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군위군 고로면소재지에서 8㎞가량 떨어진 첩첩 산속의 안용아 마을.
고로면과 의흥면을 잇는 지방도에서 비포장도로인 임도를 따라 30여분간
차를 몰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다보면 하늘이 산의 덮개로 착각될 정도의 깊은 계곡이 나온다.
금방이라도 야생동물이 뛰쳐나올 것만 같고 도저히 사람은 살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낯선 사람이 왔다는 반가움에선지 두려움에선지 개 짖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이곳이 전기 없이 살아가는 안용아 마을이다. 마을을 둘러싼 서남산 줄기의 한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주택과 헛간 등 10채의 작은 구조물이 옹기종기 보여 희미한 점으로 보인다.
안용아 마을의 주민수가 원래 4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25년 전까지만 해도 12가구에 30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녀 교육과 생활비 마련이 어렵게 되자 한두 가구씩 떠났다.
지금의 안용아 마을은 30여년 전 우리네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마을과 흡사하다. 흙돌담에다 정지문이 있고 가마솥을 걸어 군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한다.
대문이 없는 탓에 창호지를 바른 문을 열면 개울이 보인다. 아무리 가 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개울에는 1급수에만 사는 버들치가 있고, 긴 세월 을 연상케 하는 둥글둥글한 돌에는 ‘고디’가 까맣게 붙어있다. 산개구리가 될 올챙이도 수없이 많다.
한나절 산에 들어가면 한달은 족히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한 자루나 됨직한 봄나물을 캘 수 있고, 한순간에 더덕과 산 도라지 몇 뿌리 정도는 쉽게 챙길 수 있다.
갈대밭에서 꿩을 잡아 먹는 범을 보고 며칠동안 집 밖을 나오지 못했 다는 얘기, 과수원을 엉망으로 만든 늑대를 잡아 들개인 줄 알고 가마솥에 고아 먹었다는 풍문, 사냥개를 만들기 위해 늑대와 잡종개를 교배시키려 했다는 ‘영웅담’도 전해 내려온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전기가 없어 불을 밝히지 못하는 것보다 음식을 보 관하지 못하는 것이 더 불편하다. 냉장고가 없는 탓에 끼니마다 음식을 만 들어 먹어야 한다. 그래도 겨울은 조금 낫다. 여름이면 하루 세 끼 먹을 반찬을 때마다 만들어야 한다.
고등어를 사면 두어번 소금에 절여놓고, 먹을 때는 쌀 뜨물로 한 나절 간을 빼고 석쇠에 굽는다. 생활용수는 계곡 위쪽에 설치한 자연유화식 청정수로 해결한다.
눈이나 비가 오면 바깥 세상과 단절됐던 산 속의 생활도 10여년 전에 개설한 마을 위쪽의 임도 덕분에 많이 나아졌다. 이 마을에서 8남매를 키워 도회지로 보낸 김태순씨(여·72)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자녀와 손자손녀를 맞이할 준비에 일주일이 금방 지나간다.
김씨는 옛날에는 한달에 한번 정도 의흥이나 고로 5일장에 생필품을 사 러 나가야 했으나, 요즘은 필요한 물품을 자녀들에게 전화로 얘기한다. 6· 25전쟁 이후 무장간첩이 자주 나타나자 국가에서 ‘간첩신고용 전화’를 넣 어준 것을 지금도 고맙게 쓰고 있단다.
지금은 3가구 모두 전화가 있다. 6·25전쟁 이후에도 무장간첩이 자주 나타나 두번씩이나 피신을 했다는 김씨는 매년 겨울이면 공수부대 대원들이 어김없이 훈련을 위해 이곳을 찾 는다고 귀띔했다. 김씨와 이웃에 사는 아들 조씨 집은 신문지 한쪽 크기의 태양전지판으 로 자동차용 배터리를 충전해 자동차 전구로 불을 밝힌다. 배터리로 가동되 는 5인치 TV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하지만 용량이 부족해 인근 수태사에서 구해 온 양초로 불을 밝힐 때가 많고 TV도 가끔 씩만 본다.
도회지로 나간 아들의 권유로 14년 전 처음으로 이곳을 떠나 대구의 아들 집에서 5년동안 있었으나, 적응을 못해 되돌아왔다는 김씨는 “전기만 들어 온다면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며 전기공급을 갈망했다. 몇년 전부터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할 때마다 “곧 전기가 들어 오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 마을 사람들에게선 포기한 모습 이 역력하다.
