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조선시대인 1592년 4월13일 임진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
당시 영암지역 의병을 모집하여 권율장군의 부대에 들어가
크고작은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치다 이듬해인 1593년 2월 16일
행주산성 전투에서 적군의 화살을 가슴에 맞고 장렬히 순절하신 장수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우리 선조인 월재공 인걸 이었다
공의 이름은 인걸 , 자는 영숙, 호는 월재. 경주이씨다
신라 개국원신인 알평의 후손으로 고려말 익재공 제현은 공의 10대조가 되신다
또한 조선조 이조참의를 지내시다 외직으로 경상도 관찰사로 안동에 순시차
가셨다가 낙동강변 영호루에서 돌아가신 청호공 희가 계셨으니 이분은
공의 7대조가 되신다
인걸의 아버지는 반기이며 호가 호암공 이시다
호암공 반기께서는 경기 고양에서 무과에 급제한후 선전관이란 벼슬을 하시다
1545년 을사사화의 난을 피하기 위해 영남으로 그리고 충청을 거쳐 이곳 호남으로
오셔서 월출산 아래인 녹문에 터를 잡으셨다
월재공 인걸은 신사임당이 돌아가신 해인 1551년 9월 8일 영암 월출산 기운을
받으며 녹문(회문리1구 큰골아래)에서 태어나셨다
어머니는 양천허씨 허응서의 녀이시다
월재공 인걸은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에서는 느낄수 없는 총명함이 있었다
어렸을적부터 아버지로 부터 소학.논어.맹자등 옛 학문을 읽혔으며
15세무렵 양천허씨인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집례(제사의식.절차)하는 일에는 어른처럼
하였다
스무살이 넘자 앞으로 닦쳐올 어려움을 예견하고 시골에서 하는 글공부를
중지하고 무예를 익혀 늦은 나이인 37세인 1588년 무과에 합격하여
첫 벼슬로 수문장이 되었다
그리고 훈련첨정에 승진되었는데 1592 임진년에 왜병(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와
부산을 무너뜨리고 동래지역을 빼앗으러 하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달아나는등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임금은 도성(서울)을 버리고 파주.개경.평양을 거쳐 6월에 의주까지 피난처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 선조의 피난일지를 잠시 올려본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남
1592년 4월 30일 선조 몽진 시작 1592년 5월 1일 파주도착
1592년 5월 2일 개경도착
1592년 5월 3일 한양 함락
1592년 6월 11일 평양출발
1592년 6월 12일 안주도착
1592년 6월 13일 영변도착
1592년 6월 15일 평양성 함락
1592년 6월 16일 정주도착
1592년 6월 18일 곽주도착
1592년 6월 22일 의주도착
1592년 7월 17일 명 선발대 평양공략
1592년 12월 11일 명 본진 선발대 압록강 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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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재공 인걸은 왜군이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범할것을 미리 예측하고
무과에 급제한후 지략을 읽혀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 처해있는데 나라의 신하로써 어찌
바라만 볼수 있겠는가 하는 충정어린 심정으로
홀로 늙으신 아버지 호암공께
" 아버지 눈 앞에 도성이 허물어 지고 임금이 지금 난을피해 피난길에 오르고 있는데
어찌 신하로써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다만 늙으신 아버지가 집에 홀로 계시니
의병을 모집하여 도성을 향해 떠난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지난 8월 26일 10시에 충남 논산군 진산읍 묵산1리에 소재한 1592년 7월 20일 임진왜란 최초 유전 승전지인 이치대첩지 충장사 사당에서 충남 금산군이 주최하고 이치대첩기념제추진위원회에서 주관한 "충장공 권율 도원수 제417주년 이치대첩 기념제"가 엄숙히 봉행되었다. 1592년 7월 20일 이치대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율 광주목사는 왜군이 북상하는데 필요항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고자 곡창지대인 호남을 침략할 것으로 예상하고 관군,의병 등 1500명의 소수병력의 군사 편제를 재정비하고 군사훈련을 독려하였으며 동시에 이치의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고갯길의 양편 산위에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시설(말뚝을 박아 만든 울인 목책과 대나무를 세워 사슴뿔처럼 만든 울인 녹채,성위에 낮게 쌓은 담인 성가퀴)등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임진년 7월 경상동와 충청도를 휩쓴 왜적이 군량미의 현지보급을 꾀하여이 배티재(梨峙)를 넘어 호남평야로 진출하려고 적장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거느린 1만 병력을 이끌고 이 재를 넘으려 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권율 광주 목사는 "오늘의 싸움은 진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으며, 죽음만 있고 삶은 없다"라고 싸울 것을 명령했다.
황진장군을 선봉장으로 한 이치전투는 아침에 시작되어 왜군이 성채 안에 들어오기까지 치열하였으며 적이 너무 가까이 접근하여 총포가 미치지 않게되자 육박전을 감행하여 오후3시경 왜적을 물리쳤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다가 왜군은 5시경 재공격을 개시했으나, 우리 군은 용기백배하여 왜군을 격퇴하였다. 미리 영정곡에 매복시켜 놓았던 기병장 권승경(權升慶)부대는 패해 오는 왜군을 기습하여 또 한번 무칠렸다.
