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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작년에 발표된 것인데 다시 한번 여기에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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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가서스(아제르바이쟌, 그루지아, 아르메니아)여행기
2009. 10. 7.~16일까지 10일간 코카서스 3개국을 여행하였다. 짧은 기간에 참으로 주마간산(走馬看山)의 여정이었다.
코카서스지방 또는 코카서스산맥이라 하면 아직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안개 속 같은 곳이다. 알프스, 록키, 피레네, 천산, 안데스, 우랄 등 많은 산맥에 대해서는 일가견들이 있지만, 흑해와 카스피해를 연결하는 1,100km가 넘는 코카서스산맥에 대해서는 막연하다.
나는 1957년 고등학교시절 지리 선생님의 설명으로, 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눈이 푸르고 코가 높으며, 미남 미녀에 장수를 하는 인종이라는 사실을 꿈같이 오래 마음에 지녀왔다. 2003년부터 이 지방을 여행하려고 시도해왔었는데 이상하게도 매년 어떤 사유로 시기를 놓쳐서 겨우 이제야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시간적으로도 참 긴 여로라 하겠다.
6·25동란을 통해서 쓰딸린 원수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되었다. 북한군이 남침을 하자 학교며 공공기관과 시장거리 어디나 항상 쓰딸린과 김일성 초상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우리보고 미제 앞잡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평소 이승만대통령사진 옆에 미국대통령사진이 걸린 경우는 보지를 못했다. 작은 키의 콤푸렉스로 항상 긴 장화를 신는 난장이며, 고공공포증이 심해서 비행기가 아닌 기차로만 여행을 하던 Yosef Stalin의 공산당은 세계는 물론, 우리의 어린 시절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스탈린동지가 1953. 3.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바로 그 때 죽었다. 이때 동아일보에 며칠간 그의 생애에 대하여 연재가 되었었다. 거기서 그가 그루지아인이라는 사실, 그루지아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멋진 단어로 기억이 되고, 거기에 그의 아내 사진이 실렸는데 무척 미인이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50년이 넘어서 이번 여행에 그 그루지아가 포함이 된 것이다.
코카서스산맥의 남쪽, 흑해와 카스피호수 사이에 아제르바이쟌, 그루지아, 아르메니아가 있다. 50년 전부터 들어왔고, 가 보아야지 하고 7년을 벼른 곳이다.
내가 여행을 하던 중, 한번은 땅덩어리가 큰 나라의 서쪽 지방에서도 아주 변방 산촌에 사는 노파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한국’이라 하니 곰곰이 머리를 갸웃거리다 알아서인지 모르는지 ‘기타 국가로군’하면서 무슨 족이냐 하던 기억이 난다. 묘족, 장족, 이족, 백족 하는 어떤 종족이겠거니 하는 말이다. 그녀의 세상에는 그런 족만 보아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여행한 나라야말로 세계에서 보면, 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저 ‘기타 국가’에 지나지 않는 국가들이다. 우리 남한보다도 작은 면적들이고, 세 나라를 합쳐도 우리 수도권 인구보다 작은 인구다. 그러나 문명사로는 우리나라처럼, 곰삭은 간장독 같은 귀중한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은 기원전에 고도의 문명을 유지하고 그 유적이 지금도 간직되어 있으며, 중세이후에는 천산북로를 통한 실크로드의 교역로이기도 하였다. 기후는 산맥으로 북풍이 막혀 습윤한 아열대 내지 온대기후라 물산이 풍족하니 지상 낙원이 여기라고 했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주변에 동로마제국, 페르시아제국, 몽고제국, 오토만터키제국, 러시아제국과 소련 공산당 등, 강대국가에 둘러 싸여서 수시로 간섭을 받아 한시도 편안할 틈이 없었고, 자체 내적으로는 서로 다른 인종과 종교로 갈등이 심해서 시달리고 쪼들린 짠지 꼴이 되었으나 한편으로 강인한 독자적 자존심을 지녀오고 있다.
