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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택호가 안땔집이었다. 연곡 새말에서 제법 부농으로 살았다는데 강릉으로 이사를 나와 안땔골 차돌배기 옆에서 6.25사변 전까지 10여 년 살다가 가산이 기울자 우리 어머니 말씀으로 내가 뚜루루... 뛰어다닐 때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이사를 온 후 3년 쯤, 6.25 사변이 일어났는데 우리 아버지는 사변이 끝나고 그 이듬해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해 5월에 돌아가셨다. 술을 너무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속이 졸딱 녹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시절 독에서 퍼주는 벌건 막소주를 소금을 안주로 잡수셨다니 그럴 만도 하였다.
마흔 아홉에 돌아가셨으니 당시에도 일찍 돌아가신 편이었지만 딸 넷은 이미 출가를 시켰고 두 딸과 끝으로 본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내가 8남매의 막내였다.
아버지는 풍채가 매우 좋으신 분으로 재산이 많은 양양의 먼 친척 종손 집으로 양자를 오셨다는데 젊은 시절 흰 옥양목 두루마기와 중절모를 쓰시고 서울과 금강산 여행을 하신 사진이 있는걸 보면 당시에는 꽤나 멋쟁이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그 좋던 재산은 화재와 몇 번의 이사로 제대로 써 보시지도 못한 채 날려버리고 이곳까지 흘러와 저 고생을 하신다고...
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하시고 체면을 중히 여겼던 분으로 기억되는데 비록 밭에서 돌을 주워내며 개간을 하시는 등 거친 일도 하셨지만 동네사람 중에 억지를 부리거나 성질을 돋구는 사람들이라도 보면 ‘에이 금수(禽獸)만도 못한 인간들 같으니라구....’ 하시며 외면하셨고, 딸 여섯 후에 낳은 금쪽같은 아들 둘도 한번 안고 어르는 것을 못 보았다고 하셨다.
후일 어머니의 회상으로, 누나들이 어릴 때 울기라도 하면 사랑채까지 멀어 소리도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으련만 ‘시끄럽다, 내다 버리라’고 고함을 쳐서 추운 겨울에도 뒤뜰에 업고나와 달래곤 하셨단다. 형님을 낳은 후에는 딸 여섯 후에 낳은 귀한 아들이라 울어도 방안에서 달랬더니 어느 날 아버지가 방문 앞까지 우루루 달려와서는 ‘그깟 놈 당장 내다 버려라. 인왕산 호랭이는 자식이 없어도 산다더라....’ 하고 소리를 쳐서 기급을 하였다는 이야기로 보면 아버지 성질도 대단하였고 잔재미는 없는 분이었던 듯싶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앵두꽃이 만발한 뒷마당 양지쪽에 멍석을 깔고 누워서 ‘아이고 속이야, 어디 잘 드는 칼이 있으면 이놈의 뱃속을 갈라 한번 드려다 보았으면 속이 시원하겠구만.....’하고 노상 말씀하시곤 했던 것으로 보아 복통이 매우 심하셨던 것 같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께서 갑자기 보신탕을 드시고 싶다고 하여 어머니께서 아끼던 큰 물독을 주고 설래마을에서 개를 한 마리 바꾸어 손질해 오셨다고 한다. 솥에 된장 등속을 넣고 끓이는 중 먼저 익은 내장을 꺼내 오라고 하여 뜨거운 국물과 함께 간을 비롯한 몇 가지 내포(내장)를 드시다가 바로 얹혀버리셨다. 정작 고기는 드시지도 못하고 며칠 후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내내 아쉬워 하셨다.
임종이 가까워 친지들이 오셔서 둘러앉았는데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입을 비쭉거리며 애를 쓰시길래 어머니가 입에다 귀를 대고 들었다고 한다. 시내에서 오신 오촌 당숙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나무 쪼가리~~하는걸 보니 평소에 말하던, 남부끄럽지 않게 상여를 해 달라는 소리 같네요...”
“상여는 무슨... 형편이 이런데... 숨 떨어지면 관이고 머고 그냥 떠메다가 묻어야지....”
원래 성격이 좀 모나신 분이기는 했지만 좋던 양가 재산을 멋대로 탕진하고 말년에 피란민이 사는 이곳까지 밀려와 고생 끝에 임종을 맞는 사촌이 못마땅해서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혀는 굳어져 말은 못하시는데 귀는 아직 들리는지 눈꼬리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더라고 하였다.