이러써 도원수 권율(權慄)은 1,500여명의 군사로 1만여명에 달하는 왜군 제 6군 주력부대를 궤멸시켜 전라도 침공을 단념시키게 되었고, 육전에서의 전세를 뒤바꾸는데 크게 기여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독산성전투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도원수가 되었다.
08 이치 대첩지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79 (도 기념물 제 154 호 2000.09.20)
(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승지로 3대 대첩 지 중 한곳 )
이치대첩은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중요한 곳이다. 임진년 7월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적이 군량미의 현지보급을 꾀하여 이 배티재를 넘어 호남평야로 진출하려고 적장 고바야가와가 거느린 2만 병력을 이끌고 이 재를 넘으려 했다. 이보다 앞서 권율 장군은 동복현감 황진과 1,5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재를 지켜 왜적의 호남진출을 막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적은 수의 우세함과 승승장구한 힘을 믿고 단숨에 이 재를 넘으려고 덤벼드는 것을 장군은 전 병력을 독려하여 결사전을 벌려서 적을 섬멸하여 대첩을 올리니 왜적이 다시는 호남에 진출할 엄두도 못 내게 되었다. 이치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보다 앞서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승전지로 국가사적지로 지정 추진 중이며 성역화 사업을 통하여 새롭게 단장할 전망이다.
권율 장군 이치대첩비 (도 문화재자료 제 25 호 1984.05.17)
개 요 : (기념물 제154호)
이치는 순우리말 배티재의 한자식 이름이다. 이 배티재는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 상 중요한 곳이었다. 임진년 7월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군이 군량미의 현지 보급을 위해 이 배티재를 넘어 호남평야로 진출
하려 하였다. 이때, 왜장 고바야가와가는 2만 병력을 이끌고 재를 넘으려 했다. 한편,
이보다 앞서 권율장군은 동복현감 황진과 1,5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재를 지켜
왜군의 호남진출을 막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군은 수의 우세함과 승승
장구의 힘을 믿고 단숨에 이 재를 넘으려고 공격했지만, 장군은 전병력을 독려, 결사
전을 벌여서 적을 섬멸하여 승리를 거두니, 이를 일컬어 이치대첩이라 하고, 이후 왜
군의 호남진출 전략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치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보다 앞서
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전지로 국가사적지 지정을 추진 중이며 성역화 사업을 통
하여 새롭게 단장될 전망이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 154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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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성 세마대(禿山城洗馬臺)
독산성 세마대는 경기도 오산시 지곳동 162-1 번지 에 있는 사적 제 140호로써 매우 귀중한 우리 역사의 현장이요 문화유산이다.수원 동문 기점 남방 약 13km 되는 이곳은 1번국도를 따라 달리면 약 30분이면 도착한다.
산 입구에서 부터 산으로 오르는 길은 비록 시멘트 포장 길이나 좁디좁아 혹 차량이 마주치면 피하기 매우 곤란한 입장이 된다.
이 산성은 백제가 처음 성을 쌓았다 하며 그 이후 통일신라 ,고려를 거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하는데 남한산성,용인의 석성산성과 함께 도성방어의 삼각체제를 이루었다 한다.
이 독산산성은 성벽이 매우 낮고 허술한 면이 많은데 주변에 돌이 별로 없는것이 연유인듯 하며 선조27년에 백성들이 불과 4일만에 쌓았다 하니 그도 그럴것이다.
세마대(洗馬臺)란 곧 말을 씻긴 돈대란 뜻이다.
임진왜란때 전라도 관찰사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이 근왕병(勤王兵) 2만을 거느리고 이곳에 진을 쳤는데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이곳을 지나다가 조선군이 주둔해 있슴에 벌거숭이 산에 물이 없을것으로 알고 물 한지게를 보내어 조롱했다.
이에 권율은 왜병이 잘 보이는곳으로 말을 세워놓고 쌀을 끼얹게 하여 마치 물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하니 가토가 이를 보고 산위에 물이 풍부한것으로 오판하고 퇴각하였다 한다.
세마대(洗馬臺)란 이름이 그래서 생겨나게 된 동기라 한다.
1593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일본군을 대파시킨 싸움.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이치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관군과 명군이 평양을 수복, 남진을 속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관군을 이끌고 북상,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관군을 서울주변인 안현(鞍峴)에 설진(設陣)할 것을 원하였으나 막하 장수들의 반대로 조경이 물색한 곳으로 결정하였는데, 이곳이 행주산성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조경으로 하여금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이곳으로 옮긴 뒤 휘하병력 가운데서 4,000명을 뽑아 전라도병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금천(衿川:지금의 시흥)에 주둔하게 하여 서울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도 정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 행주산성과 금천 중간위치에서 일본군을 견제하도록 하는 한편 만약의 사태에 대비,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친 권율을 돕도록 하였다. 권율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조경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 설진, 이때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의병(僧義兵) 1,000명을 이끌고 옴에 따라 이 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3천여명에 불과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태세를 갖추자, 적장들은 이치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경험한 지라 일거에 아군을 멸하여 위험을 배제하자는 결의로 임하였다.