현재 세 나라의 국경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하게 갈려있다. 심지어는 지역갈등문제로 쏘련공산당에 진정을 하면 레닌이 국경을 이렇게 하라며 땅에 금을 그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국가 안에 인종이나 종교가 다른 반정부 지역이 있어 다른 나라에서 견제를 하니 세 나라 사이가 원활치 않고 불안의 씨앗이 상존한다.
2009. 10. 7.(수) 12:50출발한 러시아 항공Aeroplot기가, 모스코바 공항에 사뿐히 착륙을 한다. 하기는 러시아 조종사들의 이, 착륙하는 기술은 어느 나라보다도 뛰어나다. 항공기 승무원이 조금은 미소를 짓고, 공항관리들도 한결 부드러워진 모습이 무척 안도감을 준다.
우리나라와는 5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9시가 넘게 걸려 도착한 모스코바는 막 저녁 무렵이다. 모스코바의 공항은 원래 비좁은데다가 재배치 공사가 한창이어서 환승할 2시간동안도 어디가 앉아 대기할 곳이 없어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런데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공개된 흡연공간이 공항 내에 여기저기 있어 러시아답게 세계기류에 무척 무뎌 보인다.
여행사에서 모집한 20명의 단체여행이다 보니, 100나라를 넘게 여행하였다는 75세 노인들부터, 비즈니스 석으로 여행하는 돈 많고 수다스러운 귀부인 네들, 이 여행사를 통해서 남미와 그린랜드 여행에도 함께 갔었다며 가이드의 환심을 독차지하려는 축에다, 남편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여성들 틈에 끼어서 가자니 여간 거북스런 자리가 아니다.
돈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여행 가방이 다르다. 커다란 알루미늄 케이스나 하드 팩들의 위엄이, 나의 조그만 보퉁이 같은 것과는 벌써 다르다. 그렇게 큰 가방을 갖고는 개별여행을 하기는 어렵다. 특히 돈에 대해서 열세를 느끼니 독자여행으로 많은 나라에서 동적인 관광을 하였다는 허세로 꿀림을 면할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쟌 러시아항공편으로 환승하고 3시간을 가서 아제르바이쟌의 수도 바쿠에 도착하니 자정 무렵이다. 입국 수속이 소잡하나 큰 불편은 없다.
바 쿠 시 와 바 이 칼 호 수
1991. 10.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19세기 후반 카스피해 서안, 바쿠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북해유전과 버금가는 산유국으로 국부가 큰 나라다. 마르코 폴로가 이미 이 지역에는 꺼지지 않는 불과 검은 물이 있고 사람들은 이 물로 위장병을 치료한다는 기록을 했다며, 한 때는 노벨도 이곳 유전에 투자를 했었다고 한다.
수도 바쿠에는 여기저기 석유를 퍼내는 광구를 쉽게 볼 수가 있다. 또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정유사에 근무한다. 남녀 시민들은 주로 위아래 검은 옷을 입고 생활하는데 턱에 수염이 짙고 자잘하여 보기에도 투르크인답다. 도시 중심지에는 재건축을 하는 모습이 보이나 주변에는 아직도 빈민가 모습이 많고, 부자나라면서도 어딘지 꼭 ‘흥부 여편네 비단옷 입기’ 같은 인상이다.
바쿠는 1백 7십만의 인구도시다. 바쿠란 페르시아어의 ‘바트구베’ 즉 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메이든 타워와 시르반 샤스 궁전이 포함된 구 시가지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라 하는데, 29m 높이의 메이든 타워는 7, 8세기에 지어진 구시가지 성안에 방어용 탑이라거니, 또는 전망대라느니, 조로아스터 사원이라느니 해석이 분분하다.
쉬르반 샤스 궁전은 아제르바이쟌을 통치하던 15세기 쉬르반 샤스 I세가 세운 궁전으로 아제르 건축미를 갖춘 곳이라 하는데, 내가 보기에 넓은 땅을 두고 왜 궁전을 궁핍하게 오르내리고 꼬불꼬불 지었는지 의아하다. 물론 기후나 습도 등을 고려해서 더 잘 알아서 했겠지만.
