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 가도를 달리는 유럽여행
일정 : 2008. 10. 3(금) ~ 14(화). 11박 12일.
여행 나라 :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
10/ 3일 출발 : 집에서 9:00에 나서서 범계역에서 9 : 30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국제공항에 10 : 30 도착하였다. 세중투어몰에서 나온 여직원인 가이드 김민경의 안내로 인원확인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람이가 사진 2장을 찍어 주고 배가 고프다며 집으로 가고 우리는 출국 수속을 밟고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시간이 돼서 된장덮밥 한 그릇으로 둘이서 요기를 했다. 짜고 맛은 별로였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1시 15분의 이륙예정 시간을 넘기고 1시 30분에 이륙을 하였다. 3시쯤에 소고기를 구운 기내식이 나왔다. 그리고 생선튀김의 저녁 식사도 맛있게 먹었다. 새벽 2시쯤에는 간식으로 삼각 김밥이 또 나왔다. 대한항공 승무원들의 친절은 세계적인 것은 다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친절하고 기내식도 입에 딱 맞는 세련된 음식이다. 비행 예정시간은 약 11시간 35분이었는데 출발 시간도 늦었지만 도착시간도 조금 늦어서 12간만인 다음날 오후 18시 30분에 독일의 프랑크프르트 안 마인공항에 도착하였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뻐근하고 온몸이 찌뿌듯한 참으로 힘든 여정이었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무렵에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사방은 어둠에 싸였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관광버스를 타고 출발을 하였다.
♦프랑크프르트. 인구는 65만명 정도로 마인강이 흐르는 자그마한 도시다. 7시 57분경에 뢰머광장으로 나갔다. 로마인들이 머물던 곳으로 지금은 1층은 선술집으로 바뀌어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술 먹는 사람들만 조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우성당으로 갔다. 자유와 정의를 상징하는 칼과 저울을 든 동상이 인상적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를 않았다. 주말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가족과 함께 보낸다고 한다. 조용하고 한적한 거리, 전차가 다니는 중세도시를 연상하게 하는 분위기였다. 실용주의 사상으로 길이 좁고 소형차를 좋아하며 호텔은 잠만 자면 된다는 생각으로 편의시설은 부족하고 좁으며 인도에도 차를 주차하는 것이 우리와 흡사하였다. 5일간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캐러반(캠핑카)을 끌고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세금은 40 ~ 50% 이상을 내며 노후 보장제도가 잘 되어 걱정 없이 사는 나라 독일. 저녁 5 ~ 6시가 되면 대부분 가게가 문을 닫고 거리는 한산하며 혹간 술집만 늦게까지 영업을 한다고 한다.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기에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의 중간에는 나무를 넣는 것이 특색이며 그것은 여름의 습기와 겨울의 한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어서 중심(大)성당을 보았다.
★중심성당. 서기 1400년쯤에 지었다니 약 600년이 된 셈이다. ‘그라쩨’ 이태리어로 감사하다는 뜻이다. 그라쩨 마우리찌요! 우리를 태우고 다닐 기사와 첫 인사를 하였다. ♣8시 30분경 한식으로 저녁 식사를 한 후(맛은 별로였다) ibis hotel 222호실에 숙박을 하였다. 시설이 별로라는 사전 이야기를 많이 들은 것과는 달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10/4. 첫 밤이라 그런지 아내가 새벽 2시에 잠을 깨는 바람에 같이 일어나서 뒤척거리다가 준비를 다하고 6시의 모닝콜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소식도 없고 시간만 이리저리 맞추다가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내려가 보기나 하자고 하며 갔더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밥까지 다 먹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급히 서둘러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급하게 준비를 하고 나왔지만 첫날부터 제일 늦어서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8시에 출발하였다. 본조르노(아침인사). 차오!(안녕). 고속도를 타고 하이델베르그로 향했다. 1시간 30분소요. 도로주변은 벌써 단풍이 예쁘게 물들고 있었다. 소나무와 아카시아 등의 나무가 많은 것이 우리나라의 산과 비슷하였다. 9시 40분에 ‘신성한 산’이라는 뜻을 가진 하이델베르그에 도착하였다. 프랑크프르트의 밋밋함과는 달리 고도(古都)의 성(城) 도시답게 고풍스런 멋을 느낄 수가 있었다. 비가 조금씩 내렸다. 도시 한 가운데로 네카강이 흐르는데 강주변의 아름다운 별장(40억)과 서서히 물들어 가는 단풍의 조화가 서구의 멋을 더하였고 서정적이고 단정한 멋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성령교회(성당). 12c에 지은 건물로 인간의 멸망을 예언한 그림이 있고 미사와 예배를 같이 들이는 조금은 특별한 곳이었다. 마르코트광장과 하이델베르그 대학이 있고 시청사와 골목에 학생 감옥도 있다. 카롤태오도르(황제 이름) 다리에서 사진도 찍고 작은 시장이 서는 거리를 지나 바로 옆의 MJ 백화점에서 쇼핑도 하고 과도(8,5유로)와 열쇠고리(12,9유로)를 사고 나와서 작은 슈퍼에 가서는 선물용 칼 몇 개와 1회용 면도기 5개(14유로)를 구입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동면도기로 면도를 하려고 하니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밧데리가 다 방전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1회용 면도기를 꼭 사야 하는데 파는 곳이 어딘지 알 수도 없고 답답하던 차에 쇼핑상가에서 물어 보니 슈퍼에 가보라고 하며 가르쳐 주었다. 슈퍼에 가면 팔 거라는 말을 듣고 근처의 슈퍼를 찾아가서 손짓 발짓 다하여 겨우 사는데 성공을 하였다. 광장 시장에서 포도 3.99유로치를 사는데 화장실 티켓 두 장에 1유로를 제하고 2. 99유로를 주었다. 유럽은 가는 곳마다 광장이 설치되어있는데 이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12시 30분 우리의 돈까스와 비슷한 슈비체리라는 현지식으로 식사를 하고 12시 45분 오스트리아 인스브르그로 출발을 하였다. 약 5시간소요. 고속도로 주변에는 많은 숲이 우거져 있고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우리나라 신축아파트 정원이나 고층건물 정원에 많이 심는 키가 큰 소나무와 아카시아도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로맨틱 가도를 통해서 정해진 속도 80km로 계속 달렸다. 기온은 12도 정도에 단풍은 곱게 물들고 옥수수는 추수를 마친 빈 들판만 남았거나 서있는 것은 마른채로 있는데 바로 옆에는 파란 어린 채소나 초지가 조성되어 있고 또 다른 한 쪽에는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있는 우리가 화면을 통해서 많이 보던 이색적인 풍경이 그대로 시야에 펼쳐져 있었다. 날씨는 비가 오거나 흐리면 춥고 볕이 나면 따뜻하고 더운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고속도로 상에도 휴게소가 별로 없고 있다고 해도 작은 가게에 간단한 물건을 조금 펼쳐놓은 것이 전부였다. 화장실은 역시 한 칸이나 두 칸에 좁고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며 언제나 돈은 어김없이 받고 있었다. 싼타페, 모닝, 마티즈 등의 국산 자동차가 간간이 보였다. 이것이 작은 애국심인가? 상당히 반가웠다. 3시 52분에 휴게소에서 25분간 쉬었다. 화장실 사용료는 50센트, 티켓을 받아서 나중에 그 값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더 사용할 기회가 없어서 그냥 버리고 말았다. 독일의 남쪽 바이에른 주를 지나 낭만의 지역으로 별장이 많은 낭만가도를 따라 가는 도중에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오류동 단체 진익상씨를 비롯한 14명, 그 외에 제주도 홍상철 父子, 춘천의 현정호 夫婦, 제일 연장자인 분당의 김의신 夫婦, 홍제동의 이찬수 夫婦, 용인의 서흥복 夫婦, 전주의 허성철 가족 4명, 대전의 여자 친구 2명, 서울의 4촌 아가씨 자매, 그리고 우리 夫婦, 모두 전국에서 모인 36명의 일행이었다. 서울의 젊은 한 여자는 28살인데 결혼을 하여 4개월 된 아기가 있단다. 그리고 같이 온 사람은 이름이 최우현, 청바지를 느슨하게 입고 키도 큰데다가 머리를 짧게 깎아서 모두가 남자 친구로 알고 있었는데 4촌 여동생이니 오해하지 말라고 하여 한 바탕 웃고 놀리기도 했다. 소개를 끝내고 나서 대전에서 온 아가씨들이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셨죠? 라고 벌써 눈치를 채고 말을 걸며 친절하고 상냥하게 노는 모습이 귀엽고 좋았다. 그 중에 박현정이는 역시 결혼을 하여 두 아이의 엄마라고 했다. 우리들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다들 어린 아이와 신랑을 두고 혼자 여행을 할 만큼 용감한 사람들 같다. 바이에른 주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 森林이라는 의미의 ‘검은 숲’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목재는 자급자족하지만 후손들을 위해서 지금은 수입을 하여 쓴다고 하였다. 산꼭대기까지 밭을 일구어 포도나무를 일직선으로 가꾸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도로 주변은 작은 공터도 모두 초지를 조성하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서 조화롭게 잘 가꿔 놓은 나라. 독일! 자연을 잘 관리하는 것이 선진국의 잣대가 된다고 믿고 있는 나라가 독일이라는 나라다. 히틀러는 원래 오스트리아 국경지역인 브라운지에서 태어난 독일의 독재자. 세계 1차대전 후 합수부르크 왕가의 멸망으로 체코, 헝가리, 슬로베니아, 폴란드 등이 독립을 하였다고 한다. 마우리찌요. 우리를 독일에서부터 태우고 다니기 시작한 운전기사 이름이다. 이탈리아 사람인데 50정도의 나이인데 머리가 하얗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아서 60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그런데 매우 친절하고 항상 웃는 낯으로 모든 사람의 가방을 다 받아서 싣고 내리고 하는데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이 잘해주었다. 운전기사 마우리찌요가 이탈리아 사람이라 이 곳 독일 지리에 어두운 관계로 길을 잘 못 들어서 갔던 길로 다시 되돌아오고 하며 헤매는 바람에 예상보다 도착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처음에는 정해진 속도 80km를 잘 지켰는데 예상보다 늦어진 바람에 100km 이상으로 위반을 하며 달렸다. 5시 55분 휘센 휴게소에서 0,5유로 내고 화장실에 갔다. 드디어 알프스를 넘어 오스티리아에 들어오니 참으로 아름답고 유럽의 전형적인 우리가 늘 그리던 이색적인 풍경으로 가장 인상에 많이 남는 곳이다.
