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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신억불(崇神抑佛),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일본불교
그저께밤, 안라꾸지 츠야도에서는 숙제를 풀지 못해 고심하는 학생과 같은 형국으로
사찰 이름과 달리 전혀 안락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젠콘야도의 간밤은 숙제가 잘 풀려감으로서 신명이 나는 듯한 밤이었다.
남녀를 분리하는 2개의 방이 각기 6명이 정원이라는데 3명이라 여유로운데다 온천욕
까지 한 후라 그런지 편하기도 했고.
젠콘야도의 다다미방 벽에는 묵고간 헨로상들의 88영장 부적(納札)이 도배하듯 빼곡
하게 붙어있고 방명록에는 감사의 글 일색이다.
특히 일본인들은 장문의 수필을 쓴다.
나는 한 줄 이상 할 말이 없는데 하고 싶은 말이 그리도 많은가.
내가 너무 건조한가.
'카모노 유' 젠콘야도(善根宿)는 "加賀城晃氏의 봉사정신에 따른 것입니다"
벽에 붙은 이 집(젠콘야도) 운영자를 소개하는 글이다.
온천은 시영(市營)이고 다다미와 목재, 용품 등의 기증자의 이름도 일일히 밝혔는데
그렇다면 加賀城晃氏의 봉사정신의 실체는?
(9월 5일, 이 아침에 떠날 때 42일 후에 다시 와서 1박하게 될 것을 상상이나 했는가.
88영장을 일주한 후 10월 16일 나홀로 1박하게 될 줄이야)
하룻밤에 만리장성도 쌓는다지만 하룻밤 사이에 말이 필요치 않을 만큼 이심전심의
관계로 업그레이드 된 우리(니시오와 나)는 아침 6시 조금 지나 숙소를 나왔다.
내 다리 사정을 알게 된 니시오는 어제와는 전혀 딴판으로 내게 맞추며 함께 걸었다.
이 사람이 전일의 그 일본 청년 맞나?
믿기지 않게 변화 중인 그에게 헤어질 때까지 선도(先導)를 맡기고 나는 현실 적응에
올인하면 이상적인 동행이인이 되겠다.
남쪽, 누렇게 익어가는 벼 뒤로 산록에 줄지어 들어선 아파트들이 아침을 맞고 있지만
아직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고요하다.
뒤로 시코쿠산맥 연봉 사이로 박혀있는 흰 구름들이 구례 순천 섬진강변, 이충무공이
백의종군 하러 가던 길에서 본 아침 모습을 불러왔다.
용일을 슬로건으로 걸고 걷는 일본 땅의 길에서 정유재란 백의종군 길이 생각나다니.
안타깝게도 나의 한계일 것이다.
코보대사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맑은 계류의 선경에 마음이 끌렸나.
그래서 중생의 안녕을 위해 약사여래상을 조조하고 당우를 지었고.
그는 200m쯤 위 너른 바위에 금강불괴(金剛不壞)라는 호마단(護摩壇/밀교 수행방법
의 하나)을 쌓는 등 17일간 수법(修法)을 하고 당우 앞에는 5색 등나무를 심었다.
'콩고잔 후지이테라(金剛山藤井寺)' 이름이 이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등나무의 개화기
에는 5색꽃이 장관이란다.
액막이 약사(藥師)로 널리 알려진 이 본존은 훗날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코보대사가 창건했는데도 왜 그가 창시한 밀종(密宗) 신곤슈에 속하지 않고
선종(禪宗)인 린자이슈(臨濟宗妙心寺派)일까.
(린자이슈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불교와 병합을 시도했던 종파다)
1573~92년(天正연간)의 병화(兵火)로 소실된 후 1674년(延寶2)에 린자이슈의 난잔
국사(南山國師)가 입산해 재건함으로서 종파가 바뀌게 되었다는 것.
같은 불교라 하지만 즉신성불(卽身成佛)의 밀종(진언종)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선종(임제종)으로 바뀐다는 것은 개종에 버금가는 일인데.