이에 이번 출정까지 한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던 우키타(宇喜多秀家)를 총대장으로 이시다(石田三成) · 마시다(增田長盛) · 오타니(大谷吉繼) 등을 세 봉행(奉行:통치자 將軍을 보좌하던 최고무관직)으로 하여 본진의 장수들까지 7개대로 나누어 전병력은 3만여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여 왔다.
성 안의 관군이 소지한 무기로는 궁시(弓矢) · 도창(刀槍) 외에, 변이중이 만든 화차(火車),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水車石砲)라는 특수한 무기로 적의 침공에 대처할 수 있었다. 또, 아군의 산성에서는 일본군이 일시에 몰려올 것에 대비하여 성책을 내외 이중으로 만들고 토제(土堤)를 쌓아 조총탄환을 피할 수 있게 하였고, 병사에게 재[灰]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일본군이 내침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권율은 성안의 모든 병사들에게 이번 일전(一戰)이 생사도 중요하지만 국운이 이 한판싸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주지시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1593년 일본군의 선봉 100여기(騎)에 뒤이어 제1대장 고니시(小西行長)의 대군이 밀려왔다.
그는 평양싸움에서 대패한 이후 벽제관(碧蹄館)싸움에도 참전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설욕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제일 앞서 공성(攻城)에 나섰다. 그러나 성 안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震天雷) · 총통(銃筒) 등을 쏘아대고 강궁(强弓)의 시위를 당기니 몰려들었던 적의 병마가 맞아 혼비백산하니 고니시의 제1대는 궤멸상태에 빠져 물러갔다.
이어 이시다가 인솔한 제2대도 공격에 실패하였다. 다음은 제3대의 군이 달려들었는데, 대장 구로다(黑田長政)는 전년 9월 연안성(延安城)싸움에서 의병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어 장제(長梯) 위에 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명을 올려놓고 성 안을 향하여 조총을 쏘게만 하고 병졸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조경은 대포를 쏘아 이를 깨트리고 또 포전(砲箭) 끝에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게 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제1대부터 3대에 이르기까지 연패하는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적의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하여 선두에 나오니 이에 소속된 제4대 장병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전진, 마침내 제1성책(城柵)을 넘어서 제2성책까지 접근하자 관군은 한때 동요하였으나 권율의 독전으로 이를 극복하고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사격되어 우키다는 부상을 입고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퇴진하였다. 그리고 이때까지 남아 선두에서 지휘하던 제2대장 이시다 역시 부상으로 후퇴하였다.
제5대장 요시카와(吉川廣家)는 4대의 뒤를 이어 화통(火筒)으로 성책의 일부를 집중 발사, 불이 붙게 하였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버리고 시석(矢石)을 퍼부어 그는 큰 부상을 입고 퇴각하니 그 부하 병졸의 사망자만도 160명이나 발생하였다.
이 두 대장의 부상에 분노한 제6대장 모리(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小早川秀秋) 두 장수는 제2성책을 점령하려고 공격을 가하여 왔다. 이때 처영의 승의군도 용감히 맞서 싸웠는데, 이들은 차고 있던 재[灰]를 적군에게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달아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바꾸어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의군의 일각을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자 승의군이 동요하기 시작, 급박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권율은 대검을 빼어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자 승의군은 다시 돌아서서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한편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하여 투석전으로 맞섰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싸웠으며,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적이 이것을 알고, 기세를 올리려 하였으나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빈)이 수만개의 화살을 실은 배 두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니 적은 당황, 내성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내의 관군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추격하여 적의 목 130급(級)을 베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하였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는데, 아군측은 그들이 버리고 간 갑주(甲胄) · 도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이 노획물 가운데 중요한 것만도 272건이었고, 버리고 간 적의 시체가 200 이상에 달하였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이루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명(明)의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이 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휘하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 뒤 김명원의 뒤를 이어 도원수가 된 것은 행주대첩의 전공이 많이 작용된 것이라 하겠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긴 싸움. 진주대첩·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이다.