♥오스트리아. 나라 면적의 3분의 2가 알프스에 접한 나라, 인구 670만 명, 게르만족으로 철광 산업이 발달하고 땅이 좁고 자원이 부족하여 관광산업이 주를 이루는 나라. 2차 세계대전 후 여러 나라가 독립을 하여 결국은 작은 나라가 되어버린 오스티리아. 세계적인 음악가 모짜르트가 태어난 나라요, 짤스부르그는 사운드오브뮤직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될 만큼 아름다운 나라. 1년에 관광객이 1억 명이 방문할 만큼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나라가 바로 오스트리아다. 약 8시간 30분이 걸려 9시 5분에 인수브르그에 도착하였다. 너무나 긴 여정에 많이들 힘들어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밤하늘에는 소박하게 별빛이 반작이고 조용하고 한적한 정경이 너무나 정겹게 느껴졌다. 10시 5분에 쇠고기 중심의 메뉴로 늦은 저녁 식사를 하였다. 크로네 호텔 304호. 넓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고 말로 듣던 것보다는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엘리베이터가 3개밖에 없고 느려서 조금 불편하였다. 일행이 두 곳으로 나눠져서 호텔에 묵었다.
10/ 5. 4시 30분에 일어나 예배를 드렸다. 유럽에서의 첫 주일을 맞는 날이기 때문에 비록 교회 출석은 못하지만 경건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에서였다. 사도신경 고백과 찬송가 1장을 부르고 성경말씀 창세기 1장 1절을 낭독한 다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다’라는 제목으로 잠깐 묵상한 다음 내가 기도를 하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쳤다. 마음이 가볍고 한결 편하게 느껴졌다. 5시 30분 모닝콜이 울렸다. 발코니에 나가 시원한 새벽바람과 하늘에 무수히 떠있는 총총한 별을 보면서 알폰스 도오테의 ‘별’이라는 소설을 생각하였다. 프로방스 지방의 알프스 산자락에 자리한 목장에서 어쩔 수 없이 목동과 주인집 아가씨가 같이 밤을 지내면서 느끼는 목동의 야릇한 마음을 그린 아름다운 소설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록 프로방스 지방은 아니지만 하늘의 별이 더욱 영롱하고 찬란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날이 밝자 옆방 사람들이 산꼭대기를 한번 보라고 해서 나오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보니 역시 발코니에서 바라다 보이는 알프스 산봉우리가 전날 내린 눈으로 하얀 모자를 쓴 것 같은 모습에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눈이 부실 정도의 멋진 광경은 천상의 세계를 보는 듯했다. 전날에 조금 내린 비가 우리를 맞이하려고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신비스러운 모습에 야 ~ 아!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8시에 독일에서와 같은 켈로그, 빵, 얇게 썬 고기로 아침 식사를 한 후 처음으로 변을 보았다. 7시 15분 출발하기 전에 마을에 나와서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카롤태오도르 다리에서부터 대전 아가씨가 우리 부부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설경을 배경으로 역시 수고를 해주었다. 설경 아래에 펼쳐진 파아란 초지. 아침햇살을 받아 더욱 선명하고 신비스러우리 만큼 금색 찬란한 산봉우리와 맑게 떠있는 구름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인스브르그. ‘인강이 흐르는 다리’라는 뜻으로 인구가 15만 명인데 인스브르그 대학의 학생 수만 3만 명이라고 한다. 노벨상 수상자를 15명이나 배출하였으며 1964년에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곳으로 우리에게 낮 설지 않은 이름이다. 대표적인 건물에 막시밀리안이 지은 황금지붕의 집이 있다. 막시밀리안이 마리아테레즈 왕비와 2번째 결혼식을 올린 장소로 구리로 지붕을 덮은 집이다. 지은 지는 500년이 되었다고 한다. 또 간판의 거리가 있는데 글씨는 하나도 없고 그림으로 간판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라틴어는 원래 귀족들만 사용하게 되어있었고 일반 서민들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그림으로 표현을 했다고 한다. 차에서 내릴 때 뿔만이라는 차가 유난히 높고 계단이 가파르기 때문에 아내의 손을 잡아주는데 뒤에 따라 오던 박현정이가 자기도 잡아 줄 줄로 알았는데 사모님 손만 잡아주고 그냥 돌아서는 바람에 서운했다고 농담을 하였다. 그래서 아 젊은 사람들이니까 노인네가 잡아준다고 하면 싫어할까 봐서 그랬다고 하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계속 잡아주었다. 그러다 보니 선희도 바로 뒤에 따라오면 또 잡아 주곤하였다. 날씨가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제법 쌀쌀하였다.
♣ 스와로브스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였다. 크리스탈 전문상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표라고 한다. 아내는 80유로에 반지 하나를 구입하고 대단히 만족해했다. 9시 45분의 꽤 이른 시간인데 중국과 한국인들로 많이 붐비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보통 9시에 문을 열고 저녁 7시에 문을 닫으며 주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9시 50분 경 베네치아로 출발하였다. 약 5시간소요. ☂ 돼지우리에 중국, 일본, 한국, 세 나라 사람이 들어가면 나오는 순서는 일본, 한국, 돼지, 마지막이 중국이라고 가이드가 우스개 소리로 들려주었다. 10시 20분경 국경마을인 브레네 마을을 지나갔다. 작은 연못이라는 뜻의 브레네 호수가 있고 산자락에는 눈이 많이 와서 하얗게 아름다움을 더했다. 자연풍광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인상이 깊게 남는 곳이다. ☀10시 20분 태양의 나라 이탈리아에 들어왔다. 국립공원인 돌로미트(돌이 생산되는 곳) 지역을 지나는데 온통 포도와 사과 밭이다. 특히 포도가 더 많았다.