카펫 박물관에는 독특한 아제리 카펫이 1000점 이상 전시된 곳인데, 디자인이 다양하고 독특해 보이나 그 이상의 감식안은 없으니 잘 모르겠다.
바쿠 시내에도 중세부터 상인들이 드나들던 Caravansara가 마주하여 두 곳이나 있고, 지금은 식당이나 상점들로 사용이 되는데 우리가 간 때에는 마침 어떤 음악연주회가 열리고 있어서 가외의 구경이 되었다.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는 199l년 독립을 투쟁하다 사망한 애국인사들을 기리는 꺼지지 않는 기념비가 서있고, 그 옆으로는 영정과 인적사항을 일일이 돌에 부각시켰는데 공교롭게도 내 생일날 모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코부스탄(Qobustan)은 바쿠로부터 남쪽으로 60km에 위치한 아주 을씨년스런 마을이다. 카스피해로부터 부는 바람에 먼지가 쌓여 무엇으로 생업을 하는지 죽음의 마을처럼 보였다. 마을 뒤편으로 5km 올라가면 암벽이 쌓여있는데 여기에 1만2천 년 전 석기시대에 유적인 암각화가 6천점이상 있다한다.
석기내지 청동기시절에는 지금의 카스피해 해수높이가 암벽가까이 다다르고 원시인들은 이 앞에서 가축을 기르며 살았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때에 비하면 해수가 80m는 낮게 줄었다고 한다.
많은 호텔이 헐어지고 재건축 중이라, 궁색하게 골목으로 굽어 들어가는, 그러나 방은 초대형으로 크고 깨끗한 Anatolia Hotel에서 묵었다. 이곳은 대사관저가 밀집한 지역이라 경찰초소가 코너마다 있고 수시로 순찰을 돈다. 전국에 이 나라 대통령 초상화가 태국 왕의 그 것만큼이나 거리에 많이 세워져 있고, 경찰도 시내에 많이 깔려있어서 무언가 시사되는 바가 있다.
10. 9일은 쉐키를 보고 그루지아로 넘어가는 날이다. 새벽 6시에 아침을 먹고 7시간 걸리는 400km거리의 쉐키를 향해서 버스가 떠났다. 길 도중에 먼동이 트더니 카스피호수에 붉은 해가 장엄하게 떠오른다.
자연의 조화는 참으로 기막히다. 석유가 길거리로 펑펑 넘쳐나는 동부지방은 흙먼지 바람에 초목이 못 견디고 황량한 사막 같더니, 서부고지로 가면서는 비옥한 토질에 벌판이 윤택하다. 목축을 하고, 곡식이 익고, 과일이 풍부하며, 수목에는 단풍이 들어 먼 설산을 배경으로 아주 싱싱한 자연을 보게 된다.
쉐키는 2,500년 전에 이미 인류가 정착하여 남 코카서스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였으며, 18~19세기에는 카라반 숙소로 활발하게 운용되던 요충지로 지금은 63,000의 인구를 갖고 있다. 카라반들이 바쿠나, 트빌리시, 터기 등으로 오고 가는 교차지였다.
이곳의 Caravansaray는 옛 모습 그대로 여행객들의 숙소로 활용되어오고 있고 식당이나 공예품, 실크 등의 관광물품 상점이 들어있어 잘 보존된 상태다.
옛날 대상의 숙소 외관과 내부 식당
조금 올라가면 1760년대에 축조된 왕의 궁전 Khan's Palace가 있다. 궁전은 조그맣고 단정한 2층의 건물이지만 내부에 들어가서 보면 기하학적으로 모자이크된 스테인 글래스나 내부 장치가 화려하다. 지역에서는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관리하여 입장할 때는 덧신을 신게 하고, 영어를 하는 안내원이 직접 안내를 한다.