형편이야 어려웠지만 동네의 반장도 하시고 인심을 잃지는 않으셨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동네사람들이 나섰고, 둘째 누님이 보내온 돈으로 관(棺)도 좋은 것으로 맞추고 상여도 번듯하게 하여 설래 뒷산 공동묘지에 모셨다. 어머니는 두고두고 오촌 당숙의 매몰찬 말을 서운해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고모 네서 팥죽을 쑤어오자 나는 겅정거리고 뛰어다니며 마을 아이들한테 ‘우리는 고모 네서 팥죽 쑤어 왔다~~~’고 자랑을 하고 다니고 또 만장(輓章)을 내가 들고 가겠다고 떼를 썼다니 여덟 살이나 먹었으면서 그다지도 철이 없었던지...
6.25사변 후 어단리 쪽과 금광리쪽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막아 저수지를 만드는 수리조합공사가 시작되었는데 2공구가 먼저 시작되고 연이어 3공구 공사도 시작되었다.
금광리 보리암 쪽을 제2공구(工區)수리조합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동막지(東幕池)’가 되었고, 어단리 칠성암 쪽을 제3공구(工區)수리조합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칠성지(七星池)’가 그것이다.
사변 후 어려운 시절이라 품팔이꾼으로 타관사람들이 수도 없이 몰려와서 마을이 갑자기 북적거렸는데 공사현장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였지만 우리 집도 건넌방을 비워서 세를 놓았었다.
수리조합공사는 골짜기의 물길을 돌리고 먼저 깊은 구덩이(호리가다)를 판 다음 흙과 자갈을 다져넣는 일을 한다.
공사현장 바로 밑에는 기다란 숙소와 그에 딸린 함바(はんば,飯場)와 한밥집도 생겼고, 흙을 실어 나르는 트럭도 10여 대씩 와서 북새통을 이루었다. 우리 마을도 꽤 높이 솟아있던 마을 앞의 언덕을 송두리째 파내 트럭으로 흙을 실어 나르느라 항상 동네에는 흙먼지가 자욱하였다.
우리 어머니와 막내누님도 동네 사람들과 같이 먼저 공사가 시작된 2공구 공사장에 나가 일을 하셨는데 '하꼬떼기'를 하였다고 한다. 밑이 없는 커다란 나무상자(하꼬/箱)를 놓고 그 속에 저수지 바닥의 흙을 파다 하나가득 채우면 도장을 받았다가 저녁에 도장 갯수를 세어 전표(錢票)를 받는다.
처음에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인데 나중에 둑이 제법 높아지면서 바닥에서 흙을 파담아 지고이고 가파른 비탈을 올라와 둑 위에 놓은 하꼬에다 쏟아붓는데 물먹은 흙은 다져지면서 부어도 부어도 한 하꼬 채우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저녁이 되면 전표 쪼가리를 받아 들고는 서둘러 집으로 와서 저녁을 끓여 먹는 둥 마는 둥 어둠 속에서 밭일과 집안일을 돌보고는 다음 날 새벽이면 다시 공사장으로 나갔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터였다.
남자장정들은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레일에서 구루마(밀차)를 탔다. 어느 정도 높아진 둑 위에다가 레일을 깔고는 산 쪽에서 구루마에 흙을 퍼 담아 올라타고는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막대기를 잡고 호기 있게 레일을 달려 내려온다.
레일 위를 구르는 바퀴가 요란한데 끝 부분에 오면 막대기를 뒤로 힘껏 당겨 구루마를 멈춘 다음 위에 얹은 거푸집 모양의 나무상자를 벗기고 삽질로 흙을 반쯤 퍼낸다. 나머지 흙은 브레이크 막대기를 뽑아 지렛대모양으로 구루마 옆구리에 대고 밀어서 옆으로 전복시켜 흙을 부었다. 그리고는 다시 거푸집과 막대기를 올려놓고 둘이 밀면서 온 길을 되짚어 가고오기를 반복한다.
레일 위를 힘차게 달리던 구루마의 행렬과 개미떼처럼 바닥에서 파낸 흙을 이고지고 줄맞추어 비탈을 오르던 아낙네들과 아이들,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던 트럭들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일하고 받은 전표는 한 달에 한 번 씩 간조(중간정산)를 하여 사무실에서 현금으로 바꾸어 주었는데 숙소 사용료, 밥값 등을 제하고 나면 몇 푼 남지도 않으련만 그나마 일거리를 구하려고 타관에서 오는 사람들이 매일 북적거렸다.
그 때 만복이 형도 일당이 좀 나은 구루마를 탔는데 만복이 형 뿐만 아니라 구루마를 탔던 젊은 사람들은 간조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전표를 와리깡(할인)하여 술을 먹거나 담배를 사 피웠는데 와리깡을 해주는 전주들은 보통 10%를 떼고 현금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기간이 20일이 넘으면 15%씩 터무니없는 고리(高利)로 떼고는 불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싫으면 그만두라는 등 횡포를 부려서 원성을 사기도 했는데 만복이 형이 나서서 인부들을 모아 고리로 와리깡을 못하도록 바로잡기도 했다.