☀ 이탈리아! 한 반도의 2,5배 정도에 인구는 6000 ~ 7000만 정도라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탄생한 베르나를 지나는데 이곳에 줄리엣의 집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고 하며 원형극장에서 7월에 세계의 오페라 축제가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마티즈 광고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11시 15분 FINI 휴게소에 도착하여 잠간 쉬면서 역시 까까(소변)를 하였다. 최고의 화창한 날씨가 과연 이탈리아의 날씨를 말하는 듯 했다. 로마! 지중해를 장악하고 카르타고와 3번이나 전쟁을 하여 이긴 후에 그리스를 점령했다고 한다. 그리스의 영향으로 광장문화가 발달하였으며 로마 없이는 유럽이 없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는 목욕탕 때문에 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목욕문화가 발달했고 기원 후 313년에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인정하였다고 한다.
★ 건축 양식. 1. 로마네스크 양식 : 창이 좁고 어두운 수도원 건물. 2. 고딕양식 : 뾰족뾰족한 지붕과 창틀의 양식으로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양을 본뜬 것으로 하나님께 절대 복종을 상징한다고 하며 700년 전 건물. 3. 르네상스시대 : 돔형. 아치형으로 인간과 하나님의 화합을 상징하는 모양으로 500년 전 건물. 4. 바로크 양식 : 왕을 위한 화려한 건축으로 대칭을 이루고 1층이 높으며 아치형 옆에 장식을 한 것이 특징이며 350년 전 건물. 베니스 상인으로 널리 알려진 곳,
♣ 베니스. 이탈리아 말로는 베네치아! 1시 15분 도시 진입료를 250유로나 내었다. 만남도 참으로 신기하다고나 할까 그 곳에서 우리교회 출신인 김현웅을 만났다. 분홍빛 바지에 약간의 연두빛을 띤 자켓을 걸치고 나타난 사람을 보고 우리가이드라고 하며 옷이 눈에 띈다고 들 하는데 보니까 아는 사람이었다. 자유의 다리를 지나서 1500년 전에 120년에 걸쳐 만든 인공 섬. 베네치아! 112개의 섬을 450개의 다리로 연결하였고 나무를 박고 뻘 위에 돌을 쌓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진 섬. 1년에 23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했다. 실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은 육지에서 연결하여 쓰며 처음에는 마당 가운데 우물을 만들어 빗물을 모아서 정수를 하여 먹었다고 한다. 이곳 리베섬에서는 유명한 베니스 영화제가 열란다고 한다. 해성(海城)에서 중식(中食)으로 점심을 먹었다. 역시 남녀 한 칸씩의 화장실에서는 예외 없이 한 줄로 서서 기다려야했다. 길바닥에 유일한 광고지가 한 줄로 군데군데 붙어 있다. 바로 W.C 표시다. 2300만 명 중에 1000만 명이 화장실을 이용한다고 하고 1000 x 50센트 = 5천만 유로로 우리 돈으로 약 90억이 된다. 참으로 대단한 관광 수입을 올리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 산마르코 광장.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격찬할 만큼 아름다운 광장으로 주위에 바이런, 괴테, 바그너 등의 명사들이 단골이었던 까페가 있고 산마리코 성당이 있었다. 종신형 감옥 쁘리지어 라는 감옥이 있는데 철창은 엄청나게 굵은 쇠로 만들어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것 같았다. 그 곳에 들어가서 살아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무서운 감옥인데 유일하게 살아 나온 사람이 카사노바라고 한다. 그 비밀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했는데 끝내 듣지를 못하고 말았다. 쁘리지어 감옥과 연결되어 그곳을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가족들이 탄식한다는 탄식의 다리가 연결되어있다. 산마르코 성당은 지붕이 금으로 장식을 하였으며 날개 달린 사자 상은 베니스를 상징하며 수호신으로 마가를 뜻한다고 했다. 그 곳의 명품인 각종색깔의 크리스탈 제조 공장을 견학하였다. 순전히 공짜 화장실 사용을 위해서였다. 젊은 여자 4명(대전여자)이 길이 어긋나서 한참을 찾아 다였다. 곤돌라는 4명이 한 조기 되어 타는데 우리부부와 같이 타기로 되어있어서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흔들리다’라는 뜻을 가진 곤돌라를 탔다. 좁은 골목으로 된 물길을 따라 길고 앞뒤가 삐죽하게 높이 올라간 배를 타고 다니는데 선원의 노젖는 솜씨도 일품이고 재미도 쏠쏠했다. 필레토 라는 메뉴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러나 처음 나온 스파게티는 거의 먹지를 못했다. 입이 까칠하고 국수발이 덜 익은 것처럼 떡떡 씹혀서 전혀 맞지가 않았다. 다음에 생선이 나와서 맛있게 먹었다. 먹고 난 후에 약속대로 가이드가 나를 포함한 일행을 위해서 ‘오 솔레미오’라는 이태리 가곡을 불어주었다. ‘부어나 빼띠또’- 맛있게 드세요. 36명 전원이 40유로를 내고 25분간 선택 관광인 수상택시를 탔다. 버스로 ‘홀리데이인 페라라‘ 호텔로 갔다. 9시 20분에 도착하여 216호실 배정을 받았다. 좁고 시설이 형편이 없었다. 추워서 얼마나 떨면서 잤는지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서 알고 보니 덧문도 닫아야 하고 화장실 바깥문도 닫지를 않아서 더 추웠던 것 같았다.
10/ 6. 6시 30분 모닝콜. 화장실에 변기 같은 또 하나의 물건이 달려 있다.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아내가 그 사용처를 알았다며 머리 감는 곳이라는 말에 물을 트니 물이 쫙 뿜어져 나오기에 그 물에 머리를 감았다. 나중에 그 일화를 들려주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 것은 바로 비대였다. 부끄러워서 말은 안했지만 한 바탕 웃음거리가 될 뻔하였다. 아내는 세수까지 하였단다. 거기에다가 발을 씻는 사람, 세수하는 사람, 심지어는 과일을 담가 먹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을 하였다. 7시 30분 아침식사. 빵과 계란 볶음, 팍팍한 아침을 겨우 먹고 8시 30분에 피렌체로 출발하였다. 약 4시간소요. 태양의 나라답게 화창하고 찬란한 햇살이 반겨주는 아침이었다. 플로렌스 주유소에서 화장실 사용료를 40센트 내고 소변을 봤다. 아내는 공짜로..... 9시 7분 공중전화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볼레아라는 곳을 지나가는데 버드나무가 곧게 서 있고 추수가 끝난 벌판은 우리나라와 거의 흡사하였다. 10시 30분 경 우리의 태백산맥과 같은 아뻬니노 산맥을 넘어갔다. 산 중턱까지 밭이 있고 꼭대기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그 높은 곳까지 길을 다 만들고 돈 있는 사람일수록 높은 곳에 산다고 한다. ⚉ 에피소드 한 자락. 충청도. 아버지 돌 내려 가유 ~ 제 2탄 아버지 돌 내려 가유 ~ 그런데 또 죽었다. 돌이 두갠디 ~ ~ ~ 1. ‘애수’라는 영화 본 이야기 하다가 3번 봤다는 남편 말 듣고 한 번 나하고 두 번은 누구냐고 하여 다투었다는 어느 부부의 이야기. 2. 나체로 문 닫힌 할아버지. 문이 자동으로 닫히는 걸 모르고 샤워 중에 짐 가지러 나왔다가 문이 닫혀서 못 들어가고 짐 뒤에 숨어서 가이드를 향해 오지 말라고 소리친 할아버지!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산맥은 길가에 아카시아, 소나무, 히말라야시타 등의 잡목이 서 있는 모습은 우리나라와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I. C 주변의 소나무가 우리나라 향나무처럼 위가 소복하고 넓게 자란 것이 인상적이었다. 10시 30분 피렌체에 진입하였다. 도시 진입료 우리 돈으로 약 90만원이 되는 500유로를 내었다. 자동차는 아주 작은 소형차가 대부분이고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실용적인 모습은 유럽의 공통정적인 모습이었다. 도로는 2차선 내지 4차선으로 비교적 소통은 원활하였다. 모처럼 무료 화장실을 사용하였다. 시설도 양호하여 기분이 상쾌하였다. 현지 가이드 이승희 씨 만남. 역시 노래하는 사람으로 로마에 산다고 하였다. 삐삐=오줌. 까까=똥 시내로 진입하였다. 가로수는 소나무와 느티나무였다.
