 교실 11실을 증축하기에 이르렀다. 이 교실은 현관부 좌측으로부터는 반 지하로 설계하여 신관이 완성되어 현관부 우측이 3층으로 현관부 좌측은 4층 건물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김성식(金成植)선생 중학교 교감 취임
1979년 4월 17일 중학교 김성식 선생이 중학교 교감 직무대리 발령을 받아 중학교 교감으로 취임했다. 김성식 교감 선생은 상주 출신으로 상주농잠고등학교와 1960년 성균관대학교 법정대학 경제학과를 졸업, 1965년 4월 1일부터 남산중학교 영어 교사로 첫출발을 하였다. 이어 1979년 4월 17일 남산중학교 교감 직무대리를 역임 1980년 4월 17일까지 남산중학교 교감으로 근무하다가 1987년 3월 1일 상주공업고등학교 교감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고 다시 1992년 3월 1일 남산중학교 교감으로 전보되었다.
제1회 법인산하 교직원 합동 연수회
1979년 8월 18일 교직원들의 교사로서의 긍지와 사명감을 고양하며 교직자로서 전문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직원 친목을 도모하는 목적으로 교직원 합동 연수회가 경희여자상업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열렸다. 여름 교직원 합동연수는 본 학교법인 경희교육재단과 남산학원에서 주관한 것으로 경희여자상업고등학교, 남산중학교, 상주공업고등학교의 전 교직원이 참석했으며 1985년부터는 경상고등학교의 개교로 경상고등학교 교직원까지 4개 학교 교직원 200여명이 참가하는 큰 행사로 발전하였다. 주로 저명한 외래강사를 초빙하여 실시하였으며 교육내용은 교직자의 전문성을 신장할 수 있는 내용 및 교직자로서의 투철한 사명감을 고취할 수 있는 내용과 교육철학적 내용이었다. 이 연수회는 6회까지 합동으로 개최하였다가 1994년도엔 법인별로 실시되기도 했다.
1970년대 상주공업고등학교의 교육 활동 실적들
유능한 기능 인력의 산실로 더욱 자리를 굳혀 가고 있는 고등학교는 교육활동 전반에 걸쳐 좋은 실적을 거두고 있다.
* 체육부문
체육부문의 실적은 1974년 배구부와 씨름부가 제12회 도민체육대회에서 우승하고, 육상부가 제22회 상주군민체육대회에서 종합 우승하였다
* 실업부문
1976. 7. 6 경상북도 교육위원회 주관 실고생 실기경진대회 측량 3위
- 이병준, 김무식, 김남희
* 미술부문
1976. 5. 20 경희대학교 주관 전국 중고등 미술대회 은상 김충언
11. 9 경상북도 교육위원회 주관 제4회 화랑문화제 미술실기대회
준특선 - 김충언
1977. 7. 2 전국 문화원 연합회 주관 새마을 미술 공모전 입선 김충언
* 기타 수상내역
1976. 3. 20 경상북도 교육위원회로부터 교련 지도 검열 우수 학교 표창
1978. 7. 20 한해 극복 공로 문교부장관 표창 최점달
1979. 3. 1 새마을 연수 중앙교육연수원장 표창 교사 박순학
첫댓글 이런걸 어케 다 아세요?? ㅎ
너무 복잡하네요... 정리 필요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