사천집에 밥을 붙여먹던 명철이 형은 타관에서 온 사람으로 2공구 수리조합의 현장 십장(什長)이었다. 공군을 제대했다하고 키도 훤칠하며 말도 시원시원할뿐더러 예전에 주먹깨나 날렸다더라고 소문이 나서 동네 처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사천집 큰딸인 명자가 쫓아다녔는데 연당집 연옥이도 쫓아다녀서 결국 친한 친구사이가 갑자기 연적이 되고 말았다.
명철이 형은 딱히 누구를 찍어 정을 주지 않고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쳤던 모양이었다.
명자와 연옥이도 물론 공사판에 나가 하꼬떼기를 했는데 미처 하꼬 언저리까지 흙이 차지도 않았는데 도장을 찍어주기도 하였고 슬금슬금 그늘 밑에 앉아 농뗑이를 쳤는데도 항상 다른 사람들 보다 후하게 전표를 받고는 했다.
저녁이면 명자네에 과자 쪼가리며 빗이나 민경(거울) 나부랭이를 내 놓아 명자 어머니의 환심을 샀다. 다음 날은 다시 연당집에 가서 어디까지가 정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울이 고향이라는 둥, 집에 엄청나게 부자라는 둥 시원시원한 달변으로 연옥이 어머니의 마음을 휘어잡고는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사천집과 연당집에서는 미리부터 서로 사위로 점을 찍고 과년한 딸이 달밤에 명철이와 쏘다니는 것을 모르는 체 하였다. 어떤 때는 셋이 만나서 쏘다니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중 하나와 은밀히 만나기도 했는데 이따금 여자 둘이 아옹다옹 말다툼을 하고는 했지만 그런대로 잘 지나갔다. 마을 어른들은 그래도 집안을 보면 연당집 연옥이가 낫다느니, 타관 놈을 어떻게 믿느냐는 둥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동네 청년들은 타관 놈이 마을 처녀들을 망친다고 괜스레 열기를 터뜨리고는 했지만 누구하나 명철이 앞에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그랬는데 막바지쯤 명철이 연당집 연옥이로 기우는 듯한 행동을 했던 모양이었다. 얼마동안 명자가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약을 먹었다더라, 밤에 물에 빠져죽는다고 연당가에 서 있는 것을 끌어 왔다더라, 사천 댁이 머리채를 잡고 행실 똑바로 하라고 등판대기를 후려갈기는 것을 봤다는 등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공사가 끝나고 명철이 집으로 가면서 연당집에 곧 어른들을 모시고 오겠다고 약조를 하고는 주소도 적어주고 갔다는데 그 이후로 종문소식이었다. 주소를 들고 서울로 찾아가겠다는 연옥이를 붙잡아 놓고 한 달이나 기다린 끝에 그 주소로 편지를 써서 보냈더니 편지가 되돌아 왔다고 하였다. 명철이 말고도 외지에서 온 품팔이꾼과 눈이 맞아 쉬쉬하면서 만나던 처녀들도 몇몇 있었는데 공사판을 떠난 후 한 사람도 맺어진 사람이 없었다.
타관에서 온 떠돌이 공사판 놈들을 믿은 사람이 바보라는 둥, 그 놈의 수리조합 공사 탓에 동네 처녀들만 바람이 들고 망쳤다는 둥 말들이 많았지만 후일 모두들 시집들을 가서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다.
3공구 수리조합은 우리 마을이 화전놀이를 가곤 했던 보아구(堡口) 아래쪽에 제방을 쌓아 개울을 막는 공사였다.
이미 공사가 시작되어 골짜기 양쪽에서 흙을 메꾸어 오는 중에도 우리는 개울 옆을 따라 오르내리며 나무를 하러 다니곤 했다. 개울 옆의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보아구에서 큰골과 절골로 길이 나누어지고 왼쪽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진등이나 행상봉이 되는데 이곳이 우리 마을 사람들이 장작감 나무를 하러 다니던 곳이었다.
이곳은 국유림으로, 마을 젊은이들이 처음에는 가까운 곳부터 너도나도 닥치는 대로 소나무를 잘라서 금방 잡목만 우거진 민둥산이 되었는데 얼마 후 산림간수를 세워 지키기도 했지만 요리조리 눈을 피하며 계속 잘라내었다.
나중에는 소나무 장작감을 하려면 행상봉처럼 아주 먼 곳까지 가야했고 따라서 민둥산은 점점 늘어갔지만 동네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렇게 마련한 소나무 장작은 강릉장에 내다 팔아서 생계를 꾸려 가는데 큰 보탬이 되고는 했는데 수리조합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나무장사는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무장사를 할 때, 동네에서도 읍엣집이나 찰방집 같이 돈이 있는 집에서는 전문 나무꾼들이 산에 해 놓은 장작을 평(坪)으로 사서 실어오고는 했다. 산속에서 직접 나무를 자르고 쪼개어 풀 숲 속에 숨겨 놓고는 어느 정도 마르면 산에 놓은 채로 직접 흥정을 했다.