★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을 연 곳으로 중세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뽑내는 빨간색 지붕이 있는 곳이며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꽃의 도시‘(꽃처럼 생겨서, 꽃이 많아서,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도시)라는 뜻으로 알고 있으며 역사의 중심도시라고 했다. 11시 10분 시내관광을 하였다. 좁은 골목과 돌벽, 르네상스식 건축이 특이하다. 중앙, 중심이라는 뜻의
☛’두오모 성당‘을 관람하였다. 일본인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피렌체의 상징으로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하다. 세례당(6C) - 성당(13C) - 종탑(사탑)으로 되어있고 전망대는 105m라고 한다. 정치 중심이요 사회중심으로 메디치아(메디칼의 어원) 가문이 이룩한 광장이라고 한다. 메디차아는 약장사였고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모아서 이룩한 곳이라고 한다. 평강교회 권사 내외를 만나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포세이돈 분수가 있고 1400년대에 단테가 태어난 집이 있고 신곡(마키아벨리의 하늘이 내린 곡이라는 찬사를 들음)을 쓴 단테는 교회 시대를 부인하므로 추방을 당했다고 한다. 단테가 사랑한 여자 비아뜨리제는 단테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여 결국 자살을 하고 자기가 기도하던 교회 안에 무덤이 그대로 있었다. 점심은 현지식 스파게티를 먹었다. 오랜만에 닭고기가 나오고 오렌지도 나왔다. 1시 45분경에 가죽 전문상가에서 쇼핑을 하였다. 평강교회 권사 내외를 2번 째 만났다. 3번 째 만나면 차 한 잔 하자고 하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3시에 로마로 가는 길에 조셉삐뽀찌가 만든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사진을 찍고 시가지를 조망하였다. 아래로는 아르노강이 흐르고 있었다. 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민족이 독일이라고 한다. 짠돌이기 때문에 버스가 높고 짐칸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버스아래에 짐을 많이 싣기 위해서 좌석을 높이다 보니까 차가 아주 높아졌다고 한다. 이 차를 뿔만이 만들어서 이름이 ‘뿔만’이라고 한다. 이탈이라 사람들의 농사는 해바라기와 옥수수, 담배와 포도 그리고 올리브를 주로 재배한다. 1년 내내 계속되는 것이 이곳의 특징이요 신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도로 주변에는 온통 올리브 나무였다. 산비탈에도 밭을 일구어 축사를 짓고 집을 지어 사람이 사는 모습은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가이드비용 한 사람당 120유로를 내었다. 포도주에 얽힌 속담도 있다. ․ 좋은 포도주를 알면 지갑에 빵고가 나고 술을 좋아하면 위에 빵고가 난다. ․ 포도주와 여자는 눕혀 놔야 한다. ․ 포도주는 늙어야 좋고 여자는 젊어야 좋다. 5시 30분 오르테 발사믹식초 가게에 들러서 12년산 발사믹식초 시음을 하고 야채 셀러드도 먹었다. 핸드크림 4통을 35유로에 구입했다. 7시 경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테변강을 따라 로마에 입성을 하였다. 아내는 피곤하여 골아 떨어졌다. 로마 입구에 브르크식 도시(모자형)가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7시 15분 한국 식당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나오는 평강교회 권사 내외와 대학생인 아들을 세 번째로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고 차는 마시지를 못했지만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식사는 오랜만에 한국식으로 맛있게 먹었다. 배추잎만하게 큰 상추쌈, 된장으로 만든 쌈장, 배추김치, 열무(하루나)무침, 돼지고기볶음, 오이무침, 무채무침, 그리고 된장찌개가 나오고 후식으로 별 맛은 없지만 사과가 나왔다. 8시 50분에 바르디아(bardia)호텔에 도착하였다. 밖에서 잠깐 기다리는 사이에 이탈리아 할아버지 2명이 전주에서 온 사람들 카메라를 보고 한 장 찍어 달라고 하여 찍어줬는데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한참 애를 먹었다. 나중에는 또 에메일이 없어서 주소를 적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가이드가 동원된 다음에 겨우 적었다. 고마움으로 할아버지가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2병을 주었다. 수다스럽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과 성향이 비슷하고 정이 많다고 하는데 아마 그런가 보다. 호텔 30호 배정을 받았다. 2층인데 너무 좁고 답답하였다. 엘리베이터도 한대밖에 없고 느린데다 옛날 시골 부잣집의 고방 열쇠 같은 것인데 문을 여는데도 어려울 정도였다. 70년대식 10인치 정도의 작은 티브이와 다이얼 전화기, 구식 옷장, 부스가 없는 샤워기에 꼭지 하나만 있는 것이 상당히 불편하였다. 새벽에는 불이 나가고 말았다. 밤새 추워서 떨며 자다가 일어나 발이 추워서 양말을 신고 잤다. 덧문과 화장실 바깥문을 닫지 않은 것도 한몫을 했다. 유럽에서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 철저하게 관의 지시를 지키며 위반할 경우에 많은 벌금을 내기 때문에 추워도 난방을 넣어 주지 않았다.
10/ 7. 6시 모닝콜하고 7시에 아침식사를 하는데 빵 쟁탈전이 벌어질 정도로 서로 챙겨 먹느라고 정신이 없다. 부족해도 잘 보충을 해주지 않았다. 7시 55분 폼페이로 출발하였다. 약 3시간소요. 9시 휴게소에 들러서 50센트를 내고 삐삐를 봤다.
♣ 폼페이. 서기 79년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7m의 화산재가 덮여 완전히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 도시. 폼페이! 18c에 발굴되어 2000년 전의 로마시대의 부유층의 생활상을 상상할 수 있는 문화 유적이다. 총면적이 64만 hr인데 3분의 1만 발굴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묻혀서 그대로 화석이 된 모습을 재연해 놓았고 옆의 밭에는 그 당시 포도씨와 올리브씨를 발굴하여 DNA를 재생시켜서 심은 포도와 올리브가 자라고 있었다. 사람이 다니는 도로와 마차가 다닌 길을 구분하고 길에까지 상수도 연결이 잘 되었으며 주막과 사창가나 기타 가게도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었다. 베수비오 산의 높이가 2400m에서 1300m로 낮아졌다고 한다. 그 당시의 화산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하게 하였다. 1944년에 폭발한 후 지금까지 쉬고 있는 휴화산이라고 한다. 폼페이 관광 후에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홍합스파게티에 쎌러드와 새우, 오징어 튀김으로 모처럼 괜찮은 현지식사였다. 후식으로 무화과 같은 작은 배가 나왔는데 꼭 삶아 놓은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뒤에 선택 관광으로 1인 120유로씩 내고 26명은 카프리 섬으로 가고 10명은 자유시간으로 쏘렌토로 갔다. 도로가 좁아서 시내로 진입은 하지 못하고 높은 언덕에서 멀리 아말피 해안을 내려다보며 산타루치아 정경과 항구를 바라보며 사진촬영도 하고 잠시 쉬었다가 나폴리로 돌아왔다. 지중해의 푸른 물결에 반사되는 눈부신 햇살이 오! 솔레미오가 저절로 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세계 3대 미항이라고 하는 나폴리항으로 돌아오는데 말로만 듣던 미항의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마피아가 개입하여 쓰레기 처리비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바람에 예산이 돌아가지를 않아서 쓰레기를 제대로 치우지도 못하고 길가에 그대로 방치되어 쌓인 곳도 흔하게 보였다. 아주 웃지 못 할 일은 서민아파트가 많은데 합의가 되지 않아 도색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기 집 부분만 하는 바람에 같은 아파트에 색깔이 알록달록 제각각인 집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창틀에 어수선하게 매달린 빨래가 우리의 6, 70년대의 서민아파트를 보는 듯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이기심으로 도시의 미관은 볼품없이 되고 인심도 사나워졌다고 한다. 6시까지 자유시간이다. 4시 40분. 작은 가게에서 피자 3판과 맥주 3병, 그리고 콜라 2병을 시켰다. 의자 1개에 1유로씩 모두 40유로 70센트가 나왔다. 팁까지 합쳐서 45유를 주었다. 알고 보니 서서 먹는 것이 제일 싸고 그다음은 실내 좌석이고 제일 비싼 곳이 길거리라고 했다. 우리는 제일 비싼 곳에서 먹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계산이 많았던 것이다. 유럽 사람들이 길거리에 의자를 쭉 펼쳐놓고 먹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 아마 고급 손님들인 것 같았다. 5시 50분에 피자집을 나와서 계란성을 지나 중세 시대의 성(城)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배 터미널에서 사람이 없는 사이에 공짜로 화장실을 갔다. 6시 10분에 카프리 섬 일행과 합류하여 서해 낙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로마로 돌아왔다. 8시에 호텔에 도착하여 피자와 비슷한 식사를 하는데 입맛이 없어서 거의 먹지 못했다. 2차로 나오는 쎌러드와 고기는 맛이 좋았다.