그루지아 차를 타고 잠이 들어 2시간 쯤 더 가니 그루지아와의 라고데키 국경이 나온다. 그루지아는 우리와 비자면제협정이 맺어진 나라지만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그들 서류에는 비자면제국으로 South Korea라 되어있는데 우리의 여권은 Republic of Korea로 되어있어 이것이 South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30분 이상 국경통과가 지연이 되었다.
2시간은 더 가야 수도 트빌리시에 도달한다는데, 도중에 예약된 농촌민가에서, 국경에서 지연되고 하여 늦게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민속의 붉은 옷을 입고 칼을 찬 4명의 장년들이 식탁 상석에 앉아, 오늘은 자기들이 테이블 마스터 라하며 포도주도 자기가 건배할 때에만 따라 마시라 한다. 이것이 이 지방의 풍속이다.
그들은 악기에 맞추어 민속악을 4중창으로 하는데 아주 명품이었다. 노래를 마칠 때 마다 마스터가 건배를 제의하고 자못 흥취가 도는 저녁 식탁이었다. 직접 딴 꿀과 포도주, 그리고 그들 노래 CD를 판매하기도 한다. 밤 10시가 넘어서 트빌리시에 도착하고 Sheraton Metechi Palace 호텔에 들었다.
고대사에 이름이 등장한 이 나라는 309년 아르메니아에 이어 두 번째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다. 그렇지만 역시 역사적으로 페르샤제국, 로마제국, 몽고제국, 투르크,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에 항상 침략과 시달림을 받는다. 그루지아 출신인 스탈린과, 그 후 그루지아 공산당 제1서기인 세바르드나제 시절에도 지역적인 특별혜택보다는 박해를 받았다. 역사야 복잡하지만 1992년 지금의 그루지아로 독립을 하였다.
세바르드나제가 나왔으니-, 그는 1995년 이 나라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서 독재를 하다 오렌진지 옐로인지 시민 혁명으로 물러났다고 한다. 그런데 세바르드나제라는 인물은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고르바쵸프의 통치시절 그는 쏘련 외무상으로, 88올림픽 2년 후에 한국에 와서 한·쏘 국교 수립협정에 서명을 한 장본인이다.
그루자아(Georgia)라는 발음은 러시아인들이 부르던 발음이라 한다. 우리가 들은 바로는, 그들은 자기나라를 ‘죠르지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죠르지아에 있는 성소형태를 크게보면 동방정교라 하겠지만, 유대교, 회교, 천주교, 기독교 등이 함께 어울려 있는, 별도의 기독교로 보인다.
이 나라에는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산재해 있다. 공산당시절 금지되고, 파괴된 이 정신수련장이, 독립이 되자 제일 먼저 복구되었다. 독립이라는 시대적인 변화가 생기면 사람들은 전통을 잊고 새 질서를 찾기 십상이나 시민들은 물질적인 풍요와 사치에 한눈을 팔기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옷을 단정히 하고 성소에 와서 잊은 시절을 돌아보며 마음을 경건히 다스리고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들이 참으로 아름답고 역시 문화민족이구나, 감탄하게 된다.
문득 이런 비유가 떠오른다. 옛날 시골 농촌에서는 채마밭에 울타리를 치고 닭을 놔먹였다. 닭에게도 어떤 경계가 있지만 암탉은 울밑에서 갸웃갸웃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울을 넘어간다. 물론 다른 집 수탉이 저쪽에서 홰를 치고 있다. 우리는, ‘그럴 수 있지’ 라며 자유에 절제가 없고, ‘나는 민주요 남은 모두 독재’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독단이 만연한다. 긴장과 절제가 없이 정신적인 허영과 나태의 늪으로만 뛰어드는 우리 사회가 대비되니 서글픈 마음이 든다.
10. 10(토) 한 때는 이 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던 Mtskheta는 트빌리시에서 불과 27km 떨어진 곳으로 종교적 상징의 중심지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Sveti-Tskhoveli 성당이 있다. 성 니노가 예수의 옷을 가져다 숨겼다는 전설이 있어 매우 신성시한다고 한다. 여기서 강 건너 산위에는 Jvari교회가 있는데 역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된 곳이라 한다. 6세기말에 건축되고 조르지아인들에게는 성소 중에 성소로 여긴다고 한다.