사방 6자쯤이었는지 외겹으로 장작을 쌓아놓은 것을 한 평이라고 했다. 장작개비의 길이는 2자쯤으로 이렇게 두 겹이나 세 겹으로 쌓으면 장작 두 평, 혹은 세 평이라 하였고 흥정이 되면 사들인 집에서 달구지로 실어오는 것이다.
다른 집은 조금씩 통나무를 집으로 져 날라다가 패서(쪼개어) 얼기설기 쌓았다가 마르면 지게로 지거나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잘 마른 나무라야 잘 팔렸기 때문에 마른 것처럼 색깔을 내려고 어떤 집은 소변을 뿌리기도 했는데 소변을 뿌리면 덜 말라도 마른 것처럼 노랗게 고운 색깔이 났다. 솔골집을 비롯한 한두 집이 그런 짓을 해서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는 했다.
시내에는 지금 영빈장 근처에 백화점이 있었고 그 아래쪽에 나무전(㙻)거리가 있었는데 한쪽에는 장작지게가 줄을 맞추어 있고 또 한쪽에는 여자들이 머리에 이고 온 장작단 줄이 따로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는 적게 넣으면서도 짐이나 단이 커 보이게 하려고 재건교 다리 입구에 와서는 장작을 풀어헤쳐 얼기설기 커보이도록 짐을 다시 만들고는 했다.
줄을 맞추어 늘어 선 장작지게와 장작단 사이로 시내 아낙네들은 이리저리 살피고 다니며 턱을 치켜들고 ‘나무개비가 너무 작다’는 둥 ‘제대로 마르지 않았다’는 둥 까탈을 잡다가 흥정이 되면 나무장사꾼들은 이고 지고 줄레줄레 아주머니 치마꼬리를 따라 가곤 했다. 값이라도 후하게 받은 날이면 지게가지에 지푸라기로 아가미를 꿴 간고등어나 이면수 한 손이 대롱거리고 매달려 온다.
2공구 수리조합이 먼저 끝나고 곧이어 3공구 수리조합 공사도 완성이 되었다. 까맣게 쳐다보이는 높은 둑이 생겼고 저수지에 물이 들이차자 나무를 하러다니던 개울가 오솔길은 물론이려니와 보아구 근처까지 물이 차올랐다. 암자로 올라가는 길은 저수지 옆으로 구불구불 산을 파내어 다시 내었다. 아카시아나무와 잡목들로 우거졌던 골짜기에는 시퍼런 물이 그득 들어찼고 둑 근처는 엄청나게 깊었는데도 수영 자랑을 한답시고 건너편까지 헤엄쳐 건너가곤 했는데 어스름 달밤이면 이 저수지 둑은 동네 총각 처녀들이 즐겨 찾는 새로운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곧 이어 수로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들쭉날쭉 구부러졌던 봇도랑을 시멘트로 말끔하게 일직선의 수로를 만드는 공사로 중간 중간에는 논으로 통하는 작은 수문(水門)을 설치한다. 훗날 동네의 장난꾸러기 꼬맹이 나무꾼들은 통나무를 잘라서 저수지 밑가지 지고 와서는 꾀를 낸답시고 수로에다 나무를 띄워 마을까지 오곤 했다. 통나무 일곱 여덟 개를 띄우고는 빈 지게를 지고 쫓아오는데 이따금 서로 엉켜서 내려가지 않으면 지게작대기로 쑤시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법석을 떨었다. 그러다가 동네 앞에 와서 나무를 건져내면 껍질은 이곳저곳 벗겨지고 물을 먹어 팅팅 불은 나무를 지게에 다시지고 오려면 더 무거워져서 낑낑대었다. 무거울 뿐만 아니라 껍질이 벗겨져서 장작으로 만들어도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한다고 어른들께 야단을 맞고는 했다.
마을에 득실거리던 타관 사람들도 모두 다른 공사판을 찾아 훌훌이 떠나고 난 후 마을은 다시 예전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서 척박한 땅뙈기에 매달리기보다는 공사판에 나가 돈을 버는 것이 한결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심은 더 각박해졌다고 어른들은 한탄하였다.
이렇게 2공구와 3공구 수리조합공사를 하면서 우리 마을은 물론 타관에서 온 사람들까지 전쟁 후의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으니 1961년쯤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강릉에 기차가 처음으로 들어오게 되어 사람들이 새하얗게 남대천 제방 둑에 구경하러 몰려나왔던 기억이 난다.