10/ 8. 5시에 일어났다. 문을 다 닫아서 그런지 어제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추운 밤이었다. 7시 30분 출발하였다.
★바티칸. 인구 1000명도 안 되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 카톨릭의 본산이며 교황령에 의해 다스려지는 바티칸으로 갔다. 총 44만km²에 성베드로 성당과 바티칸 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초대교황 베드로가 죽은 뒤에 콘스탄티누스가 교회를 지은 것이 성베드로 성당이라고 한다. 현재는 266대 교황인 베네딕토 신부가 재위하고 있다. 초기에 로마 인구가 350만으로 구로마와 신로마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길로 로마시내에 입성하여 네로가 가던 길을 따라 9시 30분에 바티칸에 도착하였다. 3 ~ 4시간씩 기다려야 하는데 일찍 가서 그런지 하나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바티칸 박물관에 입장하였다. 소지품검사를 철저하게 했다. 스위스 용병이 지키고 있었다. 자원이 부족한 스위스는 용병을 수출하여 국가에 이바지한다고 한다. 시스티나 성당을 관람하였다. 1500년대 초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29살에 들어가서 4년 반 동안에 다 그리고 장애인이 되어서 나왔다고 한다. 그림 전부를 나체로 그렸는데 교황 비서가 몰래보고 보고를 하여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하여 완성했는데 나중에 나체에 옷을 입혔다고 한다. 라파엘로가 만든 천정의 조각은 모두 평면 그림인데 입체적으로 보일만큼 훌륭한 그림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그린 카페트의 예수님은 눈동자가 움직이는 듯 사람을 따라오는 것 같았다. 네로 황제의 욕조와 콘스탄티누스의 딸 엘레나의 석관을 보았다. 그리고 베드로성당의 웅장함과 대리석의 화려함은 참으로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뭐라고 말로는 도저히 표현을 다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렇게 멋지고 어마어마한 건축을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고스란히 보존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만 생길 뿐이었다. 유럽의 돌은 모두 석회암이라 물러서 조각하기가 쉽다고 한다. 그런데 건물이나 조각품들이 비를 맞고 세월이 오래되면 될 수록 단단해 진다니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12시 15분 중식(中食)으로 점심을 먹었다. 옥수수스프, 볶음밥, 쎌러드, 탕수육, 닭튀김과 포도가 후식으로 나왔다. 역시 가까운 나라의 음식이라 그런지 우리의 입맛에 제일 잘 맞아서 맛있게 먹었다. 바티칸 광장의 웅장하고 거룩한 성지로서의 모습에 압도당하며 그림으로만 보던 곳을 직접 보니 감회가 무궁하였다. 여러 가지 칼라로 조각된 건물과 바닥이 참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걸어서 로마시내를 관광하였다. 천사의 성은 원래 아드리안느의 무덤이었는데 오페라 토스카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한다. 바티칸과 지하로 연경되어 있다고 한다. 법원과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서 ♣트래비 광장에 가서 분수를 보며 그곳의 유명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내 생전 처음으로 두개를 먹을 정도로 갈증도 났지만 맛도 있었다. 그 기회에 삐삐(소변)도 하였다. 선택관광인 벤츠투어를 모두 하지 않는 바람에 걸어서 시내관광을 하였고 몽마르뜨 언덕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시간이 없어서 가보지를 못해서 조금 아쉬웠다. 빅토리아 2세는 이탈리아를 통일 시킨 사람으로 그 묘지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석회암으로 되었다고 한다. 가장 아름다운 언덕으로 카피돌리가 80세에 만든 미켈란젤로 언덕(일명 카피돌리언덕)이라고 하며 로마시청과 양족은 궁전이 있는 곳이다. 제우스와 주피터 신전이 있는 비아새크라 길을 걸어보았다.
★ 콜로세움. 무솔리니가 만든 길을 따라 8c에 만들었다는 콜로세움으로 갔다. ‘거대하다’는 뜻의 이 건물은 5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으로 무너진 언덕과 좌석, 일부 4층으로 된 벽이 그대로 남아서 그 위용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경기를 즐기며 특히 죄인을 운동장 한가운데 세워놓고 굶주린 사자를 풀어서 사자 밥이 되게 했던 곳, 그 때 그 함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중심역인 전 유럽으로 연결되는 테르미역을 지나서 식당으로 갔다. 입구에 태극기가 걸려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가인(佳人)이라는 韓食堂이었다. 식사를 한 후 6시 30분 호텔로 출발하였다. 이승희 가이드와는 이별의 인사를 하였다. 비록 겉모습은 조폭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였으나 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이승희 음악 살롱이라는 맨트로 계속해서 좋은 고전음악을 들려주어서 버스를 타고 다닌 동안에 그런대로 즐거웠고 목소리도 친근감이 들어서 괜찮았다. 호텔에 도착하여 씻고 바로 골아 떨어졌다.
10/9. 5시 30분 모닝콜. 7시에 출발하였다. 3시간 30분소요.
♦ 피사.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고향이다. 갈릴레이가 진자의 법칙을 발견한 곳이다. 사탑으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사탑은 원래 종탑이었는데 기울어져서 더 유명하게 된 사탑. 세계 7대 불가사의 중하나다. 성당과 사탑 주변에는 잔디를 깔아서 그냥 앉아서 놀거나 사진을 찍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골고다 언덕에서 흙은 갔다 깔았다고 한다. 입구 주변에는 온통 아프리카에서 불법으로 입국한 흑인들이 각종 상품을 들고 따라 다니며 싸다, 빨리 사! 하면서 귀찮고 복잡할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소매치기에 특별히 조심하라고 하며 물건을 잘 못 사다가 바가지도 쓰고 봉변도 당한다고 가이드는 단단히 당부를 한다.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지는 의구심이 가지만 조심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사탑을 구경하고 2시 20분에 밀라노로 출발하였다. 약 3시간 30분소요.
★ 밀라노. 6시 5분에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밀라노에 도착하였다. 섬유산업이 발달하고 이태리 경제의 중심지 밀라노. 천민은 성(性)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빈치에서 태어난 다빈치. 그 다빈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도시로 방사선 모양으로 인구 70만 ~ 150만 정도로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다. 역시 도시 진입금을 내었다.밝은 시간에 도착하여 두오모 성당을 보고 싶었으나 차가 밀리고 늦어지는 바람에 해가 서산에 기울고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도착하여 식사부터 하기로 하였다. 7시 30분 스파게티와 돈까스, 피자가 나왔다. 이탈리아의 현지식사는 마지막이다. 식사를 한 후에 두오모 성당을 관광하였다.
☀ 두오모 성당.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 두오모 성당. 두오모 성당은 1368년에 시작하여 약 450년간 지어진 건물로 나폴레옹 때 마무리하였다고 한다. 원래 더 지을 예정이었으나 재정 문제와 여러 가지 사회의 형편상 조기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길이가 133m 높이가 108,8m 153개의 성인을 조각하여 꼭대기 마다 세워놓았다. 그리고 3185개의 첨탑을 만들어 세운 고딕에 바로크양식이 섞인 너무나 상상을 초월하는 위대한 건물이다. 마침 운이 좋았는지 본관 문이 열려있어서 자유로이 들어갈 수가 있었다. 내부도 그 규모는 어마어마하다는 말 외는 달이 표현할 적당한 말이 없을 것 같다. 성도들이 군데군데 모여 경건한 자세로 머리를 숙이고 손을 모으기도 했다. 조용히 다니면서 사진도 몇 장 찍었다. 그곳의 예수 초상을 그린 인물이, 훗날 유다의 인물을 그릴 사람을 찾는 중에 감옥에서 찾았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 후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카라라 지역에서 가지고 온 대리석으로 미켈란젤로의 동상과 빅토리아 임마누엘 동상을 조각하였다. 8시 30분에 스칼라극장을 보았다. 1776년에 빅토리아임마누엘 2세가 지은 겔러리로 십자형의 건물이었다. 스포르체 성(城)을 지나서 9시 40분에 그랜드호텔에 도착하였다. 그동안 묵은 호텔 중에서 가장 넓고 깨끗하며 시설이 좋은 곳으로 아주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이탈리아는 관광으로 얻는 수입이 년 80조라고 한다. 실로 대단하고 부러울 뿐이다.