권율은 1952년 임진왜란 초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공을 세워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그 뒤 명(明)나라의 원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고자, 관군을 끌고 북상중에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데 이어,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에게 서울탈환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지역을 찾도록 하였다. 이에 조방이 양천(陽川)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장소로 판단하여 보고한 곳이 행주산성이다. 권율은 조경이 보고한 장소로 옮길 것을 결정하고, 조경에게 목책(木柵)을 세우게 하고 나서 은밀히 군사를 이곳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병사 4000명을 뽑아 전라도병사 선거이(宣居怡)에게 금천(衿川;지금의 시흥)에 주둔하여 서울의 적을 견제하게 하고,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은 양천에 주둔하여 행주산성과 금천 중간 위치에서 일본군을 견제하도록 하였으며, 만약의 사태에는 그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이 무렵 총퇴각하여 많은 병력이 서울 부근에 집결하고 있었고, 1593년 1월말 벽제관(碧蹄館)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라서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같은 해 2월 12일 새벽 6시쯤 일본군은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를 비롯한 7대, 3만여 병력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여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고, 쉴새없이 공격해 왔다. 권율의 병사들은 궁시(弓矢)·도창(刀槍) 외에 화차(火車)와,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水車石砲)라는 특수한 무기로 대처하였으며, 내외 이중으로 만든 성책으로 적들의 일시침공을 막고 토제(土堤)로 조총탄환을 피할 수 있었다.
막바지에 이르러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게 되자, 권율의 진영에서는 화살이 다하여 투석전을 폈다. 이때 부녀자들까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는데,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싸운 결과 일본군은 큰 피해를 보고 퇴각하였는데, 적은 사방의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다. 이때 유기된 시체가 200구에 이르렀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알 수 없었을 정도였다. 권율의 군대는 적이 버리고 간 갑주(甲胄)·도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이 싸움 이후 권율은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며, 일본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았다. 행주 산성은 본래 성이 없는곳이었다.
권율이 덕양산에 와보니 남쪽은 천야 만야한 절벽이오 동북쪽은 허허 벌판에다가 서쪽은 얕은 구릉이 일산 까지 뻗혀 있었다
"좋은 위치다 ,이곳에서 일단 적병들을 유인하여 기를 꺾은 다음 동쪽 저멀리 보이는 한성을 수복하리라"
권율은 갖고 있던 장검을 빼더니 왕성있는 한성을 향하여 긴칼를 한번 휘두르고 칼을 땅에 꽃고 무릎을 꿇었다
"전하, 기어코 한성을 수복하여 왜군들에 대하여 원수를 갚겠습니다"
하고 멀리보이는 한양을 바라 보고 있었다
옆에 이광경을 보고 있던 조방장 조경도 서울을 향하여 무릎을 꿇었다
권율의 얼굴에는 한성 수복의 결의에찬 눈에 눈물이 비쳤다
권율은 우선 조경에게 성책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성책은 2 일만에 완성되었다.
권율은 만들어놓은 성책을 돌아 보고 만족하며
"조방장 , 우리 조선군을 독산성에서 이리로 이동해야겠소"
말하자 조경이 반대하였다.
"첩보에의하면 한성의 왜군이 대병력을 동원 독산성을 총공격한다 하는데 독산성에서 이곳으로 이동하면 수원과 호남이 위태롭습니다"
'"아니야.적들은 명나라 동정군이 지금 개성에 머물고 있기때문에 서뿔리 수원의 독산성을 공격 할리는 만무일세"
"하지만 명나라군이 벽제 전투에서 지고 후퇴 하면서 일본과 강화를 한다합니다"
"강화? 왜놈들과 강화 한다고? 그놈들이 강화 할놈들인가 ? 강화한다고 해 놓고 서울을 안 내놓을 심산이야"
"명나라군과는 강화 한다고 해놓고 독산성을 치려 할지모릅니다"
"아니야 명령이다, 내 명령대로 하라, 우성 독산성 병력을 모두 야간에 왜놈들이 눈치 채지않게 이곳으로 모두 이동하라.다만 독산성은 일부 경비병력만 남겨 놓고...."
"하지만 장군님 , 독산성에 일부 병력으로는 불가항력입니다"
"허...조방장은 하나밖에 모르는구먼 .."
권율은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조경을 가까이오라하여 작은 목소리로
"병법에 은밀히 하되 형태가 없게 하고 신기 하게 하여 소리가 없게 하라는 말이있소.
이말은 자기의 정체를 알리지 말라는 말이오"
"그러면 어찌 하오리까?"
"우리가 이곳에 진을 친것을 알게 되면 놈들이 그쪽을 관심 가질것이오 .그러므로 그곳에는 의병(擬兵)을 많이 만들어 적을 속이시오 그쪽에 주력군이 있는것 처럼....."
조경은 그때서야 권율장군의 깊은 뜻을 알아채고 권율의 지략에 내심 감탄 하였다.지금까지 권율에게 반대 한것이 부끄러웠다.
