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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늙은이라 그랬을 것이다
이룬 행 열차 안에는 순례자로 보이는 몇 명의 남녀가 있었는데 모두 이룬 역에서 하차했다.
야심한 시각에 내가 전일에 확인해 둔 알베르게(Anzaran지역Lucas de Berroa) 쪽으로 가는
것으로 보아 노르떼 길을 걸으려는 이들로 짐작했는데 잠시 후에 알베르게 앞에서 재회했다.
기뿌스코아 까미노 친구들 협회의 오스삐딸레로(hospitalero)들이 관리하는 알베르게라는데
수리 중?
임시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듯 널따란 맨바닥에 놓여있는 간이침대에서 전야를 보내게 되었다.
풍찬노숙에 비하면 호텔에 다름 아니겠으나 점심 이후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 잠이 올까.
6만명이 넘는 중(中)도시지만 변두리라 그런지 밤11시 전인데도 식당, 매점 모두 문을 닫았다.
큰 바게트(baguette)빵 봉지를 들고 가는 젊은이들에게 빵집을 물었다.
지금쯤 문을 닫았을 것이라며 바게트빵을 두도막 내어 하나를 주고 갔다.
빵값을 주려 했으나 겨우 20센트 안팎이기 때문인지 사양하며.
2015년 5월 7일.
이틀 간의 준비를 마치고 노르떼 길(Camino del Norte/북쪽 길)을 시작하는 날.
새벽같이 모두 떠난 후 나는 우체국(Oficina de Correos)의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09:00?)에
맞춰 느지막이 알베르게를 나섰다.
나바라대학교에서 받은 책들과 앞으로 15일 동안에는 불필요한 물건들을 15일 안에 도착하게
될 라레도(Laredo)로 보내기 위해서.
(저렴한 탁송료로 발송일로부터 15일간 도착지 우체국에서 보관하는 순례자 편의 제공 제도를
활용하면 한결 편한데 IMF의 위협을 받고 있는 스페인의 공공요금이 많이 인상된 듯)
바스크 자치지방(Comunidad Autonoma)의 기뿌스코아 주(Guipuscoa Provincia)에 있으며
프랑스와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비다소아 강(Rio Bidasoa)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룬.
아직도 바스크어(Basque/Euskara어/스페인북부,프랑스남부,피레네산맥주변 바스크인들이
쓰는말)를 쓰고 있으며 옛 바스크 어로 요새화 된 마을(fortified town/防衛都市)을 뜻한단다.
로마제국 때의 작은 마을 오이앗소(Oiasso)의 유적이 있으며 중세에는 나바라와 까스띠야 두
왕국의 계쟁지(係爭地)였으나 지금은 내가 타고 국경을 넘어 온 SNCF와 RENFE가 합류하는
철도 중심지일 뿐 아니라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란다.
순례자여권(일반)을 발급받은 교회(Padres Pasionistas)앞으로 가서 장정을 시작하려 할 때
교회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온 노녀(老女)들이 열렬히 환송한 것은 고마우나 안내를 잘못했다.
그들은 바욘(Bayonne/프랑스)을 들머리로 하여 이룬~비토리아~부르고스에서 프랑스 길에
합류하는 바욘 길(Via de bayona)을 안내한 것.
고의였을 리 없지만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앞에도 뒤에도 걷는 아무도 없는 나홀로 길에서
상당한 시간과 체력을 낭비할 뻔 했다.
도로 보수작업중인 중년남(男)에게 노르떼 길을 물었다.
백지에 길을 그려가며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노 쎄 에스빠뇰, 노 아블로"(no se espanol, no
hablo/스페인어 모르는데요)
바스크어인지 워낙 조금(un pogo)밖에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는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나이를 물어온(꽌또스 아뇨스?) 그.
내 대답(오첸따 이 우노/81)이 떨어지기도 전에 주차중인 자기 차에 나를 태운 그는 어디론가
달리다가 까미노 마커(노란 화살표)가 있는 길 위에 내려주고 돌아갔다.