쯔바리 교회
북서쪽으로 고리를 향해 가는 길은 높다란 버드나무 숲이 벌판에 널려있고 그 사이사이 한적한 마을이 아름답게 벌려있으며 교통량이 빈번하다. 가다가 보니 작년 남 오세티아 문제로 러시아와 무력충돌 시 유입된 난민들을 수용하는 조립된 주택 마을이 자주 보인다.
고리는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인 스탈린의 고향마을이다. 스탈린 박물관에서 가이드가, 얄타에서 쳐칠, 루즈벨트, 스탈린이 회담을 하고 찍은 사진을 놓고 난쟁이 스탈린이 의자를 어떻게 특수제작해서 앉았는지 긴 장화를 신은 발을 어찌했는지 설명하는 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며, 나는 50년 전 신문에서 본 그의 둘째 아내 사진이 혹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허릴 없는 일이었다.
고리에서 1시간쯤 더 가면, Uplistsikhe(우풀리스치케)라는, BC1천 년경 청동기시대부터 조성된 거대한 동굴도시가 있는데, 조르지아가 기독교국가로 되기 전에는 순례자들의 중심요새였으며, 실크로드의 경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총 연장 208km의 군사도로는, 트빌리시에서 Great Caucasus를 통해서 러시아의 북 오세티아로 가는 환상적인 옛날부터의 통로를, 19세기에 새로 조성한 길이다. 우리는 카즈베기를 가려고 이 길로 들어섰다. 청명한 햇볕에 아름답게 단풍이 든 가로수 길을 달린다. 마을과 산에도 노란 단풍이 눈을 뜰 수 없게 아름답다. 환성과 감탄을 하며 멀리 5,050m의 카즈벡 설산을 바라본다.
하늘은 한없이 푸르고 흰 구름은 더욱 희다. 스키장이 있는 구다우리에 다다르기 위해서 급한 경사를 구불구불 버스가 오른다. 사람들은 버스에서 경사 밑의 장관을 보려고 한쪽 자리로 몰린다. 나는 버스무게가 한쪽으로 몰려 옆으로 구를 것만 같아 홀로 이쪽 좌석에서 힘을 주고 앉아있다. 진땀을 흘리며 구다우리 스키장 마을에 도착해서 숙박을 했다.
10. 11.(일) 카즈베기 마을을 향해서 도시락을 싸들고 아침 일찍 떠난다. 4km정도 가서 고도 2,380m의 Jvari고개를 넘으니 2차 대전 때 독일 포로들이 만들었다는 겨울통로인 인공터널이 길옆에 보인다. 많이 죽었고 그 묘지가 길가에 있다. 전쟁은 총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카즈베기 마을은 러시아 국경과 수마일 떨어진 코카서스 산 속의 매력적이고 편안한 농촌이다. 카즈베기라는 유명한 소설가의 출생지이기도 하지만 이 마을이름은 러시아인들이 만들었다고 해서 지금은 St. Stephansminda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2170m의 Tsminda Sameba언덕에 세워진, 14세기 성 삼위일체 교회인 Gergeti교회로 4륜구동의 지프차를 타고 오른다. 코카서스의 제3봉인 카즈벡 산(5,047km)은 불행히도 구름에 쌓여 고봉을 볼 수가 없지만 설산의 웅장한 자태가 가슴을 탁 트게 하니 모두 심호흡을 한다. 교회 바로 아래에 맑은 샘이 철철 흐르고 한 입 마시니 속이 후련해진다.
카즈벡산은,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제우스가 이 바위산에 그를 쇠사슬로 묶어놓고, 낮이면 까마귀로 하여금 그의 간장을 쪼아 먹게 하고, 밤이면 회복시켜 다시 낮에 고통을 당하도록 하는 그리스 신화의 장소다.