겨울밤이면 우리 아버지는 이따금 문고리 옆 문설주에다 못을 박아 놓고 삼 끄트렝이를 모아두었다가 못에 걸고 노끈을 꼬고는 하셨다. 그럴 적이면 나는 아버지 옆에 붙어 앉아 신기한 세상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어머니와 누나도 까무룩한 등잔불 밑에서 삼을 삼으며 말없이 아버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다가는 소리를 죽이고 쿡쿡 웃고는 했다.
‘아, 기차란 눔은 시꺼먼기 엄청나게 큰데, 처음에 기차화통으로 시꺼먼 연기를 내 뿜으민서 치~익 처~억 하다가 조금 있으면 이번에는 허~연 연기를 콸 콸 내 뿜으면서 바퀴가 철커덕 철커덕 구르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때 꽤~액~하고 벼락 치는 소리를 낸단 말이여. 아, 그러면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귀가 먹을 지경이지 뭐~’
‘아, 인자 달리기 시작하는데 첨에는 허연 연기를 내 뿜으면서 치익 처억 치익 처억하는데 속도가 빨라지면 치쿡 치쿡하다가는 이따금씩 꽤~액~하고 벼락 치는 소리를 내지~’
‘아 내가 금강산 유람을 가느라구 서울에서 온정역까지 기차를 타고 갔는데 이눔의 기차는 속도가 붙어 놓으면 울매나 빠른지 바람소리가 쌩쌩 나구, 창 밖으루 팔을 내 밀면 팔이 뒤루 꺾어진단 말이여~’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평생에 그런 기차를 한번 타 볼 수 있을라나, 그놈의 기차는 얼마나 크고 또 얼마나 빠르길래 바람에 팔이 다 부러지나....하고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바로 그 기차가 처음으로 강릉에 들어오는 것이라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 서너 명과 제방 둑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 기차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나 저제나 남대천을 가로지른 철길만 쳐다보고 있는데 얼마 후 굴 밖인 박월리 쪽에서 꽥~하는 기적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시커먼 기차가 철다리 앞까지 와서는 다시 꽥~하고 기적을 울리자 가까이 앉았던 사람들은 귀를 막고 개미처럼 흩어졌다. 그날은 시험 개통이었는지 몸통은 없고 가처머리만 다리 위로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강릉역으로 갔다. 그때는 경포에도 간이역이 있어 얼마동안이었는지 경포까지도 기차가 다니다가 후일 경포역은 폐쇄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해 만복이 형이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때 만복이 형의 아들 길수는 벌써 뜀박질을 할 정도였는데 만복이 형은 이따금 뜨문뜨문 잠깐씩 들러서 옷가지랑 돈을 놓고 갔다고 하였었다.
이번에도 택시를 타고 왔는데 찍꾸(포마드)를 발라 반들거리는 머리는 올빽으로 넘겼고, 까만 양복, 까만 라이방에 반들거리는 구두를 신었는데 커다란 가방을 두개나 들고 내려서 사람들이 놀랐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가방을 받아든다, 인사를 한다, 법석을 떨며 집으로 들어왔는데 금의환향하는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저녁도 드시는 둥 마는 둥 연순이 네로 달려가서 동네 아낙네들과 풀어놓은 가방을 구경하셨는데 가지가지 미제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하였다.
가지가지 옷은 물론이고 지포 라이터, 미제 화장품, 미제 간스메(통조림)에다 햄이며 이상한 냄새가 나는 노란 덩어리도 있었는데 치즈라고 하던가 빠다라고 하더란다. 그런 냄새나는 것을 먹으니 양놈들한테서 노린내가 난다더라는 둥 이야기꺼리가 한도 끝도 없었다.
또 손바닥만한 라디오도 있었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나무에다 안테나를 높이 건너매고는 또 한 줄은 어스로 땅에다 묻고 광석이라는 조그만 돌맹이를 안테나에서 내려온 줄에 끼워 바늘 끝을 대어 레시버로 방송을 들었었다. 이렇게 방송을 들으면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고 문이라도 쾅 닫으면 광석에 닿아있던 바늘이 움직여 소리가 들리지 않기도 하였다.
언젠가 귀가 약간 어두운 엿빵집 영감은 우리 집에 와서 처음 레시버로 방송을 듣고는 ‘햐, 이눔들이 욕을 하네... 여기는 강릉방송국입니다. 페이페이 에씨팔(KBS).... 머 이래는거 같구만...’ 해서 웃은 적이 있었다.