의병(擬兵)이란 적을 의혹시키는 군사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권율은 우선 선거이 병사에게 병력 4천명을 주어 수원 광교산에 주둔했다가 행주산성으로,소모사 변이중에게 병력 2 천명을 주어 양천현에서 적을 견제 하다가 행주 산성으로 , 창의사 김천일도 강화도를 거쳐 행주 산성으로 서서히 집결케하고 권율은 직접 조방장 조경과 승장 석처영을 데리고 정예군 2천 3백명을 직접 거느리고 행주산성으로 향하였다
권율은 한성내에 총 집결한 적 주력군을궤멸 시키기위하여 군사들이 모이기 시작하니니 한성과 불과 20리밖에 안되는 한강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계속 아래 장수왕님과 아싸나이스님이 아래 논해주신 진주성 싸움은 행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이랍니다. 행주대첩은 일개 장수였던 권율을 도원수로 만든 전투
이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행주치마라는 말을 만들어낸 전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저는 권율장군에 대한 평가와 행주대첩에 대한 학계 일각의 의견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권율 장군은 기백과 강단이 있는 장수로서, 1593년 행주대첩이후 도망병을 즉결 처분한 문제
로 도원수에서 해임되었다가 1596년 도원수로 재기용되었고 1599년 관직을 내놓고 노환으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향년 63세). 전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선무 일등 공신으로 임명되었고,
92년부터 98년까지의 임란이라는 험난한 상황속에서도 변덕스럽고 의심많은 선조와 지극히
비협조적이였던 명군을 잘 조율하고 붕괴직전까지 갔던 조선군을 유능하게 지휘통솔한 훌륭
한 사령관이라 하겠습니다. 권율 장군의 유명한 일화가 협상때문에 적진 한가운데를 지나가게
될 일이 있었는데, 적들이 일부러 번뜩이는 창검으로 위협을 주었음에도 권율 혼자만은 의연
하게 적진을 지나서 적들마저 감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임란 기간내내 전투를 꺼려
하였던 명군을 전투에 끌어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고, 전쟁의 조기종결을 위하여 분골쇄신
하였던 충직한 장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권율의 이와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인정하더라도 1)그의 가장 큰 전공이였던 행주
대첩과 2)96년 이순신대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도록 조장내지 방관한 전략적
판단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첫째 93년 행주대첩의 규모에 대해서는 저의 개인적인 의견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행주대첩 관련 정황을 요약하자면
1)왜군은 평양성 패전 및 벽제관 승전 이후였으며, 총퇴각와중에 전황 반전을 꾀하였음
2)93년 2월 12일 서울 근방에 집결하였던 왜군 3만명은 행주 덕양산에 있던 160평방미터의
산성에 주둔한 2800여명의 관군 및 의병을 새벽부터 종일 공격하였으나,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패배함. (전공에 대해서는 2만3천여명의 왜군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기록도 있음)
그러나 다음 근거에 입각하여 행주대첩의 규모는 다소 부풀려졌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전투의 의의는 반드시 규모에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규모의 전투는
아니였다는 것이죠.
1)당시 왜군은 총퇴각중이였고 당시 왜군의 배치상황을 헤아릴때, 서울 근방에 3만명이라는
왜군이 존재할 수 없고 이런 대군이 체계적인 군사작전을 펼쳤다는 것은 더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저만의 생각이 아닌 학계에서도 제기되는 의혹중 하나입니다.
2)야전이 아닌 산성방어전에서 하루 만에 공격측에 2만3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것은
전쟁의 상식에 어긋난다. 아다시피 진지방어전에서는 공격군은 부상자를 회수하기 용이
하기 때문에, 피해가 단기간에 쉽게 커지기 어렵다. 아무리 목책을 감안해도 160평방미터의
행주산성에서 공격측이 하루만에 2만명이상 사상자가 발생시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임란의 또다른 진지 방어전인 진주성 1,2차전투에서도 1주일정도 치열하게 싸웠다. 역사
적으로도 진지방어전에서 하루만에 대첩이라는 명성을 얻은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행주
대첩이 산성에서 벌어진 사실상의 야전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렇다하여도 야전에서 10배
이상의 병력차가 격돌하였음에도 승리하였다는 것은 더더욱 설득력이 약합니다.
요컨대 행주대첩은 전투의 의의면에서는 대첩일수도 있지만, 규모면에서는 진주성싸움이나
한산대첩과 같은 반열에 올리기에는 다소 부족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주
전투가 대첩이라는 이름을 얻게된 것은 중앙정규군이 얻은 가장 큰 전공이였기 때문인 걸로
보여집니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원래 목사가 아니였으나 성을 잘 수호한 공적으로 목사가
되었고, 이순신도 중앙정규군이라기 보다는 지역군사령관이라 하겠습니다. 93년 행주대첩은
92년 중앙정규군의 총사령관이였던 신립의 엄청난 패배를 상징적(??)으로 극복해낸 사건이
였습니다. 물론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규모면이나, 이후로도 5년이상 왜군이 조선에서
전쟁을 벌였던 것을 감안하면, 절대로 동일한 급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만 말입니다.
당시 조선의 총병력 13만 중앙군을 일거에 날려버린 신립의 탄금대 전투가 "전략적 오판과
지휘관의 실책으로 왜침을 7년국란으로 확전시킨 최악의 전투"가 아닌 "최선을 다했으나
어쩔 수 없이 패한 안타까운 전투"로 기억되는 것처럼, 행주대첩 또한 전후 사정과 관계없이
조선군이 왜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힌 대첩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
습니다.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고, 행주대첩의 의의는 단순히 규모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말입니다.