돌아오는 길에, 먼 설산과 저 아래로 단풍진 평원을 바라보면서 평평한 언덕의 풀밭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고 있자니, 이 먼 코카서스까지 경영하고 있던 당시 그리스인의 우주관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진다.
웅장한 카즈베기 설산
귀로에 트빌리시에서 66km지점에 아나우리 성이 있고 그 앞으로는 호수가 있다. 이 성은 13세기부터 이 지방을 다스리던 Aragvi공작이 17세기에 지었다는데 그 안에 아름다운 교회건축도 있다.
10. 12.(월) 아침을 먹고 잠시 시간이 있어 호텔 뒷마을을 거닐다, 재래식으로 굽는 나바시 빵가게를 보게 되었다. 인자하게 생긴 주인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여 들어가 둘러보는데 어디서 왔느냐 묻기에 코리아라고 하니, 주인이 왼손을 펴 들고 가운데 금을 긋고는 위에 한 번, 아래로 한 번 점을 찍는데 무엇을 묻는 표정이다. 얼른 눈치를 채고 아래를 찍으니 ‘아하, 씨울’하면서 갖 구어 뜨끈한 큰 빵을 하나 준다. 재미있던 빵집주인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트빌리시는 인구가 1백 7십만 정도의 이 나라 수도다. 5세기경 한 왕이 사냥을 하다 유황온천을 만나 저녁을 해먹고 반했다느니, 다리를 다친 사슴이 이 온천에 담그고 상처가 난 모습을 보았다느니 하여 여기에 수도를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부호의 재력으로 지었다는, 널찍이 자리 잡은 Echmiadzin Catherdral을 들러보았다. 앞으로도 그렇지만 매번 보는 성당내부의 이콘과 성화들에 대해서는 고색과 품격이 높아는 보이지만 말할 능력은 없다. 성직자들이 밖으로 나와서 시민들과 진지하게 또는 명랑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하루 종일 시내를 관람했다. 성 삼위일체교회, 성 니노의 십자가가 보관되었다는 시오니 대성당, Gorgasali왕의 동상이 있는 성 메텍히 교회, 타즈만다 수도원, 나리킬라 요새와 구시가의 건축이며 유황온천장 등 정신없이 몰려다니니, 수많은 이콘과 성화며 건축기법을 보기는 했는데 지금은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모든 성당, 수도원이 천편일률 사암으로 지어졌는데 이 타즈만다 수도원은 독특하게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타즈만다에는 이 나라의 저명한 인사들이 묻히는 곳이라는데, 스탈린의 어머니 묘가 여기 있으니 역설적이기도 하다.
Georgian National Museum에는 흩어진 성서, 성물, 교회의상 등이 수집되어 있어 종교문화의 화려함과 장엄함을 갖추고 있다. 나는 여기서 성직자들의 용품이 황금보화로 꾸며진 것이며, 희사한 액수에 따라 영주들의 형상이 크고 작고 한 것 등을 보면서 성직자의 근검청빈과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잠시 혼란스런 생각이 든다. 너무나 속물적인 생각일까. 하기는 노동자·농민의 세상이라는 중국공산당도 요새는 부르주아지의 상징인 진시황 능을 복원하고 양귀비의 초상화를 그리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10. 13(화) 사실은 전날이 월요일이어서 Museum이 문을 닫았으므로 오늘 11시가 되어서 입장을 했었기 때문에, 아침에 호텔에서 마련해준 도시락을 싸들고 12시가 지나서 아르메니아로 향해서 출발했다.
