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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운남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용표(와우정)
1. 백로·왜가리 번식지 터진 1950년에는 총성에 놀란 듯 찾아오지 않았다. 그후 1966년 마을앞 청용산 등 사방 2㎞의 소나무 숲에 백로 2천여수와 왜가리 5백여수, 해오라기 수십수가 찾아들면서 천연 번식지를 이루게 되었다. 장관을 이루곤 하는데, 용연저수지에 조성된 인공섬과 한가롭게 노니는 백로ㆍ왜가리의 모습이 어우러져 더욱 신비를 자아내고 있다. 이곳에는 매년 3~4월 경이면 동남아 지역에서 월동한 백로와 왜가리가 이곳을 찾아와 집단을 이루어 번식하고 10월이면 동남아의 월동지역으로 다시금 남하 이동해 가곤 한다. 늘어나고 있다. 번식지 보호에 힘쓰고 있다. 백로ㆍ왜가리 번식지가 있는 이곳 상동마을은 환경친화마을로 지정되어 자연생태 학습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 362)약 100m 가량 울창한 나무가 일직선으로 울타리처럼 마을 앞을 막아 주고 있다. 달성배씨 입향조인 배회가 이곳에 자리잡고 자손을 번창 시키려 했으나 지운은 좋은데 서해의 해풍이 불어와 가옥은 물론 농작물에 많은 피해를 입어 별다른 방안을 차지 못하던 중 한 나그네가 지나가는 말로 “촌전에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심어 잘 가꾸면 해풍도 막을 수 있으며 자손도 번창하고 마을이 부유해 질 것이라” 일러주었다 한다. 성장해 가면서 자손도 늘고 마을도 번창해 졌으며 해풍도 막아 옥토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나무를 심은 다음 이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지를 꺽거나 잎이나 열매를 따면 중병에 걸린다는 교훈을 남겼는데, 이는 팽나무 열매는 달콤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즐겨 따먹기 마련이므로 이를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나무의 둘레는 평균 3m 이며, 수고는 30m 의 노거수로 팽나무 54주와 느티나무 등 60여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현재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67호로 지정 보호를 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임좌 방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비교적 경사가 급한 지형을 3단으로 잘 정지한 후에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자리하고 있다. 행랑채에 난 중간문을 통과하면 좌측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으며 그 중앙 아래쪽으로는 곡간채가 큰 규모로 건축되어 있다. 안채는 지형의 정지상 바깥마당과는 2단으로 석축을 한 후에 맨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안채와 곡간채, 그리고 행랑채, 대문간 등 4채 만이 남아 있으나 그 이전에는 당시주택건축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동재와 서재가 안채 뒤 후원에 독립적으로 건축되어 있었으며 사당과 사랑채등 많은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흑실3 평(목조와가) 공수산 서원에 세워졌다. 그런데 매년 1월 1일 제사를 지낼 때마다 사람이 한 명씩 호랑이한테 잡혀 먹혀 77년 뒤인 성종 원년(1470)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숙종 15년(1689) 정조 13년(1789) 순조 20년(1820), 고종 29년(1892), 1902년 등 여러 차례 고쳐지었다. 무학당 등은 남아있지 않다. 명륜당 앞에 수령이 약 600년 된 은행나무만이 역사를 전할 뿐,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거의 조선 후기부터 재건된 것들이다. 대성전 안에는 5성과 중국 4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봄.가을로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독립구릉이 다수분포하고 있다. 상봉산(해발 64.1m)은 서쪽으로 내려오면서 해발 47.7m 의 구릉 정상부를 형성하고 다시 서남서쪽으로 떨어지는데 말단부에 이르면 몇 갈래의 가지능선을 형성하며 급격하게 해발 20m 내외의 충적평지로 이어지고 있다. 고분은 해발 35m내외에 위치하는데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구릉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가지구릉이 분지되는 곳으로 고분은 가지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고분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내려오는 구릉의 북서사면에 위치하며 분구에는 다수의 민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평탄부와 북서, 남서, 남동 사면에 분포하며 남동사면 끝자락은 깊게 패인 부분도 있다. 분구의 남동변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분구 끝자락이나 주구에 해당되는 부분히 상당히 깍여나간 것으로 생각되며 분구에 민묘가 조영되면서 일부 변형되었지만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분구의 평면형태는 방향이며 축방향은 북동-남서이다. 규모는 각변 길이 38m 내외이고 높이는 고분이 경사면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점에 따라 다르지만 분구 중앙을 기준으로 하면 5m 정도로 추정된다. 