또한, 창건자와 무관한 종단 소속이 되었음에도 시코쿠헨로 88영장의 하나가 된 것을
이해하려면 일본 불교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일본의 불교가 6c에 백제로부터 전래된 것이 사실이라 해도 초석을 쌓은 불교는 8c
초중반, 쇼무천황(聖武/701~756)때 당나라로부터 들어왔다.
9c초, 헤이안 시대(平安時代/794~1185)에는 쿠카이(空海/코보대사)와 사이초(最澄/
767 ~ 822)가 당에서 밀교와 천태종을 들여왔다.
이들은 모두 현세적 성격이 강한 일본토착신앙 신도(神道)와 습합된 형태로 공존했다.
무사들이 지배한 가마쿠라 시대(鎌倉/1192~1333)에는 니치렌종(日蓮宗)을 개창했고
중국에서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曹洞宗)을 수입했다.
메이지 시대(明治/1868~1912)에는 기독교의 추방을 목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보호한
토쿠가와 시대(德川時/1603~1867)와 달리 불교를 신도(神道)와 분리, 배격했다.
소위 '숭신억불(崇神抑佛)' 정책이며 '일본의 국가정체성은 천황' 이라는 이념의 국수
주의는 '폐불훼석(廢佛毁釋)'을 실행했다.
승려들의 결혼과 육식을 허용하고 모든 사찰의 사유화와 세습 등 불교의 비하를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코보대사가 개창했으나 88영장 중에 비록 소수지만 신곤슈 아닌 종파가 있는 까닭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헨로 코로가시
3일째 아침, 후지이테라 경내에 도보 헨로상 몇이 모여들었다.
돈 바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듯 수납(納經)이 시작되는 7시를 기다리는 것 같다.
11번사찰로 오는 도보자는 너나없이 높은 산을 넘을 헨로상들이다(도중하차할 망정)
그래서 모두 아침 일찍 서두를 것이며 아침에 만나는 사람들이 하루의 도보 헨로상의
숫자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해발40m 후지이테라에서 해발700m 쇼산지(燒山寺) 까지의 산길은 옛길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다는 헨로미치(道).
코보대사가 수행중 쉬었다는 유적과 석불, 표석 등이 남아있는 귀중한 헨로길이란다.
바야흐로 그 길 등산이 시작되었다.
첫 안내자는 1번 료젠지에서 88번 오오꾸보지(大窪寺)까지의 미니 영장모형들이다.
곧, 칙칙한 숲길과 포장 임도, 다듬지 않은 풀밭이 번갈으는 길이 고도를 높여간다.
여러 안내판 중에서 유일하게 기분 나쁜 것은 'マムシ'(독사)주의'.
살생금지 교리에 순응해 죽이지 않는데 그런 갸륵한 은덕을 모르고 덤벼드는 무지한
독사에 희생당한 헨로상도 있었겠다.
대사들은 도술로 안전을 도모했을까.
남서로 오르는 후지이테라~쇼산지 13km산길에서 후지이테라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쇼산지가 야금야금 가까워 가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지점에서 젠콘야도에서 간밤을 함께 보낸 팀을 만났다.
해발225m 하야마(端山)휴게소에서는 홀로인 중년여(女)도 만났다.
모두 우리보다 먼저 떠난 이들인데 온천효과인지 내 다리의 아침 사보타쥬(?)가 웬만
해서 가능했을 것이다.
바위틈 옹달샘에 "여기에서 4km앞 류스이안(柳水庵) 까지는 물이 없습니다"
안내판이 작은 친절 같으나 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복음에 다름 아니다.
까미노에서는 마을마다 물 뿐 아니라 순례자에게 필요한 중요품목들 리스트에 OX 로
표시된 대형 간판이 서서 무비유환(無備有患)을 겪지 않도록 안내한다.
시코쿠 헨로가 진정 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까미노에서
많은 벤치마킹(bench marking)을 해야 할 것이다.
9시 반에 해발440m 조토안(長戶庵)을 통과했다.
2시간에 3.2km라면 분발해야 할 저조한 기록이다.