저녁에 동네 청년들이 모여들자 만복이 형은 양담배를 한 개비씩 권한 후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는데 시골 사람들로서는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대충이 이야기는 먼저 친구들 몇몇과 어울려 삼척에서 하역하는 일을 하다가 부두의 기도(紀導)를 보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어찌하여 다시 영주로 옮겨 큰 영화관 몇 군데서 다시 기도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서울 청량리로 가서는 이것저것 자잘구레한 미제 물건을 받아 다방으로 돌며 장사를 시작했는데 괜찮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번 크게 해보자고 의논이 되어 용산에서 동두천을 오가며 본격적으로 미제 물품을 받아 넘기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동두천의 양갈보 촌 이야기며, 어수룩한 미국 놈들 이야기에 영어도 몇 마디씩 섞어가며 풀어놓는 이야기로 듣는 사람들의 얼을 빼놓았다.
이제 곧 자리가 잡히면 마누라와 아이를 데리고 가서 호강을 시킬 자신이 있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만복이 고등꽈라두 나왔으면 한자리 톡톡히 해 먹을 사람인데 아깝다고 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툭하면 나보고 ‘너두 커서 이담에 만복이 반만이라도 되면 좋겠다.’고 노상 말씀하시곤 했다.
칠성지 아래쪽에 있는 설래마을은 예전부터 겨울철이면 엿을 고는 마을로 유명했다.
주로 옥수수 가루로 엿을 고아서는 겨울 내내 시내에 내다 팔았는데 엿이 좋다고 소문이 났었다. 7~8호의 동네 집들이 모두 엿을 고아서 엿 동네라 하였고 둥그렇게 대엿을 만들어 팔았다. 두껍고 윤기가 흐르는 까만 설래 엿은 딱딱하다가도 입에 넣으면 금세 말랑말랑해져서 엿이 아주 좋다고 하였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겨울이면 젊은이들은 저녁마다 몰려다니며 놀았는데 추렴이 유행이었다. 작게는 과자추렴에서부터 엿 추렴, 떡 추렴, 국수 추렴은 물론 심지어 밥 추렴까지 했다.
저녁에 두세 명이 모이면 보통 화투치기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민화투로 팔뚝 맞기를 했는데 열끝짜리 10에 한 대씩 맞기로 하면 띠끝짜리 5는 썩었다고 하여 버렸고, 만약 띠에 한대씩 맞기로 하면 띠끝짜리 5에 한대씩 맞았다. 그리고 또 심심풀이로 하던 화투놀이로는 록백구(600)를 쳤는데 시까 300, 비조리 200하며 점수를 세어서 600점을 먼저 얻는 쪽이 이기는 것도 있었다.
화투도 귀하던 시절이어서 어찌하여 구한 화투는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썼는데 오래되면 껍질이 벗겨져서 속에 들어있는 하얀 조개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또 떨어지면 여러 번 밥풀로 붙여 쓰기도 했고 한 장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종이를 몇 겹 붙여 그려서 쓰기도 하였다. 어린시절 화투로 노는게 너무도 재미있어서 모자라는 쪽을 엎드려 그리거나 심심하면 재수떼기를 하곤 했는데 어머니가 보시면 노름꾼이 되려느냐고 야단을 치시곤 했다.
화투놀이 하기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화투짝으로 도둑놈 잡기를 하거나 착착이를 했는데 걸리는 사람은 벌칙으로 노래를 부르게 하거나 엉덩이로 이름을 쓰게도 하였다.
기나긴 겨울 밤, 돈을 조금씩 모아 군것질꺼리를 사다먹는 추렴은 과자부스러기나 엿, 혹은 국수를 사다 삶아먹는 것은 남자들 추렴이요, 쌀을 한 줌씩 모아다가 밤중에 방앗간에 가서 찧어 와 시루에 떡을 쪄 먹기도 하고, 밥을 해서 먹는 것은 주로 여자들의 추렴인데 우리 누님도 어머니 몰래 그 귀한 쌀을 덜어내다가 혼구멍이 나는 것을 보곤 했다.
처녀들은 떡 추렴이나 밥 추렴을 할 때는 아무도 몰래 했는데 귀신같이 낌새를 눈치 챈 동네 총각 녀석들은 몰래 가서 놀래키거나 얻어먹기도 했다. 어느 해 처녀들의 떡 추렴 낌새를 눈치 챈 형들 서넛이 놀래키려고 몰래 가서 가만히 울타리 뒤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소리를 죽이며 컴컴한 부엌에서 시루에다 떡쌀을 넣는다, 불을 지핀다 부산을 떨더니 재옥이와 금순이 둘이 바깥으로 나와서 두리번거리다가 하필이면 형들이 숨어있는 컴컴한 울타리 밑으로 와서는 치마를 올리고 오줌을 누더라고 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데 재옥이 하는 말이 ‘아이, 난 왜 이렇게 오줌줄기가 약한지 몰라...’ 하였단다.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형들이 ‘와하핫~~’ 웃으며 앞다투어 도망을 갔는데 처녀들은 미처 소변을 마치지도 못하고 방으로 뛰어 들었을 터였다.