목포대 박물관에서 주변지역에 대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너비 6.1m 깊이 0.73m, 단면형태 U자형에 가까운 주구가 확인되었다. 정자로 영산강과 그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은 곳이다. 그리고 임연의 증손으로 동사회강을 지은 문인 학자인 노촌 임상덕(1683-1710)이 제현과 교류하는 등 무안 몽탄이산리의 나주임씨 강학교류 공간이었다. 무안 이거와 경관, 정자건립 등에 관해서는 1643년에 임연이 지은 복거록에 잘 나타나 있고 교류한 문인도 많다. 식영정은 창건주 임연의 증손인 노촌 임상덕 등 대를 이어가면서 교류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식영정은 측면에서 보면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 정자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정자의 입지나 주변의 경관도 뛰어나다. 현재의 건물은 1900년대 초반에 중건한 건물이다. 서쪽 기슭에 창건하여 고려 고종(1214~1259)조에 시중을 지낸 절효 서릉을 주향으로 하여 9대손인 사암 서식, 사암의 현손이며 예조삼의에 이르렀으나 무오사화(1498) 때 낙향하여 연산하에서 향민을 교화하였던 정암 서암로(1422~?)를 배향하였다. 그러나 오랜 풍우로 인해 퇴비되자 1829년(순조29)에 현재의 반월산 남쪽 기슭으로 옮겨 중건하였다. 그 후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46년에 복설한 것이다. <월산사유허비〉와 삼문 그리고 제실인 모사재(서진영(1688~1744)과 제 서진갑에 의해 건립)가 있다. 배향해오다가 1828년(순조28)에 구암 김충수(1538-?)지암 김약화 추배하였다. 1945년에 사우를 중건하면서 월당 김대경을 주향으로 하였고 그후 김원, 김덕수,김례수, 김지수 등이 환배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81년에 확장 개축한 것이다. 와<<취암김선생사우유허비>가 있다. 제실인 충의제는 원래 동제리에 1982년에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마을 입구에 근년에 세온 비전이 있다. 65대 의상대사사가 건립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원갑사에는 강산사에 대한 현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오래된 절이 무너지자 신도들이 중수하기 위해 돈을 모았는데 목우암의 신도들이 이야기를 듣고 도와 1908년에 다시 세웠다고 쓰여있다. 것으로 볼때 이름이 강산사였다가 원갑사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의종 연간(1131-1162)에 중국 임천사의 스님 원명이 고쳐지었다. 그때 제자 500여명이 찾아와 도를 깨달았다고 하여 산 이름을 승달산이라 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원명 스님이 꿈에 백운산에 있는 총지사에서 소가 한 마리 나와 이 암자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스님이 이것을 이상이 여겨 암자에 가 보니 계속 바위에 소 발자국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발자국을 따라와 절을 지어서 이름을 목우암이라고 불였다고 한다. 한편 원명 스님이 이 암자를 풀을 사용하여 지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하여오고 있다. 승달산은 영산강을 동쪽으로 거느리면서 서쪽으로 서해의 도서들이 수를 놓은 듯 장관을 이루며 정남으로 승달산을 지맥으로 영산강의 수구를 막으면서 우뚝솟았으니 이 산이 노령의 맥을 이은 승달산이다. 무안군의 주봉을 이루고 있으며, 이 산 아래에 노승 지념지기가 있어 이땅에 묘를 쓰면 삼현칠현 판서에 왕비가 배출된다는 호남의 대지가 있다는 옥용자의 쾌담이 유명한 승달산의 중곡에 문수봉을 바라보면서 신비를 가득안고 자리 잡은 목우암은 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원나라의 중 원명이 바다를 건너와 승달산에 택지하고 풀을 엮어 암자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수 없다. 현재 경내에는 법당 및 요사체, 축성각, 석등 부도가 있으며 법당안에 봉안되어 이는 삼존불은 지불로써 현재 지방문화재 자료 제17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무안군에서는 목우암의 목재가 부식되는등 훼손상태가 심하여 지난 97년부터 대웅전, 요사채 등을 전명 개보수 하였다. 조망을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겨울에도 훈훈한 훈풍을 느낄수 있는 명산이다. 이름난 곳이다. 그를 찾아온 제자 500여명이 한꺼번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전설처럼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3천년에 이르도록 문무백관이 탄생한다는 호남의 4패 명혈 중의 제 1의 혈처를 안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더욱 주목받는 산이다. 그 때문인지 3개 대학교가 소재하고 산 곳곳에 무덤들이 유달리 많이 눈에 띈다. 사창리 출신인 전공군 참모총장 옥만호씨가 고향사랑의 실천과 우리 공군의 발전과정을 소개하고 후세들의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250여평의 실내 전시관에는 우주항공분야의 발전상 등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각종 실물, 모형, 사진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방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