어찌됐든 권율은 위대한 장수이며 행주대첩을 제외하고서라도 수많은 전공을 쌓았으며,
당시 중앙 정규군 장수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힘든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7년 임란을 위해
서 모든 것을 불살랐던 그는, 임란종결 이듬해인 99년 향년 63세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97년 원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과 관련된 권율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적어 보겠
습니다.)
우리들의 머리 속에는 임진왜란하면, 육지에서는 권율, 바다에서는 이순신이라는 알게 모르는 공식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순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을 했으면서도, 권율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저 행주대첩만 생각했지, 그분이 왜란때 어떻께 활약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충무공은 임진왜란 시기에 난중일기라는 진중일기를 후대에 남긴 덕분에 어느 정도나마 그분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지만, 충장공 권율장군은 그런 기록을 남기지 못해 이순신장군에 비해 연구가 저조한 편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도원수 권율장군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권율 장군의 생애를 돌아다봐도, 임진왜란때 그분이 세운 전공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금방 알게된다.
그래서 나는 도원수 권율이 임진왜란 시기에 어떤 활약을 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그분의 행적을 조금이라도 알리고자 한다.
충장공 도원수 권율은 대기만성형 스타일인지 46살이라는 적지 않는 나이에 과거에 합격을 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때가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1580년도였다.
그때는 그의 사위 이항복은 정계에 이미 진출하여 선조 국왕의 신임을 받고 그의 나이에 걸맞지 않는 높은 벼슬에 오른 상황이었다. 장인이 되는 권율은 과거에 합격하여 낮은 벼슬을 전전한 것에 비교하면 재미있는 일이라 (?)생각이 된다.
그 후, 김성일과 황윤길이 일본으로 통신사를 갔다 온 후부터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영남과 호남에 성채와 무기를 수리하고 군량미를 저장하였다. 또한 새로운 인재를 발탁하여 등용도 하였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그래봐자, 대규모 전면전이 아닌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의 폐지로 인해서 생긴 스트레스를 조선한테 푸는 정도로 여기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군비 준비가 미비했고, 그나마 했던 준비도 형편없고, 빈수레에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요란하게 하여 백성들의 원성만 사게 했다.*)
그런 분위기로 인해서 인재를 알아보는 서예 유성룡는 하급 벼슬을 하고 있는 권율과 이순신을 추천하였다. 이것이 계기로 되어 권율은 의주목사로 고공 승진을 한다.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낙하산이라고 할까? 몇 단계로 뛰어넘는 승진을 하여 의주목사로 취임한 그는 거기서 군사분야에 관련된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임진왜란때 유용하게 써먹는다.
그 후 일년이 안 되서 임진왜란이 발생한다. 선조임금은 권율을 좋게 보았는지 곧 바로 광주목사로 임명하고 국난극복에 한몫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 전쟁이 발생한지 얼마 안되서 선조가 권율을 기억하고 직접 추천을 하여 광주목사로 보낸 것을 보니 그의 사위 이항복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추측을 한다.)
의주에서 서울을 걸쳐 호남으로 들어온 그는 전라도 관찰사 이광의 휘하에 들어간다. 당시 조정에서는경상도 관군이 무너지고, 중앙에서 파견한 이일, 신립등이 패전하여 서울을 내주고 평양으로 몽진을 간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하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근왕군을 결성하여 일본군을 치라는 어명이 각도의 관찰사에게 떨어진다. 이광은 전라도 병사 4만을 동원하였고, 충청도 8000명과 경상도 100명을 합쳐 서울로 진격해 들어간다. 이때 권율은 이광의 휘하에서 중군을 이끌고 있었다.
이 근왕군 5만명은 수원을 지나 용인으로 들어가 그곳에 주둔해 있는 소수의 일본군을 공격한다. 당시 권율은 그 공격작전을 반대했다고 한다. 험한 곳에 위치한 적을 공격하는 것이 힘들고, 서울에 대규모 적이 있다는 점등과 다른 기타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를 하였지만, 결국에 주장인 이광은 권율의 충고를 무시하고 일본군을 공격하여 결국 패전을 하고 만다. 당시 5만의 조선군은 600명의 용인의 일본군과 구원군 1000명한테 쫓겨 크게 패전하고 많은 병사들이 흩어져 괴멸되었다.
하지만, 권율이 이끄는 중군만 질서정연하게 행동을 하여 군사를 잃지 않고 온전한 보존하여 전라도로 돌아온다. 그것은 조선이 반격을 할 병사를 온전히 보존했다는 점에서 권율의 공이라고 하겠다.
당시 권율이 다른 장수처럼 도망만 하고 군사를 다 잃고 전라도로 들어왔다면, 일본군이 전라도로 공격하러 들어 올 때, 이에 맞서 싸울 병사가 적어 크게 낭패를 볼 가능성이 높다.