아르메니아 입국수속을 마치고 한참을 오다 Debed협곡으로 들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Haghpat수도원을 보았다. 10세기에 한 여왕이 세웠으며 12세기까지 부속 건물이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성당 안 바닥에 여기저기 마치 김칫독을 묻은 듯한 구멍이 있는데 적이 올 때면 중요문서를 여기 넣고 두꺼운 대리석을 덮어 바닥인양 위장을 했던 자리라 한다. 여기 십자가는 네 끝이 양쪽으로 갈려진 특이한 형태라는데 넓은 판석에 새겨져 있어 아르메니아는 또 다른 기독교 종파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너무나 애처로운 장면을 만났다. 수도원을 나와서 마을과 연결된 넓은 마당 끝에 한 노파가 힘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마을의 경치를 사진 찍고 있었다. 마침 아내가 먹지 않은 자기 도시락을 이 노파에게 주는가 했는데 그 노파가 이를 받고는 아내의 손에 엎드려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먹고 사는 것이 이렇게 애절하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저녁에 도착, Marriott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공화국광장이 시원하게 넓고 휘황찬란하다.
AD405 Mesrop Mashtotz에 의해서 아르메니아 글자가 만들어지고, 이로서 언어, 문학, 예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10세기에 성경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면서 기독교 신앙의 중요성이 증대했다. 지금도 아르메니아 출신의 예술가, 문학가, 과학자들이 세계에서 활발히 활동을 한다.
10. 14.(수) Geghard수도원은 7세기에 가장 오래된 동굴교회로 지어졌으며, 10세기 아랍의 침공 때 한번 불에 탔다고 한다. 여기에 십자가들은 첨탑을 제외하면 네모진 돌 판에 한껏 모양을 내서 부조되어 옆에 세워져 있다. 예수를 찌른 창이 있다고 하는데 다른 곳에 가보니 거기도 그 모양이 있어서 잘 모르겠다.
Geghard로 가기 전에 가르니 마을에 있는 Garni Temple은, 24개의 원주로 된 희랍사원형으로, 1세기에 아르메니아 왕이 로마의 태양신 헬리오스를 모시는 사원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기독교로 전향된 후에는 아르메니아 왕실의 여름 휴양지로 이용된 모양이다. 1996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파건(이교도)사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Holy Echmiadzin은 아르메니아의 사도 교회의 Vatican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 2~4세기에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였다. 중심 수도원은 Mayr Tachar 대성당이라 한다. 그런데 우연히 옆 건물에서 혼례식이 있었다. 이 수도원의 내력을 가이드로부터 설명 듣는 중에, 이를 본 관광객들은 혼례식장으로 뛰어가 풍물사진을 찍느라고 야단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도원이라는 돌덩어리만을 보아온 것이다. 생동하는 사람, 옛날의 돌덩어리가 아닌 활동하는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Zvartnots성당은 7세기에 세워지고 파괴된 교회다. 최초의 아르메니아교회로 St. Gregory를 봉안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라는 평판을 받으며 Catholicos Nerses II가 세웠다고 하는데, 930년 지진에 무너졌다고 한다. 원주가 둘러있고 그것은 하나의 작은 로마였다.
1차 대전 무렵인지, 터키는 아르메니아의 지도급 인사, 여성과 아이들을 대량으로 살해했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나치가 유태인을 학대한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모든 당시의 증거물을 모으고 위령탑을 세워서 국민들이 잊지 않도록 성역화하고, 전 세계에 이를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 또는 중국을, 심지어는 6·25를 쉽게 잊고 산다.
10. 15.(금) 돌아올 준비를 하는 날이다. 끝으로 본 고대 문서 필사본 박물관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저 강대했다는 나라는 박물관에 칼과 갑옷만이 진열되어 있을 뿐, 문서는 본 적이 없다. 전시물 중에, 한 서사는 똑같은 책을 500권이나 필사를 했다고 하여 보니 인쇄물처럼 고르고 단정하다. 역시 역사가 있고 문화를 아는, 진정으로 슬픈 문명국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나라의 영산인 Ararat산(실은 터기 영에 속함)은 짙은 안개에 쌓여 3일간이나 보이지 않더니, 떠나는 날 하늘 중턱으로 희미한 흔적만을 보여주었다. 공항에서는 이 나라의 특산인 Ararat브랜디를 손에 든 귀국인사들이 우왕좌왕하고들 있었다.
10. 16.(금) 모스코바를 거쳐 귀국하니 한낮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