후일 이것이 우스개꺼리가 되어 심심하면 ‘아이, 난 왜 오줌줄기....’만 하면 모두들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고 간혹 처녀들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실없는 녀석이 ‘난 오줌줄기~’만 해도 모두 배꼽을 잡았고 처녀들은 얼굴이 빨개져 도망을 가곤 했다.
만복이형이 마을을 다녀가고 한 달쯤 되었을까 구정지서에서 순경이 만복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만복이 아버지는 쩔쩔매며 말을 더듬거리다가 순경을 따라 20여리 떨어진 지서까지 갔다가 저녁 늦게야 돌아 왔다.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만복이에게 무슨 사단이 생긴 모양이라고들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궁금증으로 애가 닳아 만복이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물어 보았지만 만복이 아버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
사람들은 만복이 도둑질 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다더라, 군 기피자가 되어 군대에 잡혀 갔다더라, 미군들한테 잡혀서 미군감옥에 갔다더라, 구정지서에서 나온 말을 직접 들었으니 내 말이 틀림없다는 둥 이야기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듬해 정월,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만복이 형이 나타났는데 빡빡 깎은 머리에 수척한 모습이었다.
만복이 형 이야기로는 동두천에서 미군 PX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물건들을 받아 장사를 했는데 양이 차지 않아 양공주를 끼고 크게 한탕 벌리다가 덜미를 잡혀서 동두천 유치장에서 콩밥을 좀 먹었노라고 했다. 그 통에 군대에 가지 않은 것이 탄로나 곧바로 군에 입대하게 되었노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또래들보다 서너 살이나 많고 아이까지 있는데 설마 군대를 보내겠느냐, 겁을 주느라고 엄포를 놓았겠지 하고 말들이 많았지만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정말로 군대에 징집되어 논산훈련소로 떠나고 말았다.
추렴을 할 때에는 사랑방에 모여 놀다가 주로 사다 먹지만 엿 추렴은 2km 쯤 떨어진 설래마을로 직접 가기도 하였다.
눈이 억수로 퍼붓던 어느해 겨울, 처녀 총각 일여덟명이 엿 한 대 살 만큼의 돈을 모아서는 설래마을로 엿추렴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쳐서 코앞도 분간하기 어려운데 무슨 역사가 났다고 옷가지를 머리꼭대기에 뒤집어쓰고 히히덕거리며추운줄도 모르고 설래마을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둔지마을인 옥봉(玉峰)을 지날 때 허허벌판이라 대관령을 넘어온 눈보라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는데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에서 넘어지고 뒹굴다가 방향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헤매었는지 눈보라 속에 우뚝 솟은 살개바우(굴산사 당간지주)를 발견하고 나서야 방향을 잡아 설래마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제일 가까운 집 등불이 보이자 젊은이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우루루 몰려들었고 주인이 놀라서 쫓아 나와 눈을 털어주는 한편 턱을 덜덜거리는 젊은이들을 서둘러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 방에 들어서자 엿을 고느라 불을 얼마나 때었는지 방바닥이 절절 끓었다.
처음에는 두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짚으며 법석을 떨었는데 조금 지나자 엉덩이가 뜨거워 쪼그려 앉았다가는 이번엔 발바닥이 뜨거워 마루로 뛰쳐나오곤 했다. 부엌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가마솥에 그득한 엿물을 기다란 주걱으로 쉴새없이 저어주고 있었다. 얼마쯤 후 주걱으로 엿물을 퍼서 주루루 흘려 보다가 알맞게 끈이 달린다 싶으면 불을 끄집어내는 한편 됫박으로 쓰는 바가지로 엿물을 퍼서는 밀가루를 편 넓은 쟁반위에 부어 한쪽으로 내 놓기를 반복하였다.
좀 덜 고아졌을 때 한 종지를 퍼 달래서 돌려가며 맛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조청이었다. 시중에 내다파는 가격보다 훨씬 눅은 값으로 한 대를 받아서는 칼과 망치로 잘게 쪼개어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잘 먹는 사람은 혼자 반 대(반 쪽)도 먹는다고 했으니 양이야 차지 않았지만 마냥 즐겁기만 하였고 무르팍까지 차오른 눈을 헤치며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한밤중이 훨씬 넘었을 때였다.