후지이테라에서 6.6km, 쇼산지까지 반절인 해발500m 류스이안(柳水庵) 휴게소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잠시 쉬었다 떠나는 여느 휴게소와 달리 아늑하고 안락한 방이며 멋진 대피소다.
휴게소 또는 대피소 라기 보다 공기 맑고 경관 좋은 심산의 소박한 미니 별장이다.
헨로 코로가시!
헨로상들을 쓰러뜨리는, 굴러 떨어지게 하는, 그로기(groggy)펀치를 먹이는 구간.
그래서 '헨로(遍路) 코로가시(轉がし)'라는 악명이 붙었을 것이며 위험부담이 큰 심산
길이기 때문에 휴게소를 특별하게 꾸며놓았을 것이다.
침구와 충전장치까지 모두 있으며 먹을 것만 있다면 하룻밤 자고 싶을 정도다.
한데도, 양 들머리에 왜 일언반구 없을까.
먹거리를 준비해 가면 1박하기 좋은 곳이라는 안내를 왜 하지 않을까.
나는 대간 정맥들에서도 그랬거니와 별이 총총한 산중의 밤을 선호한다.
금방 쏟아져 온몸을 덮쳐버릴 것 같은 별들의 마력에 이끌려 방안보다 천막,천막보다
통비닐 속에서 자기를 좋아한다.
이런 나를 위해 지인은 통비닐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 천막을 따로 지어주기까지 했다.
내가 만일 이 헨로미치를 다시 걷게 된다면 그 때는 꼭 먹거리를 충분히 준비하고 이
곳에서 묵을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하여 걸으리라.
하산길인 듯 내려갔다가 다시 오른다.
말짱하던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한 안개비에 시야가 없고 칙칙한 숲속의 가파른 오르
내림에는 코로가시의 위험이 배가된다.
해발745m 능선마루의 암자에 올랐다.
후지이테라에서 8.8km인 조렌안(淨蓮庵)이다.
요시노가와시 카모지마초와 묘자이군 가미야마초(名西郡神山町)의 경계를 타던 헨로
미치가 조렌안 부터는 너른 산지 가미야마초의 산길이다.
쇼산지까지 계속되는 능선이면 좋으련만 류스이안 보다 더 많이 내려가 계곡을 건넌
후(다리) 또 다시 오른다.
헨로 코로가시의 위험이 점점 더 커가는 산길이다.
후지이테라 ~ 쇼산지가 없다면 헨로미치도 없다?
쇼산지 1km쯤 전방부터는 완만한 임도지만 시야가 거의 없어 몹시 답답한 길이었다.
코로가시의 위험에서 벗어난 시각은 오후 3시 반.
해발938m 쇼산지산(燒山寺山) 8부능선쯤에 자리잡은 쇼산지.
본당으로 가는 초입에서 도보 헨로상을 환영하고 있다.
'수고많으십니다'(お疲れさまです)
자모관음보살(慈母)을 비롯해 석가여래,문수보살 등등 도열되어 있는 13불을 지나서
시코쿠영장에서 2번째로 높은 산악후다쇼라는 영장에 오후 4시쯤 당도했다.
아침에 하야마휴게소에서 만난 후 앞뒤를 번갈으며 걷던 여인을 다시 만났다.
그녀를 헨로미치의 히로인(heroine)이라고 부른 것은 빈말이 아니다.
젠콘야도에 함께 묵은 젊은 팀은 초장에 포기했는지 끝내 보이지 않고 11번 사찰에서
넘어온 5지 안에 드는 헨로상 중에 홍일점이니까.
이 산에 살며 이따금 신통력으로 마을사람과 농작물에 불을 뿜어 막심한 피해를 주고
있는 이무기(大蛇)가 코보대사의 사찰 건립을 방해하려고 온산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산록의 강에서 몸을 정결히 한 후 진언을 외면서 산에 올라간 대사는 허공장보살(虛
空藏/허공처럼무한한자비를 가진 보살)의 도움으로 이무기를 산정 근처 암굴에 가둠
으로서 화를 없앴다는 전설이 있단다.