10/ 10. 5시 30분 모닝콜을 하고 6시 30분 식사, 그리고 7시 30분에 출발하였다. 알프스 산맥의 아름다움과 협곡의 아찔한 모습과 그사이로 교묘하게 길을 만들어 놓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을 극복한 인간의 위대성을 느끼며 경이로운 풍경에 감탄을 하였다. 8시 20분 꼬모라는 국경 마을을 지나는데 다른 곳과는 달이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었다. 기사가 내려서 몇 가지를 확인하고 통과세를 낸 다음 스위스로 들어갔다.
♣ 스위스.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 들러 싸인 작은 나라. 척박하고 좁은 땅으로 살기가 어렵고 힘들어 용병을 수출하는 나라, 주변국에게 항상 지배를 당한 나라로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타고 난 나라, 스위스! 60%가 게르만 족이고 프랑스계가 16%, 기타 라틴족, 이탈리아족, 겔트족 등으로 구성된 민족, 그러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저절로 수공업이 발달하여 시계는 세계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내게 됐다고 한다. 9시 40분 협곡 속의 아담한 휴게소에 도착하여 볼일을 보고 17km의 긴 터널을 통과하고 루쩨르 호수를 지났다. 주변의 그림 같은 경치가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군데군데 골짜기에 자리 잡은 호수, 가파른 절벽과 언덕위에도 자리 잡은 붉을 색 지붕의 집과 푸른 초지, 한가롭고 평화로운 농가의 모습, 또 절벽 사이로 난 기차길과 자동찻길, 쭉쭉 뻗은 나무들, 울굿불굿한 단풍을 카메라와 눈에 담기에 바빠서 정신을 놓을 지경이었다. 12시에 ‘호수 사이의 도시’라는 뜻의 인터라캔에 도착하였다. 사방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골짜기에는 어김없이 호수가 있고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흐린 녹색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며 절벽에서 폭포도 떨어지고 높은 산꼭대기로 연결된 케이불카도 보이며 운동장보다 넓은 초지도 많이 보였다. 한식(韓食) 꼬리곰탕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밖에 태극기가 걸려있고 江村이라는 간판이 너무나 정겹게 느껴졌다.
★ 융플라우. 유럽의 지붕이요 3000m 이상의 고지대에 자리한 빙하가 쌓여 있고 네 계절 장엄한 설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1시 5분에 인터라캔 오스트역에서 기차를 탔다.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와 한국말로 안내를 하는 것이 너무나 반갑고 인상적이었다. 1시 30분에 라우텐 블루넨역에서 벤겐알프 철도로 기차를 갈아타고 2061m고지대의 글라인 샤이덴역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초고속으로 순식간에 올라가서 스핑크스전망대에 내렸다. 제법 넓은 실내에 가게가 있어서 기념품도 팔고 간단한 식사도 가능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컵라면 하나에 자그마치 5유로 우리 돈으로 약 8 ~ 9,000원 정도다. 물만 부어주면 물 값만 3유로, 젓가락 1개에 1유로, 그것도 한가하게 먹을 시간이 없어서 물을 부어서 바로 먹으면서 익혀야 된다고 한다. 얼음 동굴에서 선희가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전망대로 올라갔다. 3454m. 듣고 보던대로 높기도 하고 장엄하고 멋있는 광경이었다. 3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제일 높은 오른 쪽이 융플라우, 가운데가 마히봉, 왼쪽이 아이거봉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봉우리였다. 인간 세상에는 가을인데 여기는 한겨울의 정경으로 빙하를 처음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또 높은 전망대에서 구멍이 뻥뻥 뚫린 철망을 깐 바로 발밑을 내려다보니 천길 낭떨어지로 아찔한 느낌이 들고 다리가 떨렸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탁 트이고 십년 묵은 체증이 쏵 내려가는 느낌이다. 4시 35분에 다시 기차를 타고 4시 40분에 중간역 (2061m)을 거쳐 인타라캔역 오스트역으로 돌아왔다. 봄 같은 푸른 풀밭과 풀이 마르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등성이의 가을 풍경과 겹겹이 쌓인 산봉우리의 빙하나 눈을 보면서 한꺼번에 4계절을 감상하며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너무 깜찍하고 예쁜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는 사람과 같이 앉게 되어 물어 보니 인도 사람인데 영국에서 치과 의사로 일한다고 했다. 부자간의 사진을 한 장 찍고 이메일 주소를 적었다. 그동안 송선희씨가 여행을 위해서 준비해 온 카메라로 우리 부부의 사진을 간간이 찍어 주었다. 두사람이 함께 찍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가는 곳 마다 찍어주니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6시 55분 인터호피 가게 쇼핑을 하였다. 8시에 출발하여 baumgarten 호텔에 도착하여 바로 현지식으로 식사를 하였다. 용인의 부부와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그 두 사람의 대화가 조금 심상치가 않았다. 여자가 하는 말이 남편은 남들에게는 정말로 친절하고 잘 해 주는데 집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은 나름대로 아내를 나무라며 주고받는 말투가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약간 불안한 느낌도 들었다. 2층 4호, 비누도 없는 낡은 집이었다.
10/ 11. 2시에 모닝콜, 3시 30분 제네바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전날 저녁을 같이 앉아 먹었던 용인 양반이 보이지를 않는다.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여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전날 밤에 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떠날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단체가 움직여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출발하였다. 아침은 도시락으로 준비를 했다. 치즈토스트, 음료와 계란, 오렌지가 전부다. 6시 15분 제네바역에 도착하였다. 약 7일간 정들었던 마우리찌요와 이별을 하였다. 너무 친절하고 순박하며 조금도 싫은 내색 한번 안하고 항상 웃는 모습이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내려서 아내와 몇 사람이 화장실을 찾았다. 그러나 그 큰 역에 화장실이 딱 한군데 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이 잠겨 다른 곳으로 찾아갔던 사람들이 헛걸음을 하고 돌아왔다. 화장실 문을 두들겨도 아무 반응이 없다. 아내는 나올 것 같다고 발을 구르는데 정말로 난감한 상황이다. 그 순간에 안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눈을 비비며 40대 정도의 남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역시 돈을 받는데 무려 2유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는 유로를 안 쓰고 자기 나라 돈인 프랑으로 받는단다. 프랑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냥 급하다는 흉내를 내며 몸짓을 하니 일단 2유로(약 4천7 ~800원)를 내고 들어가라고 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다. 열차 티켓은 한 사람당 53유로였다. 7시 17분에 출발을 하였다. T.G.V를 탔다. 조금은 낡은 것이 기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기차는 짐칸이 계단 입구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짐을 얹어 놓고 들어가서 제자리에 앉아야 하며 짐에 신경을 써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프랑스까지 약 3시간 30분소요. 어디를 가나 비슷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넓은 벌판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나 양떼의 모습은 참으로 이국적인 정경이었다. 자욱한 아침 안개가 시야를 가려서 답답하였다. 10시 40분 파리 리옹역에 도착하였다. 역 앞의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였다. 알량미 밥과 시원한 국, 쇠고기와 양파 볶음, 콩 볶음에 마파두부, 김치, 후식으로 오렌지가 나왔다. 역시 중국음식만 하여도 우리 입맛에 꼭 맞아서 맛있게 먹었다. 12시 식사를 한 후에 이동호 가이드가 인사를 하였다. 파마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었는데 너무나 범생 느낌이 들고 교과서 적이었다. 또 프랑스 기사는 너무나 근엄하고 전혀 웃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말도 안 통할 뿐 아니라 전혀 대화도 없다. 사람들이 다 한 마디씩 한다. 너무 무섭다고..... 세느강은 길이가 776km로 하류가 도버해협이라고 한다. 강에는 그 유명한 미라보 다리와 뽕네프 다리 그리고 알렉산드3세 다리가 유명하다. 리옹역을 출발하여 파리 6 ~ 7대학 옆을 지나갔다. 대학 등록금은 두 학기에 약 100만 원 정도라고 하니 상상도 안 되는 너무나 부러울 뿐이었다. 182년에 지은 노트르담 대성당이 유명하며 고딕건축 양식이다. 뽕은 다리, 네프는 9라는 뜻이라고 하며 402년에 지었다고 한다. 350년 된 프랑스 학사원은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며 그팔새꼴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졸업하면 연봉이 보통은 3천만원정도인데 그들은 1억 7천만 원을 받는다고 한다. 오른쪽은 루브르 박물관, 왼쪽은 오르세 미술관을 끼고 콩코드 다리를 지나서 국회의사당과 러시아 황제 이름을 딴 알렉산드3세 다리 오른 쪽은 유리지붕으로 된 만국 박람회 전시회장을 지나 에펠탑 근처의 지하도에서 다이애나비가 교통사고 죽은 곳을 보면서 에펠탑에 도착하였다.
