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의 가치를 설정한 후 운동(Movement)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일’을 했습니다. 과거 그 운동의 정점을 우리 청소년들의 주체성과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으로 단정 지었습니다. 좋은 이름 붙여야 한다며 근래에는 제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 주창하는 생명(주체성)과 평화(공동체성)라는 이름으로 포장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실천해야 한다며 이런저런 사업들을 무수히 만들어 냈습니다.
주창한 가치의 실천을 임의대로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많은 일들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사회적 지원’이 아닌 단체나 임의 조직적 지원이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일들을 아이들과 소통한다고 우기며 묻기도 전에 목적지를 설정하는 크나큰 우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을 제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호혜적 관계와 소통’이 아니었습니다.
지역사회 공동체성에 대한 부분의 초점을 정책 변화에 두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을 처음 만나며 제 안에서 꿈꾸는 사람들로의 변화를 보기 위해 미친 듯이 이런저런 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뒹굴며 울며불며 무슨 일이건 진행했었습니다. 소진되어 힘들 때도 있었고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나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가끔씩 ‘그만 하렴’이라고 말씀 하시는 그 분의 경고도 무시한 채 무언가 계속해서 저질러 댔습니다. 많은 아이들의 변화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을 위한 삶이라고 우기면서 제안의 빈 가슴을 채우는 활동이기도 했습니다. 제안의 저는 날로 소진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당위성을 부여했습니다. ‘나를 포기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가장 크게 기인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그 마저도 나를 위한 행위였으면서 말입니다.
많은 아이들을 만나오다 고개를 돌려 지역사회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변하는데 지역은 그대로였습니다. 지역이 변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아이들이 힘겨워 진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나름 전문가 그룹 조직하여 지역최초로 청소년인권센터를 개소했습니다. 아이들의 주체성에 기인한 활동의 토대라 믿었습니다. 인권교육하고 전국최초로 청소년인권조례 만들어 제시했으나 전례가 없다는 문제로 반려되기도 했었고 선거 때마다 아이들의 공약이라며 아이들과 토론하여 아이들 이야기와 제이야기 단체 이야기를 교묘히 섞어 제시하며 좋은 후보 나쁜 후보 선정하며 운동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7~8년 전 지역의 모든 피시방·오락실 등을 지역 교사와 태권도협회 관장님들을 조직해 모니터하고 개도하고 잘 못된 것을 지적하며 돌아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년 후 문제 있었던 곳을 다시 가보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참여한 분들의 작은 인식의 변화 이외에는 노력한 만큼의 성과는 그 자리에 남지 않았습니다. 현재 그 조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회가 핵심 소관이었는데 임의적 조직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인 모순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현장감이 있어야 한다며 아이들을 만나며 진실로 사랑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었지만 몇 년이 흐른 후 어느 순간에 아이들의 좋지 못한 행실만을 탓하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지역변화의 초점을 정책에 두고 선거가 있을라 치면 후보자들 모아 토론회를 열고 제안하는 등의 여타 시민운동 진영에서 보이는 행위를 했습니다. 잘못된 교육정책이나 청소년정책 등이 나올라 치면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대응하기도 했습니다. 청소년의 주체성을 살려야 한다며 아이들과 토론하며 아이들의 이름으로 대응하기도 했으나 저희 단체나 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육성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모습이 정말 싫었습니다. 때문에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며 비판의식을 더욱 키워 주었던 것 같습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몇 년이나 진행하며 그 주체성의 핵심이 모호해짐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의 이런저런 모습을 제안에서 해석해 버리는 크나큰 우도 범했습니다.
시민운동진영에서의 이런저런 활동을 진행하며 그들만의 비판이 기독교적 가치관에 맞지 않음을 제 안에서 또 비판했습니다. 청소년단체, 수련시설에서의 연대 활동과 기관운영 등도 했었습니다. ‘청소년’자가 붙어 있지만 아이들이 없는 단체·시설의 자기주장의 괴변에 따른 목적성 상실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3년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사회복지협의회, 사회복지관등 관련 기관과의 다양한 활동을 행하며 사회복지계의 기득권 획득을 위한 기관 이기주의도 싫었습니다. 기관의 성장 목적이 아닌 지역 전체의 대상자 분들의 성장에 맞추어야 한다고 부르짖었지만 정작 제 안의 연대 활동의 성과는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비슷하지만 많이 다른 이런저런 진영의 활동(운동)들이 목적성은 비슷하나 큰 차이를 보았습니다. 차이를 보았다는 표현보다는 제 나름 데로 설정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 합니다.
운동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뜻’을 설정하고 그 ‘뜻’에 의해 사람이 모여 행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세상이 바뀔 것이라 믿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한 내용을 설정하고 바꾸어 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용 채우는 것을 우선해야 하는데 내용을 위해 형식을 너무나 껴안은 관계로 내용이 상실된 활동도 있었습니다. 바꾸고 변화하고 자신이 돌보지 않고 내 달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제 안의 저는 많이도 소진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본질인줄 알았습니다.
휴식이라는 이름으로 가정에서는 아내와 어머니에게 거의 무심하게 보냈습니다.
언론에 써대는 글들도 사회비평적인 부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제안의 저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들이 잘 못되지는 않았나 봅니다. 이유인 즉 최소한 한 선생님께서 전하시려는 뜻을 이해하고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한덕연 선생님께 4일간 가르침을 받으며 제안의 저는 많이도 요동쳤습니다. 복지요결을 읽으며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본질이라 믿었는데 그 본질이후의 이상적 본질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지도력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삶 자체에 녹아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 안의 운동의 본질을 다시 설정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덕연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라는 말 그 이상의 어떤 표현을 전하고 싶지만 단순한 저의 단위구사력이 한계를 느낍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저를 다시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추구했던 목적지 이후의 이세상의 이상적 가치에 대한 실천의 방법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가 없는 행위에 너무나 크게 작용했던 저의 생활과 운동방식의 잘 못됨을 일깨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운동 따라 생활 따로 였던 저를 다시 한 번 반성하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별로 가진 게 없다 생각했던 제가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겸손하다 여겼던 제가 너무나 교만한 자였던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얼마나 나 자신의 개인에 속해서 운동했던 사람이었음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선생님께만 감사의 글을 드리려다가 이곳에서 소통하는 분들과 동역자로서 함께 하기 위해 미천하나마 저를 드러내 보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행하려고 하는 현재 행하는 활동 모두가 그 가치에 맞는 활동이 되도록 체화하고 더욱 기도하고 고민하여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덕연 선생님과 동역자 여러분께 많은 지도와 편달 부탁드립니다.
군산에서 부족하고 부족하고 부족한 정건희 드립니다.
첫댓글 한덕연 선생님의 복지생태학 교실을 참여하며 느낀 제 안의 소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