'쇼산지'라는 이름도 이에서 비롯되었다는데 지척도 분간할 수 없어 현(縣)의 기념물
이라는 수백년된 거목들의 몸통 외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까미노 프랑스루트는 프랑스땅 생장 피드포르에서 곧바로 해발1.437m 피레네산맥을
넘지만 25km라는 긴 구간이기 때문에 오르내림이 비교적 완만하다.
지속적으로 올랐다가 그렇게 내려가므로 단조롭기는 해도 여기처럼 코로가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라곤 루트도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지대인 피레네산맥의 솜포르트가 1.640m지만
가파르거나 험하지 않고 광대해서 오히려 낭만적이다.
이에 반해 시코쿠시마의 헨로미치는 3일째인 초반에 크게 한방 먹인다.
얕잡아 보지 말라는 경고의 펀치일 것이다.
겨우 50km쯤 지났으며, 헨로미치의 맛을 보는 중인데 큰 한방을 맞고 얼얼한 기분?
백두대간에서 어머니와의 극적인 상봉 체험이 있은 후로는 그림자 처럼 따라다니며
아들을 살펴주시는 어머니를 느낄 수 있다.
'그 분'은 까미노를 비롯하여 일체의 길에서도 절박한 순간들을 극적으로 벗어나도록
스스로 도와주시는 분이지만 불교성지를 걸으면서 손을 내밀거나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바야흐로 현세에서 종교간의 대화, 협조가 다른 어느 시대보다 활발한 것처럼 천상의
머리들 간의 무드(mood)도 그러하다면 부처님의 배려도 남다를까.
헨로코로가시로 불리는 구간이 몇 곳 더 있다는 데.
(완주 후 돌이켜 보면 이 구간이 2번째로 높다 하지만 가장 힘든 구간이다.
헨로코로가시로 불리는 다른 구간들도 산체질인 내게는 부드러운 오솔길인데.
11번~12번 구간이 없다면 헨로미치도 없다?)
에몬 사부로, 동냥은 못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았어야지
쇼산지를 나와서 동동남으로 가는 지루한 내리막 길은 해발440m로 뚝 떨어진 지점의
조신안(杖杉庵)으로 이어진다.
쇼산지 경내에서 1.8km쯤 내려와 있는 번외 영장으로 시코쿠헨로의 원조'에몬사부로
(衛門三郞)'가 생을 마쳤다는 곳에 건립한 암자란다.
마치 예수가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광경과 흡사한 동상도 서있다.
(여기에는 右衛門三朗로 소개하고 유래판에는 衛門三郞이니 어느 쪽이 진짜 이름?)
시코쿠헨로의 아이콘은 코보대사라는 것이 고정관념이 되어 있는데 웬 원조?
궁금증이 발동했다.
탁발승과 구두쇠 부자 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우리나라에도 흔히 있는 전설이다)
탁발승 코보대사가 에히메현(愛媛縣)의 노랭이 부호 에몬사부로의 집에 가서 시주를
부탁했으나 시주는 커녕 빗자루로 대사를 쫓아낸 에몬의 집에 변고가 일어났다.
다음날부터 슬하의 8명 자식이 8일 동안에 첫째부터 차례로 다 죽었다.
사랑하는 자식을 모두 잃고 비탄에 빠졌던 에몬은 비로소 깨닫고 대사에게 사죄하고
악업을 씻기 위해 대사를 찾아나섰다.
시코쿠를 20번을 돌았으나 끝내 만나지 못한 에몬은 역으로 돌면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21번째를 반시계방향으로 도는 중이었다.
그러나 12번영장 쇼산지에서 발병하여 곧 죽게 되었다.
이 때 대사가 나타나 그의 죄를 용서한 후 작은 돌맹이에 에몬의 소원을 써서 에몬의
왼손에 쥐어 주었고 에몬은 곧 눈을 감았다.
대사가 에몬사부로를 매장하고 무덤에 그의 유품 지팡이를 꽂아놓았는데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큰 삼나무로 자라서 이 암자를 '조신안(杖杉庵)'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에몬사부로의 이 순회가 시코쿠순례와 이른바 사카우치(반시계방향 순례)의 효시가
되었기 때문에 시코쿠헨로의 원조라 한다는 것.