그 해, 들리는 소문으로는 미국과 월남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고 했다. 미국이 우리나라 군인들을 보내 달라고 했는데 미국은 자기나라 군인들이 자꾸 죽으니 우리나라를 끌어들이는 거라더라, 미국이 돈을 많이 준다니 가면 떼돈을 벌게 될 꺼다, 6.25때 못 봤느냐 태국 놈들이 제일 지독했는데 월남도 그 옆에 있는 나라로 더 지독하다더라, 가면 모두 죽는다더라는 둥 소문이 무성했다. 월남이 어디 붙었는지 알지도 못하던 시절인데 무척 더운 나라라는 것, 거기는 북두칠성이 안보이고 남십자성이 보이는 나라라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갔다 오면 한 밑천 잡을 수 있을 거라며 은근히 파병이 결정되기를 기다리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그해 10월 경 만복이 형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월남에 가기로 결정이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는 부대라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편지를 받은 연순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는데 사람들은 세상에 전쟁터인데 전투를 하지 않는 군대가 어디 있느냐, 가면 모두 죽는다더라, 죽지만 않고 살아온다면 돈은 무척 많이 벌 꺼라는 둥 기대와 걱정이 뒤섞여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온통 만복이 이야기와 월남파병 이야기뿐이었다.
그 이듬해 월남에서 만복이 편지가 왔는데 야자수 나무 밑에서 총을 들고 멋진 폼으로 찍은 사진이 와서 만복이 말이 헛말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고, 모두들 월남사진을 본다고 몰려들어 난리를 쳤다. 만복이가 있는 곳은 ‘다낭’이라는 곳인데 그 인근의 ‘호이안’ 이라는 데로 통하는 부근의 다리를 놓는 공병대 소속이라고 하였다. 이따금 포소리와 총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아 안전하다고 하였다.
동네 젊은이들은 남자가 한번 태어났으면 만복이처럼 넓은 세상에 뛰어들어 자기의 운명을 시험해 보고 외국 구경도 하는 것이 얼마나 멋지냐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왜 그런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 하느냐, 고향에서 착실히 농사를 지으며 자기만 알뜰히 하면 땅뙈기도 늘어나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데 모두 쓸데없는 허영이라고 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말씨름을 벌이곤 했다.
<Epilogue>
내가 대학에 진학하던 해 우리 집은 가족이 모두 영등포구(현 구로구) 오류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난 후 몇 년 동안은 가오리연을 닮은 망덕봉의 절벽과 고향마을이 꿈에 나타나 잠을 설치곤 했는데 특히 만복이 형의 소식이 궁금하였다.
풍문으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만복이 형은 2년 여 월남에서의 군 생활이 끝났는데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예 귀국도 하지 않고 월남에서 제대를 한 후 그냥 눌러 앉은 모양인데 편지에 쓰기를 지금 월남은 기회의 땅으로 돈을 얼마든지 벌 수 있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 같이 사업을 하기로 하였는데 한 밑천 잡은 후 귀국하겠다고 하였단다.
그 후 얼마동안은 꽤 많은 돈이 연순이와 아버지 앞으로 붙여왔던 모양이다. 만복이는 월남에서도 미군 부대의 물건을 빼내 월남 사람들에게 넘기는 장사를 하는 모양이었다고 했다.
신수가 훤해 진 만복이 큰 꽃무늬가 있는 남방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바닷가 야자수 그늘아래에서 찍은 사진도 있고 흰 아오자이를 입고 커다란 세모꼴 삿갓모양의 모자를 쓴 날씬한 월남 아가씨와 함께 찍은 사진도 보내왔던 모양인데 1년 쯤 지난 후부터는 아예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고 한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연순이는 동네 사람들의 주선으로 이미 오십이 가까운 홀아비 권씨와 같이 살기로 되어 길수를 데리고 사천 쪽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는데 길수는 제 아비를 닮아 얼굴도 잘 생겼을 뿐더러 무척 영리하였다고 한다.
졸지에 두 아들은 물론 손자와 며느리까지 빼앗긴 벙어리네 양주는 누구에게 이렇다 할 하소연도 못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횡계로 다시 이사를 가버렸는데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후 고향을 찾았더니 낯익은 또래 처녀들은 이미 모두 시집들을 갔거나 뿔뿔이 흩어졌고 남자들은 모두 농사일에 찌들어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더욱 서운하던 것은 가오리연을 닮은 망덕봉의 그 절벽은 채석장이 되어 따가운 햇살 속에 시뻘겋게 상처를 드러내고 있었다. 또 세찬 파도 속에 우뚝 솟아있던 죽두봉 옆의 바위는 내가 자맥질하여 숱하게 섶을 따내던 곳인데 새로 생긴 기다란 방파제로 예전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은 동막지와 칠성지의 푸른 물은 그대로였고, 아득히 올려다 보이는 대관령 굽이와 납돌과 월호평을 넘어 남항진 앞 푸른 바다가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
<연재를 마치며>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것은 추억의 강물, 그리움의 강물입니다.