★ 에펠탑 : 에펠은 사람이름으로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박람회를 빛내기 위해서 에펠이 세운 기념탑이라고 한다. 높이가 310m( 탑 끝까지 324m)로 119년 전에 2년 5개월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오른 쪽은 베르사유 궁전이 있고 서울까지의 거리가 899km라고 꼭대기 안내판에 기록되어있다. 참 멀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중간 전망대 105m에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니 파리 시내가 한 눈에 다 들어왔다. 올라오기 전에는 너무 높이 올라가는 것에 대하여 겁을 먹고 안 올라오려고 했는데 와서 보니 가슴이 탁 트이고 시원하여 기분이 아주 좋았다. 오르내리는데 사람이 많고 한참이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꼭대기에서 줄을 서서 화장실에 간 아내를 기다리는데 오지를 않아서 줄을 벗어나서 아내를 기다리다가 바로 나와서 같이 줄을 섰다. 원래 자리로 들어가기가 미안해서 뒤에 다시 서서 기다리는데 일행은 다 내려가고 몇 사람만 남았다. 그래도 다음 에레베이터를 탈 것으로 알고 여유 있게 줄을 서서 양심을 지키고 있는데 막상 탈 때는 마구 밀치고 들어와서 나와 아내만 못타고 말았다. 유럽 사람들도 질서를 잘 안 지키기기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마음이 급하고 미안해진다. 한참 있다가 차례가 되어 내려왔더니 다들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때문에 기다린 것이 2번째라 정말로 미안했다.
♥ 파리. 동서가 9km 남북이 11km 인구는 250만 정도로 영등포와 비슷한 면적이라고 한다. 근처의 수도권을 합치면 1200만 ~ 1300만 정도로 시내는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외각에서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관광객이 1년에 7000만 명 정도 라고 한다. 사이어 궁전 앞에서 에펠탑 사진을 찍고 잘 정돈된 정원이라는 뜻을 가진 베르사유 궁전을 관람하였다.
☀ 베르사유 궁전. 유럽의 최고의 왕권을 자랑하던 부르봉 왕조가 107에 걸쳐 살았던 절대군주 제도의 대표적인 사적지다. 1634년에 세워진 루이 13세의 사냥 별장을 그의 아들 루이 14세가 1661년부터 20년간 증개축을 했고 1682년부터 공식적인 왕궁으로서 기능을 하게 되었으며 이 궁전은 태양왕 루이14세의 침실을 중심으로 대칭구조로 설계됐고 1715년 루이 14세가 서거할 때까지 즈축이 계속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잘 정돈된 궁전! 베르사유. 모든 정원을 직각으로 가꾼 것이 인상적이다. 가로수도, 정원수도 마찬가지였다. 궁전 뒤뜰의 정원의 넓이가 250만 평이라고 한다. 그 넓은 정원을 한결같이 가지런하게 잘 정돈되게 꾸며 놓았다. 6시 10분에 한식당 권(權)에서 갈비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일행 중의 28살짜리 엄마 국지선의 신랑이 거제도 대우 조선 직원인데 신입사원 연수차 독일에 출장 왔다가 아내를 보기 위해서 잠깐 시간을 내서 식당에 찾아와서 식사를 하면서 테이블마다 소주 한 병씩을 돌렸다. 한 병에 30,000원이라고 한다. 맥주는 하이네켄이 약 6,000원 정도였다. 7시 30분에 호텔 도착하여 모처럼 일찍 호텔에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빨래도 하고 몸도 쉬면서 얼마 남지 않은 여정을 그려보았다. 304호실. 천정에 벌레가 기어 다니고 약간은 낡고 오래된 호텔로 로마보다는 낫지만 넓지 않은 곳이다. 호텔 balladin comfort saint.
10/ 12. 6시 50분 모닝콜. 유럽에서 맞는 2번째 주일이다. 사도신경 후 찬양을 부르는데 가사를 잘 몰라서 얼버무렸다. 하나님께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아내가 기도하고 주기도문으로 간단하게 예배를 드렸다. 8시에 식사. 9시에 출발하였다. 여유 있는 시간에 카메라 메모리가 부족하여 찍은 것 중에서 몇 장을 삭제하여 67장의 메모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어제 스위스에서 갈라졌던 용인 서흥복씨가 나타났다. 다들 별말 없이 이렇게 무사히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인사를 하고 조용히 물어 보니 인근 호텔에서 잤는데 15만원을 냈다고 한다. 호텔 주인이 차로 택시 타는데까지 태워주어서 택시를 타고 제네바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부부 사이는 한층 다정해 보였다. 서로가 반성의 기회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모두가 같이 한발씩 양보하며 이해하고 덮어주고 묻어 주며 사는 것이 현명하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지면서 살면 아무 문제나 불편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루브르 박물관.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 일명 도둑 박물관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서 훔쳐 온 물건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는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13c에 세운 요새로 이 후에 왕실 소유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1793년에 개관하였고 현재 225개 전시실에는 40만점의 예술품이 전시돼 있다. 미켈란젤로의 ‘평화‘ 라는 작품은 노예의 죽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고통의 삶을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평화스럽다는 가슴 아픈 내면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많은 작품을 보았지만 다 기억할 수도 없고 기록하는데도 한계가 있고 시간도 정해져 있기에 안타까워하면서 대충 보고 나왔다. 특히 모나리자의 웃음은 남편의 죽음에 대하여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애매한 미소가 최대의 걸작이 되었다고 한다. 밀로의 비너스는 밀로섬에서 발견한 것으로 아름다운 미의 여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폴로는 태양의 신으로 루이 14세를 상징한다. 그 외 가나의 혼인잔치를 비롯한 너무 많은 것을 보다보니 기억할 수도 없고 지루하기도 하고 힘도 들었다. 11시 30분 현지식으로 달팽이 요리를 먹었다. 작은 고동만한 달팽이 6마리가 나왔다. 파란색 쏘스에 찍어 먹는데 짜기만 하고 별다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paris look이라는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였다. 영국에서 산다던 버버리 제품을 아내와 지영이, 현지의 티샤스를 하나씩 고르고 우람이 남방을 샀다. 값은 향수를 포함해서 총468유로였다. 이어서 중국인 백화점에 들렀다. 거기서는 의자에 앉아서 쉬었다. 삼위일체 성당 galeris patayette를 보고 2시 50분에 샹제리제 거리로 갔다. 영국의 다이애나가 마지막으로 묵었던 리치란 호텔을 지나갔다. 하룻밤에 350만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이애나는 공짜로 묵었다고 한다. 바로 호텔 주인이 애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제일 비싼 호텔은 하루에 4,000만 원짜리도 있는데 주로 아랍의 왕자들이 묵는다고 했다. 화합과 단결의 상징으로 루이 왕자를 위해서 만든 콩코드 광장에 전시된 미라주전투기와 국회의사당 앞에 단두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천사의 뜰도 보았다. 상제리제 거리 입구의 영국식 정원과 그랑팔레스(그랜드 팔레스) 유리지붕으로 된 건물도 감상하고 개선문에 도착하였다.