전기가 없는 안용아 마을에도 두꺼비집이라고 불리는 전기차단기와 계량기, 그리고 냉장고는 있다. 20년 전 3년간 대형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공급할 당시 기름값을 나누기 위해 집집마다 설치했다. 냉장고는 도시로 나간 자녀들이 나중에 전기가 들어올 것에 대비해 마련해 준 것이다.
6년 전 대구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 정착한 이상후씨(67)와 박연남씨(6 3) 부부. 계곡 주변의 몇 마지기에 양식이 될 만큼의 논농사와 소일거리로 깨농사를 짓고 있다.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과 시집간 딸들이 한달에 서너차례 방문 해 생필품도 사다주고 가끔씩 세상구경도 시켜준다.
이 집도 소형 발전기로 불을 밝히고 TV를 통해 세상 구경은 하고 있으나, 요즘은 급등한 기름값 때문에 큰 걱정이다. 처음에는 “우리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데, 가끔씩 찾아오는 손자손녀 때문에 그럴 수 없다”며 자주 발전기를 가동했으나, 한달에 수십만원씩 드 는 기름값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
최근엔 소문을 듣고 찾는 외지인들 때문에 생활에 불편을 느껴 마을 입구에 ‘이곳은 개인 사유지이므로 출입을 통제합니다(출입시 관계자의 허락 을 요함)’이라는 팻말도 세웠다. 외지인들은 눈요깃거리나 신비감 때문에 이곳을 찾지만 마을 사람들은 사생활 침해로 생각한다.
장마철 바깥세상에 자주 나가지 못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마을 사람들은 “우편집배원이 필요한 물건도 사주고 은행이나 농협에 들러 돈도 찾아 준다”고 고마워했다. 산 속이라 바람이 많이 불어 비교적 낮게 지은 안용아 마을 기와집과 슬레이트 지붕 처마 밑에는 진흙으로 만든 벌통이 드문드문 놓여있고 토종벌들이 수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안용아 마을은
4가구 5명의 주민들이 산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오순도순 살고있는 군위군 고로면 학성리 안용아 마을.
마을 입구의 산형 좌우가 용아(龍牙·용의 이빨)와 닮았고 용아의 안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안용아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만 전해져 내려올 뿐 누가 어디서 이곳에 삶터를 일구고 터전을 잡았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늘아래 첫 동네로 손꼽히는 이 마을은 앞뒤, 좌우 모두가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청정 산골로 소문나기보다 경북도내에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몇 안되는 ‘전기없는 마을’로 더 유명하다.
군위군 고로면사무소 주민등록상에는 4가구 5명으로 등재돼 있으나 1가구 노인 한분은 지병을 고치기 위해 도회지에 머물러 지금은 3가구에 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일본에서 살다가 14세 때 광복이 되자 귀국, 15세에 이곳으로 시집 온 뒤 57년째 살고 있는 터줏마님 김태순 할머니(72), 남달리 태어난 곳에 애착이 많은 김씨의 아들 조기호씨(44), 대구에서 살다가 도시가 싫어 6년전 이 곳으로 이사온 이상후씨(67), 박연남씨(63) 부부가 전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탓에 맑은 날에는 태양전지판으로 축적한 자동차용 배터리를 차량용 소형전구와 연결해 불을 밝힌다. 태양전지판이 작동하기 어려운 흐린 날에는 사월 초파일을 지날 무렵 인근 절에서 한아름 가져온 양초로 긴 밤을 밝힌다.
평소에는 고립된 안용아 마을 사람들이 유일하게 외부소식을 듣는 것은 이씨 부부 집에서 휘발유 발전기를 가동해 전원을 연결한 TV를 보는 것.
그러나 기름값이 많이 들어가 최근에는 가동을 중단했다.
전기가 없기 때문에 전기 제품이라고는 자동차 배터리로 잠깐씩 겨우 작동할 수 있는 5인치짜리 흑백 TV와 라디오 뿐이다. 손전등 배터리와 연결한 라디오는 아침에 눈을 뜬 뒤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항상 곁에 두는 가장 친한 친구다.
얼마전 산업자원부가 5가구 이상 마을에는 정부지원금으로 전기를 공급해 주겠다는 방침을 정했지만 이 마을은 1가구가 모자라 대상에서 제외됐다.
군위군과 마을 주민들은 5가구 기준을 맞추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한동안 끝내 이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전깃불을 밝히겠다는 희망은 물거품이 된다. 그래도 전기를 넣겠다면 1억원 가량의 공사비를 주민들이 부담해야 하지만 이 마을 주민들의 형편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지금도 호롱불과 양초 밑에서 온갖 불편을 견디며 생활하고 있는 안용아 마을 주민들이 전깃불을 밝힐 수 있는 그날은 언제쯤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