아마, 늙은이라 그랬을(도움 주었을) 것이다.
서로 부축하며 어렵사리 걷고 있는 노부부에게 노르떼 길을 다시 확인했다.
대형 배낭을 멘 동양 늙은이가 부러운가.
걸음과 달리 또렷한 말로 내 국적과 나이를 물은 그들.
90 넘어 보이는데도 81세라는 나보다 데 바하(de baja /낮다)란다.
그들도 내가 늙은이라 자상하게 길을 안내했겠지만 얼마나 알아들었겠는가.
크레덴시알(Credencial)을 발부하던 신부도 그랬다.
안내문과 달리 문잠긴 교회 앞에서 기다려(마냥 기다릴 수 없는지 젊은 한쌍은 떠나고) 기어코
만난 신부는 자기의 짐작 보다 엄청 늙은 동양 영감 앞에 지도를 펴놓고 자상하게 설명했으나
알아들은 것이 몇 %나 되겠는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내 삶의 요약
북쪽 하이스키벨(jaizkibel)산 중턱에 자리해 유난히 시선을 끌어가는 과달루뻐 예배당(Ermita
Guadalupe)을 조준하고 편편한 길을 걷는데 어디쯤에선지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이룬에서 온다리비아(Hondaribia)로.
오름이 시작되고 산띠아고 예배당(Ermita Santiago) 이후의 까미노는 과달루뻬 예배당 까지
가파른 등산로에 다름 아니지만 올라서면 일품 시야가 전개된다.
동남쪽 부터 반시계방향으로 눈을 주면 국경을 이루며 칭구디 만(Bahia de Txingudi / Baie
de Chingoudy)에 합류하는 비다소아 강이 마치 푸른 구렁이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
건너편 프랑스 땅 엉데(Hendaye)도 지호지간 처럼 보이고.
관광객 무리가 차도(GI3440)를 통해 올라와 있고 승용차들도 적잖이 오르내리고 있는 명소.
눈요기를 마친 후 벤치에 앉아 쉬면서 배낭 안의 오카리나(ocarina)를 꺼냈다.
무료하거나 절박할 때, 감동적이거나 간절할 때는 늘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콧노래로 부르는데 오카리나로 대체하려고 짐이 되는데도 챙겨와 최초로 부른 것.
놀라운 은혜! (Amazing grace!)
얼마나 감미로운 소리인가 (how sweet the sound,)
나 처럼 불쌍한 사람을 구해 주셨네! (That saved a wretch like me!)
한 때 길을 잃었으나, 지금은 인도해 주시고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한 때는 장님이었으나, 이제는 나 보게 되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후략>
가사는 영국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존 뉴턴(John Newton/1725-1807)신부의 자전적
시(詩)지만 내 삶의 요약인 듯 하여 애송, 애창한다.
또한, 작곡자 미상의 기독교 찬송가로 신.구교 모두 애창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 흑인 여성가수
마헬리아 잭슨(Mahalia Jackson/1911~1972)의 열창으로 더욱 유명해진 노래다.
(천리길에는 눈섭도 짐이 된다는데 도자기(陶瓷器)라 꽤 무거운데도 지니고 만리 머나
먼 길을 걸으며 절박하거나 긴절할 때 마다 연주했건만 이 오카리나 마저 도둑맞았다)
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는가.
조금 떨어진 벤치에 우아한 여인과 짝하여 앉아있던 중년남(男)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자기도 이 노래를 안다며 크리스천이냐고 물은(그들에게 크리스천은 가톨릭 교인) 그도 동양
영감의 국적과 나이가 궁금했는가.
대부분이 묻기를 치노?(Chino/중국) 또는 하폰?(Japon/일본)이라 하는데 이 사람은 데 돈데
(de donde/어디에서)?
전(2011년)에도 전자처럼 물어오는 자들에게 나의 응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후자에게는
양털 같이 부드러웠다.