★ 개선문 12각형의 별 모양으로 1년에 약 1000만 명이 지나가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다. 그리고
상제리제 거리. 이 거리의 가게세는 제일 작은 것이 한 달에 4,000만원이라고 한다. 4시 35분 세느강의 유람선을 타고 파리의 연인을 촬영한 알레산드3세 다리와 뽕네프 다리, 오르세 박물관, 노틀담 성당을 보고 로댕의 집이 있는 쌩리섬에서 유턴하여 돌아와서 5시 43분에 유람선을 내렸다. 6시 사모 식당에서 육개장으로 저녁을 먹었다. 나중에 남은 반찬을 모아서 준비해간 고추장을 넣고 비빕밥을 만들어 먹었더니 맛도 좋고 배도 부르고 마음도 넉넉하고 여유도 생겨졌다. 파리에 중국식당이 3000개 일본식당은 300개 우리식당은 5개 정도 있다고 한다. 식당 개업에 30만 유로 우리 돈으로 약 5억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한다. 세느강 야간 유람선 선택 관광은 다 하지 않아서 7시 30분에 호텔에 도착하여 마지막 밤 송별 모임으로 맥주 파티를 하였다. 전날 스위스에서 집나갔다가 돌아온 용인 부부를 위한 의미도 곁들였다. 그리고 대전의 젊은 엄마 박현정의 생일과 송파부부의 회갑기념과 나의 퇴직 및 첫 만남 33년을 기념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1인 5유로씩 추렴하여 맥주와 감자튀김으로 파티를 하고 9시경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10/ 13. 3시 30분 모닝콜. 4시 30분 식사. 5시에 기차를 타기 위해서 파리 노르드역으로 출발하였다. 7시 43분 기차를 타기 위해서 새벽부터 서둘러 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시간의 기차는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다음 것이라도 우선적으로 타도록 해줘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단다. 어쩔 수 없이 2시간 30분을 기다린 끝에 그 유명한 유로스타 8시 7분차를 탔다. 영국과 파리는 또 1시간의 시차가 난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시간으로 (9시 경에 영국 땅으로 진입) 9시 55분에 도착하였다. 영국에서 가장 큰 역 세인드팡크역이다. 날씨는 영국답게 흐리고 유럽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역시 도로는 좁았다. 인구 900만. 넓이는 서울의 15배라고 한다. 영국 기사는 젊고 씩씩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짐은 우리가 얹으 려고 하면 손도 못 대게하고 자기가 직접 실었다. 아이들과 장난도 치는 것이 그래도 보기가 편했다. 영국의 가이드는 인사를 하였는데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지 나도 알 길이 없다. 바바리를 입었는데 잘 어울리는 편이다. 그런데 얼굴이 검고 약간 찡그린 듯한 표정이 풍상에 찌든 것 같고 말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 타워브릿지 런던의 중심가이며 번화한 금융가를 지나서 타워브릿지로 갔다.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며 영국의 대표적인 곳으로 이 다리는 양족으로 올려지는 가동교라고 한다. 1886년 대영제국 시절에 시작하여 1894년에 완공한 다리다. 바로 옆에 기울어져 가는 독특한 모양의 시청사 건물이 있고 길이가 총 298m 되는 국회의사당이 근처에 있다.
★ 국회의사당. 현리 8세의 별궁으로 지은 집인데 아내가 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 2명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 죽였다는데 그 감옥은 테임스 강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리의 9시 뉴스에 영국 특파원들의 단골 배경이었던 곳이다. 다리 건너편에는 금융가가 있다. 다리와 시청사건물, 금융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영국 특파원들이 그곳 소식을 전할 때마다 단골이 되었던 그 유명한 곳이 바로 국회의사당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빵 몇 조각으로 아침 식사를 하였더니 배가 몹시 고팠다. 12시 40분 이탈리안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 버킹검궁. 영궁의 상징이요. 왕의 권위와 존경의 대표적인 곳 버킹검 궁. 영국왕실의 주궁인 이곳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다. 빨간 옷에 까만 털모자를 쓴 근위병은 항상 제자리에 꼼짝도 않고 자리를 지키다가 힘이 들면 제자리 근처를 2사람이 똑 같은 동작으로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움직인다. 교대식이라도 있으면 대단한 구경거리가 될 텐데 아쉽게도 멀리서 움직이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영국에는 지하철이 150년 전에 들어왔다고 한다. 하이동팍과 1900년에 짓고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을 치른 웨스트민스트 성당과 바로 옆에 감리교 총 본산의 건물이 있다. 120년 전에 만든 세계 최초의 우체통과 전화부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넬슨제독이 나폴레옹에 맞서 그를 물리친 인물로 영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2시 30분에서 50분간 머스코시 백화점 쇼핑을 하고 또 점포 정리를 위해 대폭 쎄일을 한다는 유대인 상가쇼핑을 하였다. 마후라 3개를 8만원에 구입하고 나는 열쇠고리 1개에 4유로를 주고 구임했다.
☀ 대영박물관. 역시 도둑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5000년 전 유골이 그대로 전시돼 있고 5400년 전 미이라도 그대로 전시돼 있다. 특히 이집트관에는 유물이 많고 관람 시간도 제일 많이 걸렸다. 미래관, 토기관. 등을 차례로 보았는데 화강암으로 조각된 왕의 석상과 미라를 안치한 20톤이나 되는 석관과 바로상을 보았다. 특히 이집트 상형 문자 해석의 열쇠가 되었으며 기원전 6c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 로제타석은 인상이 깊었다. 위에는 상형문자, 중간에는 민간, 아래는 희랍어로 되어있었다. 그리스 파르테르 신전관은 7만 파운드의 돈을 주고 사온 유물이라고 하였다. 가난하고 무지했던 그리스 사람들이 엄청난 돈 700만 파운드에 유물을 팔아먹고 지금은 후회를 하며 영국을 비난 한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은 우리가 사왔으니까 보존이 되었지 너희들이 그대로 두었으면 이미 다 훼손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큰 소리 친다고 한다. 마지막 관람을 마치고 6시 런던 공항으로 갔다. 차 속에서 김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잘 먹히지를 않았다. 아내는 두어 개 먹고 그대로 넣어 두었다. 7시30분에 출국수속을 완료하고 KE908편으로 게이트 46A.B로 티켓을 끊었다. 현지의 대한 항공 직원 2명이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고 표를 끊어 주는데 낮선 이국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데 친절한 한국 사람을 보니 반갑고 감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대한 항공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10/14. 현지 시간으로 9시 30분 이륙하였다. 10시간 30분소요. 기내식은 비빕밥을 먹었다. 갈 때는 쇠고기를 먹느라고 못 먹어서 아쉬웠는데 참으로 맛있고 깔끔한 비빕밥이었다. 기내 음식으로 세계2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내는 김밥 먹은 것이 잘 못됐는지 비빕밥을 먹고는 조금 있다가 결국은 다 토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에는 야식으로 죽이 나왔다. 아내는 먹지 않는다고 했다가 죽이라도 좀 먹어야지 배가 고프니 먹으라고 권하는 바람에 죽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기내에서 초콜렛을 2상자 각 20,000원씩에 샀다. 3시 50분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갈 때는 12시간이 결렸는데 올 때는 10시간 30분 정도 밖에 안 걸렸다. 갈 때는 자리도 불편하게 느껴지고 힘들었는데 올 때는 너무 상쾌하고 편안하여 기분이 좋았다. 공항버스로 이동하니 편하고 좋지만 한 사람당 11,000원이라는 차비가 좀 쎈 편이다. 지영이가 범계역으로 차를 가지고 나와서 픽업을 해서 아주 편하게 여행을 잘 마치고 귀가할 수 있어서 즐겁고 감사했다. 생전에 한번은 가 봐야 할 곳 유럽. 본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으며 느낀 것 또한 무지하게 많은 난 생 처음으로 해본 긴 여행이었다. 그 풍부한 문화유산으로 가만히 앉아 있어도 고수입이 저절로 보장되는 그 사람들이 한 없이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잘 관리하며 유지하는 그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정신은 개발과 경제 논리로 과감하게 파헤치는 우리들의 무지하고 용감한 행동에 대한 자성과 함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아주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