에몬사부로의 이야기는 더 있다.
해가 바뀐 후 어느 날 영주의 집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왼주먹을 쥔채 펴지 않았다.
51번 사찰 안요지(安養寺/당시의 이름) 주직이 기도하여 주먹을 펴게 되었는데 이 때
"에몬사부로재래(再來)"라고 씌어진 돌맹이가 손 안에서 나왔다.
안요지가 이시테지(石手寺)로 바뀌게 된 까닭이란다.
에몬 사부로, 동냥은 못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코보대사님, 인과응보 치고는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않고.
부처님의 자비가 이토록 엄중하다면 겁나서 어디 기 한번 제대로 펼 수 있겠습니까.
시주 대신 쇠똥을 주었다가 불벼락을 맞은 노랭이 영감 이야기 등 우리나라에도 있는
유사한 전설들을 접할 때마다 자비는 눈꼽만큼도 없고 빰 한대 맞고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는 형벌만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많다.
축적된 죄과가 워낙 크고 많기 때문이겠지만 자비는 권선징악이라는 통습을 넘어서
악인도 개과천선하도록 보듬는 뜨거운 가슴 아닌가.
죄는 밉지만 죄인은 긍휼히 여기고 구제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작고 적게 벌하고 크게 많이 베풀며 오래 참아야 중생의 제도가 이뤄질 텐데.
병 주고 약 주기 인가.
혹독하게 벌 주고는 환생의 소원은 들어주었으니.(통상적인 룰을 깨고)
알바하기 십상인 애매한 길을 1.5km쯤 더 내려가 우리가 묵기로 한 젠콘야도 스다치
관(館/神山町)에 도착한 시각은 어둑발이 깔리기 시작하는 6시쯤이었다.
잡화 매점으로 젠콘야도와 민슈쿠의 중간쯤이라 할 수 있는 집이다.
도착하자마자 맞게 된 주인영감과 함께 한 일본집 첫 식사는 서로에게 불합격.
어차피 김치 없는 식탁은 진수성찬이라도 내게는 합격권에 들지 못하고 빵만 못하며
최초라 일본식 식사매너가 빵점이었을 것이니까.
젊은 니시오가 내 몫까지 더 먹어주어 오히려 다행이었으며 앞으로 꾸려나갈 내 식사
메뉴의 윤곽이 그려지는 듯 했다.
식사 후 엄청 변한 니시오를 확인하는 작은 듯 하나 큰 사건이 생겼다.
두끼 식사를 포함해 3.000엔이지만 온천욕을 더하면 4.000엔이란다.
온천장은 주인영감이 운전하는 차로 10km쯤 달려야 하는데 니시오가 떼쓰듯 졸랐다.
그저께 7번 주라꾸지에서 8번 쿠마타니지로 가는 길에 이정표에 나타났던 가미야마
(神山)온센인데 증액되는 온천비는 자기가 부담할테니 함께 가자는 일본청년.
그의 마음씀이 고맙고 귀여워 함께 온천을 다녀왔고 그는 내 옷들을 빼앗듯 가져다가
말끔히 세탁까지 완료했다.
어느 새, 우리는 네것 내것의 한계가 없어진 관계가 되었다.
시코쿠헨로 첫번째 수확이며 '용일'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계 속>
카모노 유 젠콘야도(위)와 출발하는 헨로상들에게 인사하는 加賀城晃氏(?/아래)
11번영장 후지이테라 가는 길(위)과 후지이테라(아래)
(구름 타고 하늘로 오른다는 雲龍/본당 천정의 그림/위)
(4월 하순~5월 상순에 활짝 피어 장관을 이룬다는 5색등나무/위)
(납경소)
헨로코로가시(쇼산지 가는 산길/위):와 쇼산지 1km전방~쇼산지(아래)
쇼산지~조신안(위)과 조신안~스다치관(아래)
스다치관 젠콘야도(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