무지 무식하고 매너(manner) 없는 자들에게 갖출 예의는 없으나 예의 바른 이에게는 예의로
응대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 아닌가.
고백하건대 한. 중. 일. 3국인은 당사자인 나도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겪으며 반일, 항일, 혐일의 정서가 응고되어 있는 내가 일본인으로 보이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용일(容日)하지 않고는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일본의 1.200km시코쿠헨로를 작년에 걸었으므로
이미 용일은 한 것(메뉴 <시코쿠헨로> 3번글 참조)이지만 일본인으로 취급되는 것만은.
'꼬레아'라는 내 대답에 수르(sur/남쪽)?
분단 현실을 알고 있으며 북쪽(Norte)은 올 수 없음도 안다는 뜻이 담긴 물음이다.
끌라로(claro/물론)에 세울(seul/서울)?
한국을 조금 알고 있다는 그는 묻기를 끝내고 한 가지 요구를 해왔다.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자기 짝(우아한여인)이 함께 촬영을 원하는데 그리 해주겠는가"인 듯.
조건부(?) 승낙을 하고 칭구디 만을 배경으로 그녀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조건이란 e-mail로 내게도 보내주는 것이었는데 약속을 지킬 사람으로 보였건만 내 메일함에
그의 메일은 아직껏 도착하지 않았다.
내 디카에도 담았으나 나는 그 사진이 포함된 3.954 컷의 사진 메모리 칩(4GB 2개)과 까미노
5개월 간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배낭을 도둑맞았다.
그래서, 프랑스인을 제외한(이유는 다음 기회에 밝히겠다) 많은 나라의 무수한 남녀 노청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보내줄 사진이 없어졌고 유감을 알릴 주소(e-mail)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인데 이 사람도 나와
유사한 처지가 되었는가.
도니바네의 알베르게 산따 아나
해발 521m 하이스키벨 산 허리를 서쪽으로 돌아가는 노르떼 길은 임도처럼 나있다.
완만한 오르내림이 계속되며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 길이다.
좀처럼 물을 마시지 않는 체질(?)이라 준비하지 않았는데 더운 한낮에 올라왔기 때문인가.
길 왼쪽 가장자리에 서서 약간의 갈증을 느끼게 하는 아구아(agua/물) 50m(?) 안내판.
남쪽 사면으로 난 유도판(화살표)을 따라 내려갔으나 허탕쳤다.
목장지역인지 가축용(?) 물탱크 안에 오염된 물만 가득할 뿐 가도가도 없는 마실 물.
갈증만 더해 가는데 다행히도 얼마 가지 않아 물이 나왔다.
북쪽의 높은 사면에서 호스를 통해 쏟아지며 목마른 나그네들을 기다리고 있는 시원한 물.
사이클리스트들(cyclists)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이기도 한 듯 서쪽 아래에서 자전거 타고 아스
팙트 길을 올라온 이들이 마시고 갔다.
아랫마을에서 올라온 듯 차를 몰고 와서 길어가기도 했다.
간밤에 얻은 바게트빵 남은 것을 먹으며 잠시 쉬고 물을 실컷 마신 후 걷기를 계속했다.
지근에 알베르게가 있다는 안내판이 있으나 아무 데도 없는 알베르게.
마감하기는 아직 이르며 크레덴시알을 받을 때 신부가 소개한 오스삐딸(Hospital) 산따 아나
를 겨냥해 가고 있으므로 개의치 않았으나 늦은 시각이라면 낭패 아닌가.
까미노는 헷갈리는 갈림길이 있기는 하나 무난한 내리막 포장도로다.
멀지 않은 발치에 검푸른 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스까야 만(Golfo de Vizcaya)의 빠사이야 하구(Ria de Pasaia)일 것이다.
노르떼 길 첫날의 안식처인 산따 아나(Santa Ana) 알베르게가 있는 빠사이 도니바네(Pasai
Donibane/Pasaia San Juan)도 멀지 않았음을 뜻한다.