하여튼 전라도로 들어온 권율은 관찰사 이광한테 군사 지위권을 넘겨받고, 전라도군은 그의 지위로 들어간다. 용인싸움의 패전으로 인해서 전라도에서는 그 여파로 인해서 사기가 뚝 떨어지고 민심이 이반당한 상황이지만, 권율은 그것을 잘 다스려 조선의 반격의 근거를 마련한다.
일본군 5군이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남하를 하여 충청도 금산을 점령한다. 그 후 다시 전주로 공략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들어가는 두 갈래의 길로 병사를 나누어 진격한다.. 그래서 권율은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두 갈래의 길에 위치한 웅치와 이치에 병사를 배치하고 저항을 한다. 웅치는 다른 장수들에게 맡기고, 그는 이치에서 황진하고 같이 맡은 상황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결과 조선육군은 웅치에서 패전했지만, 일본군은 많은 피해를 입어 철수를 하였고, 이치에서는 권율과 황진이 힘껏 싸운 결과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이 두 전투로 인해서 일본군의 호남 입성이 저지당하였다.
이 전투는 많은 의의가 있다.
첫째는 관군이 재정비를 할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고, 의병이 봉기가 촉진했다는 점이다.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 함경도, 황해도의 관군이 제대로 저항도 없이 무너진 상황이었고, 평안도는 고니시군한테 연전연패를 당해서 사기가 뚝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라도가 웅치 이치 전투에 승리를 하여 조선군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전라도 안에서) 시간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훈련을 통해 관군의 병력을 강화할 수도 있었다.만일 전라도가 패전했다면, 전라도는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고, 바다에서 고군분투하는 수군도 근거지를 잃게 되어 결국 붕괴되어 조선은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다.
또한 경상도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도 이 전투로 인해서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둘째는 조선군이 반격할 근거지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이미 타도에서는 관군이 무너진 상황에서 전라도만 보존되어 육군과 수군과 의병에 투입할 군사를 뽑을 수 있고, 군량미도 조선에서 가장 큰 공급처가 되었다.
셋째는 일본군의 배후지를 장악하여 일본군의 진격과 보급계획에 차질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권율은 (웅치 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큰 공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어느 사람은 웅치 이치 전투를 행주대첩보다도 더 중요시 여긴다.
또한 권율은 전라도에서 훈련시킨 관군을 이끌고 경기도로 진격하여 서울 탈환을 노렸다.(* 일본군 5군은 결국 금산에서 조선 민병대의 2차례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경기도로 철군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권율은 다소 안도한 분위기에서 경기도로 진격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 근거지가 바로 독산산성인데, 그곳에서 지구전과 유격전을 벌여 서울의 일본군을 압박하여 그 결과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의주 행재소의 연락선을 보호하였고, 주변에 노략질을 하는 일본군을 막았다는 점에서 또 다른 권율의 공이 아닐 수 없다.
이듬해까지 경기도에서 활동을 하는 권율에게 서울 탈환의 기회가 왔다. 바로 조명연합군의 평양성과 개성의 탈환이다. 권율은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서 북쪽의 조명연합군과 연합작전을 하기 위해서 독산산성에서 서울 부근의 행주산성으로 옮긴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이여송이 이끄는 요동병사와 고언백이 이끄는 평안도 기병 3천) 벽제관에서 패전을 하여 임진강으로 물러나니 경기도에서 일본군을 압박하던 조선군은 사기를 크게 잃었다.(*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 군사와 주변의 경기도 군사, 각지에서 올라온 병사들이 경기도에서 주둔하여 일본군과 대치중이었다.*)
.
당시 행주산성은 방어를 위해서 주둔한 장소가 아니고,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서 잠시 주둔한 지역이었다. 당시 권율군은 조명연합군과 연합하여 서울을 공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행주산성을 거점을 삼아 여기 저기 출몰하여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서울 방어를 위해서 주변에서 출몰하는 조선군의 거점중에 하나인 행주산성을 공격하는 것은 일본군으로써 당연했다.
결국 병력 삼만의 일본군의 공격에 권율은 목책이나 석성, 토제등 인공장애물을 이용하여 돌, 화살, 각종 신무기로 사용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직접 병사들에게 물과 식량을 날라다 주면 독전을 하였고, 도망치는 병사들을 처단하는 등 병사들이 싸울려는 의지를 불태워 주었고, 전투 이전부터 정탐을 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취득한 상태다.
이런 이유로 그는 행주산성에서 크게 이겼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행주산성은 전세에 아무런 영향을 안 준 전투라고 .
-이미 그 전부터 명나라의 요청으로 일본군과 강화회담이 오가는 상황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려진 정보다. 행주대첩 이전부터 강화회담은 없었고, 오히려 행주대첩 이후에 일본군이 명군 진영보다 먼저 조선군 진영으로 강화을 요청하였다. (* 조선군이 강화를 반대하였고, 작전권과 외교권이 명나라로 넘어간 상황이므로 나중에는 조선은 배제를 당한다.*)
행주대첩으로 인해서 일본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조선군에 큰 사기를 주어 그 후 여기 저기에서 일본군을 더욱 압박하게 된 계기가 되어 결국 일본군은 서울과 그 주변만 웅크리고 앉아 조선군에게 포위 당하는 상황에 빠졌다. 서울 탈환을 안 당겼고,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철수하게 된 동기를 부여한 싸움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행주싸움을 삼대첩 중에 하나로 넣는 것이다.