과달루뻬에서 하이스키벨 산 정상을 거쳐가는 길과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로 나뉘었던 까미노
노르떼 길이 합류한 후 곧 빠사이 도니바네 까지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
레소(lezo)를 거쳐 가는 길과 직행하는 길로.
하나의 건물인 예배당(Ermita de Santa Ana)과 2010년에 오픈했다는 작은 오스삐딸.
도나띠보(donativo / 기부금)로 운영하는 18c의 건물 산따 아나는 주방(cocina)이 없는 것이
흠일 뿐 경관만은 내가 묵은 무수한 알베르게(albergue/hospital) 중 최고.
양안(兩岸)의 저쪽이며 지호지간(200m?)인 빠사이 산 뻬드로((Pasai San Pedro)가 앙상블
(ensemble)을 이루고 있다.
조금 큰 선박에 강폭이 꽉 차는 듯 하지만 대서양을 향해 무시로 드나드는 요트와 소형 어선에
조정경기 연습까지 짙푸른 수면 위에 쉴 새 없는 하얀 파문.
오스삐딸레라(hospitalera)도 자기네에게 최고령 뻬레그리노라며 가장 편한 잠자리로 안내한,
어른 공대하는 맘씨 고운 여인이다.
빠리에서 받은 귀한 선물이라는 부언을 달아 조금 준 간식거리에 대한 답례?
응접실에서 비노(vino/와인) 한 잔이 나를 기다리고 있단다.
비노는 미끼(?)였고 60대 남 둘이 나를 맞았다.
오스삐딸레라와의 관계는 모르겠으나 동양 할아버지에 관심이 많은 그들.
81살에도 큰 배낭을 메고 걷는다는 것이 불가사의(misterio)라며 비법(secreto)이 뭐냔다.
비노를 계속해서 마시려면 내 귀한 간식이 더 나와야 할 판.
말은 안해도 더 먹고 싶어 하는 그들로 보였으니까.
그러나 귀한 선물을 더 내놓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말이 달려 대충 끝내고 마을로 내려갔다.
단식(금식)을 하지 않는다면 나가서 저녁식사를 하거나 완제품 먹거리를 사와야 하기 때문에.
하이스키벨 산 서쪽 사면의 하구에 형성된 인구 2.400여명의 어촌 빠사이 도니바네.
남북으로 난 단 하나의 해안로(street/calle) 한 쪽에 들어선 아름다운 마을.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1802~1885)가 반해서 한동안 머물었다 할 만큼이다.
19c인 그 때는 오늘날 보다 덜 인위적(人爲的)이어서 더 자연스러운 미(美) 였을 것이다.
길이 끝나는 지점 까지 거닐며 샌드위치를 안주로 맥주도 마셨다.
막다른 길을 가고오며 들러서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붐비는 빠르(Bar)라 지체, 정체가 심한데
이 많은 사람이 어데서 왔는가.
조금 전에 갈 때 보다 더 늘어났다.
산띠아고 광장(Plaza de Santiago)의 3면을 둘러싼(바다쪽제외) 노천 빠르의 식탁 의자들이
사람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하긴, 스페인의 저녁시간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거리로, 음식점으로 몰려 나오니까.
아주 힘겨운 작업을 시작했다.
필요한 모든 것을 다카에 담았으며 보완적인 것은 가이드 북에 메모했는데 이 모두가 사라져
버렸고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을 퍼즐 맞추듯 하려니.
가끔 스마트폰에 담아놓은 사진이 있기는 하나 기억을 살리는데는 지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앞뒤(순서)가 바뀌고 이름과 연대가 틀리는 경우가 흔하지 않을 런지. <계 속>
과달루뻬 예배당 뜰에서 보는 칭구디만(위)
빠사이 도니바네(아래)
첫댓글 감동입니다, 선배님. 저도 카메라 분실의 아픔이 있는데 본 카메라, 디카, 휴대폰 3가지가 있어서 다행히 영패는 면했지요. 중간 중간에 피씨방에 가서 메일이나 카페로 올리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