그는 행주싸움의 공으로 인해서 나중에 도원수로 임명된다.
즉 행주대첩 이후 권율장군은 남쪽으로 철군한 일본군을 쫓아 영남으로 내려갔고,그 곳에서 조선군 총사령관격인 도원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시기가 동시에 아픈 기억이 된다. 왜냐하면,조선군에게는 임진왜란 시기를 통틀어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지만, 명군의 비호로 인해서 일본군 주력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치고, 무기력하게 일본군이 유유자적하게 철수하는 꼴을 보게 된다. (* 마지막으로 권율이 최후의 시도로 4월 19일날 서울을 떠난 일본군을 쫓아 다음날 20일에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도하하여 추격할려고 했지만, 명나라 이여송의 견제로 실패를 본다.*)
그 후 일본군이 명군의 비호 아래로 재정비를 한 다음, 진주성의 패전을 보복삼아 제 이차로 공격하는 상황에 빠진다. 권율장군은 명군이 도움을 안 주고, 진주성의 기세로는 일본군의 공격에 무너질 것임을 알고, 결국 진주성의 구원을 회피하고, 남원을 옮겨 전라도 방어를 힘쓴다.
훗날, 많은 사관들은 권율이 진주성의 위급함을 알고도 도와주지 않고 철수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하지만, 권율로써는 패전할 것이 뻔한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는 훗날을 기약하자는 것이 더 유리하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진주성 전투 이후로 권율은 정식으로 도원수로 임명받고 남해안에서 일본군과 대치한다.
행주대첩 하면 행주치마, 권율장군등이 생각날 것이다.
허나 행주대첩이 무엇이고.. 과연 왜 대첩인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행주대첩은 한성을 다시 수복하려는 조선군과, 명군의 연합군공격의 일환이였다.
그당시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명군대가 평양을 왜군에게서 뺒고 한성으로 진격도중
1월 28일 벽제관 부근에서 일본장수 소조천 융경에게 기습을 받고 후퇴를 하게된다.
그러자 조선은 단독으로 한성을 다시 수복하기 위해 한성에 집결해 있던 왜군을 공격할 교두보를
확보하려 권율장군과 조방장 조경, 승병장 처영등의 정병 2천여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 덕양산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아현고개를 정하려다가 조경의 의견으로 행주 덕양산을 성지로 결정하니
이곳이 바로 행주산성이다.
권율은 해발 124m 덕양산 중턱에 이중의 튼튼한 목책으로 만든 성을 쌓았다.
전투준비가 끝난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
왜군 총수 우키다는 3만에 이르는 7여개 부대를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 1대는 소서 행장의 군사로 조총을 쏘면서 목책까지 접근 하자 조선군은 화포와 수차석포의 공격을
일시에 퍼부터 말과 사람이 뒤범벅 되어 1대는 궤멸되어 버렸다.
제2대는 석전삼성의 군대로 역시 화살과, 화포의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적장 전야장강은 가슴에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오 후퇴했다.
제 3대는 흑전장정의 군사로 누대를 만들어 성책을 공격했으나, 석포와 화전의 공격으로 패퇴했다.
제 4대는 22세의 젊은 총사 우키다가 선봉이 되어 외책을 부수고 내책까지 밀고들어왔으나,
화포와 신기전의 공격으로 후퇴했다. 이전투에서 우키다는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제 5대는 길천광가의 군대로 내책까지 밀고 들어와 내책에 불을 지르고 공격했으나
조선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적장 길천광가는 중상을 입고 물러났다.
제6대는 모리원광과 소주주포의 군사로 산성의 완만한 비탈로 넘어들어왔다.
이때 처영장군이 이끌던 1천의 승병군이 재로 만든 주머니를 터트려 눈을 뜨지 못하게 하고 백병전을 실시해
적을 물리쳤다.
제 7대는 60세의 노장 소조천융경의 군사로 제 6대의 뒤를 이어 승군진영을 뚫어 성내로 진격했다.
권율장군과 승장처영은 필사항전의 돌격명령을 내려 배고 찌르는 참혹한 접근전이 벌어졌다.
밀고 당기는 공방전이후 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이때가 어둠이 밀려드는 저녁 6시..
이 대첩이 충무공의 한산대첩이 일어나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이전투에서 조선군은 신기전과, 화차, 천자총통등이 사용되었고, 화차의 공격이 막강했다고 한다.
신기전은 긴 화살에 약통을 달아 날리는 것인데, 1000m, 150m, 100m 정도의 사거리를 가지며,
영국의 w. 콩글레브가 만든 신기전보다 앞서서 만든 최초의 종이통 로켓이였다.
신기전은 화차에 100여개를 장전하여 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